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에 따라 식물 품종 간의 꽃피는 시기가 다르다. 금년에는 산다화가 다 지도록 겹동백 꽃이 피지 않고 수선화 개화가 예년과 다를 조짐이 있다. 오늘도 시래기 걷기와 말랭이 작업은 이어진다.
예수님의 탄생
1978.12.24. 정인세 원장
누가복음 1장 26절서부터 봅니다. 예수탄생의 예고 엘리사벳이 아기를 갖은 뒤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갈리리의 한 동네 나사렛이라는 곳에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놀라며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천사는 마리아를 안심 시키며 말 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리아 아가씨 아가씨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십시오. 이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게 될 것이며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천사에게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 하였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대답 하였다. 성령이 아가씨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 친히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아가씨의 친척 엘리사벳을 보십시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요새는 성탄절이 되어서 예수님 탄생에 대한 걸 여러 가지로 다시 한 번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어제 저녁에는 세례요한이 이 세상에 먼저 오게 된 경로를 조금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것이 여러 번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예언되었었는데 그것만 오늘은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 오신 것은 우연히 오신 것도 아니고 별안간에 오신 것도 아니고 벌써 수천 년 전 부터 오시기로 되어있었고 또 그 오실 것을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자세하게 말씀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오신 것이라고 또 더 말하면 하나님이 벌써 아주 오래전에 미리 계획하셔서 예수님을 어느 시기에 이 땅위에 보내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던 그대로 오신 것이다. 그것만을 오늘 조금 생각 하려고 그러는데 그건 구약에서 많이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오신 그것을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것은 그렇게 성경에도 말씀했고 또 이스라엘 민족들은 간절히 오래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오실 분 그분을 메시야라고 그랬는데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대개 어려운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다시 한 번 생각을 새롭게 하도록 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대체 예수님이 오실 것을 어떻게 미리들 말 했는가? 또 어떤 모양으로 오시겠다고 했는가? 그걸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건 예수님 오시기 한 700년 전에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미리 앞으로 되어 질 일을 말씀 하셨는데 처녀에게서 아들이 낳게 될 것이다. 그럼 성모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을 것을 분명히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이사야 선지자는 성신의 감동으로 앞에 되어 질 일을 미리 말씀 한 거지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처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 미워하는 두 땅의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왕의 오는 날이니라. 예수님이 오실 것과 그때의 정경을 미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사야서 9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이는 해변 길과 요단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릴리까지 이름을 미리 들어서 거기 예수님이 나타나실 거를 말씀 했어요.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렇게 흑암 중에 대단히 어려운 고통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빛이 비췰 것이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려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음으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재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어깨에 채찍과 그 압재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이건 여기뿐 아니라 여러 군데서 그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이렇게 압재 자에게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억울한 자에게 모든 그 해방을 주실 것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실 것을 항상 이렇게 미리 말씀해 왔어요.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디를 싸우는 군인의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솥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6절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여기 한 아기가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라 묘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오시는 경로에 대해서 이렇게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 이새의 뿌리에서 라고도 그 아래에서는 그랬고 꼭 이렇게 계통까지를 이렇게 미리 말씀 하셨어요. 또 오실 땅도 이렇게 갈릴리 까지도 이렇게 미리 말씀을 해왔고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라.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적에는 언제든지 공평한 정의의 왕 정의의 주님으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불의한 세계가 제일 큰 불의는 하나님을 떠나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거역 하는 게 제일 큰 불의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건 하나님과 올바른 자리에 백성 사람들의 마음이 놓이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언마다, 그래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렇게 예언의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또 이사야서 11장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갖으신 분은 혹시 찾아보시면 더 좋겠어요. 이렇게 구약에서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상고하는 것은 저부터 예수님을 떠나서 살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더 좀 분명히 인식하자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지요. 예수님을 어떤 분이시라는 걸 더 좀 알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1장 1절 이하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이새라는 건 다윗 아닙니까? 다윗 왕이 이새의 자손에서 나오니까 그래서 한 것이지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기묘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런 신이 충만하시다. 그래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에 겸손한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에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을 것이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메시야의 모양을 여기는 또 이렇게 어딘지 보면 공의 진실 이것을 말해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불의가 거꾸러지고 세상을 의로운 세상으로 이렇게 세우실 것을 강조했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거짓이 물러나고 진실이 나타날 것을 그때에 이제 더 적극적입니다. 이제 예수를 잘 믿으면 말이지요. 우리가 참 신자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참 신앙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 세계를 또 미리 말 했어요. 6절 이하에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구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놀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차고 넘치게 될 것이라.
