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을사년 설 : 믿어지는것이 은혜

mamuli0 2025. 1. 30. 10:25

 을사년설에는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내렸다. 현직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갔고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출범, 우크라이나 중동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금년 설에는 해외에 나가 있던 연이가 들어왔고 윤이가 제대를 하고 참석했다. 민이는 호주에 있고 주는 군대에 있다. 평택에서 직장 사정상 불참했다. 세배와 성묘를 하고 돌아갔다.

 

 

믿어지는 것이 은혜

1982. 1. 5

 

‘그때 닥친 온갖 모순, 모순을 극복한다.’ 이 눈을 뜨고 보면 모두 모순덩어리죠. 그걸 극복한다. ‘인간이 희망을 가질 때 그는 죽으면서도 자기 육체를 부활의 빛 속에서 내다볼 것이다.’

‘인간이 희망을 가질 때 그는 두려움을 이기고 시련의 참뜻을 깨달으며 하느님을 믿고자 한다.’

사람은 믿고자 하는 것, 믿어지는 것은 은혜고 믿고자 하는 것도 은혜지마는 이것도 여기서 인자 생기지 않습니까? ‘믿고자 하는 것들, 희망을 품었을 때. 하느님이 주신 그 희망을 받았을 때. 시련을 참뜻을 깨달으며 하느님을 믿고자 한다.’

‘불가능한 것도 믿으며 그 어둔 밤에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이거 신앙의 체험은 이것 아닙니까?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

나 같은 죄인에게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 하는 고 체험이요. 함께하심을 느끼며 기도할 마음이 생긴다. 지금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대신 말 안 했으면 쓰겠으나,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하니까 시간이 모자랍니다. 해지도록 하면 조금 할지 몰라도, 모자라겠어요. 그러나 어찌해? 마쳐야죠.

 

 

기도할 마음이 생긴다.

‘아브라함의 희망이 인간의 경외 가운데 하나요. 순교자들의 희망이 하느님 교회의 영광인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무능력, 이걸 알아야합니다.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할 때 자기의 무능을 알았고 동시에 의지할 필요를 느꼈다.’

우리의 자기의 무능력을 모르니까 의지할 마음이 없죠. 자기가 강하니까 믿을 필요가 없죠. 그리스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그리스도 없어도 나 잘 사는데. 자기는 죄인임을 알 때, 아, 이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 누구냐? 그리스도다.

자기 약함을 알 때, 강하신 그리스도를 의지 하고 싶지, 자기가 강한데 어떻게 의지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면 의지하면 승리한다. 승리한다는 희망입니다. 의지하면 승리한다. 왜 의지 않냐? 자기가 강한, 자기가 있다. 자기 약함을 의식하면은 희망이 있다, 의지하면 된다. 그러면 또 여러 가지.

희망의 출처죠.

인간이 자기 무능력의 저 밑바닥에 떨어질 때에 거기서 희망이 솟아난다. 거기서 희망이 솟아난다. 이 오늘 돌아가실 분들은 돌아가시는데 돌아가실 때, 요 희망만 품고 가시면 되요. 맡기고, 모든 걸 송두리째 쓸어맡기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승리하신다. 믿어야 한다, 승리하실 것을 믿어. 내가 승리한 거 아니야. 난 받쳐버릴 것이야, 의지할 것이야. 송두리째 맡길 것이지, 내가 섬기는 거 아니야. 맡기면 그리스도께서 하셔.

이 신앙만능이란 말은 내가 해서 만능이 아니에요. 나는 없어요.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그리스도 안에만 만능이죠. 그리스도만 만능이에요. 하느님이 전능이에요. 희망이 솟아난다. 인간이 자기 무능력의 저 밑바닥에 떨어질 때에 거기서 희망이 솟아난다. 이런 우리 희망을 갖고 싶거든 무능을 자꾸 발견하라고. 해서 의지하라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레미야가 감옥 웅덩이에서, 예수님이야 십자가 위에서 참 희망에 눈뜨듯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참 희망에 눈을 떴다. 요 말씀이 하나 들어오면 참 좋겠어요. 요 말씀 하나 받아주면 참.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야 희망의 눈을 뜨셨답니다. 나 다 이뤘다, 승리했다. 완전 실패 아닙니까? 십자가. 완전 무능의 결과 아닙니까? 무능해서 십자가 졌거든. 그런데 그것이 승리라고요 승리. 그것이 악마의 세력을 깨트려버린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참 희망에 눈떴듯이 지금은 비로소 나는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이해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갈 수 있다. 예수님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버림받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십자가 위에서 버리셨어요, 예수님을. 그럼 나도, 인자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가까이하면 나도 버림을 받아요. 내가 나한테 버림을 받아요. 또 자기 집안에서 버림받아요. 스스로 한다, 스스로.

