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독교 동광원수도회유적지탐방 5 : 원달에서 능주 한천

mamuli0 2022. 11. 20. 14:33

 곡성 원달에서 나와 죽곡 석곡 주암을 지나 복내 화순을 지나 능주에 가서 능주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교회 근처에 있는 정귀주 집사님 , 조사연 언님 집 자리를 보고 조금 떨어진 정한나 집사님 집 터를 오세휘 장로님의 안내로 보고 나서 한천 교회와 정일채씨 4형제가 사셨던 곳을 보고 현재 정국채씨 자제분이 운영하고 있다는 벽돌공장 뒷쪽에 집을 보고 화순군 소반바위 고개로 갔다.

 

이글은 1981년 1월1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6.25때 화학산에서 한천에 나오실때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가신 길로 인제 제가 귀화했지요. 제가 지고 선생님 뒤따라 가보니까 참 선생님 가시는 길은 참 탄탄대로여. 아무 거리낌이 없어요. 사람이 안다니는 물가 세니까 사람을 만나지가 않습디다요. 그런데서 선생님의 그 높은 지혜가 인간적인 지혜인지 모르지만 참 영적인 지혜지요. 선생님을 처음부터 뒤따랐으면 그렇게 사람을 안 만났을 텐데 길로 갈라다가 저는 많이 만났거든요. 그래 서로 피차간에 구사일생 만났는데 거기서 부터는 인제 선생님 뒤따라오셔서 뒤따라가 보니까 그렇게 발이 얼어버렸어. 가야할 길은 많은데 발은 얼었으니까 이렇게 한 걸음, 한걸음 쫒아 오시는 것 같지만 아무리 쫒아 올라 해도 이렇게 띄엄, 띄엄 꼭 황새 거름처럼 그렇게 젊은 사람 걸음으로는 한 시간이면 될 것을 댓 시간이나 걸렸지요. 물가를 빠져나오는데 한천 쪽으로요. 그 물 따라 나오니까 동뜰 때가 나옵디다요. 그 물로 건너니까 한천으로 건너갔습니다. 아침 미명에 훤할 무렵에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그 물속에서 맨발 벗고 발이 얼었는데 포기를 안 해. 생명을 다해서 걸었는데 전 힘을 다해서 걸었는데 아무 거기에는 공포심도 없고 누구를 원망하는 것도 없고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없고 참 무아경지에요. 무아경지, 그 마음자리 참 완전한 자유라 할까 이 선생님의 자유 평화 기쁨 또 축복 찬송 그것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그 경지를 들어가려면 한 백년 살아야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은혜 받은 분의 가슴을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러면 한 일주일 전에 한 며칠 전에 한 삼일 전엔가 그 신만 양보 안했으면 걸어오실 길이에요. 척 척척 걸어오실 길이에요. 고무신만 양보 안했으면요. 쉽게 걸어올 길이거든요. 그 고무신을 그 불안에 떨고 있는 형제한테 양보했음으로 대신 맨발벗고 걸어가는 길은 참 한 걸음 한걸음 참 피맺힌 길 아닙니까? 참 희생의 길이야. 희생의길 무아 어느 수녀님 말씀같이 다시 말하면 무아의 희생 내가 이 고무신 신어야겠다. 내가 신어야지 그런 것 없어요. 그때 당하면 무조건 자기는 양보해 버려요. 그 생활이 전체적인 것 아닙니까? 하루하루, 여기 오셔서 평생 그렇게 사신 거예요. 사람이 하루에 아침저녁 굶으시고 밤 잡수시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고 밥이 먹고 싶겠어요? 그러나 누가 면회 오시면 딱 밥 덮어버리고 다 이야기 하지요. 흔연하게 꼭 면회 온 사람이야. 뭐 구속합니까? 종일 굶으시고 진지 잡수시는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그 사람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면 걱정만 하지. 저녁에 밥 안 잡수세요. 굶어, 굶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을 시간이 있어야지. 그 사람이 안가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 같으면 불평하지 않겠어요? 나 밥 안 먹었다고 어서 가라고 그런 생각 그런 말 아니 그런 마음도 없어요.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위로해 줄까? 그 몰두만하고 계시지 자기가 그날 밥 안 먹은 것도 망각하고 계시다고 그런 마음을 갖으신 분이지요. 그러니 그 심장이 예수심장으로 불타고 있어요. 예수님은 한번만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런 분은 시시각각으로 어떠한 의미에서 순교지요. 자기 포기라는 말씀입니다. 자기희생, 그래서 아 그 선생님의 일생은 무아의 희생이었다고 그 말은 얼른 말해서도 바로 본 것 같아요. 아 그분 무아의 삶을 사셨군요. 쪼금만 이야기 들어봐도 아 그 분은 나 자기가 없이 희생하셨다고 무아의 희생을 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한 말이 옳지 않냐?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은 눈으로 안 봤으니까 몰라요. 오늘밤에도 제가 말하면서도 보여요. 그 물가에 그 강가에서 맨발을 벗으신 분이 엉금엉금 뒤에서 쫒아 오는데 곧 오면 잡힐 텐데 태연 태연도 아니지 발이 그것 밖에 움직이지를 못해. 항 정진, 정진 정렬한다 할까? 꾸준히 걸어간다고 그 힘을 다해서 다리를 옮겨가지고 앞으로 전진을 해. 꾸준한 전진이지요. 참 용기 또 희생 희망 사랑 믿음 전부 거기에 함축되어서 나타난다고, 그 발걸음에요. 또 참 예수님의 사랑, 그래 사람을 만나서 봉사 한다는 생각 보다는 혼자 있을 때 혼자 걸음을 걸을 때에도 생명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거예요. 그렇게 왔으니 그 날 밤에 마음이 약하면 모두 잡혀 죽지요. 내 생명 내 생명 하지도 않고 내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제일로 그 분이 걱정했던 것은 가다가 잡히면 내가 죽는 것은 아무 그 아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 나를 죽인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나를 죽인 다음에 그 사람들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그것만 걱정 하셨어요.

