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눈속에 피는 꽃 : 종교의식 배제

mamuli0 2025. 2. 5. 12:08

전국에 한파가 입춘 지나고 많은 눈과 함께 왔다. 눈속에서도 산다화가 곱게 피어 있다. 하얀 눈을 덮어쓴 농장을 담아보았다. 오장로님의 '종교의식 배제'의 글을 올린다.

 

 

종교의식 배제

1982. 1. 5

 

용서뿐이야 하고 무조건 그저 사랑하는 것 뿐 이지.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는데 무슨 신앙이 있느냐고요? 자기가 살아있지. 오히려 믿는 사람이, 믿는다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인다. ‘그리고 나 자신은 죄인이니 교회에 몸담지 않을 수가 없다.’ 교회는 요 나타난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 있는데 입니다. 신령한 교회는 영적인 정신적인 교회가 있죠? 그 교회는 감히 내가 교회이다 고 못한다. 교황도 내가 교회이다 고는 못한다. 그래요 그럼 그리스도께서 세워준 교회. 그러나 보이는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 있는 데라야 교회요. 모두 요새 교회도 보이는 교회도 위인들만 모였으니 그리스도 교회가 아니란 말이야. 기도는 아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무얼 위해 기도를 하고 잘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기는 해도. 역시 교회에 안 오는 사람은 지옥가고, 교회 온 사람은 천국 간다. 그런 생각이 있다하면 안돼요. 우리 종파나 교파에 구원 있는 거 아니야. 나사로가 어느 교회에 갔습니까? 어느 교회입니까? 어느 교회에요? 모두 기독교인이에요? 장로교인 이에요? 아무교회 이름도 없잖아요? 뭐 갔단 말도 없고 찬송 불렀단 말도 없고, 성경 봤단 말도 없고, 기도했단 말도 없고, 종교의식은 하나도 찾을 것이 없어. 근데 천국 갔는데 말이여. 부자는 오히려 의식적인 걸 찾을 수 있죠. 아브라함 할아버지여! 그건 입으로 믿는 것이고. 마음으로 믿는 것 하고 안 다릅니까?

 

'죄인은 교회에 몸담지 않을 수가 없다'

 

‘점잖은 구세대의.’ 거기도 그만 두고, ‘인간에게 단점을 사랑하는 것 또는 없는 것 아직 있지 않는 것을 사랑할 줄 모른다.’ 인간은

 

좀 더 봅니다.

134페이지 가서 눈앞에 보이는 세계.

‘하느님의 악을 이기신다는 희망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악을 이기신다는 희망 희망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현재의 눈앞에 나타난 것만을 바라본다면 오늘의 세계는 가공할 힘이다.’ '가히 두려울 만하다. 언제든 승리감을 가져. 이 악은 악이 선으로 바꾸어진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신다.' 그걸 믿어야 해.

‘그러나 사물을 이런 눈으로 보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내심으로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를 믿지 않는 소치다. 일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살리시고 빛을 보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소리다.’ 하느님의 역사, ‘사도바울도 바울로 말마따나 지금 세계가 산고를 겪는 중이라면 내 눈으로 보는 부정적인 현실을 미구에 나타나는 세상의 서곡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을까? 미구에 지금 이 진통을 겪고 있는 이 현 세계가 앞으로 쭉 욱 세계가 온다는 차례,’ 차례 그것만 봐두고,

 

'정의의 하느님께서 이 불의가 판치고 있는 이 장면을 우리가 하느님편이라면 그걸 어떻게 봐야합니까? 그 해답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불의와 싸우되 방법이 있습니다. 거기의 해답은 하느님의 말씀 성령의 능력,' 맞아요. 그러면서 내가 취해야 할 것이 있어. 근대 요기요, 사막에서 온 편지 151페이지에.

‘정의의 하느님은 이제 영원히 정의의 페이지를 닫아두셨다.’ 잘하는 사람만 구원을 시키려면 눈을 씻고 봐도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죄에요. 삐뚤어졌어. 곁길로 갔어. 그러니 인자 그 방법으론 틀렸다. 인자 무조건 죄인은 다 오라.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냈단 말이야. 인자 죄인 구원해야지, 잘한 사람 구원하려고 보니까 한 사람도 없어. 이 하느님은 인자 실패했어. 실패. 그 실패가 십자가야,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실패요? 성공이요? 십자가에서 갈라져버려. 실패함과 동시에 성공인 부활로 들어가 버렸어. 예수입니다. 그렁게 실패는 뭐이냐? 전 인류의 죄 짐을 당신이 지시고 죽었어요. 죽었어요. 실패죠. 그러나 부활했어요. 성공이요. 진리요. 참이요. 참은 없어지지 안 해요. 참은 하나요.

