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길에 연산 마을을 담아보았다. 옛날 모습과 다른 추워서 인지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 제사장이신 예수
1982.05.16. 정인세 원장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교독문 28번 시편 139편을 교독하겠습니다.
기도드리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에게 귀한 자리와 시간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 올립니다. 저희들 심히 부족하고 죄가 많은 인생들입니다. 이 시간에도 예수님의 피로 저희 더러워진 영과 육의 모든 것을 다 씻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성령님께서 감찰하셔서 저희들의 지난 시간동안에 잘못된 것을 다 헤아려 거룩하신 불로 소멸시켜 주시고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님 앞에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시고 아버님을 기쁘시게 하고 저희 영혼들이 새로워 질수 있는 시간이 되게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형제자매들 어느 곳에 있던지 있는 곳에서 아버님을 영화롭게 하는 시간되게 도와주시고 죄에 빠지지 말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을 기억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항상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또 주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모이는 곳에는 온 천하 어느 곳에든지 성신님이 역사하셔서 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에서 주님의 등불 노릇을 하는 교회들이 되게 하시고 또 모든 성도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어서 이 세계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바로잡는 사람들 되도록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또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위정자들 각계각층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성신님이 역사해 주시기를 빕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불행한 가운데서 헤매는 사람들 억울한 가운데 있거나 또 대단히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아버님 특별히 권고 하시는 줄 믿습니다. 저희들도 그들을 위해서 힘껏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버님께서 모든 것을 맡아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옵고 불초한 자식은 예수님의 피 공로만 받들고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성경말씀은 히브리서에서 읽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서부터 봅니다.
위대한 대제관이신 예수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관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 제관은 연약한 우리를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5장 1절입니다. 대제관은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 제관은 속죄를 위해서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대제관은 자기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무죄한 사람들과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대제관은 백성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제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 성서에 다른 곳을 보면 너는 멜기세덱에게 제관직분을 입는 영원한 제관이다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예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제관직분을 잇는 대제관으로 임명 받으셨습니다. 10절까지만 읽겠습니다.
오늘은 제사장이신 예수님 대제관이신 예수님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속죄 주 예수님에 대한 것은 너무나 많은 말들을 하고 또 저도 꽤 설명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했는가 할 정도로 기억이 흐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책무를 느껴서도 이 말씀을 오늘 택했습니다. 또 사실은 우리 신자들은 다 제사장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제사장이신 동시에 우리들 자신들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 제사장의 책임이 있다. 이랬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 아닙니까? 여기 5장 1절에도 그랬지요. 대제관은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5장 1절에는 제사장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어요.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서 하나님이 뽑으셨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레위족속을 뽑으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이렇게 제사장에 대해서 그랬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면 제사장이라는 것은 아까 읽은데 나왔지요.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제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는 멜기세덱의 제관직분을 잇는 영원한 제관이다. 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제관직분을 임명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맡으신 제관직분은 유대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받드는 제사장 직분과는 달리 멜기세덱을 잇는 제관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지요. 