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소나기 한차례 지나갔다. 새벽에 26도 내려갔다. 기장 수확한 포장 후작 월동무 준비작업 로터리를 모두 마쳤다.
이현필 선생의 우리의 거울 전문을 올려본다.
우리의 거울
1947년
이현필
주를 아시기전에 그는 이렇게 사셨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셨다. 가난하셨다. 형님 밑에서 자라나셨다. 남의 집을 사셨다. 일만을 아셨다. 글을 배우신적이 없으셨다. 국문(國文)을 어찌 아셨다. 정직(貞直)하셨다. 충실(忠實)하셨다. 남의 일 틈틈이 신을 삼아 모아 형님께 드리셨다. 일 년일 삯을 벼로 받아 형님께 식량으로 드렸다. 이것을 본 마을사람들은 난리(亂離)가 나 다 못살더라도 그이는 사실 것이라고 증거(證據)를 하셨다. 검박(儉薄)하셨다. 사치(奢侈)를 모르셨다. 일만 충실(忠實)이 하셨다. 말씀은 올곧고 바르고 옳게만 하셨다. 굽은 말씀이 없었다. 책(冊) 잡아보지 않으셨다. 동리(洞里)사람들은 다 경원(敬遠)했다. 편(便) 하려 하시지 않으셨다. 직심(直心)이시고 몸을 한시도 편하게 두시지 않으셨다. 마침내 장성(長成)하셨다. 형님들을 이사(移徙)시켜 가깝게 모시고 도와드렸다. 형님들도 차차(次次) 가산(家産)이 늘어 살만하셨다. 그제야 그는 성혼(成婚) 하셨다. 나이 40십에 열네 살 쯤 되는 촌 처녀에게 장가 드셨다. 살림을 차리셨다. 지게를 맞추셔서 지게가 다 닳아지도록 일하셨다. 어심(於心:마음의 속)새벽 없이 일을 하셨다. 겨울이면 콩잎사귀 죽으로 끼를 넘기셨다.
형님 댁 살림살이까지 다 보살펴 드렸다. 한편으로 저축(貯蓄)해 가셨다. 마침내 그 마을에 제일가는 살림이 되셨다.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채무(債務:빚) 없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답(田畓)도 작만(作滿) 하셨다. 그러나 잘 입지 않고 잘 잡수시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일가(一家)들은 퍽 많이 도와드리게 되셨지만 당신은 검박(儉薄)하셨다. 사오성상(四五星霜)을 남아 지내시도록 슬하(膝下)에 일점혈육(一點血肉)도 생기지 않았다. 자녀보시고 싶으신 소원(所願) 이 생기셨다. 무당을 들였다. 공을 들이기 시작 하셨다. 정성(精誠)이셨다. 정성(精誠)으로 하라는 대로 복종하고 아들 낳기만 힘쓰셨다. 지게는 거의 다 닳아서 어린아이라도 질수 없도록 되었다. 이제는 생활을 고치셨다. 옷도 깨끗한 것을 입기 시작하셨다. 공들이고 살림살이 도 좋은 것으로 작만 하셨다. 산당을 짓고 공들였으나 아들은 가망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미치리라고 추측(推測)했다. 지성껏 공들이는 아들은 못 얻고 마침 그 해였다. 이사를 하신 까닭이다. 사치(奢侈) 모르는 이가 사치(奢侈)하기 시작하면 죽는 법이라고 했다. 사치(奢侈)라고 해도 조끼하나 사 입으신 것이다.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웃집에 놀러 가셨다가 붉은 책(冊) 가위 있는 국문으로만 된 책(冊)을 보았다. 예수 믿는 책(冊)이라고 했다. 그는 보자고 청하셨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책(冊)이였다. 마음에 썩 들었다. 그 책(冊)을 빌렸다. 그 집 사람들은 일지기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이였다. 안보는 책(冊)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에 또 구약(舊約)을 구했다. 당신이 그 외에 또 다른 책(冊)이 없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마침 구약(舊約)이 있었든 까닭이다. 자세히 보아가시는 중에 레위기를 보시게 되었다. 당신이 이제까지 집짓고 상을 차리고 촛불을 켜고 떡을 차리고 백지로 꾸민 공 드리던 제도(制度)가 구약시대 성전(聖殿) 제도(制度)와 제사예식에 흡사함을 이상히 여기셨다. 다른데 공을 들이는 것은 헛짓임을 아셨다. 십계명을 보셨다. 죄인임을 아셨다. 무당을 후히 보내셨다. 주검의 초상(初喪)을 잘 치러주셨다. 기구(器具)를 고이 버리셨다. 너희는 너희 복(福)이나 타라고 버렸다. 사람에게 까지 복(福) 주려 말라고 하셨다. 나는 이제 복(福)을 받아도 하나님께 직접 받고 화(禍)를 받아도 하나님께 직접 받겠다고 하셨다. 공들이던 기구(器具)는 일소(一掃)하고 정성(精誠)은 하나님께 바치고 말씀은 정성(精誠) 들여 보살피셨다. 순종(順從)하여 하나님을 받드셨다. 신약(新約)도 구했다.
마침내 진실(眞實)한 신자(信者)가 되셨다. 아들은 구하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녀 있는 것 보다 나은 것을 아셨다. 전도(傳導)하셨다. 열심히 섬김으로 예배당(禮拜堂)이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믿게 되었다. 이웃 마을까지 다니시며 전도(傳導)하시고 간증(干證)도 하시고 어떤 때는 식사도 잊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경(恭敬)하자고 큰 소리로 외치셨다. 미쳤다고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더 맑으셨다. 동리마다 전곡(錢穀)을 배부하여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내라고 하셨다. 면 당국(當國)은 그의 선심(善心)에 감동(感動) 되어 비석(碑石)을 세웠다. 그는 교인(敎人)들을 데리고 십자가를 휘날리며 나섰다. 동리마다 하나님만 공경(恭敬하자고 하나님만 공경(恭敬)하자고 시위를 하셨다. 당신의 명예(名譽)는 나타낼 것 없으니 비석(碑石)은 넘어트리라고 했다. 내손으로 이 사람들을 시켜서 라도 비석(碑石)은 없앨 수 있으나 당신들이 세워 놓은 것을 차마 그럴 수 없으니 당신들 손으로 무너트리라고 권유(勸諭)하셨다. 안 무너트리려고 면장과 면민들은 말했다. 이왕 비용 드려 세운 것이니 그대로 세워두자고 의논(議論)했으나 만약 안 무너트리면 당신이 사람들을 시켜서 무너트리겠노라고 하셨다. 마지못해 비석(碑石)은 그 자리에 묻었다.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부르셨다.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다 탕감(蕩減)해 주었다. 계약서(契約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다 불에 살라 버리면서 다 받아 버렸으니 안심(安心)들 하라고 안위(安慰)하셨다. 그 마을 전답(田畓)과 토지(土地)가 거의 전부일대(全部一帶)가 그 문서(文書) 속에 저장(貯藏) 되였던 것이었다. 꾸어간 사람들에게도 다 물시(勿施:꾸어간 것을 무효))해주셨다. 그들에게 그 외에는 한사람의 빚진 자도 없고 꾸어 간 물건이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이 되어버렸다. 일대(一帶) 희년(禧年) 이였다. 그 마을에는 전무후무(全無後無)한 희귀(稀貴)한 일이였다. 못 믿을만한 일이였으나 사실(事實) 이였다. 생각도 못하는 기쁜 일이였다. 못 믿을 만한 일 이였으나 사실은 그대로 되었다. 산에나 들에 가셨다가 일군들이 흔히 하는 것과 같이 남의 콩 한포기라도 뽑아 잡수신 것은 다 그 임자들에게 자복(自服)하고 갚으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차(苟且)한대로 무엇이고 도와주셨다. 곡식을 모아 두셨다가 노인과 어린 아이가 있는 가난한 집에 나눠 주셨다. 당신은 콩잎사귀도 아까워 못 잡수시면서도 일 년에 한 두 차례 의례 아프시던 병은 물러가고 기적(奇蹟)은 늘 보여 지기 시작했다. 그는 말씀 하시기를 마을사람들이 소경이 아니면 하나님을 믿으리라고 하셨다. 연보(捐補)를 풍성(豊盛)히 하심으로 사람들이 따라 믿었다. 배부른 까닭이었다.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 하셨다. 그에게는 금식(禁食)이 좋은 식사(食事)였다. 성경(聖經)을 들고 계시면 일출(日出) 일모(日暮)를 모르셨다. 백두 밤중이 없으셨다. 병이 나도 절대 죽이나 숭늉물이나 미움을 안 잡수셨다. 오히려 성하실 때는 죽이 그에게는 별식이었지만 병석에서 일어나시기까지는 통 안 잡수셨다. 선교사(宣敎師)가 순교(巡敎:순회심방) 때에 귤 2개 병석(病席)에 계실 때 드렸더니 회복(回復) 되신 후에 계란을 구해가지고 그 선교사(宣敎師) 댁까지 가셔서 드리고, 순교(巡敎) 때에 대접 못했노라고 사과(謝過)하셨다. 그는 매일 아파도 약을 쓰시지 안했다. 그는 말씀 하셨다. 사람들이 죽고는 싶다고 하나 약을 쓰는 까닭은 무슨 마음이냐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약이라고 믿으셨다. 의(義)의 약이라고 믿으셨다. 이 약을 쓰면 장생불사(長生不死)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0이요, 썩지도 않는다고 믿으셨다. 몸이 썩어도 아무 때 썩어도 썩을 것이라고 버려두셨다. 사람들에게도 이 의(義)의 약을 권(勸)하셨다. 매 아프면 죽으리라고 기다리시고 숼(수월:쾌차) 하면 회복 될 거라고 참으셨다. 그는 배부르기를 구하기전에 먼저 오로지 그 나라와 그 의만을 구하셨다.
