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섬나리 활짝피다 : 욥의 고난

mamuli0 2023. 7. 1. 10:10

 계묘년이 벌써 반이 갔다. 오늘도 흐리고 비소식이 있다. 큰아들이 다녀가고 세째가 다음주에 온다고 한다. 산천은 그대로인듯하나 세대가 바뀌고 있다. 능소화가 물레나무 꽃 옆에 몇송이 피었다. 섬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욥의 고난

1995. 1. 3.

욥기 4장

‘하룻밤도 문젠데. 그것이 다 하느님이 성품을 들어낸 거요. 참사랑.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 걷게 하시지 않았는가? 무릎에 힘이 빠져 흐느끼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치고 보니 어찌할 줄을 모르겠구나. 자네가 어려움 겪더니 이렇게 힘이 빠져있구나 이보게 자네가 하느님 모시고 꼿꼿이 살아오지 않았는가? 자네가 그렇게도 소망하던 것은 믿음을 지키며 올곧게 사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말이야. 그래 이유를 모른다고. 엘리후는 안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지어본 거예요. 엘리후는 하느님의 대변자니까 성령의 역이라고 볼 수 있고 욥은 인류 대표로 중보니까 중보 역을 했다. 인류 죄 짐을 자기가 져야 해. 그래 예수 역을 한다고요. 그러고 또 중보니까 하느님 편에도 옳은 것은 끝내 옳다고 하는. 이게 하느님 편으로 더 채우니까 인류가 책망을 하긴 했어. 악인이 받을 벌이니까 그걸 그릇되게 하지 말란 말이야. 인간의 대표가 모든 저주와 불행을 자기가 받아라. 그거야. 그 말이야.

 

그러면 여기 22장 끝 절에 보면, 29절 30절

‘하느님은 쟁취하며 잘난체하는 것들을 꺾으시고 겸손히 사는 이들은 구해주신다네 자네가 깨끗이 산다면 죄 있는 사람이라도 그분은 건져주실 걸세. 그런 사람이라도 그분은 구해주신다네.’ 이 진리요. 진리의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 욥이 당하는 건 그 이유를 모른 것뿐이지 말은 진리란 말이야. 이것도 성령의 역사로 하는 거란 말이야. 말이 진리면 그 사람은 아무리 죄인이라도 말 자체가 죄인이면은 그때 그 순간은 성령이 쓰신 거란 말이야. 진리의 성령이 쓰셨어. 긍게 그 사람을 상대할 것 아니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까, 하느님 대변자니까 그 말을 듣고 뜻을 깨닫고 그대로 실행해라. 그러나 자기도 행치 못하는 말이니까 행동은 본받지 말라. 자기 사명이 모세의 자리에 있으니까, 모세를 이어받는 사명을 가졌으니까 그 말은 다 하느님 말씀이니까 그 뜻대로 알아듣고 그대로 시행하되 그 사람은 그 말씀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니까 행동을 본받지 말라 그런 거예요. 근데 우리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 행동부터 보지 않아요? 그리고 신용 못 해요. 아 저런 사람. 그래 사마리아여인이 마을에 가서 했을 때는 전도했을 때는 예수님하고 대화를 하는 끝이니 까, 그만큼 신용하고 가본 것이지 예수님과 대화하기 전 같으면 신용도 안 해요. 남편이 여섯이나 되는 그런 여자의 말을 누가 믿느냐? 그 대화 본 그 결과가 그만큼 유력이 있어요. 마을사람들이 신용할만한 그 힘이 거기 나타나는 거예요. 그럼 대화 결과가 뭐냐? 물동이를 내동댕이쳐버리고 왔거든요. 남편은 지금 언제 물 길어다 밥해 주련가 기다리고 있을 것 아니에요? 그건 무엇을 뜻하느냐? 현재까지 생활을 완전히 청산한 거예요. 이제 새 출발입니다. 복음 전해야겠다. 영의 운동을 해야겠다. 성령 운동을 해야겠다. 성령의 종이 되어야 겠다. 그것이에요. 지금까지는 헛된 것에 종살이했다. 그 진심을 갖고 가서 와보라고, 내 과거의 생활을 속히 알아보더라고. 어쩌면 나 그런 사람 못 봤는데 처음 봤는데 아마 우리가 바라던 메시아가 아닌가? 메시아인 것 같은데 확신이 없으니까 여러분 가보십시오. 그 가보고는 뭐라고 말했냐고. 나는 그대, 당신 말만 듣고 믿는 거 아니요 실지 가보니까 과연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그래 고맙다고. 그만큼 마을 전체에 전도를 해버렸어요. 고맙게 표현하고 받아들여.

