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유적지 탐방 4 : 곡성에서 외사리, 원달, 삼온회 탄생 이야기

mamuli0 2022. 11. 18. 19:16

 지난번에 시간이 모자라 다하지 못한곳을 남원에서 5명 곡성에서2명 진도에서1명 모두 8명이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다녀왔다.김공 광석 장로님이 사셨던 곳과 소효례 어머니가 사셨던 집터와 교회터를 보고 서집사님네가 사셨던 곳은 길이 험하고 찾기 어렵다고 하여 가지 못했다.

 

 

 곡성에 있는 태안사 주차장을 지나 곧 바로 올라가면 원달리에 가는데 마을에 당도하기전 입구에서 개천을 건너는 작은 샛기로 좌회전 하여 올라가면 집한채가 오른쪽에 있고 그 옆길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감나무 밭이 있고 그 밭에서 남서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 숲속에 김공이 사셨던 집이 쓰러져 있고 석조물들이 사용하던 대로 놓여 있다. 집 주변에는 칙간터와 전답 터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번 답사에 함께 해 주신 복집사님은 어릴적 이집에서 다른 고아들과 같이 지냈노라고 들려주셨다.

 

이 이야기는 삼온회(三溫會)가 생겨난 이야기 입니다. 원달 여름집회때 일입니다.

그래 이렇게 정했어요. 요사이 발언 전부 유 선생님이 말에서 나온 소리야. 선생님 말에서 단어 적어가지고 이렇게 드리면서 그 두 분 오라고 하면 안 오겠소. 결혼 했으니까 그래 너하고 나하고는 결혼 한사람하고 안 한사람 이예요. 그이는 예수라고, 세 사람이 모여. 그래 삼온회 이지요. 예수하고 결혼 한사람하고 안 한사람하고 셋이 예수님의 그 누가복음에 나와요. 아버지 큰아들 작은아들 그 세 사람이 모여야지. 내버려두면 영원히 벌어진다고, 그래 유 선생님이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래서 그분이 딱 정한 거예요. 그럼 삼온(三溫)으로 하자. 그리고 따 술 온(溫)자 석삼(三)자 따술 온(溫)자를 정자로 딱 써가지고 인제 이차라고 막 끝까지 다 만들어 주셨어요. 다 만들어 주셨어. 그 년 년이 모여라. 그러니 본원에서 못 모이지요. 결혼한 사람이 부끄러워서 안 오니까. 그래서 함평 아니 함평서 한번모이고 도암 아니 곡성서 한번 모이고. 그랬어. 이 선생님이 제1회 아주 기뻐했어요. 이 선생님이 그때 그분이 몸이 환자인데 열일제치고 오셨어요. 그런데 그 인제 섬진강 3회요. 제일 비가 많이 왔어요. 강가에 앉아서 밤새도록 못 건너오시고 참 눈물겨웠지요. 물이 빠지면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데 너무 물이 많으니까 배가 안 떠나요. 섬진강에, 지금 언니가 한분 계신지 몰라. 이 선생님이 하룻밤 잤다는데 8월 달이니까 모기가 어떻게 많던지 주막 마루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물이 안 빠지니까 돌아가셨다 그래요. 그래 제1회를 원단에서 모였지요. 그런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니까 이렇게 모였지요. 그때는 아주 분별이 강하고 순결을 주장하다 보니까 결혼한 사람은요, 자기스스로 마음이 불안하고 미안하니까 삼가는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삼온 이라고 정신을 이렇게 하고 어른들 살아계실 때 그 어른들이 가장 기뻐했어요. 유 선생님하고 이 선생님 결혼한 형제들도 죽 앞날을 내다보신 거지요.

오른쪽이 김공(광석)입니다

 

 아래 이야기는 1992년1월3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곡성 원달 삼산 서집사님댁과 그 주변에서 있었던일 입니다.

