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배다리공원 한바퀴 : 모두가 한 몸

mamuli0 2025. 2. 14. 13:44

 을사년 정월 보름 지나고 평택 배다리공원을 찾았다. 저수지는 꽁꽁 얼어 있고 배다리 도서관쪽에서 흘러들어온곳은 물이 얼지 않았고 겨울 철새들이 모여 있었다. 많은 철새들이 호수를 떠난것 같다. 한바퀴 돌아나왔다.

 

 

모두가 한 몸

1983. 1. 4

 

성경 갈라디아 321~29

그렇다면 율법은 하느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낼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 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 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어요. 나는 율법의 손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 그 말입니다. 때가 왔어요.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 율법.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이게 믿음이란 말이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믿음이야.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여기는, 그리스도 안에는. 야만인이니 상놈이니 양반이거니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그 사랑이, 그냥 천국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이유가 없어. 그냥 무조건 사랑이에요. 잘못한 사람 보면 더 사랑해 버려. 용서하고 그러지, 뭐 따지는 것이 없어요. 너나가 없어요. 하나요. 한 몸이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여기는 안내자란 말이 있는데, 신앙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법률 아래 갇혀 있어, 장차 나타날 신앙이 오기까지,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이에 얽매어 있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화 되기 위하여, 법률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리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 율법이. 그럼 어떻게 안내자 말 쓰느냐? 죄가 많이 드러나게 해가지고, 예수를 갈망하도록. ‘주여 나를 구하소서,’ 이리 갈망하도록. 그럼 이제 때는 어느 때냐? 주께서 알아서 하실 때요. 주의 처분 이지. 지금 올 때입니다, ‘지금 오셔주십시오그럴 수는 없어요. ‘어서 오십시오그런 태도는 가질지언정 지금입니다그럴 수는 없어요. 하느님이 우리 마음보를 다 아시니까. 인자 너는 그만하면 다시 변질 안 되겠다 그쯤, 믿어질 때 오신단 말이야.

 

저번에 어떤 그 여러 번 범죄를 하고 형무소에 들어온 사람, 회개를 하려고 아주 열심히 하고 그래 그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 동감이 가고, 참 믿을만하다, 참 얌전하다. 해서 내놨는데 도로 범죄하고 오더라고 하더라. 그 결과는 어쨌냐면 또 그 뒤에도 또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그걸 물어봤어요. 김제두 그 사형수가 뭐 열일곱이나 죽였다던가 뭐 그러던데, 그 이가 그대로 사형을 당해버렸으니까 그대로 승리를 했지. 막상 다시 한 번 세상에 나왔더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모르죠. 또 타락 할 런지 모르죠.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 은총이라야 되지, 자기 인간의 결심으로 안 되니까. 그렇지만 그 아주 그 사형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없었으니까, 그걸 자기도 알았으니까, 그냥 그대로 승리했을 런지 모릅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방청객들에게 막 설교를 했어요. ‘여러분,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앞으로 갑니다. 그 분 앞에 가서 만납시다. 어서들 회개들 하십시오.’ 그렇게 승리 적으로 갈 수가 있는가 말입니다. 그렇지마는 , 그만치 회개했으니까 석방 받으라.’ 그랬으면 도로 타락했을지 몰라요. 인간은 장담 못 하는 거예요. 사람으로는 안 되니까. 은총이라야 되니까. 순간이라도 은총이라야지. 은총 없는 인간의 베드로의 장담.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른 거야. 그래 그대로 사형한 것은 그대로 바로 간 것이에요. 그렇게 많이 그런 죄를 지었으니까 영혼 상으로는 승리하고 갔지 않습니까? 그럼 또 오해로 들으신다면 , 저 나도 사람 죽이고 그래야겠다.’ 그래서 되겠습니까? 그럴 사람 없겠지마는. 아담이 실패를 했기에 그리스도가 오신 겁니다. 아담이 성공을 했으면 불완전한 인간으로 끝나버려요.

