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뜨거운 여름 : 이현필 선생 말씀

mamuli0 2024. 8. 11. 09:36

 모두들 금년 여름이 뜨겁다고 한다. 말복 3일 전이다. 울금밭에 물을 주고 있다. 몽골 여행에 다녀온 큰자부가 내려와 이불 빨래와 살림사리 정돈을 해주고 갔다. 연방죽에 탐스런 꽃이 피었고 분꽃과 나팔꽃도 피었다.  뜨거운 여름이 가을로 달려가고 있다.

 이덕주 교수가 발취한 이현필 선생 말씀을 올려본다.

 

 

이현필 선생님의 말씀

 

★ 이덕주 교수의 <이현필, 그 말씀과 영성 회복>에서 설명문을 거의 빼고 이현필 선생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위주로 젊은 세대를 위해 일부는 현대어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이 선생님이 1956년 3월, 신안리 농대 묘목장에 식구들과 함께 가셨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模倣)하는 것 외에 영적(靈的) 진보(進步)의 길은 없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도(道) 구령(救靈)을 원하는 자가 들어갈 유일한 문(門)이다. 그럼으로 누(누구) 만일 편하고 쉬운 길만 거닐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를 모방(模倣)함에서 어긋나는 것이니 그러한 정신을 나는 선량(善良)한 것이라고 인증(認證)할 수 없다.

二. 그대의 최대의 관심은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 주를 닮고자 하는 열열한 사랑에 충만한 소원을 갖게 하는 것이오라. 매사를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행하기로 힘쓰라.

三. 그럼으로 어떠한 소원이나 즐김이라도 만일 그것이 순수하게 천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이를 버릴 것이다. 주께서는 이 세상에서 이르시는 동안 나의 음식이라고 부르신 성부의 뜻 외에는 아무런 취미나 소원도 갖지 않으셨다.

四. 비록 아무리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결코 그를 그대의 모든 행위에 완전한 모범으로 가리지 말라. 마귀가 그대에게 그의 불완전함을 본받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할 것이니 그러면 그대는 결코 그르칠 위험이 없으리라.

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항상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혀 살라. 그러면 그대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평화를 깨닫고 그 평안을 그리스도의 인내 중에 보존하리라.

六. 만사에 있어서 그대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으로써 족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통을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쉬라.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고통이던지 아무 휴식이던지 취하지 말라. 이러기 위하여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내적으로 모든 애착을 끊어 버림으로써 외적으로 너를 온전히 없애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七. 아직도 자기를 중히 여기는 자는 자아포기를 모를뿐더러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않다.

八. 모든 재보(財寶)를 초월하여 가난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라. 그대를 위하여 생명까지 버리기를 주저치 않으신 그대의 영혼이 천상정배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九. 만일 그리스도를 소유코자 진실로 바란다면 결코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찾지 말라.

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 않는 자는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찾지 않는 자이다. 마음으로 언행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받은 은사 각각 다르다. 자기 분수 생각고 모방하라. 천부의 뜻이 음식으로 여겨지나 예수를 닮으려고 힘쓰면 결코 닮아진다.

十一. 시련 중에 있을 때는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천주任을 조금치라도 닮고자 하는 원을 가지라. 이 세상 생활이 주를 닮기 위함이 아니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

十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받을 줄 모르는 자는 과연 무엇을 아는가? 주를 위하여 참는 고통이나 수고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것을 참아 견디는 이는 남이 부러워할 만한 자이다.

十三. 천주任께서 주시는 은혜와 총애를 바라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천주 성자와 더불어 노고와 간난을 받고자 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十四.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라고 자칭하는 자도 가끔 극히 조금 밖에는 주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 주 안에서 쓴 맛이 아닌 위안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1956.3.13, 3.23)

 

 

선생님이 1957년 광복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심령에 자유라야 참 자유지 정치나 국가적이나 경제적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안 후부터는 자유가 없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안 후부터는 그 뒤에는 비난과 곤고, 모욕, 능멸이 따르기를 장미꽃에 가시 찌르듯 했으나 그의 심령은 참 자유가 있었다. 모든 사람의 종 될 수 있는 자는 참 자유자이다. 체조선수 되기 전에는 자유가 없다. 기축에 의해 순종함으로 선수가 되듯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면 참 자유자가 아니라 죄의 종이 된다. 신의 법도 안에서 사는 것이 참 자유자다. 예수를 섬기는 것은 예수에 종 된 것이요 예수에 종 되면 심령에 참 자유한다. 신께서 주신 자유는 빼앗을 자가 없다.”(1957.8.15.)

 

선생님이 계명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울타리치여벌리고 롬 7:22-25, 엡 2:11-18, 마 6:24

방애안자 마 6:19-20, 히 4:10. 마 6:6 고후 6장

비지먹지마시고 마 4:9-10. 마 16:22-23

진지자시오 살전 4:1-5, 요 4:34, 벳전 3:117. 4:1-2. 히 11:24-27, 35- 히 4:1-5

하로고생 벳전 3:13=16, 히 12:4-9, 마 20:1-16, 잠 3:11-12

하로만족 눅 16:25-26, 요 2:9, 요 13;14-17, 엡 4:9-10. 마 6:34. 11:28-30 딤후 2:3-23.”(1957.10.18.)

 

“울타리 치워 버리고 방에 앉아, 비지 먹지 마시고 진지 자시오. 하루 고생, 하루 만족입니다.” 언뜻 들으면 “무소유의 삶으로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자.”는 원론적인 말씀처럼 들리나 한자로 바꾸어 쓰신 문장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잡한 다른 이치를 좇아 살면 벌과 고통이지만(鬱他理致予罰理苦) 그걸 버리고 애통하며 살면 평안이 찾아옵니다(防哀安自). 옳지 못한 생각과 세력은 마귀가 보여주는 고통이니(非志勢旨魔視苦) 참다운 뜻을 이제 펴 보이시오(眞志自示要). 축하받으며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賀勞苦生)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은 만족이 됩니다(下路滿足).”