 목수일 끝나버렸으니까. 장로님은 가셔버리고 저는 저대로 흩어졌지요. 그런데 선생님을 만나봤다 하더라도 잠깐 잠깐 몇 번 만나봤지요. 그러면 또 궁금하더라고요. 사시는 데가 없잖아요? 여기 정심사 앞에 별장을 가지고 계시는 최 목사님을 찾아가 뵈면 그 어른의 행적을 아시리라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이 아주 반가워하시며 형제 왜 이제 오냐고, 아 여기 이 현필 선생님 오신일 없으세요? 아 여기 안 왔네. 그럼 어디계실까요? 아 그분 저 동북 오 북희씨하고 친구라고. 그 이 세종선생님 제자들인데 아마 오 북희씨 찾아가보라고 그래요.

 

 

 거기 오셨는가 누가 알겠냐고 그러니 오 북희씨를 찾아가서 물어보니 십 년 전에 시집가 버렸다고 거기 계시지 않아요. 목사님도 짐작으로 하신 말씀이지요. 너무나 짐작이지요. 그러면 오 복희씨 어머니 집까지 무등산을 넘어서 이선로를 지나서 동북으로 갈 때는 선생님을 만나러 가기 때문에 신을 신을 수가 없어요. 소문듣기에 선생님 맨발 버섰었다는데 그래 맨발벗고 무등산을 넘어서 동북을 거쳐서 청풍까지 찾아갔습니다. 

 

 

밤중까지 처음으로 맨발을 벗었기 때문에 발바닥이 떨어져가지고 아프고 쓰리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거기서 선생님이 아닌게아니라 계십디다요.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어디가신지 모르게 새벽길을 떠나시는데 수레기 어머니와 한나 어머니 두 분이 그분들과 계셨어요. 두 분이 모시고 떠나시더만요. 그래서 어제 밤도 인사 안했지요. 왜 왔냐고도 안 물어 보시고 옆에 있다가 아침에 따라가서는 왜 따라오냐는 말씀도 안하셨어요. 그냥 모르고 따라가는 겁니다. 

 

 

거기서 소위 말하면 하룻밤을 가다가 석곡에서 자게 되고 이틀 만에 삼산 서 집사님 댁에 들어가셨습니다. 밤중길 가니까 길을 몰라요. 얼마나 발바닥이 아프며 다리가 아프고 질질 끌고 갔다고요.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이틀 동안 먹은 것은 없지요. 피차간, 너무 내가 말씀을 비약해 버렸네요. 그 석곡에서 쪼끔 가니까 믿는 댁이 있습디다요. 거기 심방 하십디다. 들어가십시다. 어머니들 들어가니까 안방으로 다 들어가시드만요. 그 어머니가 눈물 뚝뚝 떨어뜨리시고 있는데 쪼금 있으니까 김이 나는 쑥떡 한 바구리 상에 차려서 방으로 들어오십디다요.

 

 

선생님이 우리 기도합시다. 이틀 만에 떡 먹겠다. 침이 막 넘어오는데 뭐라고 기도하시는가 하니 ‘아버지 제가 이집 저집 과부 집에 찾아다니면서 이런 떡이나 얻어먹고 돌아다닌다면 이 이빨이 썩어내려 앉게 해 주시고 이 목구녁이 썩어 내려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아멘.’ ‘떡 잡수시오.’ 그러시더라구요. 이제 수레기 어머니 한나 어머니 손이 벌벌 떨려가지고 못 잡수시더만 저는 먹고 싶어 죽겠지요. 침이 꿀떡 넘어가는데 모두 가만히 보고 어떻게 먹을 수가 있어야지. ‘갑시다’하고 나섰지요. 그분은 가는데 마다 그러시더라구요. 가는데 마다 떡이 요 상에 떨어져요. 반찬이 떨어져도 절대 입을 안대시고 꼭 그러셨어요.

