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산집 옆 시래기 담기 : 믿 음

mamuli0 2022. 2. 14. 08:43

 무말랭이 작업과 시래기 내려 담기를 하고 있다. 어제는 산집 옆 덕장에 걸린 무청을 내려 담았다.

 

 

믿   음  

1987.01.02. 정인세 원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교독문 36 마태 6장 교독 하겠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곡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목숨을 일각이나 더 하겠느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적 게 믿는 이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욱 입히지 아니하시랴
그런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사람이 구하는 것이라 
이 모든 것을 너희 천부께서 너희 쓸 것인 줄을 아시나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니
그런고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 하니라 
기도드리십시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 심히 부족한 인생들에게 이렇게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 아버님 앞에 나올 수도 없고 입을 열수도 없는 인생들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를 보시고 이 자리를 받아주시고 은혜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또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서 모든 부족한 것을 없이해 주시고 아버님께 영광이 되는 시간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참석지 못하게 되는 형제자매들도 다 있는 곳곳에서 예배드리는 시간되게 해 주시고 또 예수님의 이름을 갖고 먼 나라 온 세계 어느 곳에 이든지 아버지께서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모든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종들과 함께 해주시고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은 모든 백성들 위에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대단히 어려움을 많이 안고 있는 이 민족 사회에 아버지의 긍휼을 베푸셔서 먼저 모든 대통령이하 정치하는 지도자들이나 각계각층에 있는 지도자들 위에 성신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주시고 또 서로들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빕니다. 모든 문제는 믿음과 사랑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압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허락해 주시기를 비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께서 온전히 주장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예수님의 피공로만 의지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성경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절서부터 읽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창조 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아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 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노아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만들어서 자기 가족을 구했으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세상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일러주시며 그리고 가라고 명령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채 떠났던 것입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사는 생활이 나그네 생활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그 땅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주실 도시를 바라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이제 나이가 많은 여자인 데다가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임신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늙은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난 자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하고 다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그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찾고 있던 고향이 따로 있었던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이 그들이 생각하고 바라던 곳이었다면 그리로 돌아갈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더 나은 곳 하늘에 있는 고향을 갈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시려고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 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의 외아들인 이삭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은 터였지만 그 아들을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네 후손이 퍼져나가리라. 퍼져나가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유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되찾은 것이 됩니다. 거기까지 19절 까지만 우선 읽겠습니다.

 


