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대전 유성에들려 강형님과 펜셩에 들렸다가 세종시와 아산을 지나 평택에 왔다. 손자들과 다음날 안성 카페에 벤토와 다녀왔다. 저녁에 보름 찰밤과 나물을 먹었다.
율법과 복음
1983. 1. 1
성경 로마서 15장 14절~21절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너그럽고 지식이 풍부하여 서로 충고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내가 이 편지에서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서 말한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의 직무를 맡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방인들을 하느님께 복종시키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나는 다만 그분의 일군 노릇을 했을 따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기적과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힘 곧 성령의 힘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말과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전에는 집을 짓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소문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 주고 그분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깨닫게 하여 주리라"고 한 성서 말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으로써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의 직무를 맡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5:16공동번역)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 내용이에요. 성령으로 거룩히 되어야만, 거룩히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성령으로 거룩히 되지 않고는 하느님의 제물이 못돼요. 암만 바친다고 해도 그 자기 생계를 위해서 바친 것뿐이지, 의식주문제, 먹고 살라니까 바쳤다는 것이지. 성령으로 거룩히 되지는 안 했단 말이야. 그래야 인자 받아서 기쁘게 받아 쓸 제물이 된다는 것. 그렇게 되게 하는 그 역사가 바울사도의 복음 내용이에요.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 어떻게 받아주시냐? 성령으로 거룩히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어떻게 그렇게 하냐?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돼요. 그 방법은 예수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18절.
점점 구체적인 방법이 나옵니다. ‘이방인들을 하느님께 복종시키시는 분은 그리스도시고 나는 다만 그분의 일꾼노릇을 했을 따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강조란 말이 두 번 있어요. 아까 15절도 있고. 강조. 이 점이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율법과 복음의 한계를 뚜렷하게, 정확하게 한계를 지었습니다. 율법이란 말은 율법으로 안 된단 말은 인간의 힘, 힘과 성령의 능력과는 하늘과 땅 차이란 말이야. 이방사람들을 하느님께 복종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에요. 사람은 못해요. 다만 그분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뿐이에요. 몸을 바치는, 주님의 몸으로 쓰도록 내놓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자유가 없죠? 자기 자유가 없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기적과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힘, 곧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일루리쿰(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말과 행동을 했다. 말과 행동. 그래 이 행동은 무슨 행동이냐? 이거에요.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했습니다. 그러고 나는 남이 닦아놓은 터전에 집을 짓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써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소문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주고 그분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깨닫게 하여 주리라 하고 한 성서 말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근데 이방인 사도가 됐죠. 이방인이. 먼 이방에서부터 몰아서 이스라엘까지 싹 한 그물에 다 들어오게 했죠. 먼 데서 몰아요. 사냥하는 데는 몰이꾼이 있죠? 몰이꾼, 멀리서 몰아온다. 그러고 인제 방법은, 또 더 구체적인 방법은 어디 있느냐 면은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이 고린도후서 4장을 볼 때는 2절을 뺄 수 없습니다. 1절서부터 읽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울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삐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을 어떻게 하면 바로 전하고 어떻게 하면 삐뚤어지게 전하는지. 그것도 우리는 분별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어떻게 전한 것이 삐뚤어지고 어떤 것이 바르게 전한 겁니까?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 어떤 게 삐뚤어진 것인지, 어떻게 알아요? 예? 아, 성경만 들고 설교만 하면 다 복음일 텐데요. 그래 안 해요? 성경도 하느님 말씀이니까. 하느님의 말씀인건 사실이라도 사람의 입을 통해서 사람의 말을 빌려가지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죠. 많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입을 통해도 하느님께서 성령이 쓰 면은 바로 되는데 자기 생각이 섞여있으니까 성령께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거기다 보태버리니까 많이 틀리죠. 그래 삐뚤어지죠.
