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동안 흐리고 눈이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오다가 말다가 눈이 왔다. 눈 덮인 농장을 담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982.06.13. 정인세 원장
온 천하에 성도들과 함께 아버님을 경배하고 말씀으로서 교제 할 수 있는 기회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항상 육신을 가지고 이 죄 많은 세상에 사는 동안 아버님 앞에 득죄함이 많사옵고 또 저희들 모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생활가운데 잘못된 것이 많은 인생들입니다. 이 시간 아버님께서 무한하신 은총과 자비를 내리셔서 저희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또 깨끗하게 해 주시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빕니다. 이 시간 아버님의 영광을 위해서 받아주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저희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들 심히 약한 무리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건너가는데 지나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사랑을 더해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 자리에 참석치 못하는 형제자매들도 있는 곳에서 은혜 받게 도와주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어느 곳에든지 하늘나라의 복을 풍성히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또 기도하옵고 원하기는 이 나라에 평화를 주시고 이 민족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모든 위정자로부터 지도자들을 위에 성신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 앞에나 모든 자기 직책에 대해서 잘못되는 일 없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몸들 바치는 종들 위에 아버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내려주셔서 아버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 땅위에 이루어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버지께서 끝까지 같이 계셔주시기를 바라옵고 불초한 이 자식은 예수님의 피공로만 의지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성경말씀 읽겠습니다. 요한1서 4장 7절서부터 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그대들은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 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사랑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 장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요, 1장 4절에 그분은 생겨난 모든 것을 당신의 생명으로 살게 하셨는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10절에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이 세상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 또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당신의 고향에 오셨지만 그 고향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8절에 그는 빛 자체는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증명하러 왔을 따름이었다. 말씀이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었다. 또 요한1서 1장에도 처음에 이렇게 말씀이 시작되어 있지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 말씀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 그 말씀을 듣고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또 5절에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그분에게서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세 번 읽은 말씀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1서 4장에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또 특별히 요한복음이나 요한1서에 보면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또 하나님은 빛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이 세 말씀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려고 그래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그랬고 하나님은 또 생명이시라고 그랬고 하나님은 또 사랑이시라고 그랬는데 그럼 그 빛이 다른 거고 생명이 다른 거고 사랑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하나이다. 그것을 이야기 하려고 그래요. 셋이 아니고 하나에요.
우리가 지금 요한1서를 통해서 또 고린도전서 13장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많이 배웠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사랑이 제일이다. 사랑이 귀하다. 하는 것을 우리가 이론으로도 알고 체험으로도 압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랑만 있으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우리는 긍정하는 거지요. 어느 문제든지 크게는 이런 이 세상이 움직이는 정치나 경제나 모든 문화문제나 개인에게 있어서 사소한 가정문제나 개인의 어떤 육체의 병까지 모든 것을 골똘히 생각해 보는 사람들은 사랑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 하는 것을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유무식간에 여기 앉아있는 우리 뿐 아니라 수천 년 동안에 온 세계가 다 그것을 긍정합니다. 사랑만 있으면 해결 안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인제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사랑이 어디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성경은 사랑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둡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사랑이 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모든 사랑의 뿌리 근원 그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 안에는 또 생명의 근원도 있다. 그러니까 생명과 사랑은 하나가 되지요. 다시 말하면 참 생명은 사랑에 있고 참 사랑은 생명에 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랑과 생명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런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빛이시다. 라는 말과 그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빛이 우리에게 왔다. 하는 그 요한복음의 말씀과 같은 것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에 사랑이 없을 적 경우를 체험합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내 마음이 깜깜합니다. 