여러분은 멜기세덱에 대한 것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거기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고 또 마지막입니다. 여기 나오지요. 17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임과 그들과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해골짜기 곧 나와 그들을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여기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꼭 한번 나와요.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에 주재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네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은 족보도 없기로 유명하지요. 그것이 예수님과 같다.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또 멜기세덱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 어느 제사장보다 더 높은 제사장의 직분이라. 그래서 그것이 예수님과 같다는 거지요. 왜 그런 고 하니 이때 멜기세덱에게 10분의 1을 바친 아브라함 레위족속의 조상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의 열두 형제 가운데 레위가 들어갔거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속에는 벌써 그 제사장이 들어가 있어요. 제사장들이 바친 십일조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이 멜기세덱은 제사장 중에 제사장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사장에다가 비유할 적에는 언제든지 멜기세덱의 반차로 이렇게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의 제사장 자리를 확고하게 설명을 하고 계신데 우리는 그 뜻을 생각할 시간을 아마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떠실까 몰라도 너무 드문 것 같아서 그래 생각해 본 것이지요. 예수님에게는 세 가지 직분이 뚜렷이 있지요. 하나는 왕 중의 왕, 왕의 직분이 있지요. 둘째 번으로는 제사장의 직분이 있지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속죄제물의 직분이 있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3대 직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갓난 애기로 계실 적에 동방에서 세 왕이라고도 그러고 박사라고도 그러는 그들이 와서 세 가지 예물을 바칠 때 그 뜻을 벌써 보여주었습니다. 황금은 왕권을 가리킨 것이지요. 고귀한 것을 가리키고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황금을 바쳤지요. 첫째 박사가, 둘째 박사는 유향을 바쳤지요. 유향은 기름을 붓는 것 제사장이 하는 일은 왕이나 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그 유향은 예수님이 제사장의 직분을 하실 것을 그때 벌써 상징한 것이지요. 셋째 번은 몰약 이지요. 몰약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속죄제로서의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그때 뜻한바 아닙니까? 그때 벌써 예수님이 나시면서 전 인류를 대표해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에게 이 제사장의 직분이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물론 아까 그 본 창세기에서부터 예수님이 제사장이신 것은 이미 예시하고 있었고 특별히 이렇게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이 제사장이라는 걸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한 서너 댓가지만 본문에 의해서 참고해 보십시다.
첫째 번에는 이렇게 말 했지요.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이 제사장이다. 이랬습니다. 그럼 섬기는 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여러분이 레위기나 신명기 구약에 보면 많이 나오지요. 제사장이 하는 것은 다른 거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적에 제물을 바치는 일 그러니까 속건제니 속죄제니 모두 화목제니 그런 제사드릴 적에 그것 백성들을 대표해서 속죄봉헌 등 섬기는 일을 맡은 일인데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본문에 쓰여 있지요.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친다. 특별히 감사 제물을 드릴 적에는 감사예물을 바치는 일을 제사장을 통해서 모두 바치지요. 특별히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물질적으로나 무엇으로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대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할 때는 제사장이 드리지요. 그때 양이나 모든 비둘기나 짐승들의 피를 흘려서 바치는 일인데 그걸 꼭 제사장이 대신하거든요. 그래서 큰 제사를 드릴 때 유월절이라든지 큰 절기에 와서 제사를 드릴 때는 엄청나게 많은 짐승들을 가지고와서 전부 제단위에 놓고 불태우고 혹은 이렇게 피를 흘려서 모두 뿌리고 하기 때문에 굉장한 제물이 바쳐지는 것이지요. 그 일을 전부 제사장이 도맡아서 했거든요. 그걸 수천 년 동안 계속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특별히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짐승의 피를 흘리고 혹은 불을 질러서 그 냄새를 내어가지고 제사를 지내는 그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짐승의 몸을 태우는 거야. 그것은 그때 제사지내는 풍속이라는 것은 짐승 자체를 바치는데 뜻이 그치는 게 아니거든요. 자기 대신 짐승을 바치는 것이거든요. 그래 짐승의 목을 찔러서 피를 낼 적에는 자기 목을 찔러서 피를 내는 것이고 그것 상징한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적에 이삭의 목을 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짐승을 불살라 태우려 하나님 앞에 바칠 때는 내 몸을 불사르는 식으로 하는 거지요.