 오늘은 믿음에 대해서, 믿음이 무엇인가? 또 믿는 양반들은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것을 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수록 내 개인의 생애도 너무나 험하고 고달픔을 느낍니다. 또 이 세상 되어가는 것을 보아도 점점 어렵기만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독교는 굉장한 세력을 가지고 확장되어나가는 것 같아서 신자 수효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고 그럽니다. 저는 엊그제 어떤 청년 장년이지요. 한분을 만났더니 한국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하나도 없다고 그래요. 그래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대담한 소리를 하는가? 그 이유는 불의가 판을 치고 있으니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느냐? 믿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참 놀라운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만나면 한국 기독교인이 800만 명이고 온 세계에서 대단히 강성한 기독교 국가라는 걸 자랑을 합니다. 그래 또 그 말도 놀라운 말입니다. 믿는 사람이 몇 만 있어도 한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했는데 만일 저 사람말대로 800만 명이 다 믿는 사람이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텐데 그래서 대체 믿음 이라는 걸 알고 말 하는가?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금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도 그렇거니와 여기 앉아계신 분들은 믿음 무엇인가? 라는 걸 많이 배우시고 듣고 또 생각하시고 또 살아보려고 애를 쓰셔서 이미 어느 정도들 알고 계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알듯하면서 모르는 게 믿음이고 믿는 것 같으면서 보면 하나도 안 믿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게 우리들의 체험입니다. 그럼 이 성경 본문에 의해서 조금 여러분의 믿음이나 제 믿음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이 난 것이지요.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부터 지금 우리가 과연 믿고 있는가? 그걸 한번 다시 생각해 봅니다. 바울사도는 너희가 믿음위에 서있는가 스스로 살펴보라고 그러셨습니다. 여기 1절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이랬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우리가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 리 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진대 참고 기다릴지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다 소망을 두는 것이 참 소망이라. 그랬어요.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라는 것이라는 건 그 소망, 참 소망을 보증해 주는 게 믿음이다. 믿는 사람은 참 소망에 대해서 보증서를 받은 거와 같다. 그런 뜻이지요. 그 뜻이 어렵다면 그 다음을 봅시다.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신해 줍니다. 여기는 이렇게 그 아래 보면 말하고 있지요. 그 뛰어가서 그 아래 보면 우리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걸 곧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걸 압니다. 이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천지창조 하신 걸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걸 믿고 알고 그러고 있지 않느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확증한다고 우리가 미국이 있다는걸 여기 안본 사람이 대부분일 겁니다. 그러나 미국이 있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례 미국이 있는 줄 압니다.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신해 주는 것을 믿음이라고 그런다. 그런데 옛 사람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첫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옛 사람들이라는 건 모든 그 족장들 선지자들 성인들 이런 양반들을 지칭하는 것일 테지요. 믿는 양반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인정하신다. 그 뜻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이 시대에 있는 44억이나 되는 인종 가운데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 혹은 형편없이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마음가운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고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고 지식이 많거나 훌륭한 사업을 많이 한다. 그래도 그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 말이니까 이 첫마디에 가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부닥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던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못 받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해? 돈만 있으면 제일이지. 혹은 지식만 많으면 제일이지. 이러는 사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가 안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면 거기는 아무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인정하신다. 이 인정하신다는 말이 공동번역 성경에는 한마디로 올바르다. 옳다. 하심을 입는다. 그전 개역 성경에는 의 라 그랬지요?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 이렇게 나와요.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삐뚤어진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그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제 이 말씀 한마디로서 우리가 결론은 얻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예를 듭니다. 아주 고대서부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맨 먼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아벨입니다. 여기 아벨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그 구약 성경에 나타난 것 보다 이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에는 없는 말씀이 여기 가끔 나옵니다. 이 아벨에 대한 것도 그렇지요? 아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가인이 바친 제물은 믿음으로 되었고 아벨이 바친 제물은 믿음으로 되었고 가인이 바친 제물은 믿음으로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받으셨다. 그런 말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지적을 하셨어요. 왜 그랬을까? 무슨 양으로 바쳤느냐? 채소나 다른 것으로 바쳤느냐? 그게 문제가 안 되고 있어요. 가끔 그렇지 않느냐? 이렇게들 생각을 하지만 여기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아. 이 아벨이라는 사람과 가인이라는 사람의 보통 생활도 별로 기록이 된 게 없지만 가인은 짐승을 사냥하는 사람 거친 사람 그쯤은 나타나 있지요. 그런 것도 문제를 안 삼으셨어. 가인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포악하고 나쁘니까 그 제물 안 받으셨다. 그렇게 되어있지 않거든요. 또 아벨이라는 사람이 대단히 온순한 사람으로 들 생각하지만 또 거기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조건을 삼은 것은 아벨은 믿음이 있었다. 그겁니다. 아벨은 믿었다.  그래 그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쳤는데 믿음으로 바쳤고 가인은 모르겠어요. 제 이건 억측인지 몰라도 많은 훌륭한 것을 바쳤는지 몰라도 믿음으로 바치지 않았다. 이건 오늘 현대교인들이 자기의 성찰해 볼 좋은 재료가 되는 거지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 연보를 십억을 바치고 백억을 바치고 요새 그 장 여인이라는 분이 불교에 불공을 드리는데 1억을 공양 돈으로 바쳤답디다. 그 많이 바쳤느냐가 하나님 앞에가 문제가 안 된다. 그 말이야.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엽전 한 푼을 칭찬하셨거든요. 아 저 여인이 성전 앞에서 가만히 보고 앉아 있다가 많은 사람들이 연보를 많이 내는데 예수님보시기에는 모두 위선자들이야. 가짜야. 내가 돈을 이렇게 많이 낸다. 그러고 요새처럼 뭐 손바닥은 안쳤는지 모르겠어도 아무개가 1억 원 냈습니다. 그러고 광고를 하고 손바닥치고 아마 그런 건 예수님 마음에 안 드셨던 거 같아. 그런데 과부는 아주 부끄러운 태도로 겸손하게 자기에게 있는 것 전부야. 그 한 푼을 갖다가 하나님 앞에 바쳤어. 예수님은 그걸 감격하셨던 거 같아. 아 저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가장 큰 거 많은걸 바쳤구나. 그런 거, 믿음으로 바치는 거, 믿음으로 바치는 그 태도에 대해서 두어서너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요. 하나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지요? 자기의 공로를 나타내거나 내가 이렇게 바친다. 하는 그런 표시를 하려고 애를 쓰거나 어찌되었든지 그 나 라는 것이 거기 끼어들어가지 않아요? 그게 믿음으로 바쳐지는 거예요. 가장 겸손한 태도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심히 부족하지만 예수님 비유가운데는 그런 대목이 많이 나오지요. 그렇게 바치는 자세 말이에요.  

