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매화 보던 날 : 그리스도와 우리의 부활

mamuli0 2022. 2. 28. 12:47

 2월 마지막 날 매화가 만개하여 꿀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담았다. 아롱이는 기운을 잃어가고 농장에 잡초를 캐주는 일을 조금씩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소련군 침입 나흘째이고 큰누님 병원 입원과 불편한 일들이 겹쳐 있다.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펜션 등기부등본 떼었다. 5일 있으면 경칩이온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부활  

1978.12.31.정인세 원장

 310장 찬송
 고린도전서 15장에서 12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우리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어째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으로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 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잠으로부터 부활 하신 것처럼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삶을 통해서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사람을 통해서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의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 시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셔야 합니다. 또한 마지막 원수인 죽음 까지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 발아래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 분에게 굴복 당한다고 할 때에 굴복시키시는 그분은 그 모든 것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 당하게 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여러분을 자랑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이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혹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우는 위험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당한 것이라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 아니겠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나쁜 친구를 사귀면 분명히 나빠집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내가 이 말을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은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 씨앗에 물을 주시고 씨앗 하나하나에 각각 알맞은 몸을 주십니다.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동물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또 다릅니다.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또 땅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존재하는 것들의 영광도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 사이에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2절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몸은 묻히면 썩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묻힐 때에는 치욕을 받고 묻히지만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납니다. 묻힐 때에는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인간인 아담은 생명을 받아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이고 영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첫째 인간은 땅에서 온 흙의 인간이었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그 흙의 인간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그 하늘의 인간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 흙의 인간의 형상을 지녔듯이 그 하늘의 인간의 형상 또한 지녀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에는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삽시간 눈 깜빡할 사이에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몸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음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 질것입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며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 하십시오. 

 


 이 말씀은 그대로 우리가 이해만 하고 받아들이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씀입니다. 이 이상 더 어떻게 자세히 여기다 말을 한마디만 붙여도 군살이 됩니다. 그러니까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부터 고린도전서 15장으로 와서 이걸 생각 하려 드니까 참 창창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도 하는데 또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부활에 대한 걸 희미하게 비치셨거든요. 그래가지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시편을 읽어보면 맨 썩지 않게 썩지 않게 그 미리 말씀 했어요. 예수님이 부활 하실 것을 그럼 모든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내다보고 증거 했거든요. 그걸 다 우리가 인용해 봐야 되는데 그러려면 많은 시간을 우리가 가져야겠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간에는 어제 저녁에 1절서 11절 까지 본  그것을 대강 줄거리로 잡고 그 다음으로 조금만 나가보고 싶어요. 여기 보면 첫째는 부활은 믿음의 기초라고 그랬습니다. 어제 안 들으신 분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 하는데 부활은 믿음의 기초라 우리 신앙의 기초를 부활에다 두지 않으면 그 신앙은 쓸데없다고 그랬지요. 잘못 믿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큼 중요하다. 그것을 여기 써 놓았지요. 그런데 7절 근처에서부터 조금 보십시다. 15장 7절, 거기 보면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 번 나타나셨다고 그런 말 가운데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 동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래서 자기를 많이 낮추면서 이런 나에게도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평생을 바치고 큰 변화를 받아가지고 그냥 이렇게 주님의 일을 역사에 공적을 나타낸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을 사도바울은 수없이 증거 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언제든지 사도바울은 그 자기 설교를 할 적마다 꼭 이 대목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어요. 다메섹 성문 밖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그때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부르셨지요. 그때 ‘사울아, 사울아’ 그러던 그 소리 그게 영 잊혀 지지 않는 거예요.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사도바울을 일생동안을 울게 하고 헌신하게 한 것이야. 그래서 설교할 적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끝머리를 가보시오. 아그립바 앞에서도 베니게 앞에서도 말 할 적마다 꼭 그 대목을 꼭 이야기 하거든. 사도행전 9장 장면이 나타납니다. 3절서부터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나타나 그의 주위에 두루 비쳤다. 그러자 그는 엎드러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소리, 이 소리 하는 음성이 사울의 귀에 들려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사울이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것이 아주 그냥 가슴에 꽉 박혔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또 임금 앞에서도 총독 앞에서도 대중 앞에서도 어디 가정에가서도 어디 가서도 항상 이 말이야. 그래가지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꼭 사도바울은 어느 대목에 가서든지 내가 이렇게 부활을 이야기 하다가 이런 꼴을 당했다. 항상 그런 말을 잘해요. 그리고 여기 보니까 그 아그립바와 베니게, 베니게는 총독이지요? 그때 베니게 총독이 새로 부임을 하니까 아그립바가 인사를 왔었거든요. 그 앞에 사도바울이 끌려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이야기 하던 그 장면을 보면 거기도 이렇게 몇 군데 말을 하고 있거든요. 사도행전 25장 18절 근처를 여러분이 이렇게 성경을 찾아가면서 읽으면 재미있고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여러 시간이 걸려요. 그래 제가 얼른 읽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18절, 원고들이 일어서서 그에 대한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예측한 죄목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없었고 다만 자기네 종교와 죽은 예수라는 사람에 관해서 바울과 의견을 달리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예수가 살아있다고 주장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총독이 임금에게 말 하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 결국 골자는 듣고 보니까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더라고, 그때 베니게 총독의 머리에는 그것만 남았던 모양이야. 그렇게 부활에 대한 걸 이렇게 강조하고 있어요. 또 그 아래가보면 26장 8절입니다. 거기 가보면 이번에는 아그립바 왕 그 인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임금에게 막 자기를 아주 초라한 죄수가 거지같은 죄수가 지금 거기는 굉장합니다. 그 베니게 총독의 가이사랴에 있는 어마어마한 거기 아그립바가 와 있고 그 부인도 와있고 그 대관들이 늘어앉고 그런데서 막 따지는 거야. 막 따지는 거야. 그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지 않느냐고 어째서 믿을 수 없다고 하냐고 이 말이에요.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가장 강조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또 그 예루살렘에서 잡혀가면서 층층대에 서서 마지막 군중들에게 말 할 적에도 그런 소리 하지 않아요. 내가 부활을 전하다 그랬다. 또 그 바리새교인하고 사두개교인 사이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도 그 이야기를 꺼냈어. 내가 전하고 있는 건 예수의 부활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신앙 우리 영적 생활 가운데 얼마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이게 문제에요. 이 시간에는 그걸 반성을 해봐야 해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어느 정도 믿고 우리 생활화 하고 있는가? 우리 생활에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는가? 그게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언제든지 그걸 상기하면서 그 위에 말하고 있어요. 마지막에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리고 11절에 가서 보면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것을 믿는 것이라고 내가 전하고 있는 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가만히 보면 동정녀 탄생도 전했을 것이고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그렇게 모두 예수님의 많은 것을 말 했는데 왜 여기 와서는 특별히 내가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것과 그리스도의 사신 것 이라고. 그게 가장 중요해. 우리 신앙에 있어서 이건 골자입니다.  그 다음으로 내려가야겠는데 사실은 거기에 대한 것은 아까 읽은 사도행전 9장에서도 봐야 되지만 사도행전 13장 22절 근처 또 31절 사도행전 23장 6절 11절 사도행전 24장 15절  25장 19절 26잘 8절 여러 군데를 꼭 읽고 지나가야겠는데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찬찬히 사도행전에서만 찾아보시기를 바라요.