 

앞줄 두번째 정귀주 어머니

 

이글은 1981년 1월1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이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받을 것이라. 어찌되었든지 하루하루 사시면 이 사람들과 살면서 희생한다는 희생 보다는 홀로 있으면서 자기 생명에 충성 하신 분, 배가고프거나 병들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행복해요. 아무 병이나 아픔이나 배고픔이나 아무 그 마음을 흔들 수가 없어. 너무 행복해 하시니까 병에 대해서도 너무 병에 대해서 감사했다.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사람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수님을 그리워하는가? 사람이 병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는가? 배고픈 사람의 사정 병들어 아픈 사람의 사정 얼마나 알게 되는가? 내가 병 안 들어 죽었다면 인생의 반도 못 알고 죽었겠다. 그랬어요. 내가 병들었으므로 주님께서 인생의 반쪽을 보충해 주셨다. 나는 반쪽을 하마터면 손해보고 죽을 뻔 했는데 이렇게 아프게 하심으로 나는 인생의 반쪽을 다시 주셨습니다. 내가 병 없이 죽었으면 속없이 죽었을 텐데 병이 들었으므로 속이 들었습니다. 이 축복받은 병이여 그러니까 그분이 배고프면 배고픔이 축복이 되어버리고요. 오, 축복받은 이 배고픔이여 또 그분이 병이 들면 오 축복받은 병이여, 그러니까 아무것도 해칠 수가 없어요. 배고프나 병이 들거나 그 선생님은 해로운 것이 없어요. 피해 아무 피해를 받지 않아. 오히려 배고프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서러움을 이해하게 되고 병들었기 때문에 모든 병든 인류의 그 슬픔을 그 같이 같이 슬퍼하시고 감사했습니다. 그런 점, 그런 점이 무아적인 희생이라는 말이야. 내 몸둥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이 몸은 이미 주님께 바친 몸 이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병이 들던지 아프던지 배고프던지 주님이 원하셔서 하신 것이니 찬송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더 주십시오. 제가 복이 있다면 굶어죽게 해 주십시오. 만일 이 복을 빼앗아 가신다면 저는 괴롭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것을 감격하시고 찬송하시고 지지하시고 자원하시고 그렇게 원했지만 그 시간에는 다시 광주 나오셨지요. 그래 밥을 잡수셨지요. 아프신 때도 그랬다는 말씀 입니다. 병이 나을까봐 오히려 병 자체가 자기 영혼을 이렇게 그 성화시키는 천사인데 이 병 때문에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게 되었는가? 얼마나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았는가? 그래서 고마워라. 내 자매 형제여 행여 라도 내 병이 나를 떠나면 나는 섭섭하다. 그렇게 일기에 써놓지 않았어요? 그건 어떠한 시가 아니라 자기 본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본심, 그 인생의 모든 그 모든 인생이 앓는 병을 앓으시고 모든 인생이 그 굶주리는 배고픔을 대신 받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배부르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병을 낫게 하셨다는 이사야 53장의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셨다고 예수님의 마음씨고 이 세상을 사셨다고 그러므로 그 선생님을 잘 배우는 것은 예수님을 잘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 선생님이라고 그랬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분은 당을 싫어하시고 파를 싫어하시고 나만 어찌 기독교인이냐고 기독교를 싫어하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화해서 죄를 회개 받고 구원받게 전도하시던 하나님의 전도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전도사였어요. 예수님의 심부름꾼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느 교파에 예속 되었든지 감격하고 예, 감사합니다. 그러지, 남이라 보지 않는다는 말이야. 남의 식구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요. 심지어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남이라고 보지 않아요. 우리 선생님, 또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그렇게 보지요. 그런 점이 참 무아의 희생을 하신 분이다. 이름도 성도 아무근거도 없이 예수님의 심장을 대단히 잘 나타내신 분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또 그렇게 압니다. 그런 뜻으로 오늘 밤에 우리가 선생님이 여러분 다 믿겠지요? 어디가 있던지 자기 가르침을 위해서는 선생을 만날 수 있어요. 많은 선생을 만나서 배웠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뿐이시다. 아버지는 하나뿐이지요. 누구든지, 선생님은 일만이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하나 고린도 교인들이 많은 전도사 목사가 와서 가르쳤지만 이 신자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신 분은 바울 선생님 자신이었다. 그 말씀인데요. 우리들의 선생님은 일만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영혼을 예수님 앞으로 지도하신 분은 이 선생님 이었다. 그 점입니다. 이 모임은 역시 그렇게 성스러운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의 모임 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분위기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배우시고 여기서 믿음을 가진 분들은 어디 가서든지 어디 가서든지 나다 그것이 없고 우리다 그것이 없고 우리 패다 그것이 없고 우리 당이다 그것이 없단 말씀이에요. 왜 그 가르치기를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니까? 그러므로 그 분들이 유언 한 것은 나 때문에 내 말을 오해해 가지고 우리를 내세우고 나를 내세우고 우리 패를 내세운다면 안 되겠다. 그래서 유언 하신 것이지요.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말이라고 말을 말아다오. 내가 해온 것은 다 수치 뿐이다. 죄인이라는 수치뿐이고 선 것은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자비 예수님의 구원뿐이니까 예수님의 말로 전해다고 그렇게 선생님들은 유언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제자들도 어디 땅 끝까지 가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 사랑 그 자비 그 피 그 눈물 그 순수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훈을 이렇게 받으신 분들은 세계일치, 참 교파일치, 또 인류일치를 위해서 심부름 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을 받으신 분들이다. 그렇게 여겨집니다. 만일 그렇게 못되었다면 선생님을 잘 못 배운 것이지요. 잘 못 배웠다는 것입니다. 오해한 것이지요. 그런데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어요. 제 나름 대로요. 임종하실 때 기쁘시다 고 노래 부르셨다고 그랬지요? 임종 하실 때 ‘아 기쁘다. 아 기쁘다.’ 하고 그냥 그 찬송을 부르시면서 임종을 했다. 그런 이야기 안 들으셨어요. 그런데 여기 제가 오기 전에 한 삼일 전에 그때 임종 하루 전에 보신 자매님 말을 들었어요. 임종 하루 전에 뵈었는데 얼굴이 광채 나기가 참 모세가 광채 나 듯이요. 참 말은 못했지만 참 그냥 어떻게 얼굴이 광채가 나 던지요? 그 말씀할 때 환 하시더라. 그래요. 물론 의학적으로는 열이 오른 지도 몰라요. 그 몸이 열이 났는가 모르지만 그 말씀할 때 태연하신데 얼굴이 그냥 환히 꽃이 핀 것같이 그렇게 해가지고는 훤하니 빛이 나시더라고 그런데 뭐라고 하시냐? 기쁘다고 그러시더라고, ‘아 기쁘다’ 말씀 안 해도 얼굴이 기뻐하시고 말씀할 때 기뻐하셨다고, 그런데 그 이튼 날 임종하실 때 한 십분 전 까지도 ‘아 기쁘다. 아 기쁘다.’ 이거 전라도 사투리로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쁘네. 기뻐, 아이고, 너무 기뻐 못 참겠네. 오매.’ 그렇게 기뻐서 그냥 가슴이 터질라고 하시니까 얼굴이 환하니 진땀이 나시고 땀이 나는데 기쁘다고 그러면 대개 듣는 분들이 그러거든요. 그 기쁨이 무슨 기쁨이냐? 하늘나라 가서 알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풀었습니다. 자기가 그저 참 이 믿음가운데 여러 가지 덕이 있지만 정절의 덕을 사모하신 분 아닙니까? 그분도 결혼 했지만 그래서 이 정절을 지킨 것이 이렇게 행복하다. 그래서 서울 네거리 가서 이 정절 지키라고 전도하고 싶다. 그래서 기뻐했는가? 그렇게 해석이 왔어요. 그렇게 해석해 왔는데 요새 한 삼일 전에 그 증거를 듣고 제 나름대로 아주 새로운 아, 역시 그 기쁨이다. 그렇게 저로서 감사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참 절대 무아의 희열이다. 거기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정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 임종 직전에는 그 예수사랑에 그냥 아주 반한 사람이야. 반했어. 뭐 죽니 사니 나니 사니 죽니 배고프니 땅위에서 나는 배부르니 기쁘다. 나는 죽은 사람 만나서 기쁘다. 가사 나는 정절 지키니 기쁘다. 그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생과 사를 초탈했어. 초월 해가지고 몸은 아직 땅위에 있지만 마음은 생각은 영이란 말이야. 영, 영화 되었단 말이야. 해방, 성령의 기쁨 성령의 열매는 사랑 평화 기쁨 자유 평화 희열 성령의 은총의 기쁨이다. 그래서 아 그것은 은총을 받은 기쁨이다. 그렇게 파악됩니다. 정절을 지키니 기쁘다. 그건 상대적이에요. 육신의 이야기에요. 나는 죽은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그건 육신에 있을 때 기쁨이거든. 그거는 사람의 몸에서 나는 기쁨이 아니에요. 사람의 결심이나 수도나 뭔 계명을 지켜서 오는 기쁨은 평소에 있는 것이고 그 기쁨은 은총의 기쁨 이었다. 그 사람은 할 수 없는 기쁨이야.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초자연에 예속된 기쁨이야. 아니 그냥 몸 열이 42도 4도 올라가지고 숨이 턱턱 끊어지는 불이 나는데 몸에서,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고통뿐이지, 몸이 막 터지려고 하는데 아파서 거기서 그렇게 기쁘다고 황홀해서 하는 말이 오매 못 참겠네. 기쁘다. 라는 그 경지는 그 육에 속한 기쁨이 그건 성령 은총 이었다. 초자연의 속한 기쁨 이었다. 은총에 속한 기쁨 이었다. 그럼 평소에 그렇게 생명을 바쳐서 그렇게 몸을 자기부정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상으로 하나님께서 죽기 전에 영원한 그 기쁨을 땅위에서 맛보게 하셨다. 그렇게 파악되어요. 프란치스코 말년을 보나 같아요. 그렇다면 그 기쁨 내용이 달라짐에 따라서 우리 원의 선생님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정절을 잘 지키는 우리 선생이다. 그러면 당이 되어 버려요. 그러나 그 기쁨을 확실히 국경을 초월하고 단체를 초월하고 교파를 초월하고 인생을 초월해서 천상적인 기쁨 이었다고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제자들도 모두 우리 없어지고요. 당이 없어지고 편협이 없어지고 그런 그 참 무아의 희생, 참 자비의 희생 참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인류에 봉사할 수 있겠다. 그 기쁨은 우리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다. 천군천사의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것이다. 전 인류를 그 전 인류가 우리 선생님 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상대를 초월한 기쁨을 기뻐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받아 집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 점입니다. 그럼 한 3일 전까지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상대적인 기쁨을 가졌는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 한 이틀만은 그 자기의 평소의 신앙을 주춧돌로 해서 완전히 그 상승의 기쁨 이지요. 영원한 기쁨 이지요. 영원한 사랑 이지요. 영원한 황홀 이지요. 영혼을 초월한 대 우주적인 희열 이었다. 기쁨 이었다. 모든 인류가 다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런 울타리를 초월한 기쁨 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여져요. 해석을 아니 해석이 아니에요. 그렇게 믿어질 수가 없어요. 그 인물 됨됨이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선생님은 우리 식구들의 선생님이 아니고 모든 인류의 스승이 되셔서 세상을 떠나주셨다. 말로 그렇게 하는 말이 아니고 그분 됨됨이, 그분의 인격이 그분의 신앙이 그분의 완벽이 그분의 사랑이 완전에 예속된 분이시다. 완성을 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믿습니다. 그 이 선생님의 노래하나 있지요? 부르십시다.

