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온창고 정리하고 가공용 무우를 들여놓고 어제 오늘 이어 울금을 다드고 있다. 산다화가 활짝 피고 비파도 피기 시작한다. 아직 눈은 오지 않았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진다.
주님의 피 한 방울
1980.08.13. 김준호 선생
우리 수도원에만 묻어 준다면 이 수도원은 성화의 불이 될 것이다. 내 가슴에 예수의 피 한 방울만 떨어진다면 나는 성녀가 된다고 하는 그 희망 때문에 칠십년 팔십년 늙도록 기도한다고, 그렇게 고백들 하고 있어요. 수도원에 들어가서 직접 수도사가 되면 무슨 비밀이 있냐?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예수님의 피를 우러러 보고 사모하는 마음, 우리 주님의 피가 내 가슴에 한 방울만 떨어진다면 내 평생에 지은 죄는 깨끗이 닦아주시고 내 영혼은 구원 받습니다. 주여 제게 피 한 방울 주소서 하는 그 열렬한 사랑을 애모(愛慕) 하는 것. 그런 시간을 특별히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알고 보면 허망할지 몰라도 참 순수한 사랑이 있다면 아무리 나무에 묻었을 지언 정, 사랑하는 자기임의 피가 그 나무에 묻었을 때 직접 그것을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에는 살아있는 예수님과 똑같지 않았겠어요? 하늘나라 가신 다음에, 사랑은 시간도 초월하지만 몸도 초월하고 기념만이라도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신 다음에도 십자가에 ane은 피만 자기가 달아봐도 전기가 오듯이 뜨겁지 않았겠어요? 감격이 되어서, 감격해서 자기 전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어디가면 무슨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순애(純愛) 깨끗한 사랑을 예수님께 받을 수만 있다면 많이도 말고 찰나 똑딱하는 시간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어도 나는 성인이 된다. 나는 성녀가 된다. 라는 희망 그것이 수녀들의 희망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육신을 갖은 사람들이지만 계명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형제를 위해서 자기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참 사랑만 할 수 있다면 인생은 성공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바는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시라고 기도할 제목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서 참 예수님의 그 순수한 사랑을 자기가 받아들였을 때 베드로 선생님이 설교하시던 설교만 보더라도 우리가 직접 예수님을 본받기 보다는 베드로사도를 본받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듭디다. 어제 말씀드렸지만 사도행전 3장. 저로서는 처음 봤다고 했어요. 그래서 3장에 있는 말씀을 어제 하다가 조금 덜했다고 했는데 오늘 거기 대목을 다시 봅니다. 시간이 조금 적고 그러니까 제가 직접 읽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똑바로 보며 ‘우리를 좀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성전 앞에 있었던 불구자 거지이지요.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볼 때 가슴이 울리고 본받고 싶어요. 우리는 돈도 없는 사람들이 돈이나 있는 것 처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 같애요. 우리도 베드로 같은 참 깨끗한 마음만 지녔다면 아니요, 참말로 그렇게 그런 말 한번 해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말 한자리가 어떻게 부끄러워서 못하고 일생을 그렇게 돈이 있는 것처럼 살다가 죽지 않습니까?
