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처서 전전날 : 참 평화

mamuli0 2023. 8. 21. 07:43

 내일이 칠석 모래가 처서다. 기온이 조금 내려 갔지만 아직도 덥다. 뜨거운 여름에 심은 당근이 잘 자라고 있다. 새벽에 농자재가 두차 도착했다. 어제 큰손녀에게서 잃어버린 짐을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과 사진 몇장을 받았다. 당종려나무에 올라간 능소화가 만개했다.

 

 

 

 

참 평화

1999. 2. 20. 오북환 장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자라는 인정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된 평화, 참된 평화라 했으니까 참되지 못한 평화도 있단 말이야. 그럼 인자 참된 평화와 참되지 못한 평화가 어떻게 다르냐 이거야. 참된 평화.

 

누가복음12장49절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이 평화가 아니지요? 오히려 불을 지르니까 더 불화를 일으키러 왔단 말이야. 이 참된 평화는 불이 탄 후에 나와, 불이 탄 후에.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불이 이미 붙어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그래 이건 육적 평화가 아니란 말입니다. 육적으로는 불이나요, 불이. 게 이 참된 평화와 대조를 합니다. 우리 감정은 육적 평화를 원하거든요. 성령을 통한 평화가 아니고 감정이 원하는 평화만을 원한단 말이야. 긍게 그것은 반대란 말이야. 참된 평화와 이 세상 우리가 바라는 평화가 반대여.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불이 이미 붙어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내 앞에는 무서운 세례가 가로놓여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내 마음이 오죽 답답하겠느냐?’ 이 감정은 거 스린 평화란 말이에요.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냔 말이야. 세상 평화가 아니에요. 이 세상 평화와 참된 평화가 반대라니까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믿어진 사람만 감당한단 말이야. 하느님의 사랑이 반대란 거, 육적 사랑과 반대란 것, 영적 사랑, 육적 평화 영적 평화, 육적 사랑 영적 사랑 반대란 말이에요. 그러니 아무라도 믿겠어요?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말이야.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분열. ‘이제부터 한 집안 식구 중에서 셋이 나를 사랑하며 둘은 반대할 것이다.’

다섯이라면 셋은 예수님이 원하신 길 영적으로 원하고, 둘은 육적으로 원한다, 이거야. 반대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생길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따르겠다고 하면 아들이 반대할 것이고 아들이 나를 따르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반대한다. 왜 그럴까요? 나를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믿을 때에는 서로 반목할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싸운다고요. 그러면 자기 마음 안에서의 자기마음 안에도.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 마음 안에 두 마음 있으니까, 땅에도 육적으로도 잘살고 싶고 영적으로도 잘살아야겠고 두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 자기 안에서 싸운 게 가족끼리 싸우고 또 친구끼리 싸우고 싸워요 늘, 반대를 하고. 그래 이건 누가 나쁘다고 해야 돼, 각자 개인에게 있단 말이야.

 

 

마태복음10장34절

좀 같은데 조금 다르지요. 칼을 주러 왔다 여기는, 칼은 인자 싸운단 말이잖아? 죽이고 서로.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말이야. 칼 가지면 죽인다고요, 죽여. 주려고 왔다. 아까 저기는 불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을 그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과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이상하지 않아요? 아 평화를 이루러 오셨는데 어찌 그럴까나?

‘사람의 원수는 바로 자기 집안에 있다.’ 또 사람의 원수는 자기 한 개인 안에 먹는 데 있다. 식구가 입 구(口)자거든. 식구, 의식주에 매여 버린다, 말이야. 영혼이 끌려가요, 약간. 땅의 것에 끌려간다고, 육정에 끌려. 만일 너희가 나보다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면 너희는 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럼 어머니를 택한 사람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택한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보다 더 사랑한다고. 자기를 사랑하니까 모두 자기 몸에 맞는 사람 가족, 또 친구도 맞는 사람. 완전히 이건 세계가 다르단 말이에요. 그럼 아까 5장 들었고요.

믿음만이 이제 바른 길이라 믿음. 믿음은 나는 없고 내 안에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라야 바로 간단 말이야. 그리스도만이 참 하느님이시니까, 하느님이 몸을 입은 이가 그리스도이시니까, 예수. 믿음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자라야 인정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참다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다운 평화야. 영적이란 말입니다, 영적. 야, 영적이란 건 또 무엇인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삼위의 요구란 말이야. 그럼 우리 안에도 이미 두 싸움이 있단 말입니다. 또 봐 야죠. 두 가지 있어요. 우리 안에요.

