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선경 황용 : 간증

mamuli0 2016. 11. 10. 17:20

 무현에서 아침을 먹고 고성에 와서 황용에 가려고 했으나 중국 추석 연휴로 오채구에 오르는 케이블 카 차례가 2시간 이상 기다려야 된다고 하여 거꾸로 일정을 수정했다. 쇼핑과 맛사지를 먼저 받고 가기로 했다.

 

 고산으로 갈 때 비가 내리더니 산 마루에서는 눈이 내린다. 케이블 카로 3500m에 올라 구경하면서 걸어 내려와 차를 타고 돌아오는 코스다.

 

 

 

   

 

   

 

선경 황용

 우뚝 솟은 민산 최고봉 설보정 밑에 특이한 모습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창공설산의 광명아래 구불구불한 삼림은 거대한 황금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다. 수많은 오색 호수와 폭포 등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이곳이 선경 황용이다.

 

 

 

   

 

 


 황용은 사천성 아패장족 강족 자치구 송반현에 있으며 성도와 360km정도 거리에 있다. 황용의 면적은 700k㎡이며 황용 본부와 모니구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용 본부는 황용구, 단운협, 설산양, 홍심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600k㎡이다. 모니구는 찰소와 이두해가 이웃하여 구성되어 있다. 황용구는 황용경치구의 핵심이며, 해발은 3123m에서 3576m에 달한다. 총 3.6km  30~170m의 옅은 황색의 지표석회화 퇴적은 3400여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화, 류휘, 분경, 명경, 사라, 쟁염, 류방, 욕옥등 8개로 나뉘어지며 호수 사이의 흙둑과 어우러져 미관을 만든다. 황용은 과학적인 가치가 있으며 높은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모니구의 찰소 폭포는 93.2m의 높이에 3단계로 낙수하며, 안개와 어우러져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를 낸다. 이도해는 원시 삼림 안에 있으며 수십 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고 짙푸른 호수는 무성한 삼림과 어우러져 각별한 고요함과 원시 야생을 느끼게 해 준다.
 황용 경치구는 그만의 특이한 경관으로 사람들의 찬양을 받고 있다. 1992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명단에 기록 되었으며 2000년 세계 인간과 생물권 보호구로 지정되었고, 2002년 푸른지구 21세기에 등록되었다.

 

 

 

   

 

 

 

간 증

 


1981.3.2. 오북환 장로

 


 남원에서 여기까지 왔고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현필 선생님을 만나기 전부터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한계를 논리적으로 들었거든요. 어떤 목사님의 신앙 잡지를 통해서 율법이 무엇이냐? 복음이 무엇이냐? 그것을 분별을 조금 얻었어요. 그래서 참 기쁩디다. 그러면 그렇지 맹목적으로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런 뒤에 이 현필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에게서는 율법적인 것이 별로 보이지를 않아 율법적인 것이 무엇이냐? 조금 그런 것이 있었지만 과정으로서 있었지만 복음적이야. 그래서 무등산에 산다고 제가 금식, 속으로만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속으로만 약속을 했어요. 그렇지만 말로는 안했어요.

 

 

   

 

 

 

 

 그래 장소를 잠깐 비워주십디다. 저는 속으로 했지만, 이 선생님은 실제 하는 것 같이 알아들으셨거든. 그러니까 내게 자유로 하라. 무등산 동광원 시작되기 전이지요. 소년들 데리고 시련하는 과정에 있었을 때 그때 잠깐 비켜주세요. 최 흥종 목사님 별장에 있을 때, 저는 한 사나흘 지났더니 도저히 안 되어요 그런데 실패를 했지요. 안 되는구나. 이 선생님이 한 사나흘 뒤에 오셨지요. 무엇을 깨달았냐고 뭐라고 하더라. 무엇을 깨달았냐고? ‘공의의 복종 환경에 감사,’ 간단히 그렇게 대답했다고, 맞다 고 아멘, 아멘. 나 아멘소리 두 번 들었다고 그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절대 순종할 것이지 내가 이렇게, 이렇게 내가 안 되어요. 모든 주어진 환경이 극복 된 만큼 순종이 된 만큼 승리가 있을 테니까 감사가 있을 거라고 간단히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래서 최근에 저번에 출발해가지고 진도까지 돌아왔어요. 마침 이 집사님 따라 붙으셨는데 이 원 안에서는 제일 논리가 진도가 제일 센데 거든 요. 이제 거기 가서 조금 말해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그래도 통하지를 않습디다.

 

 

 

   

 

 

 

그리고 또 그 논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도 느꼈고요. 실력을 갖추어야지, 실력 없는 논리만으로는 무능하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그것이 조금 느껴집디다. 그래서 이 책자 먼저 지금 들어온 사람들 있으니까 광주에 이 책 있어요? <인간 테레사와 이웃> 본적 있어요? 있었고 만요. 나는 이것 처음 봤어요. 자서전은 소화 테레사 자서전은 아주 세밀하게 관련시켜 가지고 페이지 수도 다 지적해 가지고 말씀 해놔서 더 자서전에 대한 실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이 서두에 조금보고 덜 본겁니다. 다른 사람 그만두고라도 내 자신이 공부를 해야겠다. 그래서 대략 서두에서 조금 설명하고요.

 

 

 

   

 

 


 인간 테레사와 이웃, 한 영혼이 겪은 어려움과 극기의 인내심과 지혜, 특히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는 진리,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그 말 알아들을 만하지요? 이건 여러 번 설명했어요. 그런데 처음 들으니까 그전에 사회에서 쓰는 말이 아니겠어요? 무관심 속에 관심, 사람에게 지도하는데 있어서 부모가 자녀를 너무 일일이 간섭을 하면 안 된다고, 거짓이 커간다. 아무 간섭을 하지 말고 가만두고 스스로 자기 생각이 발달이 됨에 따라서 되도록 부모가 행동으로 보일 것뿐이지 말로는 이래라 저래라 공부 잘해라. 그러면 그럴수록 반감이 생긴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여야겠는가? 비범함, 평범함 속에 비범함, 조금 뜻이 통한단 말이야. 누구를 대하나 평범해요.