 

 

그러면 아벨이라는 사람은 아마 그의 생애가 그랬던 것 같고 또 그 형하고 다투다가 얻어맞아 죽은걸 보면 힘이 약해서 그랬던 것 보다 예수님이 뭐 그들을 대항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서 붙들려 죽으셨습니까? 열두 영의 군대라도 지금 불러 올수가 있다고 하신 예수님이 아마 아벨도 그런 사람이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상징이라고 그런 것이지요. 어찌되었던지 아벨과 같은 사람이 믿는 사람이다. 그걸 우리가 단적으로 배워야 해요. 아벨과 같은 사람, 아벨과 같은 사람을 믿는 사람이라고 그런다. 그의 제물은 믿음으로 바쳤기 때문에 가인보다 더 낳은 제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으로 보시고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리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너 옳다. 네가 바치는 그 예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 태도가 옳다.’ 하고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을 하셨다. 가인은 뭔지 부산하게 많이 갖다 바친 것 같은데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셔. 그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이 시간에 우리가 길게 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아벨이 바친 것을 하나님이 믿음으로 바쳤다고 인정하셨다는걸 깊이 생각하고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가인의 피가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하지 않느냐? 그러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까지 아벨의 피는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때문에 그렇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 다음에도 믿음은 영원하다. 믿음은 영원하다. 하는 예가 많이 나오니까 에녹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늘로 올려 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에녹에 대한 것 같이 구약에 간단히 기록된 것이 그 드물지요? 창세기에 보면 창세기 5장 24절 인가요? 에녹에 대해서는 꼭 한 가지 나와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말 밖에 없는데 여기는 에녹에 대한 설명을 꽤 썼습니다. 에녹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늘로 옮겨져서 에녹이 잘 믿었다는 말 여기 없어요.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 말로 설명은 되려는지 몰라도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이건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죽음이 없다. 이랬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됐습니다. 이게 문제지요. 그럼 성서에 그런 말이 없는데 믿음으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 사실은 경외에 에녹서 라는 게 있지요. 그런데 더 강조해 놨는지 몰라요. 어쨌든지 에녹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이 엘리야와 에녹뿐이지요. 육신을 가진 채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것은 성경에 증거 한다면  그 유명한 에녹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게 여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기쁘시게 했느냐? 여기는 다른 설명이 없어요. 믿음으로, 에녹이 잘 믿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또 그에게는 죽음이 없어. 여기 또 죽음이 없다. 아벨은 육신은 죽었지만 지금까지 영으로 우리에게 살아서 말씀하는 분으로 설명이 되어있고 이 에녹이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살아서 이야기 하는 사람을 대표한 사람의 하나로 여기고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일상생활에서 지금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지금 여기 계시다. 하는 것을 우리들이 사실 확실히 느끼고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 생활태도는요, 훨씬 올바르고 정직하고 양심적이고 불평을 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이 억울한 소리를 해도 그것가지고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함께 계시는데 두려울 것도 없을 것이고 피곤할 것도 없을 것이고 약하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에녹과 같이 이렇게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 사람은 대단히 귀하지요. 그 체험을 쓴 양반이 일생동안 대단히 노력을 해갖고 하나님과 동행을 한 생활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더러 간간 있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그래서 그는 죽음이 없었다. 이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도 말씀을 하셨지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마르다 자매에게 말씀하시고 나사로를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믿기만 해라. 무덤에 들어가서 나흘 (끊김)

 