거기 개역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2절에, 고린도후서 2장 17절 말씀을.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말씀을 파는 잡상인이란 말이에요. 상인, 장사꾼. ‘상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파견을 받고 하느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삐뚤어지지 않고 바로 행한다고 역설을 하는데 듣는 편에서 그렇게 바로 못 듣는다. 그럴 수 있지도 않겠냐? 그 말이에요.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 자신의 입으로 하던 말씀은 틀림이 없겠죠. 그러나 듣는 사람들이 잘못 들으니까 죽이려고 그러죠. 사도들이 증거 한 말도 그러고, 봐요. 어떤 사람은 그 말에 대한 감격을 받아서 넘치는 사랑에 그냥, 기쁨에 넘치는데 어떤 사람은 그걸 없애 버리려고 해요. 그런 복음은 있어선 안 되겠다고 우리 장사에 큰 지장이 생긴다고.
마술사로 인자 큰 이문을 보는데 점치는 사람보다도 그런 여자, 근데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해 봤다고 예수를 쫓아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 개역에는 그렇죠? 혼잡? 섞일 잡(雜)자야, 섞였어. 무엇이 섞였어요?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나 자기 무슨 뜻이 섞였단 말이야. 그 어떤 야심이 섞였다고. 이래선 안돼요. 바울사도는 어떻게 바로 전했냐 하면은 무보수로 전했죠. 무보수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줬죠? ‘우리는 많은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파견을 받고 하느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 4장 2절,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삐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갈라디아 1장에 보면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진 저,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증거 하는 복음 외에 다른 것이라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에요. 내가 하느님을 사람을 기쁘게 하면은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내가 받은 것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접 계시로 받아낸 거다. 하느님 말씀을 삐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냈으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대담하죠.
그, 늘, 두드려 맞고 채찍을 뭐 몇 번 했어? 십에 하나 감한가 사십에 하나 감한가 그런 매를 맞고, 몇 번을 맞고 늘 죽임을 당하고. 그러고 도로 살아나고. 아무리 거꾸러짐을 당해도 나는 숨 막혀 죽지 안 한다. 은총의 덕분으로 되서야 말로 나는 승리라 한다. 우리가 전에는 복음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려졌다 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려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안 해요. 믿지 안 한단 말이 무엇을 믿지 안 한단 말이야. 쉽게 믿지 안 한다.
로마서 6장 8절 다 대봐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어찌하라고 믿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는다, 어쨌으니? 죽었으니. 제 말이에요? 바울사도 말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요. 그걸 믿지 안 했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영광의 빛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일하는 여러분의 종, 영을 건지는 종,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 빛은 어따 쓰라고 주셨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춰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으라고 어둠에서 빛이 비쳐 나오너라 그리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게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 빛을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럼 이 이것을 깨달은 사람의 생활이 인제 예수를 증거 하는 방법입니다. 예수의 일꾼 노릇하는 방법이에요. 예수와 한 몸 되어서 예수와 같이 복음을 증거 하는 방법이 나와요.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뭔 보화입니까? 질그릇은 우리 몸입니다. 돌이 부닥치면 깨져버리는 질그릇 같은 몸이여, 이건. 뭐 이건 이 몸은 언제 안심할 때는 없잖아요? 이 지구상에 사람 치고 나는 이제 안 죽는다 하고, 안심하고 있을 사람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그 라디오만 틀 면은 뉴스 들으면 맨 지구상에 그 어떤 사건, 사건. 뭐 지진이 나서 몇 천 명, 몇 만 명 뭐 사건. 전쟁 뭐 끝날 새가 없다 말이야. 그러니 이 한국은 어쩌겠냐? 이만하면 됐다 뭐 안심한다고. 이거 걱정 하려면 제대로 마음 놓고 못살아. 그런 몸이에요.
그런데 이 보화를 가졌다면 염려 없다 말이에요. 그럼 보화가 뭐냐? 보화가 뭐예요? 6절에서 찾아보면 된다고요.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닫는 것이 보화란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빛을 비춰주시되 그 빛을 어따 쓰라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으라. 그걸 깨달은 것이 보화요.