 

 


 그리고 12절 이하를 보십시다. 우리의 부활, 우리의 부활 그 문제를 지금 논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어째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아래 쭉 아주 거듭 거듭 그걸 되새기고 있어요. 어째서 죽은 사람이 못 살아난다고 그러냐? 이 말을 줄여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성경도 거짓말이고 하나님도 거짓말 한 게 되고 내가 말하는 게 전부 거짓말이 된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살아나셨다. 그걸 말하고,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우리들의 부활을 위해서도 살아나신 거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이 부활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자기도 부활 못한 양반이 우리더러 부활을 믿어라. 그러면 그거 말이 되요? 누가 그 예수의 말을 믿겠소?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부활의 신앙도 전부 거짓말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믿는 게 전부가 헛것이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왜 그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느냐? 그 말이야. 그런데 왜 부활을 안 믿느냐? 그럼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우리가 언제 부활을 안 믿는다고 그러던가? 그럼 내가 한번 묻지요. 제게도 여러분만 지금 실책하는 게 아니에요. 제 자신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욕을 할 수 있는가? 욕할 사람 있는가? 어째요? 여러분의 마음에 그늘은 없어요? 여러분의 눈에 주름살은 없고 여러분의 신앙에 의심은 없습니까? 갈팡질팡 하는 거 없습니까? 부활을 믿는다면 그런 게 없어야지, 그렇지 않소? 부활한 몸둥어리가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소? 부활하는 몸둥어리가 뭐라고 이런 옷 나부랭이를 끌고 다니고 살림살이를 끌고 다니고 땅 조각 집 조각을 붙들고 있겠소? 부활하는 영혼이 그렇지 않소? 아직도 부활이 안 들어 간 거야. 아직도 부활을 믿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요런 거 가지고 네 것 내 것 무엇 갖고 싶어 하고 자꾸 주면 좋아하고 그게 무슨 부활을 믿는 거냐?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참 부활에 들어간다는 건 위대한 새 능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새 힘을 얻는 거예요. 천사 같은 소리를 하고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 생활의 초점을 가만히 봐서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를 우리는 생각을 해야 되요.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괜히 쓸데없이 이렇게 사도바울이 잔소리 하는 거 아니거든요. 어째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리가 없고 무엇 때문에 예수님 혼자 자기 혼자 하나님의 아들이 뭐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겠느냐? 우리들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니냐? 그런데 그 정도를 이다음에 예수님의 나팔소리 나면 우리들도 펄떡펄떡 일어날 걸 믿소? 그럴 거야? 그건 뻔뻔스러운 소리야. 현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오실 때 부활을 믿을 수가 있어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된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참 성경에만도 14개의 편지를 썼고 십년동안이나 그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가르치는 게 예수님의 부활이 만일 없었다면 다 헛것이란 말이야. 다 헛것이야 우리들도 그래요. 뭐 그렇게 장로님도 애를 쓰고 돌아다니시고 모두 오늘 한국 기독교계 강단마다 서서 목사들이 설교를 할 거고 큰 교회는 막 만여 명씩 모였을 거고 그래 그러나 몇 만 명이 모였더라도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없다면 그 울리는 괭과리다. 그거야. 요새는 사랑이 없으면 괭과리라고 그랬듯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이야. 애쓰고 돌아다녀도 쓸데없다 그 말이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다. 이거 말을 거듭 거듭하는 것 같지만 잘 들어보시오. 한마디도 거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 우리들이 우리들도 지금 보통으로 보면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더러 여러분 여러분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네 믿습니다. 그럴 거예요? 그런데 보십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으니 우리의 우리로 하여금 부활을 믿고 우리도 부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그 말 아닙니까? 살리셨을 리가 없다. 그 말이지요. 무엇 때문에 그랬겠느냐? 그래서, 그래서 살리신 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줄여 말하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부활하셨다. 우리도 틀림없이 부활한다. 그 말 아닙니까? 그 다음 16절로 갑시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 다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해놨어.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하나다. 그 말이야. 하나다. 도저히 그건 분리시킬 수 없다. 그 말이야. 17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또 다시 말하는 것 같지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건 아주 기독교에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보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요? 우리 죄, 또 내 죄, 네 죄 그렇지요? 우리 죄라는 말도 맞고 어찌되었든지 죄 때문에 죽으셨지요? 그러면 잘 생각 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을 안 하셨다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요? 죄가 왕 노릇 하지 않았소? 죄가 이겼거든. 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잡아 죽였으니까 이제 죄는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겠냐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얼마나 큰 문제냐 그 말이야. 지금 그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도 지금까지 죄 아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이야. 지금까지도 우리가 전부 죄에 얽어 매여 있을 것 아니냐? 그 말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그놈의 죄의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버리고 일어나셨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길이 열렸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죄가 무섭지 않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이다. 그렇게 말해요. 그래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지금 말하고 있어요. 다 아는 것 같지만 그 다음에 참 우리 아주 일상생활에 대단히 감명 깊고 위로를 주는 말이 자꾸 나와요. 거듭거듭  17절을 봤지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다 영원히 죽음 가운데서 그 스데반의 장열한 죽음도 별 수 없다. 그 말이 되요. 보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은 채로 지금까지 그냥 땅속에 썩어져 버릴 것 아니오? 그 다음에 목이 잘린 야고보로부터 그저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로부터 사도바울로부터도 태워 죽인 순교자처럼 쟈스틴으로 부터 전부가 영원히 그대로 있었을 것 아니냐 그 말이야. 전부 원통한 일 아니요?  저 우리 한국만 해도 절두산에서 이만 명이 목이 잘려 죽었는데 대원군 때 그게 전부 헛된 죽음이 되지 않았겠냐 그 말이에요.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제 우리 문제에요. 이거 하나는 꼭 외워두면 좋아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자 이건 중대 문제 아니요? 우리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다만 만일 희망을 두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러고도 술 먹고 계집 얻고 처먹고 고등 문화주택 갖고 살면 그거야 불쌍하지 않지 자가용타고 뭐 영화를 누리고 연애도하고 마음대로 한다면 그거야 뭐 불쌍할 거 없지 세상 영화를 누렸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지금 우리라는 건 뭐예요? 사도바울 자신이나 그 일행을 놓고 하는 소리 아니야. 거기에 대한 성경은 고린도전서 1장이라든지 여러 군데 나오지 않아요? 만물의 찌꺼기같이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와 같이 바보소리 듣고 병신 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한 우리같이 그 말이야.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시집도 진정으로 못가고 장가도 못가고 옷도 한번 제대로 못 입어보고 밤낮 쑥 죽이나 먹고 요새는 쑥 죽이 없어졌지. 또 이물 겨나 먹고 그런 우리말이에요. 그런 우리 예수를 위해서 그랬다면 그런 우리는 만일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불쌍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그렇지요? 부활이 없다면 그러고 죽어버리고 말아버린다면 불쌍하다 말이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 아래 그런 말 했지요? 나는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도 세상 사람같이 먹고 마시자 그랬어. 여러분들도 시집가서 자식을 빠뜨려도 그래도 괜찮다. 그 말이야. 이 세상뿐이라면 잘 들어야할 문제에요. 큰 문제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들이라는 게 뭐냐 말이야. 우리들 잘 믿는 사람들 정말 잘 믿는 사람 좀 어폐 있는 말일 런지 몰라도 수도자들 같이 진정한 수도자 말이지요. 꼭 수도자만 아니지요. 수도자라고 이름 안 붙여도 가령 손 양원 목사님이나 주 기철 목사님 같이 순교자들 제가 그 꼭 우리가 천주교에만 그런 게 있는 게 아니고 또 수도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그래요. 그 해방 직후에 손 양원 목사님이 감옥에서 풀려나왔지요. 그때 광주 도청 뒤에 여관에 가계셔서 우리 청년들이 몇이 찾아가 뵈었어요. 고생하시고 나왔으니까 뵈러 왔다고 그런데 그 손 양원 목사가 앉았는데 옛날에 이 선생님 마른건 문제도 되지 않아. 꼭 마른 아주 말라빠진 명태조각 같이 되어서 앉아 있더라니까. 참 이거 보기만 해도 눈물이나. 아 그런 이들 불쌍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야. 무엇 때문에 그냥 대구 형무소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는데 미워서 밥을 그냥 죽지 않을 정도로 먹였거든. 그래 오죽 배가 고팠겠소? 사람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이들 그런 이들은 불쌍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뿐이라면 희망이 그 말이에요. 그럼 이걸 뒤집어서도 생각을 해봐야 되요. 우리가 요 세상에서 뚱땅거리고 잘살면 그런 사람은 부활 날에 부끄러워지지요. 세상재미 다 봤으니까 부자와 같이 그런 사람들은 문제도 되지 않아요. 여기 그럼 또 이런 염체 없는 사람들도 생기지. 이 세상에서도 재미보고 잘살고 또 부활한 다음에도 한번 재미보고 잘살고 그런 성경은 없거든. 그런 건 없어.