그때 그일

봄 기운이 느껴진다 : 바울사도의 기도

mamuli0 2022. 1. 24. 08:44

 설 전인데 대한이 지나자 봄 기운이 느껴진다. 손녀가 미국에 일년 나가기에 인사차 다녀갔다. 아이티를 벗고 어른스런 모습이 새삼스럽다. 농장에서는 무 말랭이 작업을 계속하고 부스러기 사료화 말리는 곳이 산책길 옆에 있어 보고 왔다. 기러기들이 이제는 사람 가까히 집 옆까지 와서 먹이를 찾는다.

 

 

 

 

 

바울사도의 기도 

1982.07.04. 정인세 원장 

 에베소서 3장 14절 이하 21절 까지 있는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바울로의 기도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립니다.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여러분을 내적으로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터전으로 삼아 굳건히 설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여러분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거기까지 찬송 하나 더 부릅니다.

 

 


 오늘은 사도바울께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하신 그 기도, 그 기도를 우리가 생각하면서 오늘 한국 기독교회가 또 여기 앉아있는 우리 나,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기도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공동번역은 최근에 와서 가장 원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정수를 기울여서 번역했기 때문에 가장 원어에 충실하게 잘된 번역입니다. 그것을 인정 합니다. 그런데 어느 대목을 가서 읽어보면 뜻이 조금 애매해서 차라리 구역 개역 성경이 더 잘되지 않았는가 하는 대목이 있고요. 암만해도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그래요. 또 이렇게 영어 성경이라든지 중국어 성경이라든지 일본어 성경을 보면 우리 성경도 무던하지 않나 사실 중국어 성경번역이 가장 잘 됐다는 겁니다. 그쪽이 더 잘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대목이 있는데 오늘 읽은 여기 대목도 그런 것이 조금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외국어 성경을 비교하는 것 보다 여기만은 개역성경으로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에베소서 3장 14절 이하를 읽어 볼 테니 공동번역 찾으신 분과 한번 비교해 봅시다. 그럼 무엇이 하나 개역 성경이 잘 드러나는가 하니 여기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신비를 분간 한 것 같이 깊이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그렇게 오해하게 생겼어요. 공동번역은 그것이 개역성경은 그렇게 뭐 생각을 잘못할 수 있는 그것이 여지가 없어요. 읽어 보겠어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갖추고 터가 굳어져서 네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기도의 본문인데 거기 보면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계시게 하옵시고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너희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그러니까 여기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건 사랑으로 아주 누구든지 알기 쉽게 되어있지 않아요? 그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시라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여기 공동번역에는 그 신비에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깊이를 알게 해달라고 한 것처럼 그러니까 조금 분간하기 어려운 것 같으나 신비 곧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는 이해가 됩니다. 그 점만 우리가 조금 참고하면서 제가 이 시간에는 역시 공동번역을 기준으로해서 조금 바울사도가 하신 그 기도를 조목조목 생각해야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참 기도를 해야겠다는 것은 오늘 한국교인이 다 입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진정으로 하는 사람은 조금 드물지요. 저부터 기도가 대단히 부족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사람가운데도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더 희귀합니다. 그래서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고 잘못 구하는 것이 많이 있고 또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그런 것을 여기서 우리가 조금 볼 수 있지요. 바울 사도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다 기도를 많이 하신 흔적이 있는데 특별히 바울사도께서는 기도를 어떻게 그렇게 많이 하셨는가? 놀라울 정도에요.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하면서 또 밤늦도록 천막 짓는 일을 하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어려운 옥고와 어려운 일을 많이 해내시면서 편지도 꽤 쓰시는 것 같고 그런데 물론 기도하면서 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하셨는가? 여기 보면 에베소서에만 봐도 기도한 대목이 두드러지게 세군데 나타나지 않습니까? 1장 15절 이하에도 보면 16절에 여러분들을 위하여 끈임 없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하고 거기 중요한 것 세 대목을 기도했거든요.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모두, 또 그 다음에 3장 첫머리에도 가보면 또 그렇게 했어요. 예수의 포로가 된 나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이렇게 말끝마다 기도한다. 그런데 여기는요, 가장 두드러져요. 그대로 본문에 의해서 생각해 봅시다.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이 설교라고 할런지 성경강해라고 할런지 이것은 일종의 피차 공부도 되니까 조금 생각해 봅시다.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을 하지만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야. 여기 사도바울을 무릎을 꿇고 기도 했다고 그랬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큰 바위를 의지하고 무릎을 꿇었는데 반 엎드린 자세로 하는 게 있지요? 근자에 와서 어떤 화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림을 그리는데 넓적하게 이렇게 두 팔을 쫙 펴고 두 다리를 땅에다 펴고 배를 땅에다 대고 이렇게 엎드려서 기도하시는 그렇게 하셨다는 거야. 그런데 사실은 구약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서 그렇게 기도했다는 대목이 더러 나오지요. 아주 하나님 앞에 착 엎드려서 그렇게 했다고 또 여러분이 잘 아는 성인들의 기도를 보면 참 형형색색이지요. 심지어 프란치스 제자 가운데는 이렇게 드러누워야만 기도가 된다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프란치스 성인 같은 이는 보통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지요. 눈을 뜨고 기도하는 이도 있지요.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이도 있지요. 기도만 하면 되는 거 아니요? 꼭 이렇게 해야만 된다. 하고 서로 다툴 필요 없거든요. 영으로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만 드리면 되는 거야. 여기는 한 좋은 이것도 한 표준이라고 그럴 런지 우리가 보통 이런 것을 일반적으로 많이 옳다고 생각을 하기는 하지요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무슨 소원이 이렇게 간절해서 감옥에서 기도를 하고 계신데 바울사도는 16절에 봅시다.  

