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2009년도 농사는 힘들었다. 2011년 성 무렵 해남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전대병원에 다니다가 김제에서 6개월 보냈고 곡성에서 있을 때 일이다. 1월 30일 주일날 말씀을 들을 때 할머니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다.
주일 이야기
2011.01.24. 장금실
크고 작고 간에 소중한 게 있는데 누구 집이나 그 집안의 역사가 있는데 함부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정말 작은 것이라 해도. 진도나 여기나 그런데 나라도 그래. 한 번은 꽃나무 몇 개를 한주먹을 갖다가 심었어. 꽃나무 몇 개를 가져다 심었는데 어느 날 누가 캐갔어. 그걸 생각 하면서 소중한 것 풀 한포기라도 그거 갚아주신다고 그냥 건성으로 쓸데없이 말아야 돼. 그렇게 꼭 그렇게 하고 싶고 김제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그걸 생각했어.
무엇이나 다 소중한 것이야. 커서 소중한 것이 아니야. 많은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니야. 사는 게 내가 가지고 싶은 거 없으면 희망 없어, 희망 있는데 그 마음은 소중한 거야. 그 마음이 소중해. 그래서 그 마음이 있으면 희망이 있어.
내가 김제 가니까 가서 내가 몇 달 살았냐? 7월 달에 7월 말경으로 아는데 8 9 10 11 12 1월 달 여섯 달 있다 왔어, 그런데 내가 거기 가니까 소중한 게 무어냐? 하면 그 공장은 내꺼 아니다. 내꺼 아니고 그리고 내가 얹혀서 사는 식객이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밥 먹으러 가려면 참 조심스럽고 불편 해.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아버지도 그러고 아들도 그러는데 그래도 그게 안 돼. 그런데 내가 농사꾼이니까 주변 땅이 전부 묶은 것만 보여. 잘 가꾸었으면 좋겠어. 진도 주헌이가 꽃을 잘 못 가꾸니까 그걸 가져다가 여기다가 심고 요거 심고 요거 심고 그렇게 하고 싶은 상상만 나. 아무것도 생각 안나. 그런데 그렇게 하면 공장이 아름다워 지면 조금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머리가 아파가지고 몇 시간 씩 깨지게 아프거든. 그 시간을 쪼개가지고 막 그것 하고 싶은데 걱정 없어. 그렇게 해서 가을 겨울 지나기 전에 봄에 해서 조금 아름답게 좀 더 아름답게 그렇게 해놨어.
그랬는데 정 안 되어가지고 수원에 있는 중국교포 교회 수원(隨元) 선생 별로 기대를 안했는데 암은 수맥 파에 의해서 걸리며 그 치료 역시 수맥 파를 피해야 하고 수맥파의 유해성을 무해 성으로 바꾸는 비파고(秘波膏)를 만들어 손상된 부위를 L-rod로 진단해 치료하는 데를, 그거는 매일 왔다가도 그거는 우리 집안에 거기 내가 가 있음으로 해서 과하게 되었어. 같은 사람이라도 아버지와 같은 경우에는 수맥이 있어도 오히려 좋고 그런데 거기서 하는 이야기가 소음인하고 태음인하고 태양인하고 살면 태음인은 죽게 되어있다고 수원 선생이 그렇게 얘기해. 그거 모르는 거잖아?
