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동광원 유적지 탐방2 : 갈보리와 선인래

mamuli0 2022. 11. 1. 08:47

 주천면 배덕리 덕촌에서 수지면 유암리 갈촌 지리산 끝자락 농고 축산실습지 옆에 강남순 김금남 모녀가 100일 기도 했던 김수녀 숙부 농원 산지기 옆방을 빌려 살면서 남원지역 신도들이 모여 집회와 예배 장소가 되고 그전 1944년에 선인래에 집을 짓고 출가 했던 강남순 갈보리 어머니께서 계시던 선인래에서 소녀 소년들을 교대로 성경공부와 신앙 교육을 하면서 수도회가 탄생한 곳을 약4시간 걸려 다녀왔다.

 

아래 이야기는 1999년9월30일 동광원 초기이야기 좌담 내용입니다.

(김 승명) 그럼 서리내 에서 몇 년이나 있었어요? 서리내 에서 몇 년이나 있었어?
 (오) 서리내? 나는 거기 살지 않고 거기서 산다는 거는 막연한 처지였지.  
(김) 누가 살았어요? 누가 살았어?  
(오) 서리내, 서리내는 금남 어머니가 살고 살면서 이 선생님 있을 때는 집회도하고 그랬어요. 
(김) 아 집회를 하고 그래 이 선생님 몇 년이나 살았어요? 서리내 에서, 
(오) 저는 직접 가 살지를 않았다니까. 
(김) 아 이 선생님이?  
(오) 그것도 그 뒤로 햇수는 잘 모르겠어요. 그건 금남 양한테 물어보면 잘 알거에요. 나는 그냥 왔다갔다만 했지. 금남양이 그것에 대해서는 잘 알거야.
(이) 서리내 에서는 몇 년도에?
(윤) 46년도로 되었는데 해방 후에 해방 후 해방 전이에요? 금남언니랑 언니들 교육한 것이  해방 후지요?이 선생님 혼자 계실 때 해방 전이고 또 갈보리 어머니 계신 것도 해방 전이고 12살, 십세 소년소녀들을 교육하신 건 46년 해방 후, 그런데 장로님 처음 이 선생님 만나셨지 않아요? 목공소에서 그리고 집회 가지시고 그럼 얼마동안 기간이 있다가 광주로 찾으러 나가신 거예요? 1년이나 되신 거예요? 아니면 몇 달 되신 거예요? 
(오) 그러니까 그때는 해방 그때도 해방 전입니다. 전이고 저는 공장에서 출발해가지고 그 집은 도구박골 거기고 양식도 벌어야하니까 저는 연장 가지고 사연 양 친척이지요. 거기서 뭐 일을 해달라고 요구해 가지고 그 집 장롱이랄지 그런 일을 했어요. 거기 있으니까 이 선생님이 그 후부터 저를 만나러 오시지요. 그런데 하루 밤은 여름이에요. 해방 때 개숫물서 이 선생님하고 나하고 잤어요. 그때도 그거 해방 되었다 말을 들었어요. 해방 3년 전에 만나가지고 한 일 년 후에는 생활 했지요. 3년째 된 때에 해방이 된 거예요. 
(윤) 이 선생님 만나서 일 년 후에  도구박골로 가셨고 이 선생님 처음 만나신 다음에 이 선생님 사모님 모시고 복희 어머니한테 찾아 가실 때 그때가 얼마동안 기간이 처음 뵈셨을 때하고 광주 이 선생님 찾아 가셨을 때 하고. 
(오) 그때는 남원 공장 있을 때지요. 그러니까 그 해방 전 글쎄 만나서 얼마 안 되었을 거예요. 해방 전 그때 3년 전 그때지. 별로 얼마 기간 안 떨어 졌어요. 
(이병찬) 그러면 그 인제 동광원에 어떤 시작은 인제 출산과 같은 그런 시작은 남원 목공소로 보고, 이 세종 선생님과 관련된 광주 시절은 그 이전 시대로 구분이 되겠네요? 
(윤) 그 시절은 그 전에  능주 어머니들을 목공소 만나기 전에 그 분들을 만나셨을 거 같아요. 능주 한나 어머니 귀주 어머니 그 어머니들 만난 시기가 같은 시기가 되든지. 그쪽은 그쪽대로 따로 만나게 된다고. 
(고) 그러니까 그 시기가 중요하다고 남원 가기 전에 회개하고 난 다음에 그때 무엇을 하셨는가? 
(윤) 그때 지금 사모님 말씀 듣고 보니까 그때 42년 가령 수술 했을 때 다시 통증이 오거나 그런 게 가령 한 일 년 기간 전이에요? 어때요? 간호,

 

   갈보리 기념비 좌표는 북위 : 35,32758. 동경 : 127, 38340.