 

 

 

   

 

 

 

특별나게 이렇다. 잘 믿는다. 그런 것이 없어요. 아주 천한 가장 고역인 천한 노동자인 예수님 나사렛 사람 아니에요? 아주 가난한 노동자 아니에요? 목수, 목수는 목수 쟁이 쟁이라는 말은 천하다는 말이거든. 석수 쟁이, 대장 쟁이 쟁이자 붙은 것은 다 천한 거예요. 섬기는 일이거든요. 이것해라. 예, 이것해라. 예,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천한일이에요. 예수님은 아주 평범해요. 농촌 노동자에 가난한 노동자 그런데는 비범함이 있다. 그것 무슨 말이에요? 평범하지 않다. 그 말이지요. 무관심 속에 관심 아무 간섭을 안 하고 내버려 두나, 그런 성경을 어디하나 댈 수 있어요? 무관심 속에 관심, 비유로 들었어요. 지적했어요.

 

 

 

   

 

 

 

사도행전 20장에서 그러면 무엇이 비범함이고 무엇이 관심을 갖는가? 무엇이 무관심이고 무엇이 관심인가? 처음에 관심해가지고 무관심이 되거든요. 처음에는, 관심은 무엇이냐? 3년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있는 힘을 다 쏟아서 진리를 가르쳐 놨습니다. 29절에 가보면 3년 동안 눈물로서 훈계를 해 놓았어요. 그것 관심이지요. 관심인데 그랬으나 이제 무관심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은총의 말씀에 맡겨요. 그리고 자기는 악한 것이 와서 물고 뜯고 다 헤쳐 버리고 진리에서 이탈시켜 버리고 또 그럴지라도 그런 것은 확실히 알면서도 떠난다는 거예요. 무관심 아니에요? 떠나, 그러나 그 무관심속에 관심이 무엇이냐? 처음에 관심, 나중에 무관심 또 무관심 속에서 나중에 관심 그것이 무엇이냐?

 

 

 

   

 

 

 

은총의 말씀에 맡기는 것 그것은 말로는 관심 없어요. 기도뿐이지요. 몸은 떠나가지고 기도할 것뿐이지 구체적인 예를 들으면 김 선생님 지도 방법이 그렇지 않아요? 관심은 별로 안하셔. 그러나 무관심한 태도로 계시면서 기도로만 돕는다고요. 그리고 또 너무 빗나가려고 하면 넘어지려고 하면 조금 딱 와서 관심이 되지요. 이렇게 해보라. 벌을 키워보라. 돼지를 길러보라든지 조금 관심을 가져요. 그것은 정리해버려 라든가 차차 자기가 깨달아지기 까지는 무관심 관심 무관심 관심 꾸준히 그러니까 이 집사님이 지금 떠나는 것은 간섭만 조금 쉬는 것이지 마음으로 간섭하는 거라고 기도하려니까 농장을 말입니다. 나 지금 꼭 떠나라는 말도 아닙니다. 가시라는 말도 아니고 스스로 자유성을 지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해결하라고 또 그러면 왜 떠났냐고 그러면 떠나라고 그래서 떠났다고 사람의 말 듣고 이리저리 안 되어요. 스스로 해결하면 아 이것이 주님의 내게 대한 교훈이구나. 그렇게 믿어질 때 해결이 되어야 지요. 누가 사람이 그러더라, 그것은 안 됩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 진짜 간섭이지 기도로 이것 성경 어디에 있냐하면 개역으로 봅니다. 빌립보 3장 3절이요. 육체의 봉사만 봉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육체를 의지 하지 않아요. 성령으로 봉사하는데 육체로만 뼈가 빠지게 뼈가 녹아나게 봉사했던들 성령으로 봉사하지 않으면 다 허사에요. 율법적인 거예요. 성령의 봉사가 됩니다. 이것은 복음적인 활동이지요. 참 신앙의 생활이지요. 복음적인 생활이지요.

 

 

 

   

 

 

 

 성령의 봉사,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요. 율법적인 것이 아니에요.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것을 공동체와 사회 속에 산재해있는 그릇된 것들을 피하거나 무시할 것인가에 고심할 것이 아니라,’ 귀찮은데 해봤자 할 것이다. 딱 내던져 버릴 것이 아니라 이것들과 부닥치면서 같이 싸우면서 접촉하면서 어떻게 성화시키고 자꾸 정신이 성화되어가요. 성화시키고 초월하느냐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초월하느냐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고통은 은혜의 전주곡이다. 전주곡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순서로 무엇을 시작하려는데 미리 예비적으로 앞에 있다는 말이야. 전주곡이다. 성격 결함이나 우리 사람은 다 결함투성이입니다. 허물투성이로 되도록 예수님이 하셨으니까 허물투성이가 되어야 해요. 성격결함이나 또 인간적인 나약 몸이 약하다는 거야. 의지가 약하고 나약 함들이 신앙 안에서 완덕으로 향하는 더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성격 결함이나 인간적인 나약함이 신앙 안에서는 완덕으로 행하는데 더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경애 양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사랑하는 거라고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안하고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될 말이냐? 말이야.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참 예수의 제자구나. 그렇게 믿는다고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잘 기억하네요. 조금 서툴기는 해도 죄인들의 영혼이 회개하여 그분께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테레사는 깨달았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소망도 있어요. 소망은 무엇이냐? 소망은 예수를 열렬히 사랑하고 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수를 사랑하도록 하려는 소망 우리 소망도 그것이 소망이 되어야지요. 소화 테레사의 소망도 그거에요. 예수를 열렬히 본인이 사랑해요.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으로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수를 사랑하도록 하려는 소망이다.