우리 질그릇 같은 몸, 뭐 담으면 깨져버리고 까딱하면 차사고가 나고, 뭐 운동선수도 뭐 어데 안심해요? 권투선수는 뭐 70명 중에 몇 명이 뇌에 병, 뭔 이상이 생겼다고. 전부 안심할 것 없어요. 하다보면 운동도 다 위태로운 거 많잖아? 그러나 그건 명예니까 목숨을 걸고 모두들 하지 않아요? 죽어도 좋다. 한번 이름을 날리고 죽자. 아무리 날려도 그건 세상이야. 땅에서 끝나버린 것이지, 영의 세계는 상관없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영광, 아 예수의 얼굴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십자가 질 무렵에. 뺨 맞았죠? 침 뱉음을 당했죠? 발길로 채였죠? 그 수욕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라는 거예요. 진짜 영광. 하느님으로서 피조물한테 그렇게 천대와 멸시를 당하는 것, 그것이 만물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이에요 수단 방법. 독생자를 그렇게까지 멸시당하도록 내놓았습니다.
그럼 당신의 마음은 어쩌겠는가 말이에요. 독생자가 그렇게 당한 것, 참 차라리 당신이 당하고 말지, 독생자에게. 사랑하는 자식 같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느님은 무자비 했죠? 그때. 잔인했죠?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고는 영혼을 건질 길이 없다면 전 영혼을 건짐과 동시에 또 그 천대와 멸시의 천대가 영광이라는 거예요. 멸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멸시가 영광을 벌어줬나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래 땅의 영광과 하늘 영광과는 정반대라고.
사람들이 제일 천하게 여기는 것이 하느님께는 제일 귀하게 보시는 것이고요. 사람들이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느님은 눈도 깜짝 안 하십니다. 그게 다릅니다. 그게 달라.
그래 그걸 깨달은 사람의 생활이 7절 이하에요.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완전히 전멸상태에요. 자기는 완전히 깨져버리고 없어요. 없어. 그런 데서 인제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나요. 내가 살아서 내 힘이 있는 만큼은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육적으로는 절망이 되나 영적으로는 희망입니다.’ 새 희망. ‘그러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게 방법이에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복음을 증거 하는, 빚 갚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죽어진 만큼 생명이 나타나요. 예수의 생명이.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12절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설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빚을 갚는 겁니다. 모든 인종에게 야만인에까지도 빚을 졌다. 은총의 빚을 졌다. 그러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그 말입니다. 그 받은 은총을 자기만 누리란 거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해주란 거예요.
특별히 천민에게. 농민들 중에도 또 산중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순진한 영혼들에게, 죄를 깨닫는 영혼들에게 증거 하란 겁니다. 그 증거는 이 몸으로. 말로만이 아니거든요. 몸으로, 행동으로. 행동은 뭐예요? 구체적인 행동. 빚졌으니까. 긍게 우리 안전하면 빚 몫 안 갚는 거 아닙니까? 은총의 복음을, 은총을 받았으면 은총을 나눠줘야 되는데 말로만은 안 된다 말이야. 아니고, 실지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다 바쳐야 혀.
뭐 십일조 정도가 됩니까? 십일조라 하면 구약시대 말이지, 신약에는 다 바치라는 거지, 뭐 십일조만 내면 됩니까? 십의 십조를 다 내도 그것만은 안돼요. 왜 가인이 농산물 다 바쳤다 하더라도 왜 안 받아 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아벨의 피만 받아주죠. 그 믿음과 불신, 신앙과 불신앙 차이에요. 가인은 신앙 없었어요, 그때는. 믿지 안 했어요. 하느님의 능력 믿지 안 했어요. 사랑 믿지 안 했어요. 안 함과 동시에 불신앙인 만큼 죄는 죄대로 지은 거예요. 아벨은 그렇지 안 해요. 순교를 당했으면 당했지 형한테 맞아 죽으면 죽었지 죄는 안 지은 거예요.