‘지금 비로소 나는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이해하는 마음으로. 희망에 눈뜨는, 눈을 떴어요. 이해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갈 수 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에게서 나는 온 세상 고통의 응집, 온 세상의 고통의 응집, 다 거가 모여 있다 거기가. 응집을 나그네 인류를 구원하는 불꽃을 위대한 사랑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본다. 위대한 사랑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 거기서 본다. 그분에게서 나도 해답 없는 질문에 대한 무언의 답변을 발견한다. 그의 모든 요구가 충족됨을 깨닫는다.’

‘내 모든 동포들의 고통을 수반하고, 모든 동포들의 고통을 거기서 다 이해가 됐단 말이야. 그 고통에, 깨닫기만 하면 그 고통의 가치가 참 여기 있구나. 고통의 가치. 나사로가 온갖 불행을 독차지한 그 가치가 여기 있구나. 내 모든 동포들의 고통을 수반하고 납득한다. 야훼의 가난한 이의 저 숭고한 자세를 본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영적 사명을 깨닫는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된 인간을 그분에게서 본다. 아 천것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디 있어요? 아 성경에요, 성경에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어디가 말이 있어요? 베드로사도가 발표를 했죠. 진실로 하느님 아들이로소이다. 했지만은,

 

 

로마서 1장 3,4절.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의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서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 무엇으로 아들인 증거입니까? 죽었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부활은 죽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옛사람은 죽었다. 전 인류의 대표로 당신이 죽으셨는데 살아났어.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 그것이 하느님이 그렇게 능력, 전능하시다는 증거고. 부활이 세 가지 증거여.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 하느님이 전능 하시 단 증거, 하느님이 신성을 지녔다는 증거. 거룩한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죽어도 살아. 그 신성이 뭐냐? 사랑이란 거예요 사랑. 진리란 거예요 참이란 것 이지. 참은 없어지지 않아요. 진리나 다요. 그러니 다 잘못해도 이 진리, 사랑만 있으면 된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있으니까.

그럼 우리도 그 아들이 되려면 예수님같이 죽고 예수님같이 살아야죠. 6장 6절서 9절.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살이, 아까 죄의 종으로 팔린 몸이라 했으니까 일단 거기서 벗어나려면 죽음을 통해야지, 옛사람을 장사지내야지, 십자가에 내놔야지 죽지 않고는 못 벗어나요. 아 언제든지 죄의 종살이야. 죽으면 곧 벗어나요. 그 믿는 순간부터 자기는 죽으니까, 옛사람이 죽었으면 그 순간 그리스도가 살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았단 말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해방 못 됐다는 건 안 죽었단 거예요. 아이고, 어쩌고, 근심하면 아직 해방 못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 말이야. 죄가 해방 받으면 뭐에 매이고 무엇이 걱정이 있겠어요? 안 죽어진 것만 걱정이지 뭔 걱정 있겠습니까? 안 죽어지는 것도 뭐 걱정을 해요. 죽으면 되는 거지, 내놓으면 되는 것이지.

성령이 오시면 죽는 것이죠. 성령께 순종하면 죽을 때가 있을 거 아닙니까? 자꾸 순종해보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이 뭣을 믿습니까? 예수에게 속하면 뭐 떡 주고, 밥 주고 그거 믿죠? 그건 믿지만은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리라고 그건 안 믿는다고. 안 죽고 살라고만 해. 옛사람은 안 죽고 살라고 하는데 문제는 무진장 겹쳐지지 풀리지는 않는다고. 죽으면 해결되는 건데 말이야. 죽으면 끝나버리는 건데, 종살이서 벗어나는데 말이야. 아무리 걱정 해봐도 안 되고 별 방법을 해봐도 안 되고 죽으면 끝나버려. 뭐 방법도 쓸 것 없어. 죽으면 끝나버린 거야. 해방을 받아, 죄에게서. 그래 그걸 믿는 것이에요.

 

또 아들 된 증거, 골로새 2장이죠, 그 그전 공동번역으로 보기를 청합니다. 먼저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9절, 10절이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 신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보다 더 높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죠.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죽어야죠. 새사람 안 죽고는 하나 못 돼. 옛사람 죽어야 하나 돼.

