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산 각수봉 근처에 있는 뿔바위 아래 암굴에서 6.25 동란시 미국인 선교사 유하레(수피아여고 창설자)씨께서 동광원의 보호로 피신했던 곳을 보고 내려와 차에 올라 이공 이세종 선생이 마지막 은둔 수도하시고 돌아가신 장흥 유치로갔다. 그곳에는 삼우엘 장로님이 다시 움막을 짓고 이현길 수사님이 계셨었는데 지금은 김규성집사님이 계셨다. 이곳에 이공께서 영면하시다가 등광리로 분토를 옮겨 갔기에 빈무덤이지만 이자리가 더 귀하다고 할수 있겠다.
이글은 김준호 선생(1990년 1월4일) 증언입니다.
헬라어로 수도자라는 말은 혼자 사는 사람, 고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은사, 숨어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세종은 말년에 세상과 사람 일체를 떠나 산에서 산으로 보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옛날 에집트 안토니처럼 깊은 산에 숨어 은사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았다. 고독과 침묵은 모든 수도자들이 영성을 길러가는 두 가지 방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었다. 그것은 에집트 사막의 수도자들이라든지 동굴 속 수도자들의 생활과 똑같은 생활이었다. 화학산 도구박골은 주위 십리에 인가가 없는 수도의 적지였다. 기적도 나타난 영지다. 지금도 거기에는 오두막 한 채밖에 없다. 이 공은 이 도구박골에서 지냈을 때 돌로 울타리를 쌓아놓고 그 안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앉아 매일 하늘만 쳐다보면서 명상하였다. 얼마 후 더 깊은 산 자기의 마지막 장소를 찾아 거기를 떠나 화학산 각시바위를 넘어 한새골에서 최종 말년을 지냈는데 그곳은 인가가 전혀 없는 산중이었다. 그를 따르는 은사인 제자 박 봉만을 시켜 통나무집을 사 일간 지었는데 그것은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거처할 집이었고 문도 성경대로 좁은 문이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세종은 평소에 늘 가르치기를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좁은 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야 한다. 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집을 지었다. 이 한새골 움막 좁은 문도 이 공은 너무 크다고 했다. 제자가 다시 뜯어 더 좁게 할까요? 하고 물으니 얼마나 오래 살 거라고 내버려 두시오. 했다. 결국 이 집에서 삼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모든 수도자와 성인들 같이 이 세종은 사무친 고독과 침묵과 철저한 은둔 속에서 살았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그의 영성은 놀랍게 자랐다. 수도자는 청빈과 순결 속에 영성 생활을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셨듯이 청빈은 신이 함께 사는 신빈이다. 그는 마음도 육신도 모두 순결 속에 살았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는데 이 세종은 그런 영성생활 했다. 그동안 먹을 것이 없어 쑥을 주식으로 했다. 세상 떠나기 전 3개월 동안은 공기만 먹고 산다면서 음식은 일절 물까지 끊었다. 이 세종은 세상 떠나기 3-4일 전에 사람을 시켜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사다리 형 시상 틀 상여를 만들어 자기가 거처하는 좁은 방에 놓았다. 그 위에 이불을 깔고 평소에 베던 목침을 놓고 자기를 그 위에 눕게 했다. 내가 목숨을 끊더라도 꼭 이대로 옮겨다 묻어줘요. 하고 시킨 대로 않고 다르게 하면 당신들 벌 받소. 그는 사다리 상여위에 누워 제자들에게 어깨에 상여를 떠메라고 하였다. 제자 5명이 시키는 대로 상여를 떠메니 성경 아모스 4장 11절을 읽게 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말씀이었다. 이 세종은 제자들이 상여를 어깨에 메면 상여 채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세 마디소리를 시켰다. 남편이 임종하는걸 보고는 그때까지 착실히 시중을 하며 병간호 하던 부인이 울음을 터뜨려 통곡했다. 이때 죽은 듯이 누워있던 이 공은 벌떡 일어나며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내가 가고 싶어 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명이 있으니 어찌할 수 없이 가는 것이오.’ 라고 말했다. 아내가 울음을 멈추자, 이 세종은 도로 누워 얼마 후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다음글은 2007년 12월25일 이공 산소를 옮기기전 방문한 기록이다.