 

추도가

1)저 서산에 해동산위에 달떠오니 우리주님 따라가신 스승생각 새로워라.

그 물속에 비친 저 달 내 마음과 흡사하네.

2)백합 같은 그 순정을 그리스도에게로만 십여 년을 하루같이 말씀하신 그 비밀은 그 피 속에 스며들어 귓전에 사무치네.

3)샛별 같은 네 동정을 주님께만 바치라고 그 피땀이 다 진하고 그 숨결이 다하도록 못 잊어서 다시 말씀하시었네.

4)네 정절을 주께 봉헌 하겠느냐 물으실 때 예 말하고 대답하니 다시 말씀 하시기를 너 지극히 작은이를 섬기라고 하시었네.

5)그 귀향이 다 풀리고 주님 앞에 가시던 날 감격함을 못 이기고 오, 기뻐라. 오, 기뻐라. 말하시던 그 음성이 지금 같이 들려오네.

6)십자가에 달리셔서 목마르다 하시던 임 그 사랑이 목이 말라 부르짖던 그 음성이 가시던 임 연상하면 또 다시만 들려오네.

7)그 순결과 가난함과 그 순명의 복음삼덕 우리주님 앞서시고 저의 스승 따르시니 그 사랑에 의지하고 저희들도 따릅니다.

 

앞줄 왼쪽 첫번째 정한나 어머니

 

이글은 2001년 1월4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정한나 집사님이 도구박골로 출가할때 이야기 입니다.