또 사랑이 없는 사회를 보면 사람끼리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아주 암흑하고 비참한 지옥과 같은 것을 우리는 요새 많이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사랑이 있을 적과 없을 적과를 체험해본 이들은 압니다. 사랑이 있을 적에는 내 마음이 기쁩니다. 사랑이 있을 때는 내 마음이 평화스럽습니다. 사랑이 있을 적 에는 모든 세상이 좋게만 보이고 세상이 환하게 보입니다. 사랑이 없을 적에는 세상이 모두가 보기 싫고 까많게 아주 비참하게 세상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빛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해가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내 마음에 사랑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밝아지고 환하게 보이고 내 마음에 사랑이 없을 적에는 모든 것이 음침하게 어둡게만 보인다. 하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사랑 이라는 것을 체험 할 적에 사랑은 먹는 것보다 무슨 돈이나 이런 것보다 이 세상의 무엇보다 더 귀하다. 하는 것을 알지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돈이 많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마음에 평화가 없고 아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차라리 돈은 하나도 없고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즐거움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을 껍데기로 살지 않고 깊이 살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개나 돼지처럼 먹고 또 저런 동물들처럼 번식이나 하는 성적 충동이나 만족시키고 이것은 인생에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런 세계가 보이지 않아요. 정욕을 만족시키고 식욕을 만족시키면 그것으로 다 되는 줄 압니다. 그것은 동물입니다. 짐승들은 그 두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식 먹는 본능 정욕을 만족시키는 본능 그 두 가지만 만족 시키는 것이 여러분 다른 것을 보지 말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개를 보면 압니다. 개의 생활에 무엇이 있습니까? 개는 도둑이나 지켜주지, 사람이 식 본능 색 본능만 만족시킨다면 짐승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라는 것 자체를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어도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저런 나무나 푸성귀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무슨 그것도 생명이 붙어있으니까 살아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인간과 비교 할 수 있습니까? 사람도 그런 본능에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은 저런 동물이나 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 살았다. 생명이 있다. 할 적에 그 생명에 근원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참 생명 이라는 것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밥 먹고 움직이고 다닌다고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그 말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살아있다고 하면 개나 돼지나 다를 것이 없다. 그 말이 되요.
우리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살아있는 본래의 목적 다시 말하면 내 속에 있는 그 생명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생명 이라는 걸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내 생명이 쉽게 말하면 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내 생명을 예수로 말미암아서 다시 살려주셨다. 그리고 내 생명은 영원히 사는 것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하늘나라를 누리게 된다. 이것을 기독교인들은 간단하게 다들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무식해도 우리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다 압니다. 그것이 첫째로 생명을 찾는 길입니다. 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동물입니다. 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자기 생명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죄로 말미암아서 죽었다는 것을 우리 신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살아야할 생명이 죄 때문에 죽게 되었다. 멸망 받게 되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알아도 희미하게 압니다. 그러나 예수가 왜 오셨나 예수가 무엇 때문에 죽으셨다. 예수가 왜 부활하셨나 하는 것을 깨달을 적에는 우리 죄 때문에 그러셨다.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이것 처음에는 교리나 지식으로 아는지 몰라도 날이 가고 세월이 가고 예수를 믿고 자꾸 자기 죄 때문에 싸우고 고생을 하고 죄를 이기려고 애를 쓰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생명을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예수님이다. 이렇게 믿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가 이론으로 초보적으로만 알지 성경으로 은혜로 깊이 생각하지를 않으니까 우리 생활들이 힘이 없어지는 겁니다. 살아있지만 산 사람같이 살지를 않고 송장같이 사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다고 그래도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동을 하고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생명은 영원한 것인데 이게 죄로 말미암아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예수님이 내 죄의 문제 때문에 죽으셔서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하는 것 이거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걸 체험한 사람들은 드물어요. 체험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습니다. 전 생애를 내 생애를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예수만을 위해서 사는 그런 인간이 되는 그것이 산 사람이지요. 그것이 참 생명의 가치를 회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아까 읽은 요한 1서에는 그것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까 제가 읽어 드릴 적에 다 이해하시는 분들은 이해 하셨을 거예요. 그러나 여기가지 이야기하고 다시 한 번 거기를 듬성듬성 읽어봅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그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그래도 신학자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을 안 사람만이 하나님을 안다. 왜 그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하면 사랑 덩어리야. 사랑이야. 사랑의 근원이고 전부가 사랑이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요? 여기 가서 뭐 걸리는 것 없습니까?