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못 먹고 못 입고 고생 많이 하고 자지 못하고 애도 많이 태우고 그러느냐 그리고 그 부활의 날에 영광을 누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잘살고 그 다음에 가서 이야기가 나오지만 부활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않아요? 부끄러운 부활이 또 있거든, 계시록에도 그 이야기가 나와 그건 나중 이야기 합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 19절 에서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사는 동안에 우리가 큰 부활 뒤의 영광을 생각하고 그냥 참고, 참고 바보가 되고 억울한 소리도 듣고 짓밟히고 그래도 좋다. 그 말이에요. 좋다 그 말이에요. 20절 20절 이하로 내려갑시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4장, 말로만 해서는 안 되니까 고린도전서 4장 9절부터 읽어 볼까요? 이걸 제가 말 했고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데지만 우리가 여기다가 억지로 맞춰서는 안 되지요. 우리 생활을 억지로 맞추면 율법이 되지요. 고생도 율법으로 하는 건 유익이 없어요.  그래도 안 하는 거 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9절에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도들 까지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맨 끝에 세워놓으셔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이 세상 인간들 가운데 제일 끝으로 꼬랑지에다가 절대로 칭찬 듣거나 뭐 아주 이렇게 영광 누리게 하지 않으시려고 맨 끝에 세워 놓으셔서 우리는 세상과 천사들과 뭇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이라는 건 누구에요? 지금 고린도 사람들을 비꼬는 소리인지 뭔지 몰라도 또 실질적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유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자가 되었다. 아주 권세가 많고 유식한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약자가 되는 거야. 다 버리고 혈기를 버리니까 아주 세상에서는 약자가 되는 거야. 그렇게 하는 소리야. 우리는 약자이고 여러분은 강자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이것도 참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참 노동을 복 받은 걸로 생각해야 돼. 그렇다고 노동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마음으로라도 노동을 해야지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내고 비방을 받을 때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에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기를 봐야 해요. 거기를 보고 그 다음으로 내려가야 되요. 또 그 외에도 고린도후서 1장 6절서 11절 까지라든지 그런 대목들이 모두 있지요. 그런 사람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제일 낮은 자리에서 무한한 고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달게 받고 있는 사람들 그 겸손한 양떼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잠으로부터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자 인제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도 꼭 그렇게 사셨지요. 그리고 모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그런 상태로 살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사는데 맨 먼저 누가 그럴 헤치고 승리하고 일어났냐? 예수다. 우리의 지금 여기 제목이 우리의 부활 아닙니까? 우리들의 부활을 받는 순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제 먼저 첫 사람이 되었다. 부활하신 첫 사람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그때 예수님이 부활하실 적에 어떤 일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시고 사실은 그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벌써 죽으실 때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인들이 일어나서 전설에 의하면 예루살렘거리도 다녔다고 그러니까 아마 다윗왕도 다니고 그랬는지 몰라. 그걸 기독교에서 첫째부활 둘째부활 이렇게 말하는데 사람마다 해석이 조금씩 달라요. 그걸 첫째 부활이라. 그러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이 그때 골고다에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그 사람들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전문가들한테 미뤄놓고 예수님이 먼저 부활하셨고 죽음이 한사람을 통해서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사람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그 말이지요? 한 사람이라는 건 여기 한 사람 한사람 이라는 건 아담과 예수를 가리킨 거지요. 그건 로마서 5장을 여러분이 참조하시면 잘 나타나 있어요.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죄안에서 이제 꼼짝 못하고 있었어. 그리고 죽음 아래서 그랬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뭉쳐가지고 십자가에서 짊어지시고 죽으신 뒤에 그때 모든 사람의 역사이래로 미래까지에 있는 죄가 전부 예수님의 등허리에서 십자가와 함께 끝을 고했거든요. 율법과 아울러서 끝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심으로서 그때부터 인제 살길이 열리는 거야. 지금 그 과정을 이야기 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죄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사망아래 놓이게 되었었는데  그와 같이 그와 같이 부활도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걸 말하는 거 아니요? 여기서 부활하는 대열이 있다고 합시다. 모든 부활한 영혼들 부활하는 상태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가서 자세히 나오지요. 영광의 몸으로 강한 몸으로 그런 몸으로 부활한다. 인제 그런 부활한 사람들이 죽 일어나서 행렬을 한다고 하면 맨 앞에 예수님이 서셨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맨 앞에서 첫 사람으로 맨 앞에 가서 서서 계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걸 따라가게 돼. 한사람을 통해서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차례가 있다 그랬어요. 각 사람이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사실은 우리 부활이 언제 어떤 순서로 되어있느냐? 여러 군데 볼 거 없어요. 여기만 봐도 되겠습니다. 여기 한군데만 잘 기억해두면 간단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랬지요? 예수님의 이걸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한걸 보통 초림이라고 그러고 인제 마지막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강림하시리니 그걸 재림이라고 보통 말해요. 그런데 어떤 그 때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묵시록에 보면 더 좀 복잡하지요. 그런데 어찌되었든지 그때에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때 인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럼 예수님이 오시면 끝날 것 같은데 그 다음이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묵시록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마지막에 가서는 예수님이 그냥 그 참 무서운 옛 뱀 사탄용을 갖다가 지옥에다 갖다 넣어놓은 뒤에 천년왕국이 지나간 뒤에 그때 가서 신천지를 건설하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 시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그 부활에 대해서 요상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묵시록을 잠깐 펴봅시다. 이건 무슨 부활일까? 20장 11절서부터 보겠어요. 묵시록 20장 11절 이걸 제가 보는 건 우리가 끼일까봐 보는 거예요. 여기 끼지 않기 위해서 부활은 이때까지 남아 있다가 부활해서는 안 돼. 그래서 이런 것도 생각 하자는 거야. 묵시록 20장 11절 이하에 나는 또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묵시록 20장이면 거반 끝나는 거 아니요? 세상 다 끝나는 때 아니요?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인제 하나님의 보좌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사라지고 인제 땅과 하늘도 다 없어졌어. 다 없어졌어.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그럼 땅바닥이 없는데 그럼 어디가 있는가? 이 땅 지구덩어리는 임시라니까 하나님이 육신 쓰고 우리들이 이 세상에 와서 사는 동안에 예수 믿고 회개하라고 잠깐 만들어주신 여관이야. 이 지구 덩어리가 더군다나 지금 그 뭐예요? 그 집들을 팔고 사고 그 안달들을 하는 거 보면 사실 타락이에요. 인간의 타락, 여러분들 집들 쓰고 있지 마시오. 여기 집 가지고 있는 분들 몇 분이나 되시오? 집들 모두 벗고 나왔지? 잘 나왔어. 잘 나왔어. 나와야 하는 거야. 그거 우스운 거야. 아 여기 보니까 이 땅덩어리도 없어진다는데 땅 덩어리 또 나중에 보면 별도 없어져요. 다 소용 없는 거야. 우리 세상사는 동안에 필요하니까 조금 만들어 놓으신 거야. 그렇지 않아요? 성경대로 하면 나중에 개인으로 합시다. 대담을 하기 시작하면 예배가 대여섯 시간은 가야 돼.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합시다. 마귀도 자기변명으로 나서 자기변명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자들이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일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뭐에요?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이 여기 죽은 자들이 무슨 말이야? 믿는 사람들이냐? 안 믿는 사람들이냐? 이제 그걸 보자 그 말이지요.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는데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있는걸 보았습니다. 많은 책들이 펴졌고 또 다른 책 한권이 펴졌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이제 생명책이 있어. 그런데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 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냈고 바다 속에 빠져죽은 사람은 고기가 다 먹어버렸으니까 없지 않소? 다 썩어져 버렸어.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토해 바다 속에서 내놓았다고 그랬어. 죽은 사람을 그거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실은 어떤 형체든지 나왔어. 토해냈고 죽음과 지옥에 있는 사람까지도 토해냈다. 아주 지옥 속에 있는 사람까지도 한번 나온다고 그랬으니 참 이상한일 아니요? 죽음아래 있는 건 전부가 나와. 그런데 이게 어떤 사람들이냐 이 말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인가 아닌가? 이 사람들이 예수님 따라서 하늘로 올라갈 사람들이냐 그 말이지요. 어떤 사람들의 부활이냐? 부활은 부활이야. 그런데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놨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죄 살려놓고 그 책에서 싹 대조해 가면서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불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랬어요. 이것은 악인의 부활이야. 악인의 부활이 하나있어. 그러면 악한 자들도 한번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재판자리에 나온다. 그 말이야. 이것대로 한다면 그래가지고 가만히 책대로 봐서 너는 사람 죽였지 너는 도둑질 했지? 너는 무슨 짓 했지? 너는 무슨 짓 했지? 그래가지고 아주 정죄를 해. 그럼 지금까지 죽음은 가 죽음인 모양이야. 정죄를 해. 