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농막 설치 : 하나님의 사랑

mamuli0 2022. 1. 28. 07:29

 외부 조력 노동자 숙소 농막을 저온 저장고 옆에 설치했다. 아침 일찍 시작하여 오전에 마쳤다. 상하수도 설치와 무 말랭이 작업은 종일 이어졌다. 지연이가 외국 유학길에 오른 날이며 조국교수 부인 정경심 교수 대법원 판결 날이기도 하다. 대선 선거와 코로나 확산 설 명절로 시끄럽다.

 

 

하나님의 사랑 

1982.08.08. 정인세 원장 

 불의가 성행하고 있는 이 땅에서 저희들을 연고 없이 보호해 주시고 또 이렇게 성일을 택해서 아버님 앞에 모일 수 있는 은혜 허락해 주심을 감사 올립니다. 저희들 심히 부족한 것이 많사옵고 아버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것이 많은 인생들입니다. 이 시간에도 성령님이 임재 하셔서 불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또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셔서 이 자리가 아버님 앞에  영광이 되고 저희들 영혼도 은혜 받는 시간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형제자매들도 있는 곳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시간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늘 모이는 곳에는 어느 곳에든지 하늘나라의 무한한 복을 내려 주시고 성신이 충만하셔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을 성도들 위에 더해주시고 또 이 악착한 세상에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아버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또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위정자들 각계각층에 있는 지도자들 위에 아버님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그들이 아버님을 두려워하고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되게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이 시간 아버님께서 완전히 주장해 주시기를 바라 와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만 받들고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성경말씀은 로마서 8장에서 봅니다. 로마서 8장 31절서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거저 주시지 않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감히 고소할 자가 누구입니까? 올바르다고 인정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자리 잡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해 주시기까지 하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역경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박해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굶주림과 헐벗음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혹 위험이나 칼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끝 절까지 읽었습니다. 찬송가 하나, 

 


 너무 여러 번 이야기 했고 여러분들도 많이 들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오늘 이 시간 수양회 전 시간까지 끝마칠 예정이었기 때문에 여기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또 사실은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말씀은 파면 팔수록 더 깊은데서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어저께 생각 할 적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또 일 년 뒤가 다르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내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거지요. 얼마나 자라나고 얼마나 뻗어나느냐 하면 하나님 같이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이번에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행히 새로운 은사가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제목에 그대로 나온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렇게 제목이 나와 있지요.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도바울이 자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하냐?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 이라는 것을 지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 만일 우리도 바울사도와 같이 이런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을 통해서 내 것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어려운 세상을 거뜬히 강하게 힘 있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바울사도는 처음에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 하는 것은 30절 말씀을 받아가지고 한 말씀 이지요. 그 위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우리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이 만세전에 작정하셨다고 주장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을 예수 믿게 불러내시고 그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덮어놓고 불러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삐뚤어진 마음을 하나님과 올바르게 믿음으로 그래 자꾸 우리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우리들의 그 어그러진 마음 피곤해진 마음을 힘을 불어넣어 주어 가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지도록 그렇게 하시고 또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그 사람들을 영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면 올바르게 해서 가만히 놔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마음으로 올 바라지기만 한다면 그 많은 하늘나라 영광 그걸 그 믿음의 주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계단적으로 순서 있게 역사해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올바르게 하시고 올바른 자에게 하늘나라에서 무한한 영광을 끝없이, 끝없이 부어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가운데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그렇게 만들어 주신다. 어떻게 생각 하세요? 이러면 우리에게 무슨 부족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편이 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는데 세상에서는 돈 있는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이 자기편이 되도 막 아주 기세가 등등한데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설 수 있겠느냐? 이것이 믿는 사람이야. 믿는 사람은 바울사도는 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없는 자 같으나 풍성하다고 그랬거든요. 거꾸러뜨림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그랬어. 이것이 믿는 사람은 그래 그런 거야. 누가,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32절에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뭐 두말할거 있느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아니요? 또 하나님과 똑같은 그 몸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하나밖에 없는 그 예수님 까지도 우리에게 주실 적에 아낌없이 주셨다. 이걸 여러분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줄 적에 이렇게 줄까? 말까? 하는 것과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아도 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지 않을 적에는 받는 사람이 좀 꺼림 찍 하지요. 받기는 받아도 그러나 내가 누구를 무엇을 줄 적에 아주 마음에서부터 주고 싶어서 사랑으로 부족을 느껴가면서 엣 소, 당신 받으시오. 하면 받는 사람도 흐뭇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적에 그렇게 주신거야. 아낌없이 주셨다는 데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걸 알지요? 창세기에서부터 주시기로 약속하셨거든. 그러지 않았소? 여인의 자손으로 네가 한 짓거리로 봐서는 영원히 없애버리고 싶으나 그러나 그럴 수가 있느냐? 장차 여인의 자손이 나와서 뱀의 대가리를 빠술 사람이 날것이다. 그때부터 약속했어. 그때부터 수천 년 동안 선지자 성인들을 따라서 특별히 다윗 왕 또 이사야선지 그런 사람을 통해서 계속 예언하시지 않았소? 주겠다, 주겠다. 그렇게 예언 하시지 않았소? 그런 아들을 시기에 닥쳐서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생애는 전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오셨어. 예수님이 그러지 않았소? 내가 죽으러왔다. 섬기러 왔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사셨고 죽으신 거거든 그러면 거기 어디 하나님의 인색한 마음이 그림자가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걸 말하는 것이지요. 아낌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주셨는데 그런데,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아낌없이 주셨다는 것을 거저주시지 않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걸 말해요. 자기 독생자 예수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통째로 우리에게 주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겠느냐?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밤낮 욕구불만이야. 세상 걸레 조각 같은 것이나 밤낮 달라고 기도들을 하고 썩어빠질 육신만 위해서 기도들을 하고 그러지 않아요? 