아마 오늘 8백만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보는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서, 이 대목에 걸리지 않은 신자라면 8백만은 다 합격 한 거야. 구원 얻습니다. 구원 얻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습니다. 아까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생명이 죽게 된 것을 외아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다시 되살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나타났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죽게 된 생명을 위해서 자기 외아들을 제물로 희생시키신 것 신구약 성경은 전부 그걸 가르치고 있거든요.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걸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 예수를 통해서 분명히 나타났는데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고 알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았느냐? 사도요한은 그걸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 처음에 보면 우리가 그것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랬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내 영으로 깨닫고 그렇게 했느냐? 이것이 지금 문제에요. 그렇다면 거기는 이런 설교도 필요 없고 설명이 필요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무엇이든지 여기 화로불이 있는 것을 뜨거운 것을 내가 손으로 만져봐서 불이 뜨거우면 누가 화로불이 뜨겁다고 말해주지 않아도 되요. 가르쳐줄 필요가 없어요. 또 내가 말로 이론으로 이러고, 저러고 할 필요가 없어. 뜨거운 거야 알았어. 벌써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았다면 깨달았다면 맛보았다면 그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야. 신구약 성경을 다 읽을 필요도 없는 거야. 그렇지 않아요? 그것에 대한 설명이지 전부가, 그러니까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 말이 그래서 나온 거 아니에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 정말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 나타났느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거기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요. 교회에서도 그러고 설교에서도 그러고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또 그렇게 성녀 전들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자꾸 하라고 그랬지요. 억지로라도 제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그것은 왜 그런가 하니 그 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극제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 난 인간이 자자손손이 피 줄거리 살 줄거리에 음란과 정욕으로 절고 마귀의 소리만 듣던 인간 속에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사랑이 있다면 개돼지가 사랑하는 동물 사랑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죄를 안 지었지.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조금 어려운 말로하면 에로스니 필레오니 그런 것들이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말하는 것이라. 그 말이에요.
사도요한은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거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들에게서 무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지금 그것을 말해요. 그 신적 사랑이 빛이고 생명 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그런다. 그 말 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걸 여기 설명하고 있지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인간들이 전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았소?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했지요. 그리고 캄캄한 죄 가운데 있으니까 짐승의 사랑으로 서로 음란이나 하고 죽이고 미워하고 그것이 인간의 타락상이라고 로마서에는 가르치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사랑 사랑하는 그대들은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셨다.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거 아주 기독교의 골자이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한다. 이것은 그 가장 많이 외우는 요한복음 3장 16 절이라든지 요한1서 3장 1절이라든지 이것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또 보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그것을 여기 말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가서 걸려요. 대개, 그래 이치로 봐서는 하나님이 이제 우리 신자들을 말이에요. 불신자는 그거 다 무슨 헛소리냐? 그러지요. 그래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것을 알지 않아요? 예수님이 오신 것 나를 위해 죽으신 것 그런데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 가서 결려요. 전부 기독교인들이 백이면 아흔아홉은 여기 가서 걸립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을 깨달으려면 우리들이 서로 사랑을 해야 깨달아지는 것으로 되어있어. 성경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그런데 이 형제들 간에 사랑하는 것 이것이 어렵거든요. 이 이기주의 때문에 사욕 때문에 정욕 때문에 넘치락쳐치락 하고 미워했다가 끌어 잡아 다녔다가 걷어찼다가 마치 그 변덕이 많은 어머니가 갓난 애기를 그냥 예쁘면 막 보듬어 안고 씹어 먹으려고 그래. 제 자식을 그냥 막 심지어 깨뭅니다. 어떤 여자는 변태 적이지요. 그러다가도 또 미우면 이놈의 새끼 죽인다고 막 들이패고 그러거든. 꼭 그래 우리 인간들의 사랑이라는 것은 늘 넘쳤다가 쳐졌다가 미워했다가 끌어 잡아 다녔다가 정말 사랑이 뭔지 몰라서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인격적 사랑은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겠느냐? 여기 그것이 걸린다. 그 말이야.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형제끼리 사랑하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그럼 그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정말 아는 사람이 아니야. 지식으로만 알았지, 교리로만 알았지,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형제끼리의 사랑이 제대로 된다. 그 말이에요. 어떤 사람?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고 끝끝내 참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런 사랑을 실천할거야.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거든. 그것을 말하려고 그런다. 여기 지금 사도요한이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랑을 말하는 것이야. 너희들에게 있는 그런 되먹지 못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한 사랑을 말하는 거야.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참으로 알지 못했다. 그런 말이지요. 그런 뜻도 있어요. 물론 모세라든지 아브라함이든지 모두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지요. 믿었지만 예수 같지는 않았지요.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지요. 예수와 같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그 안에 이렇게 완전한 일치는 못 봤지요.