‘나라는 놈을 죽여라.’ 그게 수레기 어머니 철학이에요. 제가 이야기 하지요. 한나 어머니가 가정살림을 다 마을사람에게 나누어줘 버리고 다 집에 있는 것을 다 없애버리고 소유는 쌀 한말이에요. 쌀 한말이면 일 년 먹을 수 있다고 생각 하셨습니다. 쌀 한말을 머리에 이고 도구박 골로 들어가셨어요. 그때 제가 거기 살았거든요. 그날 그때, 수레기 어머니 부엌 쪽에다 방 한 칸 들였어요. 허락받고, 저도 조금 흙을 이겨 발라 드렸는데 그렇게 기뻐하더라고, 그런데 그 막을 치고 방이 되어가지고 사세요. 그런데 가슴아피가 일어났어요. 한나 어머니가 참 과부로서 자식을 다 키우고 보내버리고 홀 홀 단신 출가해 가지고 이제는 마음을 닦고 있는데 그 옛날 독이 있지요. 몸속에, 옛날 살아가던 흔적도 있고 또 옛날에 가슴 아팠던 흔적도 있지 않아요? 그래 가슴아피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며칠을 끙끙 앓고 누워있는 거예요. 식사를 못하시고, 그러니까 약이 없지요. 그때는 약도 안 먹을 때니까, 사람이 죽어가는 거지요. 죽어가요. 그러니까 수레기 어머니가 문을 탁 열어보고 ‘아이고 걸렸고만, 걸렸어. 고놈만 없으면 살 텐데.’ 그래 수레기 어머니의 철학은 ‘나란 놈이요,’ 나란 놈이 있어서 며느리 섭섭한 마음 아들 섭섭한 마음, 그것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가슴이 아파. 그걸 초월해야 가슴이 안 아프다는 거지요. ‘나라는 놈이 있고만,’ 왜 아프냐는 거예요. 마음이 평안하면 병이 없을 텐데 마음이 불안하니까 병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고향 떠나고 살림 다 없애고 자식 다 떠나보내고 몸만 와있지, 마음이 지금 걱정하고 있어요. 자녀들이 다 밖에 있고 아이고, 그놈만 던져버리면 그만 벌떡 일어날 텐데. 그놈 그놈만 쫒아내면 될 텐데.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알아들었어요. 처음에 출가하시고 비가 많이 오던 날 조금만 말해도 뒷방에서 다 들려요. 앞방에서 어머니들이 이야기 하는 거 다 들려요. 비가 오니까 두 분이 밭에 못나가요. 종일 한나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배당 이야기, 과거 이야기, 그러니까 손으로 뭔 일 하고 계시지요? 무슨 삼을 삼는지 알 수 없어요. 종일 둘이 방에서 일하고 계시더라고요. 말이 안 끝나.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이야기 하세요. 한나 어머니 혼자 이야기 하는 거지요. 다 들어주신 거예요. 밤에도 이야기, 낮에도 이야기, 과부의 설움이지요. 그 청춘과부가 되어갖고 살아온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하는 거예요. 다 들어주세요. 결론은 그거에요. 다 들어주고 ‘아갸갸 아갸갸 나란 놈이 안 죽었구먼, 지가 지숭 보네.’ 결론이 그거에요. 일주일동안 한스러운 이야기 했는데 ‘니가 니숭 봤다.’ 그러고 말아 버려요. 며느리 흉도 아니고 아들 흉도 아니고 남편 흉도 아니고 ‘지가 지숭 보구만. 아이고, 나란 놈이 죽어야 제.’ ‘나란 놈, 나란 놈이 안 죽어서 저렇게 가슴 아파 가슴앓이를 하는 거야.’ 자기 번뇌 자기 욕망 자기 미련 자기 미숙, 익지를 않아 자기가 건지가 있어. 건지 자꾸 뒤를 돌아봐. 그래 가슴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 밥을 못 먹고 누워 계세요. 그래 뿌리를 빼는 거지요. 뿌리를 빼. 그러니까 무식한 어른들이 철학가들이지요. 철학이에요. 나라는 놈, 예수를 믿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평화를 얻고 싶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같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같이 영적 사람이 되려거든 자기를 죽여라. 십자가를 져라. 껍질을 죽여라. 라는 거예요. 껍질을 깨라. 그럼 자유롭게 날아라. 눈을 뜨라. 태양이 보이지 않느냐? 별이 보이지 않느냐? 그거에요. 다시 말하면 해탈하라. 해탈, 껍질을 벗어라. 그러니까 동광원이라는 말은 껍질을 벗은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 뜻이거든요. 깨어난 사람들이다. 눈 뜬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훌훌 나는 사람들이야.

 

 

 이글은 1990년 1월6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한나 어머니께서 능주 교회 종을 치던 과부 집사님이시거든요. 옛날에 그 댁이 교회 3일 동안 빌려가지고 우리가 말하면 성경공부 했어요. 해방 막 그 이듬해요. 그때도 한번 참석해 봤습니다. 그때는 개인 개인 공동생활 아니니까요. 개인 개인이 소문 듣고 찾아가서 만나면 성경공부 할 때 옆에 앉아있었지요. 그런데 광주에서 가신다. 그래서 돌아가신 박공님하고 이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이 선생님을 고맙게 봐버리고 꼭 애기 같아요. 그때는 법도 없고 엄하지도 않고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그러십디다. 그래 손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무서워요. 무릎을 꿇고 아주 무섭대요. 그렇게 짱짱하게 하실 때가 있지만 마음을 놓고 허물이 없는 사이에는 애기 같아요. 아주 애기 같아요. 부드럽고, 그것도 목격했어요. 그러니까 몸가짐이 그렇더라 그 말씀입니다. 성경도 그때는 몰라요.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고 이 선생님이 어떻게 밥 먹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면 무릎 꿇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 무릎 어떻게 풀어버리는가 보자. 그걸 주목할 때거든요.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신 분은 그렇게 지내신 것이 지금 회상이 됩니다. 

 

 

그래서 아까 하신 말씀이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면 아껴 쓰면 얼마나 절제의 생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거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아껴 쓰고 절약해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를 불러일으킵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껴 쓰고 나무 한 부스러기를 아껴 때는 그 모습은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가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가난했다 그 말은 낭비 했다. 그런 결론이라는 말이에요.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망했다. 그 집안이 망했다. 평소에 천박하게 살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지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집니다. 돌 하나 풀 한포기 채소 한 가닥을 천히 보면 자기 자신이 천해 진다. 저는 그렇게 생각 됩디다. 제가 또 한 번은 아침 해가 뜰 때부터 해가 툭 뜰 때까지 남원에서요. 몇 집 어머니들이 갈 때 따라간 일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는 그 이튼 날 선생님이 오신다는 기별이 오셨던가 봐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요. 이렇게 큰상에, 자기 평생에 못 먹은 거 다 차려 놨어요. 식혜도 해놓고 떡도 해놓고 과일도 깎아놓고 고기는 안 잡수시니까 나물 해놓고 밥을 해놓고 국 끓이고 미역국 끓이고 김이 뭉게뭉게 나요. 그럼 딱 일어서요. 식사 하실까보다 안심하고 부엌에 어머니가 계신데 딱 일어나 나가버리면, 울어요. 울어, 아 밤새도록 지성을 다했는데 입을 안대고 나오시면요. 

 

 

그럼 그 다음 집에 가지요. 조금 거리 있으면 인제 거기서도 알고요. 또 밥상이 나와요. 그럼 저기서 먹어버렸으면 이 집은 얼마나 섭섭할까요? 또 들어가 조금 앉아 있다가 그냥 나와 버려요. 그 어머니 또 울어요. 참 살과 같이 피와 같이 정성을 다해 차려 놓은 음식인데 안 잡수세요. 그러니까 한 세집이 네 집이 가면 이제 해가 낯 되어버리지요. 한집에서도 밥은 안 잡수셨지만 배가 불러요. 영적으로 배불러요. 그럼 누구 집에서든지 음식은 입에 안 댔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보고 잡수시고 가시면 육적으로 만족하셨겠지요? 그러나 안 잡수시고 갈 때 영으로 그 천상의 위로를 받았지요? 천상의 위로를 받아가지고 생명도 자식도 재산도 아깝지 않아요. 모든 재산 모든 자녀를 이 선생님 뜻대로 해 달라고 던져버린 거예요. 이 선생님 앞에 던져버려. 애기가 한 살 먹어서 주고 두 살 먹어서 주고 내가 키운 것 보다 당신은 내 자식을 맡을 만한 인격이 있다. 믿음직하다. 내 자식을 맡아 주시오. 그런 애기들이 모인 곳이 양육원 애기들, 그런 소년이 모인 곳이 고아원, 그런 어머니 할머니가 모인 곳이 양로원 그랬지요. 