그러나 자기는 죄인 것을 의식했어요. 믿음으로. 나는 마땅히 맞아죽을 죄인이다. 그게 신앙이에요. 여러분도 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 개역에는 뭐라 되어있냐 하면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랬죠?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 안 했어요?
로마서 1장 6절, 개역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니라.’ 이제 내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몸 내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근데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문제가 끝날 사이가 없죠. 염려가 있고, 이 몸을 어따 두야 하냐? 어디로 가야 하냐? 저기 일해 계신 그 사람 같으면은 부안은 농사를 안 징게 그 가면 쓰겠다 하면은 그러면 또 갈 수가 있는가? 또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는 농사를 좀 지면 가겠는데 농사도 없이 가서 어떻게 있냐? 양심의 가책을 받죠. 긍게 농사를 지어도 문제, 안 지어도 문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냐? 나는 누구랑 오냐?
‘인자 영적 문제를 해결해보고, 성경을 좀 연구하려는 사람은 오라’ 이거에요. 왜냐? 내가 배울랑게. 또 누가 묻는 사람이 있어야 배우지요. 문답이 있어야지요. 학문 아닙니까? 학문. 배울 학(學)자, 물을 문(問)자 아니요? 혼자라도 자문자답을 해야지요. 아 이 말이 이런 것인가? 다른 데는, 아 어제도 얘기했지마는 그 불란서 파리 시내는 실직자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뭐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은, 일이 인자 직업을 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밥벌이를 못 하니까 거지노릇을 할 밖에 없죠. 그렁게 그 문제를 다 직업을 시켜주어야 해야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또 그렇게 함으로 해결 되냐면 그렇지가 않아요. 영혼문제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13장9절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은총으로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이득을 본 일은 없습니다.’
루가 14장 15절
같이 앉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잔치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 가치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봐야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둘째사람은 나는 겨리 소 다섯 쌍을 샀는데, 다섯 쌍이면 아마 열마린가? 그래요. 그것들을 부려보려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 있소? 하고 말했다. 여기는 미안하단 말도 없어요. 두 번째까지는 미안하단 말이 있는데 여기는 천부당만부당하지 않느냐고 말이야, 얼토당토않은 소리 말아라. 고, 곧 장가 간 사람보고 무엇을 청하냐?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가 또 있겠느냐 말이야. 그러니까 그거는 미안하다 말도 안 해버렸어요. 그래 지금 무엇을 뜻 하냐? 그 다음번에 봅시다.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에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 하였다. 얼마 뒤 종이 돌아와서 주인님 분부하신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여기도 좀 비었는데 내일쯤은 차겠죠. 모레나 찰 란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말이겠어요? 자기도 시간 허락되면 한번이라도 안 갔으면 하고 혼자는 못 오겠지마는 한번이라도 있으면 해요. 그런 하나가 문제니까, 내 자신이 문제니까. 채우도록 하라.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까 세 종류의 사람, 밭 샀다, 소 샀다, 장가갔다 이런 사람들은 이 잔치에는 참석 못 한다. 천국잔치에는 참석 못해요. 반드시 절름발이라야 돼.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돼. 그 말은 뭔 말이냐 하면은 마음이 비었다는 것을 의심한 사람이다.
우리 지금 마음이 비었습니까? 안 비었습니까요. 차기는 찼죠. 뱃속 아닙니다. 마음속. 뭣이 찼습니까? 가득 차야할 것은 안 찼어요. 꼭 차야할 것은 뭣이 차야,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무엇이 담겨야 쓰겠습니까? 마음속에. 말씀이 차야죠. 옳죠. 말씀이죠. 사랑이죠, 예수죠, 진리죠. 그리스도죠. 그리스도가 차야 돼요. 그러면 사랑이죠. 있어야 할 사랑은 없고 있어야 할 빛은 없고 어둠뿐이요. 맨 깜깜한 것뿐이요. 재뿐이요.