 

 

예수님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 저는 이런 걸 느껴요. 이렇게 살림살이를 해보면서도 항상 내 마음이 닫혀져서 쪼그라졌지,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공기가 가득하듯이 은혜가 넘치겠지 무엇이든지 주실 것 아니요? 나 이거 설교 첫머리에서부터 복잡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오늘 아침에 남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예배 조금 전에, 왜 왔는가 하니 남원 예배당 요거 갑절이나 되게 처음으로 큰 예배당을 지어놨지요. 그런데 지난번에 모두 문짝마다 해서 모기장을 해놓고 그랬는데도 어제 밤에 예배를 봐보니까 꽤 모였어요. 벌써 미리 와서 그래가지고 하는데 숨이 막히겠다. 선풍기 달아달라고 광주에다 대로 나더러 선풍기 달아달라고 그래서 선풍기를 달라면 아 내일 부터인데 내일 부터인데 언제 다냐고 그러니까 남원 전기회사에서 전화만 하면 얼른 달아준다고 그럼 돈은 있느냐? 그랬지. 나는 밤낮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건 믿음이 없어. 그런 거지요. 또 아침에는 해가 동쪽에서 들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드니까 뜨거워서 모두 앉아있을 수가 없을 거라고 사람은 많고 지금 와서 어째요? 생각 안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사실은 주머니 생각하고 넘어가자, 넘어가자 빚지고 그러는 걸 남에게 손 벌리는 거 보다는 낫다. 그랬지요. 아 그런데 이렇게  소리가 안 들릴 테니 스피카를 놔야한다. 뭐 날마다 아주 굉장합니다. 처음으로 잔치를 하려니까 이렇게 그래서 나는 그래요. 말로는 그렇게 해도 하나님이 어련히 하시겠느냐? 자기 아들딸들이 데어죽이시던지 얼려 죽이시던지 알아서 하라고 그럴 거 아니요? 하나님이 그까짓 거 그냥 막 얼음비라도 오시게 하면 얼어 죽을 것이고 말이야.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되어가면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죽 되어가. 그런데 이걸 우리가 사람이 걱정을 하려면 끝이 없는 거야.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느냐? 필요하면 다 주실 텐데 그러면 인제 반대로 생각할 것이 있어. 안주시면 참아야지. 뭐 필요 없으니까 안주시는 거니까 그러지 않소? 만일 이거 선풍기 이야기가 여기 꼭 맞는지 몰라. 너무 천박한 예를 들어 미안합니다. 선풍기 필요하면 오늘 밤이나 내일이라도 탁 달아놓으실 거고 하나님이 성사시킨 다니까 그리고 선풍기가 필요 없으면 아 그대로 참고 지내는 거야. 아마 필요 없으니까 모든 삶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신앙생활이야. 밥도 입에 들어오면 먹고 안 들어오면 굶고 아무소리 말고 그러고 사는 거야. 무엇을 아끼시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가 전부 그렇게 되어있어. 그것이 신앙생활이야. 신앙생활은 그렇게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동해서 선을 이룬다는 게 그런 뜻이 있어. 굶기는 것도 필요하니까 굶기시는 거야. 문둥병도 필요하면 문둥병을 주셔. 다미엔 에게 문둥병을 주시듯이 이 선생이 폐병을 필요하니까 폐병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폐병 환자에게 혜택이 많이 갔거든. 사실은 그래 필요하면 우리는 순종하는 것뿐이야. 성경에는 대문간에 있던 거지가 고름이 질질 흐르고 등허리가 다 들어난 옷을 입고 그 월동을 하고 그런 사람이지만 그 상태로서 마음에 천국을 이루고 살지를 않았소? 그것이 18년이나 진리를 추구하던 신학박사를 회개시켰거든. 필요하니까 그렇게 사람이 보기에는 잔인하고 왜 그렇게 희생을 시키느냐? 그러지 그러나 영원한 하늘나라로 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한 거야. 이게 믿는 것이 신앙이야. 그래 여기는 조금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을 적에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해요. 그래 예수님도 너에게 우리에게 예수님도 거저 주셨는데 무엇을 아끼겠느냐? 그런데 왜 양양거려 무엇이 못마땅해서 거저주시지 않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이걸 감히 고소할 자가 누구냐? 