<2007년 12월 25일 李空 이세종님을 찾아 전남 장흥군 유치면을 찾아갔다. 탐진땜을 지나고 보림사를 돌아 영암 금정쪽으로 (국도 23번) 가다가 화순,광주 이정표를따라 들어서면 길이 좁아져 1차편도인 임도로 들어선다.한참 오르다 보면 집 서 너채가 보인다.마을을 지나다 보면 전신주가 들어가는 골짜기로 갈림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규석 광업소가 나온다.그곳에 차를 세우고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화학산 바람재를 향해 오르면 정상 가까이 님의 묘소가 있다. 님은 이곳 산막에 사시다가 하늘에 오르셨다.>
실천신학자 박근원은 언젠가<기독교 사상>지에 이런 글을 쓴적이 있다.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어느 면으로 보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출은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신앙생활의 운동이었다. ...이 분들은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서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였고 그들의 영성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대가들의 신앙생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이세종은 한국교회 영성사의 큰 맥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다.그는 한국 개신교회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전해준 한국적 토착적 영성인이다.그는 신학자도 목회자도 장노도 아닌 평신도였으나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르며 복음을 말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고 증언한 한국적 영성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이세종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1930년대의 조직신학자 정경옥은 이세종을 가리켜 도암의 숨은 성자라고 하였다.-최흥욱-
다시 내려와 차를 타고 화순 도암에 있는 도구박골을 찾아갔다. 이곳은 수레기어머니를 비롯하여 김금남 수녀가 남원 갈보리에서 추운겨울 맨발로 걸어 들어와 수행하기도 했고 수많은 동광원 형제들이 거쳐간 곳이다. 화학산 성지의 중심지라 할수 있다고 본다.
6.25 피난시절을 그린 김준호선생의 증언 한토막을 올려본다.
그 산골짜기에 남은 사람은 이 현필 선생님 저 서울 어머니 셋이지요. 그런데 문공님이 떠나기 전 마을로 소개하기 전에 할 일이 있소. 그래요. 저기 지금 4키로 밖에 뿔바위 굴에 숨어계시는 차남씨 어머니를 우리하고 합류시켜 주시오. 모셔다 주시오. 모셔오라고 합해야겠다. 혼자 계시니까, 그런데 그 차남씨 어머니를 모시러 갈 때 저를 쩜매요. 그래 문공님하고 저하고 둘이 소재마을을 거쳐서 차남씨 어머니 계신데를 가서 선생님이 오시라 합니다.
그때 제가 본대로 이야기 하겠어요. 그 사람 집이 있어요. 거기도 한 삼십명이 피난했던 곳이라 30명이 겨울 준비하기 위해서 무 배추를 다 심어놨어요. 30명이 겨울 먹을 만큼 무 배추가 다 커서 시골이니까요. 가을이니까 무가 이래요. 무가 막 배추가 그리고 메밀을 두말을 갈아가지고 전부 수확해놓고 묶어놓고 30명 20명 10명 5명 다떠나버리고 혼자 계신다고. 그런데 뭘 잡수셨어요?
물어보니까 아 나는 먹는것은 싫고 배고프면 어떻게 지내냐? 거기 소금이 있고 들깨 한주먹이 있고 보리쌀 한주먹이 있어요. 배고프면 보리쌀 한주먹 삶아먹고 소금좀 찍어먹고 또 거기 들깨도 삶아먹고 그런다고 밥 해먹은지 오래됬다고 그래요. 그렇게 사셔 혼자
손님이 왔으니까 기름이 한방을 있어. 기름 한방울을 문 공님이 불때라 하고 한 30명이 밥해먹던 큰 솥이니까 툭툭 튀지요. 거기다 무를 한 세 개 뽑아다가 네쪽 내니까 비비하고 익더만. 딱 익혀서 줘요. 먹으라고 어떻게 타고 그렇게 그건 먹다가 누가 죽어도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좋은지. 고스름하고 배추고 한통을 딱 짜개갖고는 이렇게 설익혀 갖고 먹으라고 셋이서 먹었어요.
그래 거기서 만찬을 다 끝내고 그걸 다 포기하는 거예요. 무 살림해서 뒀던 메밀 다 포기하고 솥하고 이불하고 짊어지고 문 공님이 차남씨를 앞세우고 떠나는 거예요. 마지막 그런데 이 지혜있는걸 보십시오. 노인의 지혜는 그래서 노인의 지혜에요. 같이 가면 안된다는 거예요.
올때는 일찍 해뜨기전에 왔지만 낮에가면 그 마을에는 지금 그 사상이 저쪽에 있는 모든 마을인데 사람이 사는 곳인데 거기를 지금 인민군 아니면 유격대가 숨어있지 않느냐? 청년이라 거기가면 잡힌다. 안 놓아준다 그거에요. 아무리 어려워도 능선으로 능선으로 길 없는 곳으로 찾아오라. 그거에요.
화학산을 일주한 거예요. 화학산 끝에서 화학산 끝까지 가야하거든요. 쭉뻗은 한일자인데 그래 두 분은 마을을 지나서 가고 노인이니까 저는 젊어서 그때가 스물여섯인가 그렇게되요. 인제 걸어서 걸어서 능선으로 가는데 늦 가을도 아닌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어가지고 상소리가 빠졌는데 너무 아까워요.
