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오늘이 음력으로 유월 초하루 : 죄와 은총 2

mamuli0 2023. 7. 18. 10:14

장마가 길게 이어지고 강우량도 많고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인명 피해도 50여명이나 나고 산사태와 농지 유실도 많아 재난지역이 늘어나고 있다.

 

 

죄와 은총 2

1997. 1. 1

로마서74

지난날에는 유대교의 율법이 여러분의 남편이요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었음으로 여러분이 율법과 한 결혼은 무효가 된 셈입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여러분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분과 결혼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맺게 하려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게 하려고 이 결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매여 살 때는 죄 많은 욕망이 아직 우리 안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나 거역하고 죄에 물든 행실, 즉 죽음에 이르는 썩은 열매만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나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이미 죽고 지금은 하느님을 섬기는 참다운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전처럼 정해진 규칙에 무조건 복종하며 살기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과 뜻을 다해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7절인데. 믿음의 법과 육체의 법. 그렇다고 하느님의 율법이 악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죄를 알게 한 것이 율법입니다. 만일 율법이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들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죄, 그 잠복해 있는 악한 욕망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지 못했단 말은 그 악한 욕망이 죄인 줄을 몰랐단 말이야. 당연한 것으로 아는 거여. 그러나 죄는 이러한 욕망이 악한 것이라는 것을 내게 알게 해주면서 내 속에 숨어있는 모든 금지된 욕망. 욕망을 충동시킴으로써 이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습니다. 어길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범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율법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몰랐을 때는 마음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았을 때 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자이며 죽음을 선고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경우에는 생명의 길을 보여줄 것으로 생각했던 선한 율법이 그와 반대로 내게 죽음의 벌을 내려 준 결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가 하느님의 선한 율법을 가지고 나를 속여서 그것으로 나를 죽을 죄인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그 자체는 바르고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임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를 파멸시킨 원인이 나를 파멸시킨 원인이 된 율법이 어떻게 선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를 파멸시킨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실은 죄입니다. 죄가 율법을 사용하여 내게 죽을죄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얼마나 교활하고 악착같고 가증스러운지 아셨을 것입니다. 악한 목적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선한 율법조차 서슴없이 이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습니다. 나는 죄라는 주인에게 노예로 팔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거, 내가 미워하는 것만 저지르고 있습니다. 나는 내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가 어기고 있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나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런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속에 들어있는 나보다 더 힘이 센 죄입니다. 나는 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싶어도 되지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 이거 원인이 뭐냐. 이제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죄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아무리 선하려고 몸부림쳐도 되지도 않고 악한 일을 안 할라고 해도 되 어 버리고. 이런 경험을 해가지고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 그 말입니다. 암만 선할라 그래도 안 돼. 베드로사도가 그랬잖아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했는데 세 번이나 부인해 버렸단 말이여. 그런게 자기 마음을 꼿꼿하게 할라고 했지. 거짓말 한 것이 아니거든요. 인제 그렇게 세 번이나 부인해버리고 나니까 자기를 알았어요. 아 나 이런 것이구나. 이제 도저히 장담 못하겠다. 자기 그때의 자기가 죄인이란 걸아는 것 아니요?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의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요것은 8장에 있는 말씀을 당겨서 말했습니다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요것은 인자 요 725절에가 율법에서 복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길. 다리. 25절이고 이 다리가 잘 되어있냐 못되어있느냐에 따라서 25절을 잘 이해 못하면 복음에 못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25절 다른 성경에 다 대보면요. 요거는 그냥 해방 시켜버렸다 그랬어요. 이건 8장으로 들어갈 문제거든요. 25. 다른 성경하고 다 여럿 요 현대어성경 말고도 다른 성경 다 대조해보십시오. 이 성경만이 그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거여. 24절서 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몸에서 구하리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야 여기다 하다 해석으로 넣으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하여 이것은 삼위의 역사니까 은총은. 오전에 드린 말씀같이. 은총으로 인하여 나 구원을 받았나니. 하느님께 감사할지어다. 그런고로 나는 이성으로써는 깨닫는 마음으로 이성으로써는 하느님의 법률에 내 자신을 바치나 육체로써는 죄의 법률에 내 자신을 바치나이다. 죗값은 사망이니까 십자가에 내놓는단 말이여. 십자가에.