 

‘영원히 정의의 페이지를 닫아 두셨다.’ 이는 이 정의는 아름답고 진실하였으나 불완전해요. 그거 정의로 가지곤 죄인들을 건질 길이 없어요. 그 페이지는 특히 그 한없이 위대한 하느님의 폭발적인 힘이 없어요. 폭발적인 힘이 없어요. 또 정의라는 출구가 없는 죄의 길, 죄가 어디로 벗어날 길이 있어야 한다 말이야. ‘죄의 출구가 없는 죄인의 헤맨 인간에게 구원을 갖다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홀로 무죄하시고 참으로 무죄하신 예수님은 얻어맞고 머리를 들어 떨어치셨다. 그는 정의에 호소하는 일이 없이 몸과 마음으로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 십자가에. 그 때부터 정의를 훨씬 초월하는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거기 씌워졌다.’ ‘정의를 훨씬 초월하는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법이 세워졌다. 이제는 사랑뿐이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저 회개해버리면 그냥 사랑하신다. 죄가 많을수록 더 사랑하신다. 더 반가이 받아주신다. 죄가 없으니깐 예수님에게 오지도 않는다.’

 

 

★중간에 그쳤다가 다시 이어짐

 

요한복음15장1-17절

‘나는 참으로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시다. 나에게 붙어있지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잘 맺도록 잘 가꾸신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을 확신해야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근데 한다면 뭣이냐?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신 죄의 열매 밖에는 없다. 또 자기 자신도 평화의 열매는 없다.

 

1절서부터 쭈욱 같은 말인데 5절서 다시 봐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을 해보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새벽부터 밤중까지 하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잠을 못 이루고도 해요. 생각으로도 해요. 허나 결과는 무엇인가? 역시 근심 고통에서 못 벗어나. 왜? 자기니까, 떨어져 있으니까. 예수하고는 하나 아니 예요. 자기가 떨어진 만큼 예수님도 같이 안하셔, 그러면 인제. 앉은자리서 그런 걸 어제 들었어요. 누구나 거의가 그 자리에 매여 있어요. 뭐냐? 사람이 할일 하느님이 할일이 무엇이냐? 그 하느님은 예정해서 놓으셨는데 사람이 노력 하면 뭐더냐? 다 예정한대로 될 것인데, 그러면 인자 그런 사람은 다른 건 안 하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먹는 일은 하거든요. 그럼 고것은 예정 해 놓았응게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예정 안 됐응게 안하고. 자기 원한 것은 그럼 하느님의 예정으로 믿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합니다.

그럼 그 뭣이냐? 하면은 율법이냐? 복음이냐? 은총에 의해서냐? 스스로의 노력이냐? 이것이 언제 한번 율법적인 행동은 아 내가 노력해야 된다. 안 된다. 암만 해봐도 마음에는 공허라 비어있어. 만족이 없어. 부족해. 항상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부자청년이 질문한 거랑 같죠? 무엇을 해야 무엇을 해야 제가 무엇을 해야 무슨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아 네가 이런, 이런 계명을 알지 않냐? 고대로 하면 되지 않냐? 아 그럼 무얼 해야 합니까? 이것, 이것 이것이다. 아 그거는 어려서부터 많이 했습니다. 그면 했는데도 마음이 안심이 안 되고. 부족한가요? 했는데도 계명을 지켰다는 데도 그래도 안 돼. 그것이 율법적인 자기노력 아니겠어요?

암만 해봐도 안돼요 .