첫째 명예(名譽)를 구하지 않으셨다. 진리(眞理)만을 구하셨다. 명예(名譽)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어 보셨다. 남이 칭찬하느냐 싫어하느냐에 태도(態度)를 달리 하신적은 없으셨다. 성경에 비춰 맞느냐 안 맞느냐 상고(相考) 하고 추구(推究)하고 따라 사셨다. 한마디라도 눈 한번 떠 보시는 것까지도 발 거름 한자취라도 진리(眞理)가 아니면 아니 움직이셨다(가셨다). 어디를 가시되 미리 어떤 마음에서 가고 싶은 생각이 울어나는가 하고 살피셨다. 성신의 생각 곧 자기의 속 사욕(私慾)에서 난 생각이 아니라고 결정(決定)되었으면 그제야 비로소 일어서셨다. 마을에를 가도 그리하셨다. 그 집 밖에 가서도 찾는 것이 옳은지 안 옳은지 하고 한참동안이나 생각 끝에 찾아도 관계치 않으리라 생각이 되셔야 찾으셨다. 그는 오로지 진리(眞理)대로 사셨다. 명예(名譽)와 칭찬(稱讚)과 치우치면 꿈도 못 꾸어보셨다. 칭찬은 똥으로 아셨다. 마귀의 대접으로 아셨다. 칭찬(稱讚)으로 사람을 시험 한다고 간주(看做)하셨다. 높이는 바를 절대로 싫어하셨다. 마음이 높아진다고 해서 상에서 절대로 진지를 안 잡수셨다. 누가 상에다가 진지를 차려다가 드리면 절대로 싫어하셨다. 남을 도와줌으로 겸손히 사례라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感謝)하다고 아니 하고 당신에게 감사(感謝)해서 사람을 시험 하느냐고 하셨다. 사람에게 사례하면 그것이 사람을 넘어트리는 것 아니냐고 크게 책망하셨다. 걸인 에게 무엇을 주셔도 감사(感謝)타고 하면 하나님께만 감사(感謝)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안 주셨으면 자기들 먹을 것도 없으니 당신들도 못 드릴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에게는 사람을 대접을 하는데 차별(差別)이 없으셨다. 거지에게 무엇을 주셔도 꼭 자기 집에서 잡수시는 대로였다. 귀객(貴客)에게 하듯이 하셨다. 일반으로 하셨다. 만약 한집에 있는 이가 거지에게는 소홀(疏忽)이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낫게 하면 거지에게도 그같이 하라고 화를 내셨다. 그것이 주는 이에게 참 복됨이라고 생각하신 까닭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는 것이 돌이여 죄 된다고 생각하셨다.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다. 교만(驕慢)하려 하지 아니 하셨다. 옷만 다른 사람 보다 낫게 입으셔도 몹쓸 마음이 교만(驕慢해져서 다른 사람을 나추워 보아진다고 절대로 검정색 무명베옷 홋겉 외에는 안 입으셨다. 잡수시는 것도 낳은 것은 입에 넣어 본적이 없으셨다. 거지에게 시제(施濟:구제를 베품)를 할 때에 당신은 뉘 집 잔치에 가서라도 한때라도 배불리 잡수실 때가 있으실 것이나 이놈은 우리 주의 은혜를 아는 날부터 이제까지 좋은 것을 먹어본 적이 없소 하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잡수시고 싶다고 해서 한집에 계시는 이가 찹쌀로 절주를 좀 만들어 드렸더니 두 번 떠 잡수신 후 사시(斜視)를 지으시고(눈을 치켜뜨시고) 크게 통곡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놈이 진즉 나무 끄트랭이 에라도 치여 넘어져 죽지 않고 이제껏 산 것은 이것을 못 잊어 못 죽었던 거라고 우셨다. 찰밥을 한차례 붙들고 앉으셨던 일이 있었다. 잡수시려 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나서 찹쌀을 가지고 가난해서 찰밥을 못 해 먹을 만한 집 집 마다 눈밭에 찾아다니면서 돌려 주셨다. 올벼쌀이 생겨도 가난해서 농사 못 지은 사람에게 먼저 각각 돌려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 입에 넣었다. 무엇이고 좋은 것을 누가 가져다 드리면 꼭 아껴 두셨다가 형편 따라 나누어 주셨다. 한동안은 콩잎사귀도 아까워서 못 잡수셨다. 교만(驕慢)이 일어날까봐서 눈을 감고 길을 다니셨다. 겸손(謙遜)을 배우셨다. 반드시 고난으로 순종(順從)을 이기셨다. 그는 영리(營利)를 모르셨다. 어디를 가도 이익을 생각하고 갈 것이 아닌 것을 가르치셨다. 영리(營利)는 뜬 구름이요, 허망(虛妄)한 것으로 믿으셨다. 꽃 한 송이를 보고라도 탐내어 가면 넘어지고 허공에 자빠지고 다리가 상할 것을 아르셨다. 덕화(德化)를 일삼으셨다. 덕화(德化)를 끼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아니 하셨다. 그는 빼앗기는 것을 얻은 것으로 아르셨다. 일가친척이 안준다고 살림을 다 부셔도 그 나중에 그들의 욕구(欲求) 이상으로 그들의 편익(便益)을 도모(圖謀)해주셨다. 덕을 위하여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하셨다. 송사(訟事)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들에게 겉옷 까지 금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그의 살림을 욕심 내여 위조문서를 만들고 위증(僞證)을 세우고 그에 살림을 전부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 반구(反求)의 변론(辯論)이 없었다. 그는 말씀 했다. 이제는 죽을 때가 당도한 것이라고 자탄(自歎)할 따름이셨다. 길을 가다가 길을 막고 훼방(毁謗)하는 자가 있으면 해 지도록 이라도 그 자리에 붙들려 섰다가 그 사람이 가라고 승낙(承諾)을 해주어야 가셨다. 그는 면류관(冕旒冠)을 받았다고 생각하셨다. 욕을 명예(名譽)로 생각 하셨다. 외식(外飾)이 없으셨다. 예수와 외모(外貌)와는 원수(怨讐)라고 믿으셨다. 나병환자라도 추(醜)하게 보시지 않으셨다. 자기 외에 추(醜)한 것이 없으신 줄 아셨다. 아무리 목사라도 외모(外貌)만이 취할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외모(外貌)를 취한 것은 하나님을 능멸(凌蔑)이 여기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악수들을 하나 진실성이 없는 것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손을 잡고 흔들면 반가운 척 하나 속에는 시기와 미움이 가득 찼다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주는 밥을 먹어서는 죄가 안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겉으로 주고 속으로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뜻 이였을 것이다. 외면으로 반가워하고 속으로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뜻 이였을 것이다. 안 밖이 없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셨다. 안빈락도(安貧樂道) 하셨다. 속을 다스리는 것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한다고 굳게 믿으셨다. 남 조심보다 자기 조심이 크다고 믿으셨다. 남이 자기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해치는 것보다 자기 속에 진실성이 없고 남을 미워하고 해하려는 마음이 자기를 해롭게 하는 것임을 아셨다. 잘 입으려고 아니 하셨다. 헌 누더기로 만족하셨다. 조금이라도 좋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입으셨다. 그는 자기의 입은 것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을 보면 곧 바꿔 입으시지 않고는 못 배기셨다. 한번은 새 옷을 가라 입고 나가셨다. 어떤 남루(襤褸)한 옷 입은 어린 거지를 보시고 곧 바꿔 입으셨다. 그것은 너무 적어서 째여 수족(手足)을 동여 자유스럽지 못하셨다. 이는 심히 괴롭게 물었다(조였다). 그는 더욱 헐벗은 이들에 사정(事情)을 깊이 동정(同情)했다. 걸인에게 무엇을 주실 바에는 가서도 음식은 다른 데 가서도 얻어먹을 수 있으나 의복은 얻어 입을 수 없으니 겨울을 위하여 의복(衣服) 차례(次例)를 힘쓰라고 보태 주셨다. 그의 모자는 검은색 다 쪼그라진 중절모자였다. 여름 겨울 사철 다 이것으로 만족하셨다. 어떤 친구가 그이 몰래 불 없는 아궁이 에 던져 넣고 자기 헌 모자를 대신 드렸더니 조금 쓰고 거리에 나셨다가 조심스러워 못쓰시고 도로 돌린 다음 그 모자를 찾아 쓰고 가셨다. 그는 덕행(德行)으로 좋은 옷을 삼으셨다. 두루마기를 걸쳐 보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의에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좋은 베띠를 띠지 않으셨다. 그러나 정직(正直)의 허리띠를 항상 동이셨다. 법의 의복을 안 입으셨다. 그러나 천국(天國) 의복(衣服)을 항상 입고 항상 출입하셨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 하시지 않고 어떻게 못 입어 볼가였다. 삼동(三冬)에도 보선을 신어보신 적이 없으셨다. 단임을 치셨다. 떨어진 고무신짝을 끄셨다. 의(義)를 전하는 발걸음 이였다. 아름다웠다. 