그리고 그거 또 하나 되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아들이야. 죽어도 살아. 이 몸은 죽지만은 영혼은 살아요. 신앙은 부활을 받는다는 거예요. 심판의 부활이 아니고.

 

 

또 갈라디아 3장 7절 보고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성경에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증거를 나타냈죠? 나사로 믿었습니까? 믿었단 말은 없어요.

그러지만 여기는 믿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 품에 있었으니까. 그래 부자는 어디 있었습니까? 음부에. 불구덩이에 있죠, 뜨거운 불 속에 있었어요. 그거 왜 그렇게 갈려버렸습니까? 한 집에 살다가. 하나는 대문간에 있고 하나는 자기 방 안에 따뜻한 방에 있었는데, 한 집에 살았는데 왜 그렇게 갈라져 버려, 죽은 뒤에는? 왜 그럴까요?

그럼 거기도 부자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했지. 안 믿은 것 아닙니까? 무엇을 안 믿었습니까? 아까 증거대로. 예수와 같이 죽으면 같이 살 것을 안 믿었죠? 몸이 안 죽었죠, 안 죽은 생활을 했죠.

근데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독차지할 만큼 죽는 훈련을 했습니다. 고생을 했어요. 죽었어요. 겉 사람은 뭐 사람입니까? 거지지. 아무 생명 없죠. 겉 사람은 없어요. 죽었어, 속사람만 살았어. 믿음으로만 살았어요. ‘죽으면 산다.’ 그 말 그대로 생활로, 말로는 뭐 믿는다. 뭐다 없어요. 없지마는 여기 보니까 믿었으니 아브라함 자녀가 되었죠. 분명히 있죠. 부자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했지 마음으로는 안 믿었으니까 그래 갈라진 거 아니에요? 게 믿는 증거는 최후 결과 보면 드러날 거, 지금 기어이 사람들한테 믿는다는 증거를 내세울 것도 없고 믿어달라고 할 필요도 없고. 딱히 얼마대로 될 거면. 누가 또 믿지도 안 하는데 누가 잘 믿는다고 칭찬을 받아 봐도 소용없고. 안 믿는 놈이라고 욕을 해도 그것도 상관없고 마음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 뿐이지. 사람의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뭐 이단이라고 하고 죄인이라고 하고 아 자기가 죄인인거 더 잘 알고 있는데. 가르쳐 주는 게 좋을 것뿐이지. 아무 사람의 마음에 흔들리는 것은 아직 신앙에 순종 안 한 게 아닙니까?

그럼 4장 5절, 6절.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은 죄를 깨달은 만큼 자기를 부정한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 지배돼. 죽어야 충성이 되고, 죽어진 만큼 성령 안에만 충성이 있는 것이니까 자기가 살아있는 만큼 불충성입니다. 거짓입니다. 죄입니다. 그게 죽도록 충성하는 건 죽어야 충성한다 그 말과 똑같아. 자기는 없어요. 그리스도만이 충성이고 진실이니까 그리스도만이 살아야 해. 내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살아서 움직여야 돼. 나는 율법의 손에 죽어야 돼. 거짓이 또 나와선 안돼요. 죄 덩어리가 또 나서선 안 된다. 그리스도만 나타나야 돼.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정죄를 받았으면 판단을 받으라, 형벌을 받으라. 형벌을 받는 것이 율법의 지배받는 거다.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들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아들의 성령을 받아야 인자 참 아들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저 가서 또 좀 보 구요. 176-7. 여 문제부터 좀 보죠.

끝없이 당신을 믿습니다. 그게 죄는 무엇이 죄냐? 내가 있는 만큼 죄고, 있을 만큼 안 믿은 게 죄다.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 죄에요. 거기에서 갖가지 불복이 생길 거 아닙니까? 갖가지 죄목을 붙일 수 있어. 그 행동 하나하나. 그러니 믿었으면 나는 없거든요. 죄인은 죽었어요, 십자가에. 인자 믿었으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있으니까 믿음이 선이요 믿음이 의이고, 그리스도만이 그게 구원이야.