 

복잡하기만 한 세상 이치와 만족을 모르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단순한 삶과 의지. 그것이 동광원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경옥 교수가 이공을 만난 후 터득한 지혜, “복잡에서 단순으로!”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어덕혜삼리가 그락저락삼리다 창 1:6-8, 엡 2:1-10. 창 1:4-5, 요 1:4-5, 3:19, 마 6:22-23

조각조각주은 의복입고 롬 7:22-25, 엡 2:11-18. 마 6:24, 롬 5:3,4 벳전 2:21 히 12:10-13. 히 5:7,8

지극히 자근자로 처하자 마 25:38-40.”(1957.10.16)

 

이것도, “어떻게 삽니까? 그럭저럭 삽니다. 조각 조각 주은 의복 입고 지극히 작은 자로 처하자.”로 읽을 수 있지만 한자 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의 은혜 덕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於德惠參理可). 그 낙원에서 떨어지니 빛과 생명과 자유와 목적을 잃고 인격을 상실한 것이다(其樂底落參離多). 조각된 조각품이 주님의 의로운 온유하고 겸손한 옷을 입고 쌍십자가[苦]를 지고((彫刻彫刻主恩義服入苦)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 아래 길로 내려가서(志極喜子近者路) 남을 받들어 섬기자(處下者)”

 

“사랑은 호흡과 같다. 드러마시는 숨이 받는 사랑이라면 내쉬는 숨은 남을 사랑하라는 숨일 것이다. 숨은 쉬고 내쉬지 않으면 송장과 같듯 받은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송장과 같다.”(1956.3.11)

 

들숨이 받는 은총이라면 날숨은 나누는 사랑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 이여 쉰다. 숨을 안 쉬면 송장이다, 그럼으로 숨 쉬는 동안은 예수 같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숨을 쉬려니 늘 탄식이다. 고통만 더해갈 뿐이다. 예수는 예술로 속화되는 길이요 몸으로 정신으로 지혜로 도라가면 참 예술이다. 殉敎= 순교. 따라 죽는다. 따라 죽음이 있어야 성신 받을 터인데 따라 죽을려고는(진리로) 안하고 입으로만 구하니 성신은 불가능하다.”(1957.10.17)

 

“믿지 안은 증거= 내 부모 형제자매로 보여지지 안는 것. 부모자매로 보여지기 전 사랑한다는 것은 간사한 편벽된 사랑. 사랑도 아니다. 아버지 얼골 뵈올려고 노력할 것. 상한 갈대도 꺾지 안으시고 꺼저가는 등불도 끄지 안으시는 마음 얼골 뵈올려고 노력해야 하며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시거나 불평이나 들래지 안으신 예수님 마음씨 뵈옵고자 힘쓸 것입니다.”(1956.3.6)

 

“만물은 아버지를 알게 하기 위해 지으셨으니 만물을 볼 때에 아버지 성품 보듯 느끼지 않을진덴 편벽, 미혹, 죄로 보여진 것이다. 모든 만물과 사람 본바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소생이다, 그럼으로 아버지 성품 기억 안음으로 짐승같이 되어짐으로 짐승 같은 행동과 습관을 하게 된다. 악한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처지기 전에는 구원은 없다, 그럼으로 먼저 마음이 말가저야 성품과 습관은 고쳐지나니 우에를 바라보는 마음 늘 있고 땅을 보는 마음 제함으로써 성품이 고처저서 구원있는 만물과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 성품 깨다르면 참 인격을 보는 자요 바른 견해다. 아버지의 성품을 보고야 어찌써 초목도 함부로 못할 것이며 더구나 형제는 멸시치 못할 것이다.”(1956.3.6)

 

“음식을 주되 상대자의 소화능력을 생각지 않고 주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이다. 밝은 정성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고는 손해도 되려니와 허망해진다. 음식을 분간 못해 병해를 방지 못하며 머리가 아둔해 집니다. 의식침(衣食寢)을 함부로 하고는 바르게 못 살며 정신이 맑아지지 않는다. 생활 단정하게 하는 것은 곧 예배다.”(1957.8.10)

 

“양심으로 증거하고 몸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입으로 증거하고 또 해석해야 알아들음. 생명의 말씀은 아는 사람부터 실행해야 함.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심령의 양식이다. 힘이다. 밝히 알았다는 것은 내 마음 드려다 볼 줄 아는 것임. 양심 바르지 않고 성경 보는 것은 말씀을 능갈려 버림과 같음. 내 행위는 사랑의 율법을 짓밟는 것 아닌가 반성하라. 생명의 말씀임을 알고 원하는 마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능력 주 허락하심.”(1956.1.10)

 

“직접 아버지께서 진액을 받을 것. 곁가지에서 매치면 괭이가 된다. 구제할 때 외인에게 시기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오른 손이 하는 것 왼 손이 모르게 할 것입니다. 곁가지= 사람에게 엉키어서 열매 맺으려 말고 원가지에 붙어서 열매 맺을 것. 내 아버지가 포도원 농부라. 사람은 사람을 껍질은 만들 수 있으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이상한 일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살려고 할 것이 아니고 아버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 순종할 것이다. 큰 일 하려말고 예수 안에 있으려고 힘쓸 것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자신은 감춰지나 예수를 통한 향내가 난다. 동광원(東光園)이라 나타내지 말고 이름 없는 소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자녀로만 알게 이름 없는 자 될 것(대가를 구하지 말 것).”(1956.2.14.)

 

“어린 아이는 큰일은 못하나 하나님 섬기는 데는 보수를 바라는 맘이 없다. 복 받기 위해 섬기는 것 아니기에 어린 아이를 금치 말라 하신 것이다. 사랑을 하되 도리여서 해야 하며 일을 해도 삯 받기 위해 일하지 말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많음이라. 천국은 이해타산 모르는 자의 것입니다.”(1957.10.24)]

 

“오후 다섯 시에 부름을 받은 자는 일하고 싶었든 그만큼 마음 준비가 되어 있음에 불러준 것이 고마워서 있는 정성을 다 했을 것이며 대가를(삯을) 구하는 것보다 일 시켜 준 것만 감사했을 것이다, 그것이 즉 일 삯이다. 일하는 것은 도리로 해야지 삯을 바라는 맘은 자신이 비루해집니다. 그 마음과 정성만 보시는 것이다. 먼저 부름 받은 자의 심리상태. 욕심. 시기. 교만. 원망 등. 작정한 그대로만 받아야 할 터인데 주인을 책망하는 교만 된 맘이다.”(1957.10.20)

 