 

로마서 514

그러나 죽음이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다. 여기서 벗어날 사람은 이 땅 위에 있는 한 번 지나간 사람들 다, 여기서 벗어날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겠어요? 아담과 같이 죄를 안 지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미혼자라니까 미혼자. 미혼자라도 다 이 죄의 지배를 받아요. 받고 있었습니다. 그 이제 14절 하반과 4절에서 갈라집니다. 근데 우린 다 아담의 자손이요. 자손으로 나왔으니까 완전히 그리스도에 속해 있지 않아요? 아담이잖아요? 이 몸, 아담이잖아요? 그런데 인자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땅에 속했던 아담의 몸을 이어받았으니까 우리는 인자 그리스도에게 속해야 해요.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에게 속해야 한다고.

 

 

고린도전서 1548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당했다고 하면.

 

요한일서 3, 이 예전에 했던 거. 3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희망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그럼 인자 순결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신 분의 형상을 닮는단 말이야. 형상과 형성, 형상을 똑같이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나 잘 모릅니다마는 이성계인가요? 자기 스승이었던 그 무학 대사를 만나가지고 그의 스승인데, 정신적으로 스승인데 만나가지고, 인자 자기가 통치권을 잡았으니까 한 번 농담조로 그런 일이 있었데요.

아 대사를 보니까 주린 개가 먹이를 찾아 도는 것 같이 허기진 모양으로 보인다.’고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 그러겠죠. 개 눈에는 개밖에 안 보이고. 부처의 눈엔 부처밖에 안 보인다고. 거 참 진리를 말했다. 한번 탁 맞아버렸잖아? 나를 개로 보았으니 자기가 개가 아니냐? 그 말이야. 개는 개밖에 안 보인다고. 그럼 우리 기독교인의 말로는 내가 예수 되었으면 예수밖에 안 보였을 텐데 내가 마귀니까 모두 마귀로 보인다. 그래요. 모두 다 다 잘못해. 정의의 눈으로 봐요. 정의의 눈으로 보니까 나만 옳지. 다 모두 글렀어. , 죄인이야. 내가 제일 죄인인 걸 알고 죄인인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입은 영혼은 모두 그냥 예수로 본다. 다 항상 사랑해버려. 예수로 보고 사랑해버린다. 그게 천국이에요.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담지 안 했어요. 그러니까 모두 그냥 따져요 따져. 내가 그러는 건 모른다. 나만 옳다면서.

 

시간이 좀 갑니다. 만은.

아담의 범죄성, 그 아담으로 우리가 다 들어갑니다. 다 들어가는데 범죄성. 창세기 1장서 3장까지 내용에서, 다 볼 수 없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12절서부터 나타납니다.

인간의 타락 성. 이 성서 관에 있어서, 창세기 12절이 거기 그 2절을 표준해서 성경을 봐야 된다. 첫 내용이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볼 것도 없이 다 외우지요? 기억이 되지요? 처음, 성경 제일 처음 둘째 절이니까.

첫 절은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인격의 창조인데 2절에 가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뭐냐 면은 혼돈, 공허, 흑암, 깊음 이거 다 죄에요 죄. 어둠이요. 깊은 죄입니다. 사탄의 빙거에요.

죄가 폭로된 영혼 안에 하느님이 역사한다 그 말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영혼 안에 은총이 역사한다 그 말이에요. 이 성경 66권이 다 그 말이에요. 그런 줄거리로 봐야 된다. 그러면 다, 이사야서를 보나 어디를 보나, 한번 인간적인 거는 파괴를 당했다고. 완전히 손들어야 돼. 그런 식으로 하느님이 역사하셔. 율법적인 행동은 완전히 깨트려버려. 인간의 힘으로 하려는 그 바벨탑 다 헐어버려. 다 그런 줄거리로 되어 있어요. 그렇게 그런 뜻으로 안 보면 뭐, 도덕서로 밖에 안 보여요. 수양하는데 좋은, 그런 것 밖에 안 보여. 도덕, 교양, 수준으로 본다고.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구 하나 의인이 있습니까? 모두가 삐뚤어지고 다 죄인 아닙니까? 인자 하느님이 뭐 선지자들 보내가지고 안 돼요. 아들까지 보내니까 다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사랑의 법으로 밖에 없어요.