땅에 쏟아졌는데 가다가 아까워서 나 빤스 입었거든. 바지를 벗어가지고 바지를 쩜매서 바지를 하나를 채웠으니 한말 더된다고, 얼마나 무거워요? 그 놈을 끙끙지고 하산했어. 소위말하는 도구박골로,
그때 화순씨 어머니가 아직 안가고 계실때에요. 화순씨 어머니가 솜씨가 좋으셔. 그냥 막 찧어가지고 그냥 물부어서 어떻게어떻게 해가지고 밤새도록 불때더니 그 이틑날 낮에 묵을 해줘요. 그렇게 빨리 할수 있는가 몰라. 그렇게 비법이 있데요. 그렇게 해서 나눠먹고 떠나셨어요. 그런 사건이 있어요.
그러니까 화순씨 어머니는 언니고 차남씨 어머니가 오셨다. 그러니까 두 자매가 만났지. 그러니 이 선생님을 사랑하기를 서로 양보를 안해요. 죽어도 같이 죽을테니 너 나가라. 언니 나가시지요. 둘이 가사 인제 서울 어머니하고 어머니는 이미 거기 있떤 분이시고
그러니까 갑자기 동생이 왔으니까 차남씨 어머니하고 자기 언니 화순씨어머니하고 숨어서 나는 뒤에 숨어있지. 낮에는 방에 있을수 없어요. 누가 와서 봐버리면 안되니까 종일 둘이 양보를 안해. 언니가 광주로 나가시지요. 동생이 나가소. 조금있다가 언니가 나가시오. 내가 선생님 밥해드릴라요.
내가 해드릴라네 언니가 나가시오. 언니가 양보해요. 결국 언니가 양보하고 그날 밤에 나간거예요. 그럼 내가 나갈테니 동생 잘
아래글은 김금남 원장님의 증언(1993년 7월 11일)입니다.
이 이모님도 이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에 크게 감화돼서 언니와 같이 초창기에 동광원에 오셔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육이오 동란 때 순교를 하셨어요. 이 선생님과 김 선생님께서 화순군 도암면 깊은 산중에 피난하시고 계셨을 때 두 형제가 수종을 들고 계셨습니다. 동광원 전 식구도 같이 피난을 했지요. 그런데 사태가 바뀌어져서 광주에 국군이 입성하므로 피난했던 우리 식구들이 다 광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뀌어서 인민군들은 산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지요. 먼저 식구들은 다 광주로 나가고 뒤처리 때문에 두 선생님만 산중에 남아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안 나오시니까 수종 들으셨던 두 형제는 서로 광주로 나가라고 그럽니다. 동생은 언니 보고 언니는 동생보고 내가 선생님들 수종을 맡을 테니까 언니라도 나가라고 그러시고 언니는 동생보고 내가 맡을 테니까 동생 나가라고 그러고 서로 그러시다가 동생이 남게 되고 언니가 광주로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수종을 드리다가 인민군들에게 체포 되셨어요. 거기 서울어머니라고 산중에서 잘 믿으신 어머니 한분이 계셨는데 그 어머니하고 두 분이 인민군들한테 끌려 가셨답니다. 끌려 가셔가지고 대창으로 찔려 죽이는데 어느 산골에 끌려갔을 때 두 분 다 그때 그 고무신이 고무신 얻어 신기도 어려울 때지요. 근데 신든 다 떨어진 신을 나란히 벗어놓으시더래요. 그리고 두 분이 딱 가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합창하고 기도하고 계시는데 창을 가지고 달라 들어 찔러 죽였다고 그래요. 그 소식을 그 동네 사람들한테 뒤늦게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모님이 순교하시기 전에 몇 넌 전이었었어요. 저한테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시데요. 이렇게 편안할 때 예수 믿는 것은 누가 잘 믿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어려운 일 당해가지고 총 칼을 들이대면서 너를 죽이려고 해도 네가 예수를 믿으려고 하느냐고 그렇게 달려들 때 그때 봐야 진짜의 신앙을 알 수 있다고 그러면서 늘 저 만날 때마다 순교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때 제 생각에 어찌 저렇게 순교의 말씀을 하실까? 그렇게 생각했지요. 순교 당하신 뒤에 하나님께서는 미리미리 그렇게 준비를 시키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다음에는 화순씨 이모님을 7년 동안 수종들 때에 그때 은혜 받은 그 말씀을 잠깐 드리겠습니다. 제가 적어온대로 그래도 읽어드리겠어요. 청청벽력과 같습니다. 84세의 노인이지만 장작을 텅텅 쪼개시던 40대와 같던 건강하신 이모님이셨어요. 갑자기 혈압으로 쓸어 지셔서 세월이 흐를수록 전신불구가 되어 가시니 얼마나 절망하실 일입니까?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런데 죄인으로서 올 것이 왔다는 듯이 낙심도 절망도 근심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몇 년의 병상생활 에서도 불평 한 말씀이 없었습니다. 수종들고 있는 저는 하도 이상해서 여쭈어 봤지요. ‘이모님 전신불구가 되셨으니 어떻게 하시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주님께서 좋게만 해 주실 것이니 걱정 말고 믿고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막힌 처지에서 이런 말씀과 행함과 전적으로 신뢰하신 그 모습이 참 전능하신 분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 날마다 큰 마귀 씬 죄인이지만 화선씨 이모님은 평소에도 남의 인격을 헐뜯거나 비평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나같이 큰 죄인은 세상에 없다면서 겸손한 마음 자리에서 조용히 참회하는 생애를 보내셨어요. 종종 제가 깊은 잠에서 깨고 보면 초롱같이 맑은 눈으로 온 방안을 둘러보시면 황홀해 하신 그 모습 말씀을 하실 줄 알면 여쭈어 보겠는데 딴 세계 하늘의 계신 듯싶었습니다. 이모님의 수종을 들면서 부자와 나사로 말씀이 깨달아 졌습니다. 가장 가난한 나사로가 제일 큰 희생을 하셨다고요. 