 

그럼 인자 8장에 인자 8장은 복음이지요.

성령의 역사니까. 82절까지 봐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육체를 따라 행치 아니하는 자는 거기 조금 해석이 들어있어요. 육체를 따라. 육의 영벌 영원한 형벌 영벌 받은 것이 없나니 대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을 주는 성신의 율법은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법률에서 해방하였나이다. 사람이 할 일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이고 하느님이 하실 일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하느님 편에서만 역사해도 소용없어요. 역사할 수가 없죠. 사람 편에서 먼저 해야 되어요. 십자가에 내놔야 되어요. 인간에게 자유를 줬기 때문에 자유로 내놓으려면 놓고 내놓기 싫으면 안 놓는단 말이여. 자유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 편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 내놓으면 죽음에다 내놓으면 그것은 인자 은총의 역사가 있다. 하느님의 성령은 은총이시니까. 그것을. 고통의 신비 여러분 다 있을 것인데 받아 놓으시려면 한 번도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보았겠어? 3에 가서 고통에 대한 지식. 하느님은 본성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하느님 이름은 사랑이에요. 사랑인데 거룩한 사랑이란 말이여.

 

그러므로 사랑이 없고 사랑을 싫어하는 자와는 당신의 전능으로도 도저히 결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이해도 못하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사랑의 필요도 느끼지 않는 영혼에게는 하느님이 아무리 전능하셔도 구원할 기량이 없어요. 그래서 전능하신 하느님이 한가지지만은 세 가지 불가능이 있다고 해요. 어떤 목사님이 그걸 지적했어요. 세 가지 뭐냐? 하느님 자신을 없앨 수가 없어요. 그것이 첫째고, 둘째는 회개안한 영혼을 구원시킬 수 없어요. 또 마찬가지지만은 회개하는 영혼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요. 이거이 세 가지 불가능이란 말이여. 그러니까는 하느님은 그 본능에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고 사랑을 싫어하는 자와는 당신의 전능으로도 도저히 결합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어떤 인간을 사랑하고자하셔도 하시더라도 그가 주의 사랑을 거절하면 별 도리가 없어요. 도리가 없이 하느님은 짝사랑만해요. 하느님 편에서만 해요. 짝사랑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편의 협력이 있어야 해요. 내놔야 돼요. 회개했단 말이여. 협력과 공동작업. 같이 일하는 것이지. ‘그와 나책에도 그 말이 많이 있어요.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여. 하라 했으니까 순종해야 돼요. 순종안한데 하느님이 역사할 순 없어요. 공동 작업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한편 인간은 자원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끊고 떠났기 때문에 자원해서. 육적자유란 말이여. 불순종이란 말이여. 자기의 힘만으로는 결코 그 사랑을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은총이 있어야 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거저 주셨기 때문에 또다시 거저 주시기 전에는 받을 수가 없어요. 이거는 죄하고 바꿔요, 죄하고. 죄를 깨닫는 영혼에게 주게 되어있단 말이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힘이 없다면, 은총. 없다면 은총은 죄인에게 주는 것이니까. 죄인이 회개를 해야 은총을 받지요. 이끄시는 힘이 없다면 현실의 고통은 사람에게 지상생활의 허무까지 깨달아요. 아 허무하다. 내가 그거이 극도로 달하면 자살해요. 그것밖에 없어요. 끝이 없어요. 은총을 모르니까.