 


 첫째 번으로 이걸 조목조목 따지자면 한 여섯 가지 조목으로 구분할 수가 있어요.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제가 아마 여기를 요 자리에서만 세 번째인가 몇 번째 근자에 와서 옛날은 모르겠고 여러 번 생각을 하는데 생각 할 적마다 조금씩 다른 생각이 자꾸 들어요. 무엇이냐 풍성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풍성하신 풍성한 은총이라는 것은요, 내가 은혜 받아진 만큼밖에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내 영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호흡을 하고 사는데 그 은혜를 느끼고 내 영이 깨달은 것이 요만큼 되면 풍성하다는 것이 그만큼 밖에는 아니 알아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 선다싱 이라는 그런 이는 어떻게 내가 차고 넘치는지 숨을 못 쉬겠으니 이 은혜를 거둬주시라고 그랬거든 그러면 그에게 풍성한 은총이라는 것은 이 우주가 나를 둘러싸고 질식을 시키는 것 같은 그런 은총을 느꼈거든요. 프란치스 성인도 상당히 그런 대목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그 풍성 이라는 것이 받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거예요. 그러나 원리적으로 볼 적에는 따져보면 하나님의 은혜야 우주를 가득 채워 계시고 적게는 조그만 하루살이 뛰어다니는 개구리 한 마리 속에도 미치는 거고 풀잎하나 솔잎 하나하나에 다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고 있는 거야. 우리가 그걸 또 아는 거지요. 그런데 새삼 세월이 지나갈수록 새삼 느끼게 되요 은혜가 아니면 이것 참 우리가 숨 한번 쉴 수가 없고 눈 한번 깜짝거릴 수도 없고 우리가 막 욕심껏 먹은 것을 어떻게 소화를 시킬 수가 있어요. 누가 여러분의 수고로 어떤 의사가 누가 도와서 그거 아니거든요.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물이 움직이고 있고 역사가 지금 흐르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더군다나 여기 풍성한 은총이라는 것은 성경에 어디 가서 강조가 되는 고 하니 예수가 죽으신데 가서 강조가 되요. 예수님이 오신 것 예수님이 죽으신 것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거기에다 특별히 에베소서에는 그 대목을 강조하고 있어요. 이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아버지 그러니까 이 아버지를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서도 보통 하나님 아버지 그저 이렇게 아버지 부르지요. 부르지만 여기는 특별히 풍성한,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신 아버지 그러니까 은혜로운 아버지 그것도 또 받는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을 부를 적에 달라요. 어떤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 자비로움을 먼저 말해. 또 능력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고 은혜를 받은 이는 능력 있으신 하나님 또 이렇게 하고 그거 다 상관없지 않소? 하나님은 이것도 저것도 다 갖고 계시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다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기는 은혜로운 신 하나님으로 이렇게 바울사도는 이 시간에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문제는 힘을 주신다는 것이 이 기도의 첫째기도의 제목 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적에 목적 없이 기도하겠소?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그 구하는 목적이 있거든요. 물론 묵상을 하고 모두 여러 가지로 이렇게 드린 기도도 있지만 대개는 기도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첫째로 힘을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힘은 우리가 힘 있게 라는 말을 교회 안에서 많이 쓰는데 그것이 잘못하면 굉장히 부작용을 일으켜서 해로움을 많이 끼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성령을 통해서 라고 그랬으니까 이것이 참 좋거든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보통으로 우리가 힘이 있다. 그러면 육체의 힘을 생각하지요. 또 조금 지성적인 사람은 지식의 힘을 생각하지요. 그 외에 나름대로 이런 힘 저런 힘을 많이 주장을 하지요. 그러나 정신적 힘이니 영적 힘이니 이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 쯤 되면 상당히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 성령의 힘 이라는 것은 그런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적인 힘 그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인간에게 속한 힘에 국한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힘 이라는 건 초인간적인 힘이에요 사람의 힘이 이거 여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손톱만큼도 머리카락만큼도 끼이지 않은 힘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영 그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힘 말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런데 그러면 여기는 보면 성령 단독으로 되어있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양위가 합작을 하시지요. 여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이야. 