 

 

 

   

 

 

 

이 소망은 어떤 역할을 하냐? 어떤 이익을 주냐? 소망은 테레사의 생활을 하나로 묶어주고 하나로 우리 인격이 둘이요? 하나요? 우리 몸이 하나요? 둘이요? 몸은 하나지요? 그런데 마음은 여럿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무엇도 하고 싶고 무엇도 하고 싶고 또 어디도 가고 싶고 또 원이 많단 말입니다. 마음은 여러 가지요. 그런데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그랬어. 대체로 마음을 나누면 여러 가지로 흩어지나 둘로 나눌 수 있다. 두 마음, 농장에도 가고 싶고 여기서 공부도 하고 싶고 두 마음이지요? 두 마음이야. 여러 마음이 있지만 대체로 나누면 두 마음이야. 주님을 사랑하고도 싶고 또 무엇도 좀 사랑해 봤으면 좋겠고 세상 자기지요. 자기 육도 좀 건강했으면 좋겠고 두 마음은 다 있어요. 그런데 완전한 건전한 인격이라면 한마음이라야 된다고, 한마음 소화 테레사 같이 열렬히 예수님만 사랑해요. 그 마음이 있어야 인격이에요. 마음이 자꾸 찢어지고 갈라지고 분열이 되어있으면 그건 인격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이럴까? 저럴까? 무엇을 할까? 밤낮 해봐도 답변이 안 나와요. 또 무엇이 생기고, 영애 양, 공부를 하니까 또 어디까지 다 알 것 같습디까? 어떤 결론이 내려져요? 이 과정 치루면 또 어디까지 시험을 치르겠지. 대학원까지 나오면 다 될 것 같아요? 끝도 없는 거야.

 

 

   

 

 

 

욥기 16장에 있지 않아요? 끝없는 말이라고? 어째 무엇이 끝이 있으랴! 허망한말에 끝이 있으랴! 허망한 말 허망한 것은 비었어요. 예수가 없는 말, 진리가 없는 말, 연달아, 연달아 또 이 말하면 또 이것도 시원치 않고 또 시원치 않고 그러니까 유명한 교육가의 결론이 교육가의 일반적인 결론이 끝에 가서 무엇이냐?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모르겠다. 뜻은 그것뿐이라고요. 또 몰라야 쓰지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꼭 알아야할 것은 무엇이고 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또 사람에게 한 가지 배울 것이 있고 예수께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 앞에 통해서 하나 배웠으면 성령을 통해서 배워야지 그리스도께 성령을 통해서 배워야지 직접 배워야지, 사람한테 배운 것만으로는 끝이 없어요. 전부 시원치 않아요.

 

 

 

   

 

 

 

바울사도도 최후에 가서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택했다. 친히 하신 말씀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 내 영혼에게 다 일러준 말씀을 들어, 배울 것은 무엇이냐? 그거야. 배울 것은 꼭 배워야할 것 있어요. 히브리 5장 12절 말씀, 그것만은 배워야해. 말씀에 가장 초보원리는 배워야 하는데 그것 잘못 배웠으니까 때문에 다시 배워야 하겠다는 말 있지 않아요? 11절부터 12절 보십시오. 읽어봐요.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그것만은 받아야 해요. 누구에게 말씀의 초보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 할 말 많아도 못 알아들어요. 배반에 대한 경고, 이것에 관해서는 멜기세덱이지요. 이것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러분의 귀가 무디어져서 알아듣도록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몰라요.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었어야 할 터인데 그러니까 이미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하는데 왜 못되었냐?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를 바로 못 배웠기 때문에 가장 초보라고 그랬지요? 그전 성경에 초보적 원리를 남에게 사람에게 다시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이것만은 배워야 돼. 말씀의 초보, 그것이 은혜이지요. 은총의 말씀 아니겠어요? 은총의 말씀의 참뜻을 깨닫는 날부터 열매가 맺어져요. 온 세계에 퍼지면, 사랑하고 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수를 사랑하도록 하려는 희망이다. 소망, 이 희망은 소망은 테레사의 생활을 하나로 묶어주고 또 활력을 주었다. 사는 힘, 살 활(活)자 힘, 활력을 주었다. 능력이지요. 능력 하나로 묶어줘. 모든 것에 앞서 예수를 사랑하기 위해 먼저 이 세상에서 이탈해야 한다는 것, 이웃을 사랑하라니까 자기는 두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서는 안 되지요. 이탈해야 되요. 그러니까 무관심속에 관심되지요. 비범함 속에 평범함이 되겠지요.

 

 

 

   

 

 

 

이탈은 비범함입니다. 이탈, 나는 벗어나야겠다. 자신에서 이탈, 모든 주위 환경에서 이탈, 사람들 속에서 이탈, 그것이 비범함이야. 비범함, 비범함 속에 평범함,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줘요. 이탈해야 한다는 것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테레사는 일찍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그러면 예수를 본받는 것이지요. 묵시 2장 24절과 25절은 사탄의 비밀은 배우지 않아야 한다. 음란은 배우지 않아야 되요. 그것은 안 배워도 잘 아는 거지요. 이건 누가 가르치지 않아요. 본능이기 때문에 짐승이 누구한테 배웁니까? 사람이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물론 부모한테 배우지만 그건 본능 육의 본능이기 때문에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그러니까 그런 비밀은 배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 사탄의 것 25절은 내가 올 때까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순결 거룩 그것은 배워서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테레사는 일찍 깨달았다. 십자가 요한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말아야 한다. 진짜 내 것이 예수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 놔버린다. 그런 뜻이에요. 내가 그 애착을 가지고 내가 하려고 할 것이 아니요, 내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것이 안 되어요. 마귀 악마의 것이 되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러니까 나를 따라 오려면 그 말은 모든 것을 소유하려면 그 말과 같지 않소? 모든 것을 버려라. 그 말이니까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오라. 그랬거든. 그러면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지금 물질적인 것은 버려라.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물질적인 것은 버려라. 그 말이야. 속사람을 얻기 위해서 겉 사람을 버려라. 그 말이에요. 모든 형제들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인 동시에 평범하게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만 애착하기 위해 하나님께만 달라붙어야 돼. 떨어져서는 안 돼.

