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지나 월동무가 새순이 돋아난다. 상한 부분을 잘라내고 가공을 서두르고 있다. 꽃가꾸기와 주변 정리를 했다.
최후의 심판
1981.2.1. 정인세 원장
추악한 이 죄인이 또 저희들 심히 부족한 인생들이 다시 모여서 여기 아버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을 갖고자 모였습니다. 이 시간 은혜를 내려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희들의 모든 죄를 다 도말해 주시고 아버님의 무한하신 영광을 위해서 받아주시기를 비옵고 또 저희들 한사람, 한사람의 심령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지 못하게 되는 형제들도 한 결 같이 이 시간 은혜가운데서 지내게 도와주시옵소서.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고루고루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모든 심령들이 새로워지고 아버님의 크신 영광을 찬양하고 큰 은혜 받는 시간되게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또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지도자들 위에 성신님이 함께해 주셔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또 그가 책임 맡은 일에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나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같이 계셔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종들 위에 특별히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 인류가 큰 도탄가운데 빠지지 말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고 같이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만 받들고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성경말씀 봉독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서부터 읽겠습니다. 최후의 심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을 때에 모든 민족들이 불려나와 그 앞에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놓아 양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는 그의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입니다. 그때에 그 임금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그 축복받은 착한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그리고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제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하지만 네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41절입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시고 목마르셨으며 나그네 되시고 헐벗었으며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제가 알고도 돌보아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저주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축복받은 사람은 착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 때에 되어 질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있는데 그것이 다 심판 때와 상관이 있는 비유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슬기 있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심판 때에 구원을 받고 영광을 누리게 되고 미련하고 게으른 처녀 다섯은 심판 때에 밖에 어두운 데에 쫓겨나서 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하는 이야기가 있고요. 둘째 번 비유에는 달란트 비유가 있는데 닷 냥 중 받은 사람 셋 냥 중 받은 사람은 그걸 가지고 충성스럽게 일을 해서 그만큼 남겼더니 하나님께서 칭찬을 하시고 착한 종이라고 그러고는 너희들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자. 이렇게 참 흐뭇한 포상을 하시고 그 한 냥 중 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묻었다가 그냥 내놓은 사람에게는 너는 과연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그러고는 이 쓸모없는 종을 밖에 어두운데 내어쫒으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라.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을 보니까 참 놀라운 일입니다. 셋째 번에도 또 그런 비유 아닙니까? 여기는 조금 예가 다릅니다. 인제 예수님께서 큰 영광을 떨치고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그러고 인제 심판을 하실 때 광경을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다 예수님 보좌 앞에 끌려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인제 이렇게 그 심판 받을 사람들을 갈라놓으시는데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다 섞여있지만 염소는 염소대로 갈라놓고 양은 양대로 갈라놓듯이 그렇게 양쪽에다가 갈라놓는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그렇게 자리 잡게 한 다음에 먼저 오른편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이 우리들의 과거의 생활이나 현재의 마음 상태나 어떤 종류인가? 그걸 한번 같이 기도해 보자는 것이지요.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판 날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는 축복을 받아라. 얼마나 참 기쁜 일입니까?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하늘나라의 축복을 누리자. 너희들은 참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나와함께 하늘나라를 누리자. 그러시면서 왜 그럽니까? 왜 무엇 때문에 축복을 받으라고 하시는 고 하니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사실 이거 생각해야지요? 이건 제가 여러분 들으시라고 만하는 거 절대로 아닙니다. 요새 제 자신에 대해서 심판하는 말이 자꾸 생겼어요. 참 이거 크게 내가 속고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아주 깊은 간절한 그렇게 또 그걸 독촉하는 사건이 자꾸 생기고 그래서 과연, 과연 나는 정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정말 나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그런 기억이 잘 안 나요. 안 납니다.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중병을 앓고 들어 누워있는 사람이 목이타서 애를 쓰고 있을 때에 수저에 다가 물 떠넣어 주었던가? 마음에서, 마음에서 그렇게 중병환자에게 라 던지 또 그 외에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던가? 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었던가?