이모님을 뵈옵고 있노라면 인간의 육의 행복은 다 빼앗겨 버리고 산송장과 같이 뼈만 앙상하고 손끝 발끝하나 까딱도 못하시고 그나마도 말씀 한마디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가며 7년이란 긴긴 세월을 방 돌에 못 박아 손끝 발 끝 한 까딱 못하신 몸 식물인간과 같은 그러나 감각은 살아 통증은 예민하시어 살이 떨릴 정도로 고통을 느끼시면 서도 공의의 하나님께 의탁하시고 아픔을 감수하신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이 고요한 그 모습 나사로를 보면 어떠한 무자비한 자라도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듯이 이모님을 뵈면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제가 육신이 고되고 피곤해도 방 돌 형틀에 십자가를 지고계신 이모님을 뵈올 때마다 모든 유혹과 시험과 괴로움이 사라졌습니다. 깨닫고 보니 이모님이 병상에 계신 것은 제 마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제 영혼을 붙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깨달아졌습니다. 내 죄 대신 이 고통을 당하신다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좀 편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여 주님 제 죄 짐은 제가 져야겠습니다. 이모님을 해방해 주세요. 하고 눈물로 애원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갈등이 심한 제 가슴에 주님의 평화가 오기까지 저를 붙들기 위하여 쓰임 받고 계신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병상에 계신 그분도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수종드는 저만이 알려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내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내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제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제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 죄 대신지고 계신 이모님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7년이란 긴긴 병상생활 이었으나 근심 걱정 원망 병들어 한탄하신 소리를 못 들어봤습니다. 마치 우편강도와 같이 평소에도 공의의 하나님을 믿으시어 당하시는 환난고통을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더 받아야할 죄인이라고 감수해 오셨지만 긴긴 병상의 혹독한 고통 중에서도 여전히 더욱 감수하셨습니다.
마지막 고통만 견디면 좁은 태안에서 밝은 세상을 보듯이 이 지루하고 무서운 육체 감옥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진통 조금만, 조금만 남았습니다. 영원한 해방입니다. 영원한 낙원입니다. 마지막 숨을 쉬실 때 그 영혼이 훨훨 날아가신 것 같아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병상생활 7년 7일 금식 아침 7시20분에 영원한 부르심을 받으셔서 91세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괴로움도 아픔도 슬픔도 없는 영원한 세계에 탄생, 얼마나 그 영혼이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시원하셨겠습니까? 저도 수종을 들다보니 젊은 나이에 갈등이 심한 마음에 긴긴 싸움에서 해방을 받아 저를 그렇게도 괴롭혔던 원수가 마음의 적이 형제가 아니라 네가 아니라 내 자신임을, 형제의 티는 내안의 들보임을, 남의 허물은 내 죄가 반사되어 내 얼굴이 거울에 보이듯이 보인 것을 오해했었습니다. 늘 배운 말씀이었지만 지식뿐이요. 믿어지지가 않았었습니다. 내 안에 들보를 모르고 형제의 티가 보일 때 나 자신이 흔들렸습니다. 도망만 가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 적으로 보이는 상대는 원수가 아니라 내 영혼의 은인임을 깨닫고 보니 ‘주여 이때까지 은인을 몰라보고 원수 시 했으니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영혼이 어두웠습니다. 땅위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원수가 있다면 멸시 천대 조롱을 싫어한 내 자신 내 자고 심 이었습니다. 탐심이었습니다. 모두가 깨닫고 보면 영혼이 깨라는 종소리였습니다. 내 영혼을 위해 쓰임 받은 천사들 이었습니다. 모 나는 내 성격을 원만하게 하기위한 쓰임 받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불쌍한 나그네들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미워하니 웬 말입니까? 이것이 모두가 내안에 간교한 뱀의 짓인데 남만 원수로 여겼습니다. 혈통이 부정하여 불쌍한 신세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대신 울어주며 죽어주신 주님 품만이 참 기쁨이요, 평안이요, 영생이요, 천국인 것을 불쌍한 우리 나그네들 평안을 주시고자 만유 주께서 기다리십니다. 마음이 교만하여 내 로라 하여 높은 자리 대접받을 자리 편안한 자리에만 마음이 유혹받을 때는 이 세상은 넓은데 갈 곳이 없고 적은 몸 하나 백일 데가 없어서 마음으로 이리저리 헤매며 고민을 했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는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중 죄인을 깨닫고 보니 그 크신 사랑에 감격되어 주님이 주신 내 자리는 죽는 자리 멸시와 천대와 조롱받는 자리, 가장 낮은 자리, 용서와 이해한 자리, 섬기고 희생한 자리, 이길 만이 제가 주님 뒤를 따라가는 길 임을 마음에 정하고 나니 온 세상이 다 고요하고 잠잠한 것 같았습니다. 설레던 젊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하기만 했습니다. 마음에 38선이 트인 듯 가는데 마다 제 자리입니다. 주님 가신 길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섬기는 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뿌듯 하는데 생활화 된다면 얼마나 기쁘고 만족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총 주시기를 빌면서 마치겠습니다.