 

6절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 위에 던져 태워버린다.’ 나무 귀한데 같으면 나무를 다른 용도로 쓰겠지만, 태워버린다. 그런대도 그런 걸 뭐할라 땝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떠나지 않은 거 하느님이 인간에게도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허락돼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래야 심판을 하실 수 있지. 자유도 없이 기계같이 딱. 죄수같이 딱. 변동이 할 수 없는 일 같으면 어떻게 하느님이 심판을 하겠습니까? 자유의지가 없으면 인간이 아닌 것을. 사람이 아니 여. 하느님의 형상이란 증거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단 것이야. 죄도 지울 수 있고 안질라고 할 마음도 있는 것이고. 진리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고. 거슬리고 싶은 자유도 있고. 육적욕망이 있으니까, 이 자기욕심대로 하면서 안 된다. 안 된다. 고 말이 될 말이야? 하느님의 뜻을 전혀 상관도 없이 자기 스스로 살면서, 이 그것도 자유를 주셨어요.

로마서1장18절에서 끝 절 까지가 쭉 욱 타락 상태거든요. 자유에요. 타락한 그 상태로 자유를 주신 거여.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사랑해왔어요.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해 왔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른 것 뿐 이지, 사랑 안 받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숨을 쉬고 움직이는 한 하느님이 그 숨을 쉬게 하시고. 밤에 잘 때도 다 잊어버리고 자지만은 내가 몇 번 쉬야겠다. 그런 것도 생각이 없지만은 나는 마음 놓고 자지 않습니까? 그 숨을 주셔서 호흡을 줘서 아침에 일어나게 하신 게 그 사랑 아닙니까?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디 있겠어요? 곤솔라따 137페이지인가 보면 그 있죠?

사람에게, 온 인류에게, 인류가 상속받은 재산이랍니다. 그런 사랑 받아 놓고도 모른답니다. 괴로움 이, 괴로움은 온 인류가 하느님께로 상속받은 재산이랍니다. 그런 재산을 받아놓고도 괴로움은 싫거든, 싫어요. 이거 영적재산은 싫어. 육적괴로움 없는 육체본능이 원한 것만 바라지. 신령이 원하는 것은 바라지 안 해. 그게 재산이니까 재산 아닌 것이 없어요. 모두 우리 영적인 이것은 다 육이 싫어한 다는 거 에요.

 

또 히브리서 11장에 모세신앙으로 받아진 재산이 무엇입니까? 모세신앙 모세 자신이 바라는 재산이 무엇입니까?

25-26절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파라오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죄의 일시적인 편함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모세는 메시아를 위해서 당하는 치욕을 에집트의 재물보다 더욱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뭣이 재산이고 성도의 재산이요? 신앙인으로서의 재산. 그리스도를 신앙할 사람이 재산이 뭣이에요? 그리스도 땜시 그리스도를 위해서 멸시 천대 치욕 받은 것이 애급이라면 세상 대표 아닙니까? 모든 부귀영화 왕 자리 그것보다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예수 땜시 욕을 얻어먹고 천대를 받고 멸시를 당하는 그 재산은 세상의 대통령 왕 그 자리하고 바꿀 수 없다. 그게 재산이여. 그게 성령의 재산이라는 말이여. 모르셨으면 오늘 우리 믿는 사람의 재산이 무엇인가? 그걸 알고 돌아가세요. 말하면 저것도 실제는 싫어. 그 믿음이 없다. 그것이 진짜 참 재산이요. 영적재산이요. 믿어진 것이 신앙이여. 아 옳습니다. 아 그러면 뭐 그 믿어진 사람에게 실행을 해라. 마라. 누가 그러겠습니까? 믿음이 믿어주니까 아무리 누가 말려도 말릴 수가 없죠. 해야 하냐? 아니하냐? 믿음이 있어야지. 뭣을 해야 하냐? 안 해냐? 말도 안 돼. 믿음은 믿어져야 하는 것이고, 누가 해라해서 해요? 해라해서 하는 것은 아 내가 이문이 있으면, 육체 이문이 있으면 하고, 손해나면 안 해. 그 뭐라고 둘러 부치고 안한단 말이여. 안 해. 고런 수가, 그런 간사성. 이기적이란 말이야.

 

10절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자 이거는 믿어야 한다 말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냐가 문제야. 계명을 지킬 것이냐? 안 지킬 것이냐? 계명은 뭐냐? 뭐 십계명 뭐 그런 것도 아냐. 인자 계명 하나뿐 이여. 하나, 하나 뿐이여. 하나 한 마디 사랑하라. 사랑 여기서 너무 멋지다. 자기 몸 사랑 안 하는 사람이 어디가 있습니까? 그래 고대로 사랑하라. 뭐 어려운 것도 아냐. 어렵단 말도 할 것이 아니라 뭣들을 하냐?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뿐이야. 믿으면 할 것이고, 안 믿으면 안 할 것이고. 둘 중에 하나, 사랑하라 누구를 사랑하라. 누구든지 사랑하라. 예수로 알고 사랑하라. 예수다. 모두 예수다.