이 힘이 만일 우리들이 그 힘을 받는다면 여기 우리들이라는 거 여기 사도바울이 누구에게 그 힘을 주시라고 기도 합니까? 에베소 교인들이지요. 제가 두어 번 이야기 했지만 에베소에 모든 교인들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에요. 성실히 믿는 진실하게 믿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한다고 그랬어. 그러면 이 힘을 어떤 사람에게 주시기를 기도하는가 하니 진실하게 믿는 사람 잘 믿는 사람 열심히 믿는 사람 그 사람에게 은혜로우신 아버지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기를 빈다. 그럼 이 힘은 세상의 힘이 아니지요. 인간의 그 무엇이 조금도 끼이지 않은 힘입니다. 이걸 무엇으로 알아요? 사람의 그 요소가 끼이지 않은 힘이라는 것을 이건 성신을 받은 사람 외에는 몰라요. 거기는 전혀 혈기나 무슨 그런 것이 끼이지 않은 힘입니다. 도리어 어떤 때는 아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무력한지도 모릅니다. 바울사도는 항상 이걸 말했지요. 힘을 주셔서 여러분을 내적으로 굳세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도입니다. 내적으로, 내적으로라는 말은 또 속사람 이라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속사람 또 영이지요. 영을 가르친 거지요.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외적으로 강한 것이 아니고 내적으로 강한 것이고 육으로 강한 게 아니고 영으로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사람을 겉 사람이 아니고 속사람을, 속사람을 굳세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여기 대한 건 우리가 신구약간에 성경을 많이 찾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 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활을 통해서 잘 체험들을 하고 있지요. 이렇게 나이 살이나 자신 분들은 잘 의식할겁니다. 어저께 다르고 오늘 다르고 기억이 흐려지고 다리 힘이 없어지고 모든 게 자꾸 이렇게 되면 겉 사람은 이제 폐하는 구나. 이 육신은 폐하는 구나. 그걸 새삼 느낍니다. 나이 먹으니 날마다 달라져요. 그럼 겉 사람은 부패한다고 하면 알아먹어요. 다들 알아. 그런데 속사람이 날로 새롭다는 걸 이해하는 이들을 드물어 이건 만일 성경 그대로하면 늙은이에게 더 필요한 말씀인데 그렇지요? 우리 늙은이들은 겉 사람은 이왕 갖다 묻어버릴 거 뭐 아깝지 않지요? 사실은 그러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젊은이들 이상으로 절실하게 그걸 급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진다. 내 속사람이 새로워진다. 또 새로워지는데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운데서 더 여기 보면 능력인데 힘을 얻는 것인데 그걸 보통 능력이라고들 말하지요. 그것이 날마다 우리가 깨달아야 돼. 내 영이 힘을 얻었다는 것을 더 깨달아야 될 거 아니요? 어떠합니까? 분간이 서는가요? 그 분간이 섰다면 성령을 의지해서 힘을 받은 사람이야. 그런데 이것이 가령 근세에 와서 20세기에 와서 큰 업적을 많이 베푼 사람들 가령 리빙스톤 이라든지 뭐 죠지뮬러 라든지 모든 무디 라든지 그런 이 라든지 그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다는 그 말씀을 잘들 인용하고 마지막에 죽을 때가서 그 말 한마디하고 세상 뜬 이도 있지요? 그거 무슨 능력일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일생을 살아보고 그 힘을 증거 한 사람들인데 그건 이런 힘들을 가르칩니다. 그 힘을 받은 이들이야. 그런데 그 힘은 사업이나 활동에 대해서 한 말일까요? 그거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야.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한 사람은 활동하는 분야도 두드러지고 참 놀라운 것도 더러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거 아니에요. 가령 요전에 삼례의 집에 있다는 사람 이야기를 제가 잘하는데 제가 그 기록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그래요. 두 팔이 부러지고 두 다리가 없어서 이렇게 막가지 같다고 그래. 또 심지어 눈도 멀고 그런 사람이 뭘 할 거예요? 아무것도 못하지. 그러나 그에게 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위로를 하러갔다가 위로를 받고 온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감사의 생활을 하고 어떻게 감격을 하는지 그의 감사에 녹아난다는 거야. 그런 이들 예를 든다면 그거 능력 받은 거야. 그러면  꼭 능력 있다는 건 어떤 활동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야. 말은 힘 있게 잘 가르치는 것만이 있는 것도 아니야. 영이, 영이 힘을 얻어 그래서 능력 있는 걸 이렇게 제한된 시간에서는 자세히 못하니까 결론이 성급하게 나오는데 첫째는 자기를 이기는 것을 능력 있다고 말하지요. 자기를 이기는 그것이 능력을 얻은 사람이야. 능력을 얻은 사람은 자기를 이깁니다. 자기를 못이기는 사람은 아직 능력을 못 얻은 사람이야. 그걸 알아야 되요. 또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을 이기는 것이고 죄를 이기는 거지요. 그것이 능력을 얻은 거야. 그러니까 그 점이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 아닙니까? 죄를 이기고 또 더 그것을 확대시키면 이거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요절로 많이 외우는데 있지요? 요한1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 하는 대목을 5장에 가다보면 3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는 믿는 사람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다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거야. 