‘하느님은 인간을 신임할 줄 아시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신뢰할 줄 모른다. 하느님은 인간을 이렇게 믿어주고 끝까지 희망으로 안겨주십니다.’ 아무런 큰 죄에 빠졌어도 돌아오라. 또 제일 큰 죄에 빠졌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돌아올 여지가 있다고 본단 말이야. 하느님은 그렇게 봐요. 아직 죄도 안 짓고 죄도 모르고 죄는 짓지만 모르고 그런 사람은 하느님은 기대를 못 하셔요. 죄가 뭐 없으니까. 그 사람은 언제 돌아올 것이냐? 탕자 형이 죄를 물으니까 언제 돌아올 것이냐? 한집에 살아도 돌아온 것 아니에요, 탕자가 돌아왔지. 죄를 깨달으니까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지금 탕자 형 같은 태도로서는 안돼요. 죄 발견 못하는 그런 생활, 아무리 잘 살아도 그것은 하느님께로 돌아오지를 안 했어요. 한 집에 살기는 살아도 안 돌아와요.

우리 하느님의 사랑 속에 살지만은 사랑 모르고 살아요. 은총 속에 살지만은 은총 모르고 살아요. 물고기가 물의 혜택을 모르는 것과 똑같다. ‘하느님은 인간을 신임할 줄 아시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신뢰할 줄 모른다.’

우리의 소심함에 대한 하느님의 크나큰 인내가 여기서 유래하며 또 우리의 두려움이 그토록 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진짜 죄는 믿지 않은 것. 믿지 않는다는 것 자기가 있다는 것, 자기 자신이 죄 덩어리니까 여기 있다는 것 아직 그리스도의 손에 안 죽었다는 것, 그것뿐.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 것이다. 믿음, 희망 두지 않는 것. 인간의 진짜 죄는 믿지 않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신앙, 회의주의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인간이 관공서에 나가는 친구의 말을 믿듯이, 고궁 안내인의 말을 믿듯이 그만큼만 하느님께 신뢰를 둔다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도리어 하느님이 인간을 철저히 신임하시고, 이거야. 하느님은 인간을 이렇게 믿어주신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돼. 하느님은 어쩌면 나만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그걸 깨달아야 한다고. 그럴 때 인자 하느님을 사랑 안 할 수 없는 것이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지.

‘하느님은 인간을 철저히 신임하시고 인간들이 그 처참한 상황을 만들어 놓아도 인간들을 감싸줄 구실을 당신이 찾아내실 지경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기대는 최후가 오기 전에는 아니 최후까지도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것이다.’

요 말씀만 여러분 기억하고 돌아가셔요. 제가 증거 한 말씀 가운데 다른 거 다 잊어버리고요, 요 말씀. 최후까지도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는다. 그게 어떤 잘못에 떨어졌더라도 거기가 인자 희망이 있다. 잘못에 떨어졌을 때 인자 희망이에요. 거기서 솟아나. 거기서 인제 믿을 필요를 느껴요. 그러고 돌아오면 돼. 잘못을 모릉께 문제예요. 죄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죄를 발견하면 희망이 생겨, 구주가 발견된다. 인간을 심판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것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7절

 

희망의 화신이요 하느님의 신뢰의 화신이신 예수님의 말씀이라. 177페이지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신뢰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남의 손에 생을 거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하느님을 신뢰함은 평화요, 하느님을 믿는 것은 평화요. 송두리째 믿고 의지해버리는 것은 평화라고. 하느님 말을 신뢰함은 평화, 기쁨, 평온, 안주 안온, 안전 그리고 힘을 뜻한다.’

믿지 않으면 고립, 믿지 않은 것은 자기뿐이야. 어디에다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항상 불안해, 안정이 없어. 그리고 자기 몸 하나 둘 데가 없어. 제가 여기서 지금 어따 이 몸을 두나, 어디 갈 데가 없다. 기어이 있던 데 또 가야지 할 수 없다. 어디에다 둘 데가 없어. 어디가도 그럴 텐데. 믿지 않으면 고립 비애 슬픔 그리고 불안을 뜻한다.

이게 자기뿐이니까 그래, 믿지 않으면.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안 죽었어요. 예수 안에 없어요. ‘신앙으로 불신앙을 극복하듯이 희망으로 신뢰를 북돋고 키운다. 믿지 않으면 고립, 비애 그리고 불안을 뜻한다.’ 신앙으로 불신앙을 극복해, 자기 믿지 않은 자기를 부정해. 절제, 자제, 억제. 희망으로 극복하듯이 희망으로 신뢰를 북돋고 키운다. 그것만 보고 이 하느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데에 대해서 조금 보겠습니다.

129페이지.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영혼을 바친다. 그런 제목으로. 하느님이 택하신 것은 인간이었다. 인간을 사랑키로 하신 것이다. 그 인자 하느님이 인간을 대하신 태도입니다. 어떻게 대해주시냐? 사람으로 어떻게 봐 주시냐? 그 점을 여기 아주 설명이 되어있어요.