자기 정체를 안다는 것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다음에는 모두 자기의 본 것이 나는 없다. 나는 사랑도 없고 돈도 없고 베드로라는 나도 없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밖에 없다. 자기의 절절이 흐르는 예수의 사랑 나는 없다. 나는 돈이 없다. 그럼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기가 서울 갈 마음을 먹을까요? 너무나 뻔뻔한 생각 아닙니까? 돈 일전도 벌 수없는 식구들이 ‘나 서울에 가야겠다.’ 그거 자기 과신 아니에요? 이 동광원에 오래 계신다는 할머니들도 아주 뻔뻔해요. 나는 어디 가고 싶다. 그러고 간단 말씀입니다. 그럼 거기 돈을 가지고 차표를 샀을 때 가사 저 같은 사람 저를 두고 하는 소리인데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식구들의 피가 더했냐 말씀입니다. 차를 샀기 때문에 못났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를 갈수도 없고 차도 못타는데 뻔뻔한 사람들이 서울 간다 할 때는 돈이 없으면서 가면 남의 돈으로 간단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 불쌍한 신자들의 돈이 녹아 났나 말씀입니다. 주머니의 돈이 녹아 났나 말씀입니다. 베드로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베드로는 왜 이렇게 참 말을 했을까? 그런 말부터 가슴이 울려와요. 참 베드로 선생을 본 받아야겠다. 가사 특별히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부터 저를 부터 모든 식구가 얼마나 자기 과신에 빠져있는가 과대망상이랄까요? 돈 한 푼 없는 사람들이 참말로 베드로 같은 성령을 받았다면 자기가 어떻게 옷을 입을까? 자기가 무슨 돈이 있어서 옷을 사 입을까? 생각만 해봐도 죄가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소화 테레사 같은 성녀는 꽃 한 송이만 쳐다보고 자기가 곱다는 생각만 품었어도 평생 자기가 눈물이 나는 죄거든요. ‘주님 저는 피조물을 사랑했어요. 오, 저는 잘못했어요.’ 그리고 울어주던 그 눈물 순수한 사랑의 눈물 아니겠어요? 저는 어린나이에 리본에 꽂으려고 꽃 한 송이를 꺾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황송해요. 너무나 잘못했어요. 오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 무슨 죄가 있어서 죄를 졌어요. 사랑이 깨끗해질수록 예수님을 못 사모한 것이 죄거든. 예수님만 사랑하라고 태어난 몸인데 예수 아닌 피조물을 사랑했다는 그 부끄러움 얼마나 부끄러우면 그렇게 울었을까요?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다 같이 한번 이 말씀 배워서라도 그렇게 살도록 따라합시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혹시 불쌍히 보고 누가 차비를 줘서 준다면 감격할 테지요. 아 나는 돈이 없는데 당신이 무슨 돈으로 내 차표를 사주십니까?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나는 평생에 이 은혜를 못 갚겠어요. 내가 죽어서라도 못 갚겠으니까 우리 예수님께 빌어서 당신이 영생하도록 빌어드리겠습니다. 어느 수녀의 차비를 드릴 수만 있다면 그 영혼은 구원을 받아요. 그 수녀가 순수한 사랑으로 예수님께 부탁해서 나를 저분이 차비를 줘서 서울 가게 되었어요. 저는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 영혼을 구원해 주세요. 제 피를 바치겠습니다. 그럴 거 아니겠어요? 그러기 때문에 돈이 없는 갈멜수녀원에는 모든 속세의 영혼들이 자기 영혼을 위해서 빌어달라고 모두 밥과 옷을 갖다 줘요. 그러기 때문에 그 수도원은 부자가 되잖아요? 되고 싶어서 부자가 되겠습니까? 자기 영혼이 구원 받고 싶어서 돈이 없는 수녀들에게 감화를 받아가지고 이 돈을 쓰시고 나를 위해 빌어주십시오. 그걸 또 누가 반대 하겠습니까? 나는 돈이 없습니다. 가사 그 말 한자리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되지 않아요. 베드로를 본 받아서 그럼 자기가 서울 가는데 차표를 사줬는데 그 차표를 사준 사람의 은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남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을까요? 가사 나는 돈이 없습니다. 참 사랑을 심었을 때 이 일이 되는 겁니다. 참 사랑을 지닌 사람의 마음 말, 자기 말 한마디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일생의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아요? 나는 돈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의 말 한마디만 들어 봐도 베드로의 영혼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인품을 알 수 있단 말씀입니다. 그는 과연 참 예수님의 종이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걸어 다니시오. 그 깨끗한 사랑이 있을까요? 걸어 다니시오. 참 이렇게 말이 아니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다면 불구자가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말 하노니 걸어가시오. 그렇게 말하는 게 쉽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걸어가시오. 내가 말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지금도 베드로 같은 사람이 우리 사이에 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으면 앉은뱅이가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이 부끄러워요. 하고 말한 다음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 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걷기도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런 대목입니다. 이런 대목을 처음으로 봤어요. 요사이 여기 오기 전에, 어떻게 이런 대목을 보니까 과연 베드로 선생을 본봐야 하겠구나. 천년만년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자선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돈이 없습니다. 참 이 불쌍한 사람들을 데리고 살 때 말씀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사랑으로 드립니다. 