예수의 이름으로 얼마나 기독교가 전 세계에 바다 물결 같이 넘치고 있습니까? 그거 미리 말했어요. 이렇게 그런데 참 예수를 믿으면 사람들 마음이 이렇게 될 걸 미리 예언 하셨거든요. 이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염소와 같이 이렇게 표범이 염소와 같이 송아지와 어린사자가 함께 이렇게 풀을 뜯어먹고 살게 되고 그렇게 되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하고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 아무 해가 없을 것이라. 절대로 서로 해치는 게 없이 되는 게 그게 사실은 예수님의 마음 아닙니까? 우리들 마음이 예수님 마음처럼 되면 세상에 해치는 것은 절대로 없고 내가 죽을지언정 내 피를 흘릴지언정 남의 피를 흘리지 않고 내가 굶을지언정 남의 것을 뺏어먹지 않고 그게 원 예수님의 정신 이었거든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벌써 굉장히 앞 세상에 예수님을 통해서 변할 것을 예언 했어요. 또 이사야서 32장, 거기는 또 이렇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그늘 같으리니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않을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조급한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존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고 세상이 제대로 된다. 그 말이지요. 지금은 모두 억눌리고 어리석은 자가 똑똑한 체 하고 그냥 악한 자가 높은 자리에서 권세를 부리게 되고 이렇지만 그게 다 바로잡아 진다고 예수님을 통해서 결국은 올바른 신앙은 세상을 올바르게 바로잡고 말 것이다. 그것을 예언하고 계시지요.
또 이사야서 50장으로 내려가서 조금 더 보겠습니다. 거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또 말씀하고 계신데 50장 4절 근처에서부터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궁핍한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음으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고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이거 그대로지요. 예수님을 때리는 자에게 가만히 계셔서 등을 맡기고 매를 맞으셨지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대개 성인들은 이렇게 사시지 않았어요. 예수님 뿐 아니라 또 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누가 예수님 얼굴에다 침을 뱉어도 가리지도 않고 다 하게 나둬 또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가 그랬지요. 얼굴에다 침을 뱉어도 씻지도 않고 그대로 그저 다 당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심으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가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이렇게 그 다음에도 쭉 이야기를 했어요. 한군데 얼른 더 보십시다. 한두 군데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보시는 데가 있지요? 이사야서 53장 52장 끝에서 53장으로 여러 군데 말씀을 했지요? 거기 52장 13절 근처에서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음으로 우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 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의 전하는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거 예수님의 모양 아닙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아주 소상하게 설명을 했어요.
그 아래 가 봅시다.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오늘뿐 아니라 예수님 이후에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이걸 증거하고 있습니다. 증거하고 있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창에 찔리고 가시에 찔리고 그런 건 내 죄 때문에 그러고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참으로 예수님이 징계 받으신 것 때문에 인류 안에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또 사랑이 무엇인지 그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 예수님이 그렇게 몹시 고난을 당하셔서 인류가 평화를 회복하게 될 것을 이렇게 미리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많은 철학자들도 많고 선지자들도 많고 그랬지만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과 정말 올바른 관계로 사는 법을 몰랐었어. 다 곁길로 행하였다. 길을 찾지 못하고 인생들이 모두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이 모두 방황들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어떻게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미리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렇지요?