그래가지고 여기에 보니까 각각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았고 죽음과 지옥의 죽음과 지옥의 불바다에 던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거 보시오. 악한 사람은 두 번 죽는다는 말은 그래 하는 말이야. 예수 믿지 않으면 두 번 죽소. 그 무슨 말인고 하니 이걸 말하는 거야. 두 번 죽어. 세상에서 한번 죽고 육체가 예순 살 살다 일흔 살 살다 죽으면 한번 죽고 이때 죽어. 그래 두 번 죽는데 영원한 죽음이지요. 영원한 지옥이니까 영원한 죽음이지 그럼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믿는 사람은 한번만 죽는 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잘 알거야. 한번만 죽어. 이 세상에서 예순 살을 살다가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때 육과 영이 갈리니까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 영혼은 어떻게 돼? 믿는 사람의 영혼은 죽음을 얻지 않아. 죽음이라는 건 없거든. 믿으니까 믿는 사람은 한번죽고 안 믿는 사람은 두 번 죽는다. 그래서 이런 그런 말이 나온 거야. 우리의 신앙에 아주 중요한 대목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믿는 사람은 보시오. 고생 하는 게 뜻이 있다. 그 말이야. 아무리 예수님과 같이 별별 고생을 다해도 한번 죽으면 그만이야. 그 다음에는 영광뿐이야. 믿는 사람은, 그 다음에는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니까 아무리 고생을 해도 그까짓 거 적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생과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바울사도가 그렇게 말해.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야. 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 그까짓 거 고생 별소리 다 들어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 큰 영광을 바라볼 때는 그래 사도바울은 그 큰 영광을 바라보고 내가 기뻐한다고 그러지 않아.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 가난한 것이 순교를 해도 그 신앙에서 나올 적에는 문제가 없이 지켜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이 없으니까 그렇게 인정에 끌려서 여편네라도 하나 차고 다녀야 되고 또 집칸이나 하나 땅 조각이나 저금통장이나 하나 가져야 든든하고 그 신앙이 없어 그런 거야. 우리가 그걸 고백해야 돼. 그러니까 이런 단체에 들어와서도 그러지요. 그런데 이 단체 들어올 때는 여러분들이 다 버리고 들어올 거야. 일단 다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러나 몸둥어리는 여기 들어와 있지만 마음으로는 끌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거든요. 살림을 이 안에 들어와서도 인정도 끌고 들어오고 살림도 끌고 들어오고 또 아주 깊은 알프스 산속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합시다. 거기 들어갔어도 수도원 알프스 산속까지도 살림살이나 돈이나 인정 끌고 들어갈 수 있지 않소? 그거 버린 거 아니지요. 그러나 그거 까지가 없어진 세계를 말하는 거야. 그게 정말 부활의 세계야. 그게 참 부활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 이지요.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생각할 적에는 얼른 끊어버리고 얼른 벗어 버려야지요. 아이구 뜨거워라 하고 얼른 벗어버려요. 여러분이 지금 만일 저도 못하면서 이거 부끄러운 이야기에요. 저도 못하면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새빨간 숯 덩어리 하나 갖다가 여러분의 이렇게 가슴속에다 푹 찔러 주던지 그러면 여러분들 어떠하시겠소?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가만히 보듬고 계시겠소? 시뻘건 숯 덩어리를 여러분들 몸둥어리에다가 찔러주면 ‘어이구 뜨거워라.’ 야단날 거 아니오? 죽는다고 사실 그와 같은 거야. 알고 보면 물욕이나 정욕은 그와 같은 거야. 그런데 그걸 우리가 인식을 못해요. 저는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생활이 왔을 적에는 그게 실천이 잘 안 돼. 이게 문제야 물질에 대한 애착이나 인정에 대한 애착은 숯불같이 생각을 하라는 그런 말의 뜻이에요. 이제 그때는 ‘뜨거워라’ 하고 얼른 던져버리는 거 그게 은혜 받은 사람들이지요. 성녀들이나 하는 거지. 이거 지금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길게 나가지는 것 같습니다만 좌우간 그 다음으로 내려갑시다.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 24절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셔야 합니다. 또한 마지막 원수인 죽음 까지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 발아래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뭐 이 하늘과 땅도 전부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없어져 버리고 다 없어져 버리고 그냥 거룩하고 만일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부활을 받은 사람들이 영광체로 영원히 죽지 않을 몸들을 입고 나타나고 그리고 인제 영원 그 뒤에는 오직 누가 높아지냐? 하나님 아버지만 높아져 오늘은 보면 세상에 대통령도 우쭐대고 임금님도 우쭐대고 뭐 목사도 척하고 모두 그러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은 구경 못한다 그 말이야.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하나님만이 인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고 하면서 여기 보니까 그때가 되면 그분은 그 모든 것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은 그 모든 것 속에 안 들어 있지요.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굴복 당하게 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예수님 까지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있고 신성이 있지요. 인성을 지닌 예수님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야 하나님과 같은 자리지 영원히 같은 자리 그러나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인성을 지신 예수님은 모든 세상 것을 다 폐하고 모든 택한 백성 그 모든 영광을 예수님이 다 차지하신 뒤에 그 에베소서에는 그걸 가르쳤지요. 만물을 복종케 하신다. 그렇게 했지요. 그렇게 해서 다 예수님이 일단 모든 권세를 차지하십니다. 그래가지고 예수님 자신까지를 포함시켜서 하나님께 굴복한다 그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야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끝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 당하게 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겁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천상천하에 하나님을 지배하는 건 하나 거슬리는 건 하나도 없어. 지금까지는 마귀가 여기서 드러나고 저기서 드러나고 동광원 안에도 드러나고 여러분 마음속에서도 마귀가 자꾸 고개를 들고 그러는데 그때 가서는 그러는 게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에요. 완전히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뭐 순종이라는 말도 필요가 없어. 그대로 말씀대로 살아지는데 무슨 순종이 따로 없지, 왜냐하면 나라는 게 없거든. 나라는 게 없어. 전부 하나님의 것이야. 그래야 되거든. 그래 29절, 그런데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이건 조금 이야기가 여러분들은 교회 의식을 잘 모르시니까 세례 문제가 이렇게 나오고 그래요.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합니다. 여기 세례는 영적세례 성신세례 불세례를 생각하지 말고 세상 세례를 생각하면 더 좋지요. 천주교로 말하면 영세 같은 거 그런데 사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거든요. 큰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다는 건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모를 거 아니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거기는 그냥 지나갑시다. 그리고 거기 아래로 가서 32절 근처에서부터 읽어 봅시다. 내가 설혹 이런 건 참 용서를 빌어야겠어요. 이런 걸 설명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 그러면 우리가 정한 시간 안에 말을 못해요. 그러나 이것도 성경인데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경 안에 기록된 말씀인데 이것을 떼어놓으면 되느냐? 그런 양심의 소리도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에 굴복시키시는 그분은 그 모든 것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 당하게 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여러분을 자랑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이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혹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우는 위험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당한 것이라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 아니겠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나쁜 친구를 사귀면 분명히 나빠집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내가 이 말을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은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 씨앗에 물을 주시고 씨앗 하나하나에 각각 알맞은 몸을 주십니다.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동물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또 다릅니다.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또 땅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존재하는 것들의 영광도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 사이에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2절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몸은 묻히면 썩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묻힐 때에는 치욕을 받고 묻히지만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납니다. 묻힐 때에는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인간인 아담은 생명을 받아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이고 영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첫째 인간은 땅에서 온 흙의 인간이었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그 흙의 인간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그 하늘의 인간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 흙의 인간의 형상을 지녔듯이 그 하늘의 인간의 형상 또한 지녀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에는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삽시간 눈 깜빡할 사이에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몸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음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 질것입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며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 하십시오. 