아주 큰 공간이지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도 우리 일생에 기억해야할 요절이지요.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 다시 말하지만 많은 연보 돈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할까? 불쌍한 사람을 수천 명 수만 명 구제 사업을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우리가 무엇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것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실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여기는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건 그런 짓을 암만 했어도 하나님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 말하셔. 왜 그런 고 하니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없이 큰일 많이 한 사람들 많거든요. 좋은 사업도 많이 하고 구제사업도 많이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러면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꼭 무슨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거는 아니지요. 가령 팔도 없고 두 다리도 없고 그런 이가 있었지요? 수용소에, 여기는 없었지만 두 눈도 멀고 참 사람같이 생기지 않고 막가지 같이 생긴 사람도 잘 믿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 기록을 여러분도 아셨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산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꼭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에요. 믿음이 먼저입니다. 행동이 먼저가 아니에요. 믿음이 먼저에요. 믿음이 있어가지고 그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일 때 그 행동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이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참 명심해야 할 점인 것 같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 이라는 건 잘 보이지 않으니까 믿음이라는 건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면 행동만 보이니까 행동을 가지고 판단을 하지요. 사람들은 행동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이 상은 결정적인 건 하늘나라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지요. 은혜를 내려,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시고 그 다음에 노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셋째로 노아도 믿음으로 산 사람이다. 그럼 그는 무엇으로 노아의 믿음을 증거 할 수 있느냐? 노아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때 보이지 않는 거야. 확신이라고 그랬지요? 믿음은, 노아는 그가 600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제 내가 홍수로 이 세상을 쳐서 멸하겠다. 그러니 너는 배를 지어라. 그러나 그때 햇빛이 짱짱했습니다. 또 그렇게 지금까지 홍수로 이 세상을 전멸시킨 역사는 들어보지도 못하고 있을 법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하나도 믿지 않았지요? 저 영감이 나이를 많이 먹더니 망령을 부린다고도 했을 것이고, 또 날마다 그 노아가 자손들을 데리고 배를 짓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와서 조롱을 했다고 그런 야사도 있지 않습니까? 아 오늘 비오나보다. 뭐 이러고 모두 조롱을 하고 그래도 노아는 흔들리지 않고 아마 잘은 몰라도 그 부인이나 자손들도  가끔 항의했을 지도 모릅니다. 엄청나게 큰 배를 지으려니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아 아버지 이거, 이거 꼭 이렇게만 해야 하나요? 이거 참 믿어도 좋을까요? 별말을 다 했을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도 처음에는 믿음으로 한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일을 하다보면 피곤증이 나면 낙심도 나고 의심도 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흔들리지 않았어. 처음에 한번 하나님이 배를 지어라. 이제 홍수로 멸한다. 하신 그 말씀을 딱, 듣고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만들어서 자기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배를 짓는 동안 흔들리지 않고 끝끝내 기어이 그걸 완성을 했어요. 준공을 했어요. 이게 믿음이라. 그래서 그 믿음이 자기를 비롯해서 그 가족을 구원한 거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세상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에 들어간 외에는 전부 물에 멸망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출애굽에서도 그래요. 여호수아와 갈렙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만은 가나안땅을 들어가서 밟고 그 외에 그 엄청나게 많은 수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은 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죽고 이래죽고 저래죽고 다 죽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거 오늘도 그러는 거예요. 오늘도 참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다 뱀의 밥이 되고 말 것을 가르친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우리가 믿음의 조상 이라고 그러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아마 시간 관계가 아브라함의 사정만 이야기하면 더 시간이 없을까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그러는데 어째서 그러는가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일러주시며 그리고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채 떠난 것입니다. 그 아마 하도 많이 들으셔서 잘들 아실 거예요. 