 

 

갈라디아5장16-17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자 성령은 어떻게, 성령이 인도하는지 사탄이 인도하는지 어떻게 분간하는가? 말이야.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긍게 성령 따라만 가면 정확하단 말이야. 근데 성령의 계시인지 사탄의 계시인지 분간이 안 간다 말이야. 성령의 계시는 감정에 거스르는 거고, 감정엔 안 맞고 사탄의 계시는 감정에 딱 맞죠. 그래 누구나 그거를 따라가요. 먹고 입고 뭐든지 향락부리고, 이 육정에 좋은 것이 그걸 그러니까 사탄의 종을 못 벗어난다. 육정이 좋은 대로 끌려간다. 육정에 끌려 살면서도 나는 잘 믿는다. 그리 생각하거든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이건 틀림없다 말이야.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할지 모른단 말이야.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이 자꾸 자기 생각대로만 해버린다고, 성령께 묻지도 않고. 또 자기 생각을 또 사람한테 물어보고. 자기가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아요? 다른 사람은 사탄에 좋을 대로 육에 좋을 대로 가르쳐주지, 영에 좋을 대로 가르쳐주겠어요? 똑같은데.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여러분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것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근데 육정을 좋아하니까 성령은 거절해버린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바라신 것과 정반대란 말이야, 성령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과 내 육정이 원하는 것과 반대에요. 이 육적 평화를 원한다말이야.

 

 

성령이 요구한 대로 하면 영적 평화가 될 텐데 육적 요구대로 따라가니까 무장, 무장 자유도 없고. 괴롭고 무엇을 해도 괴롭고. 만족하다 하는 게 없어요. 조금 만족하다 그러면 또 반대가 나와요, 육정은. 그래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아요? 육정에 맞는 것은 잠깐 좋으면 나쁜 것을 듬뿍 많이 받는다고. 긍게 영적 평화는 변하지 않지만 육적 평화는 쉬이 갖고 없어진다. 좋았던 것도 나쁨이 있고 이 항상 불화가 있지. 만족이 없다 이거야 정반대니까. 정반대의 악한 일이 하기를 좋아한다, 말이야. 악하다고 생각도 안 하고 해버려, 모르고. 악한지 선인지 모르고 하는 거야. 분별이 없으니까, 깜깜하니까. 악한 일 하기를 좋아합니다. 인자 성령이 보기에 악하지, 자기 그때는 악한지 모른다고. 아주 가장 선인줄 알고 하지요. 이를 좋아하는 본성이,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살며 선한 일을 하고자 또 성령이 되어야 선한지 악한지가 분별을 하지, 이 감정으론 분별을 못 한다 말이야. 선이 뭐인지 악함이 뭐인지 그저 내키는 대로 움직여버리는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본성의 욕망과는 정반대라니까. 육적 평화와 영적 평화, 정반대란 말이야. 영적 평화는 외모로는 불행같이 보여도 마음으로는. 예를 들면요, 부잣집의 대문간에 있는 나사로는 육적으로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없죠. 또 부자는 육적으로는 그렇게 불행을 살 사람이 없단 말이야. 누구나 그걸 좋아해, 부자는. 그런데 마음에 지옥은 모르거든요.

그래 영적으로 만족할 수는 없거든요. 거지는 사람보기에는 아주 불행하고 그냥 제일 기막힌 팔자를 타고났고, 천국에 갈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근데 본인은 비유지만 본인은 천국이란 말이야. 대문간이 천국이야. 그 믿음이 있으니까, 본문에는 믿음이 있단 말 없어요.

 

 

누가복음11장 그런데 이 갈라디아 3장6-7절 보면 있단 말이야.

믿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자손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숨 끊어지자 아브라함 품으로 가잖아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대행하는 거니까. 긍게 믿음의 눈으로 보지, 육체의 눈으론 모른다고. 우리는 성령께서 바라는 길과는 정반대로 악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 말이야.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살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본성의 욕망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힘이 있단 말이야, 두 힘. 이 보통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것도 모르죠, 당연히. 성령을 따르고 싶은 사람이 인자 발견하지, 그러면 저기 가는 데가 좋은 길인 줄 알거든요.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힘, 힘은 서로 우리를 맘대로 조종하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어요, 둘이. 사탄에 끌리는 마음, 성령에 따르고 싶은 마음도 욕심도 있어요. 인자 어느 쪽이 이기냐? 그거에요 어느 쪽이 이기냐? 늘 싸움하는데 어느 쪽이 이기냐? 성령 따라가야 인자 길이 생기고 평화가 있는 거고, 육적대로 해봤자 그 결과는 항상 결론은 뭐였느냐? 죽겠다, 하고 그뿐이야. 살겠다는 없어. 성령 따라서 살아야만 그 길이 있지 않는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으니까 두 힘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 자유입니다, 우리 자유. 육체 따라 살 수 있는 따로 또 자유도 할 수 있고 또 성령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갈 텐데 그것을 거스릴 자유가 있단 말이야.