내게 손님이 왔다 던지, 특히 나그네, 이 손님이라는 건, 내게 유익한 손님도 있고 해로운 손님도 있지요? 물론 그것도 똑같이 잘 대접해야 하지만 그것도 저는 못해요. 도저히 못합니다. 그런데 나그네라는 건 나와 이해관계가 없고 대게 나그네라는 건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 아닙니까? 와서 밥 한 그릇이라도 축내고 가고, 또 재우려면 잠자리 하나라도 준비하고, 참 저는 항상 그거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에요. 정말 만일 그냥 온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모두 이런데 똥오줌을 싸서 뭍이고 또 이가 줄줄 흐르고 하는 사람이 지금여기 오면, 맞아들일 수 있을까? 내 방에서나 내 옆방에 들여다가 여기 들어오라고 그리고 참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들일 수 있을까? 안 되는 거 같아요. 안 될 거고 못 할 거 같고 또 그렇게까지 않더라도 나그네라는 것은 참 정처 없이 그렇게 잠자리 없이 먹을 거 일정하지 않고 다니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의 사정을 참으로 이해하고 그런 사람을 언제든지 아무 때든지 얼마든지 기쁨으로 그렇게 맞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만큼 너그럽지 못 할뿐만 아니라 마음이 또 모든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저는 항상 병원 앞을 지나가다 보면요. 병원마다 그렇지만 응급실 이라는 게 있지요. 여기 전남 의대병원 앞을 차를 타고 자나가다 보면 응급실 이라고 빨갛게 커다랗게 써 붙였어요. 또 그 담장에다가 응급실 입구라고 써 놨어요. 그거 저는 참 흐뭇하고 좋아요. 거기서 들어간 뒤에 어떻게 맞는 건 나중문제고 어떤지 급한 환자를 이리 들어오시오. 하는 거 아니요? 사실 응급실에 들어가는 급한 환자라는 건 시간도 없고 또 돈이 한 푼도 없는 수가 있고 그런데 그걸 다 맞아들이다니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런 생각이 나요. 정말 급환환자를 진정으로 마음으로 맞아 드려줘서 조건 없이 해준다면 그거야말로 하늘나라 가서 큰 상을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소위 이렇게 참 말 내기도 부끄럽지요. 자선사업을 하니, 구제 사업을 하니 그런 말 내기도 자격이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렇게 간판 달아놓고 뭐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의지 없는 나그네가 온다면 무조건 그렇게 기쁨으로 참말로 맞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은 그래야하는데 더군다나 이런 데는 암만 참 문둥병자가 와도 폐병환자가 와도 걸인이 와도 어떤 사람이 와도 무조건 맞아들일 수 있는 게 그게 원래 믿는 사람들의 자세고 또 더군다나 이런 기관에서는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런데 뭐인지 모르게 그렇게 됩니까? 몰라요. 그렇게 하는 분도 계실지 몰라요. 또 여러분들은 하실 수 있는지 몰라. 그러나 제 마음준비가 그렇게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반성해 보는 거지요. 그래서 나그네들을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말이 좋아요.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 그런데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는 게 요새는 아주 필요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요. 요새는 생활이 뭐하고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따뜻하면 그 사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내가 배불렀을 때는 배고픈 사람이 절대로 안보입니다. 내가 참으로 배가 고파보고 내가 참으로 따뜻한 방이 없어서 한데서 떨면서 아이고 오늘 저녁은 어디 가서 잘고? 눈물을 흘려봐야 그런 사람의 사정이 알아지지. 제가 배우는 거예요. 제가 꽤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겠더라니까요. 그래 제가 그전에 만주 한번 왜정 때 쫓겨 다니다가 남의 집 추녀 끝에서 하루 밤 지낸 적이 있어요. 막 궂은비가 내리는데 어디 들어갈 곳이 없더라니까요. 참 눈물을 흘렸는가 몰라도, 어떤 추녀 끝에 가서 집 없는 사람들 불쌍하다. 잠자리 없는 사람들 불쌍하다. 마음으로 한번 느껴본 일이 있어요. 그건 도저히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심정입디다. 배고픈 것도 그래요. 또 헐벗어서 옷 못 입는 것도 그래요. 저부터도 여기 앉은 우리들은 솔직히 말하면 옷이 너무 많아요. 옷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헐벗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제가 그걸 무엇 때문에 느끼는가 하니 어제도 그이들 큰맘 먹고 가져온 거지요. 여기 미망인회 자매님 들인가 모두 서울 부인회 그런데서 헌옷들을 모아가지고 온 게 있기에 그걸 추려서 넣을 것 넣고 그러자. 그러면서 그런 걸 느꼈어요. 어떤 건 정성껏 내놓은 것도 있습니다. 뭐 못 입을 거, 이런 거, 내놓은 거 아니에요. 큰맘 먹고 내놓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걸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거 같지 않아요. 쓸데없는 거 모두 이런 거준다고 도리어 줄라면 이딴 거 줘? 라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있거니와 어떻게 생각하셔? 여기 있는 우리들 보고 지금 헐벗고 그런 사람이 있으니 여러분들이 갖은 옷가지 한 가지씩 이라도 내놓으시오. 그러면 여러분들 내놓으실 분들 있겠지요? 기쁨으로 얼마나 내놓으실 런지? 그러니까 그런 거 보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마음과 그 내놓은 사람의 마음을 언제든지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데 참으로 입을 옷이 없어서 헐벗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기에는 현재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아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우리 눈앞에 있고도 안보일수 있어요. 아주 생각밖에 가까운데 있는 사람인지 그걸 모릅니다. 안 보이지요.