사람에게 지상생활의 허무를 깨닫게 깨닫게는 만들어주지만 그것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은총이라야 되죠.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불멸한 사랑만이 구세주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다시 당신께로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 하셨을 때 당신의 정의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를 세워 대신 상함을 받음으로써 중보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본래 아무것도 가치가 없던 인간의 고통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에 위대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속은 세 가지 요소로 그 실현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고통. 바로 이것입니다. 세 가지요. 사랑 정의 고통, 정의라는 목수가 고통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걸작 품을 완성시켰다 하겠습니다. 정의라는 목수. 고통이라는 재료, 재료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걸작 품을 완성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그것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24.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우리의 협력을 면제시켜주지 않습니다. 우리도 협력해야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져야 돼. 각기 자기 십자가가 있단 말이야. 면죄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조금 더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통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화해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분의 고통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나누는 자만이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 건도의 결과는 친히 짊어지나 여 실제적으로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런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그분 혼자서만 고통을 겪도록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협력을 호소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 사업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요구하시는 한편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통도 함께 나누어 받을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피라도 쏟아 부을 것입니다.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빌립보21718절되죠.

이런 말은 우리의 시야를 놀랍게 넓혀주고 있습니다. 고통은 이제 그것이 직접적인 벌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 사업에 참가하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은 구속 사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높이 달리면 모든 사람을 다 내게로 이끌겠다 하고 하셨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고통으로 이끌겠다는 뜻입니다. 뜻도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길이요 생명이요 라고 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 위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요만치 봐두고요. 요기서 조금 봅니다.

아버지께 바치나이다.’ 는 책에 29페이지인데.

이 마음의 사랑을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마음으로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것은 인간이었다. 인간은 사랑키로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키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이것은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그 모든 선지자를 통해서 하늘에서 교육을 시켜 봐도 도저히 한사람도 회개한 사람이 없다 이거여. 그 보낸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려요. 인자 할 수 없다. 독생자 하나 보내가지고 죄를 다 용서할 길 밖에 없다. 용서하고 데려와야지. 그대로 돌이키려니 안 된단 말이야.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보내버렸어요. 인간의 죄를 다 대속하라고 담당하라고. 인간을 편드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가인이 저 무서운 살인을 보냈어. 형이 한 뱃속에서 나온 아우를 죽였지 않느냐? 그렇게 큰 죄를 지었어도 가인편이라고 하느님은. 죄인편이에요. 범한 뒤 복수를 당할까봐 두려워할 때 하느님은 가인의 편을 드셨다. 가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의 벌을 내리리라.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여호와께서는 누가 가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었어요. 창세기415절에요.

 

하느님은 죄인의 편이시다. 죄인인 인간을 편드시는 까닭이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기대를 꺾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계획을 어길 수 없다 말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터 라도 하느님은 그 계획대로 다 진행한단 말이여. 그 죄를 다 잘 이용해가지고 영혼을 불러들인단 말이여. 죄가 없으면 오지를 않잖아요. 인간이 돌아오리라. 회심하리라고 잘못을 깨달으리라고 아셨어요. 멀리멀리 본다. 시간이 지나 죄가 극도로 드러난 사람은 이제 됐다. 이제 희망이 있다. 돌아온다. 죄가 아직 안 드러난 사람은 언제 돌아올지 몰라. 탕자 형. 아우는 이미 돌아왔는데 형은 언제 돌아 올려나? 까마득하다. 죄를 몰라요. 아우는 돌아왔어. 죄를 버리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임은 끝까지 꺾여 지지 않는 것이다. 그 어른은 끝까지 기다리실 줄 아신다. 회개하도록.

 

베드로서39절 보면 한 영혼도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래오래 기다린단 말이여. 회개하기를. 어째 당신 묘셔 가지고 당신 아들이라고 해 놓고는 멸망 시켜불라면 뭐할라고 그런 무능한 하느님을 믿어요. 그 어른은 끝까지 기다릴 줄 아신다.