예수님이 그 빌라도의 법정에서 혹은 가야바 혹은 헤롯왕한테 모욕을 당하고 그럴 적에 누구 때문에 그런 것인 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럴 적에 우리 죄 때문에 그렇다는걸 거기 있는 사람이 누가 알았겠느냐? 그때 아무도 그런 줄 몰랐었다. 그 말 이지요. 몰랐었다 그 말이야.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괴사가 없었으나 예수님 에게는 강포라는 게 없었는데 오늘은 세상이 아주 강포 또 믿는다는 저부터 혈기가 있어놔서 자꾸 강포가 나오거든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괴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 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 하리라. 이렇게 쭉 이야기 하고 있어요. 이사야서 61장으로 가서 좀 더 보십시다. 여기도 예수님의 모습이 이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힘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시니라. 이 말씀이 특별히 누가복음이나 신약에 가서 많이 이 말씀이 나타났지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난한 자에게 요새 제가 보는 모든 기독교 서적은 전부 그냥 이게 제목이 되어 있더군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어째서 가난한 자에게만 부자에게는 복음이 없느냐? 그걸 모든 신학자들 설교자들이 굉장히 말들 하고 있어요. 그건 나중에 다음 시간에 우리가 또 생각을 해봅시다. 어째 하필 가난한자의 복음이라고 그러셨는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시니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예수님의 사명을 가장 똑똑히 말하는 것이 여기에요. 이건 우리가 누가복음 4장에 있는 말씀이나 그런 것과 맞추면 참 좋지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주시고 또 싸매준다고 그랬지요. 상한 자를 고치며 또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이건 실제로 감옥에 갇혔거나 가령 외국으로 포로가 되어갔거나 저렇게 이북이나 중공 안에서와 같이 일종의 포로 상태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끊김)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 영혼은 자유를 얻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거든요. 육체적으로는 노예상태에 있는지는 몰라도 마음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도록 그게 신앙의 본질이거든요. 그것을 예수님이 하러 오신 것이지요. 제일 큰일은 그거야. 이제 그게 한발 더 들어가서는 죄에서 해방 받는 것이 진정한 자유 사람들이 이렇게 감옥에 갇혔거나 또 지금은 우리 주위에 노예제도가 없으니까 잘 모르지요. 그러나 억울하게 누구에게 압박을 당하거나 또 사실은 월급 몇 푼 때문에 종살이 하는 공장이나 하는데 가서 봐도 물론 자진해서 간 거지만 일종의 비슷한 모양을 우리가 많이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포로라고 그러더라도 죄 때문에 우리가 포로생활 하는 것 보다는 낫다 그 말이에요. 진정은 제일 무서운 게 죄의 종노릇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것이지만 일생동안 우리들이 가장 괴로운 것은 마귀의 쇠사슬에서 해방 못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고 사실 수도한다는 원 뜻은 모든 걸 끊어버리자는 것이 수도지요. 그건 무엇을 죄를 끊어 버리자 마귀의 사슬을 끊어버리자 마귀의 사슬을 끊어 버리자 그게 수도의 원 목적인데 어디 그게 됩니까? 일생동안 싸워도 어딘지 모르게 언제든지 그 쇠사슬에 해방을 받지 못하는 그런데 그거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것 때문에 오신 것이다. 악마의 쇠사슬에서 죄에서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돈에서 돈에 종노릇 하는 사람은 돈에서 해방 가정에서 가정 때문에 종노릇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해방을 어떤 권세 아래서 종노릇 하는 사람은 권세에서 해방을 시키고 병마에 시달려서 종노릇하는 사람은 그 병에서 해방을 시키고 무엇에든지 사람마다 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든지 하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항상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서 거기 종노릇을 하게 돼. 인간은 무엇이든지 우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마음속에 무엇이든지, 자기 내가 이것 좀 했으면 그것이 하나님 뜻에 맞지 않을 때는 다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생각은 다 우상입니다. 그런 것을 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종노릇 합니다. 국회의원 하나 되어보자 그게 우상이 되어가지고 제가 조금 전에 나오다가 크리스챤 신문에 보니까 우리 한국에서도 가장 크게 사회사업을 하는 이에요. 그이가 제주도에서 아마 입후보를 했나 봅디다. 이번에 국회의원이 되려고, 그런데 그 자기가 움직이고 있는 사업기관의 본부가 미국에 가있어요. 거기서 돈을 많이 주기 때문에 언제든지 몇 천만 원 돈이 움직이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2천2백만 원을 몰래 다른 이름으로 빼서 도장을 모두 가짜로 꾸미고해서 빼가지고 이번에 제주도가서 입후보를 해가지고 선거운동을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들켰어. 그런데 그 분원이 광주에 있는지 잘 몰라요. 저 서울 대전도 지난번에 가보니까 YMCA 안에 간판이 붙어있습디다. 각국에 미국에도 있어요. 일본에도 있어요. 그렇게 큰 기관입니다. 그 회장되는 사람이 국회의원 되려고 그래가지고 그래 이번에 제가 어떻게 하다가 일산 가서도 그 분원이 있어요. 거기 가서 그 원장을 만났더니 걱정을 합디다. 큰일 났다고 아주 옳게 걸렸다고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어요. 구속을 당했으니까, 그 생각을 해보면 우습지요? 그 국회의원 하나 되려고 어쩌면 그 불쌍한 고아들 그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미국서 보낸 돈 2천2백 만 원이나 그렇게 자그마치 그걸 횡령을 해가지고 횡령죄 공문서 위조죄 사전 선거 죄 몇 가지 죄목으로 그 국회의원 하나 되려고 국회의원이 그렇게 되고 싶을까? 조금 우리는 알 수없는 세계이지만 말이에요. 그게 우상이 되었어. 그래 저렇게 이러고저러고 없이 흉보는 것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니고 우리는 또 조그마하게 라도 뭐 하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 때문에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 죄를 짓고 그러는 게 많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에요. 거기서 해방시킨 다는 거예요. 원 신앙은 사실 그건 기독교 단체니까 더 문제가 크지요. 아주 유명한 이에요, 신문 잡지마다 가끔 그이가 나오고 영화도 나오고 그랬는데도 국회의원 하나 되려고 하다가 전부 무너져 버렸어.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이 무너져 버렸지요.