“진리의 공부는= 자기 이기는 극기심을 양성하는 것임. 자기를 못 이기고 일만하려고 힘쓰는 것은 헛세월 보내는 것뿐이다. 거짓된 세상에서 참을 찾아야 사는 참 가치가 있다. 나는 일선장병이라는 것, 또는 진리의 용사임을 망각치 말 것입니다.”(1956.3.3)

 

 

 

선생님이 1956년 연초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영원히 섬기신다. 내가 깨끗지 못해도 사랑하시는 사랑에. 넓이나 높이나 길이를 알기를 바람. 육체를 입히시는 이유? 육체가 속사람을 괴롭혀서 하나님의 사랑은 감촉함으로, 흠미함으로, 더욱 날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셔 우리의 키가 그리스도를 아는 분량이 장성한 아내로써 만나기 위하여 날로 정화하고 거룩해지기 위해 육체를 두셨습니다. 선생이라고 하면 흠모만 해서는 안 되고 따라가며 모방해야 됨. 찬란한 심판 주 따르는 것 아니고 낮은 자리 겸손하고 가난한 주를 따르려는 것이어야 함.”(1956.1.26)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 완전한 존경은 그 교훈 완전히 지키는 데 있다. 예수는 낮아지심으로 의를 완성시키셨습니다. 부활승천은 의의 결과. 고생당하시고 승천하셨음. 높은 자리에서 의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 지중히 높으시면서 가장 낮아지심. 낮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회개하려는 마음이다. 낮아지려는 마음 없는 자는 회개하려는 마음조차 없는 자다. 대제사장 예수 보았으나 낮아질 마음 없음으로 예수 보지 못했음.”(1956.1.19)

 

 

“1. 종자는 땅 속에 겸손히 묻혀야 싹이 돋고 소망을 바라보고 참아 자라고 열심히 힘써 끝까지 참음으로 결실합니다. 부지런히 자기 찾고 남의 잘한 것만 보고 배우려 힘씀으로써 좋은 마음씨가 됩니다. 자기 죄만 샅샅이 찾아 그 죄에 대해 무슨 형벌 받을 줄 아는 자는 지혜 있는 자이다. 벌 받아 마땅한 자인데 예수께서 대신 져주심으로 살고 있는 줄 아는 자는 지혜 있는 자이다.

2. 자기 생각이 옳은 줄 아는 순간에 교만이 자라서 마귀가 그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 선행할 때 내가 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벌써 그 마음에 마귀시험 임함이며 선한 일도 아닙니다. 하여간 자기는 천군천사가 보호하심을 알아서 선한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있어야 합니다.

3. 누룩 비유. 다 되어 깨끗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음란의 생각이 들어오더니 잠깐 동안에 음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의인이 죄인 되는 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빠르다. 순결한 마음은 마귀가 제일 싫어한다. 내 몸 가지고 예수님 일, 즉 선한 일 한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피 한 방울을 아낌없이 쏟으시고 사주신 몸인데 엄청난 해보다 빛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 큰 잘못이다. 우리의 몸은 아버지를 알리는(인자와 자비와 거룩) 빛의 몸이다. 내 몸을 주님이 사신 줄 알진데 저만 먹으려고 땅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역적은 이기주의다. 온 재산 다 드려 구제할지라도 햇빛 되게 가르치지 않으면 더 큰 일만 만드는 것뿐이다.”(1956.3.17)

 

“잘하나 못하나 뜻이나 상하지 않게 순종하면 넘어져도 기뻐하시고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신다. 겸손하려고 해도 예수님의 겸손 따를 수 없다. 사람끼리도 낮아지도록 힘쓸 것임. 내 고생 감당해 주시는 이가 계신 것을 알면 덜 감당시킬 생각이라도 든다. 감정과 의지와 행함이 일치되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죄며 잊어버리는 시간에 범죄 하게 된다. 예수 따라가려면 모방해야 함. 능력 주시는데 순종할 맘 없음으로 행치 못한다. 겸손과 사랑= 예수보다 더 낮아지려는 것이 예수 따르는 것이다.”(1956.1.28)

 

“사랑을 실천함으로 천국을 이루는 것이지 율법을 주장함으로 예수님 기쁘시게 못하고 마귀를 기쁘게 한다. 내 주장 내 고집을 주장함으로 의는 되나 하나님을 기쁘시게는 못한다. 예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함으로써 천국의 사자가 될 것이다. 내 고집이 내 몸을 시달리게 만든다. 내 몸을 예수님께 바쳐서 자기를 이기고 복종하고 삶으로 세상의 왕 되는 것보다 더욱 행복됩니다.”(1956.3.19)

 

“가난을 싫어하는 것은 예수를 싫어하는 죄가 됩니다. 무엇이 미련한 것인가요? 부자가 되려는 마음. 편하려는 마음. 말씀 듣는 것이 복이 아니라 마음 깨끗한 자체가 복이다. 온유, 겸손, 핍박, 그 가체가 복된 것이다. 있는 지혜 다 써봐야 미련함을 알 수 있음. 정직하니 힘써보면 자기 약한 것을 알아진다.”(1955.12.27)

 

“예수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 만유의 왕 평화의 왕 권능을 가지신 왕으로 오셨음. 구유에 나신 예수는 가장 어려움을 무릅쓰고 보배를 가지고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심. 원수를 대적치 않으시고 애급으로 피난하심. 전능케 하시니 악한 자를 힘으로 권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셨음. 아는 것과 기분으로 살지 말고 평화의 왕의 지도대로 살아야 함. 가장 비천한 곳에 나신 주님, 가장 가난하신 주님, 이름 없는 곳에 나신 주님을 믿고 기억해야 함. 믿을 것임. 비천한 곳 같이 하심으로 비천한 가운데 평화를 얻을 수 있음. 가장 귀한 보배 바치기에 합당하신 왕.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 바쳐서 섬길 수 있는 왕이심(가난한 곳에 나셨기 때문에).”(1956.1.19)

 

“바로 본 예수= 예수님을 안다. 고생의 예수. 죽어야 할 예수.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 본 예수래야 참 예수다. 세상 눈 견해와는 아주 정반대다. 틀리지 말 것임(사 52:13-, 53:6- ) 베드로 왈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내가 어데로 가오리까?= 속, 알맹이 없는 말이다(아버지 뜻 모른 말). 우리가 틀리기 쉬운 점= 영생하고 죽지 않는 예수만 알었다. 그리스도의 것이면= 간난하고 핍박받고 어려운 예수를 말없이 따를 것임. 고생아? 너는 나를 괴롭게는 하나 해롭게는 못한다. 잘 믿는 것. 사나 죽으나 잘 순종하는 것. 성신님께 순종하는 것(벧전 1:3-, 2:21, 3;17. 4:1-12. 5:7-9).”