 

 

처음에 절대 양녀도 아니고 고아도 그 집 어린 애기들 유치만 그 집 조금 큰 애기들 고아 반 그 집 시어머니는 할머니 반 그 집 시아버지는 할아버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중에 형성이 되었지요. 그 식구들이 그러니까 집집이 가서 맛이라도 보고 냉수를 마셨어요. 네 것 내 것 따로 있고 내 재산 내가 지키고 내 자식 내가 키우고 그럼 이 공동체 형성이 안 되어요. 동광원이라는 울타리 형성이 안 되어요. 울타리 그 생명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을 이 선생님의 생활에서 감화를 받았다고요. 생활에서, 뭐 성경말씀은 그 분은 별로 말 안했지요. 신령한 말도 별로 안하고 기적도 없고 그 인격적인 그 사랑 그 무엇인지 모르게 먹는 것도 아니고 입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느껴지는 평화, 영성으로 느껴지는 감화 영성적으로 느껴지는 그 어떠한  인력 끄는 힘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부모형제 친척 고향 모든 것을 이 선생님께 위탁하고는 일체 의심을 안했지요. 조금도 의심 안 해버렸어요.

 


 그렇게 생각해 보고 아까 글을 다시 읽어보고 들어보세요. 자기 길을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배고픈 것만 생각하면 한 3일 굶고 쑥떡 찰떡이 김이 뭉게뭉게 나는 게 그렇게 기도하고 딱 그럴 수 없어요. 자기를 생각했다면 자기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다른 영혼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자비가 가슴에 꽉 찼었지요. 그러면 아까 그 후실이라는 부잣집 부인은요. 그 떡을 안 먹고 갔다고 얼마나 대성통곡을 하고 울고 내가 죄를 지어서 안 잡수시고 가셨다. 싶어서 못내 대성통곡 하다가 후실이라는 가문에서 뛰어나와 버렸거든 살수가 없어 불안해서, 그래 광주에 와서 양림교회 앞에 집짓고 사신다는 말 들었어요. 독립해 가지고, 그때 떡을 먹어버렸으면 안심하고 살 텐데요. 소실로 그렇지 않아요? 만나가지고 말로 후실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시오. 그러지 않았거든, 마음으로 영으로 하셨지, 

 

 

자기를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얌전타는 생각 잊으셔야 합니다. 양반 생각이 너무 짙으면 고기 장사 비린내 모르듯이 모릅니다. 허례허식 양반 껍질로 얌전한 것 천국의 사람이 되려면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여간 다른 일마시고 죄 찾는 일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쳐흐름을 깨닫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선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 되려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 입으심을 깨달아 알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 없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온순한 심령으로 부족한 것이 참 행복이라고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자유 방종 않는 일은 참 자유 얻는 방도입니다. 자유 없는 생활 주를 생각하는 시간 아 그 얼마나 자유와 참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위안이 마음속에 새겨들어 오는 것인지요? 물 한 그릇을 자유로 못 마시고 먹을 것을 하나 못 먹고 입고 싶은 옷을 못해 입고 살고 싶은데서 못살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부자유, 그를 불러서 참 행복은 이 사람들의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시고 갈 데도 못가고 보고 싶은 것도 못보고 듣고 싶은 것도 못 듣고 마음대로 못하는 생활이야 말로 아 얼마나 참 자유로운 행복 된 생활인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던 정경은 생활로 우리가 더듬어볼 때 이 말씀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여기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러운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육이오가 나기 전 전해 이지요. 서울 어머니가 살던 문바위 집터가 비어있었습니다. 그해는 금남 언니도 해방 후에 한 일 년 있다 내려가 버리고 동구씨도 내려가 버리고 서울 어머니도 하산해 버리고 집이 텅텅 비어 있습디다요. ‘준호,’ 그러니까 ‘예’ ‘오늘 문바위에 가봅시다.’ ‘예,’ 따라갔어요. 방에 들어 가 보니 해는 집니다. ‘준호, 준호는 여기 남으시오.’ 그리고 혼자 내려가 버리세요. 참 그때 지금제가 복 있는 것을 느껴요. 그때 어떻게 믿었을까? 이 선생님의 말을 믿었을까? 무조건이에요. 이불이 있을까? 요가 있을까? 밥이 있을까? 옷이 있을까? 가사 나무가 있을까? 성냥이 있을까? 해만지면 추운 때거든요. 그러니까 혼자 내려가 버리시는데 해가 지니까 쓸쓸하고 처량 합디다요. 

 

 

더듬어 보니까 성냥 하나가 있어요. 불을 탁 피워가지고 뒷산에 가 낙엽이 많지요. 가져다 불 때고 자고 그 이튼 날 어린 소년 둘이 그때 귀주 어머니가 어머니고요. 어린 소년 제가 5-6명 데리고 있었지요. 담요 하나 단지 하나 뭐 김치 조금하고 쌀 한 되하고 그냥 쭉 성냥 한 곽 하고 딱 부쳐줍디다. 그리고 애기들 가버렸지요. 이유는 없어요. 설명도 없어요. 거기 있으라. 하고는 양식이 와버리니 이제 오지 말라는 기별이거든, 짐작했지요. 오지 말라나보다. 거기서 한 일주일 있으니까 애기 하나를 보내줍디다. 혼자 있으면 적적하다고 애기 하고 둘이 살지요. 한 달이나, 그냥 한 달 후에는 어머니하고 애기들 다시 다 올라와 버려요. 청소 집에 있는 애기들이, 그래서 소문을 들으니까 광주에서 그때 무슨 라디오도 없고 깊은 산에 있으니까 육이오가 일어났든가 동광원이 출발 했던가 보지요. 동광원 식구 백 명이 왔다고 거기 있던 애기들은 전부 산으로 올려 보냈어요. 얼마나 명철하세요? 

 

 

거기 살던 사람이 하나만 남아도 안 되어요. 거기 그때는 밤손님 와서 물어보고 낮에는 순경이 와서 물어보고 거기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이 남으면 안 되거든요. 유화래 여사가 오기 위해서 길을 닦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세례요한이 길을 닦듯이 유화래 여사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사람은 옛날에 살던 사람은 전부 비켜 버린 거예요. 미리서,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있도록 하고 그 길목으로 올라가실 수 있게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그 길목에 우리 아기들이 살았거든요. 우리 아기들을 전부 산으로 올려버려. 그 아기들은 동광원 애기들이 아니에요. 동광원보다 일 년 전에 살던 애기들 이지요. 그래 이 조금 있으니까 짐작이 가요. 뭔 난리가 일어났나보다. 그러면 육이오가 일어나기 전 몇 달 전에 왜 무슨 직감이 있냐? 그거에요. 예언적으로 아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어쩐 직감이 있어서 저를 미리 산으로 올려보내고 그 다음에 애기들이 다 올라오게 그렇게 착 착 착 됩디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요. 