더 넓게 보면 많이 있을 거고. 더 이렇게 세계를 놓고 보면 이만저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몇 만 명씩 굶어죽는 나라도 있고 그런데 꾀 벗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 사진이 가끔 나오지 않읍디까? 그런걸 보면 옷 하나 헝겊 데기 하나도 아깝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아닌 것을 이렇게 못 하는 건 의미가 적어요. 내 것을 보내야지. 내 것을 한 가지라도 보태서 이렇게 내보내는 것이 의미가 있지요. 그런 걸 좀 했느냐? 그걸 예수님이 물어보시는 거예요. 너희들 옷 못 입은 사람들을 위해서 옷 한 가지라도 내놓은 일 있느냐? 그걸 지금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또 인제 우리는 더 가까운 문제들이 있지요.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이 안에 지금 병든 사람이 꽤 많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인제 여려 분들은 같이 있는 방에도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아마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이 하시는 줄 압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이 그렇게 대변을 제대로 못하면 그 냄새나고 더러운 걸 다 치워주는 분도 있고 모두 입을 헹궈주는 그런 일도하고 옷을 빨아주고 그거 참 사랑으로 마음으로만 한다면 그건 참 훌륭한 일이고 아마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으로만 했다면 아마 예수님이 내가 병들었을 때 그렇게 너희들이 나를 돌보아 주었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는 지금 기회가 많이 주어져있어요. 정신적으로 부족한 이, 정신적으로 부족한 이 라는 건 큰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정신병자가 되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저는 제일 머리 아픈 병을 못 견디는 사람이에요. 다른 건 참는데 머리는 조금만 아파도 못 견뎌요. 그런데 정신병자라는 건 마음도 머리도 굉장히 고통을 느낀답디다. 정신병자 그러니까 정신병자가 소리를 치고 또 그렇게 중얼중얼 하고 돌아다니고 뭐이라고 누가 날더러 해치려고 한다는걸 우리는 대개 흉을 잡지 않습니까? 참 귀찮은 존재로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 마음에는 항상 피해망상증 이라고 모든 사람이 나를 해치려고 그런다. 저 사람도 나를 해치려고 한다고 저 사람도 그 피해망상증, 그게 있다는 거예요. 그래 오죽하겠어요? 밤낮 저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고 한다고만 생각하니 마음 편할 시간이 조금도 없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참 딱하고 불쌍하거든요. 그거 우리가 흉볼 수 없거든요. 흉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저 마음을 안정시켜줄까? 또 항상 보면 우리가 못 미쳐요. 이 안에서 우리가 할 일 모르겠어요. 열 칸에 한 칸이나 하고 있는가? 아홉 칸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안정시키는 게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시끄럽게 하고 걸리적거리고, 그 한 사람 한사람은 다 그 욕구가 있는 거예요. 가만있던지 뛰뛰 하던지, 남을 막 때리든지, 그 속에 욕구불만이 꽉 차서 폭발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만족시켜 주는가가 우리의 임무에요 여기는 그 욕구불만을 어떻게 해소시켜주느냐? 그래서 그 마음을 풀어주느냐? 그래서 그걸 잘 유도하면 정신병은 낫는다고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하나만 가지고 아주 내 심혈을 다 기울이고 사랑을 쏟아내 놓으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거거든요. 그 사람을 기도하고 내가 먹을 걸 잊어버리고 잠잘 걸 잊어버리고 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해주고고 아껴 주고 돌봐주고 때리면 그저 아무소리 안하고 맞고 그냥 참 눈물을 흘리고 때리는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그래야 되는 거예요. 정신병자를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못한다고 제가 꾸짖는 거는 절대로 아니에요. 공동책임 아래서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 있는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가?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봐주었고 예수님이 자기입장에서 하는 소리지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는 예수님이 그러면 우리가 돌보지 않겠느냐? 그러지만 그렇게 되요? 예수님이 오셨다고 자꾸만 하루에 졸졸 대변을 내놓으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이라고 잘 돌봐드리려는가 모르겠습니다. 잔소리안하고 눈살 찌푸리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참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지요. 뭐 예수 따로 있고 그런 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픈 사람이 나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거든요. 내가 그랬을 적에 너희들이 나를 돌봐주었는가? 얼마나 친절하게 얼마나 겸손하게 사랑으로 그렇게 나를 돌봐주었는가? 그렇게 물어보시거든요.