 

 

서 집사님 댁에 가서 밤중이니까 잤지요. 새벽에 일찍 유난씨 어머니 마을에서 1키로입니다. 마을 예배당에서 소식을 듣고 쫒아왔어요. 아침 밥해줄려고 밥을 해서 선생님은 안 잡수시니까 세 그릇이지요. 거기도 밥을 많이 담았어요. 이제 서이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옆에 앉으셔서 준호 밥 먹고 싶으면 죽 내려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얻어 잡수시오. 그러데요. 그러니 어저께 떡도 못 먹었는데 와 이밥까지 못 먹으면 굶어죽겠다 싶어서 다 먹어버렸어요. 확 다 넘어가 버렸어요. 그렇게 많은 밥이, 그런데 어머니 두 분은 안 잡수시지요. 딱 일어섭디다. 어머니 안 잡수시고 일어서며 선생님 그러세요. 준호, ‘집사님 이 사람 밥 먹었으니까 삽을 주세요. 준호는 밥을 먹었으니까  땅 파시오.’ 하고 다 하산해 버려요.

 

 

깊은 산속입니다. 무서운 곳이에요. 그때  혼자 쳐져 가지고 얼마나 쓸쓸하고 슬플까요? 나가시며 그러시더구만요. 준호 땅파기 싫으면 광주로 가버리시오. 광주로 가자니 참 부끄럽고 땅을 파자니 처음 파는 거라 못 파겠고 한참 울었습니다. 세수하다 울어버렸어요. 참 이거 어쩔 수가 없대요. 광주는 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틀 땅을 팠습니다. 울다 파고 울다 파고 처음으로 하는 일이라요. 유난씨 어머니가 오시데요. 어머니께서 들깨 씨를 뿌리십디다. 그걸 뿌리고 있는데 참 진퇴양난이에요. 나는 어찌할까? 참 아득한데 사무엘형님이 그때 열세 살 먹었습니다. ‘형님 선생님이 오라고 하십니다.’ 하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서리내 까지 갑니다. 서리내 까지 기차로 남원에 내려 걸어서 서리내 까지 가니까 거기 선생님이 계십디다. 어머니들 몇 분하고 석양이 딱 되어가는데 제가 학원에 다니다 올라왔기 때문에 학원 선생님들이 일본서 나와 가지고 아주 점잔하고요. 아주 친구같이 해주었거든요. 아주 친구같이 해줘서 선생님 나 돈 3만원만 취해주세요. 울 아버지가 비단공장 하니까 선생님 양복기지 같다 드릴게요. 하니까 아 그러라고 3만원 주십디다요. 그놈 가지고 다 써버렸다. 양심이 괴롭지 않나요? 객지에 나와서 다 써버렸어. 양복기지를 같다줘야 할 텐데 못 같다줘. 집하고는 하직해 버렸으니까. 이제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해남 다녀 올랍니다. 해가질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순하고 양 같은 분이 가만히 고개를 들더니 해남 놈은 간사와 갈라면 지금 가버려 해가 질라는데 그렇게 점잖게 말했으면 내가 안 가게요. 어떻게 매섭게 해남 놈은 간사와 갈라면 지금 가벼려. 안가도 창피하고 가자니 해는 졌고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나와 버렸어요. 밤중에 해남 가서 빚 갚고 집에 가서 돈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 찾아가서 몇 년만에 어머니가 재봉침 하나 가지고 있어요. 그것 갖고 생활하는 것을 어머니 나 재봉침 주세요. 학교 공부 할랍니다. 아 그래라. 주십디다요. 그것 딱 싸짊어지고 가서 양복점 주인이 따라 왔어요. 그때 아주 귀할 때 그 재봉침이 아주 귀해가지고 그 사람이 따라왔어요. 그 사람이 돈 3만원 주마고 가져가 버립디다요. 그 양복점 주인이, 어머니는 의사될 줄 알고 내가 의학공부 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의사될 줄 알고 그걸 주십디다요. 아주 기뻐하면서 그리고 부모하고 한 20년 서로 행방을 몰랐지요. 저도 어머니 모르고 어머니도 제 소식 몰랐어요. 그렇게 소위 말하면 선생님 지도를 받는 것이지만 조직적으로 신학이나 성경공부를 해본일이 없어요. 성경공부 할 때 가보면 여자들이 한 30명 앉아있습디다. 그럼 남자는 저 하나 뿐이라구요. 그러니 옆에 5분도 앉을 수가 없어요. 규모가 짱짱해가지고 그러니까 먼 빗에서 서서 아 공부하시나보다 선생님의 지도는 두 번 동냥을 시킨걸 보면 이렇게 살라는 것이다. 자각을 했지요. 