 

 

 

   

 

 

 

포도나무 가지가 몸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만 애착하기 위해 그들에게서 이탈 육정에서 이탈해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테레사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제 1장에서는 소화 테레사는 이렇게 무질서한 위험을 빠져나가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가정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어떻게 정화되어 갔으며 어떻게 하여 성녀는 봉쇄 안에서 봉쇄수도원 안에서 자기의 지닌 애정을 순수성을 철저하게 지켰는지 보게 될 것이다. 제 2장에서는 교만과 허영이 지닌 위험, 사방에서 공부하자. 모이자. 말씀해 주시오. 참 위험천만입니다. 교만덩어리입니다. 자꾸 이럴수록 교만이 오거든요. 나다. 나다. 교만이지, 교만과 허영이 지닌 위험에 대해 소화 테레사가 어떻게 처하는가를 살펴보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명백한 결점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사실 이웃에 대한 애정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와 이웃으로부터 칭찬받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은 서로 분리해서 다루어야 한다. 무질서한 사랑 안에서 우리들이 추구하게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의 호감을 사게 하려는 것만 아니라 그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며 그의 현존과 우정을 향유하려는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체험, 현존과 우정을 누린단 말이야. 향유, 향유하려는 것이다. 십자가 성 요한은 무질서한 애정을 음란죄에 결부시키고 반면에 이웃과 자신의 눈에 덕성스럽게 보여 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교만에 결부시킨다. 무엇이 교만이라 그랬고 무엇이 음란이라고 그랬지요? 무질서한 애정을 음란죄에 결부시켰다. 무질서한 애정 육정이지요. 애정을 음란이라 했고 이웃과 자신의 눈에 덕성스럽게 보여 지고 싶어 하는 욕망 자존심 명예욕 자부심 그런 거지요.

 

 

   

 

 

 

남에게 좋게 보이려고 덕스럽다. 덕성스럽게 보여 지고 싶어 하는 욕망, 허영심 아니요? 욕망을 교만에 결부시켰다. 교만 무질서한 애정에 사로잡힌 것을 음란이라, 또 남에게 호감을 사고 덕성스럽게 보이고자하는 그런 욕망이라는 것은 교만이라고, 마지막 3장에서 이 책을 다 소개한 셈이에요. 3장에서 소화 테레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기분전환이라는 호기심 이런 위험을 어떻게 피해갔는가? 하는 점, 다시 말해서 고요하고 적적한 생활에서 단지 기분전환은 아 일도 없고 평화롭고 좋다. 그런 생각으로 기분전환을 해보려는 목적으로 이웃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위험, 누구와 서로 대화도 하고 싶은 것을 좋아한다. 그런 위험을 어떻게 피했나 하는 점을 볼 것이다. 이렇게 써봤어요.

 

 

   

 

 


 아까 말씀대로 하면 육이오 전부터 아 육이오가 아니다. 해방 전 해방 3년 전에 이 현필 선생님을 만났거든. 그러니까 해방 6-7년 전부터 율법이냐 복음이냐 이 문제를 늘 생각해 봤고 또 어느 정도 해결을 지어봤다고 했으나 지금까지 실제는 율법에 매여 있어요. 지금 말하는 것은 실천도 안 되어버려요. 말 자체가 복음은 아니에요. 복음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부분이에요. 세상의 실력이니까 말로 해버리면 율법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복음은 실제 복음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복음이라고 그러지요? 성경은 다 복음인데 신약은 다 복음인데 예수님의 말씀만은 특별히 4복음 이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 예수님이 직접 입으로 소개한 말씀이니까 그 아무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내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말씀이 실현될 것이지 성령의 능력 받지 못하면 실행 못하거든요.

 

 

   

 

 

그것을 아무리 다 외우고 그래도 항상 율법입니다. 복음이 율법밖에 안되는데 말로 되면 그러니까 실행이 복음이에요. 그 말씀대로 실행이 복음인데 실행은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지요. 삼위 안에서만 될 일이지 믿음 안에서만 될 일이지 자기 율법적인 자기 삶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것은 알아도 실행은 못해. 그전에 이런 말씀 많이 해봤지만 근자에 조금 덜했으니까 처음 들은 것 같을지 모르지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도 성령의 능력 받기 전에는 실행이 안 되는 것이니까 율법이다. 알아도 다 율법이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말을 실천하니까 그리고 실천되는 것이고 실천을 말해버리면 자랑이 되니까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니까 복음을 율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 현필 선생님의 생활이 복음이었지 말이 복음이 아니야. 말이 율법이야. 김 선생님도 그렇지 않아요? 생활이지 실력이지 능력이지, 저는 아직 복음이 못 들어왔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시간도 모자라고 또 그 말 또 하려면 힘이 빠지고, 언제 끝나느냐? 자꾸 듣겠다고 하니 말이야. 끝이 안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듣기는 바로 들어두어야 한다. 그 말이야. 그래서 원 사람들은 초보로 다시 시작해야한다. 그러니까 그냥 원 사람만 가지고 시작할 수 없으니까 저 다른데서 온다니까 아주 율법 전통으로 잘살고 실제 복음으로는 가장 바르게 살고 그렇게 사는 청년들이 온다니까 그 사람들하고 논리적으로 의논해 보면서 한번 같이 공부해 보면서 원 안에 있는 청년들하고 공부할 수 있어요. 장소를 어떻게 하냐? 남원으로 와서 하면 곡성에 있는 청년들도 오려면 오라.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또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 하나는 못 오거든. 여기서 하면 곡성은 올 테면 오라할 수도 있지만 거기 못갈 사람은 여기오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모임이 되려는지 안 되려는지 몰라도 생각해 보는 거지요. 장소가 어디가 허락이 되려는지 가서 의논해 보고 전화하기 전에 의논하려고 했더니 의논하기 전에 전화가 오니 문제가 아니야. 기다린다니까 어서 오라고 말이야. 여기는 낮에 원장님 인천서 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는 관심을 안 가지려는지 그렇게도 생각을 했거든. 월요일 날이나 갈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제 또 듣고 보니까 그렇다면 금요일에 갔어야 맞을 텐데 월요일에 갔어야 맞을 텐데 그러니까 모인다고 해결 안 될 문제거든요. 그런데 시작해서 모이냐? 그것이 문제라고 지금까지 들은 것 다 안 들었다고 치고 다시 듣느냐? 그러면 물어봅니다. 율법은 신앙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 어디에 있어요? 성경에 있는 말로 해놓았어요. 율법은 신앙에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영애양은 자기 공부하는데 크게 방해될 텐데 여기와 가지고 공부하려면 다 쏟아도 못 따라갈 텐데 갈라디아 3장 12절이에요, ‘율법은 믿음이 기초를 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지킴으로 산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지켜야 산다. 그 말인데 지킬 수 있냐? 그 말입니다. 부자 청년은 못 지켰으니까 자기는 지켰다고 하나 실상은 못 지켰거든. 그러니까 영생을 몰라. 영생에 대한 자신이 없어요. 못 지킨 거예요. 계명 못 지켰어요. 율법 못 지켜요. 그럼 거기 볼 때, 요한복음 7장 19절이요, ‘너희에게 율법을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냐? 그런데도 너희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도대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그러면 못 지킨 것이 증거가 뭐야?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 사랑이 없단 말이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끊김)

