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장 수확 :'우리의 거울'에서

mamuli0 2024. 7. 30. 18:35

 입추가 열흘이면 온다.  말복 처서가 지나야 더위가 수그러질 것이다. 맵새들이 먹고 남은 기장을 수확했다. 아침에 들깨 모종을 내고 목포 치과에 다녀왔다.

 

 

괴악(怪惡)한 마음씨는 버리면 양심(良心)은 희생심(犧牲心)은 열열(咽咽)해질 것이다. 뜨거운 사랑 솟아날 것이다. 시기심과 미워하는 것은 사귀(邪鬼)의 마음이다. 교회(敎會)가운데 목사(牧師)들 마음가운데도 이 시기하는 마음 자기 자녀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사탄(詐誕)의 생각이다.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심판(審判)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날의 심판(審判)을 무서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첫 심판(審判)은 영(靈)과 육(肉)이 갈리는 때요, 둘째 심판(審判)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내리시심을 받을 때임이다. 에스겔 36;37, 마른 뼈들이 힘을 얻어 군대(軍隊)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마음 육체(肉體)가 심령(心靈)의 새로워짐으로 의로워 질 것을 가르치심이다. 아무 의도 행할 능력(能力)도 없고 아무 선(善)에 대한 소망도 없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움직일 때 선(善)하신 손이 움직일 때에 우리 심령(心靈)은 힘을 얻어 떨치고 일어나서 선(善)한 행실(行實)이 나올 것이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다. 듣는 자는 다 사망(死亡)에서 나와 영생(永生)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수께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실 때에 무덤 속에 있는 의인(義人)들이 나와서 부활(復活)하신 후에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천사(天使)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의(義)에 영생(永生)이 있다. 선(善)한 마음이 악독(惡毒)과시기(猜忌)와 분쟁(分爭)과 탐심(貪心)과 자기이익(自己利益)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생명(生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 남을 해하려는 마음은 짐승의 마음이다.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하여 롬7;22-29, 8 ; 1-2, 고후5;11, 롬7 ; 손은 마음을 가리킨다.

 

 