그러면 인자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대인관계, 아까 저 갈라디아서 말씀같이, 그 사람은 사람을 또 어떻게 대해야 하냐? 그거에요. 그것은 영혼으로부터 하느님이 내리신 선택이었다. 인간을 사랑키로 하신 것이에요.

‘그것은 영혼으로부터 하느님이 내리신 선택이었다. 인간을 편드시기로 하신 것이다. 가인이 저 무서운 살인을 범한 뒤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할 때 하느님은 가인의 편을 드셨다.’ 그 얼마나 사랑이십니까? 살인죄, 자기 한 뱃속으로 낳은 친아우를 죽였다고요. 아 아우도 죽이는데 다른 사람 죽이는 거야 보통 아니겠습니까? 한 뱃속에서 나온 친 동생을 죽인 사람인데 말입니다. 인간이요. 그 인류의 시조 아닙니까? 제2대, 아담의 장자 아닙니까? 장자가 자기 동생을 죽였다. 그런 큰 죄를 범해놓고도 자기가 죽임을 당할까봐 그러니 죄인이 제 발이 저려서 말이야, 누가 죽일라는 사람이 없어도 꼭 그렇게 마음이 믿어진 단 거야. 아휴 마음이 저린 다고. 제 양심이 항상 가책을 받아요. 그래 죄 지으면 항상 마음이 어디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 앞에 호소를 해요. 여 쫓겨나면 하느님도 못 뵈고 어쩔까요? 그리 걱정을 하니까 하느님은 아니다 보증을 해줘요. 너를 죽이는 사람은 내가 벌을 칠 배나 주겠다. 창세기 4장 15절에 있고, 24절에는 라멕인가 누구를 죽이면 그때는 인자 칠십칠 배나 주겠다고 하니 더 하느님의 벌이 더 커버려. 그처럼 더 무장, 무장 하느님의 사랑이 더 커버려.

게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하느님의 은총은 그보다 훨씬 크니까 그냥 뭐 태평양 바다에 물 한 방울이에요 우리 죄는, 하느님 은혜에다 대면. 그보다도 더 은혜는 더 크죠, 태평양 바다만 말했으니까. 그러니 그 뭐 죄는 있으나 마나에요. 사랑, 은총 안에 들어가면 그 죄가 문제가 아니다. 물 한 방울 떨어지나 마나 온 지구에 있는 물이 다 들어가도 하나도 불치도 않는다.

하느님은 죄인의 편이시다. 죄인인 인간을 편드시는 까닭이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기대를 꺾어놓질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기대, 하느님의 바라심, 하느님의 희망. 얼마나 인간에게는 믿어주시고 바라신단 말이야. 최후까지 회개할 것을 아신다는 거예요. 인간이 돌아오리라. 회심하리라고, 잘못을 깨달으리라고 아신다. 이렇게 봐주셔. 아 그런데 왜 잘못했다고 그 뭐 걱정할 거 없어요. 잘못한 거 때문에 인제 하느님 앞을 찾게 될 동기가 되지요. 그래야 인제 하느님을 쳐다보죠. 잘한 것이 오히려 하느님과 멀어지는데, 나 잘했다는 것이 하느님과 멀어지는데 아까 갈라디아 5장에도 있지 않습니까? 4절에. 율법적인 행동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다.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가 잘해가지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그런 태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져버려. 은총에서도 벗어나버려.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야. 어디에 비할 데가 없이 큰 손해 아닙니까? 자기가 잘한 것은. 잘해가지고 하느님 자녀 되겠다는 그 어리석은 태도는 자기는 죄 덩어리, 자기를 치워버려야지 죄 덩어리를 가지고 무엇을 잘해 봐도 똥은 어디까지 똥이지 죄진 것도 똥이지 똥 아닙니까? 독사는 어디까지 독사지, 사람은 아니지 않아요? 그 어른은 끝까지 기다려줄 줄 아신다. 여러분 조목을 한번 붙여보십시오. 하느님이 인간을 대하신 태도에서 몇 가지 몇 가지?

여기 인자 첫째입니다.

그 어른은 끝까지 기다리실 줄을 아셔요. 회개하기를. 그래 로마서 1장에 18절 이하에 쭉 말씀, 그 타락한 상태 그대로를 내버려두셔요. 어느 때이든지 깨닫고 돌아오리라 그런 희망을 가지신다.

둘째는 인간에게 있는 부정적인 것이 적극적인 것으로 바꿔질 것을 믿으신단 말입니다.