도구박골 수도처에서 나와 차를 타고 수락폭포 아래 마을 수레기로 갔는데 수레기 어머니 친정집이 마을 끝에 개축된 모습으로 다른분이 살고 있었다.
아래글은 김준호 선생 증언(1989년5월4일)입니다.
이 세종 선생님의 무덤을 말로만 듣고 항상 가뵙지 못했다가 이번에 장로님 모시고 장흥군 유치면 화학산에 묻히신 무덤을 가서 다녀왔습니다. 또 일전에는 육이오 동란 때 유화래 여사께서 숨어계시던 물론 마지막 한 십 여일 숨어계시던 박자골 그 깊은 산중 또 이 선생님께서 마지막 한 달, 약 사십일 숨어계시던 도구박골 깊은 산속이지요. 또 여기 지금 김 원장님이 숨어계시던 각수바위 일대를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옛날 생각을 더듬어 보면서 일 년에 한번씩 이 모든 특별히 이 선생님을 아시는 분들, 또 아직은 보시지는 못했지만 말씀을 듣던 분들이 이스라엘까지도 다녀온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들의 발상지 우리들이 옛날에 믿고 살았던 고향 그런 발자국을 순회하고 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년에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보시지 않았더라도 정 원장님은 마음뿐이시지, 못 다녀오시겠지요? 업고나 다니신다면 몰라도, 다행이 지금 오 장로님은 다리 힘이 강건하시니까 실상 5월 달에 장로님 모시고 도구박골 또 이 선생님을 만나가지고 오 장로님이 처음으로 출가하시고 정착하셨던 그 박자골 이지만 마을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절골 이라고 합디다. 절골, 옛날 쑥 캐 잡수시고 지내시던 그런 영적 고향을 한 번씩 다녀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참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너희들이 첫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씀도 있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라. 그런 말씀도 있고 생각만 이 세종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물만 잡수시던 세월이 있었고 한 달이든지 두 달이든지, 또 물도 초월해서 공기만 잡수신다고 엄동설한에 문을 열어놓고 한 달이든지 두 달이든지 사셨다는 그런 이야기도 들어보고, 방이 쪼그마한 방인데 거기서 칸을 막아 놓으시고 방이 두 개가 되는데 사셨다는 말씀도 들어봤는데, 이 세종선생님이 사셨던 집터는 참 부끄럽고 또 부끄럽게도 가시가 많이 나 있었고 집터에, 이것이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참 돌아볼 수만 있다면 앞으로 주무시고 임종했던 자리라도 가시밭도 좀 치우고 그렇게 해야 옳지 않은가? 그런 부끄럽고 참 부끄러운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럼 성경은 왜 봅니까? 이건 어떠한 뜻으로는 예수님의 무덤인데 예수님이 지나가신 흔적 발자국으로 쓴 말씀들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향을 다녀온 사람도 있지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시던 십사 척 기념할만한 곳에 전부 거기 무슨 푯말이 붙어 있답니다. 거길 걸어가 보시고 예수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그런 곳도 다녀오시고 그렇게도 한다하는데, 우리들을 지도하시고 우리들을 영적으로 먹이시던 그런 우리들의 성지, 우리들의 고향이 분명히 있는데 우리들의 고향이 쑥대밭이 되고 가시밭이 되어도 아직도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춘추로 바쁘시니까 다 함께 갈수도 없고, 한 몇 분씩 쭈욱 봄부터 가을까지 시간을 다 짜서 몇 분 몇 분 다녀오시고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납디다. 봄에 도암면 들어갔더니 그 말씀을 누가 했어요. 선생님께서 기도 소에 계실 때 업고 여름철인데 업고 또 모기가 많아서 모기향을 가지고 화학산을 가셔서 거기서 차마 떠나지 못하시고 하룻밤을 주무신 것을 봤노라고. 왜 그랬을까? 몸은 쇠해서 생명이 왔다 갔다 할 때 왜 걸어가지도 못하시는데 업혀서 그렇게 다녀가셨을까? 