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살구꽃이 모두 피다 : 사 랑

mamuli0 2022. 3. 27. 08:23

 우리가 내려올때 개량살구 한나무가 있었고 할머니가 양살구를 사다 심었다. 그후 동네에 사는이가 토종 살구를 주어 심었는데 개랼 양살구는 태풍에 쓰러져 기운대로 살아있으나 토종 살구는 세그루 모두 건재하다. 오늘은 살구꽃을 중심으로 사진을 담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후 자주 내린다. 강풍으로 비닐하우스가 찌저지고 큰물통도 옮겨 놓았다. 태풍 못지 않은 강한 바람이었다.

 

 

사  랑 

 1981.01.02. 정인세 원장 

 또 자기 무엇이 이런 건 많아요. 제 안에서도 자꾸 그 자랑하려고 하는 말들이 있어요. 내가 이만큼 했다. 이거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랑하고 그럴 때, 만일 자기가 그렇게 무엇이든지 자랑하고 싶은 때, 누구에게 칭찬을 요구하고 싶을 때, 그때 양심을 더듬어 봐라. 그거에요. 네 속에 사랑이 있는가? 사랑이 없을 때는 그런 게 나온다는 그 말이에요. 사랑이 없을 때는 자랑, 그러니까 사랑은 참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말 아니에요?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참 아까 제가 오전에 말씀 듣는 가운데 아주 감명 깊게 들은 말씀이 겸손은 순결의 보고라. 그 말씀 생전 잊어버리지 않고 싶어요. 그런데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하다. 그 말이지요. 참 사랑이라는 것은 겸손이지요. 겸손의 덕을 이 시간에 우리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만 배우면 되지요.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이 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땅에까지 내려오신 것 아닙니까? 내려와서 그 고생을 하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셨다. 낮추셨다. 그 말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너희들도 거기서 그것을 배워라. 겸손, 그거를 배워라. 이렇게 사도바울이 지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시는데 어디까지 낮추셨다. 그랬어요? 음부에까지, 지옥에까지, 내려가도록 낮추셨다. 오늘 땅위에서 참 겸손한 지도자들이 많은데 겸손의 덕은 기독교의 첫째도 기독교의 미덕은 겸손이다. 기독교의 미덕은 둘째도 겸손, 기독교의 미덕은 셋째도 겸손이다. 그런 말 한 게 어거스틴 입니다. 그런데 좌우간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강조했지만 그게 무한히 낮아지는 마음 아니야? 무한히 낮아지는 마음, 그런데 예수님같이 음부에 떨어지도록 낮아진 사람은 아직 땅위에 없어요. 아까도 선생님에 대한 걸 조금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 사람은 설교를 듣는 가운데 예수님은 비천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는 그 설교 한마디를 듣고 일생동안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그렇게 아까말씀한대로 그렇게 수녀원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래도 내가 너무 높지 않으냐? 그래도 내가 너무 높지 않으냐? 그래서 그 양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 고 하니 비천한 곳에 사랑하는 주님 만난다. 그것 하나에요. 주님 만나고 싶어서야 마음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싶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자꾸 떨어진 게 아프리카 오지까지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그 무서운 사람을 잡아먹는 속에 들어가서 있다가 순교를 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낮은데, 낮은데 자꾸 낮은 데를 찾아간 거지요. 그런데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기가 제일인척 높은 척 하느냐는 말씀이지요.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높아지지 않습니다. 이건 양면이 다 있어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절대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 말도 있어요. 그 말도 있고 또 참으로 내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무한히 내 마음을 낮출 것입니다. 같은 말이지요. 그래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꾸 이렇게 찾아보는 거지요.

 