그의 용모(容貌)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러 다니셨다. 예모(禮貌)를 중히 여기셨다. 특히 남녀의 사이가 길을 가시다가 부인들과 길을 비껴가게 되면 반드시 모자를 벗고 눈살미를 찌 부리고 겨우 그 사람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정도로 눈을 뜨시고 모자로 눈을 가리 우고 비켜섰다가 지나간 뒤에야 길을 걸으셨다. 믿는 다고 남녀가 한방에 모여 있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셨다. 불신자가 처모와 한방에서 잤다는 것을 들으시고 놀라셨다. 남자는 남자에게 여자는 여자에게 전도(傳導)할 것임을 주장하셨다. 젊은 여자들이 남의 젊은 남자들에게 전도(傳導)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부인들이 찾아 와도 단 둘이 계신 적은 없으셨다. 꼭 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나가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로 데리고 나가셔서 이야기하셨다. 의복(衣服)은 그에게 수치를 가린 법 밖에 안 된다. 예모(禮貌)만이 참 옷임을 아셨다. 그는 청렴(淸廉)하셨다. 주기 좋아 하시나 받기는 대단히 싫어 하셨다. 농구를 빌려 써도 성냥으로 답례(答禮)하셨다. 흙을 써도 일군들을 시켜서 퍼다 쓰실 일 있으시면 반드시 당신 토지에 가서 파오라고 하셨다. 만약 가까운 곳에서 남의 논에서 파오게 되면 기필코 그 자리에다가 다 메워주고 멀어도 당신 논에 까지 라도 가서 쓰게 하셨다. 이웃마을에를 가셔도 잡수실 것을 가지고 다니셨다. 안가지고 가시며 그 집에서 준비(準備) 하려고 하면 미리준비(準備) 되였으니 그만두라고 말씀하여 준비(準備)치 못하게 하시고 그래도 준비(準備) 할 때에는 절대로 안 잡수셨다. 그냥 잡수실 때에는 그것 잡수시고 나자 그 집에 거지가 왔었다. 오늘 점심은 대신 먹었으니 그 값은 이사람 에게 주신다고 하며 전도 말씀 하시고 주셨다. 다른 사람은 대접(待接) 하셔도 당신은 대접(待接)받지 않으셨다. 당신을 위하여 예비 한 것이니 잡수시라고 하면 안 쉴 터이니 다음 끼에 두었다먹으라고 권면(勸勉)하셨다. 쉴듯하다(상하다)고 하면 쉬여도 사랑으로 양보하는 일은 아름답다고 하셨다. 당신을 보시려고 찾아온 손님은 반드시 당신 따로 양식을 주어대접하게 하게하고 교회(敎會)로 미룬 적이 없으셨다. 그는 청백(淸白) 하셨다. 다른 사람의 형편을 잘 살피셨다. 누를 끼치지 않으셨다. 당신 댁에서 대접(待接) 받았으니 한 끼쯤 대접(待接) 하려고 하면 당신 형편이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시제(施濟) 하고 손을 거두지 않으셨으나 잔치에 참석 해보신 적은 없으셨다. 잔치에 가셔도 볼일만 보실 따름이요, 음식 먹을 시간에는 밖에 가셔셔 음식 필하기를 기다리셨다. 명절이 라도 이웃집 같은데서 음식을 가져 오면 나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니니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도 두고 가면 도로 갔다가 그 집에 주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버리려고 하면 그것을 거두어 잡수 시였다. 이것은 누가 먹을 이가 없으니 먹어야 한다고 치우셨다. 쉬였다고 버리려 하면 속에 들어가면 더 쉴 것이니 잡수신다고 잡수시었다. 여러 사람이 콩을 먹다가 병든 콩이라고 땅에 버리면 그것을 주워 먼지를 털어 잡수 시였다. 구진 것은 당신이 잡수셔야 한다고 생각 하셨다. 낮은 것도 당신은 못 만드니 귀하다고 하셨다. 구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아셨다. 그래서 버린 사람들은 도려 무안하게 하셨다. 조금이라도 남의 도움을 받고 그대로 지나버린 적은 없으셨다. 양식을 사도 시장을 가면 중계인 줄 것은 파러가는 사람보다 이익을 보아 가라고 제 해주셨다. 돈 없이 팔로 온 사람이 있으면 돈 없으면 그저 가시라고 한두 되 그저 주셨다. 많이는 줄 형편이 못된다고 하셨다. 그는 양식을 미리 두셨다가 세금이 할당(割當) 되면 돈 사서 납세(納稅) 하는 것이 의례(儀禮)히 관례(慣例)였다. 나라 토지(土地)에서 난 것이니 나라에 먼저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가을이면 분깃을 나누신다면서 1.복음(福音) 전도비(傳道費)로, 2.국세(國稅)로, 3.남의 힘 빌린 것 있으면, 4.구제비(救濟費)로, 5.당신 도리(道理) -친척이나 친구 대접 하실 일 로 나누어 두셨다. 사람의 대접은 변소에만 한 번 더 가게 하는 것밖에 안된다고 해서 조심하셨다. 썩을 것으로 인심 쓰고 영은 썩혀버려서는 안된다고 각심(覺心)하셨다. 주는 데나 받는 데나 서로 조심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심히 청렴(淸廉) 하셨다. 빈민 구제(救濟)할 양식도 미리 제량(劑量)해 두셨다가 긴(緊)한 때 주셨다. 임시로 주는 것으로는 당신 잡수실 것에서 주셨다. 어디까지 청렴(淸廉) 하셨다. 철저 하셨다.
8. 그는 자비(慈悲)하셨다. 길을 가시다가 당시에 발에 개미가 밟혀도 뒤 돌아 보시고 우시며 길을 멈추셨다. 하나님 앞에 행위로 봐서는 너 한데 밟혀 죽어야 옳을 터인데 네가 나한테 밟혀 고생을 하는구나! 우거진 풀포기를 부어 잡고 좋아라고 하셨다. 인간들의 욕으로는 너를 몇 번 찍었으련만 하나님의 자비가 너를 먹아 주셨으니 너도 조물주(造物主)에 은혜(恩惠)를 감사(感謝)하라 하셨다. 우거진 산천(山川)을 우러러 보시고 한량없이 기뻐하셨다. 만물(萬物)들아 함께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찬양(讚揚)하세 하셨다.
죄인(罪人)을 보시면 애인(愛人)을 보시면 애인(愛人)해서 못 배기셨다. 보실 때에는 꾸지람 돌려 세워 놓고는 울음이셨다. 한사람이라도 믿음에서 떨어지면 밤새도록 우셨다. 하나님 이죄인(罪人) 잊지 말아 주십소서. 해친 자가 있으면 세상 에서도 불상한 사람이라고 안타까워 하셨다. 무엇을 훔쳐 간 사람이 있어 그것 갔다가 유익 못 볼 것이라고 하고 왜 수고 하셨는가 하셨다. 그는 거름 거름마다 눈물방울이셨다. 하나님 이 죄인(罪人)들 어떻게 하시렵니까하셨다. 사람들을 떠나도 하나님의 말숨께 부탁하셨다. 이 백성들을 잊지 마라주소서하셨다.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救援) 베푸시는 자비(慈悲)의 말숨께 부탁 하셨다. 그는 부지런 하셨다. 말숨을 전하는 데는 어심(於心) 새벽이 없으셨다. 말숨 하시는 시간에 밥상이 들어와도 사사(私事)는 뒤에 하고 공사(公事)부터하시자고 말씀 하셨다. 한때도 마음 편히 가져보신 적은 없으셨다. 항상 괴롭다고 말씀 하셨다. 이마를 찌 푸르셨다. 관속에 들어가도 마음 편히 못 놓으신다고 하셨다. 사후(死後) 심판(審判)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항상 진리(眞理)만을 궁구(窮究) 하셨다. 길을 가셔도 밥상을 받으셔도 말숨 생각하시는 것이 일이셨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 하셨다. 길을 가시다 피곤(疲困) 하셔도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실 뿐이셨다. 당신 힘으로는 한발자취라도 움직일 힘이 없고 위에서 주셔야만 걸어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욥기를 생각 하신다고 하셨다. 야고보서에는 욥의 말숨이 있으니 좋아라고 하셨다. 앓는 이를 보셔도 하나님은 이제라도 성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건만 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신 것은 그의 기도(祈禱)이셨다. 식사(食事) 때에 앉으셔도 위를 한번 쳐다보실 뿐이셨다. 사는 것은 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셔도 돌아오고 못 도라 올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달렸다고 믿으셨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셔도 절망(絶望)이 없으셨다. 언제 돌아오실 기약(期約)도 없으셨다. 사람들이 물으면 당신은 모른다고 하고 하셨다. 가다가 어떻게 될는지 돌아오는 길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소. 하셨다. 하나님을 의뢰(依賴)하는 것이 힘 이였다. 그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세상(世上) 영광(榮光)을 버릴 것을 가르치셨다. 이 세상(世上)에 자기 영광(榮光)은 다 드러내 버리고 예수님만 도와드려야 한다. 내속에 계신 예수를 위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다 장사해버리고 주님만 위할 것이다. 내 생각은 죽을 것뿐이다. 멸망(滅亡) 할 생각뿐이다. 내 생각대로 나가면 멸망(滅亡)하고 영영히 죽을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지혜 있고 통달한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셨다.
