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시래기를 덕장에서 내려 상자에 담는다. 비를 맞지 않아 잘 말랐다. 이슬도 내리지 않아 눌러담기 어렵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
1986.08.14 정인세 원장
요한복음 1장 1절서부터 몇 절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5절까지 읽었습니다. 또 요한1서 1장 1절서부터 몇 절 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를 우리와 차별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차별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함이로다.
오늘 저녁은 제가 말씀을 드리고 내일 새벽에는 오 장로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내일 오전에 마지막 시간을 김 선생님께 말씀을 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일 오전 시간까지로 이번 모임은 일단 마치는 걸로 할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말씀을 드리기 전에 어저께 저녁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마음에서 자꾸 한마디 뒤따라서 증거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잊어버리기 전에 그 말씀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이 공 어른 부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 공 어른 부인이 세상 뜨시기 며칠 전에 제가 도장리가 뵈었지요. 그런데 그저 잔잔한 미소만 띄시고 무슨 말씀을 하신 것도 같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그 전에 등광리에 가서 또 한 번 뵈었지요. 그때도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 도장리에 가서 또 한 번 뵌 것 같아요. 그런데도 영 무슨 말씀 들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어제 생각을 했습니다.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어째서 이 공 어른이 나를 보고는 말 한마디 없으시던 분이 김 선생님 보고는 그렇게도 자기 비밀을, 이야기를 다 하셨을까? 그걸 생각을 해봤어요. 그런데 그래서 인제 내 자신을 반성해 봤지요. 원체가 딱딱하게 생겼거든요. 누가 이렇게 만나면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길께 야요. 그러니까 안 하셨을 거고 그 양반은 아주 확실히 태도는 무척 겸손하고 잔잔해지셨습디다. 그래서 임종이 가까우시구나. 알았지요. 그렇게 겸손한 양반이 저를 볼 적에 이 교만한 놈 그렇게 보이셨을 거야. 틀림없이 그러니깐 말할 마음이 안 생겼을 거고 그래 가만히 어제 저녁에 그런데 김 선생님 보기에 그렇지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속에 든 말을 다 털어 내어놓으셨구나. 그래서 오늘 저녁에 말씀과 상관이 있어요.
여기 처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 그랬어. 여기 말씀 말씀에 대한 걸 오늘 저녁에 생각을 좀 하려고 하는데 이 말씀은 우주 안에 가서 충만하게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꽉 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가 뚫어지지 않은 사람은 못 알아들어. 그런데 그 귀가 뚫어진 자세가 첫째가 겸손이다. 그리고 온유해야 하거든.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보니까는 그 생각이 자꾸 앞을 서요. 그 이 공 부인이 아주 지금 속에 있는 말씀을 기어이 어디다가 털어내 놓으셔야 할 텐데 그거 참 큰 비밀이지. 털어낼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김 선생님을 만난거야. 그러다가 다 털어내 놓은 거고 그래서 내가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할 말을 못하고들 갔을까? 그 생각을 해봤어. 여러분들도 그거 느꼈을 거예요. 나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어도 정이 떨어져서 말 못하고 그만둔 분도 많이 있었을 거예요. 제가 그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다고요. 원장님한테 이야기 좀 하려고 가면 딱딱 눌러버리니까 말을 못하겠다고. 그래서 이 우주 안에 꽉차있는 진리의 말씀도 마음이 열어져야 들을 귀가 있어야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이, 그런데 보통 말은 귀에 쏙쏙 잘 들어갑니다. 그냥 보통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같은 건데 그러나 그건 들으나마나한 이야기 하나마나한 이야기 한 푼어치 값어치도 없는 말들 그걸 말씀이라고 그러는 게 아니야. 이 말씀 이라는 것은 정말 꼭 들어두어야 하는 말씀, 또 내 생명에 유익이 되는 말씀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이라는 말에 대한 것이 성경마다 다릅니다. 대개 보면 어떤 성경에는 태초에 도가 있으니 이랬지요? 그러나 인제 그 원어로 들어가면 로고스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로고스, 그 말씀이라는 것은 아주 해석이 어렵습니다. 말씀에 대한 것만 풀이한 책이 이만한 게 있는 걸 봤어요. 전부 말씀에 대한 뜻을 풀이한 그러나 그렇다고 그 말씀을 다 풀어서 해석해 놓을 수 있느냐 하면 해석을 못해요. 그렇게 말씀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하려면 힘이 들어요. 힘이 드는데 여기 보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했어요.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이랬거든요. 말씀이 곧 하나님이야.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 그런데 또 요한1서에 가보면 이 말씀이라는 걸 이렇게 설명을 했거든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러분 말씀을 만져본 사람 있어요? 말씀을 만져본 사람 있으면 어디 손들어 보시오. 말씀을 만져봤다. 그래요. 또 눈으로 보았다고, 말씀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거든. 이 로고스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또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연구 할수록 참 맛이 나오고 뜻이 나오는 게 그게 말씀이야.
