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한국고아들의 아버지 홀트 : 창주 현동완

mamuli0 2024. 10. 27. 14:25

 

기독교수도회동광원 계명산 수녀원 태동 동기 이야기가 있다. 6.25전란으로 많은 고아들이 발생하여 서울 YMCA 총무 창주 현동완(1899.6.12~1963.10.25) 고아와 부녀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는데 그때 난지도에 삼동촌을 이주할 장소를 물색하던중 계명산 골짜기를 정인세 선생과 답사차 한나 어머니가 능곡에서 따라 나섰다가 미8군단에서 일선이 가까워 허가를 내주지 않아 오지 못하고 어머니는 계명산 풍광에 반해 그해 가을에 앵무봉 아래 골짜기에 움막을 치고 살다가 다음해 1957년 3월 5일 입산 정착했다. 그리고 한국고아들의 아버지 홀트는 녹번리에 '해외양자회'가 자리를 잡았다. 해리 홀트는 원경선 선생과 절친했고 동지로써 형제로써 매사에 함깨 했다. 이 세기관은 동시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다고 여겨져 창주 현동완 선생과 홀트 소개의 글을 함께 소개한다.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 해리 홀트(1905~1964)

 

한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어린아이의 생명은 더한층 귀하다. 해리 홀트(Harry Holt, 1905-1964)는 인류 역사의 대 전쟁중 하나인 한국전쟁 이 후부터 수많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홑트는 1905년 4월 6일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닐리(Neligh)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주도하는 가정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성장했다. 소속한 교단은 미국 남 침례교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 온 가족이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로 이사했다. 화이어스틸(Firesteel) 근교의 농장이 생활의 터전이었다. 그가 받은 학교에서 받은 공교육은 3년 정도였다. 오직 농장에서 밀 재배 등 농사일에 전념했다.

 

소 농장주로 성장한 해리 홀트는 1927년 12월 31일 간호사인 버다 마리안(Bertha Marian, 1904-2000)과 결혼했다. 마리안은 홀트와 평생의 반려자이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아동 복지 사업을 전개하는데도 뜻이 같이하였다. 버다 마리안 홀트는 1904년 2월 5일 미국 아이오와(Iowa) 주 데모인(Des Moines)시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과 간호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1926년에는 아이오와 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였다.

 

해리 홀트와 버다 마리안 부부의 슬하에 1남 5녀, 즉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는 스트어트(Stewart, 1933), 큰 딸 완다(Wanda, 1934), 셋째 말리 (Molly, 1935), 넷째 바바라(Barbara, 1936), 그리고 여섯째가 린다(Linda, 1946)이었다.

 

1937년, 그들이 살고 있던 사우스 다코타에 큰 가뭄이 들어 더 이상 농사일이 어려워졌다. 홀트 가족은 미국서북부의 오레곤(Oregon) 주 크레스웰(Creswell) 교외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시작한 사업은 제재업이었다.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성실함으로 새 사업은 크게 번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처럼 사업확장을 준비하던 홀트는 45세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징병제로 바뀌어 미국의 젊은이들이 위험에 처한 바로 그 해에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 그의 병은 심장병의 일종인 색전증이었다. 혈액 속의 부유물질이 혈관의 협착이나 폐색을 일으키는 질병으로 병세가 6개월이나 계속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의 신앙심은 깊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긴 투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홀트씨 가정에 입양된 한국 고아들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부여받은 그는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성경공부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편 남은 생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그의 삶을 바꿔 놓은 병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이자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투병 전 까지 홀트 가족은 성공한 집안으로 많은 재산과 함께 150평의 2층 저택에 살면서 좋은 생활환경 속에서 단란한 행복을 누렸지만 해리 홀트의 투병생활 이후부터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해리 홀트는 번창하던 제재소의 일부를 팔아 농장을 사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건강을 돌보면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주변의 아이들을 모아 집에서 어린이 전도협회 수업을 펼치는 등 활발한 신앙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홀트 가족은 어느 때보다 충만한 신심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으로 새로운 임무를 준비하게 되었다.