 

선생님이 1956년 부활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고생과 가난이 예수님 나시기 전에는 수치였으나 나신 후로는 영광이다. 날마다 의를 위해 큰 고생 당할수록 더 큰 빛이 되며 헛되이 생명을 낭비치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짜내서 우리 속의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 부활에 대한 소망과 인식이 확실해야 어둠과 싸워 이길 수 있음. 고생이라는 기름으로 참아서 충분히 인식하시기 바람. 인간의 정성이 예수님께 하등 필요 없지만 간절된(만나고 싶은) 마음을 보시고 만나 주신다. 공의대로 살면 부활하고 싶지 않아도 부활하게 된다. 그 생명은 누구에게 정복당할 생명이 아니고 죄와 악에게 이길 생명임으로 왕 될 생명이다.”(1956.4.1 부활절)

 

“믿으면 누구나 구원 있다. 믿게 해 주심으로 믿는 것이 은혜다.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예수를 우러러 보며 죄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회개와 동시 순종하면 구원 있다. 우에서 믿음 주심으로 믿어야 겸손해진다. 가난 핍박을 환영하는 것이 곧 예수 영접하는 것임, 참으로 믿으면 남의 부족이 보이지 않고 내 부족만 보인다. 내가 예수를 만들어서 믿으니까 남의 허물만 보인다.”(1955.12.27)

 

“어떤 것이 성신이며 성신 아닌 것 분간하자. 참 성신= 속에 죄를 들춰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 주신다. 성신 받을수록 자신이 뚜렷이 나타나 죄가 자꾸 나오는 것이다. 거짓 성신= 성신을 받으면 불이 나타나서 죄가 소멸되는 줄 아는 것. 예수님 말씀 알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다(요 14:16- , 31- ).”(1955.12.26)

 

“내 물건 도둑질 당할까 조심하는 것보다 내가 남의 물건을 탐하는 마음 없는가 검토할 것이다. 사랑과 덕을 상실할까 조심할 일이지 물건 도적 마질까 염려는 금물입니다. 믿음은 든든한 소망과 점점 밝아져 가는 고로 하나님 계신 것을 완전히 의지하는 것임. 칭찬과 존경을 탐하지 말 것이다. 수양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동물과 같다. 빚 하나 없이 간간 궁핍하게 지내는 것은 참 평안인데 빚지고 배부르고 평(平)하려 하니 수양의 가치를 모르는 자이다. 어둡게 오래 사는 것보다 밝게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참 사는 것이다.”(1956.3.21)

 

“예루살렘 생활은 고결한 생활. 고통이 따르는 생활임. 고결한 생활을 원하는 자는 많은 어려움을 자원해야 합니다. 자립정신. 두 발로 서는 사람 되어야 함. 거룩한 생활은 가치 있는 생활임으로 고생스럽고 멸시받고 가난하나 참된 생활함으로써 부끄럼을 씻고 활발히 나아갈 수 있다.”(1956.1.14)

 

“하나님의 말씀과 사귀의 말. 영생만 믿을 것이 아니라 죽음도 믿을 것임. 죽음도 영생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 천국은 고생이다. 걱정 많을수록 평안함 많다. 고생 끝에 평안함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 자체가 복이다. 믿었으면 고생이 복으로 믿어진다, 참 죽음= 참 영생. 참 복. 인간의 근성= 부끄러운 죄 중에서도 오래 살기를 원한다. 나를 따라 오려 하거든= 예수 따라오려 하거든 죽기 싫은 마음 이기고 고생회피 하지 말고 자기 당할 고생 달게 지라. 마땅히 당할 고생 회피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고생하면서 즐거워하는 그것이 천국이다. 성신 받기 원하면 고생 받을 줄 각오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곳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장막 되기 원하라. 장막 짓는 생활은 고생스러운 생활임.”(1956.2.14)

 

“그리스도의 썩지 않을 영생의 약을 쓰고 있음으로 세상 약을 안 쓰는 것이지 그냥 안 쓰고 있는 줄 아는 것은 무지한 자이다. 아버지께서 이 몸 가지고 빚 갚고 오라셨는데 그 책임 알지 못함으로 편하려고만 꾀한다. 내 몸 아니니까 세 바쳐야 한다. 성전세(聖殿稅) 바치려 작정하면 잡념은 물러간다. 고난을 달게 받는 것이 성전세(聖殿稅) 바치는 것이다. 자기 죄 때문에 꼼짝 못하는 것이 성전세(聖殿稅) 바치는 것이다. 죄 있게 살았으니 썩지 않을 것으로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가야합니다.”(1956.4.8)

 

“무엇보다 하늘나라 덕만 존중히 여깁시다. 맑음 맘. 즉 정절. 덕행 중에 제일은 정절이다. 덕행을 힘쓸 것임. 죽음의 준비= 기쁨으로. 아버지의 뜻을 마음에 삭이는 시간이 예배다. 소리 없이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더 기뻐하심. 진리만 옳게 붙들면 넓게 전파된다”(1955.12.30.)