그래서 참 남의일 아니지요. 참 생각할 문제에요.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 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려고 오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데서 해방시키려고 그 마음에 그 참 자유고 해방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또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느냐? 그걸 또 한두 군데만 더 읽어야겠어요. 같은 이사야서 65장 17절 봅니다. 보라 사실은 이 이사야가 이 이사야선지 서를 쓸 때는 참 비참할 때입니다. 아주 나라의 형편으로 보던지 외계의 압박으로 보던지 참 어려운 때에 이런 말을 썼어요. 그러니까 앞을 내다보고 쓴 거지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신앙을 붙들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 슬픔은 초월해 버리니까. 거기는 날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없을 것이라. 이걸 요새 잘못 생각해 가지고 어떤 장소를 정해놓고 거기 들어와 살고 자기들 책에다 올린 사람은 죽지 않고 오래 산다고 이렇게 속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 보면 그런 말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거 아니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 얻을 걸 말씀 한 건데 우리가 죄 때문에 죽음이 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죄 사함을 받으면 그때는 죽음이 없지요. 죽는 게 아니지요. 육신은 묻어버리지만 영혼은 그냥 영생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그 아래로 봅시다. 23절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니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그 아래 조금 더 가봅시다 66장 2절 이하, 나 여호와가 말 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다 지어서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가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만 이랬는가? 이사야 선지자만 오실 그 메시야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그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 했는가? 그렇지 않아요? 사실은 창세기에도 있는 걸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그 창세기 3장 15절에 여러분이 외우는 요절 있지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이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신거지요. 그래서 사탄의 머리를 상해놓을 것을 그걸 말씀해요. 여기서부터 쭉 시작을 해 와서 또 특별히 그 메시야 예수님이 오실 거에 대해서 말씀을 가장 많이 한 분 중에 한분이 또 다윗 왕입니다. 다윗왕도 특별히 시편에서 그런 말씀을 많이 했는데 하나만 읽어봐야겠어요. 시편 72편에서 조금 더 보십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 좌우간 이 예수님은 한마디로 하면 참 정의의 왕이셔. 의야 의, 오늘은 보면 세상이 불의한가? 의가 어디가 있는가? 그렇게 우리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결국은 의가 이긴다. 이게 신앙이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의가 이긴다는걸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국 하신다는 거지요.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요건 조금 뭐하지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년 말이라고 해서 그러지만 이렇게 선물들을 가지고 요새 텔레비전에나 신문이나 잡지나 보면 가난한 자에게 가난한 자에게 불쌍한 사람과 함께 이런 말을 봅니다. 뭐 당신 주위에는 헐벗은 자가 없는지 돌아보시오. 뭐 당신 주위에는 주린 자가 없는가 보시오. 광고를 하지 않아요? 이것도 사실은 성탄절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자선냄비니 뭐 구제운동들을 일으키지요. 어떻게 보면 그것도 한 의에 표현이에요. 왜냐하면 잘 먹는 사람은 한쪽에서 배가 부르고 못 먹는 사람은 한쪽에서 배가 고프고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게 불의한 거지요. 의롭지 않은 거지요. 세상이 그러니까 좀 말하자면 있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줄을 알아야 한다. 그 의라는 건 어떤 의미로 공평이거든. 그렇게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되는 것이지요.