 

 

그럼 아까 여기 또 29장 24절

‘내가 따뜻하게 웃어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힘을 얻었다네’ 그 친구 증거와 같아요. ‘환한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저들은 용기를 냈다네. 사실 어떤 문젯거리가 있을 때마다 내가 결정하는 일 많았지. 임금이 군대를 지휘하듯 윗자리에 앉아 일을 처리하였지. 때로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네.’ 그게 실력이, 이제 본인이 증거 한 거예요. 아까 친구들도 증거 했고. 친구 증거와 본인 증거와 일치한다 그 말이야. 그만큼 친구야, 깰 수 없는 친구야. 그만큼 믿어줬어요. 근데 인제 고통을,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모른 것뿐이야. 그만치 어둡단 말이야. 그러나 끝까지 같이 친구로 떨어지지 안 했으니까 욥의 기도를 통해서 구원하는 거라고. 말하자면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인류가 구원하는 거란 말이야.

 

이사야 6 이사야의 사명

이사야가 인자 사명을 받았어요. 소명이라 그러죠. 부를 소(召)자 목숨 명(命)자. 불러서 명령. 하느님의 명령으로 부르셨는데 인자 자기 책임이 자기 직책이에요. 사명이란 말이야. 소명. 그 우리도 다 자기 사명을 찾아야 돼요. 자기 할일, 하느님의 명령은 명령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내게 바라신 것이 다 있단 말이에요 각자에게. 요것을 어떻게 해서 해결을 시켜가지고 모든 영혼을 깨우치는데 써야겠다. 그게 다 있다고. 본인의 영혼이 깨어남과 동시에 인자 또 다른 사람 영혼 깨우치는데 써야겠다. 말하자면 희생 제물이 되게 해야겠다. 미끼라 미끼, 낚싯밥.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나는 주님을 보았다. 주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시고 성전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었어요. 그분의 위에서는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날고 있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더라.’

이것을 인자 고린도전서 13장에다 대면은

믿음 소망 사랑. 희망은 두 날개로 나는 거예요. ‘그들은 웅장한 교성합창으로 이렇게 노래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늘에서 노래하는 건 이것뿐이에요. 가사가 간단해요, 세 마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그것밖에 노래가 없어. 그 외에 다른 건 필요가 없고. ‘만군의 여호와여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구나. 그 장엄한 소리로 성전이 기초까지 흔들리며 성전 안이 연기로 가득 찼다. 그때에 내가 외쳤다. 아 이제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절망이야.’ 죽는단 말은 싫죠? 이 감정은 싫어. 산단 말이 좋지. 이제 나는 죽는구나.

‘입술이 더러운 이것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만고의 여호와이신 임금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면 죽는 거예요, 죽어. 하느님 보고 산 사람 없다고. 이게 영혼 사랑이에요. ‘아 이제 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구나.’ 완전히 절망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저주를 왜 받았죠? 인류 대표로 받았다.