꿈과 몰라서 그러는 것 태음인이나 소음인을 알게 되고 태음인이 지극히 많고 태양인은 16 프로 소음인이나 태양인은 드물다는 것 그러니까 미리미리 알아서 그걸 대처해서 공부를 하는 것 수원선생이 그것을 인해서 병을 고치는 것 그걸 해서 세계적으로 병을 고치고 중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 그것을 거기다 딱 그렇게 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 자녀들도 미리미리 잘 알아서 고쳐줘서 그렇게 남보다 더 잘 아는 것을 배워가지고 공부를 해서 많이 인정을 해주면 좋겠어. 나는 잘 모르겠어. 나이를 먹어 금방 금방 잊어버려. 구지 토를 단다면 비파고를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고사리를 삶아서 꼬부라진 것 그걸 뜯어서 말렸다가 그걸 또 삶아서 진하게 만들어 또 밤을 삶아서 껍질하고 진 하게 만들어 그 물로 목욕을 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내가 안 아팠으면 비파 고를 몰랐을 터인데 내가 비법을 내가 알았으니까
비파 고를 바르고 세 시간만 지나보면 통증이 없어져. 콩 주머니가 달린 것을 수건으로 날 때 꺾어다가 말려서 그렇게 하면 주광 이는 시험정신이 많으니까 그렇게 해 보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그리고 오행생식이라는 거 내가 그 오행생식을 안 먹었더라면 내가 피부가 약해 쭈글쭈글 해. 오행생식이 있어서 피부가 생식 안 먹었으면 피부가 더 안상하게 된 것이 그 영양이 거기에 다 들어있어 그 두 가지 돈 많이 들었어. 천만 원 내가 넉넉히 썼어.
그거 다 배우는 것이 있어. 그 외에 배우는 것이 그 두 가지 큰 틀 그 사람들이 한 거를 내 돈 조금 들여서 경험 했다는 것 자연선식
경험으로 하지 않으면 그렇게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평범하게 다 바쁜 사람들인데 이렇게 어려운 일 당하는 걸 형제간에도 부모 자식 간 서로 희생하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정성을 다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꽃 물 보다도 더 소중하구나 하는 것이 같이 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머리가 아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더 말도 못하겠어.
예언 뒤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예언이 지금 여기에 들어있어요 이사야 예언서인데 여기는 지금 이스라엘의 40장에 나오거든요. 메시야상이라든가 그것이 잠재로 히스기야 왕으로서 들어가는 것 같아요. 나는 여기에서 무엇인가 하면 지금, 지금 전자파 같은 것 차단하는 그 이야기가 거기 들어가지 않나 생각해봤는데 여기 지금 이사야선지가 히스기야 왕이 종기가 나서 죽게 되었을 때에 그 종기 자리에다가 무화과를 고약을 내서 냈다고 무화과가 생각되더라고 무화과하고 꿀하고 그 성서에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 다음에 열왕기하에 있어서는 히스기야 왕이 그 병을 보고 너는 죽을병이다. 죽는다. 살아나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유언을 해라. 너는 못사니까 유언을 해라. 자식들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슬피 울면서 하나님께 그 기도하는 내용이 나와요. 감사의 시가 나와요. 공동번역에 더 좋게 되었으니까. 하늘의
그것이 38장 9절서부터 나오다가 그 이야기가 나오니까
히즈기야의 감사 찬양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구원을 얻게 되요. 히스기야왕이 산당을 훼파하고 가장 그 인근에 하나하나 뜯어보면 지금 우리가 중간 중간 보니까 그 다음에 병이 나았는데 앗시리아가 쳐들어왔었거든. 왕이 정탐꾼을 보내서 병의 회복되었나 보러왔다고 그 이야기는 나는 모르니까 좋아서 병기고를 다 보여주었다는 거예요. 바벨론한테 망한 거야. 그 망하기 전에 자랑하지 마라라.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실 이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자기 것인 줄 알고 사업을 해도 자만하지 마라라. 네 것이 아니다. 하나님 것을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했거든. 자랑 그럴 수가 있어요? 실제적으로 어머니가 그 사업체 대표야. 그러나 전혀 하지도 않았고 지금 할 것이 있으면 하고 17절 이에요. 38장 17절
히스기야 왕의 감사 시에요. 고통 없이 평안함이 오는 것 아니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고 고통 뒤에 기쁨이 온다. 기쁨 뒤에 반드시 슬픔이 있고 그런 것이다. 내가 그래도 우리가 잘못한 것들 부족한 것들 많이 있겠지만 그건 하나님 은총들로 할 수밖에 없다. 그걸 느낀 거야. 은총을 받아가지고 한 것을 알아야 돼. 그 그릇이 되도록 혼자야. 아무 의미도 없어 하나님의 것이야. 실제로 하나님이야. 거기에 이름이 무엇이야 믿음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야. 예수님을, 기적을 갖더라도...