셋째는 미숙함이 성숙함에 이르고 아직 덜 익은 것이 완전히 익게, 이르게 된다는 걸 믿어주셔.

또 넷째는 죄는 은총으로 바꿔진다. 오늘의 죄가 내일의 은총으로 바꿔진단 거예요. 그렇게 희망을 기대를 가지세요. 근데 왜 걱정을 해요. 죄 드러나면 좋지 얼른 갖다 드리지요, 예수님 앞에. 예수님 앞에 드릴 건 죄뿐이니까. 내가 뭣을 잘한 거 갖다 드릴 거 하나도 없어. 인간은 죄 덩어리니까 죄밖에 없어. 그것만 갖다 주면 예수님은 좋아하셔. 예수님의 좋은 것하고 바꿔주신다 하잖아요?

 

 

또 다섯째는 완고는 온유로,

여섯째는 어두움은 빛으로, 가출은 귀가로. 가출, 출가. 집을 떠난 탕자가 돌아오지 않습니까? 죄 깨달았으니까 돌아오지, 죄 못 깨달으면 돌아오겠습니까? 또 성공을 했으면 돌아오겠습니까? 실패를 했으니까 죄를 깨닫고 돌아오죠. 그러니까 출가, 가출은 귀가로.

여덟째는 그의 잔악은 눈물로 회개된다 말이에요.

아홉째는 배반은 당신께 안기는 포옹으로 바뀔 것을 아신다.

열째는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 각 사람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이야기를 자기에게 결부시켜야 알아들을 것을 아셨다. 그리고 이 탕자는, 내가 지금 탕자인줄 알아야 된다, 탕자가 되어야 돼요. 죄를 깨달아요. 그래야 인자 하느님께로 돌아가요.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우리와 어느 길을 어떻게 가든지. 아까 신부가 무슨 신부직을 놨더라도 진리로 세계 인구가 모두 한 가족이다. 곤솔라따도 ‘온 세계가 내 나라다. 또 세계의 각 제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난 너랑 내 가족이다.’ 그러니 좀 넓게 봐야지, 막힌 거 보면 거기다 쓰겠는가 말이야. 그러면 무장, 무장 쪼그라들어. 시야가 쪼그라져. 골짝에만 골짝에 마다. 숨어서, 숨어서 들어. 소극적. 우리가 어느 길을 어떻게 걷고 있든지 상관없이 사랑하신다.

불교로 갔든지, 구교로 갔든지, 신교로 갔든지, 또 신교 가운데 뭔 백가지 교파가 있든지, 어디가 있든지, 그건 상관이 없다. 사랑이 있느냐 그것뿐이에요. 어떻게 했니? 모양이 어떻게 돼? 그건 상관없어. 그저 형제로 사랑 하냐? 그것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교파에 몸이 있다하더라도 그건 그 교파를 초월한 거 아니에요. 다 한식구인데, 예수 안에 하난데, 서로 내 몸인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느 길을 어떻게 가고 있든지 상관없이 사랑하신다. 그거 믿어야 해요. 사랑하시니까 나도 사랑하네, 나를 용서했으니 나도 용서만 해. 평화라고.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을 믿어주셔요. 가능성. 어떤 여지를 그럴듯한 나이를 귀히 보시는 것이다. 회신, 돌아옴, 사랑, 빛의 얘기를 보시는 것이다. 막달라 여자마리아는 죄인 여자였지만 사랑하셨다. 그녀의 내심에서 낱낱이 움직임이 빛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음을 들여다보신 것이다.

신기한 것을 찾듯이 빛을 찾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이승에서 이 세상에서 그 빛을 뵈었던 것이다. 예수를 만났습니다. 강도요 모리배와 진배없는 삭개오를 사랑하셨다. 그런 사람도 자기 삶을 바꾸어 가난뱅이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보이셨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신다. 이렇게 너르게 본다고. 모르는 것이 원시, 우리는 코앞만 봐선 안돼요. 코 밑에만 문제만 생각해선 안돼요. 멀리 좀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이 영원토록 계실 하느님이 영원토록 나를 살릴 생명을 주시고 영원토록 사랑하신다. 끝까지 사랑하신다.