 

조금 지나 반대편에 조사연 언님댁 집
오른쪽 첫번째 조사연 언님

그럼 그때 저도 어린 애기들을 밤낮으로 데리고 살던 선생인데 애기들하고 저를 딱 분리했거든. 한 달 이상 애기들 옆에 못 가게하고 그런데 그 담에 보니까 육이오가 일어나고 애기들은 제가 데리고 산에 피신했거든요. 죽 광주서 온 애기들도요. 이왕 거기서 사는 애기들은 못 만나봤어요. 육이오가 끝나도록, 서로 왕래가 없어요. 서로 이쪽저쪽 비밀을 말할 수 없지 않아요? 과거에 있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이 왔다갔다 못하니까 서로 비밀이 보장되어요. 지리 모든 사정이요. 지금 보면 얼마나 참 지혜롭고 바로 된 것인지요? 그러면 그때 저도 청년 아닙니까? 어떻게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 했을까? 그게 참 은혜롭고 복 있어요. 제가 순종한 것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지요. 말이 쉽지, 산속에 들어가기도, 보러 갑시다. 그리고는 ‘준호, 여기 남으십시오.’ 그러면 밤에 도망가 버린다고요. 화가 나서 이해가 안 되면요. 그렇게 안 됐어요. 무조건 산에 있으시오. 하니까 ‘예,’ 그만큼 이 선생님이 영력이 있었지요. 아무 설명 안 해도 산에 남으시오. 그러면 예, 그래도 아무 마음에 부담이 없어요. 이 선생님께 대해서 아무 의심이 없어 좋게 해 주시려고 그러시지 믿어버리는 거예요. 그랬어요. 

 

 

지금도 그러란 뜻이에요. 우리 원장님이 어느 보모더러 이렇게 하시오. 그러면 무조건 예, 하는 것이지. 왜 날 이래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행복스런 이들의 택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복종 한다는 것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란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순수한 순종, 어린 아기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체험 했다는 보고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도 꼭 언니가 위에 보모님이 이렇게 이것 하십시오. 가사 오늘 금식 하십시오. 찬물 잡수시오. 예, 그러고 먹고 그렇게 살아요. 왜 날 찬물 먹으라할까? 그러지 말라는 거지요. 자 따라 읽으십시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이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을 하거나 불평을 하지 말고 어린 양과 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글은 2003년 8월16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밤새도록 어머니가 살아오신 사연 이야기를 해요. 예수 믿고 보모로 발탁되어 가지고 어머니가 되시기까지의 발자취를 이야기 하십니다. 그때 이야기가 생생합니다. 동광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신다면 나는 그게 동광원이다 그거에요. 그러면 왜? 이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을까? 한 10년 전에 능주 교회에 오셨기에 하도 젊은 청년이 유망해서 내가 이야기 했다고 내 소원이 다섯 가지요. 그때는 과부가 아니고 남편이 살아계시니까 남편이 죽을병이 걸렸어요. 그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데 내가예배당에서 기도하는데 이 선생님이 당신은 뭔 기도해요? 하고 그래서 내 기도는 다섯 가지요. 독립, 첫째가 독립을 위해서 하나님 우리나라를 독립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합니다. 또 한 가지는 어떻게 문둥이들이 동냥하면 딱하고 불쌍하던지 문둥이들이 살 곳을 하나 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해왔다고 또 이 딱한 것들이 부모 잃고 어린 애기들이 우는걸 보면 이 부모 없는 애기들이 살 곳을 주세요. 그렇게 딱딱 세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남편이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내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에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주십시오. 그럼 네 가지지요. 또 한 가지는 역시 사회적인 관계에요. 자식 없는 노인들 그 늙어가지고 자식 없이 불쌍하게 사는 자식 없는 노인들이 잘 살 수 있는 집하나 주세요. 내가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했다는 겁니다. 이 선생님한테 그렇게 그 말 한번 말했는데 십년 전에 한말 딱 기억해가지고 귀주집사 당신이 십년 전에 그렇게 기도한단 말 내가 들었는데 이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시오. 그랬다는 거예요. 십년 전에 내가 한번 이야기 했는데 그걸 기억하시고 당신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십시오. 당신 기도가 그것 아니었소? 그래서 내가 왔습니다. 그럽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생각해보면 내 다섯 가지 기도가 다 이루어졌다 그거요. 평생 기도하던 독립이 이루어졌지요. 해방되던 2년 후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사무치게 원하던 독립이 이루어졌어도 내 기도가 응답되었소. 또 들으니 소록도에 나병원이 생기고 또 들으니 광주에 양로원이 생기고 그때 고아원이 있는가 모르겠소. 어쨌든 그 소원이 자기 남편은 회개하고 믿고 세상 떠나시고 기도 다 들어 주시고 이제 고아원이 있단 말도 들었지만 나 같은 것도 불러서 내 평생소원인 고아들의 엄마가 되라니 나는 천명인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고 순종하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엄숙하니 십년 전의 교인 말 들었다가 기억하시고 십년 후의 그 어머니의 소원을 알고 당신 보모가 되십쇼. 참 천 명이지요. 아 이 선생님이 그렇게 일 하시는구나. 그이야기를 들었어요. 누구 고백을 들어주시고 다 기억하시고 그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 두 살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그 이야기가 기니까 밤새 들었지요.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제가 다 못 하지 않아요? 요약해서 간단하게 이야기 드린다면 우리 집안이 불교집안 이었습니다. 큰아버지가 불이사(不二寺) 지금 있어요. 그 불이사를 창건하시고 중이 되시고 또 큰아버지의 어머니가 할머니지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불교의 신앙이 깊으시고 우리 할아버지는 천주교를 믿고 기도를 많이 하셨고 우리 어머니는 아직은 확실한 종교가 없고 우리 할머니는 아주 신실한 불교신자인데 내가 두 살 세 살 때부터 나는 동생들이 많으니까 그 집안 목사가 몇 분 나왔지요. 동생들이 또 오빠도 목사였지요. 그러니까 그런 집안이기 때문에 일찍 할머니 집에 의탁을 해서 할머니가 데리고 잠을 잤답니다. 귀주 어머니는 할머니 슬하에서 컸어요. 그런데 자기가 일곱 살 먹던 해던가 확실히 모르겠어요. 일본과 한국이 합방이 되더랍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대성통곡을 아이고 우리 임금님을 일본 놈이 잡아갔단다. 잡아갔단다. 우리 임금님을 일본 놈이 잡아갔단다. 대성통곡을 하시고 울 때 일곱 살 먹은 게 같이 울었다고 그래요. 같이 울고 할머니 울면 같이 울고 새벽이 되면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기도를 하시고 우리 임금님을 보내주십시오. 우리 임금님을 보내주십시오. 그래 할머니 따라서 같이 그 소리를 하고 두 손 합장하면 같이하고 달이 뜨면 할머니가 밤중에 달을 보고 빌 때 우리 임금님 보내주십시오. 우리나라 독립해 주십시오. 같이 그 기도를 열일곱 살 먹을 때까지 새벽이면 꼭 세시가 되면 찬물로 목욕하시면 같이 따라하고 할머니가 우시면 같이 울고 할머니가 기도하면 같이 따라 하기를 십년 열일곱 살이 먹었는데 할머니 기도가 왜 안 이루어질까? 할머니같이 기도해서는 우리나라는 독립이 안 되겠다 할머니를 믿을 수 없다. 라는 의심이 생기더라고 그래 할머니 기도는 안 되겠다. 그러면 두 살 먹어서부터 항상 동경하며 쳐다보던 화학산 속에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 속에는 장수가 계시고 밤중이면 장수가 나와서 칼 연습을 하신다는데 안 되겠다 할머니 따라서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화학산으로 뛰어 들어가서 장수를 만나가지고 칼 쓰는 법을 배워가지고 내가 장수가 되어가지고 한국 사람을 군인을 만들어 가지고 일본사람을 전쟁을 해가지고 내가 독립을 해야지 내가 기도만 해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요. 열여덟 살 먹어서 그래서 할머니 몰래 어찌됐든지 화학산에 있는 장수를 만날 양으로 그런 꿈을 꾸고 있는데 어머니가 안방으로 오라하더니 ‘얘야 너는 나이가 열일곱 살이니 여자는 출가하는 법이다. 혼처가 좋게 났으니까 결혼할 준비를 하라.’ 그 말씀을 하시더라. 그래요. 그때 자기가 원통하고, 원통하고 내가 여자던가 그때까지는 자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그날 밤 야속하게도 자기가 여자인 것을 깨닫게 되고 살맛이 없단 말이에요. 내가 남자여야 장수한테 찾아가서 전술을 배우고 전쟁을 일으킬 텐데 이놈의 몸뚱어리가 여자라니 나는 죽어버려야겠다. 그날부터 죽을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해. 철두철미하게 죽을 결심을 하고 밥을 안 먹어. 그 말을 않고 굶고 딸이 병이 드니까 전 가족이 이건 분명 입을 열수 없으니까 절대 말 않거든 그러니까 짐작으로 이 애가 갑자기 그 혼처가 맘에 안 들어서 이걸 반대하는 거다. 본인이 시집가기 싫어서 그러니까 그걸 포기하자. 아주 그 집안 덕망이 높고 세상말로 세도가 높고 돈이 많고 좋은 집안인데 애가 그걸 싫어하나보다. 그렇다면 아무리 아까워도 그 집을 포기하고 다른 집을 혼처를 구하자하고 혼처를 바꾸시더라. 그래요.