 


 이 말씀은 그대로 우리가 이해만 하고 받아들이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씀입니다. 이 이상 더 어떻게 자세히 여기다 말을 한마디만 붙여도 군살이 됩니다. 그러니까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부터 고린도전서 15장으로 와서 이걸 생각 하려 드니까 참 창창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도 하는데 또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부활에 대한 걸 희미하게 비치셨거든요. 그래가지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시편을 읽어보면 맨 썩지 않게 썩지 않게 그 미리 말씀 했어요. 예수님이 부활 하실 것을 그럼 모든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내다보고 증거 했거든요. 그걸 다 우리가 인용해 봐야 되는데 그러려면 많은 시간을 우리가 가져야겠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간에는 어제 저녁에 1절서 11절 까지 본  그것을 대강 줄거리로 잡고 그 다음으로 조금만 나가보고 싶어요. 여기 보면 첫째는 부활은 믿음의 기초라고 그랬습니다. 어제 안 들으신 분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 하는데 부활은 믿음의 기초라 우리 신앙의 기초를 부활에다 두지 않으면 그 신앙은 쓸데없다고 그랬지요. 잘못 믿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큼 중요하다. 그것을 여기 써 놓았지요. 그런데 7절 근처에서부터 조금 보십시다. 15장 7절, 거기 보면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 번 나타나셨다고 그런 말 가운데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 동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래서 자기를 많이 낮추면서 이런 나에게도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평생을 바치고 큰 변화를 받아가지고 그냥 이렇게 주님의 일을 역사에 공적을 나타낸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을 사도바울은 수없이 증거 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언제든지 사도바울은 그 자기 설교를 할 적마다 꼭 이 대목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어요. 다메섹 성문 밖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그때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부르셨지요. 그때 ‘사울아, 사울아’ 그러던 그 소리 그게 영 잊혀 지지 않는 거예요.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사도바울을 일생동안을 울게 하고 헌신하게 한 것이야. 그래서 설교할 적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끝머리를 가보시오. 아그립바 앞에서도 베니게 앞에서도 말 할 적마다 꼭 그 대목을 꼭 이야기 하거든. 사도행전 9장 장면이 나타납니다. 3절서부터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나타나 그의 주위에 두루 비쳤다. 그러자 그는 엎드러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소리, 이 소리 하는 음성이 사울의 귀에 들려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사울이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것이 아주 그냥 가슴에 꽉 박혔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또 임금 앞에서도 총독 앞에서도 대중 앞에서도 어디 가정에가서도 어디 가서도 항상 이 말이야. 그래가지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꼭 사도바울은 어느 대목에 가서든지 내가 이렇게 부활을 이야기 하다가 이런 꼴을 당했다. 항상 그런 말을 잘해요. 그리고 여기 보니까 그 아그립바와 베니게, 베니게는 총독이지요? 그때 베니게 총독이 새로 부임을 하니까 아그립바가 인사를 왔었거든요. 그 앞에 사도바울이 끌려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이야기 하던 그 장면을 보면 거기도 이렇게 몇 군데 말을 하고 있거든요. 사도행전 25장 18절 근처를 여러분이 이렇게 성경을 찾아가면서 읽으면 재미있고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여러 시간이 걸려요. 그래 제가 얼른 읽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18절, 원고들이 일어서서 그에 대한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예측한 죄목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없었고 다만 자기네 종교와 죽은 예수라는 사람에 관해서 바울과 의견을 달리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예수가 살아있다고 주장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총독이 임금에게 말 하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 결국 골자는 듣고 보니까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더라고, 그때 베니게 총독의 머리에는 그것만 남았던 모양이야. 그렇게 부활에 대한 걸 이렇게 강조하고 있어요. 또 그 아래가보면 26장 8절입니다. 거기 가보면 이번에는 아그립바 왕 그 인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임금에게 막 자기를 아주 초라한 죄수가 거지같은 죄수가 지금 거기는 굉장합니다. 그 베니게 총독의 가이사랴에 있는 어마어마한 거기 아그립바가 와 있고 그 부인도 와있고 그 대관들이 늘어앉고 그런데서 막 따지는 거야. 막 따지는 거야. 그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지 않느냐고 어째서 믿을 수 없다고 하냐고 이 말이에요.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가장 강조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또 그 예루살렘에서 잡혀가면서 층층대에 서서 마지막 군중들에게 말 할 적에도 그런 소리 하지 않아요. 내가 부활을 전하다 그랬다. 또 그 바리새교인하고 사두개교인 사이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도 그 이야기를 꺼냈어. 내가 전하고 있는 건 예수의 부활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신앙 우리 영적 생활 가운데 얼마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이게 문제에요. 이 시간에는 그걸 반성을 해봐야 해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어느 정도 믿고 우리 생활화 하고 있는가? 우리 생활에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는가? 그게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언제든지 그걸 상기하면서 그 위에 말하고 있어요. 마지막에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리고 11절에 가서 보면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것을 믿는 것이라고 내가 전하고 있는 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가만히 보면 동정녀 탄생도 전했을 것이고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그렇게 모두 예수님의 많은 것을 말 했는데 왜 여기 와서는 특별히 내가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것과 그리스도의 사신 것 이라고. 그게 가장 중요해. 우리 신앙에 있어서 이건 골자입니다.  그 다음으로 내려가야겠는데 사실은 거기에 대한 것은 아까 읽은 사도행전 9장에서도 봐야 되지만 사도행전 13장 22절 근처 또 31절 사도행전 23장 6절 11절 사도행전 24장 15절  25장 19절 26잘 8절 여러 군데를 꼭 읽고 지나가야겠는데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찬찬히 사도행전에서만 찾아보시기를 바라요.