‘그러자 여러 스랍들 가운데서 한 스랍이 불집게로 제단에서 숯불을 하나 들고 내게로 날아와 내 입술에 숯불을 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죄가 씻겨 졌고 네 허물이 깨끗해졌다.’ 완전한 해방이에요. 속죄. 이 참 자유의 몸입니다. 인자 희망 속에 살아요. 이제는 죽었으니까 깨끗해지고 죄를 용서받았으니까 무엇의 제제를 받지 안 해요. 무엇이 어떻게 장애 부를 수가 없어요. 칼이냐 기근이냐 적신이냐 어떤 환난이냐? 어떤 환난이 닥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없다. 그런 노래예요. 그때였어요. 인자는 사명을 해야지요. ‘내 입술에 숯불을 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죄가 씻겨 졌고 네 허물이 깨끗해졌다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자 여기는 인자 순교지에요, 순교지. 영광 받을 때가 아니에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이 말 할 때는 지금 하느님은 지금 이사야가 자원할건지 아신단 말이야. 아시고는 그래 바로 가라고 하지 안 해요. 그럴 순 없어. 그건 참사랑이 아니야. 명령이 아니니까, 자원을 원하시니까.

사랑은 자원하지 누구 명령에 의해서 억지로 그건 안 된단 말이야. 자원하는 거야. 십자가는 자원해서 져야지 아 이거 안지면, 안질 수가 없을까 그건 아니라고. 어쩌면 이런 제게 귀한 영광을 안겨주십니까? 그렇게 받을 일이지 내가 뭔 죄와 잘못이 있기에 십자가를, 뭔 죄가 많아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주시는가? 그것은 오해라 그 말입니다. 복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저를 보내주소서. 저를 보내신다면 그 이상 영광이 없습니다. 영광 받을 때는 다른 사람 보내고 저주와 멸시와 천대받을 자리 같으면 저를 보내소서. 그 저주야말로 상입니다. 천대받는 것이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거여. 세상에서 영광 받은 거는 그거는. 천사 앞에 조롱거리입니다. 악마가 좋아한 것이지.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참 고맙긴 하다만은 네가 감당하겠는가 모르겠다. 그럼 네가 가서 이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그러면 여기 보기 전에 저기 한번 보고 가야죠. 이사야의 태도와 모세의 태도를 조금 대조해볼 필요가 있어요. 어디에 있지요?

 

 

출애굽기 4:10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에요 이사야는 복음의 대표자. 예언자의 대표. 그렇게 보면 좋다.

‘모세가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저는 본디 말주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부터도 그렇습니다. 주께서 이웃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지금도 그렇기는 마찬가집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굳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느냐? 누가 사람의 앞을 보게 하거나 못 보게 하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아무런 걱정 말고 가거라.’ 무슨 변명 말고. 하느님 앞에 변명이 통하질 안 해요. 왜 변명을 하냐? 하느님이 아시고 할 수 있으니까 하라는 것인데 또 친히 말씀을 넣어주실 텐데 내가 딴 걱정을 해? 믿지 않은 걱정이야 믿지 않고. 하느님의 실력을 안 믿어요. 자기만 믿은 거야 그때는 겸손한 것 같고 사양은 겸손한 것 같지만은 실상 믿음이 아니란 말이에요. 교만이에요 교만. 그런 게 죄는 뭐이냐? 믿지 안 한 것이 죄거든. 믿지 안 해서 갖가지 죄가 생긴다. 믿음은 그리스도니까 뭔 죄가 있냐? 믿음은 내가 없고 그리스도가 있네. 그리스도 안에는 죄가 없지만은 나는 그리스도 밖에는 죄뿐이에요. 신앙을 기초로 하지 않는 행위는 모두가 다 죄다. 또 신앙은 복음을 기초로 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복음은 신앙이 기초가 되어 있다. 그걸 설명하려면 또 시간이 많지만은 간단히 말하면 복음은 무엇이냐? 가장 사람들에게는 멸시천대 받는 것이다. 멸시나 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어져야 된단 말이야. 멸시천대가 그야말로 영광이다. 가시관이 면류관이다 말이야.