“마음 닦는 일 곧은 마음 지키며 정조 지켜야 합니다. 선한 일이 좋기는 하나 정조 꺾일 것 같으면 무슨 일이고 집어치워도 좋다. 방해꾼은 이방사람 유대인 보담도 귀족 선지자들이다. 즉 내 속에 것이 원수다. 하나님 말씀 잘못 분간하는 선지자들이 방해함. 호기심으로 따라가지 말 것. 시간 시간이 깨달음으로 은혜의 줄에 매여 있어야 함.” (1956.1.7)

 

“한편 손 마른 자. 음란으로 인한 병이다. 예수님은 의를 완성시키려 이 세상에 오셨다. 자기 상태가 어떠한지?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소명감을 알지 못함으로 남의 책만 잡는다. 지식(겨)들만 찾지, 은혜(알맹이)를 구하지를 않는다. 영혼이 육체보다 귀한 줄 알지 못함으로 사람보다 양을 더 귀히 여긴다. 육체의 멸시 당하는 것은 아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면 날마다 걱정이 줄여가고 기쁨이 늘어가 점점 차서 넘쳐흘러야 함.”(1956.1.30)

 

“음란의 세대에 이적은 죽어 다시 하는 길 밖에는 없다. 잘 먹고 평안하려는 마음은 음란한 마음이다. 사람노릇 못한 것을 원통히 여기고 내 예수님을 내 맘에 왕으로 뫼시지 않는 한 선한 일, 고생, 기도생활, 자복, 열심히 했으나 그 결과 더 악해진다.”(1956.3.5)

 

“우리는 음신(淫神)에게 둘려 그와 타협하느라고 진리를 분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구별 받은 자니 음란의 생각은 말라는 뜻이다. 마음의 음욕을 제거하는 방법= 근본 되신 하나님을 알아 그 사랑에 옴빡 해결방책이 없다. 하나님 계심을 먼저 알고 그의 거룩하심을 믿을지니라. 딤전 5;1-12. 성신을 의지 않을 진데 정욕을 억제 못한다. 특별한 성신의 보호를 받기 전에는 육십 세가 되기 전에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못합니다. 모태로부터 보호받기 전에는 할 수 없고 보혈로 닦음과 성신께서 보호치 않으시면 정절을 결심했어도 성취되는 것 아니기에 크게 영광이며 또한 예수의 영광이다.”(1957.10.24)

“도덕(道德)과 율리(律理)를 지켰다 할지나 정절을 부인하면 허사요 저주가 됩니다. 정욕의 몸으로는 늙은이를 아비같이 젊은이를 누이같이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욕을 정복하신 분이 시종여일하게 이루었음에 한평생 섬긴 자를 믿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심을 알자고 믿는 것이다. 피와 물을 다 쏟고 목마르시기까지 참으신 그 사랑을 얼마나 가치 있게 섬겼으며 추앙했는가를 성찰할지라. 남을 전도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생명까지 내놓으시고 사랑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급선무입니다.”(1957.10.24)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시는 아버지. 믿으면 행함을 따른다. 감사함으로 불평 없이 살면 육체의 짐 가벼워지고 영의 짐 무거워진다. 안 믿고 말씀 들으면 미신이 된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어린 아이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어린이들은 천국생활이다(음란한 마음이 없음으로). 음란한 마음 없으면 (어린이) 천사와 동등임. 걱정, 근심, 의식, 욕심, 정욕, 주검 등에 흔들리지 않는가? 욕심에 흔들리는 교회는 주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1956.2.5)

 

“내 것이 없어야 예수를 따르며 빛을 보게 됩니다. 범죄 후 사정할 곳은 예수 밖에 없다. 불쌍히 측은히 여기시고 부끄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죄를 용서하시는 선생이시다. 어려운 일 당할수록 예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사내= 사람. 딸= 딸렸다. 여자는 남자에게 딸린 것으로 알았으나 예수 오심으로 개성을 살려 동정도 지킬 수 있는 유권을 주신 것이다(눅 21:1-4). 연보궤 옆에서 보셨다. 물질 쓰는 것. 그 마음과 정성을 보신 것이다. 상대자의 영혼과 자기의 영혼을 무시하지 않을 진데 범죄할 수 없다.”(1957.8.25)

 

“내가 사랑하는 자는 몇이던지 책망하여 경계하노니 그런고로 네가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묵 3;19- 미지근= 未知根 근본문제를 몰랐다. 차던지 더웁던지 하라= 예수께서는 불타기를 바라신다. 탈것 타야 함. 聽= 드를 청 = . 이왕耳王= 임금의 귀, 즉 성신의 귀. 십사일심= 십자가에 죽어야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 안에 다른 것 들면 갈리고 만다. 정절을 빼놓고 다른 것 다 잘 했을지라도 쓸 데 없다. 근본문제(정절)에 타협했으면 힘이 없다. 정욕이 십자가에 정복을 당해서 힘을 못 써야 말할 자격이 있다.”(1957.10.14)

 

“이세벨의 교훈= 행음과 우상 섬기기다. 성경의 원리가 이세벨의 교훈을 제하라는 것인데 원리를 안 동광원을 이단이라 칭한다. 그러나 원리를 안 자로서는 어느 경지에서라도 지킬 것뿐입니다(정절도 법이다). 법을 통하지 않고는 사랑이 보장 안 됨으로 정절을 고조하는 것이다. 연락의 근원(정욕) 가 아니고는 안 됨으로 정절을 생명시하라고 고조하는 것이다. 양심이 이겨야 사랑이 성립된다. 양심을 짋밥고는 정신이 깨나지를 않는다. 성신이 이끄는 대로 순종만 하면 양심이 깨어난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높은 을 주셨다. 그러나 육체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에 못 이겨 짐승과 같이 되었다. 는 시금석이다. = 금을 시험하는 돌. 내 남을 들여다보고서는 낙심 않을 자 없다. 그러나 자비하심을 의지해야 꾸준히 인내로써 소망삼고 나아가면 이뤄주심에 낙심치 말지라.”(1957.10.12)

 

“지구는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주님 계심으로 참 빛이신 주님은 지구 우에 발을 디디었습니다. 저는 어두운 일, 빛을 등진 일을 합니다. 참 빛이신 주님 앞에서 무엄하게도 어두운 짓을 범한 자입니다. 제 마음은 낮고 천하고 더러웠습니다. 개보다 못하고 도야지보다 못했습니다. 햇빛보다 밝으신 주님이시여. 제 맘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나 주여 제 맘 속 청결히 하옵시고 좌정하옵소서. 마음의 주인이 되시오며 왕이 되시옵소서. 오- 제 마음의 하나님 임금이시여. 주님 계심으로 마음은 빛을 보고 해 질 것이며 가장 맑고 거룩해지며 깨끗하고 순결해 질 것입니다.”(1956.2.1.)

 

1956년 2월에 드리신 기도입니다.

“죄를 지어도 주님은 버리시지 않으심은 아버지를 위하사 죄인을 사셨기 때문으로 소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 풍성하심은 죄 지으면 주님의 마음이 더 괴로워하심으로 소이다.