  아래 이야기도 김금남 수녀 증언입니다.

 

그리고 혼자 기도생활 하시고 계실 때였어요. 그때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거기서 며칠을 지내셨는데 저는 생각에 다시 백일을 마쳐도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그 자리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밤낮 그렸던 그 세계, 또 주님께서 거룩한 제물이 되라는 그 말씀 그대로 바치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냈지요. 그럴수록 외부의 시험은 더 컸었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일을 생각해 보면 이 생활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혼자 독신 생활이라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 산에 가서 그러고 있으니까 누군지 모르게 쪽지를 적어다가 우물가에 돌로 눌러놨어요. 제가 우물에 갔다 오다가 그것을 보았지요. 아 이 산골도 어떤 발길이 있구나 생각하니까 소름이 끼쳐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지요. 이런 이런 일이 있다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우물에 가도 따라 나서시고 그랬어요. 다음에 가니까 또 그대로 종이 한 장이 있어요. 종이 없애도 또 갖다 놓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지요. 
우물에 다녀오다 보면 그 종이가 산에서 날라 다녀요. 그때 이 선생님이 오셨는데 그 종이  쪽지를 보셨는지 어쨌는지 어머니에게 물어보시더래요. 무슨 일 없었느냐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말씀드렸는가 봐요. 저는 선생님이 젊으셔서 저를 절대로 직접적으로 만나주시지를 않았습니다. 어머니 중재를 하셨지요. 하루는 어머니 말씀이 선생님이 떠나시는데 같이 가자고 하신다고 어쩔라냐고 하세요. 그때 제 마음에 얼른 들어온 말씀이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그 말씀이 들어와요. 그래서 네 말씀대로 순종 하겠다고 그러니까 내일 수레기 어머니와 이 선생님이 가시는데 같이 가라고 하세요. 그래서 그 이튿날로 그냥 거기에서 출발을 했지요. 그때가 어느 때인가 하면 음력으로 2월이었었습니다. 아주 추웠을 때였어요. 눈보라가 치고 그럴 때였는데 선생님은 그때 생식을 하고 계셨어요. 하루 한 끼 드실 때도 있고 2-3일 후에 드실 때도 있고 아주 금식하시고 살다시피 하셨지요. 그러니까 늘 볼 수가 없어요. 어떻게 야위셨는지 선생님 가시는 발걸음은 빠짝 야윈 몸에 다 떨어진 모자에 헌 누데기 입으시고 짚신은 그때 하양 고무신 이었어요 하양 고무신 손에 들고 출발하십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엄청나지요. 저 길을 나도 가야한다 생각하니까 육신적으로는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야할 길이니까 순종을 했지요. 물론 저도 맨발벗고 바랑 짊어지고 이제껏 입었던 옷 다 던져버리고 그리고 선생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하루 길을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데 제 생각에는 어떻게 이 눈보라 속을 맨발로 걸어갈까 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시원하고 기쁘고 감사한지!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기쁘고 즐거웠을까 새장에 갇힌 새가 나라가는 것 같이 그렇게 영혼이 기뻐요. 그냥 바람이 뒤에서 눈보라가 쳐서 날리면 나를 빨리 가라고 훅 밀어주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영혼이 기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루 길을 걷다보니까 석양이 가까워 졌지요. 종일 가도 가도 어디 가서 배는 고파 죽겠어요. 어디 가서 밥 먹자는 말씀도 없으시고 걸어만 가요. 예수님을 앞에다 모시고 제가 뒤따라가는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어디만큼 가시다가 돌아서시면서 수레기 어머니보고 나가 밥 얻어 올랍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 나오시더니 밥이 없답니다. 그러세요. 또 걷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가다 보니까 어머니가 무릎이 얼어서 더 걸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리고 수레기 어머니가 과거에 문둥병을 앓으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약도 안 쓰시고 믿음으로 회복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믿음 좋은 어머니신데 갑자기 몸이 굳어가지고 움직여지지 않으셔서 아주 마음이 아파서 선생님은 앞에서 걸어가시니까 모르시지요.