이 찬물 한잔을 받으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사랑만 있다면 여기에 모인 불쌍한 형제자매들이 천국자리가 아니겠어요? 밥 한 끼를 해드리면서도 이것은 저는 쌀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해드리는 밥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잡수십시오. 그렇게 눈물겹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그 밥을 먹은 모든 환자들이 다 성화를 받고 성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감격해서 그 사랑에 감격해서 이성인이 되는 법이 따로 없고 예수님의 피가 묻으면 성인이 되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밥을 해주면 그 사람이 성인이 되어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찬 물을 떠주면 그 사람이 성녀가 되어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걸어가십시오. 하면 베드로 같은 성인이 된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든 스승들이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습니다. 말은 예수이름으로 해도 실상은 자기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에요. 밥 한 끼를 해 드려도 까 자기 이름으로 주니까 거기에 사랑이 없단 말씀입니다. 그 성경 말씀이 곧 하나님 말씀인데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그대로 자기가 살면 천국인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또 그다음에 12절에 그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우리가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었다고 생각 하십니까? 지금 자꾸 오해하고 베드로에게 무슨 능력 있냐고 모두 옆에 사람들이 눈 여겨 보니까 자기를 해명하는 거 우리자신에 무슨 능력이 있거나 우리가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경계하는 말씀 참 이 태도가 우리가 본 받아야겠어요. 아니 내가 당신들의 밥을 해 줄 사람이오? 내가 당신들 발을 닦아 줄 사람입니까?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당신 밥을 해주라고해서 이 죄녀가 밥을 해드립니다. 저를 불쌍히 보시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렇게 한 사람 한사람 불쌍한 사람들에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성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피가 묻었으니까 수도원 갈 것도 말 것도 없고 앉은 자리에서 곧 성화되지 않겠어요? 베드로의 심정 베드로 선생님의 성령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게 있는 것은 죄 뿐이고 내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힘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내게 능력이 있어서 이 환자가 걸어간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시던 말씀을 본받고 싶어요. 오늘부터 밥을 하시던지 빨래를 하시던지 찬물을 떠 주던지 그렇게 하면 어느 수녀원 가서 수도 할라고 생각하지 말고 앉은 자리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밥을 얻어 잡수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겠어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십년동안 자기가 자기의 힘으로 농사하고 논 열 마지기 밭 열 마지기 매고 그렇게 하고 산 것 보다는 일순간만이라도 괜히 고생 말고 일순간만이라도 내 힘으로 이 논을 맨 줄 아십니까? 여러분 내 힘으로 이 밭을 맨 줄 아십니까? 아주 이놈은 아주 나쁜 놈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너무나 나를 사랑해 주셔서 이놈이 할 수 없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여러분의 논을 매 드립니다. 이놈을 위해서 좀 기도 좀 해주세요. 그렇게 겸손 할 수만 있다면 논 맨 그분이 성인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성인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가 묻었으니까. 그런데 왜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하늘나라 가는 길이 있는데 왜 수도를 십년 이십년 그렇게 오래해요? 무엇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안다 말씀입니다. 수도까지도 예수님을 알아요. 자기 우월감 자기 자존심 ‘나다. 내가 한다.’ 자기가 하니까 헛수고 아니겠습니까? 헛수도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수녀원에 들어오는 수련생을 받은 테레사는 항상 그렇게 훈시한 자기 말씀이 있지요.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딸들이 항상 변함없으신 말씀에 여러분이 부모 형제 친척 고향 재산 애정 모든 걸 다 끊어버리고 철문을 닫고 봉쇄 수도원에 들어와서 착복식을 하고 수녀가 되었으니까 안심하렵니까? 여러분에게 제가 죽은 다음에도 읽어보라고 여기에 써서 내가 글을 남기고 죽는 것은 분명히 내 말을 잊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수도원 문을 닫고 여러분이 기도실에 들어가기 전에 마귀는 먼저 영리해서 여러분의 그 기도실에 먼저 와서 숨어있습니다. 그랬어요. 자기가 세속에 다 마귀를 내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온 줄 알고 착각하지 말라고, 마귀는 수도원에 먼저 들어와서 당신 기도실 속에 와서 숨어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만 잠을 잔다면 방심하면 당신 영혼을 꼬여가지고 지옥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수도원 안에도 마귀가 있다는 거예요. 수녀원에 가야만 성화 받는 것 아니란 말씀입니다. 여기 있는 지극히 적은 형제자매에게 찬 물 한 그릇 떠주면 나를 떠주는 것이다. 그랬어요.