 또 여섯 번째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이 예의라는 것은요. 인격과 인격이 서로 존중하고 지내기 위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서 예법이라는 것이 생긴 거지요. 사람이 사람노릇 하도록 질서를 보전한다. 한 방식이거든요. 예법이라는 건 그것은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서로 인격을 유린하고 짓밟고 하지 말자. 그거에요. 이 사랑이라는 건 인격을 존중해 주는 거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의 인간의 가치를 무한이 높이 평가하시고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희생해 주신 것이다. 그럼 우리가 형제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형제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거예요. 병신이라고 업신여기지 않고 무식하다고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정신병자에게 까지 라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 인정하고 그걸 존중하고 그런 동기에서 이런 사업도 나와야 되는 것이지요. 무한한 인격이, 그걸 인격을 존중해 주는데 그 참사랑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알아야합니다. 사랑은 참 사랑이 있다면 예모 있게들 살아야 되요. 우리가 이 예모에 대한 것은 다른 방면에서 많이 적용하고 있지요. 말하자면 순결이니 청빈이니 순명이니 이 덕을 지키는데도 예모라는 걸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그래 아까 오전시간에 세밀하게 이야기 할 적에 불필요한 이야기 마라라. 뭐 어째라. 그런 것인데 그걸 아주 수도원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세목 적으로 옛날에 가르쳐 주셨지요. 이 선생님 방에서 밥상 심부름하고 진지 상 심부름하고 소제도 하던 청년 한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인제 이 선생님 진지를 가지고 갑니다. 진지를 가지고 가면 밥상을 이렇게 진지 상을 가지고 가면 이 선생이 받을 거 아니요? 그 청년이 자기 딴에는, 그런데 이 선생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여자는 문밖에서 진지 상을 가져다가 밖에다 놓고 땅 바닥에 딱 놓은 뒤에 밥상을 통해서 손이 닿을 가 봐 놓고 그러고 안에서 놓은 뒤에 남자가 들도록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거기다대면 저도 낙제고, 낙제할 사람 많지요. 여기 그런데 그렇게 했어요. 그게 일종의 예의가 되고 도덕이 되지요. 옛날에 동광원 내부 이야기가 자꾸 나오려고 그러는데, 옛날에 이 선생님이 처음으로 이 동광원을 지도하실 때는 사람의 얼굴을 못 쳐다봤어요. 지금 여러분들 남자 얼굴을 쳐다보는지 모르겠는데 못 쳐다봤어요. 쳐다보지 못 하게하셨는지 몰라도 어찌되었든지 못 쳐다봤어요. 예의에 대한 강의가 나오면 그건 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어찌되었든지 우리가 참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인격을 서로 존중해 주는 거 인격을 서로 존중하는데서 그게 이 질서라는 것이 자연히 서 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사심을 품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 큰 문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사심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건데 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이기주의입니다. 이 이기주의는 아주 우리 영혼이라든지 우리 생활을 좀먹는 지독한 병균입니다. 또 우리를 국가와 사회와 전 인류를 가장 치명적으로 망쳐놓는 암적 존재입니다. 이기주의라는 건 가정도 이기주의로 대개 이렇게 찢어지게 되는 것이고 대개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런 것인데 사랑은 그게 없다는 거예요. 사가 없다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전부 깨지지요. 원자탄이라든지 음전자 양전자를 분리시키면 핵폭발이 되지요? 이기심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 속에서 뽑아버리면 사회에서 뽑아버리면 사회는 붕괴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봐요. 그런 것인데, 그 마음 이기심 또 욕심이라는 말과는 조금 달라요. 그러나 그래서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가 하니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나를 자꾸 죽이는 것이 사랑 아닙니까? 나를 자꾸 죽이는 거, 그것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거와 같이 우리가 사랑이라는 걸 언제부터 아는가 하니 주기시작 하는 데서부터 알아져요. 그전에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거짓말쟁이야. 참으로 거짓말이야. 남을 위해서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이 사랑해요. 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 그런데 어머니들이 잘 알아요. 왜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사랑해요? 열 달 동안 그 무거운 걸차고 다니고 자기 먹은 양분을 죄다 빨리고 또 날 때도 그 고생을 하고 추우나 더우나 그러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새 인공수태를 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안 생겨서 수태를 했다는 거예요. 