아직 있지도 않은 것, 지금은 있다는 건 죄뿐인데, 있는 것을 사랑하신다. 나타나지 않는 것을 아직 있지 않는 것을 사랑하신다. 우리 인간은 지금 있는 것만 사랑한다. 그의 덕, 미모, 다른 가치를 보고서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벗지 못하고 부서지기 쉽다. 하느님은 아직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하시고 그를 미더워하심으로써 그를 믿어줘. 미더워하심으로써 인간을 끝없이 거듭 낳아주시는 것이다. 자꾸 거듭거듭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주시는 것이다. 사랑을 탄생시킵니다. 인제 여기서 사랑이 나온다. 사랑은 인간에게 없거든요. 믿음도 없는 것이고, 다 선물이죠. 하느님이 사랑이시니까 당신이 사랑을 주셔야 하거든요.

예수를 믿는 것도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셔야 믿는 것이고, 또 믿음은 하느님이 주셔야 받는 것이고. 사랑이 없단 말이야. 그거를 알아보시려면 그전 공동번역 로마서 1장 8절에 있고요. 또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건 에베소 1장 11절에 있고. 고건 나중에 공동번역으로 돼 있으니까.

사랑을 탄생시킨다. 인간을 신임함으로써 인간을 믿어줌으로써 그의 탄생을 거두신다. 그면 인제 인간도 자기 있는 힘을 주어진 힘을 쓰는 거 아닙니까? 거두시니까. 전적으로 주장하시질 않고 우리가 인자 힘 주셔가지고 그걸 또 쓰라는 것이에요. 그것입니다.

사랑은 어둠을 빠져나가게 돕고 빛으로 끌어당긴다. 이게 사랑입니다. 어둠을 빠져나가는 힘도 주시고 또 빛으로 끌리는, 가는 힘도 주시고. 끌어당긴다. 우리들을 하라고 본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행적은 이렇게나 멋들어지다.

그분이 우리에게 물려주시는 애덕, 이 열 가지가 인자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여기서도 인자 사람으로서 대인관계거든. 그 사랑은 받은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창조를 받은 사람. 그분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애덕 사랑, 애덕은 그것은 형제에게 아직 없는 것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이거에요. 여가 인자 대인관계가 올바르게 돼요.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 나타난 행동만 보고 따진다. 오늘의 그 죄가 내일의 은혜로 바꿔질 걸 모른단 말입니다. 전연 여지를 봐주질 안 해요.

그러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애덕은 그것은 형제에게 아직 없는 것을 사랑하는 힘이란 말이에요 힘. 그 영안이 있지 않겠어요? 영안이. 아직 없는데, 없는 것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그러니 지금 허물을 보고 따질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건 오히려 나중에 좋은 결과가 맺어진다는 전제조건이 됩니다. 지금 허물과 잘못이 드러난 것은. 내일에 좋은 결과가 맺는다는 점. 그런 것이 안 좋습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나 한두 군데 있겠습니까? 나쁜 건 자기가 살아있는 것만 나쁘죠. 나쁘기는 나빠야지. 내 형제의 부정적인 면을 사랑한다는 것, 보다 아닌 것을 보고 오히려 사랑한다는 것.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사랑하지마는 아닌 것이 드러날 때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내일에 좋은 것으로 매인다는 희망을 알려준다, 희망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대가를 모르는 사랑이다. 그의 가난, 그의 허위, 그의 불결, 그의 어두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런 면모가 있기에 더 사랑한다는 것, 잘못되고 모두 못된 것이 있기에 더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내일에 좋은 결과가 맺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것. 사랑은 그런 인간을 덮어 재생시키는 힘이 있다. 사랑의 능력 뭐이냐? 사랑은 그런 사람, 뭐 더 잘못한 사람, 죄 덩어리 그런 인간을 덮어줘요. 죄 많은 인간을 덮어줘요. 나 같은 죄인을 하느님이 사랑해주셨고 덮어주셨으니까 씻어주셨으니까 덮어줘. 그래서 재생시키는 힘이 있다. 사랑은 인간 안에 신의 영역을 만들어 일체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사랑받는다고 느끼면 구원의 길에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여기 인자 사명감이, 여기 인자 시대가 안 되겠습니까? 사랑받는다고, 내가 사랑을 받았으니 나 같은 죄인에게 하느님이 이런 사랑을 내렸으니 이에 대한 그 보답을 위해서 인자 다른 영혼도 이런 나같이 죄 구덩이에 빠져있는 영혼을 다른 영혼도 그리스도께서 구원시키는데 나도 심부름 해야겠다, 그게 사명이야. 구원의 길에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자기의 가난이 부유해지고 거짓이 미더워지며 불결은 순결에 대한 향수를 불러온다. 어둠이 빛에 서서히 물러간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랑의 최고 한계를 보여준 것이지만 동시에 한 많은 이승에서도 평정을 갖고, 자기 안에 평화와 기쁨을 갖고 희망을 걸 수 있는 한계를 보여준다.