 


 그리고 12절 이하를 보십시다. 우리의 부활, 우리의 부활 그 문제를 지금 논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어째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아래 쭉 아주 거듭 거듭 그걸 되새기고 있어요. 어째서 죽은 사람이 못 살아난다고 그러냐? 이 말을 줄여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성경도 거짓말이고 하나님도 거짓말 한 게 되고 내가 말하는 게 전부 거짓말이 된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살아나셨다. 그걸 말하고,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우리들의 부활을 위해서도 살아나신 거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이 부활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자기도 부활 못한 양반이 우리더러 부활을 믿어라. 그러면 그거 말이 되요? 누가 그 예수의 말을 믿겠소?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부활의 신앙도 전부 거짓말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믿는 게 전부가 헛것이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왜 그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느냐? 그 말이야. 그런데 왜 부활을 안 믿느냐? 그럼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우리가 언제 부활을 안 믿는다고 그러던가? 그럼 내가 한번 묻지요. 제게도 여러분만 지금 실책하는 게 아니에요. 제 자신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욕을 할 수 있는가? 욕할 사람 있는가? 어째요? 여러분의 마음에 그늘은 없어요? 여러분의 눈에 주름살은 없고 여러분의 신앙에 의심은 없습니까? 갈팡질팡 하는 거 없습니까? 부활을 믿는다면 그런 게 없어야지, 그렇지 않소? 부활한 몸둥어리가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소? 부활하는 몸둥어리가 뭐라고 이런 옷 나부랭이를 끌고 다니고 살림살이를 끌고 다니고 땅 조각 집 조각을 붙들고 있겠소? 부활하는 영혼이 그렇지 않소? 아직도 부활이 안 들어 간 거야. 아직도 부활을 믿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요런 거 가지고 네 것 내 것 무엇 갖고 싶어 하고 자꾸 주면 좋아하고 그게 무슨 부활을 믿는 거냐?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참 부활에 들어간다는 건 위대한 새 능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새 힘을 얻는 거예요. 천사 같은 소리를 하고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 생활의 초점을 가만히 봐서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를 우리는 생각을 해야 되요.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괜히 쓸데없이 이렇게 사도바울이 잔소리 하는 거 아니거든요. 어째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리가 없고 무엇 때문에 예수님 혼자 자기 혼자 하나님의 아들이 뭐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겠느냐? 우리들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니냐? 그런데 그 정도를 이다음에 예수님의 나팔소리 나면 우리들도 펄떡펄떡 일어날 걸 믿소? 그럴 거야? 그건 뻔뻔스러운 소리야. 현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오실 때 부활을 믿을 수가 있어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된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참 성경에만도 14개의 편지를 썼고 십년동안이나 그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가르치는 게 예수님의 부활이 만일 없었다면 다 헛것이란 말이야. 다 헛것이야 우리들도 그래요. 뭐 그렇게 장로님도 애를 쓰고 돌아다니시고 모두 오늘 한국 기독교계 강단마다 서서 목사들이 설교를 할 거고 큰 교회는 막 만여 명씩 모였을 거고 그래 그러나 몇 만 명이 모였더라도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없다면 그 울리는 괭과리다. 그거야. 요새는 사랑이 없으면 괭과리라고 그랬듯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이야. 애쓰고 돌아다녀도 쓸데없다 그 말이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다. 이거 말을 거듭 거듭하는 것 같지만 잘 들어보시오. 한마디도 거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 우리들이 우리들도 지금 보통으로 보면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더러 여러분 여러분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네 믿습니다. 그럴 거예요? 그런데 보십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으니 우리의 우리로 하여금 부활을 믿고 우리도 부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그 말 아닙니까? 살리셨을 리가 없다. 그 말이지요. 무엇 때문에 그랬겠느냐? 그래서, 그래서 살리신 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줄여 말하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부활하셨다. 우리도 틀림없이 부활한다. 그 말 아닙니까? 그 다음 16절로 갑시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 다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해놨어.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하나다. 그 말이야. 하나다. 도저히 그건 분리시킬 수 없다. 그 말이야. 17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또 다시 말하는 것 같지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건 아주 기독교에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보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요? 우리 죄, 또 내 죄, 네 죄 그렇지요? 우리 죄라는 말도 맞고 어찌되었든지 죄 때문에 죽으셨지요? 그러면 잘 생각 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을 안 하셨다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요? 죄가 왕 노릇 하지 않았소? 죄가 이겼거든. 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잡아 죽였으니까 이제 죄는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겠냐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얼마나 큰 문제냐 그 말이야. 지금 그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도 지금까지 죄 아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이야. 지금까지도 우리가 전부 죄에 얽어 매여 있을 것 아니냐? 그 말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그놈의 죄의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버리고 일어나셨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길이 열렸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죄가 무섭지 않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이다. 그렇게 말해요. 그래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지금 말하고 있어요. 다 아는 것 같지만 그 다음에 참 우리 아주 일상생활에 대단히 감명 깊고 위로를 주는 말이 자꾸 나와요. 거듭거듭  17절을 봤지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다 영원히 죽음 가운데서 그 스데반의 장열한 죽음도 별 수 없다. 그 말이 되요. 보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은 채로 지금까지 그냥 땅속에 썩어져 버릴 것 아니오? 그 다음에 목이 잘린 야고보로부터 그저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로부터 사도바울로부터도 태워 죽인 순교자처럼 쟈스틴으로 부터 전부가 영원히 그대로 있었을 것 아니냐 그 말이야. 전부 원통한 일 아니요?  저 우리 한국만 해도 절두산에서 이만 명이 목이 잘려 죽었는데 대원군 때 그게 전부 헛된 죽음이 되지 않았겠냐 그 말이에요.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제 우리 문제에요. 이거 하나는 꼭 외워두면 좋아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자 이건 중대 문제 아니요? 우리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다만 만일 희망을 두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러고도 술 먹고 계집 얻고 처먹고 고등 문화주택 갖고 살면 그거야 불쌍하지 않지 자가용타고 뭐 영화를 누리고 연애도하고 마음대로 한다면 그거야 뭐 불쌍할 거 없지 세상 영화를 누렸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지금 우리라는 건 뭐예요? 사도바울 자신이나 그 일행을 놓고 하는 소리 아니야. 거기에 대한 성경은 고린도전서 1장이라든지 여러 군데 나오지 않아요? 만물의 찌꺼기같이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와 같이 바보소리 듣고 병신 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한 우리같이 그 말이야.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시집도 진정으로 못가고 장가도 못가고 옷도 한번 제대로 못 입어보고 밤낮 쑥 죽이나 먹고 요새는 쑥 죽이 없어졌지. 또 이물 겨나 먹고 그런 우리말이에요. 그런 우리 예수를 위해서 그랬다면 그런 우리는 만일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불쌍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그렇지요? 부활이 없다면 그러고 죽어버리고 말아버린다면 불쌍하다 말이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 아래 그런 말 했지요? 나는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도 세상 사람같이 먹고 마시자 그랬어. 여러분들도 시집가서 자식을 빠뜨려도 그래도 괜찮다. 그 말이야. 이 세상뿐이라면 잘 들어야할 문제에요. 큰 문제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들이라는 게 뭐냐 말이야. 우리들 잘 믿는 사람들 정말 잘 믿는 사람 좀 어폐 있는 말일 런지 몰라도 수도자들 같이 진정한 수도자 말이지요. 꼭 수도자만 아니지요. 수도자라고 이름 안 붙여도 가령 손 양원 목사님이나 주 기철 목사님 같이 순교자들 제가 그 꼭 우리가 천주교에만 그런 게 있는 게 아니고 또 수도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그래요. 그 해방 직후에 손 양원 목사님이 감옥에서 풀려나왔지요. 그때 광주 도청 뒤에 여관에 가계셔서 우리 청년들이 몇이 찾아가 뵈었어요. 고생하시고 나왔으니까 뵈러 왔다고 그런데 그 손 양원 목사가 앉았는데 옛날에 이 선생님 마른건 문제도 되지 않아. 