 

 

   

 

 


 마태복음 11장 절, 그렇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을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나에게 와서 쉬어라.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예수님께로 가면 다 해결이 되는 거지요.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사람 예수께로만 가면 된다는 것 아니에요? 또 무거운 짐 안진사람 하나도 없다는 그 말이고 땅의 인간은 다 짐 한 짐씩 지고 죄의 십자가를 지고 있단 말이야. 그것을 해결 못하니까 고생이야. 해결이 착착 되면 쉽고 가볍고 그런데, 왜 해결이 안 되느냐? 그것이 문제란 말이야? 왜 무거운 짐이 되냐? 가벼운 짐이 되어야 할 터인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 다 내게로 오라. 왜 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이 되겠냐? 왜 쉽고 가벼운 짐이 될 수 있냐? 그 한계, 영애 양 대답해요. 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또 편하고 쉬운 짐이 될 수 있냐? 그 한계가 뭐야 같은 짐인데 예수께로 가면 아주 가볍고 쉽고 평안하고 ‘내가 지려고 그러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을 뜻합니까? 내가 지려고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내가 지려고 한다. 무엇으로 하면 안 된다. 구원도 없다. 평화도 없다. 율법적인 율법으로 하는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생활이지요. 내가 하려는 것은 자기가 잘해서 자기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 그러면 그리스도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내세우는 것뿐이지 자기가 있으니까 예수와 상관없다는 거야. 예수교가 아니야. 그리스도의 영을 가져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은 없고 내 마음에 사로잡혀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 그리스도인이야? 되겠느냐? 이 말이야. 자기가 하려고 하면 고생뿐이고 무거운 짐이라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예수께로 가면 가볍지요.

 

 

   

 

 

 

 예수께로 가면 가벼운 거야. 예수님이 믿음은 무엇이지요?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예수님이 하시니까 나는 할 것이 없어. 나는 없으니까 아주 가볍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한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한다는 것이 율법이고 예수 믿음 안에서 한다는 것이 복음이고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으로 믿어지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 것이고, 믿게 하셔야 그리스도를 믿게 하셔야 믿어지는 것이고 은사야 선물이야.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못해. 율법 자기 힘으로는 못해. 네가 편히 쉬게 되리라. 예수께로 만 가면 다 버려버리고 맡겨 버리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쳐버리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다 해주신다. 그러면 자기 할 일이 무엇이냐? 그거에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네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자기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다 맡겨버리면 할 일이 없을 텐데 할 일이 무엇이에요? 먼저 가는 일, 예수께로 가는 일이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는 길을 찾는다. 어디로 가느냐? 그 말이에요. 광주에서 남원까지 갔다가 또 뭐 하러 여기까지 오냐? 말이야. 내일 공부할 텐데 무엇을 찾으려고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예수께로 가야할 텐데 예수님은 마음에 계신데 마음에 계신 예수님을 두고 어디로 가느냐? 사람한테로 가는가? 친구한테로 가는가? 어디로 가는가? 예수께로 가야한다. 몸이 어디가 있던지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 요절, 오시는 주님 책에 165페이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디로 갈까? 누구를 찾아갈까? 무엇을 들어볼까? 남원에서 원장까지 오셔서 기다리는데 왜 안 오냐 말이야.

 

 

   

 

 

 

아 예수님 더 가까운 집에 계시면서 누구한테 배운다는 건가? 또 무슨 말 새로 들을 것인가? 지금까지 들은 말씀 다 하나도 거기 관심도 안 갖고 또 듣고 잊어버리고 듣고 잊어버리고 우습지 않아요? 누구한테 뭐 듣는다. 특별 집회를 갖는다. 강사가 와야 한다. 강사는 자기 아닙니까? 마음, 예수님 외에 누가 강사가 있는가? 참 주님이 어디에 있는가? 참 선생이 어디에 있는가? 선생도 하나 지도자도 하나 주도 하나 하나뿐인데 각각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은 상관치 않고 안 계신 것 같이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이 그 밖에서 내 마음 밖에서 찾아요. 그것이 인간이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라. 예수님이 끼워준 멍에를 메라.

 

 

 

   

 

 

 

예수께로 가서 먼저 가서 예수님의 겸손의 멍에 겸손한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나의 제자가 되라. 먼저 공동번역에는 그랬다고 나의 제자가 되라. 제자는 그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제자니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제자라. 서로 사랑할 때 제자라. 말씀을 받아 새기고 사는 사람이 제자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를 따라 해방 받는 사람이 제자, 배워라. 그러면 온유하고 겸손함을 배워라. 내가 얼마나 온유한 것을 배워라. 그 말이야. 내 멍에는 쉬운데 실상은 내가 깨워줬고 내가 같이 하니까 가볍고 쉬운데 거기서 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라. 배워진 만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평안할 것이다. 당황할 것이 없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서 무엇을 배울까? 무슨 말을 들을까? 어디 가서 조금 쉴까? 아무 당황할 것이 없다. 있는 그 자리 자기 임무 허락된 그 위치 내게 주어진 그 환경 그 자리에서 배워라.