시험을 해봤어요. 희생 있는 곳에서 사랑을 알게 되요. 느끼게 되요. 그러니까 인제 이걸 어느 정도까지 하느냐가 그 사랑이 절대가 되요. 내가 누구를 위해서 요만큼 희생하면 사랑을 고만큼 밖에 몰라요.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만큼 희생을 하면 사랑을 그만큼 아는 사람 이예요. 만일 내가 누구를 위해서 내 생명과 재산 내 모든 정력의 전체를 바칠 수 있다면 그만큼 사랑을 깨달아요. 그때 가서 알아져요. 누가 설명하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져요. 그것이 예수님이야.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가운데 있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 사도요한은 가장 사랑의 사도로서 그렇게 지적을 했는데 우리가 그를 보았다. 예수님의 덕인데 로고스를 말하면서 그랬지만 그 예수님이지요? 그를 보았다. 참으로 만져보았다. 이해가 되요. 그 자세히 일본말 번역이 제일 잘된 것 같습디다. 잘 몰라도 ‘스라스’라 라는 말을 썼는데 자세히, 자세히 이렇게 예수님을 봤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결론지은 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자꾸 말해. 그러니까 볼수록 사랑이더라. 그 말이에요. 예수님을 엎어놓고 보고 제쳐놓고 보고 말을 들어보고 만져보고  뒤집어보고 그래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다. 사도요한이 요한1서 특별히 요한1서 4장에 가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런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그랬는데 그건 그 양반이 처음에 1장 첫 절을 시작한걸 보면 예수님을 통해서 깨달아 진거예요. 사도요한이,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인제 그걸 알아졌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를 전체를 볼 적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요? 그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았다. 또 그것이 아주 기독교의 큰 교훈에 추대되는 것인데,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우리들을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서 살게 해주신 거라고, 고린도후서 2장 15절. 거기에 있다고, 그런 말씀이 있어요. 그것이라고, 그때에 가서 정말 인제 알아지는 거지요. 거기는 사사로운 생각이라는 게 없어요. 이것은 우리가 참 생각을 해보면 기독교 2천년 역사가운데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내가 너희들의 믿음의 제사를 지낼 적에 내 피를 거기다 쏟아 붓겠다는 말을 쓰면서 관제라는 말을 썼어요. 그래서 그래도 좋다. 피 한 방울 안남기고. 너희들을 위해서, 항상 바울사도가 편지하면서는 꼭 그런 말씀을 꼭 잘 쓰는데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한다. 그랬지만 생각하는지 하나님도 즐겨하신다. 그렇게 항상 말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야.  거기에 무슨 사심이 있겠어요? 사랑의 본바탕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절대로 사사로운 생각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이 성을 낸다는 것은 상대자에게 상심을 주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마음에 다투는 거지요. 사실은 저도 성을 잘 내지만요. 성을 내는 건 상대자의 마음만 상처를 줄뿐 아니라 낸 마음에도 상처를 받는 것이 성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또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다면 성을 낼 수 없다. 그 말인데요. 그런데 요것도 자꾸 주석을 달아야겠어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가지고 막 때리시면서 성을 냈다고,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그것은 의분이지요? 그런데 의분 이라는 것과 혈기라든지 성내는 거 이건 구분 되어요. 구분 되여야 해요. 또 이렇게 큰소리 하는 거 그것도 말이 되지요? 예수님이 큰소리 가끔 치셨지요?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그런 말씀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큰소리만 낸다고 해서는 안 되어요. 이렇게 해서도 안 되는 거지요? 내용 문제가 첫째는 있고 인제 그 자기 스스로도 알아요. 자기가 큰소리를 하면서도 이게 내 혈기에서 나온 거냐? 심지어는 사랑에서 나온 거냐? 예수님이야 아무리 큰소리를 냈어도 사랑에서 나온 거지요. 그러니까 요런 문제는 실제로 우리 생활에다 적용을 할 적에는 진지하게 성찰을 하는 거지요? 자기 양심에다가 성찰을 하는 거예요. 어찌되었든지 사랑은 성내는 법은 없습니다. 
 또 사랑은 더군다나 앙심을 품겠습니까? 누가 내게 잘못한 거, 내가 누구에게 섭섭하게 생각한 거, 그런 거를 오래오래 두지 않는다. 그거지요. 그럴 수도 없지요? 사랑이라는 게 있는 동안에는 앙심이라는 게 생기지도 않지만 어쩌다가 어느 틈바구니를 비비고 앙심이 들어왔다가도 내 속에 사랑이라는 것이 다시 작용을 할 적에는 앙심이라는 건 다 풀어져 버리지요. 아이 내가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어째서 앙심을 누구에게 섭섭함을 가질 수가 있느냐? 하고 풀어져버릴 것입니다. 