바로 여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기 어디 가서 예수님 만나 보겠어요? 그런데 물을 떠줘도 자기가 떠주니까 나 베드로가 이런 일 할 줄 압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덕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선심이 있거나 자비심이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해서 이 아주 몹쓸 놈이 이렇게 감격해서 그럽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놈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이놈이 잠깐만 방심하면 나쁜 놈이 될 놈입니다. 그렇게 하셨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깨달은 그대로 사도바울 같은 분은 그랬어요. 고린도 전서 4장 7절에 자기가 깨달은 재산이고, 자기가 깨달은 덕이지요. 남에게 그러니까 남에게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낫다고 보아줍니까? 다른 자기 제자들한테 하신 말씀이지요. 친히 사도바울을 따라다니던 제자들한테 하신 말씀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낫다고 보아줍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아니 자기가 예수님의 감화를 받기 전에 그렇게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줄 그런 인물이냐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을 감격 또 이 현필 선생님의 사랑을 감격 그 사랑의 빚을 받아가지고 이만큼 자기를 포기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무슨 덕이나 있는 것처럼 자기가 무슨 사랑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래야 되겠느냐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 인양 자랑합니까? 그랬어요. 자랑한다는 거 참 무서운 말이지요. 한번 두 번은 깨끗하게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랑도 백번 천 번 하면 마귀가 온다면 마귀가 숨어서 오니까 나중에는 자기가 한 것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래 그랬어요. 공자님도 내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성인 성자라 하는 군자를 만나봤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앞에는 함정이 있더라. 내가 만나본 그 위대한 인물들을 만나볼 때마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 앞에는 빠질 함정이 있고 그 목이 고개가 들어가면 목이 졸려죽을 올가미가 있더라. 그런 말씀 했어요. 아무리 성인 성녀 목사 가사 부흥사 말 들어도 거기 함정이 있단 말씀이에요. 거기, 하물며 아무리 자선사업을 하고 보모 노릇을 하고 가사 수도를 한다 해도 거기 함정이 있단 말씀이에요. 거기, 무엇이든지 잘하면 잘 할수록 교만이라는 마귀가 달라붙습니다. 교만 내가 했다는 거, 그러니까 거기 지옥 갈 함정이 있기 때문에 그럼 공자 같은 인물도 그걸 봤는데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더 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일로 들어온 것은 너무 이 모임은 순결을 전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순결이 있는 것처럼 교만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 마귀가 차라리 소화 테레사 마냥 24살에 죽으면 성녀가 될법한데 70살 80살을 살다보면 자기가 평생 수절이나 지킨 것처럼 마귀가 되어버린단 말씀입니다. 늙은 말년에, 그 얼마나 서러운 절통할 노릇이야. 거기 마귀가 있는 줄 모른단 말씀입니다. 늙도록 수도했는데 거기 깨끗하게 살았다는 거기 마귀가 돌아가지고 천국을 못 가게 된다면 얼마나 절통할 노릇이냐 말씀이에요. 특별히 자선사업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영혼이 고달프냐 이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한 일인데 너무 빨리 죽지 않고 오래 살다보니까 내게 힘이 있어서 선한사업을 한 것처럼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무서운 교만이라는 올무에 걸려가지고 그 헛수고하면 얼마나 서럽겠느냐? 헛수고, 이제 그것이 우리가 지금 명심해야 할 테레사 성녀의 남으신 유언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선 사업을 하기 위해서 여기에 와서 사니까 여기는 함정이 없다고 생각 하십니까?