그런데 사실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우리가운데도 그렇게 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칭찬하시는 거야. 너희들이 그렇게 어려울 적에 내가 병들어서 그렇게 어려울 적에 너희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이건 우리가 거의 못하고 있지요? 적당하게 이유를 달겠지만 지금 감옥에서 받아야할 고통을 당연히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의례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갇혀있는 사람의 심정이 되면 그게 그런대로 굉장히 불편도 많고 또 마음에 고통도 많고 그럴 거 아니에요? 저는 더러 그 감옥에 갇힌 사람만 위해서 전도하기로 사명을 느끼고 전도하는 사람이 있습디다. 아참 특별한 사람이다. 아주 참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한다. 하는데 이상하게 꼭 갇힌 사람만 열심히 찾아보고 전도하러 다니고 차입을 해주고 또 책을 사서 넣어주고 또 구박을 받아가면서 가서 붙들고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 끈기 있게 핑계를 하면서 전도를 하면서 도움을 주고 돌봐주는 이가 있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일을 저는 근자에 와서 한 기억도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 할 적에는 작금 그래야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곧 잊어버려요. 또 실제로는 제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고생하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아요. 바쁘다는 핑계를 하고 어찌되었든지 우리 주위에 있거든요. 현재로 있지 않소? 여러분 주위에도 꼭 칭찬만이 아니고 그런데 그 찾아보았느냐? 이런 게 걸려요. 이게 심판받는다니까 이게 문제가 된다니까요. 지금 아 그런 거 뭐 안 해도 우리가 하나님 일 잘 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러는데 심판 때가서 하필 이런 것들만 추켜 내세워서 꺼내가지고 문제가 되요. 예수님이 그런 거 했다고 아주 굉장히 칭찬을 하는 거예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물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봐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러니 너희들은 착한 사람들이야. 착한 사람들이야. 그러면서 아주 창조이전부터 너희들을 위해서 그 축복하기로 한 나라를 나와함께 누리자. 아 목마른 사람한테 물 한 그릇주고 하늘나라를 누리다니 얼마나 그것참 곧이들리지 않아요? 우리는 하늘나라 가려면 성인이 되고 굉장히 수도를 하고 아주 애를 쓰고 지금 몸부림을 치는 게 하늘나라 가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갈 듯 말듯 한 것으로 생각들을 하는데 배고픈 자에게 밥 한 그릇만 주면 된다. 그렇게 되지 않아요? 여기 말씀대로 하면 심판 날에 가서 너는 뭐 성경 많이 아느냐? 수도를 많이 했느냐? 어찌했느냐? 굉장한 것 물으시지 않고 목마른 자에게 물 한 그릇 주었느냐? 그걸 물으신 다니까요. 그래서 새삼
(끊김)
말로라도 아 얼마나 아프시고 가령 이런 말 한마디라도 동정하는 말 한마디라도 그런 것 까지 여기는 계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까지 그래서 그런 것이 모두 심판 날에 가서 드러난다는 거예요. 드러난다. 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는 인제 상을 받는 사람 인제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늘나라를 누리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마지막에 하시는지는 또 나오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왼쪽에 좌편에 있는 사람들인데 그 위에 가서 보면 표현을 이상하게 했어요. 염소라 그랬어. 염소 염소라는 동물을 보통으로 그 생김생김이라든지 그 목소리든지 간사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에다가 가끔 염소를 비유합니다. 염소 같은 사람이라고 그걸 더 이렇게 하면 위선자 거짓을 많이 부리는 사람을 염소로 많이 비유 하는데 아마 여기도 그런 의미가 많이 섞여있는지 몰라요. 그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사람들에게 이 저주받은 자들, 그런데 그 아래가보면 그 조건이 저주받을 조건이 못 돼. 아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 안줬다고 저주받으라고 하시다니 그건 너무하시지 않소? 사람을 죽였다든지, 강도질 했다든지, 그러면 모르겠는데 또 더군다나 병든 사람을 좀 찾아보고 돌아보지 않았다고 저주받은 자들아 그러신다고,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심판은 대단히 표준이 아주 어렵구나. 그런 생각이 날겁니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그러고 악마와 그 종도들에게 주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이게 무서워요. 심판이라는 건 이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그 아래도 똑같아요.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저부터 양심을 갈라놓고 심판을 받아보자. 그래서 이야기를 한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럼 이렇게 됩니다.
너는 내가 또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형제가 있는데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니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종도들을 가두어두려고 준비한 그 불속으로 들어가거라. 그거 아닙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배고픈 사람을 무시했다. 배고픈 사람에게 동정을 하지 않았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째요? 그럴 수가 있을까? 또 그 다음에 보면 너희는 하나하나 떼어보면 이래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니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가라. 그 다음에 보면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아 여기 누가 찾아왔는데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고 잘데 없으니 다른 데로 가시오. 막상 그랬다고 합시다. 누가 그랬다고 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종도들을 가두어 두려고 준비한 그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이악한 것아, 우리 여기 대문간에서 사람 쫒지 않았는가요? 저도 그런 짓 잘해요. 지난번에도 누가 와서 밤중에 저는 핑계가 좋지요. 여기는 여반이니까 안 됩니다. 핑계야. 그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되겠소? 너 자는데 너는 남자가 왜 여기서 자느냐? 너 자는 방에 못 재우냐? 그럴 거예요. 그래 이 말씀이 실감이 나요. 저기 사는 사람인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려는데 늦어서 이리 들어왔다고. 아, 저녁 좀 먹여줄 수 없냐고 그런데 이 말씀이 생각이 나더라니까 그래서 이것 참 이럴 수도 없고 그래 생각난 게 남반으로 쫒아 보내자. 그래 누구를 시켜서 이 양반 남반으로 모시고가서 저녁 좀 드리고 재워서 보내도록 말하라고 그런데 뭔지 모르게 마음이 개운하지 않더라니까요. 개운할거요. 마음이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모르겠소. 하나님이 너는 염치없는 말이지만 조금 하는 척 했으니 우리들은 이해타산을 떠나서 조건이 없어야 하는 거거든. 그게 마음준비가 안 되어있기 때문에 그만큼 못해요. 또 하나는 우리 생활이 타락되어 있어서 그럽니다. 아마 옛날에 이 선생님 같으면 그분이 불쌍한 사람 도우려는 거 같으면 그건 철저해요. 철저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건 그 분의 생활이 딱 갈라져 버려서 저는 생활에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라 서요. 왜 해도 꼬랑지가 흐리멍덩해요. 선을 행해도 철저하게 하지 못해. 그래서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주지 않았다. 그러고 말하니까 그 사람들은 또 이렇게 변명을 하는 거지요.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시고 목마르셨으며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제가 돌보아 드리지 않았습니까?