죄 지은 자식 탕자의 목을 껴안으신 주님, 주여 그 사랑을 기억케 하소서.

성신이시여. 항상 깨닫게 인도하신 주님. 그 사랑 잊지 않도록 늘 인도 합소서.

이적에 믿는 약한 자로 소이다. 늘 잊고 안 믿는 죄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굳게 믿음 주옵소서.“(1956.2.3)

 

“행선에는 목표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동정의 목표가 있다. 태평양을 행선하는 배가 북극성을 목표하듯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 같이 거룩케 되기를 목표하는 것이다. 진실을 힘쓰라, 진실만 위주하면 굶어죽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거짓으로 태산을 쌓으나 천사가 와서 그 거짓부터 뽑고 태산을 무너뜨린다. 참 크리스챤이면 목숨을 더하기 위해 그 시간에 할 일 미루지 말지라. 배운 바를 실행치 않으면 교만만 더해갈 뿐이다. 선이 심해갈수록 악도 심하다. 악한 자를 선대하는 것이 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재산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오직 환난과 한탄뿐이다. 행복되다(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행복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좋은 의식(衣食) 않는 것이 우리 집의 자랑이오 명리(名利)를 웃보는 게 내 버릇인데 여지긋 바람 물 주렸으니 죄받는 듯하여라. 뱀에게, 음란(淫亂)에게, 사람에게 둘려서는 안 된다. 범죄(犯罪)치 않으려고 항시 염려하고 살아야 한다. 정조{情操(喜怒哀樂)}를 잘 가져야 자유할 수 있다. 자기(自己)를 다스리는 것. 그리스도의 법아래 있는 것이 참 자유다. 내 몸에 맑은 알짬, 신을 기르는 물이 있는데 몸 밖에 나가면 더러워집니다. 농사 질 줄 모르면 범죄치 않고 살 수 없다.”(1956.8.13.)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마다 일생일사(一生一死)는 반드시 있는 것인즉 최후까지 예수님 계명을 지키다가 죽게 되는 것은 큰 영광이요 자랑이다. 최후까지 온유한 맘으로 대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 같이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 곧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기 위해 사는 것이며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믿음에 몰려왔으니 동기는 믿음, 방법은 사랑, 목적은 예수의 계명 때문에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따뜻하고 목적이 빛나는 일이랴(정절).”(1957.7.28.)

 

“나사로= 사사로운 길에서 떠났다는 뜻이다. 잘 믿는 절정의 최고 목표를 나사로의 생활로 나타낸 것이다. 또 연락을 부자에게 양보한 기록을 나사로의 비유로써 나타낸 것이다. 엡 4:9-10. 생활이 저급할수록 심령은 맑아진다. 저급한 생활 속에서만이 참 만족이 있는 것이다. 부자의 요청= ‘나가서 전도하겠다고 물 한 방울을 혀에 대 달라.’ 들어줄 법도 싶지마는 그 사이는 음란과 연락[宴樂]과 착취의 구렁이가 있는 고로 용납이 안 된다. 남을 착취하지 않고는 연락을 못한다. 사치도 음란에서 시작됨에 사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낮은 생활 한 것만큼 평안과 위안이 옴으로 가난을 푯대로 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일수록 저급한 생활을 하게 된다. 성인들의 생애를 회고하라.“(1957.10.24)

 

“자기 위해 바친 재물 성신의 감동으로 거절하신 것이다. 자기의 행위 성신께 들어남에 심령이 놀래여 혼이 떠났다. 성신께서 숨 쉬지 않게 하시면 살 수 없다. 초대교회 출발은 이와 같이 깨끗했든 것이다. 직분 받기 위해 받치는 재물은 받아서는 안 되며 삼가야 합니다. 돈 가지고 구원의 꿈도 못 꾼다. 사람을 속임이 아니오, 성신을 속임으로 거스리면 죽읍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라. 새 정신에 새로운 형식 있어야 함. 새롭고 깨끗한 정신을 새 가죽 부대에 넣으라는 것이다. 예전 것은 까마득하게 잊으라는 것이 아니요 예전에 귀한 것은 본 삼아 이행해야 합니다. 거짓 없이 깨끗하니 지내온 초대교회인의 마음과 정성으로 떡을 뗀 것 본 삼아야 함.”(1957.8.4)

 

“예수 가신 한적한 곳 그 뜻대로 가야 합니다. 평안하기를 구하지 말지라. 예수님 가진 멸시와 조롱과 고생 속에서 사셨음에 그 본을 받아 그 제자와 같이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평안을 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울 왕은 자기 뜻대로 삶으로 물리침을 당했다. 방종은 원욕이요 자유는 진리다. 성 다미엔. 다미엔의 자아혁명을 성취한 원인은 성경과 십자가만 잡고 기구로써 이루었다. 그는 광고주의자가 아니였고 하나님과 문둥병자를 섬기기에만 치중했다. 다미엔의 생애는 불행 속에 뭍었으나 참 기쁜 속에서 깨끗하게 무명소자로 승리했든 것이다. 자기 개조 외에 더 큰 혁명은 업나니라.”(1957.10.24)

 

“공부의 목적= 마음 맑아지기 위해. 풍성히 삶을 얻기 위해. 생의 향상을 위해 공부합니다. 마음 맑음은 지혜 얻는 일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선함으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고임을 받는다. 고임= 높임 받는다는 뜻. 자기가 자기에게 당한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할 줄 알아야 고임을 받습니다.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면 이해를 잘할 수 있습니다. 과학= 실지사실을 토대로 하여 잘 알아감으로 하는 공부. 신학= 신학의 필요는 지식의 근본이니 공부할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과학은 물질향상에 쓰임 받습니다. 철학= 추상(짐작)에서 시작해서 알아가는 것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참 삶을 알지 못함으로 참 죽음도 알 수 없다. 허망하게 삶으로 허망하게 죽나니 정신생활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철학공부 하는 것이다. 종교는 구원(힘주심과 지혜 주심과 살려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건실함으로 풍성하니 삶 수 있다. 영혼이 정신을 쓰고 정신이 몸을 써서 일을 합니다. 힘만 가지고 해결하는 것은 소나 말과 같다.”(1956.4.20.)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문(禪問)을 던지셨습니다.