또 이렇게 꼭 크리스마스 때만 그러는 거 아니지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모든 그 갇힌 자 특별히 감옥에 있는 사람 또 억울하게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특별히 혜택을 베푼다든지 또 위문을 한다든지 또 병원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 그런 것들을 이런 크리스마스 때는 많이 위문을 하지 않습니까? 뭐를 해가지고 여기도 가만히 보니까 여기도 꽤들 많이 해가지고 학생들 어른들 모두 줄줄이 온 모양이지요. 어떤지 고마운 일 아니에요? 그 마음이 받으니까 고맙다는 게 아니라 선을 해보려고 그러려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여기도 꼭 가난한자 눌린 자 억울한 자 그런 사람 편이 될 것을 말했어. 예수님이 그러더니 꼭 그렇게 되지 않았어. 저가 가난한자를 신원하며 예수님이 오셔서 33년 동안 계신 동안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 번도 뭐 높은 자리 차지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리고 밤낮 돌아다녀요. 그렇게 창녀틈바구니로 세리틈바구니로 그냥 문둥병자 그저 뭐 소경 앉은뱅이 아주 참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그때 더군다나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눈으로 볼 때는 모두 죄인이야. 너희 선생은 밤낮 죄인들 틈에가 있냐고 그걸 비난하지 않았소? 그뿐이에요?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잠자리도 없이 그럼 뭐 아침 잡숫고 나면 점심 잡술 기약도 없이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었어요. 가난한자 중에서도 가난한자가 되셨지요? 그래가지고 가난한자의 편이 되셨거든요. 철저하게, 철저하게 이게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진정한 의미에서 속으로 흘러내려오는 원 예수님의 그 정의감 정의에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독교가 타락되면 권세편이 되고 부자편이 됩니다. 그러다가 기독교도 매를 맞지요. 특별히 소련이 망할 적에 그랬거든요. 그런 거 많아요. 기독교가 부자편이 되든지 권세 잡은 사람 편이 되어가지고 같이 남을 압박을 하고 우쭐거리면 타락된 현상이라고 역사가는 말을 해요. 반드시 그럴 때는 벌을 받습니다. 망해요. 6.25사변 같은 게 일어나버리든지 그럽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러지 않았어요? 아 권세가 당당한 일본의 제국주의나 뭐 히틀러의 독재주의나 그런 것도 하나님이 한번 꺾으시려면 순식간에 꺾으시거든요. 압박하는 자를 꺾으시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며 평강이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그렇게 되어가지 않아요? 실제로 그리스도의 왕국 세상 나라는 있다가도 없어지고 참 흥한 거 같다가도 얼마 뒤에 보면 자취도 없어지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은 없는 거 같으면서도 자꾸 널리 널리 깊이깊이 퍼지고 있지 않아요? 어떤 대궐 속에도 들어가고 빈민굴 속에도 들어가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깊이 널리 퍼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 강에서부터 땅 끝가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스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그렇지요? 모두 제왕들이 모두 관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바치고 모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를 섬기리로다. 어째 그 당시에 이걸 꿈이나 꾸었겠어요?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 거리를 왔다갔다하시고 그 참 학대를 받고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그렇게 조롱을 받고 그럴 때 오늘 이렇게 될 걸 누가 꿈이나 꾸었겠습니까? 열방이 그들을 그를 섬기리로다. 저는 궁핍한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제 피가 그의 목전에 귀하리로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는 기독교는 절대로 사치하거나 부하거나 권세 있거나 그편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그건 예수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언제든지 가난합니다. 약한 자 눌린 자 그런 사람 편이 되어 왔어요. 살아서도 예수님이 그러셨고 또 그의 가르침이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교훈은 어디를 보든지 그렇게 되어있어. 이것이 수천 년 전부터 예언되어져 온 겁니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그 당시에 어떤 사람은 그는 참 훌륭한 양반으로서 나타나서 의인 중에 의인이라고 그러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벌써 이미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계획 하셨어.