여기 두 가지 뜻이 있지요. 하나는 사실은 주님이 그러셨더라면 제가 했을 겁니다. 주님이 언제 그러셨습니까? 이런 뜻도 직접으로 들리지 않아요? 그런 또 하나는 자기가 그런 사람을 얼마든지 보고 헐벗은 사람 굶주린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모두 통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거든.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야. 자기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돌보지 않았다는데 가책을 안 느꼈다. 그 말이에요. 만일 가책을 느꼈다면 조금 걸렸을 겁니다. 꿈틀 했을 겁니다. 그때 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내가 배고픈 사람에게 내가 먹을 것이라도 조금 챙겨서 줄걸. 그때 아픈 사람을 내가 좀 거들어 라도 줄걸. 그랬을 거예요. 그 가책을 통 느낀 게 없었으니까 이렇게 뻔뻔스럽게 다 변명해 버리는 거야. 만일 주님이 그러셨더라면 제가 하구말구요. 얼마든지 그런 일 했지요. 이런 뜻 아닙니까? 그렇게 나오는 거야. 그러나 그게 심판 날에 가서는 성립이 안 되어요. 혹은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 그래 그럴 수도 있었지. 이러고 넘어가는데 심판 때 가서는 그게 안 된다니까요. 용서가 안 되어요. 그때 가서는 그래서 요새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럼 여기는 거의가 걸리지요. 아마 이거 걸리지 않는 사람이 도리어 드물다고 할 정도로 걸립니다. 그러고 우리가 이러고 속아요. 간판을 걸어놓고 제가 왜 하필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나 시내 부자들이나 그 옷 잘 입은 사람들 모인 예배당에나 가서 그런 소리를 하지. 왜 우리들 이런데 와서 더군다나 우리는 손에 돈 한 푼 없고 누구를 도와줄 수도 없는 병신들 불구자들 또 여기는 대게 가난한 우리들한테 와서 그런 소리를 하나 그러실 지도 모르지만요. 그러니까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났어요. 간판 달아놓고 하는 자선사업 기관에서 실질적인 자선을 얼마나 베풀고 있느냐? 그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제게 묻는 소리에요. 사회 사람들은 오면 인사합니다. 참 고생하십니다. 좋은 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합디다요. 여기 직원들이나 여러분들 여기 누가 와서 그런 말 하면 그렇지 그 말 들어도 마땅하지 그럽디까? 참 사실은 부끄럽고 괴로운 시간이지요. 참 좋은 일 많이 합니다. 그러면 물론 내가 하지 않으니까 참 뻔뻔스럽게 뭐 하는 척 한다. 이런 말도 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야.
정말 가려운데 긁어주지 못하고 아픈데 만져주지 못하는 게 우리 현황 아니요? 다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애쓰는 이들이 있어요. 그치 만 사랑으로 되는가는 문제지만 또 형식적으로라도 못 미치는 게 사랑 아닙니까? 우리가 양심을 털어놓고 고백을 해야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렇게 아주 알뜰살뜰히 구석 지 까지 싫어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그렇게 정말로 그렇게 알뜰살뜰히 챙기느냐고 시작도 안 된 부분이 많거든요. 그런데 밖에서는 그렇게 안보니 이중고가 되지요. 내가 할 일을 못하니 양심이 괴롭고 또 실제로 하지도 못하면서 칭찬 들으니 속여먹으니 괴롭고 이중고통이지요. 알고 보면 그래요. 그래 여기는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그런 정도가 아니고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무슨 변명이나 그런 게 없어요.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가지 꾸짖고만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렇게 해서 저주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야. 영원히 벌 받는 곳이야. 다시는 회복 할 수가 없어 영원하다. 그러니 너무하지 않느냐? 