자기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세상은 누구야? 그것도 너무 많이 여러분들은 들어서 다 대답할 수 있을 거야. 피조물의 세계 전부를 가르치는 거야. 하나님이 외에 있는 세상 전부를 이긴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능력을 얻은 사람이야.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또 더 말하자면 사탄을 이기는거지요. 하나님의 가장 주력하시는 건 사탄과의 대결 아닙니까? 알고 보면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부터 이 역사가 흐르는데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항상 그 사탄의 방해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소? 그것을 이긴다는 거야. 그걸 초연하는 거야. 초월하는 거야. 이기는 거야. 사실은 그런 뒤에 전도도하고 누구를 가르쳐도 가르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가르칠 자격 없는 거야. 알고 보면 자기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전도를 한다니 말이 되요? 따지고 보면, 그렇지요? 그런데 그 힘을 먼저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을 정확하게 엄밀하게 분간하는 이들이 귀해요. 가만히 보면 아직도 혈기가 그대로 있는데 자기의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이 아주 또 요새 꽝꽝하게 그걸 주장하는 사람들이 또 있지요? 나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다고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셨다고 가르쳐주셨다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아니에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이 보이거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성경대로 보면 그렇지 않아? 그런데 이기려고 변론할거요. 어쩔 거요? 그 변론하면 시간낭비야. 그럴 필요가 없는 거야. 정말로, 정말로 성령을 의지해서 무한하신 우주의 가득하신 은총을 이렇게 간직하고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통해서 내려 흘러내려오는 그 힘은 먼저 내 속사람을 강건하게 그렇게 해주신다고 이것보다 더 큰 기도가 어디 있겠어요? 이것을 먼저 구해야 할 것 아닙니까? 시시한 걸레조각 같은 것들 구할 것이 아니라 더 좀 근본적인 것 오늘 교회에서 기도들을 많이 하고 산중기도를 많이 하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 해야지요.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모든 것 다 해야지요. 김일성이 군대를 쳐 부실 무슨 그런 것도 기도하는 사람 뭐 제가 옳다. 그르다 할 거 아니야.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 강건하게 하옵시고 이것을 먼저 우리가 구해야지요. 이런 뒤에는 무엇이든지 안 될 것이 없을 겁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러니까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굳세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런 기도를 참으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한다면 여러분은 그것보다 더 고마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 중에서 그 누구든지 사실 우리 단체를 위해서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 수첩에다가 제 이름을 적어놓고 기도해주는 이가 있어서 참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송한데 그런데 만일 이런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 준다면 그건 참 그 이상 더 내게다 그까짓 거 돈 몇 백 억 주는 것보다 내게다 무슨 이런 사업에 협조를 해주는 것보다 근본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도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 기도해주고 또 자기도 기도하고 그래야 할 것입니다. 굳세게 해주시기를 내적으로 속사람을 굳세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둘째 번으로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이건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러니까 다 해방되지요.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보시고 여기 우리가 노파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가운데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야. 산 믿음 진실한 믿음 그러니까 지금 여기 둘째 번 문제만 생각을 합시다. 이 시간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지금 자기가 아무리 찾아봐도 믿음이 없다든지 또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은 믿지 않는다.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다. 그 뚜렷해지는 사람에게는 이 둘째 번 큰 기회가 상실되니까 그래 이거 참 어려워요.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이거 큰 문제 아니요? 아마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님과 같이 살기를 원할 거야. 또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처럼 살아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십시오. 