그럼 선생님이 가시던 발자취인데 선생님이 하시던 거동인데 그 모양이라도 본을 받아서 그런 정신적 고향을 찾아보는 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또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충청도에 있는 처음에, 처음에 이조시대 박해할 때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유교학자들이 깊은 절 뒷방에서 성경을 처음으로 번역하고 봤던 자리에요. 발상지 이지요. 천주교의 발상지를 가봤습니다. 옛날의 절이 있고 깊은 산속인데 거기를 전부 구입했어요. 산을 사가지고 기념관을 짓고 비석을 세우고 이제 성지이지요. 아스팔트까지 깔아가지고 아주 인산인해에요. 하루에도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답사합디다. 그걸 봤어요. 만일 동광원의 운동이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고 사람의 뜻이 아니라면 흔적을 다 돌아볼 자손들이 나올 것으로 압니다. 흔적을, 그럼 어디서 선생님이 기도하시며 말씀을 같이 배우고 노래를 불렀을까? 근데 화학산 같이 많은 발자취가 있는 곳이 없습니다. 골짜기, 골짜기 마다 피가 어린 곳이고 눈물이 떨어진 곳이에요. 땀이 떨어진 곳이고, 그럼 우리가 막 처음에 몇 분 같이 갔어요. 이 달에, 문바위를 지나서 도구박골, 거기도 가시가 나가지고 발을 디딜 수가 없어요. 거기는 집터가 있는데 수레기 어머니가 한 칠팔 년 사셨든가 그랬던지 육이오 동란까지 여기 동광원에 출가하실 때까지 그 집에 사셨지요. 제일 처음에 이 선생님께서 금남자매를 만나시고 출가시키실 때 처녀가 혼자 있을 수 없다고 해서 화순씨 어머니를 짬매서 두 분이 첫 출가했던 막이 거기 있어요. 거기가 동광원의 발상지입니다. 저도 고향을 떠나가지고 정착하였을 때 그 곳으로 저를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방이 하나인지라 식구가 거기 5,6명 되셨지요. 밥은 얻어먹을 수 있지만 잠잘 곳이 없어요. 잠은 사무엘씨 지금은 전도삽니다. 이 사무엘 전도사님 방이 둘이기 때문에 잠은 거기서 자도록 하고 밥은 장로님 집에서 얻어먹도록 그렇게 해 주셨어요. 근데 거기 문공님 사랑씨 어머니 또 서울어머니가 순교 당하신 곳이에요. 참 방울, 방울 눈물방울 참 핏방울이 떨어지던 곳입니다. 그 얼마나 거룩하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두 어머니께서 화대기를 치고 노끈으로 묶여 산으로 끌려갈 때에 ‘우리들의 신이 아직은 성하니까 산사람이 주워 다 신으라고 벗어놓고 갑시다.’ ‘아이구, 그럽시다.’ 두 분이 고무신을 나란히 길가 바위에 두시고 걸어올라 가셨다는 거예요. 얼마나 거룩하시고 성스러우시며 사랑이 많으신가? 문공님은 두 여자가 사형을 당하러 끌려간다는 말을 들으시고 ‘나도 예수 믿소.’ ‘네 이놈 빨리 오너라.’ ‘같이 가자.’ 그리고 뒤따라 가셔서 장도칼에 가슴을 찔려서 다 돌아가셨다는, 그런데 실제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영적인 부모요. 아버지요. 어머니들이 순교 당하신 골짜기지요. 그런데 40년이 가도 이공님 무덤을 저는 첨 가봤어요. 또 육이오 후에 저는 첨 가봤습니다. 그렇게 어째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었을까? 생각해 보니까 너무 불효자식 같은 또 너무 은혜를 망각했구나. 너무 첫사랑을 너무 기억하지 않고 살았다는 그런 부끄러운 생각이 참 많습디다. 그래서 어떤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곳을 일 년에 한 번씩 쭈욱 다녀오신다면 영적 부흥이 되겠다. 정신적 힘을 얻겠다. 아무리 고달프고 일이 어렵더라도 그 발자국 마다 피가 흐르고 참 아까 노래 불렀어요. 가시를 밟고 다니던 길, 그 태산을 넘어가던 길, 그 노래를 이 선생님이 거기서 지으셨는데 선생님이 왜 그런 글을 지어서 노래를 불렀을까? 직접 화학산을 가보신다면 실감이 있어. 그 느낌이, 소재로 해서 또 그 깊은 밤중에 현재 살아계신 정 원장님 이 현필 선생님 유아래 여사 잡히면 죽는데 깊은 밤중에 앞서고 뒤서고 잡히면 같이 죽어서는 안 되니까 앞사람이 잡혀가면 한사람이라도 살아나기 위해서 멀리 떨어져서 같이 가지 못하고 띄엄, 띄엄 가마테라는 마을을 지나서 소재라는 마을을 지나서 큰골이라고 박작골로 들어가시던 그런 발자국, 소반바위에서 떠나가지고 박작골로 들어갔지요. 