그런데 이거 보시오. 우리 한발 더 들어가서 생각해 봅시다. 저부터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는 건데 해주기는 고사하고 그 사람들을 이용해 먹지나 않는지? 서로 간에 그렇지 않아? 내가 지금 옷이 환자가 입은 옷을 내가 뺏어 입지 않았나? 간접으로라도 그 사람 옷값은 물론 아니지요. 나 입으라고 누가 이렇게 갖다 줬지요? 그럼 나를 왜 갖다 줬어요? 환자 돌본다고 좋은 일 한다고 가져다준 거 아니요? 그럼 그 사람이름 이용해 먹은 거지 뭐요? 내가 얻어 입은 거지. 그 사람 덕분에 얻어 입었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만일 내게 누가 돈 한 푼 줬다 던지 먹을 거 같다줬다면 둘 중에 하나일 거예요. 내가 뭐 인물이 잘나서 자격이 선해서 갖다 주지 않았을 거예요. 예수의 이름으로 받아먹었던지 환자 이름으로 받아먹은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둘 중에 하나일 거예요. 그런데 둘 다 양심껏 되지 않았다면 그건 사기 사기야. 속여먹는 사람이야. 우리는 그런 일이 없냐 그 말이지요. 지금 우리 생활가운데 그런데 이게 심판 때가서 문제가 된다 그 말이에요. 사람보기에는 속아 넘어가. 속이고 속고 할 수 있어. 사람 보기에는 여러분들이 밥 먹는 거 당당히 내가 수고하니까 밥 먹는다. 이럴 수 있어? 그러나 심판 날에 가서는 훨씬 더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서운 거야. 그래서 자기 딴에는 내가 꽤 애를 쓰고 밥도 얻어먹었고 그만큼 했으니까. 또 사도바울도 그러지 않았어요. 수고하는 소의 입에다가 자갈을 메이지 말라고 먹어도 괜찮다고 그랬으니까 그것 쫌 어떻겠느냐 그랬는데 만일 심판대 앞에 나가요. 제가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한 것처럼 하고 그러고 뭐 했는가? 이건 우리가 구제 사업에도 그렇고 전도 사업에도 그렇고 그런 거 많아요. 예수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면서 밥 얻어먹는 거, 돈 받는 거, 다 잘못하면 죄가 됩니다. 심판 날에 가서 모두 걸리니까 무서운 거지요.
참 그런데 여기 이 말씀이 예수님이 그 예화를 든 거 보면요, 참 평범한 것 같고 대단치 않은 것 같은데 그 아주 수준은 대단히 까다로워요. 까다로워서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선 칼과 같아서 우리 살도 쪼개고 뼈도 쪼개고 뼈 속 골수까지 쪼갠다. 심판이라는 것은 성질이 그렇게 되는 거. 그래서 그걸 면하는 것인데 어떻게 면하느냐? 이렇게 해서 저주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축복받은 착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때 당해봐야 아는 것이지 또 현실적으로는 우리 양심이 그 심판을 하지요. 우리 양심이 어떤 쪽이 되느냐? 그래 지금 우리가 해보자고 처음에 그랬지요? 저주받은 사람은 영원히 벌 받을 곳으로 쫓겨날 것이요. 그럼 그건 어떤 쪽인가? 우리는 그쪽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축복받은 착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인가? 그럼 여기 앉은 이 죄인부터 여러분이 그 축복받는 쪽입니까? 저주받는 쪽입니까? 그게 지금 하나 가려보자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건 이담 문제가 아니야. 죽은 뒤의 문제가 아니야. 현재 문제야. 현재 지금 내가 또 예수님은 도적같이 들어오신다고 그랬으니까 또 심판이라는 건 날마다 있고 시간마다 있는 거니까 우리가 한번 심판을 받아보자. 지금 내가 저주받은 쪽인가? 축복받은 쪽인가? 그게 문제 아니야? 만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금 이 말씀을 이렇게 말만 하고 말아버리면 문제가 커져버리니까 그 이런 말씀 있지요? 요한1서 4장에 여러분 잘 아시는데 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었습니다. 요한1서 4장 17절 이하입니다. 곧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시오. 여기 보면 요한1서 4장 17절 하반 절 이에요.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어떻게 자신을 가지고 심판을 맞을 수 있습니까?