모두 첫째 교만덩어리고 그 담에 모두모두 분통이야. 모두 문제 통이라, 문제 통. 여러 문제가 그냥 얽혀버렸어. 이건 풀래야 풀길이 없어. 이 성령만이 열쇠지, 이건 못 풀어. 성령의 은총만이 해결책이지. 그 외엔 없다. 사랑만 있다. 성령은 사랑이거든요. 삼위는 사랑이거든요, 말씀이고. 가난하다 그러면 사랑이 없다, 빛이 없다, 말씀이 없다. 그것을 의식하는 영혼이에요 그 가난이. 빛이 없는 만큼 어둠이 있고 진리가 없는 만큼 불의가 있고 참선(善)이 없으니까 죄만 있고 악이 있고. 그 반대란 말이에요. 그래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은 없어졌다. 꼭 있어야 할 거는 사랑뿐인데 사랑이 없어요. 생명이 없어요, 영생이 없어요, 진리가 없어요. 하느님이 안 계셔. 계시기는 계셔. 그래도 주관 안 하는 것이야. 내버려둬. 왜냐? 내가 머리가 돼 있으니까. 내가 왕이 되어 있으니까. 하느님이 삼위가 왕이 되셔야 하는데 내가 왕이 됐으니까.
그러면 아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은 왜 그 잔치에 못 참석하느냐? 비우지를 안 했어요. 가난하질 안 해요. 인제 그러니까 그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질 것 아닙니까? 장가를 갔으니 인자 자자손손이 다 유산시켜 줄라 면은 얼마나 노력이 끝도 없잖아 말이야. 한도 끝도 없어요. 끝없는 족보죠. 한 영혼 한 영혼을 어떻게 만족을 채워줍니까? 만족 시켜줍니까? 안 된단 겁니다. 세상에 모두 병신도 하나도 없고, 다 건강하고, 다 부자고, 그러면 좋겠지마는 그럴 순 없어. 그래서는 안 돼요. 하느님은 그렇게 안 하셔. 그럼 언제 회개하라고. 안 된다고. 하느님의 방법은 그렇게 돼있지를 안 해요. 성경이 그렇게 돼있지를 안 해. 반드시 실패를 시켜서 회개를 시켜야 해, 회개를 시키러 오셨으니까, 죄인을 회개시키려 오셨으니까 죄를 깨닫게 해야지요. 그러니까 죄를 못 깨달은 사람은 죄를 깨닫도록 유혹의 신을 보내지 않았어요? 죄를 더 짓게끔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냥 깨닫게 하려니까. 그렇게 섭리로 하시는데요,
아담이 죄를 지었기에 실패를 했기에 그리스도가 오시게 된 겁니다. 아담이 성공을 해버렸으면 불완전한 인간으로 끝나버려요. 그리스도는 못 와요. 또 제자들도 다 헤어졌고 그때 순교를 다 당해버렸으면 끝이 없어요. 복음이 없어요. 그때 다 예수를 배반하고 갔기에 다시 돌아왔죠. 죄를 깨닫고 돌아왔죠. 그 실패가 영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가 깨달으면 그것이 좋은 기회고 성공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실패는 성공의 기초에요.
육적 성공은 실패의 원인이 되고요, 욥이 부자 때는 그 재앙 받을 전제조건 아닙니까? 우리가 물질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아야 하지 않냐? 그래 재앙을 달게 받으니까 이제는 영적축복이죠. 나중에 배라는 건 도로 물질을 또 그러면 또 재앙도 또 되받게요? 나중에 배는 아닙니다. 영적이에요.