유전(遺傳) 법(法) 남편 된 예수가 죽으심으로 그의 가진 선(善)은 우리에게 상속(相續)되었다. 우리에게도 죄(罪)에 대하여 죽음이 있다. 악을 버리게 된다. 부활(復活)하셨으니 우리에게도 부활(復活)이 있다. 선善)에 상속(相續)받은 것이다. 예수 와 한 몸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을 것이다. 고생을 당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죽으신 예수를 따라가자. 의심 말고 따라가자. 저와 함께 영광(榮光)중에 나타나리라. 우리 지금 받는 고난(苦難)이 세상 죄 안 짓는 것과 오는 구원영광(救援榮光)은 족히 비교 할 수 없다. 참 생명(生命)과 기쁨은 죄에 기쁨에 비교할 수 없다. 예수를 따라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 것이다. 죄의 법 법은 죄는 아니다. 법대로 싸우지 않으면 헛수고다. 살린 이다. 시기(猜忌)함으로 될 것도 아니요, 원하고 달음질함으로 될 것도 아니다. 택한 자 곧 하나님에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 자 그 말숨을 순종(順從)하여 지켜가는 자에게 상이 있다. 사람을 외모(外貌)로 취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 있는 자는 다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다. 거듭나야 그의 심령(心靈)에 찬미(讚美)한다. 늘 기도(祈禱)할 것이다. 심령(心靈)으로 기도 하고 선한마음으로 찬송(讚頌)할 것이다. 산 마음에서 산 기도가 있을 것이요, 참 찬송(讚頌)이 있을 것이다. 신으로 기도하라. 진정(眞正)한 기도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服從)하는 기도(祈禱),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기도(祈禱),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기도(祈禱), 신으로 기도(祈禱) 할 것이다. 합리적 예배(禮拜)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 나에게 베푸시는 이를 찬송(讚頌)할 것이다. 외식이 아니요, 말만이 아니요, 소리 나는 곡조만이 아니다. 우주의 곡조에 맞추는 찬송(讚頌)이요, 우주의 공법에 합당한 기도(祈禱)이다. 사람의 생긴 것이 계란(鷄卵)과 흡사하다. 밖으로는 전부 계란(鷄卵) 껍질 같이 싸였고 성자는 마음이시고 내가 창조 때에 편수(編首)가 되셨다고 말씀하셨다. 잠언성자는 말씀하시다. 성자는 마음에 모든 경륜(經綸)이시요 경륜(經綸)의 통변이 되신다. 성부 와 성자와 성신은 하나님이시다. 마음속에 속에 내라고 하는 것을 내라고 하는 것을 죽여 벼려야 함 고전 14;26, 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이 넚은 우주 공정한 공법 밑에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내 뜻 내 고집 사망에 생각 내 지혜(智慧)는 아낌없이 버리자. 성자(聖子)의 뜻에 순종(順從)하자. 내 마음은 그의 성전(聖殿)이 되어 그의 경륜(經綸)을 이루시도록 비워 드릴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에 편수(編修)가 되셨다. 성자(聖子)는 말숨이시다. 성자(聖子)는 모든 말숨의 경륜(經綸)이시다. 성신(聖神)은 경륜(經綸)의 통역(通譯)이 되신다.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은 하나님이시다. 나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나라고 하는 것을 죽여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말숨만 잘 듣고 순종(順從)할 것이다. 속에 성령(聖靈)께 배울 것이다. 아담의 죄지은 나는 죽고 내속에 예수가 성령(聖靈)께 배워 나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방언을 힘쓰지 말고 통역을 할 것이다. 예언을 힘쓸 것이다. 성령(聖靈)의 뜻을 표현할 것이다. 드러날 것이다. 소리는 나나 내 안에 성령(聖靈)은 죽어 버린다. 성령(聖靈)은 죽이고 자기만 나타내면 무슨 빛이 있느냐? 매일 신사 참배(參拜)를 하고 무서운 우상숭배(偶像崇拜)를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 자기 배를 위하여 자진(自進)해서 하고 있다. 강제(强制)로 신사(神社)에 나가는 것이 크뇨? 자심(自心)이 정욕(情慾)에게 굴복(屈伏)하는 것이 더 크뇨? 내안에 생명(生命)을 위하여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생명(生命)을 위하지 않는 것이 죄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禁食)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책잡았다. 