그때 유대사람은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죄를 지었을 적에는 아 이놈 죽일 놈입니다. 이 목을 찔러서 피를 내도 마땅치 않을 죽일 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대신 이 불쌍한 양을 혹은 송아지를 이런 것을 바칩니다. 하고 목에 피를 흘렸거든요. 그럴 때 마다 특별히 양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 통회를 상징하는 거예요. 그 제사라는 것은 단순히 이렇게 사실은 저 어려서도 고사지낸다고 떡을 만들어 놓고 북어를 이렇게 찢어서 내버리고 하는 것도 그런 뜻이 있었거든요. 신들 앞에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시라는 그런 뜻이 다분 있었어요. 항상 그런 것이 있어요. 나보다 높은 절대의 힘에 내 자신을 사과하는 것이지요. 자기의 잘못을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 그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지내는 역사거든요. 그걸로 해와, 그것이 그렇게 수없이 예물을 바치고 수없이 일 년에도 몇 번씩 혹은 정성이 더 많은 사람은 더 많이 드렸을 테지요. 그랬는데도 그 죄는 항상 남아있거든. 그러니까 이것은 안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자기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오셨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큰 뜻 아닙니까? 예물과 희생 제물을 바쳐왔는데 그것 가지고 죄의 문제가 영 뿌리 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같은 일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바치러 오셨다. 그 말씀을 강조하는데 우선 히브리서에서 한군데 봅시다. 거기 9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잘 들으시오. 25절 이하입니다.
대제관은 자기 피를 흘리지 않고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해마다 성소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되풀이해서 해마다 그 짓거리 안하고 그렇게 되풀이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26절 그분의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창조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번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서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사장 직분을 행하셨는데 철저하게 하셨어. 제사장은 밤낮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불에다 태우고 그 짓거리를 해마다 하고 절기마다하고 그랬는데 예수님은 역사의 절정에 하나님이 예시하신 그때 그 시간 그 장소에 나타나셔서 과거의 인류의 죄를 전부 짊어지시고 또 앞으로 사람들이 지을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그 당대에는 물론이고 그래서 그냥 하늘까지 차고 땅속까지 찬 그 죄를 전부 짊어지시고 자기 자신이 어린양이라고 그러지 않았소?
사도요한은 그것을 눈으로 영안으로 봤거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봐라. 그때 세례요한의 눈에는 예수님이 제단위에 바쳐지는 어린양 희생제물로만 보여 진 것이지요. 피를 흘리신 제물 그것을 해치우셨다는 거예요. 여기 보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번 당신 자신을, 자신을 이런 제사장은 없었거든. 어떤 유명한 제사장도 자기 자신을 희생해 제물로 피를 흘려서 하나님, 이 백성들의 죄를 내가 담당하고 죽습니다. 한 사람은 없었어요. 이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같은 제사장이라도 이런 독특한 훌륭한 완전무결한 제사장의 직책을 하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서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제사장이 드린 화목제나 속죄제나 그런 제물 제사를 통해서는 항상 죄가 남아있지만 예수님이 드리신 이 제사를 통해서는 죄가 뿌리 채 깨끗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로마서에도 그런 뜻이 나오지요. 한두 군데 보십시다. 로마서 3장에 23절서부터 보십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하와를 만들 적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죄를 지으면서 부터는 누더기를 가리고 그늘 속으로 숨어 다니고 하나님의 낮을 피하게 되어버렸어. 그래서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본래의 영광스럽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질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다.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하셨다는 거예요. 이런 것은 없어요. 동서고금 어떤 종교나 어떤 인물이 자기 자신이 속죄제물이 되어서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이는 없어요. 속죄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죄를 자꾸 짓는 것은 (끊김)
이것이 완전무결하면 우리의 죄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이 되는 거야.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리이지요.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을 수 있다. 26절에 보면요,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눈감아 주시고 그러면 무엇을 보고 믿음을 보시고 그 피를 철저하게 믿는 사람 그 예수님의 피의 그 은총과 사랑을 내 영혼 깊숙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죄는 우리의 죄가 어떻게 없어질 겁니까? 이미 저질러놓은 죄를 또 소 터럭(털) 보다 많은 죄를 우리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하나님은 눈감아 주시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예수님이 그 죄를 다 소 터럭보다 더 많은 죄를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으니까 그래 자기 독생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죽음 그 몸에서 흘리시는 피를 보시고 우리들의 죄를 눈감아 주시고 이것은 구약이나 성경에는 여러 번 동과서가 먼 거와 같이 하늘과 땅이 먼 거와 같이 우리 죄를 멀리해 주신다고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은 이렇게 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는데 철저히 하셨다는 말이야. 속죄제물로서의 역할을 죄를 눈감아 주시고 참으셨지만 그래서 거기 나와 있지요? 또 5장에 가서는 또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 6절서부터 보십시다. 로마서에요, 성경 갖으신 이는 빨리 찾아서 같이 읽으면 좋습니다. 로마서 5장 6절부터 봅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절망에 빠져있어. 아까 그 3장에는 영광이 없어졌다. 절망 아니요? 절망이야. 오늘 참 이 인류가 왜 이렇게 비참해지나? 왜 이렇게 그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런 엄청난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고 그저 여자가 돈 몇 푼만 뿌리고 다녀도 온 나라가 뿌리부터 흔들흔들하고 어째서 이렇게 약체가 되어버렸나? 또 교통사고도 비행기 사고도 이제는 무더기로 하나둘 죽는 것은 좀 양이 안차는지 한꺼번에 몇 백 명씩 죽어야만 직성들이 풀리고 어째 이렇게 되어가는가? 참 인류는 비참해지고 있어. 그러니까 아무 소망이 없어.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무 소망들이 없어. 절망에 빠져있다.