 

12절,

‘아무런 걱정 말고 가거라.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다 가르쳐주리라. 모세가 말하였다. 주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참 겸손한 거 같아요. 얼마나 교만하냐? 얼마나 안 믿는 것이냐? 이 말을 듣고도 뭔 말할지 내가 네 입에다 넣어준다고 하셨는데도 안 믿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어디 찾아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분통을 터트렸어요.’ 게 율법 자기 행위는 이것이에요. 결국 하느님의 분통을 터트리고 마는 거예요. 자기 잘한다는 것, 자기 뜻. ‘터트리면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면 너희 형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말주변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다 알고 있다. 그가 너를 만나러 지금 오고 있다 말이야. 오고 있을 텐데 그가 네 얼굴을 볼 때 무척 기뻐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해야 할 말을 아론에게 주라. 그에게 돌려주어라. 나는 네가 말할 때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모세가 할 때마다 아론이 할 때마다 힘이 되어 주리라. 너희가 무슨 일을 해나가야 할지도 가르쳐주리라.’ 긍게 우리 겸손이 말이야,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겸손. 참 겸손은 행동으로 잘 안 보이는 거란 말이야. 참 겸손은 자기가 없는 것이니까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높이고 마음으로 자기가 낮아지는 거지, 속은 교만해가지고 높으면서 겉으로만 굽실굽실 그건 아니다. 가짜다 이거야. 마음이란 말이야 마음. 얼마나 지금 인격을 존경하느냐에 따른 거야. 그게 겸손이야. 사람 앞에서 교만은 뭐야 인격을 무시해버려. 남의 말을 탁 건드려버린다. 그 욥기서 그 점이 있는 데요. 배울 거예요. 그면 아까 이 이사야하고 대조적이죠, 정반대 아닙니까? 두 번이나 화가 나도록 변명하다가 책망을 받았잖아요? 근데 이사야는 자원한단 말이야. 누구를 보낼꼬? 만 했지. 가란 말 안 했어요. 요거는 자기가 가라 하는데도 변명만 하고 있다는 거야. 어디까지나 자기 그 자존심을 안 내 버리려고 해요. 꽉 쥐고 있는 거예요. 이사야는 그거 깨져버렸어요. 죽었어요. 이미. 자존심 없어요. 완전히 죄에서 해방을 받았어요. 그래 뭔 일이 닥치더라도 감사할 것뿐이지. 털끝만치도 불평이 있을 일이 없어요. 이미 구색은 지나가버렸으니까 어쩌겠습니까? 모세는 항상 그 인류 대표로 자기라고 했다고. 아까 요나가 불평을 했기에 그 점이 인류대표요, 모세도. 그러면 모세는 나쁜 사람이냐? 그렇지 안 해요 그것도 하느님 증거로 봐야지.

 

 

민수기 12장보면 하느님의 증거예요.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참 이 잘못이죠. 자기 아내도 있는데 또 구스여자는 아마 흑인인 것 같다. 흑인.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을 비난했다.’ 비난도 할만 해요.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예요. 연령이 많이 차이가 있는데 어렸을 때 업어 키웠다고, 업어줬다 해요. 그럴 정도예요. 그래 그 동생이 잘못했으니까 말할 만도, 또 자기도 예언 선지고, 예언자예요. 또 하느님의 말씀 다 대화도 했고. 동생이니까 마땅히 할 말이에요. 그런데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을 나누느냐? 우리도 선지자다. 우리하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하고 투덜거렸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비난을 들으시고 모세는 이 말을.