여러분이 여기 들어오기 전에 벌써 마귀는 여러분의 골방에 숨어있다는 것을 아시고 살라고, 그렇게 하신 성녀의 말씀, 그 말씀을 알기 쉽게 제가 말씀드린 것이에요. 옛날에도 그래요 자기 가문에 수절한 열녀가 하나 있으면 온 집안 식구가 못산다고, 열녀 등살에 어떻게 교만을 피우고 시어머니를 잡아먹는지, 그러니 열녀 하나 나자고 온 집안이 지옥이에요. 억지 열녀, 그게 교만 아닙니까? 예수님이 만든 열녀는 그렇지 않아요. 겸손해요. 천번 만번 타인이 성녀라 그러지, 본인은 죽을죄인 이거든, 항상 울고 있어요. 예수님 앞에, 어제도 말씀 드렸어요. 대 성인 성녀들은 죽는 날까지 벌벌 떨었다고, 자기 죄에 울고 저는 대 죄인입니다. 아 저는 죄밖에 없어요. 어찌 하오리까 주님 수도자의 비밀은 그 점이다 말씀입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사랑이 없습니다. 그 말 아니에요? 돈이 요즘은 사랑 아닙니까? 사랑하는 사람한테 돈을 줘야 사랑이지 어떻게 말로만 사랑 합니까? 내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왕이 가슴을 울렸다는 소화 테레사의 선생이지요. 지도 신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소품 집 39페이지에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자랑하고 싶거든 그리고 또 어리석은 자가 미친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싫거든 내 안에서 네 것이 아닌 것을 다 없이 하여라. 그것이 스승 신부님의 교훈이에요. 수녀님한테 주신 만일에 자랑을 하고 싶거든 그리고 또 어리석은 자 미친 수녀라고 말이 듣기 싫거든 네 안에서 네 것이 아닌 것을 다 없이 하여라. 그러면 그 나머지에서 너는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는 서러운 노래를 부르리라. 주여,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 제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어찌 하오리이까? 너는 무로 돌아갈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 뻔하다. 그러기에 허영의 죄에 빠지지 않고 싶거든 무엇이든 자랑하지 말고 살아라. 그것이 십자가의 왕 요한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아주시는 저 은총을 각별히 생각해 본다한들 역시 자랑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예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당신 병을 고쳐준다고 그것까지 자랑하지 마라라. 그랬습니다. 고대의 많은 성지성현 아니 부흥강사들이 앉은뱅이를 고쳐줬지만 왜 퇴색이 되는 것입니까? 자기가 은총으로 병을 고쳐준 다음에도 자랑을 한 그 후환 이지요. 내가 누구 병을 기적으로 고쳤다고 자랑을 하고 보면 거기에 화가 뒤따라요. 타락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은총으로 남의 병을 고쳐줬다 하더라도 자랑하지마라라. 왜냐하면 그것은 갖고 있는지 어떤지 너는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네가 은총으로 그 병을 고쳐줬는지 은총이 아니고도 그 병을 고쳤는지 천국에 가서나 알 비밀인데 왜 자랑하냐 이거에요. 내가 누구를 안수해 줬더니 병을 고쳤다. 그 자랑도 말하지 말라. 그랬어요. 그게 철저한 교훈이십니다. 41절에 또 그런 장면이 있어요. 엄청난 잘못은 하나님 자신보다 예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이 팔리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사랑하는 길이고(끊김)
그렇게 말씀했고, 또 대학교수로 계시다가 어떻게 했으면 이 땅에 더 좋은 일을 할까 자선사업을 해볼까 의사가 되어볼까? 보다 모든 일 보다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해 드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깨달으시고 사막에 들어가서 현재 살아계신 수도사가 해준 편지에 이런 말이 있어요. 그 목사님이 수도원을 자꾸 열망하시니까 수도원이 지어졌다고 생각하고 거기 수도원에 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람들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아요? 문화시설 문명국에 있는 수도원 보다는 사막에 모래 바닥에 있는 수도원을 찾아간 수도사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알뜰히 수도한 사람의 내밀의 비밀은 무엇인가? 직접 수도한 사람들의 영적 보배는 무엇인가? 그 비밀을 여기 조금 봅시다. 사막에서 온 편지 160페이지에서 163페이지에 있는 어느 한 말씀이지요. 전부 읽으면 시간이 모자라요. 자기가 이제 수도 생활에 들어갔어요. 교수직도 그만두고 부자 수도원도 그만두고 가장 불쌍하고 그 먹을 것도 없는 가난한 수도원을 택해 갔지요. 그래 수도원이라고는 집도 못 짓고 모래바닥에서 기도하는 곳 입니다. 그냥 모래에 앉아 기도하시면서 자기가 이 감격에서 자기 깨달음을 우리한테 편지한 한 대목이에요. 기도를 하지요. 하루 이틀 일 년 삼년 십년, 기도를 하고 짜고, 짜고 기도하고 이런 결론입니다. ‘오, 나의 미소 나의 미약 나의 비참 나의 무력이여! 진실로 제 재산은 기도뿐입니다.’ 그런 결론, 교수직도 그만두고 부자 수도원도 그만두고 가장 깨끗한 수도원을 찾아가서 5년 10년 수도하고 결론 내려진 것은 ‘오, 나의 적음이여! 나의 약함이여 나의 비참함이여 나의 무력함이여 진실로 내 재산은 이것뿐입니다.’ 그런 결론입니다. 그럼 깨달은 것은 베드로 선생님과 같습니다. 나는 돈이 없소. 그것뿐 아니요. 나는 사랑이 없소. 이 인생의 본 바닥이 드러납니다. 나는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홀로 인정했지만 난 너무나 비참해진 것이 부끄러워 늘 숨겨왔다. 그랬어요. 일 년 이년 삼년 십년 나는 아무것도 없소. ‘나는 돈이 없소.’ 