 


 또 사랑은 악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는 함께 봐도 좋아요.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 또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의를 보고 기뻐합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신 것처럼 예수님이 그러신 것처럼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게 사랑이야.  그 여기서부터는 사랑의 적극적인 면이 나와요. 그 아래, 아래 대여섯 가지 조목은 사랑에 적극적인 조목이 나와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의롭게 살고 그럴 수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요? 이야기가 어렵지만 조금 예를 듭시다. 옛날 생각하면 사랑이 아닌 것만 이렇게 이기주의도 없고 모두 그렇게 성내지도 아니하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 할 때는 사랑이라는 건 아주 소극적인 것같이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렇게 나올 때는 사랑이라는 건 참 불같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사랑이라는 건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에 가도 그런 것이지요. 그렇게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하나님이 그러셨듯이 이 세상에 지금 보기 싫은 것도 많고 악한 사람도 많고 가증스러운 것이 너무 많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참고 기다려주는 것과 같이 참 큰 사랑을 마음에 갖은 사람은 모든 것을 용납하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참 용서해주고 그럴 수가 있다. 그런 것도 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랑이라는 건 참 어렵지요? 이건 아까 친절이라든지 모두 그런 거 이해를 못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렇게 말하지요. 이 시간에 우리가 아래 위를 꼭 이야기해야 하겠기 때문에 거기는 그 정도로 지나가기로 해봅시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거 믿는다는 거 우리가 자꾸 의심이 생기지 않아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기가 있지 않아요? 그런 때는 우리가 양심에 괴로움을 느끼지요. 의심이라는 게 죄인데 어째서 이렇게 의심을 하게 되나? 그러나 그때에 그것보다 한발 더 나가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래 여기서 그걸 깨닫도록 지적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은 무조건 믿어준다는 거지요. 이거 어려워 참 어렵습니다. 믿는 대목은 실천이 어렵지요. 사랑은 무조건 믿어준다. 또 사랑에는 그러니까 자연히 무조건 바라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랬어요.

 

 