정의로 갖고는 안 돼. 정의는 인자 덮어. 정의는 불완전해. 하느님의 정의로 심판하는 건 불완전하다. 폭발적인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회개가 드러나질 안 해. 그러니까 죄가 드러난 영혼 안에 이런 거 보면 죄를 많이 드러나게 해가지고 손을 들게 한단 말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 아 인자 되었다 그러면. 하느님이 역사를 하신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다음 3절은 하느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더라.’ 있었고. 그래 인제 이 빛은 이 간주는

고린도후서 46로 나타났어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쳐 나오너라. 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기 위해서 빛을 주셨다.’ 그 빛은 어따 쓰라는 빛이냐 면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라는 빛이에요. 그럼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뭣이 있습니까? 십자가 지실 무렵에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발질로 채이고 얼굴에는 그것뿐이에요. 그게 영광이다, 그게 영광이라. 전 인류가 맞아야 하고 죽어야 할 죄의 짐을 예수님이 지셨다 이거예요. 그 사랑. 그러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우러러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 나실 때부터 얼마나 낮아졌는가? 짐승의 우리 간에, 구유에 눕혀 논 보대기에 싸여서, 간난아이를. 그것이 구세주 란 표다. 그럼 그런 구세주를 우리는 안 믿고, 따라가지는 않고, 영광에 나타난 하느님만? 그리스도를?

 

27

피조물,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 그것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땅에 속한 것인데. 그리스도 없이, 은총 없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이란 말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뭐 어떡해요? 자기 목숨만 지금 보존시켜주니까 그대로 사는 것뿐이지, 누구를 살리고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습니까? 살려주신 그대로 뿐입니다. 오늘 우리 몸도 그저 오늘만은 살아라. 숨 쉬게 하시니까 숨 쉬고 움직이는 것이지, 내 힘으로 됩니까? 그것까지도 위의 힘이지요.

또 세 번째는 216, 17절이죠. 그 뭐이냐?

선악을 알게 하는, 다른 건 다 자유로 하되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은 따먹지 마라.’ 그 법이 있다는 것. 법이라는 건 디모데전서 16절서 11절까지 써놓고 보시고요, 아까 로마서 415절도 참고하시고.

법은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 법이 있지, 아 거 사랑만 하는 사람에게 무슨 법은 완성해버렸는데. 사랑은 율법 완성인데 사랑에 의한 무슨 법이 있어요? 사랑은 무조건 사랑뿐이고 빛도 모든 데 비추란 것인데 무조건 비추고 있는 거지, 무슨 법이 있습니까?

빛은 비추는 것이 법이고 사랑은 사랑이 법이지 그 외에 다른 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법을 낼 때는 벌써 불완전하다. 내놔야 되거든. 죄를 아니까. 창세기 12절이 첫 번, 27절이 두 번, 세 번째는 17. 또 넷, 네 가지.

 

네 가지는 3, 1절에서 3절 보 면은 성경은 묵시 2218, 12절 보면

성서의 말씀은 11획도 가감을 하지 말라. 보태거나 빼서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 그랬지 않습니까? 가감하지 말라. 근데 벌써 가감을 했습니다. 3절을 보면. 뭣을 보탰고 무엇을 뺐죠?

만지지 말란 말은 216, 17절에는 없어요. ‘만지지 마라는 없는데 보탰죠. 반드시 정녕 죽는다.’ 했는데 죽을까 하노라. 뺏어요. 그 자체가 벌써 범죄 가능성이 충분하단 거예요. 이런 상태에서 뭣 합니까?