할 말 더 있으면 하고
무엇이 좀 듣고 싶어
부모로서 자식의 잘한 것 또 생각이 다른 것 그것이 내가 자식이니까 나한테 그것이
좀 아들이 돕고 며느리들이 돕고 그렇게 이해 할 수 있으면 하고자하는 거기에 좀 치중을 하고 싶거든. 다들 마음을 열어놨으면 나도 이런데 그런 것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같으면 장가가서 부모마음하고 인연이 질기다. 생각을 하는데 그런 생각이 강하고 진도에서 또 같이 살고 진도를 떠나려고 사과농장 한다고 그 때 나왔다가 그때도 그 독립심이 강했고 그러다가 인제 뜻대로 안되고 결혼을 하고 곡성을 떠나는 기회가 오고 그때는 정리가 되고 그랬는데 실질적으로 마음이 진도가 갑자기 되고 그래가지고 진도를 왔다 갔다 하다가 진도를, 살게 되고 그러다가 김제까지 오게 되면서 집안일이던지 이렇게 생활이 되는데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아니고 부모님한테 원망스럽다거나 그런 거 없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마 아버지의 은혜로 잘 살아왔고
생각은 계속 있지요. 그늘을 벗어나서 살아야 된다. 그렇게 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 그럴만한 부모님 잘못도 아니고 그래서 그런 것이고 그래도 그리고 이제 엄마 지금 편찮으신데 나름대로 참 마음은 같이 모시고 싶고 그런데 김제 있을 때 보면 엄마가 반대를 하고 그러는데 주광이가 하는 것 보면 미안한 마음도 있고 또 많이 힘들어 하시면 그런 생각도 엄마생각도 내가 싫으니까 그런 생각도 들고 지금 모르겠지만 조금 일을 떨어져서 보려고 마음으로 집중해서 안하려고 그래가지고 일을 저도 이 일을 하게 되면서 그냥 곧바로 생각을 안 하고 도망가려는 그냥 일을 보고 저도 그것을 내 회사다 생각해본 적 없고 회사에서 상무로 일이나 보고 있었으면 그런 생각이 그 일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그 일을 하는 걸 엄마가 부담을 안했으면 좋겠고 제 생각에는 여기 와가지고 계시는 것 엄마 마음이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마음을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엄마 아프시면서 제가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고 엄마 한 것은 힘들지만 저는 가정에서 배운 것이 많고 그래요. 엄마가 잘 이겨내시고 도와주셔서 그렇다고 건강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수씨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고 제가 요즘 제 마음이 그래요.
지금은 아무생각 없다. 그냥 하는 일에
사실 영윤이 엄마가 지금 많이 크고 있어. 우리 시어머니 별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돌아가신 다음에 그 중심을 몰라서 참 어떻게 생각하면 시어머님이 네게 짐이 되셨다. 그 밑에서 그런 그때는 나 눈물 흘리고 병날 때 그 조금 모시고 죽음 다 받아놓고 기도를 해. 시누들이 힘들 때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시어머님이 그저 평범한 시아버지는 못 잡숫고 못 입고 참 야속하고 지금은 시아버님 역할을 너무 철저하게 잘 하시고. 시어머니는 ....
즐기고 지금 내게 그것 없는 것 그거 나한테 주셨어.
내가 지나온 길
장 금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 할 뿐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이는 믿음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는데 참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고향이 이북의 평양 근처였습니다. 그 때 나는 언니 동생들과 함께 외가댁에 있었는데 6.25가 나기 두 달 전에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여느 때는 아버지를 잘 안 따르던 제가 만류하는 어른들 말을 안 듣고 동구 밖 까지 배웅만이라도 한다고 나선 길에 아버지의 교회까지 왔습니다. 동란이 나고 1.4후퇴 때 평양에 와 보니 시가는 싹 비고 다리는 끊겼습니다. 미군 다니는 군용 도로만 하나 남았습니다. 이 따끔 배를 타고 피난 오는 시민은 무차별 기관총 사격을 받았는데 공산당이 넘어 올 가 봐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한 민간인이 비참하게도 많이 죽었어요. 그러면서 군인들은 잠시 있다 올 테니 안심하라고 해요.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같이 피난 간다고 종일 울었어요. 차를 탈 때는 ‘당신만 타시오. 이건 누구요? ’ ‘내 딸’이라니까 겨우 탓 지만 아주 못 마땅한 표정이었어요.