 

홀트 가족이 새로운 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54년 겨울이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한국의 고아들에 관한 일이었다. 그 무렵 한국은 전쟁이 끝나고 1년 넘게 흐른 뒤였지만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모든 것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오랜 가난 뒤 세계전쟁을 방불케 한 전쟁으로 그 참화는 민중들의 삶의 뿌리까지 뒤흔들어 놓은 상태였다. 특별히 어린 아이들에게 더욱 가혹하였다. 가정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았고 굶주림과 창궐하는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으로 20만 명의 미망인과 10만여 명의 고아가 발생했으며, 5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에 미국군정 때 주둔하기 시작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거나 전쟁 이후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한국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54년 12월 14일 저녁 홀트 가족은 한경직 목사와 밥 피어스(Bob Pierce) 박사가 한국에서 창설한 선명회(현 월드비전)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상영된 기록영화는 한국 전쟁의 참상 속에서 미망인과 고아들이 겪는 비참한 생활과 이들을 지원하는 선명회의 사업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홀트 부부의 가슴을 가장 저미게 한 것은 미군 사생아들인 혼혈아들이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 멸시를 당하거나 버려지는 장면이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강연에 나선 피어스 박사는 직접 목격한 참상과 혼혈아들의 문제, 당장 한국에서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고아들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들을 후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한국에 가서 이들을 도울 지원자 모집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강연회는 평화롭고 행복에 젖어 있던 홀트 가족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날 저녁 해리 홀트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그의 아내 버다 홀트는 증언한다.

 

“피어스 박사는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서 좋은 옷을 입고 배부르게 지내며, 크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우리를 보고 경멸을 느꼈을 것이오. (중략) 나는 피어스 박사 앞에서 치욕감을 느끼면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의 행적을 심판하실 때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소.”

 

1955년 3월, 봄이었다. 해리 홀트는 입양에 대한 깊은 고민을 끝내고 4월 15일 부인에게 입양 결심과 한국을 직접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부인 버다 홀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홀트 부부는 그들의 가족의 수와 같은 여덟 명의 한국 혼혈 고아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 계획은 미국 선명회에 편지로 전달되었고 4월 27일 격려 답신과 함께 한국에 파견되어 있는 어빈 라에츠(Irvin Raetz) 씨를 소개받게 되었다.

 

한국으로 오는 도중 잠깐 머무르게 된 일본의 도쿄에서 해리 홀트는 이사야서 43장 5-7절의 말씀을 읽고 무한한 용기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내 자손을 동방으로부터 오게 하며 서방으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른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1955년 6월 3일 마침내 해리 홀트는 처음으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입양을 할 아이들을 찾으면서 한국의 현실, 특히 아이들이 처한 혹독한 환경을 목격하고 깊은 슬픔과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입양하게 될 8명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선택’되지 못한 많은 아이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강한 의욕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해리 홀트가 입양사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문제는 당시 한 가정에 두 명으로 입양을 제한한 ‘피난민 구호법’이었다. 다행히 7월 24일 해리 홀트와 아홉 명의 입양아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려 오레곤 주의 여러 곳에서 입양에 관한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마침내 7월 31일 하원에서 이를 개정하는 법안이 통과된 데 이어 8월 12일 미국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모든 법적 문제가 완결되었다.

 