 

인간에게 있는 부정적인 것이 적극적인 것으로 바뀐다. 미숙함이 성숙에 이르고 죄는 은총으로, 완고는 온유로, 어둠은 빛으로 가출 출가는 이제 귀가한다. 탕자는 출가했으니까 돌아오잖아요? 형은 출가를 안 하니까 돌아오지 않고 죄인이 되었어요. 순종 안했어요. 가출은 귀가로, 잔악은 눈물로, 죄를 깨달을 거면 눈물로고. 배반은 당신께 안긴단 말이여. 배반. 안기는 포옹. 포옹으로 바뀔 것을 아신다. 방탕한 아들이 아들의 이야기,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 각 사람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인류를 지금 죄인과 아직 회개한 사람과 회개안한 사람과의 예를 들어 비유 얘기를 한 것입니다. 실제 역사는 아니에요. 우리 인간이 역사가 좀 이렇다 그거를 들어낸 것뿐이지요. 우리 모두가 그 이야기를 자기에게 결부시켜야 합니다. 탕자는 나에요. 내가 지금 탕자가 되어야 된단 말이여. 죄를 뉘우쳐야된다 여. 그래야 하느님께로 돌아가지요. 그래야 정신이 나죠. 제정신. 긍게 지금 형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세상 적으로는 정상인데 영적으로는 그거 제정신이 아니에요. 회개한 탕자가 제정신이 난거에요. 아 나봐라, 이거 안 되겠구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

내 자유가, 결과가 이것이다. 인자 나를 포기하고 아버님께로 돌아가야겠다. 인자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잖아요? 자기에게 결부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우리가 어느 길을 어떻게 걷고 있든지 상관없이 사랑하신다. 내버려둬요. 자기가 자각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거야.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은 어떤 요지를, 그럴 듯한 말을 궁휼히 보시는 것이다. 회심. 회개. 돌아옴. 회심이란 말이여. 사랑 빛의 예지를 보시는 것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죄인이었지만은 사랑하셨어요. 그녀의 내심에 속마음에서 나날이 움직이는 빛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음을 들여다보신 것입니다. 신기한 것을 찾듯이 빛을 찾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이승에서 그 빛을 배웠던 것이다. 강도요 무뢰배와 진배없는 삭개오, 강도란 말이여. 심장 삭개오를 사랑하셨다. 그런 사람도 자기 삶을 바꿀 것을 내다보셨다. 바꾸어 가난뱅이들과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음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했다 말이여. 이 사람도 이스라엘사람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거 아직 있지도 않은 것을 사랑하세요.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 비판하죠. 우리 인간은 지금 있는 것만 사랑한다. 그러나 더 미모와 다른 가치를 보고서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해요.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하느님은 아직 있지 않는 것을 사랑하시고 그걸 믿으셔. 믿어줘요. 하심으로써 인간을 끊임없이 거듭 낳아주셔. 중생, 중생. 낳아주시는 것이다. 사랑을 탄생시킨다.

인간을 신임하심으로써 믿어요, 믿어. 하심으로써 그의 탄생을 거두신다. 사람은 사람을 전혀 못 믿거든요. 예를 들면 뭐 좀 이렇게 하세요. 그러면 어째서 하라고요? 이해를 못해. 안 믿어지니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이해를 못해요. 왜 그래요? 왜 들어줘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또 자기가 자기를 또 못 믿어요. 자 그럼 이거 너무 많이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의 최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한 많은 이승에서도 평정을 갖고 희망을 걸 수 있는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무기가 아닌 사랑으로 원수를 대한다면 원수가 원수나 나나 태평성대가 불가능하지 않는다. 않는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자 요 말은 여기 조금 보고. 그거 다 봐버리고.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는 태평성대입니다. 여기 다 되었어요.

 

 

이사야1168절입니다.

태평성대 천하일색은 이사야5715절서 29절 있어요.