미련한자 곧 세상에게 미친놈 미련한 놈이라고 말 듣는 자에게 나타내신다. 정신(情神)없는 놈이라고 말을 듣고 썩은 놈 이라고 말 듣는 자에게 미련 동이라고 사람들이 버리고 싫어하는 자에게 나타내신다. 세상 사람들은 문둥병 들면 무서워하고 하지마는 어떤 사람 속에든지 문둥병보다 폐병보다도 더 무서운 병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병은 누구나 무서워하지도 않고 놀래지도 않고 고치려고도 않는다. 한심한 일이다. 우리 주님께 병고쳐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주님이여야 고치신다. 이병이 낳음 받아야 우리 심령이 정결(淨潔)해 진다. 정결(淨潔)한 심령(心靈) 가져야 온전한 사람이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어도 여호와께서 사자 입을 막아 먹지 못하게 하셨다. 사자 입에 들어간 것이나 무슨 고생당하는 것은 다 자기 죄로 당하는 것이다. 육체 병도 그렇다. 하나님을 원망(怨望)할 것 없다. 내 죄로 당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 원망(怨望)할 것 없다. 법관(法官)에게 끌려가도 내 죄로 가게 되는 것이다. 채찍을 맞아도 법관(法官)을 원망(怨望) 말고 감옥을 원망(怨望) 말 것이다. 그들은 기계만 되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올 때에 믿는 것을 보겠느냐 하셨다. 누가 18장 8절 개미에게 물려도 개미 탓 아니다. 회초리에 눈을 다쳐도 상관없다. 돌에 발을 다쳐도 돌멩이 원망(怨望) 말라. 개미는 나보다 선하다. 개미에게 물려 죽어도 마땅하다. 누구를 원망(怨望)하랴. 죄로 당하는 것을 이 고생 당하는 것 나에게는 가장 행복(幸福) 된 일이다. 육체의 고난을 받음으로 죄에서 벗어나고 마음이 선해진다. 죄만 뉘우칠 것뿐이다. 이 세상에 무엇을 바라랴. 죄를 뉘우치는 것이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일이다. 무슨 행복(幸福)을 바랄 것 없다. 행복(幸福)이 오히려 재앙(災殃)이 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은혜(恩惠)뿐이다. 하나님의 손이 도우신다. 죄만 없으면 산다. 바위 끝에 가서도 살고 뜨거운 불속에 서도 살 수 있다. 추운 달 속에서 의인들은 살고 뜨거운 불속에서도 의인들은 산다. 아무것도 원망(怨望)도 말고 부러워할 것 없다. 아무 것도 원망(怨望)도 세상 영광 취할 것 없다. 하나님의 원하는 일만 하여라. 그러면 산다. 죄만 뉘우칠 뿐이다. 산에를 가도 하나님의 은혜(恩惠)뿐이다. 가득하다. 우거진 풀잎을 봐도 알 수 있다. 세상 법이 아니면 세상 악마들은 너를 몇 번 욕심내어 살해 했으련만 은혜(恩惠) 시대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너를 보호 했으니 너도 하나님 은혜(恩惠)를 감사 하라고 끌어안았다. 너울거리는 풀잎 하나라도 하나님의 공수(空手)로 주시는 은사가 아니면 살 수 없다. 너도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들어내는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태 23 장, 나는 다른 사람을 해하기는 쉬어도 의롭게 하기는 어렵다. 나만 죽으면 다 해결된다. 저 사람이야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바로 전하는 것이 제 책임(責任)이다. 감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바른 대로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무시 하는 것이다. 그 속에도 하나님이 감화(感化)하시면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다. 무식한 사람이라고만 생각 말 것이다. 주 명령대로 바로 전해서 못 깨달으면 그 사람 책임(責任)이다. 바로 아니 전하면 내 책임이 된다. 만일 알고도 그대로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 흘린 피가 나에게로 돌아온다. 에스겔 39장1-9절, 예수님은 의인의 친구가 아니다. 죄인의 친구가 되신다고 하셨다. 미련한자의 친구다. 모르는 중에 다 쏟아 놓고 은혜(恩惠)를 구할 것이다. 그래야 받는다. 자기가 다 알아가지고 하려는 것은 욕심(慾心)뿐이다. 알고 열심히 들어가면 자기욕심(慾心)뿐이다. 알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 의로운 줄 아니까 욕심이 된다. 고전 10장15-25절, 미련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智慧) 있는 것이 된다. 고린도후서 3장1절,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나 주심으로 풍성하게 하신 것이다.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 다니라고 하여 고쳐 주었다. 참 구제는 디모데전서 6장18절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선한 행실이다. 행실을 보일 것이다. 예수님의 행실을 나누어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서 가르치실 때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왔었다. 사람들이 문밖까지 많이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시켜서 찾는다고 하셨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지 않으셨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반문 하셨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兄弟)요, 누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형제(兄弟) 시(示)였다. 그러시고 여전히 가르치기를 계속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듣고 나누어주기를 즐겨 하였다. 마리아는 듣는 이요, 마르다는 나누어주는 이였다. 라헬은 활동가였다. 부지런히 선을 나타낸 이였다. 연보(捐補)는 내 몸을 희생(犧牲)하는 것이 참 연보(捐補)다. 디모데전서 6장3절 교훈을 받을 것이다. 죄도 모르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영광(榮光)을 버리시고 제물(祭物)과 생축(生丑)이 되셔 희생(犧牲)하심으로 그 영광(榮光)은 다 나에게 맡겨 주셔서 나는 산다. 이시간도 그 영광(榮光)이 아니면 살 수 없고 부끄러워 살 힘이 없다. 살 힘이 없다. 내자랑은 없다. 내 능력은 없으니 살 수 없다. 예수님의 것 곧 풍성한 영광(榮光), 넘치는 영광(榮光)을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주시면 공평해진다. 평균하려 하신다고 하셨다.
경책(經冊)의 뜻,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으니 우리도 예수를 위하여 가난하여야 할 것이다. 골2;20, 빌1;26 믿을 것만 알라. 우리도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영광(榮光)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수 있으신다. 이것이 경책(經冊)의 뜻이다. 하나님의 교훈이시다. 딤전 6;15,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께 묻지를 않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 되는가? 낮게 해달라는 것이 죽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살려다가 고생 당했다. 예수와 같이 죽었으면 영광되고 편했을 것이다. 살려는 것이 죽을 것 되었다. 복(福)을 구하는 것이 화(禍)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이 바알에게 묻는 것이 된다. 이 뜻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오히려 슬프게 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 신구약간에 연락(宴樂)하라는 데가 어디 있는가? 연락(宴樂) 하면 바알에게 묻는 것이 된다. 병나면 약(藥) 쓰라는 것이 죄냐고 묻는다. 신구약간에 병나면 의(義)의 약(藥) 먹으라고 하셨지 물질 약(藥) 쓰라고 부탁한데는 없다. 의(義)의 약(藥) 하나님의 약(藥) 복음 약(藥) 쓰라고 부탁 하셨다. 신령(神靈)한 약(藥) 쓰라고 부탁 하셨고 나무뿌리나 풀잎사귀는 쓰라는 데는 보지를 못했다. 하나님의 말숨이 참 약(藥)이다. 말숨 지키는 것이 위생(衛生)이다. 겉으로 정결케 해도 죽고 병난다. 그러나 신령(神靈)한 말숨 따라가면 부활이요, 영생(永生)이니 얼마나 좋은 위생(衛生)이냐? 이 약(藥)은 의심 없다. 세상 약(藥) 쓰는 것은 꼭 나을지 모르니 미신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난 는다. 고 병원에 가나 못 나는 수도 있고 죽기도 한다. 기도 들은 하나님께서 안 들으신다. 엘리사가 나아만 문동병자에게 요단강 물에 7번 목욕(沐浴)하라고 하여 순종함으로 나았다. 신령(神靈)한 물에 목욕(沐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聖靈)의 물에 목욕(沐浴)하라. 다 나았다. 꼭 나았다. 목사나 장로들이 흔히 와서 성경 묻는 것은 당신들 속에 있는 것과 씨를 찾아보는 것이요, 알아보실 마음으로 물으심이 아니다. 곁에서 듣는 이는 조심해서 들을 것이요, 판단(判斷)하지는 말 것이다. 눈감고 고요히 생각하고 상고해야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기만 하면 할 일, 요긴 하고 신구약간에 말씀 살펴서 증거 삼을 것이요, 판단(判斷)은 말 것이다.
마11;25 예수님께서 내짐은 가볍고 멍에는 쉽다고 말씀 하셨다. 내게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무겁고 다 내버리면 아주 참 쉽다. 골 2;20 의문(儀文)의 뜻이 무엇인가? 그릇된 학문 즉 음란치 말라는 뜻이다. 창세전에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과(善惡果) 먹지 말란 뜻이다. 여기서 나를 패망(敗亡)케 하는 의문(儀文)이다. 창1;6 위에 물과 궁창 아래 물로 나누워 놓으셨다. 궁창 우에 물은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이시다. 목숨이다. 영생이다. 궁창(穹蒼) 아래 물은 마귀가 주는 물 세상 명예다. 부귀공명(富貴功名)이다. 공리(公利)다. 마10;1-10 성령과 성부는 공정(公正)하시다. 롬 1;28,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유일하다. 유익하다. 쫒는 데는 육신 육체를 꾸미느라 괴롭게 만하고 생명에는 무익하다. 골3;5 위에를 생각할 것이다. 부부결혼(夫婦結婚)은 진정으로 하나가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가 죽어도 하나는 잘 산다.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니 한분이 죽는다면 다 죽는다. 한분이 사시면 다 사신다. 염통을 생각해보라. 염통과 육체는 하나이니 이 세상 부부(夫婦)는 진정한 하나가 못된다. 참 부부(夫婦)는 예수와 우리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으면 교회(敎會)도 죽고 예수님이 사셨으니 하나 된 교회(敎會)도 산다. 세상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멸망(滅亡)뿐이다. 히1;1, 지금부터 믿는 것은 증거가 있다. 만물(萬物)이 하나님의 후사(後嗣)를 보고 기쁘다고 춤을 춘다. 결혼(結婚) 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짝 지였으니 나누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의 심리(心理)를 몰라서 함부로 짝 지을 수 없다. 잘못 만나면 평생 원망(怨望)이기 때문이다. 자기 죄로 색만 고르다가는 큰 실수(失手)이다. 그러나 생남(生男) 생녀(生女)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할 것이라고 하셨다. 당신 종들 시켜서 종들에게 생남 생녀 하여 구원 하신다. 이방인에게 구원을 전하셨다. 바울선생은 시집가는 것이 죄는 아니나 안 가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말씀 하셨다. 고전 7장, 과부(寡婦)가 시집가는 것이 좋으나 홀로 사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셨다. 예수 믿는 일은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더 좋은 일 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혼자 살면 복 받는 줄 아셨다. 가도 주 믿는 자에게 가라고 하셨다. 예수 믿는 것은 더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복을 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 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거리낀데 없으면 주의 종이라고 한다. 율법의 종 되지 말 것이다. 혼인 하면 율법의 종이다. 사람의 종 되지 말 것이다. 남편 있는 자는 남편의 종이 된다. 아내가 있는 자는 아내의 종이 된다. 법의 종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하나의 절제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고전 6장12절,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 몸은 음란(淫亂)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주를 위하여 있다. 생명(生命)은 몸을 위하여 있다. 내 마음을 거룩하게 하라. 창기(娼妓)의 지체(肢體)를 만들지 말 것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신을 이룬다. 다른 사람을 압제(壓制) 하지 말라. 그러면 압제(壓制)를 받지 않을 것이다. 아들 있다고 아내 있다고 남편 있다고 압제(壓制)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압제(壓制)를 받지 않을 것이다.