 

31:57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또 달리 말하면 그만큼 교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근데 그게 깨져버렸다. 겸손했다. 예수의 역이라고. 예수님만치 겸손한 사람 땅 위에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겸손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겸손이 없어요. 오직 겸손은 예수 안에서만 있어요. 그래 믿음은 인자 예수의 겸손에서 겸손을 잇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인도하는 항상 교만은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드러날 때 인자 또 꾸지람을 받고 겸손해져요. 내가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동안은 항상 이거 안 떠나요. 나라는 것. 그래야 겸손해지죠. 자꾸 사람한테 매를 맞고 말이야. 꾸지람을 듣고 그래야 된다고. 저는 그런 경험도 없으면서 말은, 다른 이들은 그러더라 그 말입니다. 믿는 사람 보니까 그러더라. 저는 체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사람을 눈으로 보지 않고는 자기도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 이 선생이 그런 말씀 하셨어요. 참으로 믿는 사람 봤어야 그 자기가 믿을 길이 있단 말이야. 그 참 영적지도자가 얼마나 보배인지 모른 거예요. 이사야 30장에 있잖아요? 환난에 떡도 좋지만은 고생에 물도 좋지만은 정로를 가르치려는 스승만이 더 위대한 건 없다, 축복은 없다. 그러면은 모세의 자신이 말한 게 아니고 겸손하고 그럴 때는 예수의 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도 제일 죄인의 친구가 되었잖아요? 그게 복음이라고요. 그럼 인자 욥기에도 또 한층 인자 더 본다면 자 그걸 보고 여기 보죠.

 

욥기 31:13

‘남종이나 여종이 내게 투덜거리며 불평할 때라도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보고’ 이 대화, 여기는 남종 여종하고도 대화할 때도 말입니다. 투덜거리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럴 때도 아 그 불평 속에 무엇이 있다. 하느님의 어떤 교훈이 있다. 나를 무엇을 깨우치려는 그 종들의 불평이다. 아 그걸 바로잡아줘야겠다. 이거예요.

‘나에게 투덜거리며 불평을 할 때라도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보고 그에게 잘 대해주곤 하였습니다.’ 그 문제를 풀어주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느냐? 종이라고 무시하고 막 명령으로 이래라 호령을 하고 그럴게 아니란 말이야. 차별되지 않아요? 아까 빌레몬.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느님이 거동하실 때 어찌 그분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 사람으로 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그래가지고는 하느님의 얼굴을 어떻게 뵙겠냐? ‘그분이 나를 심판하실 때 내가 뭐라 말씀드릴 수 있겠는가? 바로 그 하느님께서 나를 지으시지 않았던가? 또한 내 종들도 지으시지 않았던가?’ 차별 없어요. 빌레몬같이 차별대우 안 했단 말이야 종, 상전. 종은 종인데 똑같이 하느님이 지으셨다. ‘바로 그분이 우리 모두를 지어내지 않으셨더냐? 가난한 이가 와 도,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언제 내가 거절했던가? 또 어렵게 사는 과부를 언제 내가 실망 시켰던가?’ 이건 다른 역사에는 없어요. 여기만 있지.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고아가 굶고 있는데 나만 홀로 배불리 밥 먹는 것 보았는가? 사실 나 젊은 과부처럼 오갈 데 없는 고아를 아버지처럼 돌보았다네. 정말 모태에서 나온 뒤부터 평생토록 어렵게 사는 과부를 잘 대해주었다네.’ 다른 데는 역사가 없다니까요. 그럼 이 욥이 거짓말할리가 없죠. 거짓말이라고 믿을 수 없어요.

하느님의 증거를 믿으면. 순종하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났거든요. 근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니께 이건 하느님이 하신 일을 욥이란 사람 하나 내어가지고 지금 표현한 거란 말이야. 하느님이 하신 일. 하느님만이 고아와 과부의 사정을 알고 해결해주지요. ‘어렵게 사는 과부를 잘 대해주었다네 옷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한 거렁뱅이나 입을 옷 하나 변변치 않는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돌보고 언제 그를 따뜻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양털 옷 입혀주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때마다 그들이 나에게 고마워라 않던가 말이야. 또 마음으로 축복해주고, 성문 마을회관에서 재판이 열릴 때 나도 나 도와준 사람 있다 해서 그 사람 편들어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고아를 마구 내버린 적이 있던가? 그런 적이 있었다면 내 어깨뼈가 떨어져 나가야 싸지, 내 팔뼈가 부러져도 싸지.’ 끝 절까지 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욥이 살았을 때 생활 가운데 그런 역사는 없는데 하느님의 그 심정을 표현한 거예요, 드러내고. 그런 사람이고.