우리 뭘 결심한다고 해도 확실한 성령의 지시의 결심이냐? 성령이시면 표현적 결심은 없어요. 내용이지. 더 숨기지. 긍게 혈기적인 결심이니까 탁 밝혀놓고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곧 그 뒤로 마음으론 범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게 그렇게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부 저번에 들으니까, 일부 소식을 좀 들으니까 이 라디오에서만 들은 것보다 조금 달라서. 그 김일성이 정치가 말입니다. 아 그 집단 농장인지 뭣인지 인제 하나 성적이 좋은 사람을 자꾸 상을 준다고. 아 그러면은 죽겠다고 일한다고. 인자 긍게 보수를 주니까 막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경쟁의식을 기른다고. 그 저 이남서도 그렇게 쓰지 않습니까? 막 조금 성적 좋으면 상을 주고. 아 좋죠.

 

가감하는 것,

다섯 번째로는 12에 보 면은 어째서 자기가 따먹었다고. 아담이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나를 위해서 짝지어준 아내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아 그건 남자답지 않잖아요? 가장으로서 또 실상 보면 그 계명이 있는 후에 이 218절에서부터 아담 아내가 생겼지 않습니까? 갈비뼈에서. 그 계명이 발표한 뒤이거든요. 그러니까 하와는 실상 그 몰라요. 후니까. 아내는 혼자 그저 자기만 먹겠습니까? 아내를 사랑해야죠. 사랑해주었죠. 그 자기는 그 법을 들었으니까 아니다, . 하느님이 그거 금했다고 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인데 말이여. 과일을 준 게 받아먹고는 핑계를 댔다고. 이것이 범죄의 가능성이, 한 댓가지 안 됩니까? 여기다가 인자 뭔 수양, 뭔 복직을 해서 하겠습니까? 연수원에 가면 되겠습니까? 연수원에서 두 분이 오셔가지고 말씀은 참 대화가 잘 돼요. 그래서 인제 발표를 하실 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만. 아 우선은 돼요. 보기는 어떠나, 보기는 아주 참 좋아요. 빛 좋은 개살구라던가 뭐. 겉으로 보기에는 좋죠. 그치만은 마음속 깊은 데는 너무나, 너무나. 그건 알 수 없어요.

 

<작은 자여 내게로 오라.> 그 책자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를 소개한 책이죠. 리아그르 지음. 부산 가르멜 수도원 옮김 그리고. 7페이지서 봅니다.

이 가련함이 오직 하느님께 자비를 품게 하고 우리의 가련, 품게 하고 우리가 가련함에서 일으켜 해방시켜주시려는 원리를 가지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에게는 이것이 자본입니다. 내 가련, 내 미약, 내 허물, 내 문제, 이것이 이미 재산이라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길이고 하느님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입니다 힘.

인간에게 힘은 자기 무능의 힘입니다. 하느님을 내게 오시도록 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무능입니다. 전능하신 이를 끌어당기는 것은 인간의 무능. 얼마나 무능하면 무능할수록 전능하신 이는 끌려오신답니다.

내가 강하니까 맞서버린 것이죠. 하느님과. 인간은 하느님과 맞서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러니까 욥에게 하느님께서 뭐라고 책망했죠? ‘네가 스스로 의롭다하므로 나를 불의타 하느냐?’ 하거든.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체가 하느님은 의롭다고 입으로만 할지언정 이 불의타하는 것이잖아? 불의하다고 하는 태도가 되어버린다. 지난번에 그 요절 한 구절을 봐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죠?

 

오시는 주님 265페이지.

너는 모든 것을 다 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 즉 네 안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평화와 고요 속에 귀를 기울이는 일만은 하지 않는구나.’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일은 뭐냐? 우리 안에 계신 예수를 찾아가. 뭐 어디로 몸으로 갈 것이 없어요. 저 서울서 여까지 진도서 여까지 올 것이 없단 말이야. 자기 안에 다 계셔. ‘즉 내 안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평화와 고요 속에 귀를 기울이는 일만은 하지 않는구나.’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데 그 일을 안 한다. 그러니 어디 가서 찾을 거야? 물론 엘리후는 불원천리하고 찾아다니다가 배운 것하고. 그 배운 것으로서 욥을 깨우쳤죠. 불원천리했다. 그러니까 먼데서 제일 먼데서 온 분들이 말씀을 받을 겁니다. 엘리후 같이. 불원천리하고 갔어요.