어때요? 그럼 여러분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어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인데요. 만일 예수님이 이렇게 양과 염소를 갈라놨을 때 자신 있게 그 앞에 설수 있다. 그 말이 되요. 자신 있게, 저는 문제없습니다. 이런 쪽 아니에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조건이 꼭 하나 있거든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이 조건이 되어요. 그래가지고 사랑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내가 또 주님을 전심전력을 해서 사랑을 하고 또 내가 이웃을 그렇게 사랑을 하고 그렇게 사랑 가운데 있으면 첫째 마음에 두려움이 없다는 거지요. 두려움이 없어 불안이 없고 그런데 사랑이 그 마음속에 없는 사람은 항상 불안해. 심판도 무섭고 죽음도 무섭고 세상 마치 도적질을 한 사람이 있다면 경찰만 봐도 무섭고 언제 내가 잡혀갈지 모르니까 밤새 잠자리도 다리를 오그리고 자는 이런 느낌,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불안 때문에 심판을 모르는 사람도 말이요.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심판 같은 건 생각도 않는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그 하나님의 큰 심판에 대한 불안이 그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워져. 그렇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항상 두려움이 있어요. 언제든지 나쁜 짓 한 사람은 밤낮 두려워하지 않소? 두려운 마음이 생겨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걸 현실적인 심판이라. 그러고 양심적인 심판이라. 그러고 사회적인 심판이라 고도 그럽니다. 심판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항상 말씀 해왔어요. 사회심판 양심심판 역사적인 심판과 이제 하나님의 성서적인 심판과 그런 심판이 있는 것인데 어찌되었든지 그것이 항상 우리 마음을 괴롭게 만들어요. 그걸 해소하는 조건이 여기 요한1서에 보니까 사랑이야. 사랑만 하면 그 문제가 해결 되어요. 불안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두려움을 내쫒게 된다.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 공포증이 없어진다고 그리고, 어떠한 심판이 닥쳐도 두렵지 않아. 그 말씀을 인제 그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심판에다가 우리가 해 봅시다. 그러니까 여기 조건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또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었다.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았다. 그게 전부 사랑 아니요? 사랑, 그걸 요구하신 거 아니요? 그러니까 물 한 그릇 준 게 그게 잘한 거 아니다. 그 말이에요. 사랑을 준 것을 장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는 조건이 심판 조건이 자비입니다. 네가 자비롭게 살았느냐? 그것을 물으시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엄격하지. 그러니까 물 한 그릇 주었다는 그 행위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 목마른 사람이 얼마나 저 사람이 목이 마를까? 그 목마른 사람을 동정했어. 목마른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불쌍히 여겼어. 목마른 사람을 그래서 물 한방을 그 목에 축여준 것을 사랑해서 그랬기 때문에 나온 거, 그 사람은 그때 행위로서는 물 한 그릇만 주었지만 그 사람 마음에 사랑이 있었으니까 다른 것도 다 할 수 있는 사람 아니요?
그렇게 목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배고픈 사람에게 밥도 줄 수 있을 것이고, 갇힌 사람에게 도움도 줄 수 있을 것이고, 또 목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픈 사람은 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 아니요? 그 사람이 여기 보면 영원한 축복을 받은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야. 자비로운 사람이야. 그것 때문에 여기부터 도웁는 거야. 그렇게 볼 때는 그럼 반대를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그럼 그 목마른 사람에게 그 사정 봐주지 않았다는 건 사랑이 없다는 그 말이야. 동정심이 없어. 내가 목이 말라야 야단이지 다른 사람이 목마른 건 아무렇지도 않아 다른 사람이 아픈 것도 자기는 손톱 밑에 가시만 들어도 그냥 몸살을 하고 펄펄뛰고 죽는 상을 해도 다른 사람은 심장 밑이 썩어져가도 그렇게 관심이 없는 이거 사랑이 없는 거 아니요. 결국 보시오. 이제 그렇다면 지금 목마른 사람의 사정을 모르고 목마른 사람이 목마른 거에 대해서 불쌍히 여길 줄 참 그 동정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배고픈 사람도 무시할 수 있고 병든 사람도 무시할 수 있고 사랑이 없으니까 원체 남에게 내놓을 사랑이 없어. 그 사람 속에 그러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겠소.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마음속에 사랑이라고는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겠소? 그러니까 영원히 불로 가라고 그러시는 거지요. 하늘나라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나라인데 그리고 지옥이라는 데는 동정이 없고 인정이 없고 사랑이 없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곳이 지옥인데 거기 합당하지 않아요? 이러고 보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렇구나. 그런 생각이 나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물 한 모금 안줬다고 영원한 불이 붙는 지옥에 가라. 이건 너무하시지 않냐? 그랬는데 그게 아니야. 그 마음가운데 사랑이 없는 걸 판결하신거야. 그걸 심판하신거야.
사랑이 없는 것들은 이제 그렇게 보면요. 마태복음 25장에 아까 그 세 가지 비유가 있다고 그랬는데 전부 다 그런 비유 아닙니까? 열 처녀 비유도 그런 거예요. 보통으로 그 등은 믿음이라고 그럽니다. 그러고 기름은 사랑이라 그래요. 성신이라고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사랑이라고 더 많이 해요. 믿는다고 하는 것 같은데 등은 들고 있는데 사랑이 없어. 기름이 없어. 아 빈 등만 들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오히려 걸리적거리지. 빈등은 귀찮기만 하지. 불을 쓰는 것이 목적 아니요? 그래 사랑이 없는 믿음은 쓸데없다는 말이 그 열 처녀 비유거든. 그러면 거기도 그렇게 되어있어. 그래서 그 사람 기름하나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밖에 쫓겨나서 영원히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되었다. 그러고 한 사람은 기름 준비한 것뿐이야. 똑같이 등 준비했는데 한사람은 기름 준비 안했기 때문에 밖에 쫓겨나고 한 사람은 기름준비 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서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가서 얼마나 기뻤겠소? 얼마나 기쁘고 참 기다리던 피곤도 다 없어져 버리고 그런 비유를 했다고. 사랑하나 없기 때문에 한사람은 그렇게 되고 한사람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마태복음 25장 비유가 다 그렇대요. 그러면 달란트 비유도 그렇게 해석을 해요. 달란트 비유도 거기 보니까 아주 충성스럽게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 그 데살로니가 전서1장이나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사랑으로 수고 한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네 사랑이 날마다 더 두터워 진다는 걸 보고 내가 기뻐한다. 그런 말씀이 있지 않아요? 그게 중심이 되요. 그게 중심이 돼서 말하자면 그렇게 사랑을 가지고 일을 해서 이익을 많이 남겼다. 그런 말이에요. 사랑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뿌리고 그래요.