어때요? 아마 믿는 이들에게는 그런 것 적용이 안 될 런지 모르지요? 믿는 이는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는 것이 신자니까 그 신앙을 떠나서는 소망이 없어요. 다 일시적으로 반딧불 모양으로 빤짝이는 희망들은 가질 수 있으려는가 몰라도 지식으로도 안 되고 부로도 안 되고 권세로도 안 되고 그래서 여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보겠어요. 6절서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죄 말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그러니까 이 절망이라는 것은 죄 때문에 생기는 거지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 아까는 절정에 나타나셨다. 그러고 여기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올바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감히 죽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8절입니다.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없지요. 불심판도 두려운 것이 없어요. 불 심판은 분노에서 벗어난다. 너무나 분명하다고 하나님께서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이미 화해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의 피로, 그것은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드리는 근본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해이거든요. 그래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시켰다. 이것이 그분과 화해를 얻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서 구원 되리라는 것을 더욱더 확실합니다. 틀림없이 구원을 받았다. 이 신앙이 들어간 사람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서지요. 확실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인제 하나님과 화해한 영혼 속죄를 받아서 해방 받은 영혼이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는 것 이것이 정말 봉사이지요. 그것이 참 천국 사업이 거기서 전개가 되어야지요. 그러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서 그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친다 하는 그 제사장의 직분을 훌륭하게 감당 하셨습니다. 거기 예수님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 조금 더 참고 할 데가 있어요. 거기 이런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도 그랬고 제사장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아까 히브리서 5장 2절에 가서있나요? 대제관은 자기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과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 할 수 있다. 그랬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 말씀이 있지요? 우리가 약해. 우리가 너무 무지하거든요. 아무리 무슨 세상에 철학박사가 되고 과학이 발달이 되고 그래도 죄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든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든요. 그런데 약하기 짝이 없어서 그냥 조그만 죄도 이길 힘이 없어요. 어때요? 자기 눈도 마음대로 못하고 자기 혓바닥 하나도 통설을 못하고 귀나 오관을 어떻게 어거 할 줄들을 몰라. 마귀가 이리 끌면 이리가고 저리 끌면 저리가고 거짓말 하라고 하면 거짓말하고 그저 음란하라고 하면 음란하고 도적질 하라고 하면 도적질하고 욕심부리라고하면 욕심 부리고 미워하라고 하면 미워하고 그저 뭐 마귀가 하라는 대로 한단 말이야. 약하단 말이야. 죄에 대해서는 굉장히 약해 형편없이 약해요.