 

 

   

 

 

 

지금 닥치는 것이 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냐? 또 내가 구하는 대로 하나님이 허락한 것 아니냐? 환경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거든요. 구하고, 구하고 하는 것이에요. 구한대로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공의의 하나님이에요. 구하는 대로 하니까 공의의 하나님이야. 공평하신 나사로는 나사로대로 구했으니까 구한대로 결과가 딱 안식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버려. 부자는 육적인 것을 구하고 보니까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심령의 안식은 없어. 영원한 불행에 치워버려. 자기 구하고 바라고 믿고 노력한 결과야. 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자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까지 끝났다. 요한에게서 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율법이 완성되어 버렸어. 율법과 예언서의 끝이 세례요한이고, 맨 끝에 왔고 보내셨고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 질 무렵에 세례요한 대표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아요? 엘리야의 정신으로 왔던 이가 세례요한이니까 마지막에 나타났어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서 곧 별세하실 것을 거기서 끝나고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서 인제 율법의 완성 사랑이 익었지요. 사랑이 이겼습니다. 사랑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여기 우리의 힘쓸 것에 대해서 하나 더 이야기 하지요. 12절 밑의 난에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 그랬어요. 하늘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는데 무슨 애쓸 것이 무엇이 있겠소? 사람이 애쓸 것 가만있어도 다가오는데 말이야. 애써야 된다고 하니 애쓰고 힘써야 차지한다고 하니 하늘나라는 다가오고 있는데 뭐 갈라고 애쓸 것이 없고 그 자리에서 받아 들여야 할 것 아니요? 무엇을 애써야 할 거야?

 

 

   

 

 

 

하늘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온다고 하면 그 하늘나라를 마음 안에 맞아들이려고 하면 무엇을 애쓰고 힘써야 되요? 힘쓰고 애쓸 것이 무엇이냐? 자기를 버리고 어떻게? 나 하늘나라 가면 안 받으려오? 버려버려요. 자기 몸은 그대로 있고 마음에 지금까지 이것이 하늘나라다. 만들어 놓은 것 가령 농장에 지금 하늘나라 만들어 놓았다. 그걸 하늘나라로 생각했으면 그걸 버리라고 베어버려. 지금까지 힘주셔서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해놓으셨으니까 인제 그 자리에서는 내가 깨달을 것은 다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깨닫도록 양보해야겠다. 다른 사람이 책임지고 살아보다가 깨닫도록 양보해줘야겠다. 내가 못 이겨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양보한 것이다. 다른 영혼이 이 일을 맡아서 책임을 지고 해보다가 깨달았으니까 그러니까 양보하는 거야. 내가 하기 싫다거나 짐을 회피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영혼들, 내가 깨달았으면 붙들고 할 것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 깨달도록 양보해 줘야 되거든요. 율법적인 행위 사람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은 힘껏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도록 환경이 허락되는 것이에요. 그래야 돼. 점점 안 된다는 것을 차차 깨닫고 완전히 깨닫지 못하면 혼자 남았어야 돼.

 

 

 

   

 

 

 

다 하나님의 지배도 안 받고 안 된다. 혼자 무엇을 비유 하냐? 성경 가운데 어떤 것이 그런 비유에 해당 하냐 하면, 밤새도록 사도들이 고기잡이 어부들이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율법적인 지도를 일평생 한 50년 7-80년 계획했어도 영혼하나 예수께로 인도 못했다. 그것이에요.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율법적인 지도 가지고는 안 된다. 남원서 지금 모이는 것이 그렇게 저녁에도 모이고 조석으로 예배 보고 성인 성녀들의 책도 보고 설교도 주일도 듣고 삼일도 듣고 조석으로 듣고 그러는데 뭐 또 특별히 남원에 가서 모여야 하냐? 그거에요. 왜 그러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래요? 그것이 나쁘다는 것 아닙니다. 좋은 것도 있는데 좀 잘못된 아직 잘못된 태도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거에요.

 

 

   

 

 

 

 또 예를 들면 아현교회 청년들이 전도 열렬한 유명한 전도사 자격들이거든요. 그렇게 하는데 무엇 또 여기 와서 새 말을 들을 것이냐? 모임을 갖게 해주시오. 허락해 주시오. 남원에 모이면 가겠습니다. 세 전도사가 그랬다니 그것은 좋긴 한데 무엇 때문에 그러겠느냐? 그거 한번 생각해봐.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바른 길을 복음의 길을 찾았으면 그것대로 전진할 뿐이지 어디 가서 무슨 모임을 갖느냐? 그런 모임을 한 달에 한번 지방으로 돌아가면서 모인다는 거야. 십여 년 동안 그렇게 해야 전도사 자격으로부터 점점 목사 안수를 받는답디다. 1-2년 해가지고는 안 된다. 거기가면 거기 가서 목사 안수 받으려면 시간이 없어서 늙어 죽어요. 나 같은 놈은 또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아야 교육을 하는 것이냐? 다 바로 길을 찾는데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조금 미흡함을 느낀 만큼 또 모여보고 또 들어보고 또 다른 사람 새사람 말도 들어보고 그런 이야기거든요. 좋은 것 같지요? 좋은 것 같지만 아직 완전한 길을 못 찾아서 방황하는 것 아니냐? 그 말이야.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길을 찾았다고 자신만만한 그런 교만한 생각을 하면 더 못쓰지요?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계명을 지켰기에 또 영생을 다시 알아보려고 예수님 앞에 와서 물어본 것 아니겠어요? 또 율법도 안 지켰으면 계명도 안 지켰으면 그런 질문도 안했을 거예요. 지켰으니까 지키기는 했으나 자신이 없는 것은 의심을 했거든. 그 계명을 어려서부터 지킨 것만으로는 영생이 확실하지 않은 것만은 의식했기에 물어본 것 아닌가? 확실했으면 뭐 하러 물어봤겠습니까?

 

 

   

 

 

 

그것 지킨 것으로는 확실하지가 않아. 혹시 다른 이 계명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 그래서 알아보려고 하는 건데 예수님 말씀도 똑같거든. 계명을 지켜라. 무슨 계명입니까? 이런, 이런 아 그런 것 같으면 나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지켰는가? 시험해볼까? 시험이야. 진짜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시험이 온다고 지켰으면 어찌 너 혼자 부자냐? 네 이웃에는 가난한 사람 없더냐? 있는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줘라. 있으니까 줘라하는 거지, 있을 테니까 있을 테지요. 그러고 따라오라. 하늘에 너의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순종을 안 해요. 근심만 하고 돌아가요. 지켰냐? 지켰다는 것 거짓말이야.