아브라함이 맨 먼저 살던 갈대아 지방 우르, 거기는 그 메소포타미아 평야라고 아주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가운데 하나입니다. 세계에서 삼대평야, 기름진 평야로 따지면 양자강 기슭으로 해서 메소포타미아 평야 나일강 평야 그렇게 잡아요. 그럴 정도로 유명한 곳이에요. 거기서 살았어요. 또 그는 가만히 보니까 아주 부자로 살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떠나지겠소? 그런데 가령 가나안땅을 처음에 가봤더라면 가지도 않았을는지도 모르지만, 어딘지도 모르고 떠났다고요. 이게 우리가 신앙생활이라는 게 수판 튕겨 가면서 타산해 가면서 신앙생활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 하고 나서는 게 신앙입니다. 절대순종 수도자들은 절대순종을 언제든지 숭상하고 있습니다. 절대순종을 연습하고 있는 것들이 기독교인들이지요.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어찌되었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순종이라는 게 아주 고귀한 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에게서는 첫째는 그걸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일가친척 그 부한 재산 그 정든 그 기가 막히게 살기 좋은 조건을 전부 내버리고 떠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가는 곳은 어떤 곳이라는 걸 처음에 구체적으로 지적도 안하셨는데 떠났다. 이게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만일 일상생활에서 이걸 실천을 한다면 여러분이나 저는 아주 강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얕은 지혜를 가지고 타산으로 이해타산을 하고 그렇게 하면 될까 안 될까 헤아려보고 가만히 얼마나 유익이 있을까? 이러기 때문에 무척 약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전쟁을 하는데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군대하고 전쟁을 할 때 하나는요? 배수진 이라는 게 있어요. 적과 싸우는데 강 이쪽에서 싸우지 않고 강을 군사를 건네다놔요. 그러니까 강이 뒤에가 있지요. 큰 강을 뒤에다 놓고 적과 싸우면 어떻게 되겠소? 쫒기면 물에 빠져 죽는 판이야. 그걸 배수진 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까 죽어라하고 밀고 나갑니다. 그러니까 강하지요. 배수진을 치는 사람 군사들은 아주 강한 법이에요. 우리 믿음으로 살 때는 그렇게 살아야해. 또 하나 있지요. 군대에서 전쟁을 할 적에 양식을 사흘치만 넣어줍니다. 그리고 너 요거 양식 사흘 동안 먹고 떨어지기 전에 적을 파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한다. 이렇게 해. 그게 이건 뭐 사흘 동안에 기어이 적을 점령해야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판이니까. 그렇게 해서 전쟁을 하는 것들이 있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너무 앞뒤를 보고 너무 세상을 건네다 보고 타산을 하기 때문에 믿음들이 약합니다. 믿음이 강해지지가 않습니다. 돈을 믿고 사람을 믿고 세상을 믿고 이걸 믿고 저것 때문에 이것 때문에 그러니 언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마음속에 들어올 시간이 겨를이 없지. 하나님의 음성 세상소리를 너무 많이 들으니까 요새 그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어요. 이 단체를 운영하는데도 가장 큰 문제는 세상 을 건너다보는 눈이 열려있기 때문에 또 세상 소리만 듣는 귀가 열려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 성의가 대단히 부족하니까 마귀는 막 뛰어 덤벼들어서 흔들어 버립니다. 흔들어 버려요. 우리는 원인이 어디 있는가?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라고 명령 하셨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을 알지도 못하고 떠났다. 그랬지요? 그 약속의 땅에서 사는 생활이 나그네의 생활이나 다를 것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그 땅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이건뭐 자기가 살던 고향과는 아주 뭐 하늘과 땅과 같이 틀려. 아주 뭐 돌맹이 천지고 참 농사 한포기 제대로 지을 수 없는 형편없는 땅이 가나안땅 아닙니까? 거기 들어가서 참 서툰 땅에 가서 살려니까 나그네 같아. 여기 나그네라고 거기 천막을 치고 겨우 권속들과 살적에 얼마나 쓸쓸하고 고달프고 외로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이니까 끝끝내 거기서 살 마음을 먹고 요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애급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리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뒤에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흔적이 없어. 하나님이 한번 여기서 머물러라. 그러신 뒤에는 죽어도 거기 그 자리를 지킨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든든한 기초위에 세워주실 도시를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적어도 수천 년 수백 년 수천 년 뒤 여기 하나님이 설계하신 도시라는 건 물론 오늘의 이스라엘나라 그 뒤의 이스라엘나라들 인지 몰라. 그 전성시대 다윗왕의 시대 솔로몬 왕의 시대 그런 것을 말하려는지도 몰라도 원은 새 예수살렘을 가르친 것이지요. 영원한 새 예루살렘을 가르친 것이야. 이제 차차 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왜 여기로 보내셨는가? 하는걸 알게 됐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년 이천년 뒤를 내다보고 그걸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선지자라고 그렇게 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와서 보니까 아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보냈나? 그걸 이제야 오늘 성서학자 들이나 기독교 사가들이 다 증거 하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 이 짧은 시간에 왜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걸 증거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왜 하필 거기다 보냈을까? 