그건 새삼 느껴요. 그런데 제사장도 그렇다는 거지요. 제사장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약해. 그래서 여기 이런 말이 나왔어요. 대제관은 자기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과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 일을 해내셨다. 그래 40일 광야에서 그렇게 주리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투쟁의 기도를 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셨어. 그런데 그 제사장은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하실 분이다. 그걸 말해요. 아주 초연하게 그냥 우리 사람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자리에서 제사장 직분을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이해하는 분으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핑계하지 못한다. 핑계하지 못할지니 그랬지요. 핑계를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하고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위치에서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이것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도우실수 있는 그런 제사장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셋째 번으로 이 직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이 영예로운 직무는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셔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그러지 않았어요. 거기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제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 참 이상해요. 하나님이 죽음을 스스로 택하셨다고 그랬는데 제사장 직분은 스스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그렇게 맡기셨다. 너는 내 아들 이건 시편에 있는 말씀이지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 성서에 다른 곳을 보면 너는 멜기세덱의 제관직분을 잇는 영원한 제관이다.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실 레위족속에게도 제사장 직분은 영원한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사장의 직분은 영원한 것이다. 그래 이건 몇 가지 명심해둬야 해요. 이것이 다 우리와 상관이 되니까요. 그래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제사장의 직분이 멜기세덱의 제관 직을 잇는 영원한 직분이라는데 우리는 조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 제사장들은 레위족속 가운데서 나오지요. 그런데 그 멜기세덱 이라는 사람은 어느 족속에 속했단 말이 통 없습니다. 레위 족인지 무엇인지 그때 레위 족은 있지도 않았지만 통 어느 족속인지 몰라. 그런데 예수님도 그와 같다는 걸 말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직분도 멜기세덱같이 그렇게 이 말을 어려운 말을 쓰자면 절대성을 지닌 것이다. 그 말이에요. 제사장의 절대성을 지닌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하다. 그 말 이지요. 영원하다. 한 말은 절대성을 지닌 것이다. 인간에게는 영원은 없어요. 영원은 하나님 에게만 있지 또 가장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멜기세덱은 제사장 중에 제사장이니까 가장 높은 존귀한 것을 말해, 도저히 사람의 지혜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존귀한 제사장이야. 예수님의 제사장은,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그렇게 다릅니다. 대제관으로 임명을 받았다고 5장 10절에 그랬지요. 그랬는데 그 제사장이 세상에 계실 때에 모습을 조금 생각하고 우리의 생활에다가 연결을 시켜봅시다. 그 다음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펴놓고 있지요. 7절에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눈물과 기도로 간구했다. 그랬지요? 광야에서도 참 기도로 간구하셨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특별히 아마 여기는 그것을 뜻하는 걸 거예요. 큰소리와 눈물로서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이 제사장들에게는 전부 이런 심정이 되는 거예요. 이제 나중에 제사장들이 타락이 되서 양의 고기나 얻어먹고 타락했지만 원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원은 제사장들이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는 가슴을 치면서 이 불쌍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그런 태도로 제사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그걸 예수님은 눈물로서 통곡으로서 하나님께 했다는 거야. 저는 이런 대목을 생각할 적에 참 뻔뻔스럽고 염치없어요. 우리 양심들은 무디어 질대로 무디어지고 그 죄악에 대한 타성 만성화 되어가지고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파할 줄도 모르는 것이 오늘 세태입니다. 아주 참 그냥 꼭 문둥병자와 같이 되지 않았소? 죄에 대해서,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눈물과 통곡으로서 슬퍼하신다는 거야. 눈물과 통곡 아 이 백성들의 이 죄 무서운 죄 영원한 멸망 지옥으로 갈 이 죄 이것을 어떻게 하던지 용서해 주시라고 큰소리로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습니다.