그러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그들도 아직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미완성이야. 완전한 사랑, 그런데 지금 여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완전한 사랑을 지금 말하려고 그래요. 사도요한이, 그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뭐야? 그리스도의 사랑 신적사랑 완전한 사랑 우리가 그 완전한 사랑을 소유한다면 내가 그 예수님과 같은 그런 심령으로 형제를 사랑 할 수 있다면 그 말이에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말을 너무 쉽게 생각들을 해.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서로 미워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겠소? 이것이 오늘 한국 기독교가 걸리는 대목 아니요? 오늘 이렇게 수백만 명이 모여서 예배를 보지만 서로 미워한다던지 시기한다던지 그러고들 그것 회개하지 않고 형제들 간에 앉아서 예배 본다면 그거 무슨 소용이 있어요? 너희가 내 마당을 밟으니 내가 괴롭다고 하나님이 도리어 괴로워하시지. 여기도 그렇지요? 여러분들 사이에서 사랑이 없고 그리고 서로 미워한다든지 멸시 한다든지 교만한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여기 앉아있으면 이게 무슨 유익이 있어? 하나님이 보기에 여기 뭐라고 그랬지요? 가증이 여기는 바라. 너희들이 그렇게 모여 앉아서 예배 본다는 것 그것이 도리어 내게 가증스럽다. 이거 참 두려운 일 아니에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 된다고 여기 아주 기독교의 참 큰 문제가 여기 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 되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거 아주 빤한 이야기 아니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큰 문제인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 고린도전서에 강조한 것을 보면 아주 굉장하게 그 사랑을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걸 많이 외우시지만 거의 잊어버려요.
이상해요. 보시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오늘 모두 이적을 행한다고 하고 방언을 한다고 떠드는데 내가 인간의 말을 다 알 수 있고 천사의 말을 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괭가리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굉장하지 않아? 그렇지요? 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신학박사가 되고 철학박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주 웅변으로 설교를 잘하고 뭐 별짓 다하고 한 번에 여의도에 가서 백만 명 이백만 명이 모였다고 해도 그 말이에요. 굉장히, 또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이라고 그랬어. 산을 옮길만한 믿음, 여기는 이걸 설명을 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생략하지요. 또 여러 번 설명을 했고 완전한 믿음이 사랑이 없을 수 있느냐? 그러겠지요? 그러나 여기는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랬어. 이거 큰 문제야. 지금 여의도 광장에 가서 백만 명이 모여서 굉장히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를 하고 아주 참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야단이 나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그 말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저도 그래요. 저도 아는 척하고 말을 하고 어째고 저째고 하지만 지금 내 심령 한 복판에 내 양심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괜히 떠들어 대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고 그 말이야. 모두 왔다 갔다 하고 아무리 여기 불구자 수용소를 해서 수천 명을 사람을 모아놓고 잠들을 안자고 밥을 해먹이고 모두 물리고 머리 끌려가면서 그래가면서 그 사람들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히고 약을 먹이고 그래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 말이에요.