세 번째 자신이 죄 덩어리라 하면 모두 죄죠. 자신이 예수라면 모두 예수 아니겠습니까? 어제 아주 집을 독채해서 내 죄 덩어리가 잤죠. 그런데 예수라고 하면 또 예수가 나하고 잤죠.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어요? 아무것도 죄로 보기가 싫죠?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이 요것도 사랑하라고 내게 예정돼 있으면 할 것이고 안됐으면 나 안 할란다. 그럴 랑 가? 너무나 예정설을 오해를 합니다. 저는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예정

 

이것은 틀림없는 예정이거든. 에베소1장4절.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디모데후서 1장9-10절 소개 받았죠? 창조 이 나타난 창조 우주 창조되기 전부터 여 시간이 어느 땐지 몰라요. 창조 전이니까 영원 전이여. 영원 전 그 때부터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창조 전부터 사랑하는 예수와 같이 하늘나라 있어요. 하늘나라 족보도 하나야. 또 족보 하나 더 볼까요?

 

 

요한복음 17장6절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내게 맡겨주신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아버지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본래 아버지, 누가 여기서 빠지겠습니까? 본래 아버지.

 

 

디모데후서1장

 

 

‘구유에 났을 때부터 구세주 그리스도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이제는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강보로 싸여서 구유에 놓인 것을 볼 때 그것이 구세주라는 평화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버리시고 복음을 통해서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9절-10절 내용은 고대로 사랑의 계명이니까

사랑의 계명을 계명은 사랑이니까 사랑이야, 사랑. 사랑이 뭐냐 희생이야, 희생.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것 희생이야. 그러면 실행해야 되지 않냐? 그건 바쳐야 되지 않냐? 바칠 밖에 없이 되어야지 않냐? 누가 바쳐라. 해서도 아니다. 물론 하느님이 사랑하라 하셨지만 저는 사랑안하면 못 배기게 해.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소화 데레사 같이 창세전부터 하느님이 나를 뭐든지 해서 미리 미리 보여주시고 죄 안 빠지게 해주시고 했다는, 그 창세전부터 내게 은총을 하셨다는 그 은혜를 깨닫고는 미칠 듯이 사랑했다. 미칠 듯이 깨달은 거여. 내게 뭣이 돼 있다는 것을 내게 미리 미리 그렇게 내게 주신 은혜를 인자 허락했다. 우리도 데레샤처럼 희망을 가져, 희망.

 

어제 아침에 다 발표했는데, 오늘 하루 온전히 말씀을 안 하는 줄 알고. 차례 아닌 줄 알고 지금 저 쪽에 있었어. 어제 다 마치었거든요, 저는.

그러니까 또 어제 같이 한 것이 아마 별로 그 뒤에 여론을 들어보면 어제 들은 말씀 제가 발표한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제가 좋은 것은요, 아주 흐뭇해, 기뻐. 왜 그러냐? 근데 그것이 어떻게 해석해야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참으로 지금까지, 지금까지 제가 보기는 굉장히 들어. 증거 할 때 보면 뭐 동광원을 따라갈 수 없는데 앞에 간다고 그래요. 아주 잘한다. 그렇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나는 남 같이 갈 수 없는데. 못 갈 것 같았는데. 그래 제가 그래서 그 말을 듣고는 내가 거기 가서 뭔 말을 하기가 부끄럽다.

그러니 아주 겸손한 목사님이 있었죠. 계명산에 있을 때도 학생들 딱 데려놓고 앉혀놓고는 당신도 같이 공부를 한다 말이야. 그 때도 내가 집사야. 집사 앞에서 당신도 공부해요. 집사 앞에서 목사가 공부를 해요. 나 하라는 대로 해요.