물론 아마 제사장 중에 훌륭한 성스러운 제사장들도 많이 있었겠지요. 오늘 성급한 결론이 될 런지 몰라도 오늘 사실 신부나 목사도 이 제사장의 직분에 있어요. 신부를 사제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카토릭에서는 사실은 제사장의 자리에 있는 거예요. 목사는 성경에 보면 신부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고 그랬어요. 우리들도 제사장이라고 그랬어요. 그건 나중에 읽어드려요. 그 제사장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예수님과 같이 이렇게 눈물과 통곡으로서 내 죄나 세상 죄를 위해서 오늘 호소하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마 신부님이나 목사님들 중에서는 그런 분들 많이 계시겠지요? 철야기도를 하시고 금식기도를 하시면서 내 민족의 죄를 가령 요 근자에 일어났던 그 의령사관 같은 것 그건 참 그이들을 요새 짐승에다 비교합디다만 우리 속에도 있으니까 뭐 흉은 못 보지요. 그런데 그것을 그 사람을 짐승으로 몰기 전에 우리 자신 중에서 누구든지 내 죄 탓이라고 가슴을 치고 슬퍼하고 통곡한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옛날에 이 선생님은 조그만 전쟁 육이오 사변이라든지 이 죄인 때문에 이 죄인 탓입니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냥 좇아나시며 여순 사변 현장에 계셨지요. 강진에 계시다가 여순 사변을 만났으니까 이 죄인 탓이라고 모두 피를 흘리고 백성끼리 죽이는 것은 자기 탓이라고 슬퍼하셨는데 오늘 그런 제사장이 몇 사람이나 있는지? 이 예수님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셨다고 눈물과 통곡으로서 그 자기 직책을 하시며 간구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다 했느냐? 그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은 한분뿐이야. 하나님께 그러지 않아요?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로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예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래서 그 속죄가 속죄사업이 완성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 주셨어.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로 간절히 구하는 것을 들어주셨는데 여기서 생각합시다. 우리들은 기도하면 꿀단지 받아먹듯이 아주 고생안하고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어요. 일반으로, 그냥 병자를 고치려고 한다면 그 병자의 고통을 동광원에 그전에 수레기 어머니는 병자를 위해 기도할 적에 꼭 그렇게 기도했지요. ‘저 고통을 제게다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 했어. 그런데 내가 그런 기도하는 사람을 근자에 잘 못 봤어. 저 고통만 없애 주십시오. 나도 안 아프고 저도 안 아프게 해주시오. 그런 기도지 대개가 저 사람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내게 주십시오. 그런 기도는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있겠지요? 아마 그런데 좀 귀합디다. 대체로 그런데 여기는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하는데 어떻게 들어주셨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이시면서 들어주셔 예수님과 이것이 다른 거야. 오늘 한국 교회 기독교가 마음 약했기 때문에 약화 되요. 망가졌다면 조금 실례가 될지 몰라요. 어폐가 되는지 몰라도 원은 이것을 잊어버려서는 큰일 나요. 신자들은 특별히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눈물과 통곡으로서 부르짖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거기에는 죽음이 있어요. 죽음 십자가의 고난 모욕적인 죽음 저주스러운 죽음이 있어요. 그것을 통해서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 그 말이지요.
그것을 조금 희미하게 구약에 보면 많이 그런 것을 보여줬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을 하니까 모세가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지요? 그때 뭐라고 기도했어요? 아버지 이 백성을 구해 주시던지 그렇지 않으면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없애버려 주시라고 자기 생명을 걸어놓고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하나님 앞에 호소를 했지요? 또 여호수아 같은 이도 대개 그 위대한 선지자들이던지 보면 그런 것 많지요? 또 그렇게 기도를 하라고 그러고 그렇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 것도 성경에 히브리서에도 있고 베드로 서에도 있고 그런 말 많이 나와 또 사도바울도 그런 말 했지요?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얼마나 내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하는지 너희들도 알 것이다. 그렇게들 했어. 우리도 지금 이것이 참 아쉬운 것이에요. 우리는 저부터도 아까 그런 뜻을 비쳤지만 세상이 타락되고 어지럽고 혼돈가운데 빠진 것을 뭐 흉보듯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무책임한 비판이나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참 마음 아프게 생각을 하고 어째서 내 민족이 이런 꼬락서니가 되었는가? 이런 혼란이 왜 내 눈앞에 이렇게 전개 되었는가? 또 오늘 이 세계가 이렇게 어지러워지면 왜 이렇게 같은 인류가 좀 평화롭게 같이 살지 못하고 어째서 이렇게 서로 죽이고 싸우고 빼앗고 죽이는가? 그걸 참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래서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통곡을 하고 슬퍼하기는 하는데 그 결과를 자기가 기도한 그 기도에 대해서 결과를 책임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게다 떠맡기지 말고 자기가 책임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것을 책임지시고 죽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제사장 직분이라는 것이 참 예수님처럼 하려면 정말 어려운 것이지요. 