약속된 하늘나라를 내 힘껏 넓히고 내 몫의 평화를 물려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물려받아요. 인간의 단점을 사랑하시는 거. 단점. 단점이 장점으로 화할 것을 아시니까. 내일은 그것이 장점이 되리라는 확신을 품고 그 단점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이 있냐 하면은 또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는 거예요. 세상을 그렇게 본다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죄가 드러나고 결점이 드러나고 단점이 드러나면 아 저것이 이제 좋은 것으로 바꿔진다 하고 본단 말이여. 근데 믿음 없이 대하니까 단점만 보고 따지니까. 회개할 길이 없다고. 그럼 인자 참 길어요. 여기 어떤 신학자가 실낙원이라는 책에 그 저자가 발표해 놓았는데 우리 죄와 은총과의 관계그것을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이 타락한 본성은 다 있어요. 사람이. 본성과 하느님의 은총을 대조했단 말이야. 이것을 무엇으로 표현했냐 하면은 전기. 음 전류와 양 전류로 비유했단 말이여. 이 인간의 죄의 본성과 은총과. 긍게 음전 양전이 이렇게 딱 붙어야 전기가 켜진단 말이여. 딱 떨어지면 꺼지고. 우리 죄에 은총을 입으려면 은총에 맡겨야 한단 말이여, 죄를. 타락한 본성. 그러면 인자 그것을 은총의 역사라 해. 그것을 이렇게 말해놨어요. 은총은 양 전류로서 기능을 하는데 사물의 초성 계획에 있어 그 어느 편이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팔방으로 사방팔방으로 팔방으로서 압박을 받으면 본성 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요 그럴지라도 우리가 질식하지 않아요. 숨 막히지 않아요. 영적으로요. 질식하지 않으면 은총의 덕분이다. 공동 작업을 합니다.

 

<~끊김>

 

두 번째는 우리가 궁지에 빠짐은 본성 때문이오. 그럴지라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으면 은총의 덕분이다. 은총. 아까 로마서725절이란 말이여. 깨달을 마음으로 하면 하느님의 은총에 맡기고 육체는 십자가에 내 논단 말이여. ‘궁지에 빠짐은 본성 때문이오. 그럴지라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으면 은총의 덕분이다.’ 세 번째. 우리가 내던짐을 당함은 본성 때문이오. 그럴지라도 우리가 멸망하지 않음은 은총의 덕분이다. 네 번째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지니고 다님은 본성 때문이오, 때문이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음 있는 육체에 나타남은 은총의 덕분이다. 이러한 놀라운 협력은 협력의 결과는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실은 진실하며 무모한 자 같으나 실은 유능하며 죽는 것 같으나 보라 여기 살아있으며 형벌을 당하여도 죽지 아니하며 슬픈 것 같으나 실은 항상 즐거워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죠. 가난하죠. 그러나 영적으로 부유하게 한단 말이여. 아무것도 갖지 아니하나 물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졌어. 영적인 것입니다.

 

요거를 먼저 봤으니까 성경을 인자 보죠.

고린도후서4장과 고린도후서6장입니다.

고린도후서4(현대어성경)

제목이 이렇게 붙었습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질그릇에 담긴 보물.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아까 요 책에는 우주를 버무려가지고 몸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신은 하느님의 신성을 빌려가지고 우리 정신을 만들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 복음을 전하는 이 아름다운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간교한 행동을 하거나 사람을 속이는 일에는 아무 흥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씌어 있지 않은 것을 성경의 가르침인 양 믿게 하려는 따위의 수치스러운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였으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든 사람 앞에 사람에게 떳떳이 내세울 수 있습니다.

 

3.

만일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영원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그 사람들에게나 가리워진 것입니다. 복음에 가리워졌다면. 이 세상의 신인 사단이 그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의 위에 비치는 하느님의 모습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4절이요. 그럼 인제 4절 한번 생각해봐요.

이 세상의 신인 사단이란 말이여. 세상 신. 사단이 그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의 위에 비치는 하느님의 모습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이게 이제 우리에게는 이게 해당되지 않는 말인가 그 말이에요.

이 말씀은 각자 보는 나에게 하는 말이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야 이거야. 성경은 보는 사람의 성경이에요. 거기다가 깨달아야 되는 사람의 성경이야. 못 깨닫는 사람에게는 뭣과 같으냐하면 개에게 거룩한 것이고 돼지에게 진주인 것이요. 그게 어울립니까? 뭐 때문에 가렸냐? 가리운 데에 다른 예를 들면요.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다.