나는 찬송도 안 하고. 또 기도도 안 해 버려. 그래서 내가 목사님보고 기도를 요청해서 했지. 그런데 나 하는 대로 다 해 버려. 또 나는 실상 일부러 기도도 안하고. 실제 마음도 기도 안 하는데. 요렇게 입으로 해도 안 해도 마음으로 한 줄로 믿었지. 그이는 그렇지 안 해요. 기도할 줄 몰라. 이 분이 그랬다 그래요. 용서하십시오. 제 자랑, 저는 심부름뿐 이죠. 아이고, 하느님께서 요 시간에 이 말씀 들으라고 하느님이 보내셨다고 기뻐서 돌아갔다, 기뻐서. 저는 그 분에게 심부름 한 셈이지. 제 자신이 증거에요. 제 자신도 아직 그런 실감도 없고.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은 거 보면, 아 그러니까 듣는 사람의 말씀이구나. 듣는 사람의 말씀, 증거 하는 사람 뭔 뜻도 모르고. 그 시간에 내키는 대로 했더라도 듣는 사람, 받은 사람이 자기 믿음으로 자기가 좋게 요리해서 받아 졌다는 거예요. 많이 기도한 분이고, 진리를 갈망하는 그런 분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살아가고, 새벽 네 시부터 낮 열시인가 아홉신가 산에 가면은 기도 하고 오고. 시키면 하고 오고.

 

그건 뭐냐? 제가 책 한 권 소개한 것뿐이지 만. ‘지금 나타나는 단점이 지금 나타난 죄가 내일은 장점이 되고 은혜가 된다. 그걸 여유만만하게 본다.’ 왜 사람은 곧 눈앞에 나타나는 껍딱만 보냐? 그 속에 하느님이 신비적으로 역사하는 건 모르냐? 그게 소경이여.

 

그 대인관계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봐지는데 사람을 믿어주는데, 왜 사람은 사람을 못 믿는가? 하느님을 못 믿는 게 왜 하느님의 성심을 못 믿는 게 사람도 못 믿는다. 하느님이 그 사람에게 어떤 역사를 안 믿으니까 사람끼리도 서로 의심하고 못 믿거든요.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아주 간단해요. 요 말씀만 외우고 고대로만 고대로, 고대로 사모하고 순종하면 되지 않겠어요? 뭐 다른 거 복잡한 거 많이 들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해주신 말씀 고대로 서로 사랑하라. 예, 하면 순종하면 되지. 이것을 해야 되고, 저것을 해야 되고 뭣을 해야 되고, 어찌해야 구원이 되냐 그런 생각은 필요 없다. 복잡하게 뭐하라 그래. 아주 간단하면 된다. 사랑하라. 사랑안하면 안한 만큼 자기 손해고, 사랑하면 자기 행복이지. 그 뭐 문제가 있냐 말이야. 사랑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 네가 사랑받고 싶냐? 아 그러면 고대로 남을 사랑하라. 네가 사랑을 대접을 받고자 한대로 남을 대접해라. 네가 사랑을 누구한테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사랑해보라. 그러면 인제 그 사람이 나 사랑 안 해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 사람한테 받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 받아야 한다. 그래 무조건 안기는 대로 사랑만 해버리면 된다. 세상사랑 안 받을수록 좋다. 하늘에다 다 싸놓으니까 나사로같이, 하늘에 와서 받아버리지. 뭐할라 세상에서 받아 버리느냐? 받으면 손해 아니냐? 그러니까 무조건 세상에서는 손해만 보고 사랑만 해 버릴 것이여. 사랑은 손해입니다. 손해. 현재의 손해는 영원한 나라, 저 멀리로 영원 세계에 가서 찾으라. 현세는 손해여. 영적으로는 도로 받고 영적으로. 위안을 받는 것이고. 그러니까 참으로 사랑하면은 영육간의 유익뿐이지 손해가 없어요. 육도 유익이야. 사랑하다가 인자 가버릴 것이니까. 사랑하다가 사랑하고 끝날 테니까 나가라면 무슨 손해가 있습니까? 뭐 대문간에 있을 때 뭐 걱정했겠어요? 떨어진 부스러기도 남는데 뭐 걱정 있어요?