무기가 아닌 사랑으로 원수를 대한다면 원수나 나나 태평성대가 불가능하지 않는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젖 뗀 어린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는다. 이사야 11장 6절 8절. 태평성대 말이다.

약속된 하늘나라를 내 힘껏 넓히고 내 몫의 평화를 물려받아드리는 것이다. 여기 또 인자 실리적인 대인관계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단점을 사랑하는 것, 이거에요. 누구의 단점이 드러나면 그걸 사랑해라. 내일의 장점이 되니까. 사랑하는 것, 이것이 인자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지 않고는 대인관계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고 자신도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미 용서를 받았건만 도로 용서를 못 받게 돼버려. 큰일이야. 그러니까 누구를 대하나 잘못을 대할 때 더 사랑하라 이거야. 형제에게 잘못이 드러날수록 덮어주고 용서하고 더 사랑하라 이거야.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떻게 회개를 하냐? 머리 위에 숯불을 넣어서 뜨겁게 회개한다. 그러지만은 그 잘못함을 책망하면은 반발을 일으켜. 자기는 더 잘못했다. 인간이 인간의 단점을 사랑한다는 것, 내일은 그것이 장점이 되리라는 확신을 품고 그 단점을 사랑한다는 것, 세상을 그렇게 보면 누구를 대하나 세상을 그렇게 보면 두려울 게 없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니 왜 저번에 어떤 분이 그럽디다. 아 세상에 악한 세상은 요 시대같이 악한 시대를 봤습니까? 아 세상 그 뭣보다 그와 같은 것 걱정하는 것 다 좋기는 해요. 하지마는 아 나 악한 줄은 모르냔 말이야. 문제는 나지, 아 그건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닌가? 그러면 하느님이 하실 일에 내가 협력은 무엇이냐? 내가 먼저 되는 일입니다. 내가 그물이 되어야 돼요. 내가 빛 노릇을 해야 돼요. 삐뚤어지고 거슬린 시대에는 이미 삐뚤어졌으니까 바랄 것이 없어요. 인자 그가 내가 할 일이지, 빛 노릇 할 일이고. 생명의 말씀을 밝힐 일이죠.

세상을 그렇게 보면 두려울 것 없다. 나라를 그렇게 보면 행동 의욕과 희망이 내심에서 크게 솟는다. 속마음에서 크게 솟는다. 그 대신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 죄인은 혐오, 자꾸 실증 미움, 혐오감만 주었고 나는 그를 원수로 여겼다. 창녀를 체포하는 경찰이 믿음직해보였고, 그 전에는 요. 그렇죠. 창녀를 그 체포해 가 버려야죠. 체포해가는 경찰이 믿음직해보였고 아이들에게 겁을 주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만든답시고 지옥불도 서슴없이 설교하였다. 아 그럼 지옥 간다고 그럼 깜짝한다고. 그런 걸 함부로 지옥이란 말을 어디 함부로 하겠습니까? 지옥이란 그 말 자체가 벌써, 내가 지옥 아니냐? 내가, 내가 지옥이다. 지금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을 보면 연민의 정이 일어난다. 이게 실지 체험이에요. 지금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을 보면 아주 가련 불쌍해. 몸 파는 여인을 만나면 창녀죠, 창녀가 먼저 회개하고 천국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몸 파는 여인을 만나면 차 한 잔을 아주 사줘요 차를. 사주며 얘기를 나눈다. 우리 좀 얘기 한번 해보자. 구원에다 희망을 더 걸게 되었다. 요 창녀는 인제 구원받는다. 예수께서 증거 하시기를 참 너희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천국에 간다.

 

인류의 고통을 두고 내가 겪은 연민은 너무도 크기에 나는 감히 지옥이라는 말을 함부로 토하지 않는다.

아 누가 하느님은 한 영혼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는 하느님인데 당신이 창조한 영혼을 어떻게 멸망을 시킵니까? 그러면 무능력한 하느님 아닙니까? 거기 사랑이란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이신 하느님인데 어찌 당신이 지은 영혼을 지옥에 빠뜨리느냐? 이거야. 그런 하느님은 저는 안 믿겠습니다. 너무도 컸기에 나는 감히 지옥이라는 말을 함부로 뱉지 못한다.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인간적이면서도 내심에 기쁨을 주는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나 벗으로 느껴진다. 누구를 만나도 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