 

나는 네게 무엇을 할 것인지 가르쳐주려고 한다. 귀를 기울이고 듣기만 하면 너 뭣 하라이렇게 가르쳐 주신다니까 예수님이. 그러나 너는 이미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하여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행동한다. 스스로 의롭다하므로 하느님을 불의타 하는 것이 된다.’ 나는 무엇 다 이거 할 줄 안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미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고 너무 자신만만해요. 하여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행동한다. 아 여기 안에 계신데,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좀 주무십시오. 하는 쪽으로 그렇게 만들어 놔. 그것이 우리들의 율법적인 행동이에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죄에 대해 초자연적 제보를 가장 가련한 이에게 주심으로써, 그리고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중략-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겠죠?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마는 그렇게 기도하겠죠? 그럼 몸이 건강해야 하느님 영광 돌리는 일을 잘 하려는가? 그 여기 보면 모두모두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보게 잘 살고 돈도 많고 부자가 되고 아주 그렇게 살면 그것이 믿는 사람이 저렇게 잘 되더라. 아 굉장히 영광 돌린다고. 크게 믿는 사람으로서는 오해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22 보십시오. 읽어보십시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어느 때 행복합니까? 말씀을 인해서 복음을 인해서 예수 때문에 멸시 천대를 받고 내쫓김을 당하고 능욕을 심히 당하고 엉뚱히 터무니없는 막 반대를 받고 말이야.

그럴 때만이 너희들은 행복하다. 가난한 자의 천국이다. 그러니 세상의 행복과 영적인 행복과는 정반대란 말이야 정반대. 세상은 부귀영화 영화가 최대의 영광의 자리가 영광이라고 하지요. 그러지만은 영광이 하느님의 내 영광하고 우리의 영광은 제일 낮은 자리입니다. 제일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가장 천대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천대받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그런 사람에게 쓸라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놓은 즉 얼마나 감격이 넘치겠습니까? 미칠 듯이 사랑 안 할 수가 없죠. 그래서 노래를 부른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미칠 듯이 사랑을 안 할 수가 없단 거예요. 그렇게 다 해주신다. 미리미리 나를 죄에 안 빠지도록 보호해주셨다는 겁니다.

 

 

자서전에 101페이지

하느님께서 제게 많이 사해주신 것이 아니고 모두 사해주시기 때문에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하신다, 사랑하기를. ‘성녀 막달레나처럼 당신을 많이 사랑하기를 기다리시지 않으시고 당신이 어떻게 저를 미리 형언할 수 없이 사랑하셨는지 알려주소서.’ 이겁니다. 이 하느님을 사랑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를 사랑했다는 걸 알아진 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내리사랑이에요. 하느님의 사랑이 깨달아진 만큼 거기에 감격하고 사랑하는 것이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어떻게 사랑합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하느님 사랑한단 말은 거짓말이에요. 할 수 없는 말이거든. 모르는데요. 무엇이 사랑인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가장 비천한 사람에게 약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놓으니까 미칠 듯이 그냥 어찌 이런 죄인에게 이런 은총을 설하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중에도 죄인을 이렇게 불쌍히 보시다니 이거 어디 될 말입니까? 어찌 그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 잘 한 사람을 상을 주는데 이렇게 못나고 이러한 죄인을 어찌 이런 상을 주십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인자 미칠 수밖에 없단 말이야.

이렇게 당신이 이렇게 저를 미리 형언할 수 없이 사랑하셨는지 알려주셔서 이제는 제가 당신을 미칠 듯이 사랑하게끔 하신 것입니다이건 다 하셨어요. 이게 복음이에요. 하셨습니다. 미칠 듯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미칠 듯이 사랑하게끔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한 거 아니에요. 자기는 없어. 안 오시는데 역사가 없는데 은총의 역사가 없는데 수고로울 수 없어. 사랑도 없는 사람보고 사랑하라 하면은, 애기도 안 밴 여자보고 애기 낳으라 하는 거랑 같단 말이야.