 

 

그래도 밥을 안 먹어요. 죽을 결심을 했으니까 혼처를 또 바꾸셔 상대를 또 바꿔 그러니 자기가 더 죽겠어. 부모가 뭐이라고 내가 밥을 안 먹는 것은 혼처가 나쁜 것이 아니고 내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는 절망에서 이렇게 굶는 것인데 부모가 이러신다 싶어서 급기야 안 되겠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 운명이 박덕해서 혼인을 해야 부모를 안심시키겠다. 내가 자식인데 어떻게 부모께 이렇게 불효할 수 없다 싶어서 그럼 희망은 있다 이거에요. 그러면 부모가 하신대로 무조건 결혼한다. 왜 그때는 남녀가 첫날밤에 쳐다보고 그 안 때는 절대로 얼굴을 보지 않을 때 아닙니까? 그때만 해도 그러니까 남자를 전에 알아야지만 누군지 모르니까 첫날밤에 들어서 이야기를 해보고 그 인격 됨됨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결혼식을 하고 첫날밤에 내가 이 이야기를 해보고 이 사람이 장수를 날수 있는 혈통이라면 내가 몸을 허락하리라. 정식으로 결혼생활 할 것이고 이 이야기를 해봐서 그 혈통이 뭐 그냥 밥이나 죽이는 남자라면 절대 수절을 해야겠다. 결심을 하고 엄마 나 시집 갈라요. 그 말하고 결혼식을 했답니다. 그러니 집안에서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결혼식을 딱 하고 첫날밤에 둘이 이야기를 해보니까 한말 두말 세말 네말 죽 해보니까 아 이 사람의 씨를 받아갖고는 저 소같이 일하는 땔나무꾼이나 낳지 절대 지도자는 안 되겠다. 나라를 위한 백성은 안 되겠다 해서 딱 결심하고 나는 식은 했지만 절대 나는 이 남자와 관계를 맺지 못 하겠다. 이건 천명이다. 한국의 처녀로 태어나 운명이 박덕해서 결혼했지만 이런 씨를 받아놓으면 결국은 이 독립은 늦어진다. 밥이나 먹을 사람이 태어나면 결심하고 몸을 지키기 시작하는데 한 달이가도 두 달이가도 석 달이가도 그 남편이 매를 든 거예요. 기어이 밤마다 매를 때리고 가둬놓고 매를 때리고 그런데 얼마나 논일 밭일 소 키우는 일을 분명히 하기 때문에 시아버지가 욕심을 딱 내가지고 집안에 일꾼이 없다가 남자이상에 일 잘해주니까 시아버지가 아들한테 매를 뺏어버리고 시아버지 방에 가서 피신을 시키는 거예요.

 

 

밤마다 그렇게 하기를 일 년 이년 싸우고 이젠 이것이 귀신이 들렸다. 절대 이것은 본뜻이 아니다. 신이 들렸으니까 굿을 해야 한다고 큰굿 작은 굿을 냅다 했다. 귀신 나가라고 귀신도 안 나가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니까 결국에는 무관해요. 그러나 절대 시아버지는 아이구, 내 딸 내 자식 내 자식 절대 아들의 매를 못 때리도록 보호해 주는 거 결국 시아버지 방에서 세월을 보내고 남편 잠깐 들어가서 방이나 소제해주고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로서 이십대 스물일곱 먹도록 밤새도록 시간이 끝이 나겠어요? 그런 소설이 없지요. 맨발 벗고 막 오리를 쫓겨 가고 쫒아오면 내빼기도 하고 잡혀가기도 하고 머리가 다 빠지기도 하고 질질 끌고 오기도 하고 발로 차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기어이 몸을 지키고 절대 내가 이 씨를 안 받아야겠다. 그러니까 남편이 젊은 나이에 전염병이 드시더니 자꾸 회생이 안 되고 그때는 생명을 바쳐서 간호했대요.