“마음 그대로 그린 그림 마음에 그린 행동인가?

마음 그대로 글을 쓰면 마음에 글은 사랑인가?

마음 그대로 말을 하면 마음에 말은 올음인가?“(1956.2.28)

 

“내 고집 세움으로 즉석에서는 좋을지언정 후회뿐일 것이며 불안뿐이다. 순종의 결과는 불안이다. 자기 믿으라는 예수인데 남만 보고 권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나에게 거역하는 자는 내게 큰 공부과정이 된다. 내 맘속에 평화를 원하면 잘 참는 연습하라. 선에 둘리지 말라. 욕심 있는 자가 큰일을 해도 나라를 망칠 수가 있다.”(1956.3.20)

 

“동광원 들어오기 전에는 불안과 공포에 떨던 마음 이였는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어 기쁨으로 살아오는 도중에 그 평안을 보존 못하여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함으로 모두 팔아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 평안할수록 한층 더 경외하고 믿음이 든든해야 할 터인데 교만과 사치로 다 판 결과는 수치와 멸망이 뒤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무명베와 고무신도 제대로 못 신을 때는 오히려 불평이 없었다. 그러나 사치의 맘을 채워준 결과는 사람의 힘으로는 혜여날 수 없는 끄나풀에 매여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도 회개는커녕 달리 평안한 길을 택하려 하나 구해지는 것도 아니요 불안과 죽음만 자초하는 것이다.”(1957.8.18)

 

“온전히 하나님만 의뢰해야 하겠는데 사람 中心으로 모이니 힘이 없다. 거룩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범죄 후 자복과 동시 회개치 않을 수 없다. 아부라함= 하나님 계신 줄 않믿엇을진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도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약속도 않으셨을 것이다. 신실하심과 참되심을 믿는 자에게 쌍방계획이 있는 것이다. 약속을 믿고 오래 기다리는 자에게 약속하시며 믿음이 굳어지며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증거는 선한 행실이다.”(1957.8.30.)

 

선생님이 1957년 광복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심령에 자유라야 참 자유지 정치나 국가적이나 경제적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안 후부터는 자유가 없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안 후부터는 그 뒤에는 비난과 곤고, 모욕, 능멸이 따르기를 장미꽃에 가시 찌르듯 했으나 그의 심령은 참 자유가 있었다. 모든 사람의 종 될 수 있는 자는 참 자유자이다. 체조선수 되기 전에는 자유가 없다. 기축에 의해 순종함으로 선수가 되듯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면 참 자유자가 아니라 죄의 종이 된다. 신의 법도 안에서 사는 것이 참 자유자다. 예수를 섬기는 것은 예수에 종 된 것이요 예수에 종 되면 심령에 참 자유한다. 신께서 주신 자유는 빼앗을 자가 없다.”(1957.8.15.)

 

선생님이 계명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울타리치여벌리고 롬 7:22-25, 엡 2:11-18, 마 6:24

방애안자 마 6:19-20, 히 4:10. 마 6:6 고후 6장

비지먹지마시고 마 4:9-10. 마 16:22-23

진지자시오 살전 4:1-5, 요 4:34, 벳전 3:117. 4:1-2. 히 11:24-27, 35- 히 4:1-5

하로고생 벳전 3:13=16, 히 12:4-9, 마 20:1-16, 잠 3:11-12

하로만족 눅 16:25-26, 요 2:9, 요 13;14-17, 엡 4:9-10. 마 6:34. 11:28-30 딤후 2:3-23.”(1957.10.18.)

 

“울타리 치워 버리고 방에 앉아, 비지 먹지 마시고 진지 자시오. 하루 고생, 하루 만족입니다.” 언뜻 들으면 “무소유의 삶으로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자.”는 원론적인 말씀처럼 들리나 한자로 바꾸어 쓰신 문장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잡한 다른 이치를 좇아 살면 벌과 고통이지만(鬱他理致予罰理苦) 그걸 버리고 애통하며 살면 평안이 찾아옵니다(防哀安自). 옳지 못한 생각과 세력은 마귀가 보여주는 고통이니(非志勢旨魔視苦) 참다운 뜻을 이제 펴 보이시오(眞志自示要). 축하받으며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賀勞苦生)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은 만족이 됩니다(下路滿足).”

 

복잡하기만 한 세상 이치와 만족을 모르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단순한 삶과 의지. 그것이 동광원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경옥 교수가 이공을 만난 후 터득한 지혜, “복잡에서 단순으로!”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어덕혜삼리가 그락저락삼리다 창 1:6-8, 엡 2:1-10. 창 1:4-5, 요 1:4-5, 3:19, 마 6:22-23

조각조각주은 의복입고 롬 7:22-25, 엡 2:11-18. 마 6:24, 롬 5:3,4 벳전 2:21 히 12:10-13. 히 5:7,8

지극히 자근자로 처하자 마 25:38-40.”(1957.10.16)

 

이것도, “어떻게 삽니까? 그럭저럭 삽니다. 조각 조각 주은 의복 입고 지극히 작은 자로 처하자.”로 읽을 수 있지만 한자 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의 은혜 덕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於德惠參理可). 그 낙원에서 떨어지니 빛과 생명과 자유와 목적을 잃고 인격을 상실한 것이다(其樂底落參離多). 조각된 조각품이 주님의 의로운 온유하고 겸손한 옷을 입고 쌍십자가[苦]를 지고((彫刻彫刻主恩義服入苦)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 아래 길로 내려가서(志極喜子近者路) 남을 받들어 섬기자(處下者)”

 

“사랑은 호흡과 같다. 드러마시는 숨이 받는 사랑이라면 내쉬는 숨은 남을 사랑하라는 숨일 것이다. 숨은 쉬고 내쉬지 않으면 송장과 같듯 받은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송장과 같다.”(1956.3.11)

 

들숨이 받는 은총이라면 날숨은 나누는 사랑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 이여 쉰다. 숨을 안 쉬면 송장이다, 그럼으로 숨 쉬는 동안은 예수 같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숨을 쉬려니 늘 탄식이다. 고통만 더해갈 뿐이다. 예수는 예술로 속화되는 길이요 몸으로 정신으로 지혜로 도라가면 참 예술이다. 殉敎= 순교. 따라 죽는다. 따라 죽음이 있어야 성신 받을 터인데 따라 죽을려고는(진리로) 안하고 입으로만 구하니 성신은 불가능하다.”(1957.10.17)

