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자주 보는 금골산에 다녀왔다. 진도에 내러와서 부모님과 친지들과 함께 올라 감사기도를 했고 이현필 선생이 해남에 들려 진도에 오셨을 때 한창 가뭄이 극심할 때인데 식구들과 금골산에 오라 기도를 드리고 서둘러 내려오자마자 비가 내렸는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올렸다. 금골산 바로 아래에는 금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윤영윤 선생이 1974년도에 첫 부임하여 1977년까지 있으면서 둔전교회에서 동광원 전도사 오복희 어머니를 만나 동광원에 들어오게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윤영윤(1949~2001)
복은순은 윤영윤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1974년 계명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진도로 배치를 받아서 갔는데 윤영윤 선생이 진도에서 초등학교교사를 하면서 우리 집(진도분원)에 예배를 드리러 오면 일도 도와주고 하셨는데 그때 우리는 주일날만 되면 식사 준비에 고심을 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먹어도 되지만 윤영윤 선생은 외부인이고 학교 선생님이라 반찬에 신경을 써야했는데 그것이 제일 싫었다.” 윤영윤 선생은 진도에서 초등학교교사를 하면서 오복희 전도사의 전도를 받아 진도 분원을 왕래하다가 1977년 장성으로 발령을 받자, 광주 귀일원 남자 환자숙소 옆에 집을 마련하고 장성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남반을 도와주었다. 1980년 정인세 원장이 남원 대산면에 동광원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동광원 공동체 가족의 일원이 되어 정원장을 도와 동광원과 귀일원에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어른들을 존경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면서 동광원 남반의 기틀을 다졌고 퇴직금으로 논 두마지기를 헌납했는데 현재에도 잘 이용되고 있다.
윤영윤은 1983년 귀일원 남자 환자들의 주거개선 사업을 위해 소화자매원으로부터 조봉동땅을 구입, 건물을 신축할 때에 숙직과 감독을 하면서 튼튼한 건물을 짓는데 일조하였다. 1983년부터 광주와 남원, 화순, 계화도, 진도, 곡성, 계명산 등 귀일원과 동광원의 일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정원장의 지시를 따랐다. 정원장과 김은연 총무를 돕다가 두 분이 돌아기신 뒤에는 귀일원의 상임이사로 재산과 인적관리를 맡아했다.
윤영윤은 신앙이 좋고 성품이 인자해 한번 만난 사람은 그를 잊지 못하고 다시 찾곤 하였다. 윤영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현필을 사모하게 되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귀일원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윤영윤은 귀일원의 장애 가족들에게는 아버지요, 선생님이요, 삼촌이요, 오빠로서 자상하고 그 마음이 따뜻하여 남의 아픔을 돌보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존댓말을 하였다. 특히 그는 동광원 공동체 자매들의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젊은 날의 방황을 경청해주는 등 공동체 자매들에게 막내 동생처럼 순종하였다. 윤영윤은 귀일원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자료수집 하는 과정에서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동광원 자매들에게 핀잔도 많이 들었는데 그 많은 사진들이 정리도 되지 못한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귀일원에도 목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외부적으로 절실히 느낄 때에 윤영윤은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어 귀일원이 명실공히 신앙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정인세원장이 돌아가신 뒤 전도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귀일원과 동광원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저녁에는 신학공부를 하던 중, 2001년 남원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하늘나라로 떠났다. 윤선생이 돌아가신 후, 다니던 대학에서 최우수(올A+)성적표가 도착하여 주위에 안타까움을 더했고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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