꼭 마른 아주 말라빠진 명태조각 같이 되어서 앉아 있더라니까. 참 이거 보기만 해도 눈물이나. 아 그런 이들 불쌍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야. 무엇 때문에 그냥 대구 형무소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는데 미워서 밥을 그냥 죽지 않을 정도로 먹였거든. 그래 오죽 배가 고팠겠소? 사람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이들 그런 이들은 불쌍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뿐이라면 희망이 그 말이에요. 그럼 이걸 뒤집어서도 생각을 해봐야 되요. 우리가 요 세상에서 뚱땅거리고 잘살면 그런 사람은 부활 날에 부끄러워지지요. 세상재미 다 봤으니까 부자와 같이 그런 사람들은 문제도 되지 않아요. 여기 그럼 또 이런 염체 없는 사람들도 생기지. 이 세상에서도 재미보고 잘살고 또 부활한 다음에도 한번 재미보고 잘살고 그런 성경은 없거든. 그런 건 없어.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못 먹고 못 입고 고생 많이 하고 자지 못하고 애도 많이 태우고 그러느냐 그리고 그 부활의 날에 영광을 누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잘살고 그 다음에 가서 이야기가 나오지만 부활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않아요? 부끄러운 부활이 또 있거든, 계시록에도 그 이야기가 나와 그건 나중 이야기 합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 19절 에서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사는 동안에 우리가 큰 부활 뒤의 영광을 생각하고 그냥 참고, 참고 바보가 되고 억울한 소리도 듣고 짓밟히고 그래도 좋다. 그 말이에요. 좋다 그 말이에요. 20절 20절 이하로 내려갑시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4장, 말로만 해서는 안 되니까 고린도전서 4장 9절부터 읽어 볼까요? 이걸 제가 말 했고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데지만 우리가 여기다가 억지로 맞춰서는 안 되지요. 우리 생활을 억지로 맞추면 율법이 되지요. 고생도 율법으로 하는 건 유익이 없어요.  그래도 안 하는 거 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9절에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도들 까지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맨 끝에 세워놓으셔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이 세상 인간들 가운데 제일 끝으로 꼬랑지에다가 절대로 칭찬 듣거나 뭐 아주 이렇게 영광 누리게 하지 않으시려고 맨 끝에 세워 놓으셔서 우리는 세상과 천사들과 뭇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이라는 건 누구에요? 지금 고린도 사람들을 비꼬는 소리인지 뭔지 몰라도 또 실질적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유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자가 되었다. 아주 권세가 많고 유식한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약자가 되는 거야. 다 버리고 혈기를 버리니까 아주 세상에서는 약자가 되는 거야. 그렇게 하는 소리야. 우리는 약자이고 여러분은 강자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이것도 참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참 노동을 복 받은 걸로 생각해야 돼. 그렇다고 노동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마음으로라도 노동을 해야지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내고 비방을 받을 때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에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기를 봐야 해요. 거기를 보고 그 다음으로 내려가야 되요. 또 그 외에도 고린도후서 1장 6절서 11절 까지라든지 그런 대목들이 모두 있지요. 그런 사람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제일 낮은 자리에서 무한한 고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달게 받고 있는 사람들 그 겸손한 양떼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잠으로부터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자 인제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도 꼭 그렇게 사셨지요. 그리고 모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그런 상태로 살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사는데 맨 먼저 누가 그럴 헤치고 승리하고 일어났냐? 예수다. 우리의 지금 여기 제목이 우리의 부활 아닙니까? 우리들의 부활을 받는 순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제 먼저 첫 사람이 되었다. 부활하신 첫 사람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그때 예수님이 부활하실 적에 어떤 일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시고 사실은 그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벌써 죽으실 때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인들이 일어나서 전설에 의하면 예루살렘거리도 다녔다고 그러니까 아마 다윗왕도 다니고 그랬는지 몰라. 그걸 기독교에서 첫째부활 둘째부활 이렇게 말하는데 사람마다 해석이 조금씩 달라요. 그걸 첫째 부활이라. 그러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이 그때 골고다에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그 사람들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전문가들한테 미뤄놓고 예수님이 먼저 부활하셨고 죽음이 한사람을 통해서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사람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그 말이지요? 한 사람이라는 건 여기 한 사람 한사람 이라는 건 아담과 예수를 가리킨 거지요. 그건 로마서 5장을 여러분이 참조하시면 잘 나타나 있어요.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죄안에서 이제 꼼짝 못하고 있었어. 그리고 죽음 아래서 그랬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뭉쳐가지고 십자가에서 짊어지시고 죽으신 뒤에 그때 모든 사람의 역사이래로 미래까지에 있는 죄가 전부 예수님의 등허리에서 십자가와 함께 끝을 고했거든요. 율법과 아울러서 끝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심으로서 그때부터 인제 살길이 열리는 거야. 지금 그 과정을 이야기 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죄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사망아래 놓이게 되었었는데  그와 같이 그와 같이 부활도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걸 말하는 거 아니요? 여기서 부활하는 대열이 있다고 합시다. 모든 부활한 영혼들 부활하는 상태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가서 자세히 나오지요. 영광의 몸으로 강한 몸으로 그런 몸으로 부활한다. 인제 그런 부활한 사람들이 죽 일어나서 행렬을 한다고 하면 맨 앞에 예수님이 서셨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맨 앞에서 첫 사람으로 맨 앞에 가서 서서 계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걸 따라가게 돼. 한사람을 통해서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차례가 있다 그랬어요. 각 사람이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사실은 우리 부활이 언제 어떤 순서로 되어있느냐? 여러 군데 볼 거 없어요. 여기만 봐도 되겠습니다. 여기 한군데만 잘 기억해두면 간단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랬지요? 예수님의 이걸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한걸 보통 초림이라고 그러고 인제 마지막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강림하시리니 그걸 재림이라고 보통 말해요. 그런데 어떤 그 때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묵시록에 보면 더 좀 복잡하지요. 그런데 어찌되었든지 그때에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때 인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럼 예수님이 오시면 끝날 것 같은데 그 다음이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묵시록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마지막에 가서는 예수님이 그냥 그 참 무서운 옛 뱀 사탄용을 갖다가 지옥에다 갖다 넣어놓은 뒤에 천년왕국이 지나간 뒤에 그때 가서 신천지를 건설하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 시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그 부활에 대해서 요상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묵시록을 잠깐 펴봅시다. 이건 무슨 부활일까? 20장 11절서부터 보겠어요. 묵시록 20장 11절 이걸 제가 보는 건 우리가 끼일까봐 보는 거예요. 여기 끼지 않기 위해서 부활은 이때까지 남아 있다가 부활해서는 안 돼. 그래서 이런 것도 생각 하자는 거야. 묵시록 20장 11절 이하에 나는 또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묵시록 20장이면 거반 끝나는 거 아니요? 세상 다 끝나는 때 아니요?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인제 하나님의 보좌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사라지고 인제 땅과 하늘도 다 없어졌어. 다 없어졌어.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그럼 땅바닥이 없는데 그럼 어디가 있는가? 이 땅 지구덩어리는 임시라니까 하나님이 육신 쓰고 우리들이 이 세상에 와서 사는 동안에 예수 믿고 회개하라고 잠깐 만들어주신 여관이야. 이 지구 덩어리가 더군다나 지금 그 뭐예요? 그 집들을 팔고 사고 그 안달들을 하는 거 보면 사실 타락이에요. 인간의 타락, 여러분들 집들 쓰고 있지 마시오. 여기 집 가지고 있는 분들 몇 분이나 되시오? 집들 모두 벗고 나왔지? 잘 나왔어. 잘 나왔어. 나와야 하는 거야. 그거 우스운 거야. 아 여기 보니까 이 땅덩어리도 없어진다는데 땅 덩어리 또 나중에 보면 별도 없어져요. 다 소용 없는 거야. 우리 세상사는 동안에 필요하니까 조금 만들어 놓으신 거야. 그렇지 않아요? 성경대로 하면 나중에 개인으로 합시다. 대담을 하기 시작하면 예배가 대여섯 시간은 가야 돼.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합시다. 마귀도 자기변명으로 나서 자기변명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자들이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일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뭐에요?