마침내 1955년 10월 12일 해리 홀트는 입양할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였다. 이들의 도착은 미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1955년 12월 21일, 해리 홀트는 입양에 관한 고민을 거듭하던 중 뉴버거(Neuberger) 상원의원에게 대리입양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대리입양이란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직접 가지 않고 전문 입양 대행기관을 통해 입양하는 것인데, 가능하다는 답을 받게 되었다. 결국 ‘홀트씨해외양자회’를 설립하기로하고 본격적인 입양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입양사업이 본격화되자 홀트 부부는 1956년 3월 중순 전담 변호사인 롬바드(Lombard) 씨에게 미국에 입양기관을 설립하는 방법을 문의하였다. 홀트 가족은 그 동안 많은 기부금을 선명회에 보냈으나 입양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세금공제를 위해 정식법인을 설립하여 많은 기부금을 유치할 필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해리 홀트는 1956년 10월 12일 ‘고아재단기금(The Orphan's Foundation Fund)’을 설립하였다. 오레곤 주의 승인으로 설립된 이 법인은 1962년 12월 정식 입양기관 인증서를 받고 ‘홀트 양자회(Holt Adoption Program, Inc.)’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74년에는 ‘홀트 국제아동기금(Holt International Children's Fund, Inc.)’으로, 1975년에는 ‘홀트 국제아동복지회(Holt International Children's Services, Inc.)’로 개칭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1956년 홀트씨해외양자회는 입양사업을 시작한 첫 해에 모두 256명의 아동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었다. 해리 홀트는 이런 모든 일을 진행하면서 그 영예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해리 홀트는 다음과 같이 편지에 기록하였다.

 

이 일을 하는 우리에게 여러분들이 많은 편지를 통해서 칭찬을 해 주시는데 여러분들께서 꼭 알아주셔야 할 것은 이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시작하셔서 주님이 하고 계신 것입니다. 칭찬받아야 할 분은 바로 그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한국의 고아들을 먹이시고 돌보시기 위해 수 년 동안 밥 피어스 박사를 쓰셨고, 혼혈아들을 한국으로부터 후송하기 위해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기도와 일로 도왔습니다. 주님께서 그 마지막 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러분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마치 이 일을 우리가 하는 것으로 알고 그 영예를 우리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 118장 23절의 말씀을 여기에 인용하여 진실을 전하는 바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해리 홀트는 1957년 7월 처음으로 미국 입양가족들이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야유회는 7월 23일에 오레곤주 크레스웰 홀트가에서 열렸는데 캘리포니아, 아이오와, 미시간, 오레곤, 워싱턴, 아이다호 등 여러 주에서 500여 명의 입양가족이 참석하여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야유회는 이후 매년 정례적으로 개최되어 아이들이 동질감을 나누고 먼 이국에서나마 한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부모들에게는 서로를 격려하고 아이들을 기르는데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의미는 이 행사가 단순한 야유회가 아닌, 입양아들과 입양 부모들에 대한 사후 관리 프로그램의 출발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한국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일이 점차 규모가 커져가자 1958년 3월부터 해리 홀트는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새로운 땅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5월 중순, 해리 홀트는 당시 서울 교외였던 녹번리 야산 중턱에 3,000여 평의 땅을 매입하여 당시로는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고아원을 건립하였다.

 

해리 홀트는 1959년 11월 양부모와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세한 사업내용과 홀트양자회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격월간 소식지 ‘뉴스레터’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반드시 기부금과 지출현황을 투명하게 관리, 공개하여 기부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감사함으로써 ‘홀트양자회’의 신뢰를 높여 더 많은 후원자를 발굴하는 토대가 되었다.

 

한편 해리 홀트는 1958년부터 유럽지역에서 입양사업을 시작하기도 하였고, 1959년에는 중남미 파라과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한국 고아들 중 성인이 된 이들의 생업을 위해 이민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역에 대한 꿈은 그의 생전에 채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사후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다.

 

1961년이 되자 해리 홀트는 고아들과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알아보아야만 했다. 아이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 400명 이상이 되자 기존의 수용시설로는 포화상태가 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현실적으로 입양이 불가능한 연장혼혈아동과 장애 아동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962년 1월 29일 농림부로부터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 일대의 임야 6만평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아 새로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1963년까지 이어진 공사로 건물 40개가 새로 들어서게 되었다. 홀트씨해외양자회 가족들이 꿈과 희망을 나눌 새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후 해리 홀트는 기금의 부족으로 녹번동의 시설을 매각하면서도 한국의 고아들과 장애아동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1961년 11월 29일부터 녹번리에 학교를 설립하여 고아들과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는 녹번리 시설의 매각 이후에도 일산에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해리 홀트는 1964년 1월부터는 정신지체아동을 가르치는 특수교육을 실시하면서 특수교육 분야에 있어 선구적인 장을 열었다.

