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남원지역 동광원 유적지 탐방1:3.1목공소와주천 덕모리 답사

mamuli0 2022. 10. 31. 11:24

 2022년10월29일 아침 운교리 동광원에서 1943년도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박해시절에 비밀리 모여 새벽기도회를 가졌던 삼일목공소를 먼저 찾았다. 3.1운동을 연상케하는 이름 때문에 오북환장로님은 옥고를 당한적도 있었는데 이는 장로님 고향 순창 유동마을 친구 서재선 집사와 이웃마을 배재선집사 삼인이 합자하여 설립했고 위치는 지금 광한루가 있는 천거리(지금 쌍교동 310, 315등)3~400평 규모의 목공소와 사택이 있었다고 한다. 촬영위치 좌표는  북위 35,40306. 동경 127,38088.이었다.

 

아래 이이야기는 김금남 원장님의 증언입니다.

지금은 오 장로님이시지만 그때는 오 집사님이라고 그랬지요. 오집사님 서집사님 배집사님 그렇게 의자공장 하시면서 그 집으로 기도장소를 정해서 이 선생님이 많이 오신 것 같애요. 또 황길중씨라고 형님 집으로 많이 오시고 그래서 모인 숫자가 꽤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시국이 어려운 때였어요. 예배도 잘 드리지 못하고 다 잡혀가고 어려울 때지요. 그때인데 새벽마다 3시에 나가십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어디 밖에 나가서 기도를 하시는가 생각했었는데 뒤에 알고 보니 두시쯤 되면 지금 세상 뜨셨지만 찾아오셔요. 조용하게 깨워 가지고 나가십니다. 그 몇 달을 그랬어요 제가 여쭈어 봤지요. 어머니 교회도 지금은 어려운데 새벽마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그때 젖먹이 어린 동생이 있었어요. 동생이 울면 아버지가 화나실까봐서 조심스럽고 그래서 여쭈어 봤지요. 그러니까 지금 광주에서 이 선생님이 오셨는데 그 분은 선지자라고 성령을 받으신 분인데 앞을 내다보시고 또 뭇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라고 그런 성령 받으신 분이 오셔서 지금 공부를 하신다고 하세요.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가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저도가면 안 되겠어요? 하니까 그분은 절대 젊은이를 상대안하시니까 제가 가서 여쭈어보겠다고 그러셔요. 그 뒤 어머니가 다녀오셔서 하신 말씀이 어머니한테 배우라고 하시더라고 그랬어요.

 

 

 아래 이야기는 동광원 초기 이야기 좌담에서 오북환 장로님이 증언하신 내용 입니다.

 3.1 목공소 설립 이야기 입니다.

 

(오) 이것도 참고가 되려는지 모르는데 남원 공장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가? 제가 광주서 한 5년간 있다가 일로전쟁이 가까우니까 재목이 외국서 안 들어와요. 일본서도 안 들어오고 그 한국에서는 재목가지고 특별히 의자 같은 것은 단단한 나무여야 되거든요. 솔 나무 그런 거 갖고는 안 되어요. 그런데 의자는 공수는 안했지만 가구를 하더라도 재료가 나와야 일을 하는데 안 나오니까 못해요.

 

 

그래서 인제 우선은 첫 동기가 세상 허무를 깨닫고 믿게 되었는데 그때 도로 시작하니까 욕심이 생겨가지고 도로 그만 둔다. 그러기도하고 인제 어디 장소 과수원이나 목장이나 할 수 있는 장소 찾으러 다니면서 그때 김 영환 장로님이 강사 그이가 어디 심방 간다고 그래서 나는 자전거 뒤에 타고 여름에 장로님 뒤에 타고 저리 돌아봤어요. 저 구레 쌍계사라고 악양에 까지 갔다고요. 가서 돌아도 장소가 없고 오히려 사람은 더 배게 살고 더럽고 바위틈에다 해서 포기하고 돌아오다가 그 김 영환 장로님이 지리산 피서지 선교사 피서지 거기 고지기로 계신분이 당신 친척 된다고 임 장로님이 고지기로 계신다고 만나러 간다고 나도 처음이니까 따라갔지요.

 

 

따라가서 하루 밤 자면서 보니까 대목 참나무가 쓰러져 있단 말이야. 이런 거 이용할 수 있냐고 하니까 얼마든지 있다고, 그 말만 꼭 믿고 광주 가서 주문 맡은 거 다 해줘버리고, 결국은 연장 챙겨가지고 혼자 올수 없으니까 서 집사 춘장서 일본 가가지고 배운 것도 아니고 어쨌든 처음으로 믿어봤지요. 열심이지요. 가서 만나니까 친구가 아니지요. 마을이 버들이라고 틀리니까 가서 믿는다고 하니까 이런저런 이야기 하니까 공장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갈라는데 그런 뜻이 없냐 하니까 그이가 앞장서요. 아주 열심이니까 장인 왔다는 말은 할 줄 모르고 또 광주 와서 

 