 

제가 당신을 미칠 듯이 사랑하게끔 하신 것입니다.’ 안 하셨는데 내가 한 거 아니에요. 통회하는 영혼보다 더 사랑하는 깨끗한 영혼은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참으로 저는 얼마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은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통회 없죠. 마음에만 있죠. 있지. 그러니까 미리미리 사람보기에는 뭐 흠도 티도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느낀 것은 꽃 하나 끊어가지고 뭐 머리에 꽂았다든가 그것이 큰 죄라고 생각해. 불교에서 만든 거야. 뭐 꽃 끊었으면 죄입니까? 거 끊어서 바라 보 면은 꽃 아닙니까? 그럴 정도라니까. 왜냐 그것이 좋다. 예수보담 그것이 잠깐이라도 이 꽃이 좋다 하는 생각이 벌써 예수를 잊어버렸단 말 아닙니까? 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이라 면은 예수 잊어버리는 것이라 그 말이에요.

예수님만이 가장 귀하고 생각해야 할 텐데 이 다른 거 좋다 그러면 예수는 안 좋다 그 말이 되어버리거든요. 스스로 의롭다는 건 스스로 의로울 수가 없는 건데 하느님만 의로운 것인데, 스스로 의롭다 하면 하느님은 없다 그 말이 되어버려. 하느님은 불의하다 그 말이 되어버려.

 

그러니까 그리고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초자연적 제보를 가장 가련한 이에게 주심으로써 최대의 영광을 누리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성경의 가르침과 초자연적 직관이 성녀의 마음에 하느님께 대한 최대의 신뢰, 오로지 그 무한히 자비 깊으신 사랑에 대한 신앙에 뿌리박은 신뢰를 낳게 했던 것입니다.’ 신앙에 뿌리박은, 사랑에 뿌리박은 신앙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가련함을 보아도 또 자신의 연약함을 경험할지라도 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당기는 수단,’ 하느님의 자비를. 근데 이게 가련을 발견한 만큼 무능을 발견한 만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전능을 하느님의 끌어당기는 수단이 된단 말이야. ‘당기는 수단으로 성녀는 여겼던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넘었습니다. 만은, 조금. 여기서부터 봅니다. 54페이지에 가서,

지극히 작은이는 나에게 오라.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오 라그 말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나는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오 내 주여, 당신의 그 부르심에 응하는 지극히 작은 일을 어떻게 대우하시는가를 알고 싶어 계속하여 찾았더니 마침 이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아기를 사랑하듯이 나도 너를 애무하겠노라. 나도 너를 어루만져주었노라. 내 품에 안고 또 무릎 위에서 어루만져 주리라.’

 

이사야 6613.

, 이와 같이 부드럽고 상쾌한 말이 내 영혼에 울려온 때는 없었습니다. 나를 하늘까지 올리시는 승강기,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그렇게 나는 커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반대로 나는 작은 채로 있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 작아져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더욱더 작게 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더 약해야 한다, 더 미약하고 더 무력하고 무능력하고 그걸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팔, 이 비유를 신학적 용어로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얼, 즉 성령과 그의 베푸시는 성령의 은혜이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끌어 올리시는 팔이라고도 할 만한 그 은혜입니다. 우리를 끌어올리시는 승강기. 이 말은 성령을 가리키는 데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여기 좀 떨어져서 보겠습니다. 55페이지 가서,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요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면 안 돼. 자기 힘으로. 아니고, 올라가는 데로 승강기를 딱 허고 타고 있는 것이 스스로 어떻게 올라갑니까? ‘따르며 맡길 뿐입니다.’ 승강기 안에 뭔 딱 한번 있으면 승강기가 올라가는 것이지 내가 올라가는 거 아니잖아요?