예수님은 신랑이 있을 때에는 금식(禁食)하지 안하여도 일없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예수가 계시면 금식(禁食) 안해도 좋다. 지금은 성신(聖神)으로 계시니 성신(聖神)이 내 안에 계시면 금식 안 해도 좋다는 말씀이다. 신사 참배(參拜)하라고 권하는 그 심령에도 우리주님 계신다. 그이들 다려 축지 박지 말 것이다. 옳지 않는 소리 하는 것은 죄다. 모르고 성령 근심시키나 하나님을 저주한다. 신이 아닌데다가 엎드리는 것은 성령을 엎드리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생명(生命)은 폐할 수밖에 없다. 생명(生命)이 죽어지면 에덴동산에서 어리석게 지은 죄로 종의 직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의지를 굽히는 것이 성령을 거슬리는 것이다. 의지의 주인공 마음에 경륜(經綸) 생명(生命)으로 편수(編修)되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다. 나를 죽인다. 내 욕망(慾望)을 어디까지 죽이자. 살려는 마음을 버리면 살 것이다. 오른 편 강도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알면 다시 살 것이다. 우리 남편 되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거기서 벗어 나왔다. 나를 죽여야 죄가 안 온다. 주님은 종의 직분을 온전히 끝까지 하셨다. 나를 죽여 버리면 죄와 영영이 갈려 버리고 죽었다. 다시 사신 주님이 오신다. 헛된 것이 안 죽으면 생명(生命)의 명을 어긴다. 부모(父母)와 자식(子息)이 갈리면 불효자식(不孝子息)이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갈리면 불효자식(不孝子息)이다. 시작이 어리석고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잘해나가다가 실수(失手)를 한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지 살아서는 안 된다. 점점 낮은 자리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지 내가 올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 시조가 죄(罪)를 지었다. 생명(生命)은 죄(罪)를 짓지 아니했다. 그리스도는 죄(罪)를 위하여 종과같이 순종하고 죽으셨다. 성부는 왜 성자를 보내셨는가?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구원 하시려고 보내셨다.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보내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찾으려고 보내셨다. 선한 것 상하지 않게 생전에 사망을 이루시려고 보내셨다. 죄(罪)를 위하여 보내셨다. 누구든지 제 생명(生命)을 아끼는 자는 죽고 주를 따라 죽고자 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선을 찾을 것, 마10;24, 내가 어리석어서 죄(罪)를 짓는다. 그런데 자기의 어리석은 것은 드러내지 않고 핑계를 함으로 죽는다. 뱀이 시킨 것은 뱀의 직분(職分)이다. 하나님의 형상(刑象)대로 지음을 받은 인생(人生), 하나님의 대표(代表)가 되어가지고 짐승의 말을 듣고 짐승의 핑계를 한다. 하나님을 복종(服從)하고 순종(順從)하여 짐승을 아는 자가 오히려 뱀에게 복종(服從)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끄럽고 무서워서 피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은 죄(罪)로 인해서이다. 사망은 부끄러운 것이다. 어두움은 빛을 부끄러워한다. 바알과 하나님은 원수가 아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아담이다. 짐승이 음녀(淫女)를 미워하였다. 저 사람이 꾀이는 것은 저 사람의 책임(責任)이 아니다. 꾀임 받는 나의 죄(罪)다. 꾀이는 것은 뱀의 직책(職責)이다. 남을 원망(怨望)말고 자기를 책망(責望)하고 선에 이치(理致)를 따라 행하여 진리(眞理)의 종이 되어 발악(發惡)하지 말고 죽으면 새사람이 된다. 벧전 20;18, 성자가 발악(發惡)하면 이치(理致)에 다치지 않는다. 예수께서 유다보고 친구라고 하셨다. 끝까지 친구라고 하셨다. 나를 해하려고 하는데 대하여 미워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順從)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물어야지 나대로 있으면 반칙(反則)하는 것이요, 등에다 대고 있는 것이다.