어때요? 사랑 없이 그런 것 할 수 있소? 할 수 있고말고, 할 수 있고말고. 이거 보시오. 전쟁에 나가서 군인들이 죽지요? 용감하게 죽습니다. 막 폭탄을 가지고 탱크 밑으로 뛰어 들어가기도 하고 용감하게 사랑 없이 그런 것 할 수 있어요. 물론 내 나라를 사랑하고 내 동족을 사랑하고 어찌 던지 동족을 살리자. 그래서 그렇게 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 없이도 그렇게 할 수가 있어 공산주의자 보시오 빨갱이들 무정부주의자들 아주 죽는 것 같은 거 우습게 여겨요. 자기목숨 내 던지는 것 사랑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그래 우리가 일상생활에 무슨 행실을 하던지 어디를 가든지 오든지 항상 이거 머리에 둬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 어른은 우리가 많이 알지요. 어디 심방을 갔다가 누구네 집 대문간에 가서 서 있다가 내 마음에 지금 사랑이 있나없나? 내가 지금 찾아보려고 하는 이 사람하고 사랑이 통하나 안통하나 봐서 사랑이 없으면 도로 가버리셨다고 그래요. 그 쓸데없는 일이지요. 그 사람 속이는 것이고 그 사람 집에 가서 밥이나 한 그릇 축내 버리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랑 없이 왔다갔다, 왔다갔다하지 않소? 별짓거리 다 하지 않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그런데 그 다음에 보시오. 내가 비록 내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해도 오늘 가령 정주영 씨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요새 백억 천억은 우습디다. 마는 내 재산이 백억이나 되는 것을 다 여기다 바쳤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소용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다 쓰레기지 돈 백억이나 천억이 뭐 하나님 보시기에 장할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심지어 내가 누구를 구제한다고 그 다음에 보면 더한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내가 남을 위해서 불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불속에 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불속에 뛰어 들어 가서 건져낸다 하더라도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저 사람을 살리려다가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렇게 굉장하게 말을 하고 있어요.
거기까지만 우선 그렇게 그 사랑을 말하는 거지요. 여기 요한 1서에 설명하는 사랑은 그 사랑을 말하는 거야. 아까 그 요한 1서 4장, 거기는 또 계속해서 봅시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사랑 그런 사랑을 할 적에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고 내 인격이 완성되고 거기 가서 내 생명이 이제 영생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걸 여기 말하고 있는 거야. 그것이 참 생명이야. 거기에 빛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도 사실은 성령님도 사랑이시라고 그랬지요.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이런 것을 밝히 알려주고 우리 마음가운데 가려있던 먼지 티끌 흑암을 쫓아내는 것이 성령님 이지요. 직접으로는 성령님이 우리 영혼 안에서 네가 지금 사랑을 말한다면 네 속에 사랑이 없다. 그런 것을 양심에다가 깨우쳐 주는 것도 성령님이야. 네가 지금 사랑 한다고 하지만 네사랑은 불순하다. 네사랑은 더럽다. 그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도 성신님이야. 없다는 것도 있다는 것 도 좋지 않다는 것도 전부 가르쳐 주는 것은 성신님이거든요.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여기 이건 예수를 그냥 그리스도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인정한다 하는 그 뜻이 담겨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안다. 이거 보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또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 할 적에 또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이렇게 될 적에 그걸 하나님과 같이 하는 생활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처럼 살아야한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거와 같이 너희들도 모두 하나가 돼서 우리 안에 있어라. 하는 것이 그걸 가르치는 거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국 기독교는 이것을 이루어야 되요. 그래야 세상을 이기고 하나가 되는 거야. 거기는 뭐 구교니 신교니 감리교니 장로교니 전혀 그런 것이 상관이 없어. 그리스도의 사랑뿐이야. 그리스도의 사랑뿐이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야. 그 다음에 그런 것을 가지고 말을 했어. 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들 안에서 완성 됩니다. 곧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어요? 인제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 있다. 또 그 고린도전서 13장에 그 다음에 아까 상반을 읽었는데 또 하반이 거기서 이루어지는 거야. 그때 가서 이루어져.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 다음에 보면 사랑은 그 전 성경에는 오래참고 그랬는데 여기는 참아줍니다. 또 사랑은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것이 사랑이 완성 될 때 이렇게 되는 거야. 무례하지 않고 사심을 품지 않고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고 앙심을 품지 않고 악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보고 기뻐하는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 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17절 하반 절이에요. 이제 이 대목들을 참 우리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판 우려하는 심판이 닥쳐오는데 막 우겨 쌈을 당하는데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 몰아요. 우리들이 마음에 죄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의식하던지 의식하지 못하던지 심판이라는 큰 흑암이 우리를 둘러싸고 저는 어제 밤에 잠이 중간에 깨어가지고 재미있는 영화를 봤어요.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뭐예요?