 

 

 

 그곳에서 내려와 차로 이동하여 원달 마을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오른 쪽 길로 가면 복집사님 집이 나오고 그집 아래쪽에 옛날 집터와 교화가 그 집 아래로 있었다고 한다.

 

 

가사 굶기를 며칠 전 부터 굶고 광주서 걸어갔으면 며칠 굶고 도곡면, 도곡면을 거쳐서 죽곡면 원달 상달 올라가는 길이시던가 보지요. 그때 제가 따라 붙었지요. 그런데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 동록 씨가 옛날에는 전도사직을 하셨고 지금은 전도사직을 안하고 계십니다. 이 평교우신지 그렇게 교우로 지내시지요. 그 분의 어머니께서 그 지점에 사셨든가 봅니다. 거기 도곡면 산골짜기에, 그 댁을 찾아가십니다. 가는 길 터에 심방 하시고 이제 위로하시고 가실 량으로 그 댁에 들였는데 십리 밖에서 부잣집 아주 부잣집 후실이 예수를 믿었어요. 그 후실이 이 선생님 보기가 부끄러우니까 얼굴을 내 놓지 못했지요. 선생님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눈물겹게 밤새도록 몰래 떡을 해 가지고 찰떡이지요. 밤새도록 십리밖에 있는 거기 그 어머니 집에다 떡을 가져다 놓으면서 내일 선생님이 여기 지나가실 때 이 떡을 꼭 대접 하십시오. 위탁 했단 말이에요.

 

 

 위탁해서 둔 떡을 수레기 어머니 한나 씨 어머니 이 선생님 세분이 가신 길에 제가 따라 갔으니까 네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새벽부터 갔지만 거기가 어느 지점인지 몰라도 아침밥은 넘어 버렸고 점심은 빠르고 한 열시나 아홉시 사이에요. 그 집에 들어가서 손님이니까 방으로 모두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거기 계신 분이 그날 밤에 부탁하고 가신 그 분의 부탁대로 그 다시 따뜻하게 했는지 몰라도 김이 모락모락 나요. 찰떡 그득히 하고 쑥떡 그득히 해가지고 상에 내 왔어요. 이 선생님이, 그럼 제가 뒤 따라 갔으니까 누구 사람 만난 시간 없었거든요. 전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그 집에 들어가서 큰 방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찰떡이 나오거든요.

 

 

 우리 기도합시다. 이 선생님 기도 잘 안하시는데 처음 기도하는 것 들어봤거든요. ‘하나님 아버지 이 죄 많은 이놈이 찰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이 죄인 놈의 이빨이 썩어 내려앉게 해 주시고 목구멍이 썩어서 내려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림니다.’ 한나 어머니나 수레기 어머니 보고 ‘떡 잡수시지요.’ 하니까  뛰뛰 하고 다 물러나버려요. 그래 저는 보고 의례 먹을 줄 알고 버쩍 바짝 옆으로 갔지요. 상 옆으로, 어머니들 뛰뛰 하고 뒤로 물러앉으니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눈치를 보니까 먹어서는 안 되겠어요. 뒤로 쭉 물러났지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막 김은 나는데 김이 올라와요. 그러니까 참 이분들 묘한 사람들이다. 왜 이럴까? 저는 처음으로 그때  따라갔거든요. 처음으로 참 기이한 일이다 싶었어요. 그 다음에야 알았어요. 한 2년 후에야 그 영문을 3년 후에 누가 가르쳐 줍디다. 그 떡이 다른 떡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십리밖에 있던 어느 부잣집 후실인데 예수 믿고 회개하는 뜻으로 그렇게 떡을 해다 주신 것이라고, 그럼 이 선생님이 그걸 절대 몰랐을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직감으로 느낀 거예요. 어떤 영감으로 느낀 것이지 그 사건을 안 것은 아니라고요. 그런걸 보면 역시 명철하시기도 하고, 영의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때, 그때 잠깐 잠깐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간 실수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 떡을 영문 없이 먹을 수 있지 않아요? 배는 고프고 감사해서 그러나 그렇게 무슨 일을 깊이 생각하시고 그렇게 틀림없이 하셨기 때문에 그 감화력에 의해서,