 

 

묵상(默想)과 명상(冥想)은 하나님께 나의 생각과 의지를 온전히 부합(符合)해야 하는 일이여야 한다. 신으로 하고 마음으로 할 것이다. 진정으로 간절(懇切)함으로 할 것이요. 정성(情性)되게 철저히 할 것이다. 애걸복걸(哀乞伏乞)하는 마음이여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원수(怨讐)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퇴각(退却)시켜야만 된다. 우주(宇宙)와 일치(一致)하는 사색(思索)을 붙들어야만 한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옅게 파다가는 너 죽는다. 이 담은 예수를 보내셔서 헐어버리셨다. 우리는 형제간(兄弟間)이요, 자매간(姉妹間)이다. 세상(世上)으로도 그렇고 하나님 편으로도 그렇다. 영육간(靈肉間)에 형제(兄弟) 자매간(姉妹間)이다. 욕심(慾心) 때문에 원수(怨讐)가 되었다. 휘장(揮帳)이 있다. 법(法)의 모양은 버릴 것이다. 율법(律法)의 참뜻은 너 나가 없는 것이다. 옷을 입었으니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法)의 모양뿐이다. 속에 죄(罪)가 부끄럽다. 노아는 포도원 농부가 되셨다. 아버지가 술 취하여 벗은 몸으로 누운 것을 보고 아우에게 말하였다. 동생은 뒤로 걸어가서 옷을 덮어주었다. 함은 저주를 받았다. 죄(罪)가 부끄러운 것이다. 옷은 모양뿐이다. 죄(罪) 지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휘장(揮帳)이 예수님 운명하실 때에 찢어졌다. 법(法)이 휘장(揮帳) 죄(罪)다. 육체적은 법(法)을 헐어 버린 것이다. 생명과 나 사이에 이 장해가 있다. 죄의 담이 있다. 이것 헐어버리면 생명과 나는 하나 된다. 새 생명으로 산 것이다. 법(法)을 버리면 새 생명이 나타난다. 죄 안 지으면 원수(怨讐)를 맺으려 하나 옷으로만 가리게 되고 죄(罪)를 지으면 이것이 법이다. 법에 모양만 취하여 원수(怨讐)를 맺는 것이다. 모두 옷만 입었고 남녀가 무례히 행하면 죄(罪)다. 법(法) 모양을 취하여 원수(怨讐)가 안 되려 한다. 그러나 죄(罪)지으면 원수(怨讐) 된다. 그러나 사람과 내 마음이 원수(怨讐) 되였다. 법의 모양으로 원수(怨讐) 안 지으려 하나 자식(子息)이 부모(父母) 몸둥이 보는 것은 죄 아니다. 내 몸둥이도 같다. 죄(罪)를 드러내는 것이 실수다. 옷 벗으면 세상 법은 죄라고 인정(認定)하나 마음 새롭게 하기 전에는 그 좇아 없어서는 문란(紊亂) 하니 그렇게 하여야 된다. 그러나 성경 보지 않고는 부모 자식(子息) 간에 옷 벗음을 보면 부끄럽게 여긴다. 그것이 죄(罪)다. 죄(罪)지은 후에 가죽 옷 지여 입히신 것이다. 아담 해와가 선악과 따먹고 죄(罪) 지은 후에 무화과(無花果) 나뭇잎으로 옷 지어 입었다. 사망의 열매다. 모르고 지으면 늘 근심이다. 이것이 죄(罪)된 줄 알면 안할 것이다. 결과는 죽는 일이다. 참배(參拜)안하면 왜 법은 죄(罪)를 정하는가? 마음 참배(參拜)는 하고 세상영광은 취하면서 모양만 버리려 한 까닭이다. 죄(罪) 없는 척 하는 까닭이다. 참배(參拜) 안할 수 없다. 내가 엎드리는 것이 내 속에 의지(意志)를 엎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신 예수를 엎드리는 것이다. 우리 욕심 때문에 예수를 신사(神社) 앞에 엎드리게 한다. 마치 경관(警官)이 억지로 사람을 신사(神社)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은 자기 월급(月給) 가족(家族) 먹여 살리려고 엎드리는 것이나 마찬 가지다. 내 죄(罪)가 엎드리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마음 우상(偶像) 쫒아내면 보이는 우상(偶像)은 부끄러워하고 물러간다. 내 속에 어두운 것이 있어야 어두운 것이 가까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내 속이 밝으면 어두운 것이 물러가고 가까이 못 오는 법(法)이다. 옛날 법(法)에 머리 깎으면 죽이는 법(法)이다. 우리 머리 숙이면 죽이는 것이다. 죽임 당한 것이다. 예수님이 대신 값 주고 사신 생명(生命)을 내가 죽인 것이다. 새 생명(生命)을 허락하셨다. 과거에 우상(偶像) 섬기는 죄(罪)로 예수가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生命)을 주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생명(生命)을 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자기 것인지를 모르니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이다. 세상(世上) 영광은 세상에게 돌려주어라. 생명(生命)은 하나님께 바치라. 예수님 십자가를 기쁘시게 지셨다. 달게 지셨다. 이 세상(世上)은 죄(罪)의 문에 매여 있다. 죄(罪)와 관계를 끊으면 세상(世上)에서 벗어날지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죽는 것이다. 죽으면 세상과 관계없다. 세상이 상관 않는다. 죄(罪)에게 다 갚아주셨다. 그러므로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을 수 있다. 죄(罪)의 권세(權勢)는 법이다. 법의 권세(權勢)는 사망(死亡)이다. 사망(死亡)만 이루어 버리면 법에서 벗어난다. 법에서 벗어나면 사망(死亡)은 떠난다. 사망(死亡)에서 뛰어나 영광(榮光)의 생명(生命)에 자유(自由)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냐? 풍파(風波) 적신(赤身) 칼 기근(饑饉) 위험(危險)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셨다. 몸도 당신의 것이 아니셨다. 주인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다 맡기셨다. 밤중에라도 그가 인도(引導) 하시면 따라나섰다. 한번은 밤중에 감동(感動)이 있어 나서 십리나 되는 마을 뒤에 가서 마을 뒷산에 가셔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랬더니 그 후에 얼마 못 되어서 주의 이름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마을에 예배당(禮拜堂)이 섰다. 바로 앉으셨던 앞집이 예배당(禮拜堂)이 되었다. 그는 모든 재산(財産)도 주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아셨다. 누가 손해(損害)를 해를 부쳐도 그는 모른다고 하셨다. 주님처분대로 하실 것으로 아셨다.

 

https://youtu.be/D6GAXQJ-E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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