 

 

   

 

 

 

또 선하신 선생이라고 해놓고는 그 말 해답을 듣고는 또 자기만 못하다고 하는 거야. 돌아간 것은 순종 안 한 것은 내 의견만 못하다. 다 팔아서 주면 식구들 굶겨죽게 생겼는데 그럴 수 있겠냐? 그런 말이 어디가 있냐? 상식을 벗어나는 말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냐?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유지하면서 하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다 팔아버리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어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인간에게는 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선을 하는 줄 알았어요? 사람이, 그것이 율법 생각이고 율법적으로 사람이 선이 있는 줄 알고 바울사도가 그 점이 없는 줄을 안 곳이 어디에 있지요?

 

 

   

 

 

 

사람이 선이 없다는 것과 의욕은 있어도 힘이 없다는 것, 힘도 없고 선도 없고 어디에 있지요? 로마서 7장 18절에 있단 말이야. 그러면 자기가 그만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선이 없다는 것을 왜 그때서 발견해? 그때 여러 번 체험을 해봤기 때문에 곽선희 목사님 설교 가운데 그 말이 있어요. 논리에 묻지 말고 경험에 물어라. 신앙은 경험에 있지 논리에 논리만 알아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참 진리의 말이 옳은데 바른 신앙을 가졌고 바른 체험을 했다면 논리가 정확할 것 아니냐? 그 말입니다. 성경 상 누가 논리가 정확했지요? 한사람 있지요? 아폴로는 성경과 모든 학식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세례는 시인한 사람이야. 그 점이 누가복음 7장 29절과 30절을 보면 세리와 죄인들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세례를 받지도 않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더라.

 

 

   

 

 

 

세례를 안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아폴로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그 말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의식한 것이에요.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예요. 그만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요. 논리가 정확해요. 그만큼 하니까 브리스길라의 권면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대화가 되요. 비논리적인 사람하고는 이야기가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서로 통하지를 않아요. 그렇지만 자기가 그만큼 그리스도에게 직접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정확히 배웠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브리스길라의 권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받은 뒤의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일반적으로는 부흥을 일으키고 호감을 샀지만 신앙으로 은총으로 신앙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었어요. 그런데 브리스길라의 권면을 받은 뒤에는 그냥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게 환영을 못 받아도 못 받는다고 해도 은혜로 믿은 사람에게는 큰 도움을 주었어요. 그것이 영혼을 낚은 일이에요. 믿음 안에 은혜를 깨닫고 믿어지는 거예요.

 

 

   

 

 

 

그 한 신앙 그 신앙, 은혜를 모르고 믿는 것은 수만 명 있더라도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가지고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구원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밤새도록 수고는 했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밤새도록 그때까지 자기 일평생 노력을 해봤으나 한영혼도 예수 앞으로 인도받지 못했다. 왜 그러냐? 왜 그럴까요? 그렇게 수고를 했는데 왜 그럴까요? 또 대답 해봐요. 신앙으로 안했으니까 그런데 자기가 살아있고 예수가 머리가 되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아니니까 믿음은 나는 율법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인데 예수가 하실 일이고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낚을 수 있는 잡을 수 있는 그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께 붙잡히지 않았어요. 말씀에 붙잡히지 않았어요. 은총 안에 은총을 힘입어서 역사하지 않아요. 내가 내 지혜로 내 방법으로 내 힘으로 했지 은총으로 안에서가 아니에요. 헛수고가 되어버려 밤새도록 헛수고라고 은총으로 해야지 주시는 힘으로 해야지.

 

 

   

 

 

 

 예수로 예수님이 하시도록 예수님의 몸이 되어드릴 것뿐이야.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먼저 성화되는 것이 그물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신 성화가 먼저야. 수신제가평천하, 자신이 먼저 수신이 되어야 수도가 되어야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빛낼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 하늘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으니 힘쓸 것이 무엇이냐? 자꾸 비우는 것 아닌 것을 비워버려, 내생각 내 지혜 내 힘, 나라는 것 다 비워버릴 것이야. 비우는데 힘을 쓰는 겁니다. 애써 힘쓰고 비워버려, 비워버리면 하늘나라에 가 그럴 것 아니요? 깨끗하게 음식을 담으려면 이미 들어있는 깨끗하지 못한 것은 싹 버려버리고 씻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냥 쉰밥에다. 깨끗한 것 담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들어 있는 것이 쉬어버린데 거기에다 그냥 담으면 같이 쉬어버리지 자기를 자꾸 버리는 일 비워버리는 일을 그것을 위해 애쓰는 겁니다.

 

 

   

 

 

 

아이고, 저거 다가오니까 나는 하늘나라 수고 덜하게 내가 쫓아가야겠다. 그거 아니에요? 있는 거기 있는 자리에서 비워요. 또 그 자리가 복잡해 못 비울 것 같으면 비울 수 있는 자리도 허락이 될 테지요. 그 자리가 안 될 것 같으면 더 조용한 자리를 간다든지 혼자만 있는데 간다든지 누가 아무 간섭도 받을 데 없고 그런데 가 섭니다. 그래야 될 테면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허락된 대로 또 그렇게 요구를 했으면 적당한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그런 장소를 하나님이 허락해. 또 원이 있으면 원하도록 주셨고 고요한데 농장에서 살림을 하다가 정신 이 사람 일 간섭 저사람 일 간섭하다가 또 딸 하나 있는 것 자꾸 이걸 어떻게 못 비켜주게 하느냐? 문제가 복잡하다고 하나님께 싹 맡겨버려야지 나도 내 몸 아니다. 알아서 해 주십시오. 내 지혜로 내 힘으로 못하겠습니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못 하겠습니다. 주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살 후 3장 5절하나 봐요.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참 좋은 기도지요. 바울사도의 기도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예수님이 인도하셔야 되요.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참 좋은 기도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사랑하도록 해주셔야 하거든요. 또 뜻대로 하고 싶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 주셔야 하고요. 또 할 수 있는 힘도 주셔야 하고요. 그러니까 사랑하게 해주시오. 예수님이 주님께서 사랑하게 하도록 우리 마음을 인도하신 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 다고요. 인도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게 해주시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인내 인내력도 예수님의 인내력에 인간의 인내력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한도가 있습니다. 인간의 인내력 참는 데는 한도가 있어요.