심판 날이에요. 그 성경에 심판도 뜻을 했습디다. 뜻을 했는데 왜 그런가 하니 찬송이 나오니까 끝에 가서 이 원자전쟁이 이제 이런 마지막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더라니까요. 사람들이 원자탄을 엄청나게 만들어 가지고 결국은 스위치를 눌러가지고 다 폭파시켜 버린 그 뒤의 이야기야. 그러니까 온 지구에 사람이 다 죽어버렸어. 없어져버렸어. 그리고 어떻게 호주는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있습디다. 그런데 미국 잠수함 바다 속으로 기어 다니는 군함이 하나 남아가지고 그것이 인제 돌아다니면서 어디가면 원자 진 방사진이라고 그러지요? 그것이 없는 데가 있나? 그래서 태평양 한 가운데쯤 와서 그 잠수함이 이렇게 잠망경을 내놓아가지고는 솟아가지고 거기 쥬리아라나 과학자가 하나 타고 있습디다. 그것만 계산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계산해보면 여기 안 되겠다고 여기 나가면 죽는다고 그럼 다시 들어가야지, 다시 들어가서 이번에는 저 베아린 해역으로 가드구만 거기는 아주 북극 가까운 데입니다. 거기 가서 재보니까 여기는 열이 더 많다고 못쓰겠다고 또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래가지고 지구덩어리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야. 그것도 원자 잠수함이지. 원자력을 가지고 그래가지고 빙글빙글 도는데 영 발견을 못해. 그 사람 살 곳이 없어져 버렸어. 그 날이 오면,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아이고 차라리 이러는 것 보다 내 고향에 가서 죽겠다고 샌프란치스코인가 그곳 사람인 모양이야. 미국 가서 있는 동안에 몰래 잠수함에서 도망을 쳐서 헤엄을 쳐서 나가버렸어. 암만 그 함장이 불러도 오라고 거기 나가면 넌 죽는다고 불러도 나 죽어도 내 고향에서 죽겠다고 부두 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더구만, 그래 그 함장이 과학자한테 물어봐. 저 사람 며칠이나 더 살겠느냐고? 잘하면 닷새나 일주일 산다고 그래. 저 사람이 뭐든지 배가고프면 주워 먹을 거라고 빵조각이나 주워 먹으면 이틀밖에 못산다고 그렇게 되어버려. 그래가지고 그 동료가운데 한사람이 병이 걸리더구만 그러니까 낫는다고 말로 위로를 해. 그러고 과학자하고 함장하고 뒤에 가서 저 사람도 걸렸다고 이제 걸리기만 하면 죽어버려. 사람이 남을 것이 있어? 이게 누구 이야기에요? 우리야. 우리가 받아놓은 밥상이라니까, 인류가 전부 죽게 생겼어. 이거 틀림없이 이렇게 되는 거야. 내 예언이 아니예요. 전부 그렇게 될 거야.