그런데 문제는 발자욱이 소리 안 나게 갈수 있지만 그때는 개들을 많이 키우지 않아요? 개들이 짖으면 그 길을 지키던 유격대들, 그런 분들이 밤중에 잠들었다가 깨겠지요. 깨서 나와서 살피면 붙잡히지 않아요? 제일로 걱정이 개가 나오면 어쩌나 그럴 테지요. 그럼 청년들이 모두 업고 앞서고 뒤서고 또 어른들이 앞서고 뒤서고 가는데 개가 나와 가지고 지금 살아계신 정 원장님 그냥 몸으로 갈수 없으니까 검정 홑이불 같은 거 쓰고 가지요. 안보이도록 홑이불을 쓰고 가시는데 홑이불을 뒤에 끌리기 때문에 자꾸 원장님 뒤를 따라오면서 냄새를 자꾸 냄새를 맡으면서 따라오면서 짖지를 않았대요. 얼마나 땀이 났으며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어요? 나만 잡히면 괜찮지만 선교사가 잡히잖아요? 그 감사한 말씀을 하시데요. 어쩌면 개가 짖지 않는지? 어쩌면 하나님이 개의 입을 막으시고 냄새만 맞고 졸졸 따라오더라고요. 꽁꽁 짖으면 거 누구요? 쫒아 나올 텐데. 그런데 가마테라는 마을을 지날 때는 집이 세집인데 윗집 두 가구 길이 집 사이로 났습니다. 그때는 그 어른들을 붙잡기 위해서 조석으로 15명, 30명, 많으면 어느 때는 백 명이 이렇게 포위를 하고 잡으려고 다니던 곳이거든요. 전쟁 시 그 사람들을 잡으려고 그런 곳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이야기이고, 우리 어른들이 지내오신 발자국인데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에요. 이상하다. 어떻게 그렇게 잠들었을까? 생각하니 어떻게 부끄러운지요? 천 리 만 리 밖에도 아니고 전라남도 안 이구요. 아침에 버스타고 나가면 종일 돌아보고 집에까지 올 수도 있는 거리인데 이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부끄러움이 가슴을 메었습니다. 어제 밤에 생각했습니다. 사진관 어머니 이발소 어머니 또 홈실 댁 세분이 순교를 당하시는 곳은 소란이 골짜기이지요. 거기도 작년도에 거기 김승명 장로님 모시고 다녀왔어요. 피가 흐른 발자국 무덤에 뼈가 묻혔다는 골짜기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는 그쪽에서 돌아가셨지만 득도하시기는 도를 닦으시는 사진관 어머니에 대해서는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반바위에 계셨습니다. 그 상황은 제가 동광원 창설되기 전에, 일 년 전에 거기와 계셨던 것을 기억을 더듬어 내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고향을 와보니 형님이 중촌 길가에다가 주막을 차려놓고 술을 팔고 계신 것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웠든지 ‘형님 그 주막을 나한테 파십시오.’ ‘왜 그러는가?’ ‘참 보기가 딱합니다.’ 그래서 그 주막을 사가지고 길가인데 해방이 막 되신 후 이듬해지요. 삼년 뒤인지 여순 반란이 일어나기 전 약 12개월 한 20개월 전이겠지요. 귀주 어머니가 그때 처음 출가하셨습니다. 모든 가산을 다 정리하시고 팔아버리고 집은 팔지 못하니까 두시고 점포어머니께서 집을 지키고 계셨고 점포 어머니와 귀주 어머니 두 분이 사셨던 집이 있었지요. 우리들이 오다가다 가면 꼭 방이 둘이니까 두 집이 합하시고 한방을 빌려주시면 장로님께서나 저 같은 사람이 꼭 그 집에서 자고 다니던 집이에요. 그런데 처음에 옷 보따리를 짊어지시고 출가하시던 집이 이 선생님의 형님이 술 팔던 주막집입니다. 그 주막집을 사가지고 귀주어머니를 출가하시도록 말씀해서 바야흐로 집을 떠나시고 그 집으로 오신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일대 부모 없는 어린 소년 소녀를 처음에 한사람 데려오시고, 일대 부모 없는 소년들을 둘 셋 다섯 여섯 한 일곱 소년들을 고아들을 거기 와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보모가 되셨습니다. 밤에는 밤손님 이라고 여순 반란 후에는 적어도 한 십 명 오십 명 그런 많은 구두 발자국소리, 산에서 초저녁 밤중이 되면 마을로들 가지요. 왜 양식들 털러가지요. 어떤 때는 소를 잡아가지고 끌고 가지요. 쿵쿵 소리가 나지요. 낮에는 국군이 백 명 삼백 명 오백 명이 들어 올라오지요. 잡으러, 해가지면 다 내려가고 밤이 되면 밤손님, 여순 반란군이 거기와 있었지요. 그 사람들이 소 끌어가고 양식 털러가고 밤에는 그 사람들 소위 말하는 인민군세상 낮에는 한국세상 그런 곳이지요. 그런데 거기 우리를 살게 하셨어요.