그런 말을 잘하거든. 그런데 예수님이 내 마음가운데 들어와 사실 수 있기를 기도한다면 참 엄청난 기도야. 그렇지 않아요? 우리 마음과 우리 마음속은 생각해 볼수록 약하고 더럽고 거짓된 게 사람들의 마음이야. 그건 제 이야기 아니에요. 로마서 18장이라든지 심지어 다윗왕은 시편에서 노래할 적에 만물보다 인생은 더 더럽다고 그랬는데 그런 우리 마음속에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들어와서 사실 수 있게 되느냐? 그 말이지요. 그걸 구했어. 여러분들 속에 예수님께서 들어와서 사시게 되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기도한 거야. 잘 들으시오. 예수 믿는 것이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대목이 이런 거야. 어떻게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사실 수 있게 하겠소? 그러나 이왕 예수 믿으려면 이걸 비켜놓을 수 없는 문제야. 아마 이 가운데서 참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하는 이는 그것을 주제로 하고 많이 기도를 할 겁니다. ‘예수님 제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그거 그림에도 있지 않아요?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기도 또 예수님이 마음가운데 들어오려고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면,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이야. 우리가 그 대목에 대해서 다 아는 문제이지만 또 한 번 검토해 봅시다. 예수님이 내 마음가운데 들어와서 사셨다. 사신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거든요. 그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스러워야 하고 예수님의 절대하신 사랑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 사랑 하늘같이 높은 사랑 그 다음에 나오지만 무한이 깊이와 넓이와 지위가 있는 사랑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 그것이 있어야 하지 않아? 뭐 쉽게 말하면 또 우리 이런 수도 기관 여기서는 한 서너 가지를 주로 목표로 삼았지요. 깨끗하게 산다. 예수님같이 깨끗해야 해요. 그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지요. 부부생활이 죄냐? 아니냐? 사실 예수처럼 살면 혼인 못하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왜 동정녀에게서 낳겠소? 만일 꼭 그럴 필요가 있다면 예수님도 장가가셔서 아들 딸 낳으셨지. 그런데 그것들 가지고 시비를 해? 성신 받지 못 한 거야. 다 그렇게 되라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짝지어 주셨지. 하늘나라를 위해서 된 고자도 있다고 예수님도 말씀 하셨어. 왜 그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마음을 모두 흐리게 만들어? 안갈 사람은 안가라고 안 가는 게 더 좋다. 그러는 거야. 무더기로 막 이번에 어저께 신문에 보니까 놀랍데요. 2천 몇 쌍 한꺼번에 미국서 문선명이가 2천 몇 쌍을 한꺼번에 집단 결혼을 시켜버렸어. 돼지새끼들인지? 막 그냥 지금 우스운 세상이 되어버렸어. 우리 만일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깨끗이 살아야 한다는 거야. 저절로 저는 그렇게 못했지만 또 가난을 사랑한다. 가난을 사랑한다. 그것도 시비가 너무 많지요? 예수님이야 여우도 머리 둘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그러셨는데 그대로 살아야지 모든 덕이 예수 안에서는 다 이루어질 것 아니요? 예수처럼 겸손하고 예수처럼 온유하고 또 예수처럼 능력 있고 예수처럼 자비스럽고 그래야 할 거 아니요? 그래 여기 그저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것이 그냥 그림 같은 예수님만 낸 마음속에 모신다는 그 뜻이요. 살아계신 예수님 피를 흘리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야. 그러면 우리의 생애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전 인류를 위해서 제물이 될 꺼 아니요 예수님처럼 또 자기가 어떤 책임회피를 하는 그런 일이 전 인류의 죄를 모든 사람의 죄를 내가 책임질 거 아니요? 예수님처럼 그럼 이 세상이 얼마나 위대한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또 그 인격은 얼마나 위대한 인격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인데 우리를 불러내시고 만세전에 택하시고 우리를 씻기시고 점과 흠이 없이 거룩하게 만드시는 건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는 건데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만드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앞에 세워진다고 그랬으니까 또 사실은 하나님으로서 그쯤은 하셔야 하나님이지, 그렇지 않소? 모든 찌꺼기 인간들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이다. 그러면 누가 그 하나님은 존경하겠어요? 그렇게 하신다는 거야.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야.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우리가 끝에 하나 더 생각합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터전을 삼아 굳건히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거기는 아마 개역성경으로 설명을 해야 아래대목 이 줄여서 들어가져요. 네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사랑가운데서 우리의 첫째 마음이 또 우리의 생활 전체가 사랑가운데서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친 거예요. 