부자가 오면 쓸고 닦고 맞아 드리고 가난한자가 오면 보통으로 한다. 그것이 압제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안하는 것이요, 거슬리는 것이다. 자기도 압제(壓制)를 받을 것이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壓制) 한다고 하셨다. 영화로운 이름을 훼방(毁謗)하고 너희를 끌고 법관에게 가지 않느냐고 하셨다. 훼방(毁謗)하지 내게 사자의 입을 막을 능력(能力)이 없다. 능력(能力) 받으면 훼방(毁謗)하지 않음 하나의 절제 받지 않을 능력(能力)을 얻어야 한다. 내가 죽을지언정 내자랑한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다.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자랑을 막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 하셨다. (바울사도의 말씀) 말숨 대로 하면 사람들이 미워는 하나 허술히는 못 본다. 그러나 말숨 대로 안 하면 사람들이 좋다고 하나 허술히는 못 본다. 헌 누더기를 입고 출입을 해도 허술히 안 본다. 관청에 가도 그는 그렇다. 마 24;26;28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듣지 말라는 뜻은 자기 마음대로 서로가 옳다고 부르짓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신 뜻대로 아니 하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한다. 교인들 마음속에 적그리스도가 담겨있다. 자기를 낮추려는 마음이 없다. 희생심(犧牲心)이 없다. 봉사(奉仕)의 정신이 없다. 그리스도의피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양 잡아서 문설주에 뿌리고 재앙(災殃)을 면하고 나왔다. 그리고 성 망할 때에 라합이 줄 문 에 붉은 줄 드리운 것 같이 한국에도 그런 풍속(風俗)이 지금남아 있다. 이것은 천사를 명하여 심판(審判)하실 때에 붉은 피 있는 집은 넘어가셨다. 여리고 성 망할 때에는 붉은 줄 있는 것이 라합의 집이다는 것이 표적 이였기에 그 집에든 사람은 다 구원해 내고 멸망(滅亡) 시켰다. 한국에는 동지 날이면 팥 죽물을 문과 온 집에 보이는 데다 뿌리는 것은 그 뜻이다. 신령(神靈)한 뜻은 하나님께서 천사(天使)를 시켜서 심판(審判) 하실 때 그 마음에 예수의 피가 있으면 사하심을 받게 될 것이고 예수의 피가 없는 마음이, 즉 통회(痛悔)하는 마음이 없다.
가라지 비유 좋은 곡식(穀食)은 곡간(穀間)에 드린 것은 선(善)한 마음씨는 구원 얻을 것을 가르치심이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르신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뉘우칠 기회에 뉘우칠 것이다. 선(善)한마음을 가질 것이다. 번제(燔祭) 동편(東便)에 똥을 버리고 선심(善心)은 불타야 한다. 괴악(怪惡)한 마음씨는 버리면 양심(良心)은 희생심(犧牲心)은 열열(咽咽)해질 것이다. 뜨거운 사랑 솟아날 것이다. 시기심과 미워하는 것은 사귀(邪鬼)의 마음이다. 교회(敎會)가운데 목사(牧師)들 마음가운데도 이 시기하는 마음 자기 자녀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사탄(詐誕)의 생각이다.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심판(審判)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날의 심판(審判)을 무서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첫 심판(審判)은 영(靈)과 육(肉)이 갈리는 때요, 둘째 심판(審判)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내리시심을 받을 때임이다. 에스겔 36;37, 마른 뼈들이 힘을 얻어 군대(軍隊)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마음 육체(肉體)가 심령(心靈)의 새로워짐으로 의로워 질 것을 가르치심이다. 아무 의도 행할 능력(能力)도 없고 아무 선(善)에 대한 소망도 없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움직일 때 선(善)하신 손이 움직일 때에 우리 심령(心靈)은 힘을 얻어 떨치고 일어나서 선(善)한 행실(行實)이 나올 것이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다. 듣는 자는 다 사망(死亡)에서 나와 영생(永生)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수께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실 때에 무덤 속에 있는 의인(義人)들이 나와서 부활(復活)하신 후에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천사(天使)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의(義)에 영생(永生)이 있다. 선(善)한 마음이 악독(惡毒)과시기(猜忌)와 분쟁(分爭)과 탐심(貪心)과 자기이익(自己利益)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생명(生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 남을 해하려는 마음은 짐승의 마음이다.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하여 롬7;22-29, 8 ; 1-2, 고후5;11, 롬7 ; 손은 마음을 가리킨다.
유전(遺傳) 법(法) 남편 된 예수가 죽으심으로 그의 가진 선(善)은 우리에게 상속(相續)되었다. 우리에게도 죄(罪)에 대하여 죽음이 있다. 악을 버리게 된다. 부활(復活)하셨으니 우리에게도 부활(復活)이 있다. 선善)에 상속(相續)받은 것이다. 예수 와 한 몸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을 것이다. 고생을 당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죽으신 예수를 따라가자. 의심 말고 따라가자. 저와 함께 영광(榮光)중에 나타나리라. 우리 지금 받는 고난(苦難)이 세상 죄 안 짓는 것과 오는 구원영광(救援榮光)은 족히 비교 할 수 없다. 참 생명(生命)과 기쁨은 죄에 기쁨에 비교할 수 없다. 예수를 따라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 것이다. 죄의 법 법은 죄는 아니다. 법대로 싸우지 않으면 헛수고다. 살린 이다. 시기(猜忌)함으로 될 것도 아니요, 원하고 달음질함으로 될 것도 아니다. 택한 자 곧 하나님에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 자 그 말숨을 순종(順從)하여 지켜가는 자에게 상이 있다. 사람을 외모(外貌)로 취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 있는 자는 다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다. 거듭나야 그의 심령(心靈)에 찬미(讚美)한다. 늘 기도(祈禱)할 것이다. 심령(心靈)으로 기도 하고 선한마음으로 찬송(讚頌)할 것이다. 산 마음에서 산 기도가 있을 것이요, 참 찬송(讚頌)이 있을 것이다. 신으로 기도하라. 진정(眞正)한 기도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服從)하는 기도(祈禱),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기도(祈禱),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기도(祈禱), 신으로 기도(祈禱) 할 것이다. 합리적 예배(禮拜)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 나에게 베푸시는 이를 찬송(讚頌)할 것이다. 외식이 아니요, 말만이 아니요, 소리 나는 곡조만이 아니다. 우주의 곡조에 맞추는 찬송(讚頌)이요, 우주의 공법에 합당한 기도(祈禱)이다. 사람의 생긴 것이 계란(鷄卵)과 흡사하다. 밖으로는 전부 계란(鷄卵) 껍질 같이 싸였고 성자는 마음이시고 내가 창조 때에 편수(編首)가 되셨다고 말씀하셨다. 잠언성자는 말씀하시다. 성자는 마음에 모든 경륜(經綸)이시요 경륜(經綸)의 통변이 되신다. 성부 와 성자와 성신은 하나님이시다. 마음속에 속에 내라고 하는 것을 내라고 하는 것을 죽여 벼려야 함 고전 14;26, 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이 넚은 우주 공정한 공법 밑에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내 뜻 내 고집 사망에 생각 내 지혜(智慧)는 아낌없이 버리자. 성자(聖子)의 뜻에 순종(順從)하자. 내 마음은 그의 성전(聖殿)이 되어 그의 경륜(經綸)을 이루시도록 비워 드릴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에 편수(編修)가 되셨다. 성자(聖子)는 말숨이시다. 성자(聖子)는 모든 말숨의 경륜(經綸)이시다. 성신(聖神)은 경륜(經綸)의 통역(通譯)이 되신다.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은 하나님이시다. 나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나라고 하는 것을 죽여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말숨만 잘 듣고 순종(順從)할 것이다. 속에 성령(聖靈)께 배울 것이다. 아담의 죄지은 나는 죽고 내속에 예수가 성령(聖靈)께 배워 나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방언을 힘쓰지 말고 통역을 할 것이다. 예언을 힘쓸 것이다. 성령(聖靈)의 뜻을 표현할 것이다. 드러날 것이다. 소리는 나나 내 안에 성령(聖靈)은 죽어 버린다. 성령(聖靈)은 죽이고 자기만 나타내면 무슨 빛이 있느냐? 매일 신사 참배(參拜)를 하고 무서운 우상숭배(偶像崇拜)를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 자기 배를 위하여 자진(自進)해서 하고 있다. 