 

의식주문제가 무슨 문제이냐? 없어. 얼른 가면 성공이요. 그 있는 동안에도 성공이요. 가면 그냥 마쳐버리는데. 졸업이지요. 그러니까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조리 란 게 없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대로 만족이야. 그대로 천국이야.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고 살아. 마음에 성령을 통해서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정의와 평화 기쁨이다. 이 뭐 하늘나라 마음속에 지금 믿음으로 사는 거라는 말이지. 참으로 믿으면 서로 사랑하면 사랑한 만큼 아 요런 쉬운 길이 있는데. 아 왜 어려운 길을 택하려고 이런 추운데 고생해서 와서 모두 고생을 하십니까? 아주 쉬운 일이여. 사랑하면 돼. 우리는 사랑하면 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원수도 사랑했는데 누구를 위해서 못 받치랴.

‘내가 명한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야, 예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 무엇일까? 목숨까지 주셨지만 정신적으로는 무엇이냐?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자,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증거 어디 있죠? 어디 있습니까? 여러 가지 있죠. 그냥 또 증거로 흘리죠.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나의 가장 기뻐하는 아들, 내 마음에 딱 맞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만 들어라.’ 모세와 엘리아는 할 일 다 했은게 갔습니다. 인자 뭐 이것을 하냐? 저것을 하냐? 어떻게 율법적인 행동 그건 초월해 버려라. 그런 걱정 말고 예수말만 들어라. 서로 사랑하란 말씀만 들어라. 간단하지 않냐? 서로 사랑하라. 그 말만 들으면 되지, 뭔 말 들으면 뭐하겠습니까? 그 성경 안보셨습니까? 다 외고 있어요. 자 어디 있어요?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를 예수님이 발표 하신 데가 있어요.

 

 

요한복음5장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그 뿐만 아니라 아들을 시켜 이보다 더 큰일도 보여 주실 것이다. 그것을 보면 너희는 놀랄 것이다.’ 아버지께서 친히 알려주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것이 사랑하신 증거, 친히 하시는 일을 알려주실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친히 하셔.

 

14장9절 이하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빌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예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왜 안 믿느냐? 하느님이 예수 안에 계신 것을 왜 못 믿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친히 몸소 하시는 말이다.’ 그러게 하실 일도 당신이 하셔. 또 말씀도 하느님이 하셔. 예수 안에서, 그런데 왜 못 믿느냐? 하느님이 하신말씀을 왜 못 믿느냐? 내안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어찌 못 믿느냐? 나를 봤으면 하느님을 본건데 그러니까 우리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마음에 계신다고 그러죠. 아 사람마음에 다 계신 게 모두 사람 다 하느님이고, 예수인데,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신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 하느님이 하신 일이지 이 사람이 하는 일이냐? 일을 보고 믿어라. 하느님이 하신일이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늘에서 오신분이 아니고는 땅에서 난분으로서는 저런 일은 못 할 것이다. 분명히 그 일을 보니까 하늘에서 오신 분이다. 그렇게 밤에 찾아왔죠? 그만치라도 믿어지니까, 말은 얼른 못 알아들었지만은 중생의 도리를 못 알아들었지만은. 그 만큼 자기가 본 것이 있어서 온 겁니다. 분명히 저분은 하늘에서 오신분이야. 땅에서 난 사람치곤 저런 일은 못해요. 그렇게 믿어졌으니까 온 거예요. 뭐 예정해 놨으니 온 것 인가 모르겠지만. 그렇게 믿어졌어요.

15장13절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는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지키는 그건 인자 서로 사랑하는 벗이 된다. 친구다. 친구,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몰라요. 이거 이것이 차이. 벗과 종 차이가 이것이에요. 몰라, 사랑하는 증거 하나 보아야겠다. 사울의 아들이 누구죠? 요나단 사랑했죠? 사랑한 증거가 뭣이라고 다윗이 증거 했습니까?

 

 

사무엘상20장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가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 간데’ 그가 사울 말입니다. ‘그가 내 생명 다윗의 생명을 찾느뇨?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죽지 않는 한 너는 안 죽는다.’ 나의 부친이 대소사 큰일이고 작은 일이고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대소사,

여기 앞에서 증거 한 일이 큰일이요? 작은 일이요? 대답 해봐요. 큰일이죠. 영혼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큰일입니다. 육체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을 죽이냐? 살리느냐? 는 자리거든요.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놓는데, 소개 하는 데니까 잘못 증거 해 놓으면 큰 문제여. 아 요런 큰일을 왜 하라고 했는데 말씀을 안 할 수도 없는데, 어제 말씀 다 해버렸다고 마음 놓고는 책도 어데 놓고 안 갖고 왔어요.