이말 한자리가 너무 부끄러워서 내가 무능하다는 이 말 한자리를 할 수 없어서 감정을 억누른 채 얼마나 나는 이렇게 오래오래 살았는지 감정을 억눌러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 무능의 극단의 한계점까지 나를 끌어당길 때 더는 거짓말 할 수 없어서 내 무능의 한계점에 다다랐어요. 끌어당기는 그 은총을 받았을 때는 그때 나는 철저히 내 허물을 위해 아, 나는 허무하다는 것을 이제 고백하셨습니다. 나는 빈 껍질이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이 사도바울께서 권면하는 말씀과 똑같지 않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낫다고 보아줍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논도 매고 밭도 매고 밥도 하십니까? 무슨 자기 재산이나 있는 것처럼 자기 사랑이나 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말하기가 제일 어려워요.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거지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비천한 인간입니다. 나를 위해서 빌어주세요. 그 말 한자리를 어떻게 하기가 어려운지,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조금씩 저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지금에야 바로 지금 나는 아직 약합니다. 약한 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 약점을 바칩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약한 죄인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고백을 비로소 했답니다. 그 시간에, 그러니까 이 소화 테레사나 그 십자가의 왕이나 혹은 그 위대하신 프란치스코 같은 이는 나는 죄인입니다. 가 그냥 입에서 나오겠습니까? 십년 이십년 삼십년 자기 교만이라는 마귀를 항복시켰을 때 피가 마르는 그런 고통 후에 오는 자기 비참사가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아주 몹쓸 놈이에요. 자복한다는 거 둘째아들 아버지 나는 아주 불효한 자식입니다. 나는 아버지 자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말 한자리 이 수도원에 들어가면 그 말 한자리가 나올 때까지 자기를 낮춘다는 겁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거. 자기 아닌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거 하나님의 전능 앞에 내 약점을 저는 바쳤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걸 바쳤어요. 바칠 것은 그것뿐이에요.
자기한테 뭐 있어야지. 오, 자비하신 주님, 저의 일평생 감추고 쌓아두고 감추어 놓았던 죄 더미를 주님의 자비의 태양 앞에 바칩니다. 저는 이제야 이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주님과의 만남을 얻었습니다. 그때야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수도사는, 그 자비하신 주님 품에 자기의 죄 보따리를 바칠 때에 그때에 주님이 자기를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그 순간에, 그렇게도 부끄러웠던 죄를 주님 앞에 바칠 때 지금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주님과의 일치를 느끼면 주님과의 사랑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이 수도사의 고백이에요. 저의 비참이 주님의 전능을 끌어당겼습니다.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숨겨왔지만 자기의 비참을 자기가 시인했을 때 그 비참을 주님 앞에 바쳤을 때 전능의 권능, 전능하신 은총이 그 가슴에 물밀듯이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물밀듯이 자비의 사랑이 그 가슴을 녹여냈어요. 어떻게 복 바치는 사랑에 눈물을 흘렸겠지요. 이 말이 아니에요. 능력이니까, 저의 상처가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고 저의 허무가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풍부히 받아들이게 하여 주셨나이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전능하신 은총이 제가 가지고 있던 허무와의 사이에서 주님과 만나게 하시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가장 큰 불가사의한 초자연의 은총은 제가 이 상식으로는 알 수 없었던 은총이었사옵나이다. 주님의 은총은 가장 아름다운 일치였습니다. 그는 가장 거룩하신 주님과 가장 죄 많은 제가 어떻게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을까하는 그 비밀 때문입니다. 가장 죄 많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가장 깨끗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그것은 도저히 신비한 은총이어서 이 윤리도덕을 가진 이 자존심으로는 알 길이 없어요. 어쩌면 깨끗하신 주님이 어쩌면 죄인과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그런 애인이 될 수 있을까 창피하지 않아요? 어찌되었든 수치스럽고 우리 그 거룩하신 주님이 어쩌면 그런 몹쓸 여자를 사랑해 주었다니 얼마나 천국이 수치스럽고 교회가 수치스러운가? 창피를 느끼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감정으로 그러니 불가사의한 사랑은 깨끗하신 주님의 깨끗하심은 가장 죄 많은 여인을 사랑해 주기 위한 목적이었거든요. 그 사랑을 어디다 쓰시려고 깨끗한가 가장 죄 많은 여자를 사랑하고자 깨끗했던 것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랑이 제 가슴을 녹여주셨나이다. 그는 주님이 주시는 무상의 사랑과 그 깨끗하신 부활하신 사랑을 주심과 가장 죄 많은 여인과 만남과 같은 만남이었나이다. 