그런데 한 사람은 그냥 메말라 버렸어. 사랑이 없어. 메말랐어. 그 사랑이 없어 메말라 버렸다. 그것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말했어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랬지요. 거기 보면 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보고 싸놓았다가 내놓으면 인정해 줄 것 같은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왜 그런가 하니 사랑이라는 것은요 우리 행동을 위축시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순전히 자기만 위해 삽니다. 자기 먹을 것 자기 입을 것 자기 편한 것 누가 자기 칭찬해 주는 것 사랑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그런 것입니다. 칭찬이나 들으려고 그러고 편한 것만 챙기고 자기 먹을 것이나 챙기고 자기 이속이 있으면 꼼지락 거리고 자기 이속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 사랑 없는 사람의 특징이거든요. 사랑 있는 사람은 반대거든요. 사랑이 있는 사람 보면 그냥 괴로운 걸 모르고 수고하는 걸 모르고 그냥 쉬었으면 좋겠는데 쉬지도 않고 그냥 밤낮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항상 미안하게 생각을 하고 항상 누구에게 주지를 못해서 애쓰고 그게 사랑이 습관화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 자비심이 많고 사랑이 있는 사람 보면 뭐 저를 위해서 갖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처럼 그러지 않아요? 저는 이거 어른이야기를 공 석상에서 피하고 싶은데 이렇게 엊그제 손님 한분이 오셨었어요.
그분도 제 나이 살이나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아쉬운 일이 있었어요. 이쪽에서 아쉬운 일이 있어서 전화로 ‘선생님 제가 지금 뵈오려 가렵니다.’ ‘아이고, 노인이 어떻게 오시냐’고 자기와 비슷한데 자기는 머리가 하얀 양반이 또 그 양반은 내가 보기에는 우리 한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자에요. 전남대학교 교수시고 또 여기 임원이고 그러니 당연히 가야지요. 뭘 로 보던지 이쪽이 아쉽고 그런데 아이고 말씀도 아니라고 제가 가렵니다. 내가 거기 볼일도 있고 아 기어이 그분 참 사랑에 밀려버렸어요. 그래요 그럼 우리 차로 모시러, 아이고 저 같은 것 때문에 기름을 쓰시냐고 저 같은 거라고 그래 아 그분 서울 갖다 대면 일류에요. 그래도 그러실 필요 없다고 기어이 자전거타고 여기까지 왔어. 그래가지고 인제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저는요. 성질이 고약해서 이렇게 설교를 해도 그렇고 누구하고 이야기를 해도 그렇고 맨 나쁜 거만 봅니다. 그리고 나쁘다고 이야기해. 그래 옆 사람들도 원장님은 맨 우리 흉만 보지. 칭찬은 전혀 할 줄 모른다고 이야기 하거든. 그런데 그 양반하고 이야기 하는데 반대더라니 까요. 맨 좋은 이야기만 해. 좋게 그게 참 훌륭한 거예요. 그분하고 이야기 하는데 차를 한잔 드렸어요. 그분이 여기서 서류를 볼게 많았었어요. 내 생각에 한 시간 이상 걸릴 것 같아. 그걸 착실하게 그 바쁜 양반이 안경을 쓰고 다 봅디다. 지금도 대학이 정년퇴직했는데도 아쉬우니까 학교에서 자꾸 모셔가요. 그래서 바빠요. 그런 양반이 찬찬히 다 보고 그러니까 차를 내놓을 것 아니오? 의례, 아 그랬더니 저 같은 것을 차를 다 주십니까? 그러데요. 어째 여러분 그러고 차를 잡숴보신 적 있습니까? 차 드리면 여러분 차를 드리면 아 저 같은 거에게 차를 주십니까? 그래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먹어본 일이 없어. 아 저렇게 겸손하실까? 어쩌면 이렇게 겸손하실까? 그래 나중에 인제 기어이 자전거타고 우리 차에 싣고 그분도 칠십이 다된 양반인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시냐고 그랬더니 자꾸 그래요. 자기는 기름 석유 쓰는 게 아깝다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들은 저도 그래요. 의례 휙 자가용 우리차인데 어째? 하고 미안한 생각이 요만큼도 없지요. 그런데 그 양반이 저 같은 것 때문에 기름 쓰는 거 아깝다고 그래요. 기어이 막 뿌리치고 자전거를 타셔요. 그 양반은 그랬어요. 이 선생님이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그런 이야기 하십디다. 그 양반 자기가 일생동안 사람 만난 거중에 그 양반 만난 걸 하나님 앞에 감사 한다고. 한국에서 그렇게 겸손한 사람 처음 봤다고 이 선생님이 밤낮 그랬습니다. 참 겪어 볼수록 겪어 볼수록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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