하느님은 우리의 비참이나 부족함을 훨씬 초월해서 즉 우리의 분수에 넘치도록 높이 끌어 올리십니다. 이렇게 조금씩 우리 자신에게서, 어디서 끌어오느냐 나라는 고 고집에서 자신에게서. 즉 자애심,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자애심이나 내 이득만 노리는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줍니다. 뭐 다른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 그 본질적인 업적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일이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는 전혀 의뢰하지 않고자기는 전혀 믿을 존재가 못 된다는 거예요. ‘반대로 두려움도 주저도 한계도 없이 다만 하느님만을 곧 무상의 사랑, 무조건 사랑. 무상의 사랑. 죄인인데도 전능의 사랑에 의지할 때에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사랑하고 싶은 열망, 겸손과 신뢰 이것이 모두입니다.’

 

 

저기 좀 더 떨어져서 봅니다. 57페이지 쯤 갑니다.

승강기, ‘데레사 수련자들의 지도를 맡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수련자가 자기의 결함을 고치려는 노력이 수월치 않고 수고에 비하여 열매가 너무 적은 것을 낙담하고 있을 때 이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도 인자 그런 장면이 다 안겨야 되겠죠. 자기 수고한 값을 치렀단 말이야. 수고하면 할수록, 아까 로마서 7장의 말씀같이, 무장, 무장 원한 것은 이뤄지지 않고 원치 안 한 것만 기억한다. 그걸 경험해야지 우리는. 우리 많이 경험해보지마는 잊어버리지요 잊어버려. 약간 경험해보고도 그냥 잊어버려.

자매는 내게 한 작은 애기를 그것도 겨우 설 수 있으나 발도 떼지 못 하는 작은 애기를 생각하게 합니다. 애기는 엄마에게 가고 싶어서 층계 위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첫 계단을 우선 오르려고 작은 발을 올리는 것이었으나 헛수고였소.’ 아 평지에서도 세워놓으니까 겨우 섰지 한 발도 제대로 잘 옮기지도 못 할 정도데 아 계단을 어떻게 올라갑니까? 그래가지고 하나 올렸다고 합시다. 한 단도 못 오르고 올렸던 발마저 도로 떨어뜨렸어요. 그럴 거 아닙니까? ‘한 발 여기 겨우 올려놨는데 요놈 들어 올리려고 하니 고것까지 떨어져버렸다. 한 다리 띠어서 또 거기 올릴 힘이 없단 말입니다 아직. 평지도 제대로 못 걸어가는 애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아니다. 자 이 애기가 되어주십시오 그랬어요. 그 신앙생활도. 자꾸 젊어져서 애기가 되어야 한다.’

모든 턱의 실행에 있어서 끊임없이 자매의 작은 발을 성상의 층계를, 성화되어 가는 그 층계를 오르기 위하여 드십시오. 하지만 자매가 다만 한 단이라도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자매에게 그 실행하려는 선의만을 보십니다. 실행하려는 선의. 선을 하고 싶은 그 간절한 열망을 보시다가 인자 로마서 8장에 그 장면이 일어나도록, 불나는 걸 여덟 가지나 깨닫도록 보여주셨죠? 그 선의만을 보신다는 거예요. 선의만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층계의 위에서 자애로이 자매를 바라보고 계시던 주님은 멀지 않아, 로마인서 7장이나 아까 갈라디아 3장에서나, 멀지 않아 율법에 갇혀서 믿음이 올 때까지 갇혀서 다스림을 받고 있을 때에 멀지 않아 올 테니까 그걸 못 참는다고는. 참아야 한다. 진리를 받아야 한다. 죽어야 한다. 율법의 진리는 죽는 것입니다. 안 죽으면 못 벗어납니다.