 


 요사이 들어보니까요. 열한 살 먹어서 이 선생님께 나간 애기들이 열세 살 먹어서 열네 살 먹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년 5학년 때 이 선생을 본 분들이 여기 한 오십대 되거든요. 그 어린 소녀시절에 이 선생님을 눈에서 감화를 받고  눈을 떠보실 때 밥을 차려드리면 안 잡수시고 가신다던지 옷은 다 떨어지고 살이 보인다던지 거기서 이 선생님에 대한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분 들이 자기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버리고 돌아와서 사시고 계신 것을 발견했어요. 요사이 요사이에서야 몇 분 말 들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남녀 분별이 강해가지고 우리가 서로 반말을 못해봤거든요 지금은 백발이 났으니까 그래도 고개 숙이고 땅만 보고 이야기 하면 듣고 그랬거든요. 야, 그랬구나. 그런 게 느껴져요. 심사숙고 하라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거 찬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깊이 생각하라고 부탁을 해. 본인 생활도 그렇고 글이 그런 거지요. 글이 그런 내용의 글이시고 가사 찬물 한 그릇 떠드리지요. 찬물 한 그릇 떠다가 준 것만 봐도 그 사람 다 알아버려요 이 선생님 속도 모르고 이 선생님은 남의 깊은 비밀을 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찬물 한 그릇 떠다 주고 나가는 것 보면 아 저 사람은 이렇구나. 짐작이 간다고요. 마음이 괴로운지 서러운지 기쁜지 평화스러운지 그거 직감으로 알 수 있어요 

 

 

이 선생님 아니더라도 또 물을 대접 해봐요. 찬 물 한 그릇 잡수시라고 드려봐 그럼 먹는것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지 않아요? 이 선생님은 김이 뭉게뭉게 나는 찰떡을 드려보니까 속을 알아 아 이 선생님이 그런 분이다 안 먹을 떡은 목구멍이 썩어 내려앉아 버리라고 그러고 안 먹는다. 먹을 떡은 그분이 자시거든요. 어디 가서 누가 안주면 달라고 그분은 달라고 해서 잡수시는 분이니까 그전에 그 말씀 하십디다.

 

 원달에서 능주로 가면서 석곡을 지날때 떠오른 생각입니다.