 

1964년 4월 26일, 15명의 해리 홀트 친구들과 대리입양을 할 수 없는 미국이 여러 주에서 서른 두 쌍의 입양부모들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전세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해리 홀트는 이들을 마중하여 입양수속을 도왔으며 미국 대사관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하고 입양부모들을 안내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틀 뒤인 28일 해리 홀트는 서울 시립병원에서 두 명의 아이를 일산원의 숙소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마침내 영원히 쓰러지게 되었다.

 

홀트의 부인 버다 홀트는 깊은 슬픔 앞에서도 강인하고 의연했으며, 사랑하는 딸 완다를 하나님에게 먼저 보냈을 때처럼 그 순간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신심으로 이겨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원방에서 내 자녀들을 오게 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이 순간을 기록하였다.

 

얼마나 기쁜 만남이었을까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큰 은혜였을까요? 나는 그가 하나님의 귀한 얼굴을 마주보는 기쁨 속에 빠져 있을 황홀한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는 그 곳에서 먼저 간 그의 부친, 나의 부모, 우리들의 조부모, 완다와 어린 쥬디, 폴 데이비스를 만나고 나중에는 우리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해리 홀트의 장례식은 그가 숨을 거둔 날로부터 3일 후인 1964년 5월 1일 금요일에 일산원 완다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전보를 접한 부인 버다 홀트와 동생인 필립 홀트가 미국에서 급히 입국했으며, 일산원의 모든 아이들, 십대 보조원과 직원들, 마을 사람들, 입양을 위해 입국한 양부모들, 한국의 국무총리를 비롯한 많은 정부 관리들이 참석하였다. 해리 홀트의 묘는 일산원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았으며, 후일 2000년 부인 버다 홀트 역시 임종 후 이곳에 안장되게 된다.

 

일산원에 있는 홀트씨 부부 묘지

 

일산원에 있는 홀트씨 부부 묘지

1964년 5월 한국정부는 해리 홀트의 헌신적인 봉사와 아이 사랑, 한국 사회복지사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부인 버다 홀트 여사가 대신 수상하였다. 한편 미국의 홀트양자회에서는 해리 홀트의 한국 활동과 일생을 그린 ‘한국의 유산’을 제작하여 그의 삶을 기리고 그 뜻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해리 홀트는 이렇게 그가 손수 일군 일산원의 한 가운데에 그가 거두고 사랑했던 아이들 곁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그는 죽어서도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가정도 없이 두렵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큰 별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이제는 함께 고인이 된 부인 버다 홀트와 나란히 잠들어 있는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이 땅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에게 내린 이사야서 43장 5-6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내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중략)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기자명 최재건 객원논설위원 입력 2022.08.01 10:14

 

전쟁고아와 부녀자 구호사업에 힘쓴

창주(滄柱) 현동완(玄東完) 선생

 

현동완(玄東完) 선생은 1899년 6월 12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창주(滄柱)로서 그는 1917년 조선중앙YMCA 학관을 졸업한 뒤, 1918년부터 YMCA 간사로 피택되어 소년부와 체육부 간사, YMCA 연맹 주임간사, 영창학교(英彰․Y학관) 교장, 그리고 서울YMCA 총무를 지내는 등 거의 전 생애를 YMCA와 더불어 산 Y멘이다.

 

그의 가문은 YMCA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큰아버지인 현흥택(玄興澤) 씨는 구한말엔 군인으로서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 씨의 수행원으로 미국과 구라파 여행을 했으며, 1896년에 독립협회가 조직될 때에는 정령(正領)의 신분으로 창설에 많은 활약을 했다. 특히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는 자문위원직을 맡았고 1907년에 회관을 지을 때에는 대지 4백 평(현 서울YMCA 대지의 일부)을 기증함으로써 궁지에 빠져있었던 회관건축사업을 성공리에 추진시켰다.