쌀 한 말 지고 성서, 찬송가, 옷 몇벌 가지고 대동강 건넌지 두 시간 만에 다리는 폭파되었어요. 걸어서 20일 만에 서울, 서울에서 인천, 인천에서 제주도에 8달 있는 등 이사를 자주 다녀 초등학교는 6번 중학교는 3번 고등학교에서는 1번 전학을 하여 공부를 했지만 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종교교육은 엄하셨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다녀오시고 식전에는 가정예배를 보십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손으로 짚어가며 성서를 읽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교회에서 하는 얘기가 다 정말로 알았고, 남하고 말다툼 싸움 한번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가 되니 싫증이 나데요. 하나님이 계신 것은 의심할 여지없으나 교역자의 자녀라는 굴레 때문에 이중생활 하는 게 싫었습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 고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눈치 보며 옆 사람과 장난도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조금 생각하는 때니까 진실해야겠다는 주체적인 생각과 함께 형식적인 신앙에 대해 비판과 반발심도 듭디다. 목사하곤 결혼 않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교 나온 2년 뒤 아버지가 갑자기 모든 수속을 마치고 전주 한일신학교 입학을 강권고합니다. 나는 신학은 싫었습니다. 2일 동안 항의 했으나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층집이고 50년의 역사를 지닌 남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학교인데 10명모집. 장학금이 잘 되어 있어 돈은 별로 안 듭니다. 전국에서 온 학생 중에는 할머니도 있고 어린 단발 학생도 있습니다. 규칙은 엄격합니다. 마루바닥에 잉크만 떨어져도 비누 걸레로 다 닦아야 합니다. 5시에 기상하고 5시 반에 종치면 전원 기도실로 가서 줄을 맞게 앉아 2시간 예배를 봅니다.
하루의 시간엔 빈틈이 없습니다. 기도 끝나고 7시 식사 시간 종소리에 달음박질로 식사에 참가, 식사기도 잠시 후 자유시간이 끝날 새도 없이 9시부터 아침 예배(월 수 토는 학교 교수 외부 손님을 초청, 화는 교장) 그리고 12시 지나면 점심, 오후 3시간 수업, 10시에 자유 시간 빨래 청소, 토요일은 2인 1조로 전도를 구역별로 다니고 성가대 유년학교 지도 결과에 따라 점수를 매깁니다. 전도 다니는 것은 깡통 들고 구걸 다니는 것보다 괴롭지만 월요일 보고 시간에는 교장에게 직접 세밀한 보고서를 써야 함으로 적당히 할 수도 없습니다. 저녁 식사 뒤 7시에는 각방별 예배가 있고 10시에 준비종 5분 뒤 소등 다음 날 5시에 불켜지고 같은 일과 반복.
한 가지 좋았던 일은 교수들이 구약 창세기부터 신약 까지 총론으로 윤곽을 설명해 주신 강의였습니다. 구약을 객관적 역사적으로 설명하니 흥미가 있었습니다. 차분한 성서공부와 함께, 잘 난줄 알고 반항하고 반발하던 내 나쁜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서 차츰 마음이 가라 앉았습니다.