순간적으로도 베드로사도도 그러잖아요? 죽지 마시오. 그거는 가려졌다는 증거거든. 죽어서 살아야 된다는데 사흘만에 부활한다그랬는데 그래야 인류를 구원하는 길인데 죽지 마시오. 구원시키지 마십시오. 그 말이잖아? 이 세상 고대로 좋습니다. 이대로 살랍니다. 나 죽기 싫습니다. 자기가 죽기 싫으니까 예수님보고 죽지 마시오. 그것이 사탄이에요. 사단이 다른 게 아니에요. 죽기 싫은 거. 이거 죽어야 산다는데 믿어지지도 않고 죽으면 아예 죽어버릴 것 같고 믿어지지 않아요. 그것이 사단이에요. 사단 사단이 따로 나 이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적이란 말이에요. 육적, 육적. 십자가를 지기 싫은 것입니다. 죽기 싫은 거. 오래 살고 싶은 거. 살아도 아주 최고 영광을 누리고. 어째요? 최고 영광을 누린 결과가 어떱디까? 좋을 것이 없잖아요. 세상 영광은 허망하다. 그거 드러나고 보면 허망해. 아무 권위가 없어져버려. 권위를 자유 것 부린 결과는 또 아무 자유가 없어요. 어린 애가 가서 뺨을 때려도 꼼짝 못할 거야. 뭔 말을 변명할 말을 못해. 네가 옳다. 옳다. 옳다, 옳다 해야지. 그렇지. 내가 잘못했다. 그것뿐이에요. 이 어둡다는 건 자기 죄를 못 깨달은 거 에요. 가렸어요.

 

인자 5.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을 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다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여러분을 섬기는 종이 되었음을 알릴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도 사도들도 여러분을 섬기는 영혼을 깨우치는 종 섬기는 종이 되었음을 알릴뿐입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6. 그리스도 얼굴에 무슨 영광이 있어요? 그리스도 얼굴에, 얼굴에 나타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얼굴이죠. 뺨맞고 침 뱉음 당하고 침이 아직도 있고. 뺨맞은 자리가 있고 멍들었고 형편없죠. 아 그 무모한 상태에요. 아주 비참하죠. 그 비참한 상태가 어찌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이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것이 세상 영광과 정반대란 말이여. 가장 낮은 자리에요. 가장 천대받는 자리, 섬기는 자리, 제일 낮은 사람도 높여가지고 더 밑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그것이 영광이에요. 세상 영광과 정 반대란 말이여. 세상영광은 가장 사람들한테 칭찬받고 높이 올라가. 욕도 많이 얻어먹지만 그거는 모르고 욕 얻어먹는 줄은 모르고 그 칭찬만 받을라고 올라간 결과가 반대로 되 불잖아요? 제일 천하게 되어 버렸단 말이여. 인자 고대로 천한 거를 먼저 칭찬을 받아요, 나중에는. 그것이 복음이에요. 천한 제일 낮은 자리에 내려가면 하느님이 높여준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껍딱은 율법은 껍딱은 자꾸 껍딱만 높아지려고 하는 거여.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만큼 멸시 천대받는 것이 얼굴에 나타난다.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란 말이에요.

 

 

7절에 가면

그것이 보배라. 그러나 이 귀한 보물 하느님의 영광 가장 멸시천대를 통해서 받아지는 영광 이 귀한 보물은 지금 우리들 속에 빛나고 있는 이 빛과 힘은 깨지기 쉬운 그릇 곧 우리의 연약한 육체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린단 말이여. 본성에 의해서 짓눌려요. 그럴지라도 은총의 덕분으로 살아난다. 더 힘을 얻는단 말이여. 절망에서 영적 힘을 쌓아 놨다. 우선 도기는 고통에 의해서 찌뿌러 지지만 움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은총의 역사가 있단 말이여.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은총이 하느님의 은총이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얻어맞아 넘어져요. 죄가 있으니까 넘어져. 내 맡기어야한단 말이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넘어질 것은 죄에 실려가 넘어져버리고 없어지고 새 힘을 얻어가지고 달려 나갑니다. 자고 깨고 한단 말이여. 죄는 자고 영은 깨고. 하루, 하루. 넘어진 것은 죄가 넘어져 버렸고 일어난 것은 영이 일어난 거여. 몸은 넘어졌는데 영은 살아나. 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일어나서 달려갑니다.