강제(强制)로 신사(神社)에 나가는 것이 크뇨? 자심(自心)이 정욕(情慾)에게 굴복(屈伏)하는 것이 더 크뇨? 내안에 생명(生命)을 위하여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생명(生命)을 위하지 않는 것이 죄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禁食)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책잡았다. 예수님은 신랑이 있을 때에는 금식(禁食)하지 안하여도 일없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예수가 계시면 금식(禁食) 안해도 좋다. 지금은 성신(聖神)으로 계시니 성신(聖神)이 내 안에 계시면 금식 안 해도 좋다는 말씀이다. 신사 참배(參拜)하라고 권하는 그 심령에도 우리주님 계신다. 그이들 다려 축지 박지 말 것이다. 옳지 않는 소리 하는 것은 죄다. 모르고 성령 근심시키나 하나님을 저주한다. 신이 아닌데다가 엎드리는 것은 성령을 엎드리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생명(生命)은 폐할 수밖에 없다. 생명(生命)이 죽어지면 에덴동산에서 어리석게 지은 죄로 종의 직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의지를 굽히는 것이 성령을 거슬리는 것이다. 의지의 주인공 마음에 경륜(經綸) 생명(生命)으로 편수(編修)되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다. 나를 죽인다. 내 욕망(慾望)을 어디까지 죽이자. 살려는 마음을 버리면 살 것이다. 오른 편 강도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알면 다시 살 것이다. 우리 남편 되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거기서 벗어 나왔다. 나를 죽여야 죄가 안 온다. 주님은 종의 직분을 온전히 끝까지 하셨다. 나를 죽여 버리면 죄와 영영이 갈려 버리고 죽었다. 다시 사신 주님이 오신다. 헛된 것이 안 죽으면 생명(生命)의 명을 어긴다. 부모(父母)와 자식(子息)이 갈리면 불효자식(不孝子息)이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갈리면 불효자식(不孝子息)이다. 시작이 어리석고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잘해나가다가 실수(失手)를 한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지 살아서는 안 된다. 점점 낮은 자리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지 내가 올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 시조가 죄(罪)를 지었다. 생명(生命)은 죄(罪)를 짓지 아니했다. 그리스도는 죄(罪)를 위하여 종과같이 순종하고 죽으셨다. 성부는 왜 성자를 보내셨는가?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구원 하시려고 보내셨다.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보내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찾으려고 보내셨다. 선한 것 상하지 않게 생전에 사망을 이루시려고 보내셨다. 죄(罪)를 위하여 보내셨다. 누구든지 제 생명(生命)을 아끼는 자는 죽고 주를 따라 죽고자 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선을 찾을 것, 마10;24, 내가 어리석어서 죄(罪)를 짓는다. 그런데 자기의 어리석은 것은 드러내지 않고 핑계를 함으로 죽는다. 뱀이 시킨 것은 뱀의 직분(職分)이다. 하나님의 형상(刑象)대로 지음을 받은 인생(人生), 하나님의 대표(代表)가 되어가지고 짐승의 말을 듣고 짐승의 핑계를 한다. 하나님을 복종(服從)하고 순종(順從)하여 짐승을 아는 자가 오히려 뱀에게 복종(服從)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끄럽고 무서워서 피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은 죄(罪)로 인해서이다. 사망은 부끄러운 것이다. 어두움은 빛을 부끄러워한다. 바알과 하나님은 원수가 아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아담이다. 짐승이 음녀(淫女)를 미워하였다. 저 사람이 꾀이는 것은 저 사람의 책임(責任)이 아니다. 꾀임 받는 나의 죄(罪)다. 꾀이는 것은 뱀의 직책(職責)이다. 남을 원망(怨望)말고 자기를 책망(責望)하고 선에 이치(理致)를 따라 행하여 진리(眞理)의 종이 되어 발악(發惡)하지 말고 죽으면 새사람이 된다. 벧전 20;18, 성자가 발악(發惡)하면 이치(理致)에 다치지 않는다. 예수께서 유다보고 친구라고 하셨다. 끝까지 친구라고 하셨다. 나를 해하려고 하는데 대하여 미워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順從)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물어야지 나대로 있으면 반칙(反則)하는 것이요, 등에다 대고 있는 것이다. 묵상(默想)과 명상(冥想)은 하나님께 나의 생각과 의지를 온전히 부합(符合)해야 하는 일이여야 한다. 신으로 하고 마음으로 할 것이다. 진정으로 간절(懇切)함으로 할 것이요. 정성(情性)되게 철저히 할 것이다. 애걸복걸(哀乞伏乞)하는 마음이여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원수(怨讐)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퇴각(退却)시켜야만 된다. 우주(宇宙)와 일치(一致)하는 사색(思索)을 붙들어야만 한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옅게 파다가는 너 죽는다. 이 담은 예수를 보내셔서 헐어버리셨다. 우리는 형제간(兄弟間)이요, 자매간(姉妹間)이다. 세상(世上)으로도 그렇고 하나님 편으로도 그렇다. 영육간(靈肉間)에 형제(兄弟) 자매간(姉妹間)이다. 욕심(慾心) 때문에 원수(怨讐)가 되었다. 휘장(揮帳)이 있다. 법(法)의 모양은 버릴 것이다. 율법(律法)의 참뜻은 너 나가 없는 것이다. 옷을 입었으니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法)의 모양뿐이다. 속에 죄(罪)가 부끄럽다. 노아는 포도원 농부가 되셨다. 아버지가 술 취하여 벗은 몸으로 누운 것을 보고 아우에게 말하였다. 동생은 뒤로 걸어가서 옷을 덮어주었다. 함은 저주를 받았다. 죄(罪)가 부끄러운 것이다. 옷은 모양뿐이다. 죄(罪) 지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휘장(揮帳)이 예수님 운명하실 때에 찢어졌다. 법(法)이 휘장(揮帳) 죄(罪)다. 육체적은 법(法)을 헐어 버린 것이다. 생명과 나 사이에 이 장해가 있다. 죄의 담이 있다. 이것 헐어버리면 생명과 나는 하나 된다. 새 생명으로 산 것이다. 법(法)을 버리면 새 생명이 나타난다. 죄 안 지으면 원수(怨讐)를 맺으려 하나 옷으로만 가리게 되고 죄(罪)를 지으면 이것이 법이다. 법에 모양만 취하여 원수(怨讐)를 맺는 것이다. 모두 옷만 입었고 남녀가 무례히 행하면 죄(罪)다. 법(法) 모양을 취하여 원수(怨讐)가 안 되려 한다. 그러나 죄(罪)지으면 원수(怨讐) 된다. 그러나 사람과 내 마음이 원수(怨讐) 되였다. 법의 모양으로 원수(怨讐) 안 지으려 하나 자식(子息)이 부모(父母) 몸둥이 보는 것은 죄 아니다. 내 몸둥이도 같다. 죄(罪)를 드러내는 것이 실수다. 옷 벗으면 세상 법은 죄라고 인정(認定)하나 마음 새롭게 하기 전에는 그 좇아 없어서는 문란(紊亂) 하니 그렇게 하여야 된다. 그러나 성경 보지 않고는 부모 자식(子息) 간에 옷 벗음을 보면 부끄럽게 여긴다. 그것이 죄(罪)다. 죄(罪)지은 후에 가죽 옷 지여 입히신 것이다. 아담 해와가 선악과 따먹고 죄(罪) 지은 후에 무화과(無花果) 나뭇잎으로 옷 지어 입었다. 사망의 열매다. 모르고 지으면 늘 근심이다. 이것이 죄(罪)된 줄 알면 안할 것이다. 결과는 죽는 일이다. 참배(參拜)안하면 왜 법은 죄(罪)를 정하는가? 마음 참배(參拜)는 하고 세상영광은 취하면서 모양만 버리려 한 까닭이다. 죄(罪) 없는 척 하는 까닭이다. 참배(參拜) 안할 수 없다. 내가 엎드리는 것이 내 속에 의지(意志)를 엎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신 예수를 엎드리는 것이다. 우리 욕심 때문에 예수를 신사(神社) 앞에 엎드리게 한다. 마치 경관(警官)이 억지로 사람을 신사(神社)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은 자기 월급(月給) 가족(家族) 먹여 살리려고 엎드리는 것이나 마찬 가지다. 내 죄(罪)가 엎드리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마음 우상(偶像) 쫒아내면 보이는 우상(偶像)은 부끄러워하고 물러간다. 내 속에 어두운 것이 있어야 어두운 것이 가까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내 속이 밝으면 어두운 것이 물러가고 가까이 못 오는 법(法)이다. 옛날 법(法)에 머리 깎으면 죽이는 법(法)이다. 우리 머리 숙이면 죽이는 것이다. 죽임 당한 것이다. 예수님이 대신 값 주고 사신 생명(生命)을 내가 죽인 것이다. 새 생명(生命)을 허락하셨다. 과거에 우상(偶像) 섬기는 죄(罪)로 예수가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生命)을 주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생명(生命)을 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자기 것인지를 모르니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이다. 세상(世上) 영광은 세상에게 돌려주어라. 생명(生命)은 하나님께 바치라. 예수님 십자가를 기쁘시게 지셨다. 달게 지셨다. 