그곳을 나와 청소골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생겨나 생명이 위태로울때 동족이 피를 흘리는데 가만히 있겠는가 라고 이현필 선생께서 동족상잔의 현장에 김준호선생을 보내 어머니들하고 고아를 돌보던 곳인데 그전에는 형님이 막걸리 집을 했는데 사서 귀주어머니가 출가하시고 점포 어머니와 사셨던 고로 순례객 숙소로도 사용되었답니다. 어느날 헌군복을 입은 김준호 선생을 끌고 산으로 가서 총살하려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울며 우리 선생님이라고 하여 목숨을 건진 이야기도 있다. '내가 고아들을 돌보는것이 아니라 어린 고아들이 나를 살렸다'고. 고아들을 돌볼때 일화입니다. 그곳이 청소골 고아원터입니다.
아래글은 김준호선생의 증언입니다.
하루에 삼작이 어머님들의 생활양식입니다. 하루에 삼작 보리쌀이던지 쌀이던지 하루에 삼작만 드세요. 그러면 물론 두 끼 잡수시지요. 한 끼는 냉수 한 그릇 삼작으로 죽을 쑤시는데 철칙이 십일조 떼십니다. 삼작l의 십일조니까 정확하게 왜 뗄 수 있냐? 식구가 20명 30명인데 50명이니까 계산해보면 딱 십일조가 나와요. 그러면 십일조는 어떻게 쓰냐? 주일날이면 쑥떡을 하십니다. 어린것들은 주일 돌아오기를 어린것들이 아마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려. 쑥떡 어머니가 쑥떡 해주신다. 어머니들이 십일조 걷어가지고 쑥떡 해놓으시고 잔치 하시지요. 쑥떡 나눠주면 애기들이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러면 어머니들은 하루 삼작이지만 소년 소녀 어린것들은 하루에 한 홉입니다. 보리쌀이든지 쌀이든지 꼭 한 홉을 주세요. 그래 하루에 처음에는 세끼먹지요. 어머니들은 하루에 삼작, 애기들은 하루에 한 홉, 그렇게 애기들을 키웠습니다. 그래도 저도 먹지요마는 십일조 떼니까 구작을 먹지요. 애기들도 배고프고 저도 배고프고 그러니 생활이 더 곤란해져요. 식구들이 많아지니까. 아침은 굶지요. 두 때 하루에 두 홉 그것도 일주일은 가능하지만 일 년이 지나니까 살이 다 빠져나가요. 어린애들은 비비꼬기 시작하지요. 이 넙적 다리 살이 다 빠져버리니까 꼬여요. 애기들이 뼈만 드러나요. 애기들이 수척해가요. 그때 처음 동광원 시작하기 전에 일 년 반 약 이년이라 할까 그때 고아들 다섯 명 데리고 그때 청소 자기 이 선생님 형이 막걸리 장사하시던 술집을 양보해 달라고 해서 사가지고 거기에서 고아 5명을 데리고 그때까지 살림하시던 귀주 어머니를 모셔 와서 보모가 되고 저는 광주에서 공부하던 사람을 데려다가 선생을 삼고 그리고 출발했지요. 수레기 어머니 조카였어요.
8명 일 년에 한사람씩 만원 총 생활비를 한분이 냈습니다. 김사우사 그럼 내가 식구 8명을한 명에 만원씩 8만원을 내가 내겠소. 그래서 8만원을 가지고 1년을 살았던 겁니다.
아주 정확했어요. 그렇게 살림을 하는데 귀주 어머니 첫날 부임했어요. 그런데 쑥떡베지요.
쑥색으로 만드신 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그때 40갓 넘고 50줄이니까 아주 젊으셨어요. 머리칼이 까마시고 그때만 해도 종이상자에 보따리 싸주니까 짐이 있지요. 그 한보따리 갖고 집을 인계받으신 분이 여기오신 김 집사님이라고 두과부가 살던 집이니까 점포어머니에게 양보해버리고 혈혈단신 옷 한 벌 싸가지고 보모로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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