 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정리를 해봅시다. 그러니까는 이런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사라지고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게 얼마나 큰데 그것도 신자의 특권인데 그것도 하늘나라에 가서 전도할 필요 있겠소? 그것도 어느 때 가면 없어져. 또 이상한 언어를 줘 방언이라고 하는데 방언을 하는 것도 또 지식도 우리가 여기서 지식이라는 건 꼭 나쁜 지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어요. 선한 지식도 그런 것도 다 그것도 다 없어질 때가 있다는 거예요. 다 없어질 때가 있어요. 그 다음으로 가봅시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많이 공부를 해도 어디 다 알아집니까?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알아들을듯하면서도 모르고 또 이렇게 여러분이 하루에 8시간을 들었다하고 닷새 동안을 들어도 마흔 시간 밖에 안 되어요. 아 그까짓 거 마흔 시간동안 들은 거 몽땅 머리에 집어넣는다 한들 우리 머리는 집어넣을 수 있게 했어요. 하나님이, 그런데 들어가지도 않지. 가령 다 흘려버리고 몇 마디만 남겨도 괜찮지. 이제 가령 그런 것인데 우리가 이런 것을 별 짓거리 다 해봐도 다 불완전하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지식에도 지식도 불완전하다. 그러는 건 여러 가지 뜻이 있어요. 우리에게 그런 지능이 없다. 그 말도 되고 이해력이 없다. 그 말도 되고. 또 우리가 영적으로 큰 은혜를 받기 전에는 진리의 깊은 뜻을 말 할 수도 없고 우리가 암만 진리를 말한다 해도 어떻게 하나님의 속을 우리가 다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걸 일 년 열두 달 앉아서 파고 연구를 하고 말해도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걸 다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도 불완전하다. 그 뜻이에요. 그런 의미로도 불완전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다 외운다 해도  껍데기라고 그랬지. 뭐 고 속의 것이야 한마디만 알아도 그 사람은 성자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한마디 지적해야 될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요. 피가 흐르는 생명체의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1장 1절만 잘 풀어놓으면 계시록 끝 절까지가 풀리는 거예요. 저도 다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아까 그 바클레이가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전부가 다 있다는 그 말이 그런 뜻인지 나는 모르겠어요. 어찌되었든지 성경은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요. 참 깊은 뜻을 내가 파헤치고 들어가면 아무데나 한절만 가지고 자꾸 생각을 하면 이리 뚫어지고 저리 뚫어지고 이리 뚫어지고 그래서 나중에는 창세기 꼭대기 까지 나오고 묵시록 끝 절까지 나오고 그렇게 되어있어요. 성경이 모순되느니 뭐 참 이상하다. 어디는 부모나 형제를 처자를 잘 아끼지 않는 건 나쁘다고 하시고 또 어떤 때는 다 내어버리라고 그러시고 성경에 모순이 있지 않나? 그러는 건 아직 성신을 받지 않아서 그래 무식해서 그래. 성경은 절대로 앞뒤가 딱 들어맞아요. 그런 것인데 진리의 세계라는 것은 그런데 여기 보니까 어느 때가서 그렇게 되느냐가 문제에요. 어느 때 그게 모든 게 불완전 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만 하게 되면 그게 다 해결된다는 말이에요. 이 말이 큰 말인데, 너희들이 암만 신구약 성경을 주석 책을 놓고 뭐 선생을 갖다놓고 신학교를 백 번가서 박사가 열 번 되고 그래도 다 모를 거라. 그 말이야. 다 몰라 모르는데 아무리 무식쟁이고 신학교 대문간에도 안가 봤어요. 사랑만 하면 다 안다는 거예요. 이거 그렇게 되어있어요. 단번에 신학박사보다 더  알아져버린다. 여기 보니까 그렇게 되어있어요. 보시오. 그 다음에 그 말이 또 나와.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 불완전 합니다. 말씀을 받았느니 전한다고 해도 신통하지 않고 그런데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뭐야 완전한 것을 무얼 말하려고 이러는 거예요?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또 그 다음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의 말을 하고 어린아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아이 판단을 했습니다. 그 어린아이 때라는 건 또 뭐에요? 기저귀에 똥 싸는 거, 그러지 않으면 대막대기 타고 다니면서 이랴, 이랴 그러는 거 말이지요? 사실 인생들 하는 짓거리가 전부 그런 것들 지금 하는 거예요. 그 뭐 어쩌고저쩌고 척하고 나는 늙었다고 나는 목사라고 장로라고 모두 하는 짓거리들이 그 다음에 그 대답이 나와요. 보시오. 모두 어린아이가 하는 짓거리 같다. 그 말이지요. 어린아이 같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에 하던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른은 무엇이야? 아까도 완전한 것 불완전한 것,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를 버렸다. 그럼 어른이 되었다는 건 무엇을 가르치는 거예요? 사랑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 말이에요. 사랑 모르는 사람은 나이가 80이 됐어도 갓 난 어린애기다. 그 말이야.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갓난 애기야. 기저귀나 차고 다니고 참 이거 볼 때 부끄럽지요? 부끄러워요.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또 하나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춰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밤낮 들어도 알듯하고 모를듯하고 알쏭달쏭 하고 안개 속으로 무엇을 더듬는 것 같아. 성경을 봐도 그렇고 더군다나 잠이나오고 왜 그럴까? 거울로 보는 거야.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여러분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면 그때야 똑똑하지요? 사마귀 있는 것도 보이고 아 눈살이 왜 이렇게 생겼나? 또 코는 꽤 이쁘구나. 그렇게 잘 알듯 할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거울을 비켜놓으면 이상하거든. 잊어버리거든, 자기 얼굴인데 차고 다니는 얼굴인데 잊어버린다고. 지금은 모두 우리 아는 것들이 다 희미해. 다 그런 것 많아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할 적에는 아마 많이 생각하면서 하셨을 거야. 내가 너희들에게 암만 말해도 너희들이 못 알아들을 것이다. 그런 뜻도 있지요? 그런 뜻도 있고. 또 요새로 말할 것 같으면 제일 어려운 문제들이 많지요? 지난번에 그 어떤 옛날 친구들을 만났더니 그런 말을 합디다. 어떤 친구가 자기 방을 막 밀고 들어오더니 제가 만났다는 친구가 여기 조선대학교 철학교수예요. 그러니까 광주에서는 아주 지식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런데 그이 방을 딱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인사도 안하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 당신 동정녀 탄생 믿소? 그러더라는 거예요. 동정녀 탄생 믿소? 철학박사인데 동정녀 탄생 믿느냐? 그 말이야. 아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반발이 생겼다는 거야. 조금 반발이 생겨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건 남자 모르는 처녀가 아이 낳는 것 말이지? 그래.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난 그런 거 안 믿어.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 부활 믿소? 그러더래요. 부활 믿소? 부활이라는 것은 사람이 죽어서 무덤 속에 묻혀서 들어갔다가 다시 일어나는 거 말이지? 그러니까, 그렇소. 나는 그런 거는 안 믿어. 그랬더니 족히 이야기 할 사람이 못되는구만. 하고 문을 탁 닫고 나가더라고.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요? 현대 교회를 단편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 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어째요? 그럼 동정녀 탄생을 믿소? 그러면 다 성녀들이 되었게? 그대로 믿으면 그러지 않아요? 정말 동정녀 탄생을 믿으면 여기 있는 이들은 다 깨끗한 성녀들이 되었어야해. 정말 믿는다면? 그러지 않다면? 희미하게 아는 거야. 정말 부활을 믿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 천사와 같이 날라 다닐 거예요. 정말 영적으로 자유를 얻어서 막 기뻐 뛰고 날라 다니면서 아 그깟 재산 나부랭이 그까짓 건 걸레조각 같은 거 내버리고 가져버려라 그러지요. 뭐라고 땅문서 집문서 들고 다니고 그 부지깽이 살림살이 챙기고 그런다고 옷이 좋으니 궂으니 그러고 부활한 사람이 정말 부활을 체험했다면 비겁해요. 썩어빠질 옛날 거를 아직도 쓰고 있으니까 그런 걸 가지고 다니지. 거지 넝마조각 차고 다니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그 말이에요. 뭐든지 너희들이 지금 알았다는 게 거울로 보는 거 같이 희미하다. 그 말이에요. 희미한 것 밖에 몰랐다. 그 말이에요. 아직도 알걸 몰랐다. 그 말이에요. 희미하다. 그 말이에요.  (끊김)