 

 

또 욥기 42:1

이제 이건 완전히 인류 대표로 회개를 합니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셨죠.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누구냐 하고 말입니다. 이제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댔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긍게 사람끼리 대화도 들어보고 그 속에 말씀 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라. 답은 하느님께 하라 그거야. 그 사람한테도 인자 하게 되면 하는 것이고 그리 안 하면 영으로만 하는 것이고. 말로 해버리면 못 알아듣거나 소외될 것 같으면 말로 안 하고, 소리로 안 하고 영으로만 해요. 성령이 해결책 주시라고 내가 말해버리면 내가 해결해준 것으로 된단 말이야. 내 말로 한단 말이야. 사람의 말로 한단 말이야. 성령이 하셔야 인자 사람의 말로 안 알죠.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거예요.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럼 우리 언제든지 지금 주께서 하느님께서는 내게 대한 질문을 하실 때가 있단 말입니다. 다 말씀을 일러주셨으니까 그 깨달은 것 보고를 해야 하고 또 모르면 대답을 해야 되거든.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듣는 주님에 대해서 들어왔습니다만 이제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이제 영안으로 본거예요.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물론 인류 대표로 꿇어 엎드린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회개해요. 인류 대표로요. 자기는 회개할 거 없지 않아요? 하느님 증거대로면 없거든요. 근데 인류대표로. 긍게 제사장 노릇 한 거예요. 다른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잘못을 내가 대로 당하는 거예요. 그게 제사장이에요. 그러면 이제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세 친구 대표로 하나라 나는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너희는 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내 종 욥은 얼마나 솔직하게 말하더냐? 그러니 이제 너희는 수소 일곱 마리와 수양 일곱 마리를 끌고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올려라 그래서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그 이 예수 역 아니에요? ‘이는 너희에게 벌을 내리지 않겠다.’ 욥을 봐서. 꼭 벌을 내려야 되겠는데 끝끝내 내 욥을 친구삼고 이 자리에 나왔으니까 또 세 친구에도 용서받을 조건이 있어요. 있기는. 무엇이냐? 칠일칠야를 같이 눈물을 흘렸거든. 한마음 한뜻으로 그 정도 있지만은 그것 갖고는 안 돼요. 자꾸 욥을 공격했어요. 욥이 잘못이라고. 그러면 곧 하느님의 잘못으로 된다. 게 누구를 잘못했다 하면 곧 하느님을 잘못한 것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 사람 속의 하느님 역사를 모르고. 그러니까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다면 누구의 잘못을 탓할 것 아닙니다. 그 잘못은 곧 네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의 그림자로 봐야 한다. 그래서 네 속에 들보만 없애버리면 그 티는 없어질 거예요. 모두 잘된 거 잘못된 거 모두 내 탓이에요. 나 깨우치기 위해서 주위 환경을 이루어졌다. 내 영혼을 사랑해서 모든 자연까지 희생을 시켰다. 그러면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이 크냐. 그 알았으면 인자 그 사랑을 보답하라 말이야. 사명하라, 하느님 말씀 잘 들어라. 여호와께서는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다시 복을 내리셨다. 욥이 세 친구를 위해서 빌자 여호와께서, 그동안 욥이 말도 못하게 고생했단 말이야. 애매한 고생인데 가치 있는 고생이라고. 다른 악인들 때문에 말도 못하는 고생을 했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생을 했응게 큰 상이 있지 않아요? 긍게 자기 죄 때문에 고생 받아야 하지만은 그거 청산했더라도 또 다른 사람 죄 때문에 내가 받아준 거 다. 그 사람이 받아야할 상은 독차지하지 않겠어요? 게 어떻든 자신을 위해서나 주를 위해서나 누구를 위해서나 참 가치 있게 고생해놓으면 다 내 것이라 그 말이에요. 받은 사람 것이에요 남의 것이 아니라. ‘욥이 말도 못하게 고생한 것을 돌보시고 그가 전에 갖고 있던 재산보다 두 배나 더 주셨다.’ 야 요것도 또 오해하기 십상이에요. 그 재산땜시 고생을 했다면 저주를 받고 그랬다면 또 고런 재산 또 두 배나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재앙도 두 배나 받아야죠. 그러니까 이건 영적으로 봐야 된다. 영적 재산이에요. 하나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보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었다. 가진 것이 없는데 부자로 만들었어요. 그래 도로 가진 것 없는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는데 물질적으로 부자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영적으로 마음에 평화가 있단 말이에요. 만족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물질과 영과 비교를 해야 한단 말이에요. 긍게 이건 영적 축복으로 봐야 한다. 그 다른 건 다 배나 받았다고 하지만은 아들은 그대로 십남매에요 도로. 이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이 된 거예요. 아까 자칫하면 1장에 악마의 자녀가 될 뻔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안 되게 하려니까 싹 데려가 버렸어. 죽었어요. 악마의 자식의 자리는 일단 죽었어. 그래 그러니까 이제 참 하느님의 자녀야. 영의 아들이야. 영의 아버지 영의 아들이란 말이야. 그럼 그건 그만보고.