 

 

좋은 약이라는 것은 다해서 재산을 다 팔아서 봉양을 하고 간호를 하고 그러니까 남편이 하루는 밖에서만 간호하지, 방에는 안 들어가고, 부인 다시 말하면 말을 높여가지고 방에 좀 들어오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 아 부인 내가 큰 죄를 지었소. 내가 이렇게 병들어 죽을 시간이 되고 보니 나  깨달았소. 나는 당신을 오해했소. 나는 한 여자로 태어나서 당신이 나한테 시집온 여자인줄 알고 내가 그렇게 과격하게 매를 때렸소. 내가 이렇게 천벌을 받았소. 용서해 주시오. 내가 오늘날 아는 것은 당신은 하나님의 딸이오. 당신이 죄가 많아서 그랬던지 하늘나라에서 땅에 와 내 집에 온 손님인데 간단하게 내 부인인줄 알고 내가 손을 들었소. 용서하시오. 나는 오늘부터 절대로 당신을 내 부인으로 안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딸로 보고 나는 당신을 스승으로 삼겠으니까 이제는 내 옆에 오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안심하고 방에 들어오셔서 일 보십시오. 그리 선언하시고는 깍듯이 존경하시더라고요. 그래 참 본의 아니게 귀부인이 되었지요. 아 부인 들어오십시오. 어떻게 이렇게 나 같은 놈에게 약을 대려 주십니까? 이 은혜를 못 갚겠습니다. 그러면 어르신께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한번 낳았다가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 믿고 돌아가시면 절대 죽지 않소. 부활하십니다. 예수님 믿고 부활하시고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네 그러면 예수님 믿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자기 남편이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아 부인 내가 잘못했소. 용서해 주시오. 내가 모르고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시오. 그래서 남매지간이 되었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자기들은 아들딸이시고 이렇게, 이렇게 세월지내시다가 그 남편은 급기야 하늘나라 갈 시간이 되어서 임종을 했답니다. 

 


 그래 청풍 어머니도 과부지요. 청춘과부인데 내가 살길은 다른 길은 없다. 재봉틀 하나를 의지하고 그리고 청풍어머니도 과부시고 아들하나 낳으셨으니까 우리 둘이 자식을 둘이 키웁시다. 한사람은 낳고 한사람은 키우고 그렇게 해서 김 집사님을 두 과부가 아들삼고 키웠답니다. 한번 가본일 있거든요. 누가 보면 귀족적이고 멋지고 성스럽지요. 두 젊은 과부가 애기 하나를 키우셨답니다. 그렇게 재봉틀을 의지하고 일생을 바느질품을 들어서 사셨지요. 그래 세 식구 꼭 먹을 양식만 버는 거예요. 절대 욕심 부리지 않고 양식 떨어지면 남의 저고리나 치마하나 해주고 그 쌀이나 보리쌀 한 되 받으시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셨어요. 그러신데 보십시오. 교회 잘 다니셨답니다. 남편 세상 떠나시고 그때 귀주 어머니를 만났어요. 귀주 어머니 과부되시고 두 분 사이는 한 몸이지요. 어 야! 오늘 우리 집에 오게 땔 나무 군이 말을 잘하데, 맨발 벗고 젊은 청년인데 성경을 잘 푼단 말이 세. 어디 한번 가볼까 그래 와서 보니까 이 선생 머리 싹 감고 젊은 청년인데 맨발벗고 홋바지 입고 들어와서 성경말씀을 가르치는데 예법 잘 가르치더라고 그래요. 두 과부가 들어보니까 그렇게 해서 귀주 어머니 작은방에서 이 선생님 오시면 무릎 꿇고 잠깐 들어와서 과부 집이니까 방석에 앉지 않고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 했다고 그래요. 그때 그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당신은 뭘 기도하시오? 나는 다섯 가지 소원이 있소. 그렇게 해서 그 소원을 한번 말 했는데 나를 기억해가지고 십년 후에 당신 소원이 기도 아니오? 당신 고아원을 세우고 싶어 했지요? 고아원을 창설할 테니 와서 보모가 되시오. 그래 내가 왔습니다. 이러시더라구요. 자 대강 이야기 끝났네요. 어머니 이야기 그런데 밥을 차릴 때 그분이 남존여비를 계셨던가 학생들이 고아가 다섯 명인데 나까지 여섯이요. 여섯 사람 밥과 반찬은 꼭 김치를 썰 때도 껍질은 어머니가 잡수시고 네모반듯하게 썰어가지고 철저한 가정교육 있으세요. 남자상에는 꼭 임금님 온 것같이 애기 다섯 나 여섯 남자상은 깨끗이 차립니다. 김치 한 그릇 죽 한 그릇이라도 꼭 그래요. 사진관 부인도 보모로 오셨어요. 후보로, 아까 어머니는 정보모이고 부보모로 오셨다고요. 소반 바위로 발령 받기 전에 연습으로 하지요. 한 반년동안 거기서 예절을 배우는 겁니다. 그러면 사진관 부인은 부잣집 마나님 아닙니까? 고춧가루는 일 년 분 사놓으면 사진관 부인이 고춧가루를 많이 쳐 먹나 봐요. 그러면 ‘여보십쇼, 살림은 이러면 안 됩니다. 여기는 부잣집이 아니요. 이거 일 년 먹을 고추 가룬데 그렇게 많이 치면 됩니까?’ 이렇게 가르쳐요. 방하고 정자가 딱 붙었거든, 그러니까 방에가 있어도 다 들려요. 그럼 예 그래 안 해요. 어물 쩡 하고 마는데 그럼 고춧가루 또 쳤어. 한번 말하면 들어야지 왜 두 번 말시켜 가르쳤어요. 반찬을 담을 때 남자상에다 삼각형난거 쪼가리를 놨다 이건 뭔 짓을 해요? 남자상에는 반듯한 걸 놓으라고 했는데 왜 이런 걸 차렸냐고 막 꾸지람을 하세요. 방에 다 들려요. 어떻게 부끄럽고요. 방에서 가만가만 말씀하시지만 가만가만 말해도 다 들려요. 매일 꾸지람 입니다. 어떻게 엄하게 가르치는지 철두철미하게 가르쳐요 아 그분도 군수 부인이고 그런 귀한 집 마나님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깨끗이 가르칩니다. 막 훈수를 해요. 이건 이렇게 하고 반찬은 이렇게 차리고 수저 이렇게 놓고 그렇게 양념은 이렇게 치고 옷을 이렇게 빨고 그걸 다 배워가지고 발령을 받아가지고 가셨어요.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냥 그렇게 쉽게 가르치지 않고 엄하게 똑 떨어지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육 개월 동안 보모 직을 배워가지고 보모로 취직을 시키시더라고요. 그런 것이 문제는 삼작가지고 밥을 어떻게 해서 밥을 먹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 아니겠어요? 아무리 적게 한다 해요. 쌀을 더 넣지 않아요. 그럼 한 끼 세 끼 밥을 먹으려면 일작해야 하는데 또 십일조 띠었으니까 일작이 못되지요. 그 규모라는 것은 보통 규모가 아니에요. 오늘 여러분이 해 보시지요. 일작 쌀을 내어가지고 풀을 뜯어오든지 쑥 뜯어 오든지 사람이 먹게 해보세요. 그럼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 년 넉 근이 살았거든요. 어머니들이 그 규모를 가지고 그래 철두철미하게 규모를 가르쳐요. 칼로 베듯이 여간 마음을 놓아버리면 동이 떨어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