 


그러니까 다 그 심리가 뭐 선생이 없어도 주석 책이 없어도 신구약 성경이 다 알아질 겁니다. 아무데를 펴놔도 그 뜻이 다 알아질 겁니다. 그 말이에요. 또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얼굴을 맞대어 볼 것이다. 계시록에 가 보면 마지막 대목에 가서 다 쓸데없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더불어 같은데서 살게 되지 않습니까? 그 때를 상상했는지도 몰라.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얼굴을 맞대어 보면 어떻게 알겠소? 그런데 그 뭐예요? 내 영과 예수님의 영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에요.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이 붙어서 녹아져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서 하나가 되는 상태를 가리킨 거예요. 그렇게 되면 똑똑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게 되고 또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하는지 몰라도 지금 신학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삼위일체론입니다. 하나님도 한분 예수님도 한분 성신님도 한분 세분은 위가 다르시다. 그 삼위 론에 그렇게 나오지요? 위가 다르시다. 그런데 한분이시다. 세분이면서 한분이시다. 그 대체 무엇인가? 셋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라고 삼위일체라. 제일 어려운 문제가 그 문제라 골치들을 앓아요. 이렇게 그 십자가의 요한은 신학자지만 아예 그런 건 손도 대지 말라. 너희들도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말 하다가는 시험에 든다.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그 때 가서는 알아진다. 그 말이에요. 그때 딱 하늘나라에 가보면 아 그랬어구나. 아 어째서 세분인데 한분이라고 그랬는가? 했는데 와보니까 이제 알겠습니다. 그래진다. 그 말이에요. 다 알아진다. 그 말이에요. 그때 가서는 그러면 미래만 두고 한 이야기 입니까? 아니에요. 참 사랑을 알아야 참 사랑을 알면 넉넉히 알아진다. 그 말이에요. 참 사랑을 너희들의 취득하면 알아진다. 또 거기를 보니까 그 때 가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것이 완전해 진다고 그랬지요? 내가 아까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다. 그러던 것이 이제 그 불완전한 것이 완전해 지는데 여기에는 암만 바빠도 성경 몇 군데 봐야겠어요. 에베소 3장에 보면 이건 아마 개역성경이 그전 성경 말이지요. 개역성경이 더 잘되어 있어요. 에베소 3장에 사도바울이 기도를 했지요? 14절서부터 기도를 했는데, 끝에만 봅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3장 17절 근처에서부터 봅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너희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게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감옥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고 그랬어요. 그 기도가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너희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이 우리말이 사랑이 씨가 떨어지고 뿌리가 내리고 자꾸 이렇게 커지면 아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은가?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긴가? 그 장단을 알게 된다. 그 말이에요. 그렇게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가 충만하게 됨을 빈다. 그랬는데 여기는 그 말이 끄트머리는 이쪽편이 조금 다른 거 같아요. 공동번역이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이제 그 말을 했어요. 이제 그게 완전해 진 사람이야. 그렇게 넓고 크고 길고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완전한 인격자요. 완전한 인간이야. 그러지 않은 사람은 다 갓난쟁이고 불완전한 사람이야. 병신들이라 그 말이에요. 불완전한 사람이면 병신이지, 이게 완전이야? 그런데 보시오. 그러면 인제 그렇게 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시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우리의 인격이 아주 충실해 졌어. 그래서 예수님의 그렇게 높은 사랑을 실천하셨듯이 우리도 높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깊은 사랑을 넓이 길게 그렇게 증거 하셨듯이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그 말이에요. 거기까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합시다. 다  한사람 빠지지 말고 예수님과 같은 그런 사랑의 사도들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다음에 보시오.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끝나. 하나님이 인제 하실 일 다 하셨어. 아 이 굉장하지요? 하나님이 그걸 하려고 이렇게 우주를 만들어 놓으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사랑으로 완성 되어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하신 거야. 하늘나라가 완성되었다. 그때가지는 밤낮 미완성이야 요. 밤낮 불완전하고 밤낮 미완성이야. 이거는 굉장해.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더 큰 것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래서 그렇게 말씀한 거예요. 또 그런 말은 여기저기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4장에 가서 에베소 4장 10절부터 봐야하는데 그리고 내가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여기 지금 완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때 가서는 완전해진다. 