 

 

2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가장 높은 특권이라 그래. 특권을 가진 자리에 오르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총의 역사. 이게 우리는 이 은총이란 말은 성령이고 하느님이고 그리스도란 말이야, 삼위. 여기에 전적으로 믿어야지, 자기 지혜로 벗어나거나 따라갈 수도 없고. 하느님의 능력, 사랑을 믿어. 은총의 능력에 맡겨야 하네.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와 곤경, 곤란, 역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것들이 가져다 줄 좋은 결과를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 단련, 연단. 시련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한단 말이야 인내. 자꾸 그런 역경을 부디 치면서 참고 또 참는 힘을 얻어요. 인내를 배운다. 인내를 배우게 하고 인내는 강인함을 길러준단 말이야. 자꾸 용기가 생겨요. 점점 따라가면 용기가 생긴다. 강인함을 길러주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차츰 차츰 인자 성령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면서 그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야지 감정에 맡겨 버리는 건, 자꾸 반대니까. 그렇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점점 이리 체험을 하면은 조그마한 것을 이기면, 더 큰 시련이 인자 닥쳐도 자신이 있단 말이에요. 이래 싸움을 해야 돼. 이게 선한 싸움이야. 괜히 저쪽 있는 사람하고 싸우지 말고 내 스스로 내 감정과 양심하고 싸우라 그래. 양심에 성령을 입어서 싸우라 해.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일이,

 

 

감정으로 맞지 않는 일을 이기면 그리스도에 유익하다는 말이야. 감정으로 맞는 일은 속아버리고 악마의 지배를 받아요. 이 감정을 거스른 것을 믿음으로 자꾸 이겨나가야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가, 자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된단 거예요. 사랑하고 계신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긍게 성령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시니까, 주신 사랑을 받아야 돼요. 받으면 인자 길이 환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자기 생각으로는 안 된단 말이야. 받으려면 차츰차츰 정신을 그 쪽으로 기우려야지, 만날 그냥 내키는 대로 살면 안 된다 그거는 시간낭비라.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 속에 채워주신다. 성령도 사랑인데 또 하느님의 사랑을 또 인자. 그리스도도 사랑이고 하느님도 사랑이고 성령도 사랑인데 같이 사랑을 마음속에 채워주신다. 가슴 속에 채워주시는 까닭에 우리는 따뜻한 사랑을 어디에서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할 길이 없는 궁지에 빠져 있을 때, 궁지. 절망. 자기 힘으론 도저히 헤어날 수 없어. 아 인자 죽었다 그래요.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인자 건져주신다 그거에요.

여기 공동번역으로 보면, 6절 다 보고. ‘우리가 피할 길이 없는 궁지에 빠져있던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편안할 때는 아 문제가 없으니 요구도 안 하고, 웃을 수도 없고 자 나 살려 주십시오 보여드려야 되는데 아 편하게 사니까 뭐 그게 이제 자기 멋대로 하는 겁니다. 길이 없다 이거야. 딱 숨이 막혀지고 죽겠다 할 때, 막 살 수 없을 때, 손들고 부르짖어야 한다 이거야. 여기는 그렇게 돼 있다 말이야. 완전히 절망에 빠졌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당신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18~19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절망 속에, 육적으론 절망이야. 인자 자녀도 둘 수 없어요. 나이가 많이, 백세가 되어버리니까. 세상 육적인 희망은 절망이란 말이야. 거기서 인자 영적인 희망이, 영적 아들이지 인자.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수보다 더 많다는 것은 영적을 말한 거지, 육적 아들이 그렇게 많겠어요? 이 육적으로는 절망이란 말이야. 세상 끝이란 말이야.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세에 가까워서 이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가 없어요.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5장5~6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실망이 희망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궁지에 몰렸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이 개인 개인 인자 나타날 때란 말이야. 절망에 빠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요. 그때는 인자 막 부르짖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것 아닙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뭐 예배 보면 주여, 주여 하지, 실상은 간절히 부르짖지 않는단 말이야. 편하게 잘사니까. 그러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는 회개를 못 하니까 쫓아낸 거예요. 너무 환경이 좋으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거든요. 아쉬운 것이 없어.