텐트라는 기초위에 세워주실 것을 기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아제 나이가 많은 여인인데다가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요새로 말하면 석녀인지 아이를 밸 수 없는 여자였다고, 그러나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어. 하나님은 틀림이 없으시다는 걸 믿었어. 이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늙은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난 자손이 아브라함은 노인이 아이를 낳을 시간이 지났고 사라는 처음부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이고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 그랬는데 그걸 믿었다는 거지요. 이것이 믿음이라는 건 그런 것이에요. 인간의 지혜로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걸 믿는 게 믿음인데 요새 현대 기독교인은 여러분이나 나나 가장 큰 병태는 자기가 이해해야만 믿어요. 자기 지식에 맞아야 자기 생각에 맞아야 기어이 알고 나서만 믿으려고 하거든요. 납득이 되어야, 그러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이러니까 예수가 안 믿어지지요. 인간의 지혜로 알면 몇 푼어치나 알고 이해력이 있다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데 기어이 다 보여 지고 만져지고 알려지고 그래야만 믿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그게 아니거든요. 어떻게 해? 아브라함이 그 늙은이가 어떻게 아이를 배. 또 사라가 어떻게 아이를 배? 그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돼. 동정녀 마리아가 어떻게 아이를 배?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그들은 다 믿었어. 믿음으로 왜 하나님은 더 위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 한마디로 우주도 창조하셔. 오늘 이 세상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아도 수태를 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늙은 아브라함 한 사람 으로부터 난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셀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들 하지요.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뒤에 번창한 것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그러나 거기는 또 많은 설명이 따르지요. 영원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이스마엘도 있는데 그런데 이삭에게서만 난 자라고 하는데 설명이 붙어야하고 또 오늘 기껏해야 이스라엘 민족이 한 200만 명 안팎으로 잡는데 전 세계 45억에다 대면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기 때문에 오늘 이 하늘에 별과같이 바다에 모래와 같이 이것은 신앙의 자손을 가르친 것이라고 보통 해석을 하지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렇게 아실 겁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이 오늘 믿음의 자손이 그거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그러거든요. 보통으로 얼마나 많아집니까? 또 얼마나 더 아주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나고 있는가? 전 세계적으로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그 믿음에서 이렇게 나오는 거 아닙니까? 전부가 하늘의 별과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그 다음에 또 한 대목 나오지요.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하고 다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그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여기 얻지 못했다. 그 말이 참 이상한 말인데 그 설명은 11장 끄트머리하고 12장 첫머리를 닿아야 그 설명이 나와요. 약속받은 것을 아직 얻지 못 했어. 그들이 그러면서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영원한 것을 바라본 것이지요. 하나님이 일러주신 것을 약속을 믿은 거지요. 기뻐하였으며 이 지상에서는 그들이 참 타향사람처럼 살았어.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러고 이삭도 그러고 야곱도 그러고 전부 나그네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나그네와 같은 우리도 그렇지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 쳐놓고 이 땅위에 지상 살이 60년이나 80년이 전부 그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60년도 나그네, 80년을 살아도 잠깐 풀끝에 이슬 같고 그림자같이 지나가는 인생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 나그네, 이 세상에 사는 건 나그네야. 불과 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찾고 있던 고향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거 보시오. 그 아브라함이 찾고 있는 고향이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이 떠나온 고향이 그들이 생각하고 바라던 곳이었다면 그리로 돌아갈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아브라함의 예를 듭시다. 갈대아 우르지방은 훨씬 가나안땅 보다 나은 땅 인데 그가 가나안땅을 나그네라고 생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게 만일 갈대아 우르라면 거기를 갔을 거 아니냐? 그 말이지요. 그런데 안 갔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 나은 고향 하늘나라를 말하는 거 아닙니까? 더 나은 곳 하늘에 있는 고향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사도바울이 항상 말 했듯이 내가 이 세상을 속히 떠나서 하늘나라 가기가 아주 소원이다. 아마 예수 믿는 사람은 참 잘 믿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새삼 느낄 겁니다. 이 세상 살아 볼수록 괴로워. 