2학기 말에는 변화가 왔습니다. 여직까지의 이상한 섭리의 인도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내 맘 대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은혜로 이끌어 내신 것 같이 섭리로 은연 중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파스칼의 회심의 기쁨을 아는 듯 했습니다. 조그만 학생이 중얼거리는 성구에도 크게 깨달음이 오고 신기 했습니다. 신앙이 어떤 것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는 것 기쁨의 눈물 밖에 없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최선의 은혜로 이끄시는 것. 고마워서 어렵던 일도 잘 참아지고 순탄한 생활을 생각 않고 어떻게 은혜 보답 할까 생각한 끝에 그렇게 싫어하던 교역자가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학교를 나온 뒤 20명 중 교역자로는 6명이 도시로 나갔지만 나는 농촌을 택했습니다. 개인 문제는 해결 되었지만 막상 농민들에게 부닥쳐 보니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새벽부터 바쁘게 일하는 농민에게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농촌에서는 급 한게 일입니다.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죽을병에 들린 환자가 있으면 찾아가 하나님을 믿으시라고 하면 순수하게 받아 드립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을 잃었습니다. 농촌이라는 큰 문제 앞에는 정말 무력한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성서 읽 는게 두렵고 누구의 말씀을 꼭 듣고 싶었습니다.
그 때 김 선생님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친정은 엄숙하고 조용한 종교적 분위기 엿 는데 시집은 불신 가정이라 매사가 불안정 했습니다. 이러다간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는 사람이 되겠다 싶어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아버지도 믿으시라고 가정예배 보시자고 권하여 결국에는 아버지도 안경 쓰시고 성서를 더듬어 읽거나 사도신경을 외시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믿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누구나 하나님을 회의 할 때가 있습니다. 회의가 올 때는 침식도 잊게 번민을 하면 마침내 탈출구가 나서고 그 때 기쁨이 옵니다. 평범한 중에 무의미하게 하면 신앙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 가정의 테두리에서 늘 종교생활이 거역 스럽고 진저리가 날 때도 있었으나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것은 어린 주일학교 때 들은 성서 말씀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지난 생애에서 초등학교 1.2학년 때가 최고로 자유스럽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의 그 때는 이북에서 교회를 핍박하던 때라 학교 담임 여선생님이 주일에 학교에 나오라고 했어요. 몇 달은 거역했지만 매와 벌과 호랑이 교장 선생님의 위협이 무서워 주일에 학교에 나가고 말았습니다. 어리지만 양심의 갈등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아버지께 큰 걱정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성경 말씀은 다 아는 얘기도 재미있었습니다. 무릎에 앉아 있으면 얘기는 건성으로 들어도 즐거웠습니다. 구름을 보면서 예수님이 구름 타고 언제 오실랑가? 명절 때면 떡을 하나님이 주신다니 하나님이 손 달렸는가? 아버지는 하나님이 주라고 해서 준거야 하면 기둥나무로 주었능가?고 대꾸하면 별놈의 소리라고 말 하시던 모습. 아버지 위에 또 아버지. 이렇게 올라가면 맨 뒤에 하나님 또 하나님 위에 또 하나님이 안 계실랑가? 6살 때 우긴 일도 생각납니다. 즐거웠던 어린 때 신앙이 반항기의 고비를 잘 넘기게 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신앙의 즐거움도 고민도 걱정도 없어 침체라고도 하겠지만 한편 생활로써 실행하는 결실의 단계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만 그칩니다.
풀무학원 교지 <새벽 별> 통권 60호 : 1971년 9.10월호에서.
어릴 때와 피난 나올 때 이야기
2011년 2월 18일(임종 예배 후) 들은 사람은 3인
이북 남시에서 살 때 머리에 헌데가 심해 머리를 빡빡 깎았다. 그때 아버지께서 너 죽겠다고 하셨다. 그때 죽는 게 무서워 ‘아버지 나 안 죽어, 안 죽어.’ 큰소리로 말했는데 그 후 딱지가 앉고 낳게 되었다. 내 기억이 생생하다. ‘나 안 죽어, 나 안 죽어.’ 그 말이...
그리고 항구 뒤에 가 보면 내 나이 또래 일본 아이들이 게따 신고 걸어가는 것이 기억난다.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몸베와 검정 적삼 입고 각게(x)로 애기 업고 교회당으로 모두 왔었다. 그게 기억이 난다.
그 일들은 모두 남시에서 살 때 기억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 한복 입은 것도 기억이 난다.
신의주 옆 철산에서 살 때는 학교에 다녔다. 기차 타고 이사를 갔다. 정거장 까지 인지 잘 모르겠는데 집사님이 나를 업고 짐은 달구지에 싣고 갔다.