 

우리 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어요. 늘 죽을 것뿐이거든. 썩을 것은 썩어져버려. 늘 썩어. 그것이 거름이 되어서 속사람은 자란다. 큰단 말이여.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고 썩으면 싹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은총이 계셔, 은총.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죽음에다 내놓은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음에다가 맡기면 본능은 죽음에다가 맡겨요. 맡기면 은총은 그것을 살핀단 말이여. 하느님의 은총. 둘이 함께 일을 해요.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말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고 그 믿는 것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함께 죽고 함께 살아요. 부활해요. 다시 살리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느님 앞에 서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실 것이 가 아니라 현재 실제로 그걸 체험한단 말이야. 주어진 만큼 살아지고. 살아져. 함께 다시 살리신다. 함께 하느님 앞에 서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이러한 고난은 모두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분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도 더해져서 주님께서 더욱더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16절서 18절까지는

믿음생활 신앙생활이란 말이여.

생활은 뭐이냐?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겉 사람은 시들어져요. 시들어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 않습니다. 잠깐입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짧은 고통하고 끝없는 영광하고 바꿔진단 말이여. 얼마나 큰 이문입니까? 고난이 잠깐인데 영광은 끝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어차피 고난당하고 말 것이고 고난을 가치 있게 쓴다 말이여.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대로 쓴단 말이여. 잘못 쓰면 이거 죽음에다 써버린다고. 세속적인 고통. 이 감정의 요구 맞추려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워요. 이거 가치 없는 거거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고통을 해야죠.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끝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러분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희망이란 말이여. 여러분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몸은 곧 사라져. 아 어려움은. 어려움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현대어성경)

12절서.

불신자와 짝하지 말라. 그러면 누가 신자고 누가 불신자인가 말이여. 그거 구별하기 어렵잖아요? 불신자하고 짝이 된다면 그 사람도 불신자지. 참으로 신자는 짝하고 뭐할 거 없이 하나여. 마음으로 하나니까. 가령 막달라 마리아하고 예수님하고 뭔 짝 뭔 조건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마음으로 하나란 말이여. 그러면 인자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하고 짝이 되겠습니까? 예수밖에 없어요. 짝하지 말라. 주님을 사랑. 14절부터 그런데요 11절서보란 말이여.

 

11절서.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여,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마음 깊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12.

우리 사이에 아직도 냉랭한 것이 있다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사랑이 너무 적어서 내게까지 닿지 않고 또 나를 끌어당기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것은 죄를 통해야 하는 영혼에게 끌려오는 거거든요. 그랑게 죄를 발견 못했단 말이야. 우리 사이에 아직도 냉랭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울사도 편에 아니오.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 고린도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너무나 적어서 나에게까지 닿지 않고 또 나를 끌어당기기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걸 어찌 해야 되느냐?

 

13.

나는 지금 여러분을 나의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우리의 사랑에 보답해 주십시오. 사랑이 빚만 지고 갚을 줄을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더 매여 버려요. 쪼그라져버려. 자유가 없어져버려. 갚을 줄 모르면. 자꾸 갚아버려야 넓어지고 자유로워지는데 그 말입니다. 사랑에 빚을 졌으면 갚아야한다. 뭐든지 공짜는 없는 거여. 사랑의 빚은 사랑으로 갚고 물질적인 것은 물질적으로 갚아야죠. 근데 갚는 방법이 어떻게 갚느냐?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해버리면 갚아지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놔버려요. 그럼 인자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알아서 되어요. 그러니까 자꾸 자기 있는 것을 덜어버린단 말이여. 빚지지 말고 덜어 버려. 자기 있는 것을 줘버려요. 그럼 넓어지고 자유인데. 자기 있는 것도 무거운데다 또 받아놓으니까 꽉꽉 매여 버려. 자유가 없다. 사람은 자기 목숨에 자기가 붙잡히는 것뿐이지. 누가 뭐 뭐해가지고 붙잡는 것이 아니거든. 모두 자기마음에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붙들고 있는 거여. 안 놓칠라고. 악을 쓰고 힘을 다해서 안 놓칠라고. 그거에요. 그거는 이제 갚는 것은 자꾸 내놔버려. 내놔버리는 겁니다. 늘 자기를 부정해가는 거예요. 자꾸 빚만 진 게 마음이 자꾸 쪼그라진단 말이여. 아이고, 갚아야 할 텐데. 무슨 짐을 잔뜩 지어놨으니 꿈꿀 자유가 없어요. 그런 것이여. 자꾸 갚아가란 거여. 그럼 바울사도는 인자 요거는 고린도후서1215절에 있거든요.