쫓겨나서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고생을 해봐야 돼요. 그래서 쫓아낸 거예요 영혼을 건지려니까. 아 몸만 생각하면 거 좋지만은.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것이니까요. 자 그러면 또 성경 몇 군데 더 생각해 보면.

 

 

고린도후서1장7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당하고 있으니 그의 위로도 같이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믿는 우리의 마음이 든든합니다.’

‘형제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리려고 합니다.’ ‘그 환난은 우리의 힘으로,’ 절망이란 말이에요 속수무책.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어요.

이 감정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견뎌낼 수 없으리만큼 심해서 마침내 우리는 살 희망조차’ 없어요. 아 인자 죽어났다. ‘희망조차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란 거야. 자기를 믿지 말라. 믿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예수의 은총의 힘을 의지한다. 자기 힘으론 인자 살 길이 없어요. 하느님께서는 과연 이렇게 어려운 죽을 고비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내주셨고 앞으로도 건져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앞으로도 건져내주시리라는 희망,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까지. ‘여러분은 기도로써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께서 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장9절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성령의 심부름꾼. 사람을 단죄하는 율법은 정죄하죠, 정죄. 죄를 가리키는 거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죄 없다. ‘무죄 석방하는 일에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한다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법 때의 영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도 영광이 있었는데 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광은 비교가 안 된다. 잠깐 있다 없어지는 거야. 율법은 잠깐, ‘잠깐 있다 없어진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가 있습니다.’ 잠깐 좀 가벼운 고난을 이기기만 하면 영원한 희망을 받는다 그거에요.

 

 

고린도후서4장6절

‘어둠에서 빛이 비쳐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의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로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짓 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육적으로는 절망이에요. 절망 속에서도 영적으로는 실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항상 반대란 말이에요. 육적으로 절망하면 영적으로 희망이고, 육적 희망을 바라면 영적인 게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육적 희망은 잠깐이거든요. 영적은 끝이 없는 거예요. 근데 왜 그렇게 끝이 없지? 어리석게 잠깐인 것을 모른단 말이야. 영원한 것을 모르니 그냥 원치도 안 하고 그거에요. 그것이 자기 인자 영광을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데 있다 말이야. 예수를 믿는 데 있어요. 믿는단 말은 예수란 말이에요, 예수. 자기가 없고 자기가 인제 그리스도란 말이야. 내 생각으로는 해결이 안 돼. 내 생각으로 믿어진 거 아니라고요.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짓 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리라.’ 자꾸 이제 타락한 본성은 절망일 텐데 그 인자 은총에다가 맡겨야 된다는 말이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요.

그럼 은총에 맡기면 은총이 이겨준단 말이야. 그래서 그 내심낙원에 이 말을 설명해놨는데 인체의 본성은, 육정은 음전이라고 음전, 전기 음전. 또 은총은 양전이라 그래요. 음전 양전이 붙어야 써지거든 불이. 똑 떨어지면서 꺼져버리거든. 그런 게 타락한 본성은 붙어야 하니까 은총에, 양전에 붙어야 하니까 은총에다 맡겨야 해. 스스로 해결을 못 하니까. 그럼 인자 은총이 딱 건져준다. 맡기려고 안 하고 내 스스로 해결하려 그런다고. 맡겨야 한다. 본성은 음전이고 은총은 양전이란 말이야. 음양.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다.

 

 

8절.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짓 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은총이니까, 은총에 맡기면 있다고요.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은총의 결과란 말이야.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절

우리는 살아있다 말이야. 영혼까지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어요. 거기서 인자 영적으로 살으니까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생명을 드러내요. ‘이리하여 우리 예수께서는 죽음이 설치고 육의 속에서는 죽음이 설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16절

믿음의 생활.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겉 사람.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겉 사람은 날로, 날로 부패해가요. 하지만 속사람은 인자 자꾸 자라간다. 내적 인간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이야, 육의 고난은 잠시에요.

백년 살아도 잠시, 천년 살아도 잠시, 끝이 있으니까. 만년 살아도 끝이 있어. 인자 영혼은 영적은 끝이 없는 거란 말이야.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게 고난은 잠깐 당하는 것이 영원한 영광으로 바꿔진다니까. 그러면 그렇게 이로울 일이 없는데 왜 잠깐 고난을 안 당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다.

이 영원한 영광은 싫어하는 것이란 말이야. 고난은 잠깐이요 그것만 이기고 나면은 영광은 끝이 없다고.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우리 보이는 것 모두 물질이라, 몸도 보이고 모두 몸에 속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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