 퇴용 꼴이 되었다. 아주 용을 쫒아 냈다고 그래서 여기서 자면 좋겠다. 자리를 잡으면서 집터를 보고 만들고 있으니까 그때는 지리산은 일본 삼대 대학에서 관리하고 있거든, 동경대학 구주대학 경도대학 연습지로해서 일본사람이 순회하러 지나가다가 뭐하냐고? 아 이래서 안 된 다고, 먼저 허가 있는 목재 하는 사람들 그 허가 있으니까 할 수 없지만, 새로는 그 허가도 안내주고, 왜냐하면 암만 썩은 나무라도 짐승이 어떻게 할 것이야? 그런데 그래서 그만 낙심하고 그런 판인데, 둘이 있는데 배 장로하고 형님하고 왔어요. 어떻게 됐는가하면 그래요. 이럴 것이 아니라 도로 광주로 갈수도 없고 남았다가 재목 있으니까 마천 이라는 데가 재목을 부산서 어떤 큰 나무도 부친 거 있다고. 그래가지고는 주문하고 해놨는데 내놓기는 하고 가져가지 못하니 문제가 생겼다고 그거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고 해서 새 것 좀 얼마사고 그것도 얼마 사고했는데 다 실어오지도 못하고 파했어. 구루마 인건비로 아이고 그거 아니다. 배 장로가 애쓰기는 했어요.

 

 

랬는데 말하자면 그때 하나님이 허락했으면 자본이 있고 기계 시설이 있었으면 아마 돈 꽤 모았을 거야. 손으로 이걸 만드니 도저히 이건 안 되어요. 그래도 주문이 어디서 들어왔냐 하면 저 만주서도 오고 서울서도 오고 못해줘요. 한 가지도 못해주는데 왜냐하면 걸상 사러 다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가서 광고를 해놨다고 아 그러니까 상관도 못하지요. 와서 사정사정하면 광주 주문은 제쳐놓고 해주고 그것은 돈 뭐 그런 일이 있어도 그때 자본 있고 기계시설을 잘 해놓고 했으면 아마 돈 모았을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런 거 허락을 안 해.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광주는 남원은 있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실패를 하니까 기왕이면 가까운데 있자 해서 그래서 남원에 있게 된 거예요.  

 

 

삼일목공소 옛터전을 보고 주천면 첫 출가지로 가는 중에 슬미어머니(이자근)가 사셨던 슬미 마을을 지났다. 차창으로 슬미 정류장을 담을수 있었다.

 

 

 

이현필 선생을 만나고 나서 목공소를 처분하고 오집사님은 주천면 배덕리 덕촌으로, 서집사님은 곡성군 죽곡면 원달로, 배집사님은 고향집 순창 유동으로 가셨는데 오장로님이 첫 출가지 집터를 찾았다. 몇년전에 오세휘 장로님이 왔으때는 건물이 한채 있어 반가웠다는데 지금으 건물은 없고 채소가 심겨있고 출입문 쪽도 돌담장으로 막혀 있고 집터는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오세휘장로님이 살때도 있었다는 정자

 

(윤) 장로님, 42년도에 목공소에서 처음 이 선생님 뵈셨지 않아요? 이 선생님 처음 뵈실 때 해방 3년 전이지 않아요? 제가 그 목욕하시고 구두 신고 오셨을 때가 처음 만났을 때 아니에요? 
(오) 만났는데 그때 공장 거기 있으니까 한번은 그럽디다. 
(윤) 처음 만나셨을 때에요? 아니면 그 다음 만나셨을 때에요? 

 


(오) 몇 번은 만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만나가지고 뵌 뒤로 오래 안 되지요. 남원에 왔는데 저는 그때 이제 가족을 저도 인제 자립 생활을 해본다는 뜻으로서 주천 시오리 떨어진 데로 덧모리라고 하는 곳으로 옮겼어요. 그래가지고 살았는데 옛날 공장을 왔다갔다했는데  그 전인가 모르겠어. 자꾸 잊어버려서 가물가물하는데 남원 요천에서 거기서 목욕을 하러갔어요. 저녁인가 봐요. 갔는데 그랬어요. 

 

 

처음 전도를 받은 거는 김 일석 장로님이거든요. 유명한 부산 천안교회에서 전도 받았는데 그분 생활은 고무신에다가 구두 안 신고 헌옷으로 한복 입고 그런데 이 선생님에 대해서는 조금 어째 구두를 신었을까? 그 생각을 했어요. 양복입고 그 말씀을 듣고는 그 이튿날 양복하고 구두하고 딱 싸가지고 사모님한테 갔지요. 아 내가 괜히 그런 소리를 했지? 짐을 맡아버렸지. 남원서 거기까지 걸어갔어요. 걸어가서 딱 주니까 반가워했겠습니까? 받아놓기는 해도,  

 


(이 병찬)) 그 양복을 장로님이 갖다 드렸다고요?
(윤) 장로님께서 사모 사모님께, 장로님께서 심부름 하신거지요? 장로님께서 심부름 하신거지요? 
(오) 그렇지요. 심부름 한 거지. 양복,
(이) 광주까지 걸어가신 거예요? 
(오) 예, 

 


(윤) 그때는 차도 없었나요? 
(오) 직접 광주까지 거기까지 가는 길이 없었지요. 찻길이 차가 그러고 
(김 승명) 목탄으로 차를 운전해서 갔지요. 
(오) 차는 만날 수도 없어요.  또 막상 있더라도 그때는 탈 여가도 없고 걸어보는 게 

 

 

옛날부터 있었다는 정자옆에 주차를 하고 집터를 찾아가 설명을 듣고 나왔다.

주천면 주례기라고 알려져 있는데 오늘 와서 확인해 보니 주천면 배덕리 덕촌 마을 이며 좌표는 북위 35,37136. 동경 127,41687.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