오 이 은총을 받아들이기에는 마치 가장 성도 이름도 없었던 성모님의 겸손과 마찬가지였나이다. 이 성모님의 위대성은 거기 있어요. 전 인류 앞에 자기를 소개할 때 저는 비천한 계집종이었습니다. 그 성모나 성모 되시기 위해서는 자기가 비천한 계집종이었다는 신분을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덕분으로 나는 예수님의 엄마가 될 수 있었다는 이 은총의 소식은 천년만년 영원히 인류의 가슴에 기념이 될 것입니다. 그 기념을 외우는 것이 성모송이지요. 아 천주교가 성모를 숭상한다지만 성경에 있는 그 요절을 외우는데 불과하지 않아요. 요절을 외워주는 것이 무슨 그렇게도 오해를 낳게 했을까요? 나같이 비천한 계집종은 하나님의 전능으로 예수 엄마가 된 다음에는 내가 낳아준 예수나 예수 젖을 먹인 젖꼭지나 내 태나 내 이 비천한 계집종이 천년만년 복이 있다고 복 있는 여자라고 추앙을 받게 될 것이라 고 그런 시를 읊었어요. 그것을 외우는 것이 성모송이란 말씀입니다. 그렇게 이해해 드려야지요. 어쩌면 남의 비밀을 모르고 그렇게 아프게 할까요? 아 예수님을 낳아준 성모님을 높여서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계집종을 불러가지고 자기 엄마를 삼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 아닙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성녀 되심은 막달라 마리아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버림당한 여자를 예수님이 사랑해 줬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드높이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 사도가 그 말해요. 내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내게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걸어가십시오. 그래 걸어갔단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소망과 믿음과 사랑 속에서 주님 품에 귀의합니다. 회개합니다. 그 말이에요. 주님 품에 회개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베드로를 용서하시며 막달라 죄를 용서하시며 또 사도 바울의 죄를 용서해주는가 베드로 선생님의 말씀의 사연이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이 낫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된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내 힘으로 했다는 사연은 전혀 거기서 해명을 했어요. 내 힘으로 한 것 아니라고 내 덕이나 내 수양이나 내 사랑이나 내 수도나 내 자비로 된 것 아닙니다.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이 그 믿음 앞에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베드로 선생의 이 설교를 받아들여야할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과연 우리 동광원 원장님은 원장님다우시다. 우리 청년들에게 앞으로 읽힐 말씀은 사도행전을 읽혀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원장님 같은 분은 외각을 짓지 않아 큰 집만 짓지 않아요. 내부 장식은 오 장로님과 같은 분이 하시지 않아요? 그런데 큰 집을 딱딱 그렇게 잘 맞춰 주는 거 사도행전을 잘 보시라는 것은 아 그런 점이었구나.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사람이 만일 선한 일을 했을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될 때만 선한 일이 되고 그렇지 않고 자기가 만일 선행을 했다고 믿을 때에는 엄청난 사탄이 되고 만다는 이 슬픈 소식, 똑같이 바란 것이라도 베드로 선생님처럼 내가 이러한 일을 한 인물로 아십니까? 아닙니다. 이 죄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믿은 후에 너무나 감격해서 이렇게 밥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 마음이 조금만 빗나가 버리면 엄청난 과오를 범한다는 거예요. 사탄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는데도 사탄 자신이 거룩하다고 믿었을 때 과연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은 그건 성경에 없다고 하십디다마는 사탄의 정체는 천사이지 않습니까? 나는 거룩하다고 자기가 믿었을 때 사탄이 되었단 말씀입니다. 교만했단 말씀입니다. 그 함정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이런 단체에 있어요. 사탄이 어디 있냐? 나는 깨끗이 살았다고 하는 그 함정이 일순간만이라도 들어오면 거기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엄청난 마귀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불평이 불만이지요. 그때부터는, 사탄이 들어왔으니까 자기마음으로 불평불만 할 사람이 아니거든. 사탄이 꾀이니까 불평불만이여.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 예수님을 저 빌라도에게 넘겨줬을 때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작정했는데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예수를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 거룩하고 죄 없으신 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결국 여러분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셨습니다. 그것을 본 목격자는 나입니다. 우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랬어요. 그러면 오늘날도 사람은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빛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에서 사람에게 진 사람들이요. 