거기서 살 때 학교에서 주일 날 오라고 하고 아버지는 교회에 오라 하는데 힘들었다. 월요일 선생님이 어제 교회에 나간 사람 나오라고 해서 5명이 모두 나가 교단 앞에서 두 팔을 들고 막대기 걸쳐 놓고 내려가면 때리고 1 시간 벌을 받고 그 다음에는 2 시간 벌을 받고 다음에는 교장 선생님한테 가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학교에 오겠다고 약속하고 또 교단 앞에서 4 시간 벌을 받았다. 아버지 말을 들어야 하겠는데 다음 주일에는 무서워 교회에서 의자 밑으로 숨어서 나와 학교에 갔다. 얼굴은 빨개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갈까 말까 하다가 학교에 갔는데 아버지께 야단맞을 건데 학교에서는 공부는 하지 않고 선생님은 금실이 왔다고 칭찬해 주었다. 양심 가책을 많이 받았다. 집에 돌아가니 너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시길 레 학교에 갔다 왔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때 양심 가책이 평생 따라 다녔다. 나 때문에 아버지 죄짓게 했다는 가책을 잊을 수가 없다. 학교에 가도 공부 못하고 2학년 때 아버지도 목회 못하게 되어 평양 할아버지 집으로 작은 아버지 네도 그 집에서 많은 식구가 살게 되는데 우리는 사랑채에서 살다가 함께 살았다.
많은 식구가 한 집에 사는 게 어려워 개천에 있는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딸 3과 어머니 아버지 5 식구였다. 그 때 외가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과 외숙모가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우면서도 나는 좋았다. 아버지가 따로 계시다가 오시더니 가시는데 배웅 하느라 따라갔다. 아버지가 들어가라고 하는데도 떨어지기 싫어 무서우면서도 저만치만 가겠다고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가 나 아버지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허락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자고 해서 나오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 삼춘 모두 좋은데 아버지가 좋아 그렇게 되었다.
6.25 때 거기서 지냈다. 아버지는 붙잡히지 않으려고 옥수수밭 목화밭에서 자면서 지내고 방에는 못 들어오는데 비오는 날 방에 들어왔다가 인민군이 잡으려고 왔다. 아버지가 옆집으로 나가려고 하니 ‘너 이놈 어디로 가려느냐?’ 고 하여 들어와 할아버지 중우 적삼을 입고 밀 집 모자를 쓰고 대문으로 나갔는데 붙잡지 않았다. 수염을 깍지 않아 노인으로 보았나 보다. 인민군이 30분이나 기다리다가 들어와 나오라고 했으나 할아버지가 찾아보라고 없다고 하니 작은 엄마 방까지 아궁이 수수 대 모두 뒤져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내가 어릴 때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다. 그 때가 내가 10살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늘 아프셨다. 피난 나와서 그 근처에 살던 이들에게 물어보니 돌아가셨다고 그래. 쑥대밭이 되었다고 들었어. 아버지도 어머니는 거짓말 못하는 이라 붙잡혀 돌아가셨을 거라고 해.