 

“믿지 안은 증거= 내 부모 형제자매로 보여지지 안는 것. 부모자매로 보여지기 전 사랑한다는 것은 간사한 편벽된 사랑. 사랑도 아니다. 아버지 얼골 뵈올려고 노력할 것. 상한 갈대도 꺾지 안으시고 꺼저가는 등불도 끄지 안으시는 마음 얼골 뵈올려고 노력해야 하며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시거나 불평이나 들래지 안으신 예수님 마음씨 뵈옵고자 힘쓸 것입니다.”(1956.3.6)

 

“만물은 아버지를 알게 하기 위해 지으셨으니 만물을 볼 때에 아버지 성품 보듯 느끼지 않을진덴 편벽, 미혹, 죄로 보여진 것이다. 모든 만물과 사람 본바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소생이다, 그럼으로 아버지 성품 기억 안음으로 짐승같이 되어짐으로 짐승 같은 행동과 습관을 하게 된다. 악한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처지기 전에는 구원은 없다, 그럼으로 먼저 마음이 말가저야 성품과 습관은 고쳐지나니 우에를 바라보는 마음 늘 있고 땅을 보는 마음 제함으로써 성품이 고처저서 구원있는 만물과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 성품 깨다르면 참 인격을 보는 자요 바른 견해다. 아버지의 성품을 보고야 어찌써 초목도 함부로 못할 것이며 더구나 형제는 멸시치 못할 것이다.”(1956.3.6)

 

“음식을 주되 상대자의 소화능력을 생각지 않고 주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이다. 밝은 정성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고는 손해도 되려니와 허망해진다. 음식을 분간 못해 병해를 방지 못하며 머리가 아둔해 집니다. 의식침(衣食寢)을 함부로 하고는 바르게 못 살며 정신이 맑아지지 않는다. 생활 단정하게 하는 것은 곧 예배다.”(1957.8.10)

 

“양심으로 증거하고 몸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입으로 증거하고 또 해석해야 알아들음. 생명의 말씀은 아는 사람부터 실행해야 함.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심령의 양식이다. 힘이다. 밝히 알았다는 것은 내 마음 드려다 볼 줄 아는 것임. 양심 바르지 않고 성경 보는 것은 말씀을 능갈려 버림과 같음. 내 행위는 사랑의 율법을 짓밟는 것 아닌가 반성하라. 생명의 말씀임을 알고 원하는 마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능력 주 허락하심.”(1956.1.10)

 

“직접 아버지께서 진액을 받을 것. 곁가지에서 매치면 괭이가 된다. 구제할 때 외인에게 시기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오른 손이 하는 것 왼 손이 모르게 할 것입니다. 곁가지= 사람에게 엉키어서 열매 맺으려 말고 원가지에 붙어서 열매 맺을 것. 내 아버지가 포도원 농부라. 사람은 사람을 껍질은 만들 수 있으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이상한 일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살려고 할 것이 아니고 아버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 순종할 것이다. 큰 일 하려말고 예수 안에 있으려고 힘쓸 것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자신은 감춰지나 예수를 통한 향내가 난다. 동광원(東光園)이라 나타내지 말고 이름 없는 소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자녀로만 알게 이름 없는 자 될 것(대가를 구하지 말 것).”(1956.2.14.)

 

“어린 아이는 큰일은 못하나 하나님 섬기는 데는 보수를 바라는 맘이 없다. 복 받기 위해 섬기는 것 아니기에 어린 아이를 금치 말라 하신 것이다. 사랑을 하되 도리여서 해야 하며 일을 해도 삯 받기 위해 일하지 말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많음이라. 천국은 이해타산 모르는 자의 것입니다.”(1957.10.24)]

 

“오후 다섯 시에 부름을 받은 자는 일하고 싶었든 그만큼 마음 준비가 되어 있음에 불러준 것이 고마워서 있는 정성을 다 했을 것이며 대가를(삯을) 구하는 것보다 일 시켜 준 것만 감사했을 것이다, 그것이 즉 일 삯이다. 일하는 것은 도리로 해야지 삯을 바라는 맘은 자신이 비루해집니다. 그 마음과 정성만 보시는 것이다. 먼저 부름 받은 자의 심리상태. 욕심. 시기. 교만. 원망 등. 작정한 그대로만 받아야 할 터인데 주인을 책망하는 교만 된 맘이다.”(1957.10.20)

 

“진리의 공부는= 자기 이기는 극기심을 양성하는 것임. 자기를 못 이기고 일만하려고 힘쓰는 것은 헛세월 보내는 것뿐이다. 거짓된 세상에서 참을 찾아야 사는 참 가치가 있다. 나는 일선장병이라는 것, 또는 진리의 용사임을 망각치 말 것입니다.”(1956.3.3)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약 1:27)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2-5)

 

“일곱 촉대= 우리에게도 일곱 지혜가 있다. 일곱 지혜를 바르게 쓰면 (양심) 만사가 바르고 빛이 난다. 에베소교회= 예리한 비판으로 니골나당을 미워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은 잘 했으나 처음 사랑을 바린 것을 책망하심. 남의 비판만 힘쓰다가 사랑까지 잊을까 조심하라는 책망이다.”(1957.10.7)

 

“서머나교회= 죄인 됨을 깨달아 기구함을 들으심이다, 정신 속알 양심 바라야 유대인이지 행동여하를 살펴 론단치 말 것이다.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의 생애= 죽을 것이 죽음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설 것이 서야 교회다. 양심 지키는 것이 바른 교회임으로 곧 자신이 교회이다. 희생이 있어야 생명이 확대합니다. 자기 버리고 가릴 것 가릴 것이지 남의 허물 찾다가 사랑까지 상실할까 경고하신 것이다. 즉 자기에게서만 사색할 것이다.”(1957.10.7.)

 

선생님이 1955년 성탄절에 주신 말씀입니다.

“1. 하날은 하나를 얻어야 맑습니다.

2. 따는 하나를 얻어야 평안합니다.

3. 신은 하나를 얻어야 신령합니다.

4. 골짝은 하나를 얻어야 참니다.

5. 만물은 하나를 얻어야 삶니다.”(1955.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