우리를 고소하는 게 누구요? 누가 우리를 고소 질 합디까? 누가 우리를 고소해요? 마귀가 고소하지 않았소? 마귀는 처음부터 고소하는 자거든. 그 욥을 얼마나 거꾸러뜨리려고 하나님 앞에 가서 속삭거렸소? 우리를 누가 감히 고소하겠느냐? 아무리 어떤 시험이나 환란이나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도 거저 주셨는데 그까짓 거 뭐 무서워하냐? 이 말이야. 감히 고소할 자가 누구입니까? 또 그뿐 아니지요. 올바르다고 인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단죄할 수 있겠느냐? 이것도 마귀에요. 마귀가 자꾸 우리에게 죄의식을 환기시켜 내가 죄인이다. 이 생각을 하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밤낮 죄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피 공로를 무시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거예요. 마귀는 예수님이 나 때문에 피 흘리셨다는 것을 내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잊어버리게 해. 그래야 우리가 절망에 빠지니까 그렇게 말해. 그걸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거야. 누가 우리를 단죄하겠는가? 우리는 이미 죄인이야. 또 큰 죄인이야.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와서 죽으셨는데 누가 또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할 자가 있겠느냐? 아무리 내 죄가 무등산더미같이 크더라도 겁내지 마라. 예수님이 그렇게 와서 죽으셨으니까 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 하시겠습니까? 이제 심판주로 오실 걸 이야기해요.  예수님은 이제 심판주로 오시거든. 그때 우리를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다. 우리를 단죄 안 하신다.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하라. 또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도 우리 신앙에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맨 먼저 본 사람이 누구지요? 누가 맨 먼저 봤습니까? 성경 상으로 스데반이지요?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자 봐라. 거기는 앉았다. 그러지 않았어요? 여기는 서있다. 그랬지?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이 보인다. 그랬지? 그러면 그렇게 그래서 전설에서는 그래요.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고 얼마나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래서 환영을 하느라고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고 전설에는 그래요. 어찌되었던지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고 이거는 또 여러분들 많이 들으신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것을 24시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드물어. 지금도 나를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다. 하는 걸 생각하고 사는 사람 드물지요. 여러분 중에는 그런 이가 계시기를 바랍니다만 대신 기도해 주시기까지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것이 이제 오늘 읽은 말씀에 중심 되는 거지요. 35절 이하 그런데 그 말이야.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그것이 전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그걸 말하면서 여기 이 말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에요.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말이야.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 그거지요. 