이 세상(世上)은 죄(罪)의 문에 매여 있다. 죄(罪)와 관계를 끊으면 세상(世上)에서 벗어날지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죽는 것이다. 죽으면 세상과 관계없다. 세상이 상관 않는다. 죄(罪)에게 다 갚아주셨다. 그러므로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을 수 있다. 죄(罪)의 권세(權勢)는 법이다. 법의 권세(權勢)는 사망(死亡)이다. 사망(死亡)만 이루어 버리면 법에서 벗어난다. 법에서 벗어나면 사망(死亡)은 떠난다. 사망(死亡)에서 뛰어나 영광(榮光)의 생명(生命)에 자유(自由)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냐? 풍파(風波) 적신(赤身) 칼 기근(饑饉) 위험(危險)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셨다. 몸도 당신의 것이 아니셨다. 주인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다 맡기셨다. 밤중에라도 그가 인도(引導) 하시면 따라나섰다. 한번은 밤중에 감동(感動)이 있어 나서 십리나 되는 마을 뒤에 가서 마을 뒷산에 가셔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랬더니 그 후에 얼마 못 되어서 주의 이름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마을에 예배당(禮拜堂)이 섰다. 바로 앉으셨던 앞집이 예배당(禮拜堂)이 되었다. 그는 모든 재산(財産)도 주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아셨다. 누가 손해(損害)를 해를 부쳐도 그는 모른다고 하셨다. 주님처분대로 하실 것으로 아셨다. 산에다 집을 지었다. 남의 토지가 좀 들어갔다. 산 임자는 엉뚱하게 값을 청구(請求) 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말없이 다 요구(要求)대로 수응(酬應:따라) 하셨다. 그들은 얼마 못가서 몰락(沒落)을 당했다. 화초(花草)를 옮겨 심고 꽃나무를 가꾸고 못을 파고서 잉어를 사다가 기르시면서 끝없이 기뻐 하셨다. 산에 지나가던 자들이 지팡이 하려고 나무를 베여 갔다. 화초(花草)는 옮겨갔다. 잉어는 잡아다가 먹었다. 인심이 각박(刻薄)함을 몇 번이나 한탄(恨歎)하고 우셨다. 그 생명(生命)을 애련(愛憐)히 여기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외에는 뜻과 마음을 안 쓰셨다. 아무리 목사 자녀라도 모여서 믿음의 도리(道理)나 덕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끝없이 기뻐하시고 좋아 하시고 같이 담론(談論)하시다가도 말이 해이(解弛)해져서 세상 이야기나 쓸데없는 말이 나오면 그냥 그의 얼굴에는 침울(沈鬱) 한 빛이 떠돌고 안 좋은 낯빛으로 그 자리를 떠나셨다. 그의 말숨은 주의 도리(道理)가 아니시면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아니 하셨다. 예(禮)를 생각 하시느라고 잡수시지 않으셨다. 예(禮)가 아니면 안 움직이셨다. 누가 변론(辯論)을 일으키면 사랑으로 대하셨다. 구진 소리를 하고 떠났어도 그는 나쁜 말은 아니 하셨다. 옆에서 듣던 이들이 그 사람 간 뒤에 변론(辯論)이라도 하면 자기네들이 무슨 상관(相關)이냐고 책망(責望)하셨다. 옆에서 듣기만 하고 옳은 것은 취(取)하고 그른 것은 버리기만 하라고 권(勸하셨다. 편론(偏論)하는 것은 죄(罪)를 범(犯)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주의 말씀대로 편론(偏論)들은 말라고 권(勸)하셨다. 전재산(全財産)을 다 바치셨다. 세상 도리(道理)로 친척들에게 토지와 집과 심지여 살림살이와 이발기구(理髮器具)까지라도 필요 한 대로 사주셨다. 그리고 남은 재산(財産)은 다 노회에 재단법인(財團法人)에 드렸다. 그것이 일가들에게도 더 유익하다고 아셨다. 개인에게 주면 파라다 먹어버리지만 재단법인(財團法人)에 맡겨두면 착실히만 해서 책임 잘하면 생전 자기들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란(患亂) 질고(疾苦)를 기뻐하셨다. 복(福)을 싫어하셨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요행(徼幸)을 극히 싫어 하셨다. 이익에는 눈을 감으셨다. 재난을 환영 하셨다. 병(病)을 맞이하셨다. 되게 앓았다가 나은 뒤 끝은 천국이라고 기뻐하셨다. 후에 올 병(病)을 생각하셨다. 병(病)이 들었다고 울지 말고 나았다고 기뻐하지 말라고 권하셨다. 병(病)이 들면 나을 것을 생각하고 나으면 병(病)들 것을 생각 하라고 하셨다. 그는 항상 좋은 때가 없었고 낮은 때가 없었다. 부자라고 자세(姿勢) 말고 가난하다고 한탄(恨歎) 하지 말라고 하셨다. 흉(凶)이 복(福)이라고 하셨다. 또 그와 같이 깊이 사시고 그와 같이 사셨다.
그는 모든 만물을 한결같이 사랑하셨다. 특히 사람은 더 잘 받든다고 하셨다. 가뭄에 식물에 물을 주면서도 식물도 바른 인도는 잘 받지는 않으나 그래도 사람보다 낫다고 하셨다. 산길을 다니 시면서도 칡넝쿨이나 댕댕이 넝쿨 같은 것은 다 치워 주시면서 길을 걸으셨다. 사람들의 발에 발필까 봐 염려(念慮)하심이다. 풀포기 하나라도 뽑지 않으셨다. 예배당(禮拜堂) 뜰에 잡초(雜草)라도 사람들이 뽑으려 하면 미구(未久)에 하나님께서 심판(審判) 내리실 것이니 그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한집에 계신이가 풀포기를 뽑고 그 자리에 채소라도 심으려 하면 당신은 그 풀포기를 조심스레 우대 다가 한가 진데다가 옮겨 심어주셨다. 짐승들도 사랑 하셨다. 한번은 독사가 부엌에 와서 도사리고 있었다. 부지갱이로 조심스레 몰아 산으로 보내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였다면 큰 일 날 번 하였으니 이후로부터 조심스레 몸 간직하라고 이르셨다. 하루 밤에는 어두운데서 무엇이 그를 물었다. 불을 켜고 보니 큰 지네였다. 종이로 싸서 돌 틈 속에다 가져다 넣어 주셨다. 다른 사람에게 그같이 했다간 큰일 날 터이니 다시는 인간들에 사는데 나오지 말라고 이르셨다. 무엇이나 사람에게 해롭게 하는 것은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그같이 된 거라고 한 없이 불쌍히 여기셨다. 사람에게 매이는 것은 잘 인도 할 것으로 아셨다. 나뭇가지라도 사람에게 방해되는 것은 베여 주거나 달리 붙들어 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쥐에게도 밥을 주셨다. 물에 빠졌으면 올라오게 해주셨다. 사람이 해치지만 안하면 짐승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믿으셨다. 한번은 범이 큰 소리로 산을 무너트릴 듯해서 놀래시었다. 네가 무슨 짐승이기로 피조물인데 영장(靈長)되는 사람을 놀래게 하느냐고 생각이 드셨다. 그는 어두운 밤에 산을 다니시면서 그 짐승의 거취를 살피셨다. 새벽이 되어 동틀 임박해서야 집으로 온 몸이 이슬에 젖어가지고 돌아오셨다. 저를 해칠 마음 없는 하나님의 후사(後嗣)를 해치는 짐승은 없다. 만물(萬物)을 해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 큰 벌 받으리라고 생각하셨다. 하나님이 허락 안하시면 사자라도 해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셨다. 만물(萬物)을 사랑하셨다. 파리라도 고이 몰아내셨다. 파리나 물것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한 죄로 인함이라 하셨다. 파리 생기게 하는 것도 사람 죄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진멸(盡滅)되지 않을 것으로 아셨다. 죽일수록 더 생길 것으로 아셨다.
죄 안 짓는 것이 원수(怨讐) 없애는 법이라고 아셨다. 죄는 안 고치고 병만 없애려 하니 오히려 더 큰 병에 걸릴 것으로 아셨다. 남의 집 짐승이 와서 해쳐도 그 집사람들이 잘못지도해서 짐승이 그런 버릇하는 것으로 아셨다. 닭을 길러 계란을 낳아서 연보하는 것은 좋으나 남의 것 해치 게 먹여서 연보(捐補) 말라고 가르치셨다. 도적질한 것 연보(捐補) 말라는 말씀이다. 파리가 생기기 전에 미리 예방(豫防) 할 것이요, 생긴 뒤에 죽이려고만 힘쓰지 말 것을 설명하셨다. 남의짐승 닭이라도 미리 못 오게 할 것이요, 와서 해를 부친 후에 욕하고 미워하고 죄 짖지 말 것이다 하셨다. 원수(怨讐)되지 말 것이라 하셨다. 어느 마을에 가시면 마을 어린 아이들이 욕을 하고 문둥이라고 어덩뱅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손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웃는 얼굴로 그것은 죄 된다고 타이르셨다. 그래도 욕하면 사자입도 막으시는 데 어린아이들 하나 입하나 못 막아서 애매 한말 듣게 하실 하나님 아니시매 필연(必然) 들어야 할 이유(理由)가 있다고 생각 하셨다. 배 안에도 하나씨(할아버지)도 있으니 손자라고 하나 그는 이치에 옳은 말이고 문둥이는 육체에는 문둥병 없으나 하나님께서 어린이를 통해서 속에 문둥병을 가르치는 것으로 아셨다. 어덩뱅이는 아니나 세상 어덩뱅이는 아니나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빌어먹으니 어덩뱅이도 옳다고 생각하셨다. 한(限) 끝없이 너그러우셨다. 인자(仁者)하셨다. 가뭄에 들길을 가시면 농군들이 왜 비가 안 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상제의 처분이시니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나 인심(人心)을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으냐고 하셨다. 어찌 죄 짓느냐고 물으면 인심이 점점 악해 가니 앞으로 더 좋기는 어려운 일이 라고 말씀하셨다. 묻는 이들에 심정(心情)을 깊이 동정(同情)하셨다. 얼마나 애달픈 심정(心情)들을 품었는가 하셨다. 마음들이 불타는 것을 아셨다. 심히 애린(愛鄰)히 여기셨다. 동정(同情)하셨다. 그러나 믿지 않으니 어찌 하실 도리가 없으셨다.