 

 

그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내 생애 전체가 뿌리가 내려져요. 그 안에 화분에 꽃을 갖다 심듯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다가 심어 놓으시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뿌리가 박히고 뿌리가 내려져야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흉내 내지만 흉내만 내니까 항상 문제가 있지요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깨닫고 체험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항상 느끼는 것이 있지요. 그건 뭐냐 하면 아주 처음에는 너무 약해. 내 속에 사랑이 약간 있는 것 같고 움직이는 것 같고 움트는 것 같은데 있는 줄 알면 없어져버려. 그 조금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그냥 뿌리 채 뽑아지고 누가 나를 핍박하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배반하던지 그러면 그냥 미움만 생기고 그렇게 아주 약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는 그래서 하는 소리야.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암만 참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막 그냥 얼굴에다가 침을 뱉고 막 가지로 와서 왕이여 평안하시오? 해도 불쌍히만 보이시고 그래. 십자가에다 못을 박아놓고 막 아래서 들 그 점잖은 소위 제사장들이 그 참 조롱을 하고 그러는 것을 봐도 그저 불쌍하게만 보이시고 암만 밑바닥에서부터 예수를 잡아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걸 말하는 거야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그것이 주어져야해. 그런데 그건 예수가 들어와야 되니까 기도가 순서가 잘 되는 거야.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가운데 와서 살아주시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우리가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져 이제 그러면 그 결과 이 두 가지를 다 한꺼번에 생각해도 괜찮아요.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안다고 그래도 좋고 또 하나님의 신비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안다고 그래도 좋고 여기대로 본다면 네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서 이제 그 안에서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점점 더 알게 돼.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할수록 명상하고 깨달을수록 아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 또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긴 가? 또 온 우주가 지금 혜택을 입고 적게는 항상 하는 소리이지만 우리가 여기 한 일백사오십 명 식구가 이렇게 밥을 먹고 있는데 한 사람도 한사람도 양식걱정 안 해도 한 번도 굶어본 일이 없거든. 지금 몇 해? 15-6년 동안은 만나를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것과 뭐 다를 것이 없어. 다를 게 없어. 그런 것을 보고도 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나보다. 그런 것도 느끼지만 그런 정도 입니까? 온 우주에게 이렇게 끝없는 호흡과 모든 생명을 허락해 주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약속해 주시고 입히시는 것을 볼 때 참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시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길다. 또 진리를 자꾸 파고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깊은지, 그 이 공 어른 전기에 보면 깊이 파라. 깊이 파라. 그런 말씀을 자꾸 했는데 깊이 파야만 안다. 그랬는데 그러면 그런 이들은 깊이, 깊이 파고들어갔어요. 우리가 성경을 너무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의 맛을 모르는 거거든요. 아까도 조금 말씀했지만 성경은 자꾸 깊이 파면 10년 전에 보던 성경과 오늘 성경이 더 달라지고 더 맛이 나고 오늘 보던 성경보다 내일 또 새로워지고 그건 자꾸 성경의 깊이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거든요. 그런데 자꾸 사랑을 그렇게 알아, 만일 여기 예수님의 사랑이 높은 거와만큼 우리가 높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깊은 것만큼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온 세계 인류에 미치고 우주에 가득하게 그렇게 넓으신 거와 같이 우리의 사랑이 넓어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천지창조 때부터 마지막 심판 때까지 미치신 거와 같이 시간적으로도 그렇게 길어진 거와 같이 우리의 사랑이 길어지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거에요? 하나님같이 되는 거 아니요? 예수님처럼 되는 거 아니요? 그렇게 되기를 빈다는 거야. 이거 참 엄청난 기도야.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해도 쪼금 그냥, 쪼금 손톱 끝만큼 사랑을 구해. 이건 참 사랑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요. 이제 그렇게 되기를 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다시 말합니다. 그 절대하신 영원하신 불변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깊이를 알게 해주셔. 