이 자매의 열매 없는 노력을 견디시지 못하여, 주님께서. 아 이건 못 참겠다. 인자 가서 내가 들어주어야겠다. 내가 뭐 계단 오르고 할 것 없이 내가 팔에 안고 가야겠다. 그런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시련이란 말이에요. 그런 시련. 그런 계기에요. ‘자매의 열매 없는 노력을 견디시지 못하여 친히 내려오셔서, 예수님이 말이야 내려오셔서 자매를 팔에 안으시고 그리고 영원히 마침 없는 끝없는 하늘나라로 데려다가 주실 것입니다 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성의 노력이 있어서 우리 편에서 할 협력이며,’ 우리 협력 우리 힘은 뭐 있느냐? 그 선을 해보려고 있는 힘을 다 쏟는 거예요. 그것뿐이지 오를 수는 없어, 내 힘으로 오른다는 생각은 망상이라고. 그 생각해선 안 돼. 주여, 주여 이리 부르시지, 주님의 팔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제 힘으로는 오를 수 없습니다. 그겁니다. 이것이 나는 이만치 선을 했으니까 또 거기다 또 선하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못 합니다. 나는 못 올라갑니다. 나는 이렇게 약합니다. 그러고 그 사랑의 팔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 기다린 자가 구원이란 말입니다. 끝까지 기다려야 해. 끝까지 참은 자가 구원이에요. 승리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의 노력이 있어서 우리 편에서 할 협력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선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열망과 그리고 우리의 노력,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것은 작은 나날의 성공에 대해서는 무익해 보이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의 성의를 다 보였다고 우리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때,’ 하느님이 인자 보실 때 아 네 있는 힘은 인자 다 했다, 그런데 조금만 남아있으면 아직 하느님이 역사를 안 한단 말이야. 나 또 이런 방법이 있고, 또 요 힘 갖고는 인자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럴 동안은 하느님은 가만 바라보실 것뿐이지, 그 은혜의 팔이 역사를 안 헌다. 내게 있는 힘을 다 허라고 허셨으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목숨까지 다하란 것입니다. 그래 다한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다했으면 은 그때 하느님이 역사하실 것이지. 내 생각만 다 했지 했다고 하지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직 덜 했는데요? 덜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가 없는 것이지. 그래 내가 다 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다 했어야 됐다고. 그러니 우리는 올 때까지 아직 덜한 것으로 알고 다 해야 한단 말이에요.

즉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 열매 맺지 않아도 굽히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겸손과 인내 중에 계속 원한다면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팔에 안아서 데려다 주십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승강기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번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하는 일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서로 합쳐지고 있습니다.’

완벽에 대한 노력이나 수고, 덕을 얻기 위한 이러한 방법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안온한지요. 그러므로 또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로 보다도 하느님께 더 마음을 사로잡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어떤 덕을 닦기 위하여 진보하려고 힘쓸 때에도 그녀의 노력은 자기의 완성에 힘쓴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하느님 성의에 더욱 맞 가지려고, 맞도록, 성의에 맞 가지도록 애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하늘나라는 어쩐다고 했죠? 침노를 당한 자가 얻는다고 했고 또 어떤 사본에는 천국은 하늘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으니까, 오고 있는데 그 하늘나라를 맞아들일 려면 어떤 힘을 쓰고 어떻게 애를 써야 되겠습니까? 침노를 당하기 전에, 침노를 당한다면 억지로 뺏긴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지만은 억지로 뺏기는 게 아니라 자진해서 내놔야 해. 한사람에게 내게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면 내게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어버려야 해. 그럼 그 힘쓰는 일은 뭐냐? 비 이기로, 비 이기로 자기 부정하기로. 자기를 버리기로.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하늘나라,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하늘나라. 최고 이상, 자기로서. 그건 다 버려야 한다.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 자기 표정, 자기 목표, 자기 힘, 자기 지혜, 자기 멋 싹 비워야 된다. 칼질을 당할 것이 아니에요. 억지로 뺏길 것이 아니에요. 자진해서 하늘나라를 알았으면 깨달았으면 세속적인 것은 싹 버려야 한다. 자기를 버려야 한다. , 찬송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