말 할 수없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 또 요한1서 3장 첫머리에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나? 그 어떠한 사랑 또 에베소서에 보면 그 큰사랑 큰사랑이라는 말을 잘 썼지요. 그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셔 그런데 그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겠느냐? 마귀가 떼어놓겠느냐? 그러면서 이제 그 아래 강조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 여기 몇 가지 예를 들었어요. 환난이, 환난이라는 것은 내적 환난은 육신의 병이나 생활고 이런 거 또 외적 환난이라는 건 핍박 감옥에 갇히고 두들겨 맞고 바울사도가 많이 당했듯이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나의 맺어진 사랑의 줄이 끊어질 수 있겠느냐? 어떤 종류의 환난이라도 또 역경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역경이 많이 부닥치거든요. 생활고에 대한 역경에 가정에 대한 역경 경제적인 역경 그 역경이라는 것은 이렇게 물이 순탄스럽게 흘러가듯이 가던 인생이 별안간에 탁 멈추던지 물이 거꾸로 거슬러가게 만들던지 그것이 역경 아닙니까? 그런 일이 수없이 생기는데 여기는 신앙적인 입장에서 영적인 동기를 말하는 거예요. 주로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혹시 그런 어려움에 부닥쳤다. 해도 또 이거 사탄의 시험과 유혹 이지요. 그런 것이 약간 좀 부닥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을 수 있겠느냐? 역경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거나 끓어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 말 아닙니까? 또 박해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물론 지역적으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나라도 있고 또 그런 것도 있지요. 특별히 공산진영 안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지요. 그러나 그런 박해가 있다고 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줄 아느냐?  그럼 우리가 보고 듣는 거와 같지요.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박해가 없는 데서는 우리 믿음이 약하지만 육이오 때나 왜정 때도 그랬지요. 또 이북이나 중공 안에서나 소련 안에 있는 신자들의 신앙은 더 무섭거든요. 아주 뭐 그 사람들 초창기에도 그랬지요? 여러분이 대원군 시대에 기독교가 그때는 카토릭 이었지만 주로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때는 참 예수 믿기 어렵지요. 예수만 믿으면 잡혀죽으니까 죽을 각오하고 믿지 않아요? 박해가, 박해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있겠느냐? 안 된다. 못 끊는다. 또 굶주림이 또 헐벗음이 그러냐? 이것도 여러분들 중에서 경험한 이들은 잘 알거예요. 이상하게도요. 배부를 적에는 예수가 안 믿어집니다. 솔직한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 하시오? 그래도 어느 정도 배가 불러야 예수도 믿지, 너무 배고프면 이번에 남원에서 집회를 하는데 자꾸 닷새 동안 금식을 시켜버리자고 아 그거 밥도 안 짓고 좋지 않소? 더운데 말이야. 또 먹느라고 애도 쓰지 않고 그래서 억지로는 안 된다고 왜 그런 고 하니 금식을 억지로 시키면 율법도 되거니와 약한 사람은 그냥 배가 고파서 말이 귀에 들어와야지. 배창자만 생각할거 아니요?  그렇게 하지 말자고 그러기는 했어. 그러나 원은요, 금식하지 말라고 그래도 정말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밥을 잊어버립니다. 그런 예화 많지 않소? 프란치스가 제자들에게 금식 금식이라는 건 은혜로 되어져야해. 은혜로 되어져야 하는데 이 기회에 한마디 하고 꼭 넘어가야겠어요. 정말 금식은 사랑으로 되어야 되요. 정말 금식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 영혼 가운데 사랑이 불이 붙을 때는 밥 먹는걸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는 그런데는 굶주린다는 것이 소용이 없어요. 그런 예화 많지 않소? 막 기독교 핍박이 일어났을 때는 밥을 막 굶기는 일 많이 했거든요. 