그랬으니까 무엇으로 완전하게 되느냐?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로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온갖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드님에 대한 신앙과 지식으로 하나가되어 성숙한 인간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거에요. 이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자꾸 수양회도 하는 거예요. 키우느라고, 영혼을 키우느라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뛰어가서 봅시다. 15절로 도리어 우리는  사랑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사랑가운데서 살아야 우리 영혼이 살아나지요. 사랑이 없으면 암만 지식은 자라날지 몰라도 영혼은 안자라나. 그건 알아야 돼. 그러니까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각각 뜻을 다함으로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서 자라난다. 영적 영양분, 자꾸 말씀 듣는 게 영양분이에요. 또 사실적으로 성신 받는 거 은혜 안에서 사는 거, 그게 전부 영양분을 받는 거예요. 영양분을 받아서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교회라는 건 저 무너지는 예배당은 아니에요. 택한 백성들, 원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 라는 말은 뽑아낸 무리들 이라는 말이에요. 예배당을 말하는 게 아니고 뽑아낸 무리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집단 그게 교회에요. 그러면 그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완성해 나가는 거예요. 교리나 진리나 그런 것으로 제도나 뭐 이런 것으로 다른 것으로 완성시켜 나가는 게 아니라 사랑, 하나님의 영원하신 교회는 사랑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그 다시 고린도전서 13장 끄트머리로 가서 마무리를 집시다.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끝까지 남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믿음도 마지막까지 우리 영과 육이 갈라지는 그 시간까지 그 시간까지 믿음이 필요해. 또 하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믿음이 필요해 또 소망도 그래 소망도 마지막까지 필요해. 또 사랑도 필요해. 그런데 이제 하늘나라가 완성되면, 제가 여기를 풀이를 잘못 했으면 여러분이 가르쳐 주십시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비약이 되니까 만일 우리가 이 역사 인류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고 또 개인적으로 우리가 완성이 돼서 성인의 자리에 들어갔다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 이건 다 익었다. 자 됐다. 이건 전부 하늘나라 곡간에다 갔다 놔도 아깝지 않다. 그렇게 무르익었다 합시다. 그러면 그때 가서는 어떻게 되느냐? 믿음도 소용이 없고 소망도 소용없이 된다. 그 말이에요. 그렇지 않소? 그때 가서는 믿음도 소용없어진다. 그 무엇이 하나 남느냐하면 사랑만이 남아. 그때는 사랑만은 그때까지도 남아. 그러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는 거지요.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거지요. 왜 그런가하니 하늘나라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서 사랑이 없어지면 하늘나라가 뭣이 되요? 지옥이 되게? 그러니까 그래서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이라고 그래. 그것들을 본 사람들이에요. 사실은 알고 보니까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엘리야 예레미야라든지 다윗이라든지 말라기까지 또 신약에 있는 모든 사도들까지 그것들을 바라본 사람들이 더 라니까요. 사랑의 왕국,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 그것을 바라보는 삶이야. 그것을 바라보고 그걸 모두 증거 하려고 애쓴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이 사랑이 성취되는 것, 여기 말하는 이 사랑 말이지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조목조목 사심이 없고 그런 이런 이 사랑, 이 사랑이 성취되는 것이 이 땅위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귀한 것 아니냐? 또 가장 급한 것이 아니냐?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니냐? 또 그걸 비켜놓고 하는 건 전부 무가치하다. 그걸 이야기 했어요. 사랑의 찬가도 그래요. 그건 학자들 가운데도 그런 말 한 게 많아요. 가령 페스타로치라는 대 교육가는, 그 사람은 교육가에요. 그런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과서, 가령 요새로 말하면 영어책이라든지 물리나 심리학책이 되었든 무슨 책이 되었든 그 교과서가 어떠한 교과서든지 거기 사랑이 침투되어있지 않은 교과서는 인생과 상관이 없다. 그랬어요. 페스타로는 사랑의 교육가 이지요. 그래서 그러면 프레드릭이라든지 박애도라든지 그런 교육가들을 보면 대개 그렇게 말해요. 교육은 곧 사랑이다. 그런 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어찌되었든지 원은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렇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교육이 달라요. 그래서 가령 그 페스탈로치라는 그 교육가 밑에서는 고아들이 다 사랑으로 감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고 고아원들도 많이 하고. 그래서 그러니까 가치가 있어. 몰라. 가령 지금도 있는지 몰라도, 그전에 독일에 가서 보면 박애도 학사라는 게 있는데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육까지 다 한울타리에서 교육을 시킨다고 합디다. 그래 양쪽으로 봐서는 성공이야. 박애도라는 건 사랑이야. 그런데 하는 줄 몰라도 한 예를 드는 거예요. 