그런데 지금 요새 신문에 더러 나는데 자꾸 이 원자탄 핵폭발 시험을 하고 있지 않아? 공중에 지금 많이 있거든. 그것이 사람에게 닿기만 하면 병신이 되던지 죽는데 이렇게 비가 안 올 때는 꽉 차 있다가 비가 오면 빗물이 그놈을 가지고 내려와요. 그래 비를 맞으면 병신이 된다는 거야. 지금은 좀 덜하지 실험을 삼가고 조심들을 하니까 함부로 하면 윽박지르고 야단을 하니까 그래서 지금 일본 이런데서 반핵운동을 일으키고 데모들을 하고 야단 아니요? 원자탄을 없애버려라. 이렇게, 그러나 없애버리기는 끄떡도 없지 않아? 없애버리기는 더 만드는데, 지금 그 심판을 여기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지금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은 모르는 것이 다행이요. 지금 이것을 아주 원자력에 대한 원자공포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과학자들은 전부 지금 노이로제에 걸려있어 신경쇠약이야. 이걸 어떻게 하나? 잘 모르면 이렇게 밥 먹고 똥 싸고 그러고 살지 이것을 조금 알았다는 사람들은 이거 인류가 전멸을 하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잠을 안자고 그래 정신병 걸린 사람이 많아요. 과학자 말이요. 대학 교수들 박사들 세계적인 대 정치가들 이런 사람들이 원자노이로제에 걸려가지고 정신이상 생기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요. 이야기가 너무 시간이 지났는데 옆길로 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기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거야. 사실 사랑이 없으니까 원자탄이 터지는 거지요. 원이 그런데 막상 지금 온 지구 덩어리가 원자 진으로 핵폭발이 되어가지고 그냥 그 낙진으로 아주 덮여있다고 하드라도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 말이에요. 그렇지요? 사랑만 있으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사랑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또 사랑은 심판을 이긴다고 그랬지요? 사랑은 심판을 이겨. 왜 왜 그래요?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것 아니요.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을 심판 하시겠소? 그러니 사랑은 대담해지는 거지요. 마치 이 저희 아버지라 던지 이렇게 아주 큰 무서운 장수가 있다고 합시다. 그 요새 더러 나오더구만. 잼비라던지 그런 사람 보면 아주 무섭게 생겼거든요.
그런데 조그만 갓난 애기는 그 잼비가 무섭지 않거든. 몰라요. 나는 잼비의 아들이라는 건 보지 못했지만 저희 아버지가 수염이 이렇게 되고 그런 것이 많이 있어요. 옛날이야기에 보면 눈이 이렇게 찢어진 것 목자진열이라고 그러는데 조그만 갓난 애기들은 그런 걸 무서워하지 않아. 무서워하지 않고 그냥 막 수염을 잡아끌고 매달리고 웃고 그러거든요. 그것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 때문에 그래. 개도 그렇지. 주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면 뭐 몸을 막 맡겨버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우리 생각해봐야 해요.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사는 사람은 심판도 무섭지 않아.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에게 무섭지. 참 그렇게 무서울 데가 없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심판이 왜 무서울 거야?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심판을 이긴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아 이거 아주 분명한 것이고 간단한 교리 아니요? 또 우리가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가운데 사랑 안에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라야. 이것이 어찌되었든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이 정치적 방법으로 지금 세계문제 해결 못해요. 암만 한다고 덤벼보지만 안 되지요. 우리나라 국내 문제를 비롯해서 또 이 경제적 파탄이라는 것을 도저히 사람의 수단이나 방법이나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는 해결을 해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해결을 못해요. 지식으로나 과학 그 무엇가지고도 해결 못해. 그런데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아주 바늘 끝만큼이라도 사랑이 있으면 거기서는 풀어지는 거예요. 내 마음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만이라도 느끼고 깨닫고 있고 내가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거기서부터 오늘 지구덩어리위에 있는 모든 문제가 풀어져 나가는 거예요. 이걸 확신을 가져야해요. 신자들하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은 성신을 받은 사람은 이 확신 안에서 의심하지 말고 살아도 이 사랑 안에서 살고 죽어도 이 사랑 때문에 죽고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가장 긴급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열 번 말해도 백번 말해도 그렇습니다. 이 사랑은 이론이 필요가 없고 설명이 필요가 없어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해서는 이론도 필요하겠지요. 설명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을 내가 체험해야 되요. 내가 체험하는데 이렇게 말을 해도 제가 체험하지 못하면 저는 지옥가요. 여러분들 중에서 그 누구라도 그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여러분의 영이 거기에 화답만 한다면 그 분들은 영생에 들어갑니다. 거기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빛이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하나만 있으면 그 사람이 빛 노릇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빛은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은 빛이다. 하는 것이 하나에요. 빛과 생명과 사랑은 하나에요. 우리가 그것을 실천으로 우리가 그 빛 가운데 사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살아지는 거예요. 우리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 영혼이 항상 어두움가운데서 헤매게 되는 거야. 또 우리가 사랑을 살지 못하면 사랑을 맛보지 못하면 우리 생명은 살아있다 해도 죽은 거야. 그건 산 생명이 아닙니다. 죽은 생명들이에요. 우리는 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찬송 부릅시다. 38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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