저 옥중의 그리스도라는 책을 보면 그런 대목이 나와요. 소련 안에서 기독교인들을 가뒀지요. 그래가지고 막 굶기는데 이상스럽게 기독교인들은 굶으면 굶을수록, 굶을수록 신앙이 더 날카로워져요. 그래서 이 이야기도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그 굶는 목사가 하나 있었지요. 옥중에서 그런데 신자가 넣어줬는지 누가 넣어줬는지 각설탕을 넣어주지 않았소? 그러니 그 아주 몸이 피곤할 때는 달콤한 것이 혀 바닥에 대는 것 같이 참 좋은 것 없거든요. 그렇게 배가 고프고 피곤한 마음에 자기 혀에 먼저 댈 거 아니요? 그러나 그때에 목사는 곁에 있는 사람이 보여 져. 곁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피곤하고 배고플까? 그래 자기 배고픈 건 잊어버려.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리고 참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각설탕을 옆 사람에게 주지 않소? 아주 극도로 쇄약하고 배고픈데 자기는 잊어버려. 그래 사랑이라는 건 배고픈 걸 잊어버려. 그런 예는 많아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를 때도 그러지 않소? 나도 어머니 밑에서 그러고 자랐는데 우리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은 자기 입에 넣는 것을 내가 보지 못했어요. 그냥 아껴뒀다가 기어이 나 같은 놈을 먹이려고 어째서 어머니 코에는 맛있는 냄새가 안 나고 왜 배고픈 마음이 없겠소?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목사가 옆에 있는 죄수에게 각설탕을 주었는데 그걸 받은 사람이 또 생각을 했지. 저이가 이게 얼마나 먹고 싶을 텐데 어째서 자기가 먼저 입에다 넣지를 않고 나를 줬을까? 그래 곰곰이 그 사람도 먹을 텐데 원체 그 감화가 크니까 자기 마음에 크니까 먹을 것도 잊어버렸어. 그래 사랑이라는 것은 큰 역사를 일으키는 거야. 그리고서 들고 서 있다가 또 옆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이 더 비참해 보이거든. 사랑은요, 자기 비참은 안 보이는 거야. 그래 저 사람의 비참함만 자기 아픈 것은 생각이 안 나고 저 사람의 아픈 것만 생각나는 게 사랑의 본질이야. 예수님의 사랑 그래 또 곁에 있는 사람 사탕 한 톨이 감방 안을 돌아다녔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거든. 이사람 주면 생각하다 저 사람주고 또 요사람 주면 생각 하다가 요리주고, 요리주고 그런 거야.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할 적에 굶주림 이라든지 헐벗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 아니야 더 가깝게 하는 거야. 가깝게 해 예수님과 우리 관계를 더 아주 긴밀하게 강하게 그렇게 연결시키는 거야. 또 그뿐이냐? 위험이나 칼이 그럴 수 있겠느냐? 이 이상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러고 이제 그 다음에 시편 44편에 있는 말씀을 했지요. 우리는 종일토록, 종일토록 주님을 위해서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보통 말하는 사랑을 위해서 살고 사랑을 위해서 죽는다는 거지요. 그래서 종일 주님을 위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활, 왜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그냥 그런 고생을 하냐? 사랑 때문에 그러지 않소? 바울사도는 그걸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전서에서도 후서에서도 강조하고 있어요. 사랑 때문에 그런다. 사랑 때문에 아 세상도 그러지 않아요? 뭐 쉽게 말하면 부모들이 자기도 먹기 위해 그러지만 왜 그렇게 고생들을 하는가? 자식들 벌어 먹이려고 그러는 것 아니요? 자식들 벌어 먹이려고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느냐?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 하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우리가 한 가지 조금 더 생각하고 다음 이야기를 합시다. 만일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정치는 얼마나 잘 되겠소? 그렇지요?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들이 모든 (끊김)