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데 더 이상 갈수가 없어서 근방에 어느 집으로 안고가다시피 들어갔어요. 미안하지만 이해하시고 용서 하시라고 우리 어머니가 먼 길을 오시다가 발이 얼어가지고 그러니까 잠깐만 녹여가지고 나갈라니까 용납해 주시라고 그런데 병을 앓으셨던 분이니까 자국이 있어요. 얼어가지고 시퍼렇게 나서 제가 보이지 않게 웃옷을 덮어 드렸어요. 선생님께 보고를 했지요. 조금 쉬어 가지고 어머니가 회복이 되어서 믿는 집이 없느냐고 하니까 건너에 이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이 동네에서 제일 잘 믿으시는 분이라고 그 분에게 찾아가라고 그러시데요. 맨발로 헌 두데기 사람들이 가니까 다 아무도 안 들여 놓으려고 그래요.  캄캄하니까 그 집에서는 모르지요. 문간에 가서 이 선생님이 가셔서 이 집사님 이 집사님 그러시데요. 그 분이 나오세요. 어디에서 오셨냐고 저 길가는 나그네인데 잠깐 해가 저물어서 쉬어가고 싶어서 들어왔다고 그러니까 그분이 그래요. 우리는 단칸방이라 쉬어 가실 수 없다고 저 동이라고 하든가 그곳에 가보라고 그래요. 그러다가 이 집사님 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시는지 그렇게 해 놓으시고는 다시 물으세요. 믿으십니까? 그러세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믿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러시면 들어오시라고 단칸방이면 한 형제인데 어쩌냐고 들어오시라고 그래 거지 셋을 영접해 드립니다. 들어가니까 사모님이 금방 가서 그때는 너나가 할 것 없이 생활이 어려울 때에요 그런데 금방 가서 밥을 하나 가득 가져오세요. 저는 그 세 그릇을 다 먹어도 제 양이 차지를 않을 것 같아요. 종일 굶었으니까 그런데도 이 선생님이 진지를 드셔야 밥을 먹겠는데 가만히 곁눈으로 보니까 안 드셔요. 가만히 계십니다. 수레기 어머니라도 드시면 제가 힘을 얻어서 수저를 잡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한참 앉았다가 어머니가 들으시데요. 저는 아마 다 먹었을 겁니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도. 
 그 이 집사님이 그러세요. 우리 아들이 광주 어디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그런데 내가 종종 광주를 가는데 이상한 소식이 들리더라고 동광원가 어딘가 이 초사라는 분이 계신데 그 제자들이 아마 예수를 잘 믿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 말씀이 네 그러십니까? 그러십니까? 대답만 하고 계세요. 그 밤을 남자 분들은 이 선생님모시고 주무시러 가시고 저희들만 있었지요. 그런데 수레기 어머니가 사모님에게 말씀을 하시데요. 저분이 그 분이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 아줌마가 놀래서 남이 보기에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예수님도 몰라보는 이런 예수님의 자녀들이 오셨는데 그것도 몰라보는 이 죄를 어떻게 하면 좋냐고 아주 애고잡탄을 하세요. 그 이튿날 새벽 일찍이 그곳을 떠나 왔습니다. 십리 밖까지 전송을 나오시면서 그저 용서하라고, 용서하라고 뒤를 따라 나오셨어요. 그 뒤에 쭉 광주를 거쳐서 뒤에 제가 안 일이었지만 어머니와의 대화는 저를 광주에 데리고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시킨다고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전혀 몰랐었지요. 광주 성경학교는 생각도 안하시고 능주를 거쳐서 문바우 그리 저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수레기 어머니 집이지요. 거기다 데려다 놓으시고 이 선생님과 수레기 어머니는 전도한다고 또 나가세요.  저는 하양 수레기 바깥노인 한분 계시고 두 분이 사시는 곳인데 그곳에 저를 혼자 데려다 놓으시고는 가시데요. 사방을 둘러봐도 푸른 산뿐이고 낯도 설고 물도 설고 기가 막혀 죽겠어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 수종들며 있었지요. 모두가 제 생활과는 반대에요. 빨래를 하려고 봐도 비누가 없지요. 잿물을 바쳐서 빨래를 해야지요. 밥을 지어도 쌀밥이 아니지요. 개떡이나 보리밥이나 잡곡밥이나 이런 것을 지어드려야 되요 모두가 생소하고 힘이든지 모르겠어요. 익숙하지도 않은 생활을 처음에 하느라고 무척 힘이 들었었습니다. 밤이면 혼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면 캄캄한 밤에 개똥불만 하늘에 벌개요. 

 

갈보리 우물

 

아래 이야기는 김금남 원장님의 증언입니다.