 

뿐만 아니라 현흥택 씨의 아들 동식(東軾), 동철(東轍) 등도 YMCA 위원으로서 초창기에 YMCA 육성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렇게 현씨 가문이 YMCA 운동에 많은 참여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창주 선생은 일생을 Y를 위해 헌신했다고 할 수 있다.

 

창주 선생은 YMCA 초창기에 소년부와 체육부 사업에 많은 공헌을 했다. 서울YMCA는 1916년부터 실내체육관을 열게 됐는데, 창주 선생은 농구선수 겸 감독원으로서 일본 원정을 하였고 그가 이끄는 Y농구팀은 전국을 누비며 명성을 떨쳤다. 또한 1938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YMCA가 폐쇄상태에 있었던 어려운 시기에는 YMCA 연맹 주임간사가 되어 8.15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와 6.25전란으로 인한 회관상실, 부산피난과 환도 이후의 극심한 혼란기 등을 겪으면서 YMCA를 사수하는 데 힘썼다.

 

특히 6.25전란 이후에 가장 긴급히 요청된 전쟁고아와 부녀자들을 위한 구호사업에 주력하여 많은 공헌을 했다. 1952년에는 삼동부녀회관(三同婦女會館)을 설립하여 전쟁 미망인과 윤락여성을 구호하였고 1953년에는 100만평이 넘는 난지도 전부를 매입하여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하였다. 삼동소년촌은 소년들의 자치단체였는데 지금도 YMCA 사업의 하나로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그 당시 창주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보건사회부 장관의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을 하고 YMCA 총무라기 보다는 「고아의 아버지」로서 전쟁고아 구호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가재건에도 많은 이바지를 했다. 그는 1949년에 한국산악회장을 역임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일정 때 YMCA 산악회원들을 이끌고 백두산 정상에 등정한데서 온 결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브라질, 멕시코 등 남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이민사업을 추진시켰는데, 그 성과는 별로 없었지만 당시 국제외교관계가 극히 어려운 때에 이러한 포부를 품고 시찰여행을 했다는 것에서 그의 애국심을 볼 수 있다.

 

창주 선생은 전형적인 선비며 풍자가로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를 조금 짧게 만들어 Y 직원들의 사무복으로 사용하게 했다. 양복바지 위에다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니까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적극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창주 선생은 『多白衣考見大慈』란 글을 써주면서 백의민족의 긍지와 함께 「배기고 견디자」는 뜻으로 직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자칭 애국자들에게 대해서는 『憂巨志國 眼目高 建邦之計 養淡輩』란 한시로 풍자를 했다. 이시는 「큰 뜻으로 나라를 걱정함에 안목이 높구나, 나라세움의 계획으로 많은 후배를 기르는구나」의 뜻으로 풀이되지만 사실은 「애국자를 자처하는 자가 우거지국은 안먹고 건방지게 양담배만 피우는가」하는 풍자였던 것이다.

 

창주 선생은 1963년 10월 25일 삼동소년촌에서 고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난지도(蘭芝島)

 

상암동 영역 중 난지도 지역은 원래는 한성부 성저십리가 아닌 고양군 하도면 덕은리(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의 일부였으나 1911년에 경성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고양군 소속이 되었다. 1949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 상암동 문서 참조.

 

이곳은 유명한 신혼여행지로 이름을 날릴 만큼 풍경이 아름다운 섬이었다.[1] 섬의 이름도 난초(蘭草)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난지도였다.

 

보이스타운[편집]

1950년대에 목사이면서 보이스카우트 지도자인 황광은(1922~1970)이 6.25 전쟁 때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2]을 난지도에 모아서 보이스타운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1951년에 만들어서 1955년까지 존속했는데[3], 전쟁으로 서울 시내에 넘치는 불량청소년(과 불량 청소년이 될 위험이 있는 아이들)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4]데다가 강 한가운데에 있어 자연 감옥이나 다름없는 섬[5]에 한 데 모아놓았으니 서울시 입장에서도 땡큐였다. 거기에다가 보이스타운의 또다른 이름을 소년공화국으로 지은 것처럼 민주시민교육도 시켜주니, 나중에는 서울시에서 특별시 안의 특별시로 인정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