 

 

사실 페스탈로치 라는 사람은 양적으로는 아주 빈약한 상태, 뭐 몇 번 학교 하다가 자빠지고 그러고 나서 또 하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박애도 학사보다도 페스탈로치의 고아원 학교가 더 값있다. 그 말이에요. 성경을 갖다놓고 볼 적에, 또 더 이걸 말하면 현대교회가 오백만년을 있어도 사랑을 모른다면 그건 다 쭉정이고 한 사람이라도 예배당 밖이 되었던지 또 수도원 밖이 되었든지 어디서든지 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데가 있으면 하나님은 거기에 관심이 있으시다. 그런 거예요. 그럴 거 아니에요? 그게 하나님의 사업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이걸 우리가 참 이렇게 조금 어디든지 적용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이런 현대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사랑이 없다면 꽹과리 짓 이야. 쓸데없는 일이야. 시간낭비, 사람 죽이는 거고 그렇게 된다. 교회당도 예배당도 그래요.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건 다 심판받게 된다. 그런 말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한분 한분이 이번에 가신다고 합시다. 그 돌아가는 길이 사랑의 발자취가 되어야지. 여러분이 혹시 가정이 있는 분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광주 왔다가는 거 뭐 시간만 아깝다. 여기 밥만 축내고 가는 거지. 그렇게 되요. 모든 게 다 쓸데없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다 헛짓거리다. 전도를 한다고? 너희들이 까불고 돌아다녀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쓸데없어. 이 공 어른 같은 분은 어디 심방을 가서도 그 집 대문간에 서서 내가 지금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더듬어 보셨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십리 밖 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셨다고 그래요. 그게 양심적인 심방이야. 양심적인 사람이야. 누구네 가서 밥 한 그릇을 얻어먹어도 욕심으로 얻어먹으면 안 돼. 사랑으로 얻어먹어야지. 사랑으로 얻어먹는 게 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무엇에든지 사랑하고 이렇게 관련성이 없는 것은 다 그래.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찬송 부르시지요.  

 


 마지막 두절은 조금 남겨 놓읍시다. 결론으로 시간으로는 끝나지만 5분이나 10분만. 요한1서 3장 7절서부터를 한번 읽어봅시다. 내가 큰 소리를 많이 쳐서 저는 뭐 하는 것처럼 말을 해도 성경을 읽어봐야지요. 11절서부터 보겠어요. 서로 사랑하라. 그것인데 성경말씀에서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어보지요.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계명의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미워해서는 못쓴다는 그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가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가인은 악마의 자식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가 동생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동생이 한 일은 옳은 일이었는데 자기가 한 일은 악한 일이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사랑하는 자는 이미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 만이 생명을 누리는 사람,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지금 사랑이 없으면 송장이야. 죽은 송장, 다 죽은 송장들이다. 그 말이에요. 참 무서운 말씀이에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여기 미워하는 자 없는가? 회개해야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살인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16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형제를 위하여 우리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로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그랬지요? 그 다음으로 뒤에 가서 4장 7절서부터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간구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낳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고 그게 하나님의 자녀고 또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아주 간단하지만 이 말의 사도요한의 전 사상이 집결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이 힘이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이건 어려운 설명이 따르지요. 넘어갑시다.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십니다. 제물로 사용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그대들은 명심하십시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까지,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제물을 삼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뒤에 가서, 16절로 갑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었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 사랑을 하면 그리스도처럼 살게 된다. 작은 그리스도가 된다. 그 말이야. 아 이거 얼마나 참 얼마나 참 굉장한 이야기 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뭐 심판 그까짓 거 지구가 불이 나거나 꺼지거나 상관없다. 그 말이에요. 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지키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현대인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고 공포 안에 살고 있습니까? 심지어 대 정치가 대과학자가 노이로제가 걸리고 정신병에 걸려요? 왜 이래요?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까 지금 이 핵전쟁 때문에 인구폭발 때문에 교회문제 때문에 모두 불안에 들 떨고 있거든요. 무서워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 그래.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머니 갓난아기가 젖가슴에 안겨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푹 안겨있기만 하면 되는데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텐데, 왜 믿고 맡기지 못해? 왜? 그래서 두려움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음에 불안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