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이 여기 죽은 자들이 무슨 말이야? 믿는 사람들이냐? 안 믿는 사람들이냐? 이제 그걸 보자 그 말이지요.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는데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있는걸 보았습니다. 많은 책들이 펴졌고 또 다른 책 한권이 펴졌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이제 생명책이 있어. 그런데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 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냈고 바다 속에 빠져죽은 사람은 고기가 다 먹어버렸으니까 없지 않소? 다 썩어져 버렸어.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토해 바다 속에서 내놓았다고 그랬어. 죽은 사람을 그거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실은 어떤 형체든지 나왔어. 토해냈고 죽음과 지옥에 있는 사람까지도 토해냈다. 아주 지옥 속에 있는 사람까지도 한번 나온다고 그랬으니 참 이상한일 아니요? 죽음아래 있는 건 전부가 나와. 그런데 이게 어떤 사람들이냐 이 말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인가 아닌가? 이 사람들이 예수님 따라서 하늘로 올라갈 사람들이냐 그 말이지요. 어떤 사람들의 부활이냐? 부활은 부활이야. 그런데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놨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죄 살려놓고 그 책에서 싹 대조해 가면서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불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랬어요. 이것은 악인의 부활이야. 악인의 부활이 하나있어. 그러면 악한 자들도 한번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재판자리에 나온다. 그 말이야. 이것대로 한다면 그래가지고 가만히 책대로 봐서 너는 사람 죽였지 너는 도둑질 했지? 너는 무슨 짓 했지? 너는 무슨 짓 했지? 그래가지고 아주 정죄를 해. 그럼 지금까지 죽음은 가 죽음인 모양이야. 정죄를 해. 그래가지고 여기에 보니까 각각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았고 죽음과 지옥의 죽음과 지옥의 불바다에 던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거 보시오. 악한 사람은 두 번 죽는다는 말은 그래 하는 말이야. 예수 믿지 않으면 두 번 죽소. 그 무슨 말인고 하니 이걸 말하는 거야. 두 번 죽어. 세상에서 한번 죽고 육체가 예순 살 살다 일흔 살 살다 죽으면 한번 죽고 이때 죽어. 그래 두 번 죽는데 영원한 죽음이지요. 영원한 지옥이니까 영원한 죽음이지 그럼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믿는 사람은 한번만 죽는 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잘 알거야. 한번만 죽어. 이 세상에서 예순 살을 살다가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때 육과 영이 갈리니까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 영혼은 어떻게 돼? 믿는 사람의 영혼은 죽음을 얻지 않아. 죽음이라는 건 없거든. 믿으니까 믿는 사람은 한번죽고 안 믿는 사람은 두 번 죽는다. 그래서 이런 그런 말이 나온 거야. 우리의 신앙에 아주 중요한 대목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믿는 사람은 보시오. 고생 하는 게 뜻이 있다. 그 말이야. 아무리 예수님과 같이 별별 고생을 다해도 한번 죽으면 그만이야. 그 다음에는 영광뿐이야. 믿는 사람은, 그 다음에는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니까 아무리 고생을 해도 그까짓 거 적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생과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바울사도가 그렇게 말해.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야. 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 그까짓 거 고생 별소리 다 들어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 큰 영광을 바라볼 때는 그래 사도바울은 그 큰 영광을 바라보고 내가 기뻐한다고 그러지 않아.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 가난한 것이 순교를 해도 그 신앙에서 나올 적에는 문제가 없이 지켜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이 없으니까 그렇게 인정에 끌려서 여편네라도 하나 차고 다녀야 되고 또 집칸이나 하나 땅 조각이나 저금통장이나 하나 가져야 든든하고 그 신앙이 없어 그런 거야. 우리가 그걸 고백해야 돼. 그러니까 이런 단체에 들어와서도 그러지요. 그런데 이 단체 들어올 때는 여러분들이 다 버리고 들어올 거야. 일단 다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러나 몸둥어리는 여기 들어와 있지만 마음으로는 끌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거든요. 살림을 이 안에 들어와서도 인정도 끌고 들어오고 살림도 끌고 들어오고 또 아주 깊은 알프스 산속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합시다. 거기 들어갔어도 수도원 알프스 산속까지도 살림살이나 돈이나 인정 끌고 들어갈 수 있지 않소? 그거 버린 거 아니지요. 그러나 그거 까지가 없어진 세계를 말하는 거야. 그게 정말 부활의 세계야. 그게 참 부활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 이지요.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생각할 적에는 얼른 끊어버리고 얼른 벗어 버려야지요. 아이구 뜨거워라 하고 얼른 벗어버려요. 여러분이 지금 만일 저도 못하면서 이거 부끄러운 이야기에요. 저도 못하면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새빨간 숯 덩어리 하나 갖다가 여러분의 이렇게 가슴속에다 푹 찔러 주던지 그러면 여러분들 어떠하시겠소?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가만히 보듬고 계시겠소? 시뻘건 숯 덩어리를 여러분들 몸둥어리에다가 찔러주면 ‘어이구 뜨거워라.’ 야단날 거 아니오? 죽는다고 사실 그와 같은 거야. 알고 보면 물욕이나 정욕은 그와 같은 거야. 그런데 그걸 우리가 인식을 못해요. 저는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생활이 왔을 적에는 그게 실천이 잘 안 돼. 이게 문제야 물질에 대한 애착이나 인정에 대한 애착은 숯불같이 생각을 하라는 그런 말의 뜻이에요. 이제 그때는 ‘뜨거워라’ 하고 얼른 던져버리는 거 그게 은혜 받은 사람들이지요. 성녀들이나 하는 거지. 이거 지금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길게 나가지는 것 같습니다만 좌우간 그 다음으로 내려갑시다.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 24절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셔야 합니다. 또한 마지막 원수인 죽음 까지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 발아래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뭐 이 하늘과 땅도 전부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없어져 버리고 다 없어져 버리고 그냥 거룩하고 만일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부활을 받은 사람들이 영광체로 영원히 죽지 않을 몸들을 입고 나타나고 그리고 인제 영원 그 뒤에는 오직 누가 높아지냐? 하나님 아버지만 높아져 오늘은 보면 세상에 대통령도 우쭐대고 임금님도 우쭐대고 뭐 목사도 척하고 모두 그러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은 구경 못한다 그 말이야.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하나님만이 인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고 하면서 여기 보니까 그때가 되면 그분은 그 모든 것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은 그 모든 것 속에 안 들어 있지요.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굴복 당하게 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예수님 까지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있고 신성이 있지요. 인성을 지닌 예수님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야 하나님과 같은 자리지 영원히 같은 자리 그러나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인성을 지신 예수님은 모든 세상 것을 다 폐하고 모든 택한 백성 그 모든 영광을 예수님이 다 차지하신 뒤에 그 에베소서에는 그걸 가르쳤지요. 만물을 복종케 하신다. 그렇게 했지요. 그렇게 해서 다 예수님이 일단 모든 권세를 차지하십니다. 그래가지고 예수님 자신까지를 포함시켜서 하나님께 굴복한다 그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야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끝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 당하게 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겁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천상천하에 하나님을 지배하는 건 하나 거슬리는 건 하나도 없어. 지금까지는 마귀가 여기서 드러나고 저기서 드러나고 동광원 안에도 드러나고 여러분 마음속에서도 마귀가 자꾸 고개를 들고 그러는데 그때 가서는 그러는 게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에요. 완전히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뭐 순종이라는 말도 필요가 없어. 그대로 말씀대로 살아지는데 무슨 순종이 따로 없지, 왜냐하면 나라는 게 없거든. 나라는 게 없어. 전부 하나님의 것이야. 그래야 되거든. 그래 29절, 그런데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이건 조금 이야기가 여러분들은 교회 의식을 잘 모르시니까 세례 문제가 이렇게 나오고 그래요.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합니다. 여기 세례는 영적세례 성신세례 불세례를 생각하지 말고 세상 세례를 생각하면 더 좋지요. 천주교로 말하면 영세 같은 거 그런데 사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거든요. 큰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다는 건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모를 거 아니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거기는 그냥 지나갑시다. 그리고 거기 아래로 가서 32절 근처에서부터 읽어 봅시다. 내가 설혹 이런 건 참 용서를 빌어야겠어요. 이런 걸 설명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 그러면 우리가 정한 시간 안에 말을 못해요. 그러나 이것도 성경인데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경 안에 기록된 말씀인데 이것을 떼어놓으면 되느냐? 그런 양심의 소리도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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