그는 병이 나셨다. 며칠이고 물 한 모금 못 잡수시게 매우 아프셨다. 사람들은 다 죽을 것으로 알았다. 이웃마을 에서는 죽어 장사 지냈다고 까지 풍문(風聞)이 떠돌았다. 병이 나으신 다음 어디를 가시면 그의 영혼(靈魂)을 보는 줄 아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일주간 열흘 간 아무것도 안 잡수셨다. 하룻밤에는 업어다 산에 있는 예배당(禮拜堂) 방에 놓아 달라고 청(請)하셨다. 마지막 소원(所願)이라 들어 드렸다. 업고 가니 마치 수수깡치 업고 가는 셈이었다. 살가죽과 뼈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업어다 냉동(冷凍) 방 수개월 불 안 넣은 방이었다. 누워서 다리 좀 주무르라고 부탁하셨다. 뻣뻣이 방바닥에 딱 닿아서 용이치 않으셨다. 물을 좀 떠다가 머리를 축이고 몸을 문지르라고 하셨다. 좀 일으키라고 하셔서 일으키었다. 연못가로 업어다 놓으라고 하셨다. 물을 떠서 끼얹으라고 하셨다. 시원치 않으니 당신이 옷을 벗고 연못으로 뛰어 드셨다. 광채(光彩)를 보셨다. 뛰어나와 걸어서 마을로 내려오셔서 집집을 찾아다니시면서 전도(傳道) 하시기를 사람이 사는 것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숨으로 산다고 증거(證據) 하셨다.
그는 20 세기 한국의 호세야 시었다. 달아난 아내를 아니 두 번이나 달아난 아내를 데려오셨다. 첫 번 출가(出家) 하였을 때에는 그의 쓰던 것을 다 짐꾼을 사서 다 가져다주었다. 그는 살수가 없어 할 수가 없이 돌아왔었다. 그는 모든 신령(神靈)한 소망(所望)으로 위로(慰勞)를 하셨다. 두 번째 나갔을 때에는 며칠이고 위로(慰勞)도 하고 돌아오라고 권유(勸諭)도 하셨다. 그는 모든 살림을 싣고 가서 살아보려고 결심 하였는지라 웬만하면 안 돌아오고 싶어서 악담 부담 하였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찾아 왔다고 물을 끼얹고 야단을 처서 찾아 가신 그에게 냉대(冷待)를 하셨다. 그의 간부(姦婦)를 대해서도 선하게 하셨다. 그 부인 데리고 살아도 유익 없을 것이니 돌려보내라고 권유(勸諭)하셨다. 그의 집에 과연 난데없는 재앙(災殃)이 발생(發生)하였다. 할 수없이 돌아왔었다. 국문(國文)도 모르는 그에게 국문(國文)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히고 찬송(讚頌)을 가르쳤다. 그는 마침내 회개(悔改) 한 것을 보시고 승천(昇天) 하셨다. 그의 생애(生涯)는 모든 각도(角度)에서 승리(勝利)하셨다. 세상을 작별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는 미리 예감(豫感)하시고 돌아가실 준비를 착실히 하셨다. 믿는 자들을 간곡(懇曲)하게 가르치셨다. 모든 진리(眞理)를 아낌없이 풀어 가르치시고 모든 사람을 아끼셨다.
최후기(最後期) 삼 년간은 이상(異常)이 모험(冒險)적이셨다. 예수를 죽인사람들이 유대인들임을 아셨다. 어디를 가실 때에도 돌아오지 못할 각오(覺悟)로 나다니셨다. 핍박(逼迫)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른 삶에게 집도 전답(田畓)도 다 주어 버리셨다. 가정 불란(紛亂)은 형언 할 수없이 그를 애태웠다. 선을 부지런히 가르치셨다. 곡식(穀食)까지라도 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분배(分配)해주시고 그 지방(地方)을 떠나셨다. 그 지방(地方)에 보일 증거(證據)는 다 보이셨다고 생각하신 까닭이다. 그는 안식처(安息處)를 못 구해 이리 저리 방황(彷徨) 하셨다. 그를 모시여 들이는 자가 이 땅위에 그같이도 하나도 없었던 까닭이다. 마지못해 산골로 드셨다. 거기서 고요히 운명(運命)하실 장소(場所)를 택하셨다. 그의 마음은 설레었다. 행여 한사람이나 후계자(後繼者)를 얻을까 하시여 날마다 목마르게 지내셨다. 눈물의 날 이였다. 눈이 부우시게 부으시고 우시고 한탄(恨歎) 하시고 애곡(哀哭) 하셨다. 하나님 전에 비실뿐이요, 애원(哀願)하실 뿐이셨다. 육체(肉體)는 극도(極度)로 쇠약해지시고 시대(時代)는 그를 용납(容納)지 않을 지경(地境)이었다. 그는 아무리 좋게 준비(準備)를 하셨을 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지금이라도 떠나실 준비(準備)를 다 해 놓으셨다. 날개가 있으시면 두루 다니시면서 믿는 자들에 사정(事情)을 살피고 싶어 하셨다. 보리 가루 조 가루 콩가루 상수리 가루로 분량(分量)은 점점 적게 잡수시고 마지막 40일간은 물도 공기로 연명(延命) 하셨다. 하나님의 값없는 기운(氣運)이라고 하셨다. 옆에서 밥 먹는 자들을 향하여 자기네들만 밥을 먹고 나는 못 먹게 문을 가리느냐고 하셨다. 공기(空氣)를 힘차게 마시고는 충분이 잡수셨다고 증거(證據) 하셨다. 장엄(莊嚴)한 최후 마지막 일 주일은 신의 태도(神意態度)시였다. 당신 손으로 나무로 만드신 들어 내갈 수 있는 틀을 요 밑에 넣고 들어 누우셨다. 물도 안 들어가는 그에 속은 몹시 탔었다. 회충(蛔蟲)은 입으로 역상(逆上) 하여 올라왔다. 소변(小便)이 곤란(困難)해서 극히 소량의 소변(小便)도 힘들어 하셨다. 마음의 세상을 애처롭게 여기시는 육체적(肉體的) 고통(苦痛) 힘이 땀나는 일주간이셨다. 시간(時間)은 임종(臨終)에 가까웠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유언(遺言)을 남기셨다, 부인(夫人)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부탁 하셨다. 소망(所望)을 안 버리게 하시려고 형편(形便)대로 부탁 하셨다. 나는 갈 줄 알라고 수차 간곡히 부탁하셨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형편(形便)대로 부탁 하셨다. 젊은 남녀(男女)들에게는 정욕(情慾)을, 장년(長年)들에게는 가정(家庭)에 얽매여 진리(眞理)를 덜 사랑 할까봐서 부탁 하시고 경계(警戒) 하셨다. 어떤 이들에게는 옷을 팔아서 가시덤불 속에서라도 성경을 보라고 부탁(付託)하셨다. 마지막 시간이 가까웠다. 당신 양 발과 머리를 붙잡으라고 부탁(付託)하셨다. 단단히 붙잡으라고 부탁(付託)하셨다. 말씀을 높이셨다. 놓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깊이 파라고 부탁(付託)하셨다. 진리(眞理)를 붙들라는 부탁(付託)이셨다. 높이 들라고 하셨다. 높이 올렸을 때에 말씀 하셨다. 누가 나를 받들어 올리는고? 하나님의 딸들이 로다 하고 안심(安心)하시는 한숨을 내 쉬셨다. 내려놓으라고 말씀 하셨다.
이사야 52;13-15 내 종이 지혜(智慧)롭게 행하리니 받들어 높이 올림을 입어 지극히 존귀(尊貴)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他人)보다 상하였고 모양(模樣)이 인생(人生)보다 상하였음으로 무리가 그를 놀라웠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列邦)을 놀랠 것이며 열 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傳播)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도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시는 구절(句節)이었다. 그의 일생(一生)은 축소(縮小)한 일대(一代) 성인(聖人)인 듯싶었다. 그는 고요히 잠드셨다. 거룩한 아드님 성자(聖者)의 최후(最後)를 연상(聯想)케 했다. 그의 가신 후에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예언(豫言)이 역력(歷歷)히 일일이 이루어짐을 이상히 여겨 불신자(不信者)들까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개탄(慨嘆)들을 했다. 논이나 밭이나 자기(自己)들 것으로 아느냐고 하셨다. 과연 그 말씀은 그가 떠나신 지 오래지않아 목도(目睹)했다. 쇠그릇에 밥 먹을 줄 아느냐고 하시더니 과연 공출(供出) 놋그릇을 회수(回收) 당하였다. 농사지었다고 자기만 배부르게 밥 먹을 줄 아느냐고 하시더니 과연 공출(供出)로 자유로 못 먹었다. 동네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흠모(欽慕)했다. 그러나 늦었다.
※알려드립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1947년에 기록한 것입니다. 선생이 쓰신‘말슴’을 ‘말숨’ 혹은 ‘말씀’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9주 광복절 : 정경옥과 이세종의 만남 (0) | 2024.08.15 |
---|---|
뜨거운 여름 : 이현필 선생 말씀 (0) | 2024.08.11 |
폭염 : '우리의 거울'에서 (0) | 2024.08.04 |
기장 수확 :'우리의 거울'에서 (0) | 2024.07.30 |
들깨 모종 : '우리의 거울'에서 (0) | 2024.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