절름발이 모인거야. 절름발이. 오늘 절름발이인걸 알아야 한다. 그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지고 발을 절었죠. 그 인자 발이 범죄하면은 한 발을 끊어버렸다, 손이 범죄 하면 그렇다. 또 한쪽 눈이 범죄 하면 또 한쪽 눈 뭐라고 했던가? 빼버려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세상으로는 못 가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창세기 3장에 악마에게 발뒤꿈치를 상하게 했죠. 상함을 당하셨죠. 근데 그 대신 예수님은 악마의 대가리를 깼습니다. 내 시방 세상에 있는 악마는 대가리 없는 악마입니다. 그래 무서울 것이 없어요. 예수님에게 맞아서 깨져버렸어요. 외부에 보기에 무섭고 자기 안에 있으니까 그렇지, 무서운 것 아니란 거예요. 쇠사슬에 묶여있는 사자요. 꽉 묶여 있는 거예요. 보기만 막 위엄스럽고 무섭지, 실상은 꼼짝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뒤꿈치 상한 것은 세상으로는 못 가게 하는 거예요. 천국길만 가라는 거예요. 절름발이, 절름발이인 걸 알아야 한다. 한 쪽으론 가지 말란 거죠. 소경 하나 더 보고 이제 그만 둡시다.
이사야 42장 1절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성령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바른 인생길.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여기 58장인가 어디 보면
‘크게 외치라’ 여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는 행동에 따른 말이죠, 행동에 따른 말씀이에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뭔 행동을 좀 잘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딱 치워버리거나 그러지 안 한단 겁니다. 깨달아 줄 때까지 내버려둬요 고대로.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진리만 보여줘요. ‘그는 기약 끊겨 용기를 잃을 일은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그러고 인자 저기 42장 16절서 봅니다.
‘호수도 말라 그 바닥이 갈라지게 하리라.’ 그건 15절이고.
‘그러나 나는 낯선 길 가는 소경의 손을 잡아주고 가본 적 없는 오솔길을 살펴주어 캄캄하던 앞길을 환히 트이게 하리라. 험한 길은 탄탄대로가 되게 하리라. 나는 이 일을 이루고야 말리라. 결코 중단하지 아니하리라. ’
‘우상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꼬리를 감추고 부어 만든 형상을 보고 당신들이 우리의 신이다 하는 자들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18절
‘귀 먹고 눈 먼 이스라엘. 귀머거리들아 들어라.’ 어찌 귀가 밝아야 할 텐데 귀머거리보고 들으라고 합니다. ‘소경들아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 내 종과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내가 보낸 심부름꾼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있으랴. 나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와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야훼의 종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어디 있으랴. 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다. 야훼께서는 당신의 옳은 뜻을 세우시려고 법을 크게 들날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런데 이 백성은 털리고 노략질만 당하였다. 모두 바위굴속 올무에 걸리고 영창에 갇혔다. 털려도 구해주는 이가 없고 노략질을 당해도 돌려 주어라고 역성들어주는 자 없다.’ 그 부분만 보건데, 긍게 여기 1절서 한 7절까지 그 종과 여기 16절, 18절, 19절, 20절까지의 여기 종. 귀머거리 종. 아주 딴판이죠? 그러면 그 종과 뭣이 다르냐? 1절서 7절까지의 종은 바로 예수님에게 관한 것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6절 볼까요?
‘하느님 야훼여,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인류와 계약을 맺었으니 예수지요?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여기는 야곱인가 몰라도, ‘너는 만국의 빛이 되리라.’ 여기 산 사람, 개인 사람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너는 만국의 빛이 되리라. 이는 예수입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이거예요. 그래 오늘 인자 그런 갇힌 지경을 체험해야 된단 말입니다. 한번 갇혀야 되요. 갇힘을 체험해요. 그런다고 해서 죄 짓고 형무소에 가란 말 아니고요, 스스로 하느님 앞에 죄를 깨닫고요. 하느님께 갇혔다가요, 법에 갇혔어요. 어디서 지금 몇 해동안 한 근 이십년 동안 모두 갇혔다가 해방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해방인지 몰라요. 도로 더 엄한 데가 매일 런지 몰라요. 이 법에, 참으로 해방은 어디든지, 인자 누가 가두어놓을수록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우선 나타난 법에 안 갇히려고 해요. 그럼 안돼요. 인자 가라고 허락은 했지마는 그건 참 하느님이 ‘이제는 그만큼이면 되었다’ 그래서 허락은 된 거예요. 그러나 또 자기 자유가 또 갇혀요. 매여 버립니다.