닥쳐요. 좋은 일 하다보면 교만한 사람들이 생긴다니까. 자꾸 이렇게 겸손한 사람은 져요. 오늘도 진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을 사람입니다. 오늘도 그래요. 선한 일을 하면 할수록 교만한 사람이 나오고 거기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짓밟혀요. 생명이 없어져요.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은 다음에는 그 짓밟힌 영혼은 천국에 보내져요. 예수는 사람이 죽였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을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오늘날도 거룩한 목사님은 짓밟힘을 당해야지요. 똑똑한 목사님들 한데 그렇지 않겠어요? 겸손한 목사님은 지금도 짓밟힘을 당해야지요. 사람은 사람을 죽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살려주셔요. 하나님이 살려주셔요. 여러분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똑같이 무지한 탓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점을 우리가 시인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용서함을 받지요. 지도자도 속고 지도를 받는 제자도 속고 여러분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예수를 죽였다는 그 잘못은 여러분의 지도자의 잘못이지만 똑같이 또 지도를 받는 제자들도 무지한 탓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 드린 마지막 요절에 나와요. 그렇게 모든 것을 베드로 선생님은 샅샅이 사람이 선 자리와 예수님의 은총을 너무나 자기가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예수시라면 베드로 자기 같은 배신 망덕 한 제자를 용서한 예수가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용서하신 우리 주님 여러분같이 지도자를 잘 만나고 못 만나고 또 지도자 자신도 잘 모르고 예수를 죽인 여러분이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당신들의 죄를 용서 하십니다. 그 믿음 그 이해, 그 이해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오. 그 죄인이 무슨 따로 있어요. 선한 일을 하다보면 내 힘으로 했다는 착각에 빠져버려요. 그것이 엄청난 죄란 말씀입니다. 무슨 어디가 죄가 따로 있겠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우리의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곧 그분 이십니다. 어제 드린 말씀 그 요절이 요절 말씀을 하시기까지 쭉 내력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어제 말씀을 보충했습니다. 제일로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그 점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함정이 있어요. 나는 70,80을 먹었거니 내게 무슨 시험이 있으랴 하지만 내가 일생을 수절하고 살았다는 무서운 마귀가 함정에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 밥해갖고 코 빠졌다고 늙도록 수도해가지고 지옥가면 얼마나 서러운 일이야. 또 젊은 청춘을 바쳐가지고 평생을 남을 위해서 자선 사업을 하고 늙었는데 백발이 다 나아가지고 내가 선한 일 했다 할 때 마귀가 되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 함정은 여러분에게 면제되어있지 않다. 그렇게 말했습디다. 어느 성인이, 내 제자들이여 여러분, 여러분 앞에 이 함정은 아직 해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랬어요. 제 말이 아니에요. 어느 성인의 말이지요. 수도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앞에 함정이 아직 면제되어있지 않습니다. 그 차라리 지옥 갈 바에는 젊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지옥가면 좋지 않겠어요? 젊어서 평생을 선한 사업하다가 교만이라는 마귀한테 꼬인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러니까 그 수도사의 그 중심이 그거에요. 수도하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결론은 나는 죄 뿐이다. 그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냥 이대로 주님 앞에 갑니다. 이 죄 더미를 그냥 가지고 주님 앞에 갑니다. 거기서 자기는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평안을 얻었다. 귀일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오. 거기에 죄도 씻어지고 위로도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바로 본 증인입니다. 베드로사도 본인이 본인 증인이지요. 딴 사람 어디 있어요? 예수를 자기가 안 따라갔다면 무슨 죄가 있겠소? 예수를 따라다녔다는 그 사실이 예수를 배반했다는 무서운 죄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죄를 예수님이 용서하신 그 기쁨 그 위로 그것은 자기가 받은 위로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따라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곧 그분이십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로 20절 말씀.’ 찬송 불러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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