석곡 국민학교의 교장선생님 이십디다. 지금 보면 교장 댁에 자고 갑시다. 하고 들어 가셨어요. 사택인데 해가질 무렵에 교장님이 퇴근하시니까 저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애기같이 취급하세요. ‘아, 현필이 왔는가?’ 그냥 그래요. 그냥 아이취급하세요. 그래 인제 어머니 둘하고 저 네 명이니까 또 밥상이 하나 가득 담아가지고 나왔더라고요. 밥 네 그릇이, ‘우리는 먹을 것이 있습니다. 밥상을 내가십시오.’ 먹을 것이 없지요. 눈에 안 보이는 음식이니까. 제일 저는 믿음도 없었고 나이도 젊고 세분이야 도인님들이니까 배가 안 고프던지 몰라도 저는 어떻게 배가 고프던지 밥이 먹고 싶어서, 저녁에 이렇게 늦어서 한방에 네 분이 둘이 남자니까 방하나 따로 주셔서 자러 간다고, 선생님 방이신가 봐요. 교장선생님 방인데 둘이 방으로 들어갈 때 무를 뽑아 놔두었거든요. 부엌 앞에 무, 칼자루만 한 게 하나 있어요. 사모님 제가 이 무하나 먹어도 좋습니까? 아 잡수세요. 잡수세요. 가지고 들어갔다고, 그날 밤에 그걸 얻어가지고 불 끄고 자는데 제가 자는 줄 알고 잡수신 것 같아요. 새벽 한시나 두시나 되었는데 그래 저는 배가 고프니까 잠이 안 오지요. 무를 시작할 때부터 빨리 잡수시지 않거든. 무 한 개를 십 분이나 한 삼십분 잠수시거든요. 춤이 많이 고여 가지고 부끄러우니까 삼키지 못하고 입에 빵 빵이 있어. 꿀떡 삼키니까 아 이 사람이 잠 안자고 있구나. 아셨다고, ‘준호’ ‘예’ ‘무 먹고 싶소?’ ‘예’ 캄캄한 밤중이니까 ‘받으시오’ 받았는데 다 잡숫고 끄트머리 쪼금이에요. 손에 딱 잡혔는데 아무것도 안 잡혀. 쪼금 있어. 어떻게 소원풀이야. 소원풀이, 그 무를 삼킬 때 어떻게 감사한지요! 참말로, 틀림없어. 뭐 떡을 수백 개 먹은 거보다 흡족해요. 아주 만족해요. 그걸 안 먹고 잤으면 얼마나 서러울 거야. 그렇게 배가 고파도, 권위가 있어. 본인도 먹고 입는 걸 초월하시지만 같이 살고 있는 사람도 감히 밥 먹을 수가 없어요. 황송해서, 그렇게 되어요. 분위기가 항상 그래요. 어찌 감히 우리가 밥을 먹느냐 그거에요. 선생님도 저렇게 안 잡수시는데. 그런 것에 감화 받으신 인제 백 장로님의 어머니시지요. 백 장로님이 그런 인격에 감화 받아갖고 전 재산을 ‘선생님한테 드리자’ 그랬다는 것 아니에요? 우리가 처음에 백 장로님이 그랬다 그래요. 저는 큰 아들이고 어머니가 청춘과부가 되어가지고 손톱으로 베를 짜서 무명베 삼베 그런게 이 치산한 재산을 제가 상속 받는 것을 제가 감당 못하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 선생님 드립시다. 그랬다는 거예요. 어머니께서 ‘그러자’ 그럼 일초도 생각 안하시고 ‘그러자’ 그러시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이 선생님이 어머니가 아들을 자기보다 이 선생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으면 1초도 생각 안 해보고 그러자 그러느냐는 거예요. 말이 툭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러자’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 평생 자기 손으로 치산한 재산인데 남편이 준 재산도 아닌데 자기가 길쌈해서 모은 재산인데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만큼 이 선생님을 존경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동생 있고 제수 있고 장로님 부인 있고 큰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 큰딸 작은딸 셋째 딸 전 식구한테 ‘우리 재산을 이 선생한테 드리자’ 하니까 한사람도 얼굴 붉히는 사람 없다는 거예요. 모두 ‘예’ 전 식구가 ‘예’ 제수까지 동생까지 조카까지 모두 예하지, 한사람도 반대 안한 것이 이럴 수 있냐는 거예요. 백 장로님 생각에는 사람인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해야 이치지. 그럼 이 선생님의 인품이 얼마나 그 사람들 마음을 그렇게 얻었냐? 그 점이지요. 그것은 단지 대신 굶으시고 대신 못 입으시고 대신 잠 못 자시고 대신 근심하시고 대신이야. 대신 아이고 이 선생님은 꼭 예수 같아. 그 말이 틀림없지요. 예수는 아니야. 그래 최흥종 목사님이 제일 걱정한 것은 이 선생은 피조물이다. 절대 예수가 아니다 그것만은 명심하라. 예수 같다는 말은 좋지만 예수로 보면 안 된단 말이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인데 이 선생님은 예수를 잘 모방한 피조물이다. 죄인이 회개한 사람이다. 그걸 구별하라. 항상 그렇게 충고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