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를 참 회복하시려고 인간들을 올바르게 자기 앞에 세우시려고 그렇게 계획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씀이 이렇게 자, 우리가 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해서 그 예언 또 메시야가 오시는데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오시는가? 그것을 우리가 조금 생각해 봤습니다. 이렇게 우리 다시 생각합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여기도 이렇게 모두 울긋불긋하게 꾸며놨는데 그전에는 없었지요. 그런데 괜찮아요. 이게 죄는 아니에요. 조금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언제든지 가만히 보면 아주 불쌍한 자리 비참한 자리 그런 데가 오시는 걸 우리는 알 수가 있어요. 만일 내일이 지금 날짜로 봐서는 내일이 성탄일 이라고 맞지요? 오늘 저녁부터 내일 사이가 고비지요? 오늘저녁 내일저녁에 제일 성탄 축하예배들을 드리고 모두 불들을 써가지고 새벽이면 크리스마스 찬송을 부르고 돌아다니고 그럴 겁니다. 그러나 그 마음가운데 생각해야 할 것은 마음가운데 그 들뜬 가운데 예수님은 계시지 않다. 그거지요. 기분이 들떠있고 또 모두 좋은 옷을 입고 우리 여기서는 꿈들도 못 꿔요. 저런 돈 있는 사람이나 이런 호화판 사는 사람들 가보면 굉장히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먹어가면서 막 떠들고 노래들을 부르고 크리스마스를 지냅니다. 그리고 엄청난 선물이 산더미같이 왔다갔다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 예수님이 그런 데와는 상관이 없다고 그럽니다. 지금 모르겠어. 점방에 가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모두 챙겨 놓고 아주 참 이렇게 크리스마스 츄리 하나, 이건 몇 푼이나 들었는지 몰라도 요 나무하나 꾸미는데 요새는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듭니다. 굉장하게들 거기는 예수님이 안 계실 것 같다. 그 말이야. 그런데는 예수님이 도리어 지금 가마니 떼기를 뒤집어쓰고 거적 데기 속에서 아파서 신음하는 사람과 함께 계실지도 몰라. 감옥에서 사실은 아무 죄도 없이 갇혀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있을 수 있거든. 그런 사람 베개머리에 가서 계실지 몰라. 또 저런 병원에 가있어도 무료 병실이나 또 병원에도 못가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참 신음하고 있어도 누가 물 한 그릇 떠다주지 않고 좀 다리가 아파도 다리하나 주물러 주지 아니하고 그런 사람도 없고 또 미음 한 그릇 쑤어다 줄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 곁에 계실 것이다. 그 말이에요.
요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이나 행동하는걸 보면 주님은 그러러 오신 분이다. 그리고 세상 적으로 봐서도 큰 권세를 쥐고 앉아서 많은 사람을 압박하고 명령을 하고 지배하고 그런 사람 편은 아니지요. 분명히 그런 사람 편은 아니에요. 도리어 그런 큰 세력 때문에 그냥 가슴을 치고 슬퍼하고 애통하고 압박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런 사람 편이지요. 그런 사람 우리가 그거 잊어버려서는 안 되어요. 옷을 잘 입은 사람 편이 아니에요. 옷을 못 입은 사람 편이지요. 언제든지 예수님은 그래요. 그러면 이 말은 나는 어떻고 너는 어떠냐? 오늘 기독교는 어떠냐? 이게 지금 우리가 성탄절을 맞을 때 생각할거야. 예수님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 그걸 생각해 보자는 거야. 예수님이 오신 것은 무엇 때문에 오셨는데 그러면 인제 우리가 첫째 순서로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를 어떻게 갖고 이 성탄절을 맞이해야 되는가 하는 걸 생각하게 되는 거야. 우리 마음이 그러면 오늘 조금 일찍 끝내고 싶어요. 이렇게 성탄절에 우리 마음이 높아졌으면 낮춰야지요. 낮춰야지 또 우리 마음이 허영에 떠있으면 그 마음을 가라앉혀야지요. 기분에 떠 있으면 그리고 우리 마음이 잔인하면 자비심으로 바꿔야지요. 우리 마음에 거짓이 있으면 진실로 바꿔야 하는 것이고 우리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어떤 불의와 짝짓고 있으면 그럴 수 있거든요. 불의와 짝짓고 있으면 우리는 의로운 예수님 편이 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땅위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땅위에 오신 그 예수님의 목적을 왜 오셨는가? 그게 하나님의 계획 이십니다. 그게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사실은 그게 참 예수님이 땅위에 오신 증거 한 것은 그런 것이에요. 의롭게 진실하게 온유하게 겸손하게 무엇보다 자비스럽게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찬송가 109장 찬송 부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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