 

 

아까 이사야 6:9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네가 가서 이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너희는 듣고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보기는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백성이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버리라. 듣지를 말게 눈을 아예 감겨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 받을 일이 없게 하여라.’ 이것은 어찌 이렇게 됩니까? 막힌 귀도 열고 감긴 눈도 띄워서 마음도 열려서 깨닫게 해야 되지, 알아듣고 회개를 하죠. 근데 왜 이렇게 하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것은 육적인 눈, 육적인 귀, 육적인 마음 다 없애버려라. 완전히 절망이야.

 

11절

‘그때에 내가 질문했어요.’ 누구든지 질문하게 되어있지 않아요? 아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알아듣게 귀도 열어주어야 하고 눈도 띄워주고 마음도 깨닫게 열어주고 그래야 될 텐데 복음을 받아들일 텐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냐 말이야. ‘그때 여쭈었다 주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하겠습니까?’ 요게 질문이에요. 우리도 다 우리 질문이에요 이건. 이사야가 대표로 지금 질문하는 거예요. 어느 때까진가? 그 요 때는 인자 다니엘 4장에 있거든요. 거기도 때가 말했어요. 또 신약에도 있고, 갈라디아 3장에도 있고요. 때가 있어요.

 

다니엘 4: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빌론 궁 지붕에서 거닐 쌔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크게 자랑하죠. 내 능력이단 말이야. 왕이 바벨론 왕.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때가 있지 않아요? 자기 권세가 완전히 깨지고 모든 우주 만물은 창조주가 다스린다, 그걸 깨달을 때가 일곱 때에요. 내 권세로 한 것 아니구나. 이 권세는 다 하느님의 것이구나. 아 내가 지금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했구나. 영광은 하느님에게만 돌릴 것을 내가 도적질했구나. 통회하는 거예요. 이렇게 떨어져버려. 왕이 평민도 못되고 하다못해 야만인이라도 되어야 할 텐데 완전히 짐승이 되어버려. 그래 하느님이 다스린다. 내가 다스리는 줄 알았더니 크게 오해했구나, 크게 죄를 지었구나. 하느님의 영광을 내가 따먹었구나. 이 회개 하는 거야. 그러면은 34절, ‘인간을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시더니. 그 동시에 곧 그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느니라.’ 그 기한, 어느 때, 그 기한. 하느님이 다스린다고 깨달아질 때가 기한이라고. ‘그 기한이 차 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왕의 위치로 왔다. ‘돌아온지라 이제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존경 하였노니. 이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렀도다. 땅의 모든 민족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4:17

17절이 제일 자세하게 되어있거든요.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 거룩한 이들의 말 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