 

적은일이라도 우리가 조금 친한 사이 같으면 통사정하고, 의논해보고, 그러죠. 또 그런 말하는 자리에서 딱 깨버리면 노엽죠. 삐치는 거지. 그 뭐이냐? 아주 적은 일라도 통사정을 해요. 그게 친구여. 대구에 친구 하나가 저번에 남원에 왔는데, 여기 온다더니 안 옵디다. 못 오죠. 몸이, 또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못 오죠. 또 와도 서로 부자연스럽죠.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해감이 없나니,’ 내 부친이 자기 사랑한 증거가 뭐냐? 큰일이고 적은 일이고 자기 아들한테 알리지 않고는 한 일이 없다. 요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이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 네가 죽겠느냐? 말이야. 나에게 안 알리지 않을 테니까 나에게 알리면 가만히 가서 숨어있으라고 하고 다 알려 줄 텐데. 걱정 말아라. 안 죽는다. 내가 살린다. 그럼 요나단과 다윗과의 사이는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아주 한 몸같이 생사를 같이. 죽는데도 같이, 언제 죽는데도 가서 서로 서로 살려고. 내가 죽을 테니까 내가 대신 죽을 테니까. 네가 살라고. 그것이 문제지. 서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가 죽으려고 서로 상대방을 살리려고 하는 사이, 그런 요나단하고 자기 아버지하고 부자간에 서로 통사정하고 사랑 한다 면은. 다윗하고 또 요나단하고 그렇게 한 몸같이 사랑했는데. 서로 셋이 다 사랑하니까. 다윗이 걱정할게 없는데 왜 걱정이 됩니까? 그럼 인자 요나단하고 다윗하고 사랑하고. 요나단 자신하고 아버지하고 사랑하면은 대결하면 어떤 사이가 더 큽니까? 더 강해? 다윗이 더 강해? 요나단이 더 커요. 여기는 그렇게 되어있어요.

또 그것이 인자 예수님의 중보자로서 여. 요나단이 예수의 증거 여. 바로가 하느님의 역도 하고. 마귀역도 하지 않습니까? 창세기에는 하느님 역을 했고, 출애굽기에서는 마귀 역을 했거든. 왜 그렇게 사울이 그 때는 마귀 역 아니요? 하느님에게 자꾸 감정적인 요구. 다윗이 자기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예측을 하고, 그 자리 안 뺏기려고 그런 거거든. 틀림없이 하느님의 섭리는 다윗이 자기를 꺾고, 자기가 꺾임을 당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알거든요. 알면서도 감정은 싫어. 그러니까 죽여 버리려고 그래. 끝내 자기가 왕이야.

 

 

3절이 중요하죠.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오? 대소사를 다 알게 하고 한 일인데. 이 일을 어찌 숨기겠냐? 그렇지 아니하리라.’

3절 다시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는 줄을 내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워 한 즉. 대단히 생각을 했습니다. 요나단이 왜 슬퍼해요? 다윗을 죽인다고 하면 그게 슬프지요. 아주 하나같이 사랑하는 사이니깐 다윗을 죽인다는 것까지 말하면 그럼 저녁에 잠 못 자요. 항의할 것이여. 어째서 그런 충신을 죽입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러지 그 말 안 들어. 슬퍼요. ‘슬퍼할까 두려워 한 즉 그 일을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그 사울이 누구에요? 우리 다 사울이에요 사울, 그 마음이 다 우리에게 있어요. 육의 편, 감정적인 욕망의 편, 그 사울이에요. 요나단도 내 속에 있고, 다윗도 내 속에 있고, 다윗은 항상 예수 편. 예수 요나단도 예수역도 중보역이여. 그런데 인제 다윗이 그러나 네가 슬퍼할까 두려워한 즉 그로 인하여 알게 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생사문제는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의 해결은 한 걸음 뿐이니라.’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 하느님의 뜻으로 행하냐? 자기 육체의 욕망으로 끌려 가냐? 여기 한 걸음에 있어. 한 걸음 하느님께 희망을 주냐? 예수냐? 바라바냐? 바라봐. 세상의 희망. 세상을 바라봐. 세상이냐? 하느님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향하느냐?

 

베드로전서1장21절-22절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져서 꾸밈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충심으로 열렬히 서로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