 


그런데 사실은, 사실은 정치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줬어. 이것도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한 건데 채근담이라는 책에 보면 벼슬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적이라. 이 관리들이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면 전부 도둑놈 들이다. 얼마나 적절한  말이요? 그러니까 그 말은 이 관리들도 대통령으로부터 이 면서기 동장으로부터 동 서기까지가 전부 사랑으로 해야 한다. 그 말이야. 아 그러면 나라가 얼마나 잘 되겠소? 참 잘되지 않겠소? 그렇지요? 또 교육도 그래 학교 선생들이 전부 사랑으로 하려고 애들 써, 그러나 사실은 그냥 선생이 학생들을 단순히 사랑한다. 그것만이 아니야. 원 교육이라는 것은 수학과목에도 사회생활 과목에도 영어 과목에도 전부 사랑으로 하라는 거야. 그건 페스탈로치가 말했어. 대 교육가 페스탈로치는 어떤 학과목이던지 사랑이 침투되어 있지 않는 것은 인생과 상관이 없다. 아주 유명한 말이야. 학교 선생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는가? 그럼 교육에도 사랑이야. 음식에 소금이 빠지면 맛이 없듯이 교육에도 사랑이 빠지면 교육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지금 사랑이 없는 교육들을 하니까 요 꼬락서니야. 우습거든.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러면 교육과 정치만 그러냐? 아니에요. 지금 이 짧은 시간에 내가 그거 증거 할 시간이 없어. 그렇지 뭐 산업도 경제도 문화도 과학도 전부가 사랑이 침투가 되어있어야 인생을 유익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시오. 부엌에서 또닥거리고 칼질을 하는 사람이 이 음식 먹는 놈 고꾸라져 죽어라. 그러고 칼질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러면 그 앓으라는 말이냐? 그럴 거야. 밥상을 두고 고꾸라져 죽을 수도 없고 앓으라고 그럴 거야. 그러나 도마질을 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할 적에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살이 찌도록 하는 거야. 그렇지요? 사랑으로 해야 되요. 빨래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할 적에 옷 입는 사람이 그러면 막상 이렇게 보통 이거 뭐에요? 동정이라고 그러나 섭이라고 그러나? 이것이 거꾸로 달려있어도 괜찮은 거야. 사랑으로 해준다면 그렇게 되요. 어찌되었든지 만사에 그런 거야. 지금 여기는 그걸 말하는 거예요. 여기는 지금 그것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이것을 이 공급원 이 사랑이라는 공급원이 누구냐? 하면 예수야.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온 사랑만이 그런 성격을 띠고 있지 절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인간들의 사랑이라는 건 전부 상대적이고 타산적이야. 자기에게 이속이 있을 적에는 사랑을 해. 그러나 자기에게 불리하면 사랑이 뭐냐? 하고 막 던져버려. 또 그렇게 이속을 꼭 따지지 않더라도 인간들의 사랑은 아주 변하기 쉽고 천박하고 항상 그렇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아주 불공평하고 편협하지. 자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몽땅 쏟으려고 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뭐 이런 증오하고 이렇게 되지.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랑이 아니야.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사랑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그걸 이제 조금 설명한데가 에베소서에 첫머리에 나오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기도에 이런 말이 있지요.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건 성도들이 이건 지금 사도바울의 기도에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또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야. 감정 기분이 좋을 때는 사랑하는 것 같아 자기 자식도  조금만 귀찮고 미우면 막 이놈의 새끼 죽어버리라고 두드려 패요. 그건 감정적 사랑이야. 