 

어머니하고 저는 숙부님이 갈보리라는 산을 사 놓으셨어요. 여기 남원에서 30리 길이지요. 그래서 거기에 산지기 집이 조그마하게 있어서 그 방한 칸을 빌려서 백일을 작정하고 나갔습니다. 백일기도 대엿새 전에든가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그 전에 저희들이 거기에 가니까 전에는 오 장로님이 남원에 계실 때는 교회는 안 나가셔도 오장로님 댁으로 교인들이 새벽기도회도 모이고 그러셨는데 오장로님도 그때는 남원을 떠나시고 서 집사님도 떠나시고 배집사님도 떠나시고 안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들이 갈보리로 오시게 되었어요. 주일날이면 그런데 거리가 읍에서 30리 여기에서는 한 50리 될라나 모르겠습니다. 그런 원거리를 빈손으로 오신 것도 아니에요. 어려울 때 개떡이라도 쪄가지고 오세요. 언제 출발하면 시간 맞춰서 오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40리 30리 50리 길을, 가까운 길을 찾아서 오시려니까 산에 소래길 밭길 논길 또 물을 건너서 그 먼 길을 예배를 드리러 오십니다. 어떻게 반가운지 몰라요. 그때 만남이라는 것은 이것이 형제애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어떻게 반가운지 끌어안고 다 울지요. 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간에 일주일 동안 산 보고를 돌려가면서 합니다. 정욕의 세계에서 그 세계를 빠져나오려고 하는 싸움 피나는 싸움 다리를 걷고 보면 다리마다 채찍 맞은 자리에요. 저는 그래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어요. 그런데 산지사방에 상처가 나고 얻어맞은 흔적이고 그래도 그 영혼이 그렇게 기쁘셨어요. 그러니까 50리 30리 4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오셨지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시면 꼭 전쟁터에 내보낸 군사 같아요. 일주일을 어떻게 싸우시고 오실까 아버지 힘주십시오. 하고 서로 헤어지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까지 서로 돌아보고 서로 돌아보고 그러면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랬었습니다. 
그날도 몇 분이 같이 모여서 계신 시간이었어요. 이 선생님이 들어오셨어요. 저는 이 선생님인줄 몰랐지요. 제가 얼핏 이 선생님을 뵈온 것은 얼마나 이 선생님이 뵙고 싶은데 젊은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 그 분은 마음을 꿰뚤러 보신다고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갈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을 때 애가 울어요. 동생이 울어서 그 핑계로 젖 먹이러 간다는 핑계로 이선생님 계신 데를 가보았어요. 가서도 멀리서서 들어가지도 못했지요. 꾸중들을까봐서 선생님 얼핏이 보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빨리 나오시데요. 뭣하러 왔냐고 애가 울어서 왔다고, 그렇지만 저는 그것이 아니지요. 얼핏이 보았는데 한 80세 된 노인 같아요. 하얀 노인이 호롱불 앞에 앉아계신 모습만 보고 왔어요. 그 모습만 보아도 제 마음이 하늘을 본 것 같이 후련 했었어요. 그런데 갈보리에서 뵈었던 선생님은 아주 청년이었지요. 

 

대나무숲 집터와 기념촬영
옛날 사진입니다

 

아래 이야기는 복은순 원장님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큰어머니의 전도를 받으시고 이 선생님을 만나시기 전에 10년 동안을 남원교회를 다니셨다고 그래요. 저는 요즘 들었거든요. 솔직히 어려서부터 출가를 해 나와 가지고 어렸을 때 어쨌다는 것을 전혀 어머니한테 여쭈어보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여쭈어 봤더니 10년 전에 큰어머니의 전도를 받고 여기(운교리)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믿는 분들도 아주 적으셔가지고 어머니 외에 큰어머니하고 수장언지 몇 분만 교회를 다니셨던 것 같아요. 다니시다가 이 선생님을 만나시게 되었지요. 그래서 가끔 오셔가지고 저희 큰 어머니 집에 가셔서 말씀도 하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때는 어머니가 제 막내 동생을 두고 예배드리러 가시면 계속 우니까 저는 그것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애기를 보느라고 그리고 가끔 그 가끔이 아니라 그때부터 아마 갈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가 토요일이면 막내 동생을 업고 교회를 다니셨어요. 그러니까 토요일에 가시면 언제나 일요일에 오시더라고요. 

갈보리 기념비와참가자 사진

좌표는 북위 : 35,32184. 동경 : 127,40273.

선인래 우물터와 집터에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