 

 

   

 

 

 

자기가 죽게 될 때는 그 이상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자기가 위급할 때는 내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가 배고플 때는 애기 받은 밥도 빼앗아 먹는 것이 인간인데 그때는 환장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인도하시고 그러니까 이 말과 고린도후서 4장 14절 말씀하고 통하지요. 말은 조금 달라도 주께서 항상 인도하시고 항상 주께서 인도하시고 개선행진에 기대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아는 향내를 나타내주시고 네 가지 다해주신다고, 사람은 무엇이냐? 몸으로 하나 마음으로 하나 나눈다면 몸도 아파서 꼼짝 못하면 그대로 침상에 누워서라도 마음으로만 해,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보고 따라 오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으로 인도하시니까 몸이야 가만있어도 되고 또 몸도 따라오라고 하면 따라 가야 돼. 몸도 그러니까 몸으로 순종하는 것 몸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 마음으로 항상 감사하는 것 넷 중에 두 가지 반을 해야 한다. 예, 감사. 예, 감사, 아멘, 할렐루야. 신앙은 무엇이냐? 신앙은 환경에 감사,

 

 

   

 

 

 

 공의의 복종,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그것이에요. 공의의 복종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직접 이 집사님 자신의 태도에서 대답을 하란 말씀입니다. 어찌해야 공의에 복종하느냐?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그것이 실제 우리 개인적인 문제에다가 붙여야 하는데 각자 지금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니까 공의에 복종, 무엇이 공의에 복종하는 태도는 무엇이에요? ‘하나님이 뜻에 복종.’ 뜻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것이 뜻이냐? 우리가 뜻대로 바라는 것인데 무엇이 뜻이냐? 대답은 맞아요. 그런데 뜻이 무엇이냐? 뜻에 복종한다. 그것이 제일 설명이 잘된 데는 걸인 왕이란 말이야.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통해서 최선을 다해서 전신을 다해서 내게 주신 것이다. 배고픈 것이나 헐벗은 것이나 정처도 없는 것이나 천대받는 것 남한테 멸시당하는 것 다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내게 불행이라고 하는 온갖 불행, 나사로가 그것이니까 불행은 제게 다 주시오. 그런 태도에요.

 

 

   

 

 

 

 온갖 다행은 불행이 다 벌어져 땅에서 온갖 불행은 다 독차지했기 때문에 온갖 행복도 독차지 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 품에 누구하고 있어요? 둘이 있어요? 아브라함하고 둘이 하나에요? 음부도 누가 둘 있어요? 부자 하나있어요. 한사람은 드러났지 다른 사람은 몰라. 누구든지 진리를 거슬리면 거기 가서 살고 누구든지 진리대로 살면 나사로 가는데 갈 것이고 진리로 자유를 얻은 시민이에요. 자유, 하나님이 내게 허락된 모든 것은 다 나를 사랑해서 주셨다.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공의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의에 순종하는 것이에요. 모든 역경을 달게 받는 것이에요. 내 감정의 요구에 거슬리는 그런 환경일수록 달게 받아요. 그래서 감사해야 되요. 내 육정 요구에 딱딱 맞아들어 가면 그때 감사하는 것 곧 불평 불안이 따라온다고요.

 

 

 

 

 욥이 그것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복을 받았으니 물질적인 복을 받았으니 무엇도 받아야 된다고요.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그것이 공의에요. 재앙은 깨닫고 받으면 또 무엇이 와요? 영적 축복이 오지요. 깨닫고 받으면 얻지만 깨닫지 못하고 받으면 그대로 버려버려요. 내가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오는 구나. 그걸 깨달았으면 달게 받아 버려. 그러면 배나 받았다고 영적 축복을 배나 받은 것입니다. 아들을 배나 딸을 배나 살림을 배나 받았다는 말 아니에요. 신약에 많이 있는 말씀인데 복음마다 다 있는데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말씀 때문에 부모처자 전토 다 버리면 세상에서 얼마나 받는다고 그랬어요? 백배나 받는다고 백배, 그러면 아버지 버렸으면 아버지가 백이야. 아내를 버렸으면 아내가 백이에요? 그 말 아니지요? 백 보다 만보다 더 만족하다는 말이지,

 

 

 

   

 

 

 하나 버리는데 이삭 하나 버렸는데 자손을 얼마나 더 얻었다고 그랬지요? 이삭 하나 버리고 하늘의 별수 바다의 모래 수, 셀 수도 없이 그렇게 많이 받는다고 그것이 믿어지니까 기쁨으로 버리지요. 그 독생자를 그 말이 믿어지니까 또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린다하는 전능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아멘하고 순종한다고, 안 믿어지면 어떻게 순종 하겠어요? 어떻게 그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느냐? 죽이냐 말이야.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신앙으로만 가능한 일이지, 불신앙으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불가능이지. 그런 신앙이 독자를 어떻게 보내요?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 네가 공경하는 줄을 알겠다. 네 마음 내 마음 똑 같구나. 나도 내 독생자 버린다. 내가 할 것을 네가 버렸다. 믿어버리지 않아요? 하나님이 믿어버려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어버려요. 어찌 내 마음을 똑 같으냐? 예수 바칠 것을 미리 보여준 거예요. 이삭 바칠 때, 그러니까 참으로 죽여서 불에다 던지는

 

 

 

 

 

HTML.망상


망상 간디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면 할수록


혜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아마도 가장 큰 망상이라고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친구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실체 때문인데도


우리는 잠간 동안


그 실체를 덮고 있던 껍데기가


살아지는 것을 한탄한다.


실체의 죽음,


실체와 이별하는 일은 없다.


진실한 우정은


겉껍질이 사라진 뒤에도


그 실체를 만나고 지켜간다.


2016/11/10 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