 

 

고린도후서12

14절서부터.

이제 나는 세 번째로 여러분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여러분에게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폐 끼치면 매이거든요.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지 여러분의 재물이 아니 여. 돈이 아니란 말이여. 돈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자녀가 부모의 끼니 걱정을 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부모가 자녀들의 끼니를 마련해야 마땅합니다.

비록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자신과 내가 가진 것을 기쁘게 내놓겠습니다. 기쁘게 내놔요. 자꾸 내놔야 할 것인데 무장 그걸 다 붙들고 차지하고 하니까 빚만 지니까 꽉 거기 매여 버린다고. 자유가 없어요. 바울사도는 목숨 생명까지 바쳤다. 근데 자유죠. 예수님도 왜 자유인가? 목숨을 자유로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어. 그것이 자유에요. 자기 목숨을 사랑을 위해서 바치는 그 용기가 자유에요. 아끼고, 아끼고 암만 빚만 진 것 보다. 그걸 갚는 것은 자꾸 희생해버리는 거여. 누군가를 사랑해버리면 빚을 갚아요. 갚는 일은 얼마만큼 기쁨으로 영광스럽게 희생을 했느냔 말이야. 그것이 갚은 거야. 억지로가 아니고 영광으로 알고 자기 영혼의 영광으로 알고. 괴로워서가 아니 여. 자기영광 자기영혼을 위해서 봉사하는 거예요. 그 사람 영혼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은 빚진 사람이니까. 그 사람도 인제 사랑으로 받아주는 것이에요. 인자 사랑의 빚은 갚아버렸어. 그렇게 했어요. 지되 지면서 갚으면서 그래야 되요. 지기만 하면 안 되죠. 갚아야죠. 지란 말은 서로 희생하란 말이여. 서로 높여라 그 말이고. 그러니까. 이제 빚을 안 갚은 만큼 마음이 좁아진단 말이여. 자꾸 넓혀 갚아버려야 넓어진단 말이여. 어디든 통해요. 그러지만 내 것이라 붙들고 있는 그 범위 안에 자기가 스스로 갇힌 것뿐이에요. 그 밖에는 못 벗어나니까. 내 몸이라 그러면 내 몸에 갇혀있어요. 긍게 그만큼 자유가 없어요. 예수께로 내놔버리면 인제 내가 없으니까. 뭐 걸릴 게 없죠. 자유죠. 이제 나는 세 번째로 여러분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여러분에게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까 봤지요.

 

근데 여기 15절 보면요. 아니 16절을 보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우리를 방문해서도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사실이여. 사실이지만은 그러나 그는 비열한 인간입니다. 바울사도 형제가 그렇게도 못 믿어요. 반대로 믿어버려요. 비열한 인간이니까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속여 돈을 빼앗아갈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인제 엉뚱한 오해에요. 바울사도는 그 자기는 없잖아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고. 자기는 이미 죽었어요. 없어. 사실은 몸은 바울사도 몸인데 그 정신은 그리스도 아녀? 그리스도가 살았응게. 그걸 외모만 보고 말이여. 우리에게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빼앗아 갈라고 한다. 그렇게 오해한다고. 사람끼리 오해가 많죠. 왜 그럴까? 그것은 외모만 봤지, 그 이면 정신 이면은 못 보는 거야. 극히 그 오해라는 건 아이 유치한 상태란 말이여. 건전한 신앙이 아니 여. 건전한 신앙은 어떤 일이든지 오해가 없어요. 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신 일이고 내 영혼 깨달으라고 하는 교훈으로 받지 자가 없다고. . 그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