 

 

그런데 그런 사랑이 아니거든. 그래서 그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높고 넓고 길고 깊은지를 알게 돼. 그걸 알아. 그런데 여기서 지금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 다음을 가봅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낸다. 배고픔도 헐벗음도 굶주림도 핍박도 환난도 다 이겨낸다는 거지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것도 다 이겨낸다. 그리고 나는 확신합니다. 이제 그 절대적인 사랑은요,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 한다. 천사들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은 끊지 못한다. 이 세상 가장 강한 권세라든지 그 무엇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을 끊지 못한다. 이것이 기독교야. 이것이 믿는 사람이고 그런데 어쩝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또 믿어요. 또 체험 했습니까? 이걸, 이걸 알 적에는 죽는 것도 무섭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무섭지 않고 칼도 무섭지 않고 그 말 아니요? 칼이나 그 무엇이 아무 권세라도 그런데 여기 그 사도바울이 말할 적에 무질서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크게 쪼개면 한 대여섯 가지로 쪼개는데 거기 보면 죽음도 이랬지요? 이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모든 권세를 전부 집합한 것이고 죄의 결과지요. 그러면 아무것도  죽음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를 못한다. 그건 순교자들의 생에서 우리가 많이 봤지요? 뭐 순교자들이 기쁘게 죽었지 억지로 죽은 사람 있습니까? 그러니까 죽음도 무섭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들이 죽음도 무섭지 않으면 세상에서 무엇이 무섭겠소? 죽음도 무섭지 않으니 히브리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그랬거든요. 죽는 것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죄를 떠나지 못한다. 죽음만 무섭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우리는 해 낼 수 있지 않소? 도 여기는 생명도 라고 말을 했는데 생명에서 이 생명 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거야. 영원한 생명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줄에 이렇게 매여달린 사람은 그 아무것도 끊을 수 없어요. 못 끊어 죽음도 못 끊지만 무엇이든지 못 끊어요. 그걸 일일이 바울사도는 생각하면서 여기를 섬기는 거야. 막 내키는 대로 이렇게 말씀을 한 게 아니야. 그런데 여기를 보면 현재도 또 미래도 그런 말을 했지요? 현재 시간적으로 현재의 나를 가르친 것이고 아무것도 그러니까 여기 있는 것을 종합으로 보면 공간적으로 아무것도 시간적인 그 아무것도 정신적인 아무것도 물질적인 아무것도 이렇게 말해요. 그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 여기를 자꾸 읽어봐야 합니다. 이 대목을 읽어보고 명상을 해야 돼. 자기 속에다가 새겨야 합니다. 이제 그렇게 될 적에 우리 생활이 확고히 서게 되요. 그리고 신앙하고 사랑이 곁들여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역사를 일으킬 적에 그때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완전히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칠 수 있는 순교자적인 생활이 나와요. 순교자적인 생활이 자기 생애를 전부 주님을 위해서 내 마음도 바치고 몸도 바치고 내 전부를 바치는데 그까짓 거 돈 몇 푼이 아깝겠습니까? 조금 주님의 일 한다고 모두 피곤하다. 소리를 하고 그러고 엄살들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못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아무것도 예수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사도는 결론을 짓고 있지 않습니까? 끝머리에 끝 절만 우리 보십시다. 39절이지요.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것도 피조물도 그러니까 하나님 외에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깨닫는 것이 문제야. 그 또 성경에도 보면 그 요한1서 같은데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는 걸 이론으로 들은 잘 알아요. 이론은 잘 아는데 가령 여기 이 대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이건 요한1서 3장에 있는 말씀이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거 잘 알지요? 이것으로,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사랑을 몰랐다. 이 말이 되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예수가 나 위해서 죽으신 그것을 통해서 깨달은 사람만이 참 사랑이야. 그거 외에 사랑은 동물적인 사랑 인간적인 사랑 더러운 사랑이지 그래서 이것으로 우리가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말 아니요?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랑만이 우리를 깊음도 높음도 현재도 미래도 그 아무것에서 떼어놓지 못한다. 그런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깨달은 사랑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우리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사랑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돼.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처럼 나도 형제를 위해서 죽는다. 그걸 말하고 있지 않아? 그걸 이야기를 죽 요한 1서에 해 나오다가 4장에 가보면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16절 하반 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이제 그렇게 그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안에 있어 예수님의 그 절대적인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셔. 그래 심판도 무섭지 않다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 안에 있어 또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 이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 우리 양심에 내 피 줄거리 속에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를 검토해봐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없으면 우리 안에는 마귀가 있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없는 거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밖에 있는 거야.