그리고 또 실제적으로 우리 생활에 대해서 그 다음에 또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지금 히브리서 5장을 펴놓고 있어요. 예수께서는 8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이 대제관이신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보통으로 신부니 목사니 제관이니 하는 사람은 위에서 대접만 받고 존경만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사장노릇 제관의 직분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희생의 제물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그 죄를 속죄해주시라고 눈물로 통곡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복종하심으로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을 가르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것이 구원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거기에 가서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참 뜻이 있다는 거야.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 철저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한 것이 사실은 그 속죄 사역과 같은 것이 되지요. 사실은 그 왕권이니 속죄권이니 그런 것이 다 뿌리는 하나 아닙니까? 같은 뜻 아닙니까? 덮어놓고 높아지려고 하면 왕입니까? 그거 아니지요?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제관의 직분을 잇는 대제관으로 임명 받으셨습니다. 자 이러고 보면 아주 제사장의 직분 대단이 어렵지요?
사실은 지금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은 제사장이에요.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제사장이 없는 것 아니에요. 또 장로도 거기 포함되지요. 넓은 의미로 봐서는 장로도 제사장 직분에 들어가요. 그런데 여기 우리 성경을 묵시록에 가서 몇 군데 볼 데가 있는데 한군데만 보실까요? 묵시록 5장 두루마리와 어린양이라는 제목을 읽어나가다 보면 8절 근처에서부터 봅시다. 8절 그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네 마리의 생물과 스물네 벌되는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인제 우리들의 기도가 이렇게 활동을 하는 거예요. 움직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가서 상달되어서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예수님을 가르킨 것이지요.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셔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들을 구해내셔서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있는 거야. 하늘나라에 가서 그런데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이제 우리를 구속하셔서 구속한 영혼들이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지금 10절 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제관이 되게 하셨다. 전부 제관을 만들어 버리셨다. 그 말이야. 구속받은 영혼을 다 그들을 제관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은 땅위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그러니까 왕 같은 족속이요. 제사장 같은 족속이라고 그전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이 되어있어요. 우리들이 다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가서 제사장이 되고 왕이 된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어떤 제사장? 족보를 따라서 레위족속 모양으로 그렇게 나온 제사장?
그렇지 않으면 신학교 졸업하고 그리고 신부나 목사 된 제사장 아니에요. 예수님 같이 피를 흘린 제사장을 말하는 거야. 예수님과 같이 피를 흘린 제사장, 그것이 이제 나중에 이렇게 제사장들이 이제 그것을 가보면 이런데 말이 있지요? 나의 일을 끝까지 이것은 거꾸로 묵시록 2장에 있는 말씀인데 끝까지 수행하는 자에게는 여러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구원받은 영혼 여러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 한 나라의 대통령만이 아니에요. 여러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줘. 그는 쇠 지팡이로 질그릇을 뒤지듯이 그들을 다스린다. 그 왕권은 이런 거야. 쇠 지팡이로 막 질그릇을 깨 부시듯이 그냥 악과 모든 멸망시킬 것을 쳐 부실 수 있는 이런 왕권을 주시고 또 그 위대한 그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고 구원 얻을 영혼들에게는 이런 영광이 그리고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로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만국을 만인을 다스리듯이 구속받은 영혼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묵시록 2장에 일곱 교회에 말씀하실 적에 그 말이 나오지요. 왕국을 이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관이 되게 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이 땅위에 오신 것, 참 기름을 붓는 메시아로 이 땅위에 오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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