그 무한한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에 바다에다 우리를 잡아넣어 가지고 푹 빠트려버리셔, 그렇게 생각을 할 때 아이고 우리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자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능력으로 가득해지고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뭐 성신 충만 무슨 충만 그런 소리 요새 잘 합디다만 여기도 충만 이라는 말씀이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을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하시지요. 영광도 거룩도 자비도 능력도 지혜도 주일학교에 가면 어린애들에게 요리문답을 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계신 것과 지혜와 총명과 무소부재 하시고 모두 무궁무한하시고 절대 불변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육가지 속성을 보통 가르칩니다. 그 충만하신 분이야. 그것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소?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빈다고 아마 기도가 많지만 다른 기도를 일일이 들 필요 없이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만일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이 그냥 완전히 변화를 받지요. 천사보다 더 하나님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되는 것 아니요? 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이 너희 안에 충만해지기를 빈다. 이랬는데 만일 그런 신자가 오늘 8백만 기독교인 가운데 몇이나 되는지? 어때요? 조금만 은혜를 받으면 그냥 코에다 걸고 다녀요. 우리가 참 이 충만한, 충만한 이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훨씬 더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것을 여기 사도바울이 말씀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거야. 우리가 거기 다 보지 못하지만 그 아래 두 절을 마저 보십시다. 2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 안에서 믿는 자 안에서 그 말이에요.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뭐 조금만 구하면 요만큼만 구하면 이만큼 주신다. 그 말이에요. 그렇지 않겠소? 자녀들을 길러본 부모들은 느낄 거야. 자식은 요만한 것을 구하면 어머니들은 이만한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마음이야. 하나님은 더욱이 그러신다. 더욱이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거기 못을 박았지요. 너희가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심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해로우니까 안주시는거야. 어린애가 막 허연 양재 물 덩어리를 먹겠다고 달라고 그러면 그걸 줄 부모가 어디 있겠소? 막 울고 몸부림을 치고 달라고 그래도 기어이 없애버리든지 감춰버리지 않겠소? 우리들의 기도 우리들의 구하는 것은 맨 양재 물 덩어리 같은 것을 잘 구해. 그러니까 문제가 있지. 그렇게 극단으로는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거의가 그대로 이루어 주셔서는 안 될 것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주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려고 그러실 것 아닙니까? 생각을 해보시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모든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우리가 이 모든 것이 기어이 이루신다는 거야. 이루어진다는 거야. 그래가지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를 만드신다. 전부 하나가 되요. 오직 그때 가서는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이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요. 그래서 묵시록 끝에 가서 보면 모든 그 천군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않아? 맨 찬송소리 뿐이거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그러기 때문에 우리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하는 것보다 더 큰일을 없다.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여러 번 말씀 했지만 우리들이 잘 아는 최 목사님 그분이 백일 금식기도 할 적에 갔던 이야기 했지요? 제가, 육십일 째 되던 날 갔는데 육십일이 되도록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그냥 그때 유 영모 선생님하고 이 현필 선생님하고 김 준호 선생님하고 저하고 또 어떤 청년하고 그렇게 갔었어요. 우리를 보더니 누워있던 분이 입이 바짝 타니까 파뿌리를 이렇게 접시에 이겨놨는데 그걸 손가락으로 이렇게 입술에다가 바르시더니 영광, 영광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 그냥 금방 하늘나라로 떠올라 가시는 것 같아. 그분의 영이 그렇게 보여주시는데 하나님의 영광 참 영광 감사 그것뿐이야. 그때 무엇이 있겠어? 남는 게 무엇이 있겠어? 모든 것은 이것은 떠드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속 깊은 속에서 영혼이 부르는 찬송이야. 우리 깊은 속에서 우리 영혼이 갈급하고 있고 부르는 찬송이야. 그만큼만 말씀을 끝내겠습니다. 찬송가 부르십시다. 36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