그러니까 절대 하느님의 뜻에는 일편단심으로 순종하는 각오가 철저히 서 있어야 된다. 그런 사람은 어디가 잡혀서 어디가 매이나, 몸은 매여도 마음은 자유란 말이에요. 그것이 복음 증거 하는 겁니다. 바울사도 복음 증거 하는 것은 옥중 서신이에요 옥중에서부터 그런 서신이 나왔지 않습니까? 노래가요, 시가. 시죠. 항상 기뻐하라.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 그렇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기쁨의 노래가 나온 거예요. 복음의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이란 건 뭐냐 하면,
이건 예수고, 이거는 18절 이하는,
이 종은 누구냐? 저예요, 저. 저 같은 사람. 복음을 증거 한다. 헌데 실상은 소경이에요. 그렁게 소경인 걸 의식하는 사람 불러오란 말이에요. 아까 두 가지, 세 가지, 사양한 사람. 세 번째는 사양도 안 했지마는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비유한 말이냐? 비유죠, 비유. 실제 있는 건 아니고, 비유였는데 진리는 진리죠. 진리를 설명하려니까 그렇게 비유를 들 수밖에 없어요. 비윤데. 물질로 가지고 영혼 문제까지도 해결해줬다는 무리를 비유하는 말이에요. 아, 그런 가난한 거지들 모인 데가, 뭘 그런 데 가서 그 한가롭게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야. 수치스럽게 나를 그런 데로 오라고 하냐? 미안하단 말은 사람을 멸시를 해도 분수가 있지, 나 같은 사람을 그런 데로 초청을 해? 그런 것 아니겠어요? 미안하단 것이. 그렁게 그런 사람들은 물질만 있으면 된다는 그런 주장하는 사람들이죠. 돈만 있으면 된다. 아 고아원을 세우고 싶고 돈 안 받고 가난한 사람 병신들을 다 구제해. 고쳐줄 병원을 세우고 싶지마는 돈이 어디가 있냐? 돈을 인자 본국에서부터 갖다 쓴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 있는 것부터 쓸 데 없는 사람들 쓸 데 없어 걱정하는 사람들 좀 써주게 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아요? 불가하지, 그것으로 영혼 문제는 상관없단 말이야. 영혼을 건져줘야지, 그건 육체 아닌가 말이야. 암만 만년을 살아도 끝이 있는 것이거든, 육체는. 만년 살아도. 만년동안 고생만 헛고생만 더 하죠. 그러니 장수가 복이 아닙니다. 고생이 더 많죠. 몇 해 전 까지도 소련 사람이 뭐 170세인가? 70몇 세까지 산 사람이 있었다는데 그것이 무슨 복이냐 말이야. 그건 세상이지, 영에는 상관없어요.
성인 성녀들은 24세 안짝도 있고, 그런 장수 안 했어요. 영원한 세계. 뭐 예수님이 낳았을 때 순교당하는 그 죄 없는 어린애들, 그냥 세상에 살 것 없이 고생 안 하고, 그냥 천국 영생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어? 그런 축복이 어디가 있어? 자범(自犯 : 스스로 지은) 죄도 없고. 찬송합시다.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다리공원 한바퀴 : 모두가 한 몸 (0) | 2025.02.14 |
---|---|
눈속에 피는 꽃 : 종교의식 배제 (0) | 2025.02.05 |
을사년 설 : 믿어지는것이 은혜 (0) | 2025.01.30 |
병자년 섣달그믐 : 제자들의 사명 (0) | 2025.01.28 |
퇴비 들어온 날 : 대아 (1) | 2025.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