이상스럽게도 살아볼수록 더 괴로운 게 이 세상이라는 걸 알겁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를 더욱 그 고향을 갈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사모하는 사람들, 하늘나라를 몹시 사모하는 사람들이 하늘나라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이라 부르고 그걸  하나님께서는 에구 저 구더기 같은 것들이 저 흙덩이로 빚어 만든 것이 나를 아버지라 부르다니 수치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새 예루살렘을 약속하시고 그리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 이야기가 아주 길게 나오지요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그의 외아들 이삭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았지요. 이삭으로 말미암아서 네 자녀가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는 그 이삭인데 그 이삭을 바치라고 그랬어. 그 아들을 기꺼이 바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왜? 그러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어. 어떻게 믿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네 후손이 퍼져나가리라고 약속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었던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어. 내가 지금 이삭의 목을 찔러서 인정을 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바치면 사람 생각으로는 하나밖에 씨알머리가 없으니까 자손이 끊어질 것 같으나 하나님이 어련하시겠느냐? 이삭을 되살려 서라도 기어이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걸 믿었단 말이야. 그럼 부활을 믿은 거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은 거야. 그 여기 그걸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죽었던 사람까지 살리실 수 있다는걸 믿었단 말이야. 그러므로 비유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정신적으로는 이삭은 이미 죽은 거 아니야. 벌써 나무 한 다발을 짊어지고 그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적에 그때 벌써 이삭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요. 아브라함의 마음가운데서도 이삭은 죽인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더구나 목에다 칼을 대었을 때는 결정적으로 그는 죽은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되찾아 줬으니까 하나님이 죽은 자식을 되찾아 주신 거나 다름없다. 이게 믿음이라는 거야. 그런데 이런 건 아니지요. 타산을 해서 하나님이 꼭 살려주실 거라는 걸 믿는 그 믿음이 타산이 돼서는 안 되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섭리를 믿는 것이지 인간적인 타산에서 나오는 건 아니야. 그걸 벌써 믿음은 상처받아요. 타산을 붙으면 순수성을 잃어버려. 이 아마 시간이 다 됐으니까 이다음은 다 우리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나 끝에서 드문드문 참 아까운 대목들이 많이 있어요. 여러분이 차분히 돌아가셔서 히브리서 11장을 다시 하나하나 검토해 보십시오. 그 창녀 라합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외모를 보시지 않아. 창녀지만 믿음만 있으면 그런 사람도 건지셨다. 인제 그런 이야기도 나오지요? 저 39절에 가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이 말로 시작을 해가지고 이 말로 끝내는 거지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이 말이 또 나오지 않아? 그들이 바랐던 것을 받지 못했다. 그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이 설명이 많이 따르지요?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아시지요? 위에 있는 아브라함 이라든지 이삭이라든지 야곱이라든지 노아라든지 모두 그런 사람들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최소한도 사도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면 사도바울과 여기 앉은 우리들까지 예수 믿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이걸 우리라고 그런 것이지요. 예수 안에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그들이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이지요. 그들의 구원이 우리들의 구원 없이는 완성이 안 된다. 이 말이 되지요? 쉽게 말하면, 여기는 아마 여러분 설명한 것 같습니다. 여기 참 그 다음까지 나가면 결론이 되는데, 이렇게 집을 짓는데 아무리 좋은 기둥을 세우고 상양을 다했더라도 그리고 집을 다 꾸몄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유리창이 아직 덜 되었습니다. 유리창 문짝을 아직 덜 짰어. 그러면 이집은 준공식을 못해. 유리창 박을 때까지는 이 집을 완공되었다고 하지를 못합니다. 준공식을 못해. 유리창을 갖다 달아야 그때 가서야 이집은 다 됐다. 이렇게 하는 거지.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라함도 에녹도 모두 아벨도 모세도 모두 다 있고 그 다음에 프란치스코 성인도 있고 테레사 성녀도 있고 다 계실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앉아있는 이 노인이 꼭 구원 얻을 영혼이라면 이 분이 하나 하늘나라 안가면 하늘나라 완공이 못 된다. 그 뜻이에요. 어떻게 하십니까? 이해 되요? 여기 앉아있는 나 하나. 나 하나가 안 들어가면 아브라함이 모두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개, 정 아무개, 김 아무개 저것이 얼른 하늘나라 와야 이 하늘나라가 완공이 될 텐데 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 뜻 아닙니까? 성경은 전부 그렇게 되어있어요. 뜻이 뭐 이런 거는 우리가 비유나 예화를 들면 많이 들 수 있지요. 자식을 열두 형제를 낳은 사람이 환갑잔치를 지내단고 합시다. 그런데 막내둥이 하나가 미국에 가서 오지를 않았어. 그러면 아들 열하나하고 며느리하고 딸이 다 모여 있어도 마음이 막내만 생각하거든요. 미국에 가요. 뭐 그건 가져본 이가 알거에요. 아마 자식 가져보지 않으면 몰라요. 나도 그렇게는 경험을 없습니다만 미국에 가 있는 막내아들 하나 와야 아 식구가 다 모였다고 부모는 좋아하는 거야. 하나님의 마음이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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