내가 평양 할아버지 집에서 살 때 B29가 산 아래로 내려왔다가 올라갈 때면 쾅 소리가 났다. m 근처에 영화 촬영소가 있었는데 부셔졌다. 1.4 후퇴 할 때다. 아버지가 할머니 보고 잠간 나갔다가 올 테니 금실이 좀 돌 봐 주세요. 할 때 나 따라 갈래 하고 나서니 할머니가 얼마나 힘들 거라고 말렸지만 따라 나섰다. 쌀 1말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평양에서 사리원에서 아버지를 잃었다가 겨우 찾았다. 사리원에서는 사람들이 개성으로 갈지 해주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할아버지 집에서 나와 대동강 철교를 건널 때 이리가도 못 가게 저리가도 못 가게 막았다. 철교를 차량으로만 건너 주는데 미군 차량으로만 강을 건너는 데 군인 순경 목사만 태워주었다. 아버지만 태우고 딸 잡은 손 자른다고 태우지 않으려는 데 겨우 타고 건넜다. 강을 헤엄쳐 건너는 사람들을 총을 쏘아 모두 죽였다. 중공군을 차단하려고 그리 했다. 김은국씨 소설 순교자에 묘사된 대로 그 모습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내가 건너고 난후 바로 12 시, 오후 3 시 대동강 다리는 끊겼다. 내 생명이 기적적으로 이어지고 그게 힘도 되고 기도도 되었다. 그 날 저녁을 보내고 10리 20리 걷고 다음 날 70리 걷고 나니 뒷굼치가 피가 나고 아팠다. 잠을 자고나니 내 신을 누가 가져가 버렸다. 떨어진 신 신고 가다가 지까다베 사서 신고 콩 조금 먹고 굶고 추워도 잠들면 자면서 뒤쿰치 까져서 하루에 겨우 30리 40리 밖에 못 걷고 비행기가 폭격 사격을 받으며 미군 뒤를 따라 가면서 비행기가 오면 도랑으로 숨으면서 내려왔다. 산 잘린데 5리 앞에 비행기 기관총 사격한 곳을 지나다 보면 사람들이 총에 맞아 많이 죽어있었다. 시체 밟고 가다보면 엄마가 죽고 아기 살고 아기 죽고 엄마 산거 보면서 그렇게 나와서 3.8 따라지 소리 들으면서 살았다.
다행이 미군들 바짝 따라서 살았지 조금 더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런 것 보았기 때문에 지금 이라크나 중동 지역 그 아이들 보면 내가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 고아들 보면 너희 왜 살았느냐? 미리 죽지 않고 살았느냐? 그 애들 보면서 너희 어떻게 살아 갈 거냐? 내가 30대, 50대 까지도 그 상처가 이어갔는데 그걸 보면서 많이 울었다. 내가 진도에 내려가 살면서 사는 게 너무 힘들기에 이제는 그 시절 기억이 좀 엷어져도 몇 10년 까지도 그 고통이 너무 오래 간다. 그 삶이 힘이 든다. 3.8 따라지 설음이 이어졌다.
먹을 게 없고 먹을 것이 없어도 사람 사는 것 같이 살아야 하는데 전부 돈 가지고 좋은 것은 많고
서울에서 걸어서 인천으로 가서 3 번 배를 갈아타고 LST 미 해군 함정 3층 인가 4층 인가 의용군들과 타고 가게 되었다. 미군들에게 과자 같은 것 얻어먹으면서 제주도에 가니 팔치산이 한라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밤이면 한라산에서 내려와 못 살고 한림으로 갔다. 힘들게 살다가 8개월 후에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얼마 있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그 때 민간인은 못 가게 해서 나중에 기차 24시간 타고 올라가 영등포에서 처음으로 건너서 서울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지 못 하다가 혜화국민학교에 들어갔다. 그 때 고려병원 경교장이 육군 병원이었고 여자수의학과가 있던 데다. 창경원은 미군 육군 병원이 있었다. 내가 아버지 육군병원 군목이여서 거기 살면서 혜화초등학교 2년 다니고 의정부로 갔는데 아버지가 고등국민학교 만들어 아버지와 내가 판자 집에 살았다. 판자 집은 미군 빵 박스를 뜯어가지고 각목에 틀해서 하루 밤 사이에 집 몇 채씩 지어졌어. 나는 그걸 못 잊어. 군인 담요 2장으로 겨울에 난방 없이 그런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다. 의정부에서 논산으로 내려와 내가 5학년 때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법대에 아버지 다니시고 여수로 내려가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하고 말았다. (이 때 다시 경기 와서 이야기가 끊겼다.)
내가 들은 기억으로 여수에서 남학생들 속에 혼자 중학 다니다가 또 전학하여 졸업하고 군산으로 와서 미면에서 20리길 걸어 군산여고를 졸업했다.
그 후 부안 동진에서 개척교회 하시면서 재혼 하셨고 그 때 한일 신학교(지금 동신대학) 졸업. 임실에서 목회할 때 결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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