 

 

 지금 암만 여기서 예배를 보고 있고 암만 성경을 이렇게 저도 그래요. 이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호흡에 흐르고 있고 내 피 줄거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지금 말하는 것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아무것도 아니야. 여러분이 암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어도 또 내가 만일 사랑을 퍼서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다면 바가지에 물 퍼서 여러분의 입에다 부어주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이 직접 받아서 마실 수 있어. 그래서 여러분의 혈관을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가야지.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계시다고 말했어.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있게 됐어.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 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그럴 때 우리의 인격이 완성 된다고 그래서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로 인격완성 어저께 제가 학교 선생 한분하고 남원에 갔다 왔지요? 그 사범학교 교육대학을 마치고 3년째인가 선생 노릇을 했어요. 그 사람이 얼굴이 꼭 애기같이 생겼어. 애들 선생 노릇하느라고 애를 쓴다고 아이 지금도 애예요. 몇 해 째 하지? 3년째 한다고 애들을 대하니까 어떤 마음이 들어 사랑으로 대해져요. 그 참 어려운 거지요. 남의 자식을 내 자식같이 사랑하는 것 사랑 없이 하는 교육은 죄라고 그랬는데 그런데 어떻겠소? 그 이야기가 나왔어. 대체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냐? 교육의 이념이 무엇이냐? 여러 가지 교육의 이념이 많습니다. 정말 요즘 교육자들 인격 전달자 들이라고 그럽니다. 교육이라는 건 선생의 인격이 제자들에게 흘러들어가야 정말 참교육이라고 대개의 교육가들은 그럽니다. 그렇게 가르쳐. 그러면 문제가 없지. 잘 들으시오. 선생들만 들을 것이 아니야. 어머니는 자식에게 그런데 그러면 이름은 부르지 않겠어. 아무개 네 인격이 국민하교 선생인데 학생들에게 흘러들어가야 교육이 성공하는 건데 그런데 네 인격이 무엇이냐가 문제야. 자기 인격이 서야 제자에게 인격 전달을 해도 제대로 되지. 자기 인격이 서지 않은 사람이 그 도둑놈의 인격을 전달시키면 모두 도둑놈이 되게, 이것이 문제야. 지금 그렇다면 그이가 아이고,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무섭군요. 무섭지? 자기의 나쁜 것이 모두 제자들에게 가면 교육 안 시키는 게 낫지. 원 교육은 인격의 전달이지. 그러니까 여기 완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게서 나도 이렇게 말할 자격 없어요. 내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 되어야 전도자도 되는 거야. 내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 되어야 교육도 제대로 되는 거야. 쉽게 말하면 그렇지 않소?

 

 

 그걸 여기 말하고 있어요. 보시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예수처럼 살게 되는 거야.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이것인데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내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 문둥이도 이렇게 혀 바닥으로 핥아줄 수가 있고 아무리 미운사람도 토닥거리고 품어줄 수가 있고 나를 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줄수가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야. 그리스도처럼 사는 거야. 지금 바울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살게 된다고 어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때 그리스도처럼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요새 예수 재림한다고 야단들이야. 곧 온다고 광주 예수 왔다고 보러 온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 미신이요. 오늘 처음 나온 이들을 위해서 말하는데 그런 소리 곧이들으면 예수 잘못 믿어.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야. 자기 안에 사랑이 없는데 예수님이 오시면 어떻게 되겠소? 사랑도 없는 놈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시겠소? 예수님이 오셔서 또 하늘나라가 난리가 나게? 싸움들이나 하고 이년저년하고 머리 쥐어뜯고 모두 하늘나라가 큰일 나지 않겠소? 그러니까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야. 그 사람의 마음에 여기는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될 때는 심판도 무섭지 않다는 거야. 그러면 여기 바울사도가 로마서에 말하는 것과 사도요한이 요한1서에 말하는 것과 같은 뜻 아니요? 사랑은 심판을 이깁니다. 심판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 오시느냐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느냐? 사랑 안에서 살고 내가 사랑을 숨 쉬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야.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여기 지금 로마서에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랑이냐? 그런 말이지요. 무엇이든지 여기 보니까 무엇이든지 어떤 시련이든지 넉넉히 이겨냅니다. 넉넉히 다 이겨냅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도 그 아무것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어떤 것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말이지요. 예수님 안에서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고 우리 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 부릅시다. 456장 부르신 뒤에 사랑 노래도 많이 잘들 부르던데 456장 부릅시다.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어서 준행할 때는 무엇이든지 잘 되어요. 안 되는 것이 없어요. 불평도 없고 원망도 없고 삼팔선도 문제없고 알고 보면 안되는 게 없습니다. 내일부터 수양회는 시작을 하는데 미안한 것이 몇 가지 있어요.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