그리고 한번 그 말씀이 귀로 들어가서 우리 마음속에 한번 들어가면 영 사라지지 않는 게 말씀이야. 영원히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거 그러니까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라. 그랬어. 진리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랬어. 예수님 자체가 길이야. 예수님 자체가 진리야. 여기도 그 말씀이 그렇지 않아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계셨다.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계셨던 분은 예수님 밖에 없거든. 예수님이 하나님과 처음부터 함께 계셨어.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함께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래서 자꾸 그런 생각이 요새 그러지 않아두 나요. 이거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쓸데없는 말을 고만 좀 하고 죽어야겠다. 그 생각이 나요. 오늘 저녁에도 이거 안 나올걸 나왔는지 몰라요. 내가 한 말 가운데 몰라요. 열 칸에 한 칸이나 여러분이 담아둬야 할 말씀이 있을까? 우리들이 날마다 하고 있는 이야기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야. 해도 좋고 오히려 하면 손해가 나는 일이야 내게도 손해가 나고 아까 누가 그런 말을 조금 하더군요 어떤 철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자기가 살아생전에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왔는데 아주 유명한 선생님도 만나고 철학자도 만나고 그런데 이야기하고 나서 돌아와서 내가 그 사람만나고 말하고 와서 잘됐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항상 잘못됐었다. 말하고 난 것이 후회가 난다고. 스피노자가 그랬다던가? 누가 그런 말을 했다. 그래요. 그건 깨달은 양반이야. 깨달은 양반, 우리가 참 말씀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요새 자꾸 나요. 그래서 여러분하고 갈리기 전에 이 말씀에 대한 걸 한번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말씀이라는 것은 그대로 여기 있는 대로 빛이고 생명이야. 말씀 자체에 가서 생명력이 있어. 그러니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우리가 참 생명을 사는 것이고 말씀이 우리 안에 한마디도 들어와 있지 않으면 그건 껍질 사람이고 고기 덩어리지, 사람이 아니야.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 말씀 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 할 적에 요전에 시간에 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 했으니까 거기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거기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고기 덩어리만 만들어 놓으신 게 아니거든요. 거기다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으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속에 아담과 하와 속에 말씀이 있었어. 그때, 처음에 말씀을 먼저 에덴동산에다가 심어놓으신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들어가서 그 말씀을 뽑아버린 거야. 그러니까 에덴에서 쫓겨난 거야. 이건 두나마나 이런 인간은 속에 말씀이 없는 인간은 있으나마나한 거다. 걸리적거리는 인간은 에덴에서 쫒아내 버리자. 그 다음에 가만히 우리가 역사에서 이야기 했지만 에녹 같은 사람은 말씀으로 산 사람이야. 그러니까 말씀이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간 사람이고 그 노아 때 와서 노아 한사람만이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어. 그 속에 가서 말씀이 있었어. 그럼 그 외에는 전부 말씀이 없었어. 그 사람들 속에는 말씀이 없었어. 그러니까 전부 홍수에다가 쓸어버렸어.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틀림없이 그렇다. 틀림없이, 이제 우리가 훨씬 뒤로 내려와서 아브라함 이야기도 지나가버리고 모세 때 와서 인제 하나님이 40년 동안 모세를 훈련시켜가지고 40년 뒤에 시내산에 갖다놓고 40일 동안 금식을 시키고 참 훈련을 해가지고 이제 40일 동안을 시내산에서 모세가 금식기도를 하면서 무엇을 받았어요? 계명을 받았어. 말씀을 받은 거예요. 인제 말씀을 받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제 모세를 통해서 일 년 동안을 그 이백만명이나 되는 그 군중을 시내산 아래다 데려다놓고는 말씀으로 훈련을 시키신 거예요. 거기 많은 조항이 나오고 천막을 치는데 뭐 높이를 몇 자나 해라. 뭐 폭을 얼마나해라. 그게 다 껍데기 문제야. 껍데기문제야. 정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세워볼까? 거기 하나님의 계획은 계셨어. 그래가지고 인제 그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로 40년 동안을 돌아다니셨는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생활하고 할 적에는 조금 사는 것 같다가 말씀을 떠나버릴 적에는 전부 없애버리셨거든요. 그래가지고 40년 뒤에 가서는 40세 이상 되는 사람으로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어. 그러지 않았소? 가만히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그까짓 거 가나안 족속이 껍데기로 볼 때만 그렇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넉넉히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가 있으니까 그걸 우리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라고 하지요. 그 믿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전부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를 그때 가나안 땅 근처까지 간 이야기를 하고 말았지요? 인제 그 대중들을 거느리고 가나안땅을 건너갈 적에 요단강을 건너갈 적에 홍해바다를 건너올 때처럼 물이 삐쳐버렸다고 그랬지요? 그럼 말씀이 그때에 하나님의 법괴로 상징된 말씀을 가지고 들어갔거든요. 들어갔을 적에 말씀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정지가 되어 역사도 정지가 되고 자연도 정지가 되고 그것을 가르친 것이야. 그래가지고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왜 무기로 그 여리고성을 함락 시키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의 법괴를 짊어지고 하루 한 번씩 여리고성을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빙빙 돌았느냐? 그 순전히 말씀으로 여리고성을 함락 시키려고 그러신 거야.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백만명이 들어간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이 들어가는 거예요. 가나안땅에, 우리가 그거는 분명히 알아야 돼. 그래서 우리 사람 생각으로는 알 수없는 일들이 많거든요. 어째서 여리고성을 칠적에도 그렇고, 아이 성을 칠적에도 그렇고, 그 다음에 어디 가서든지 전쟁을 하고 나면 그 도성 사람들을 늙은이로부터 남자고 여자고 어린애까지 싹 죽여 버리라고 그러셨을까? 그 참, 하나님은 그러게 그것들 때문에 시비가 많지요. 그래 구약의 하나님을 보면 전쟁의 하나님 살생하는 하나님 피 흘리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있다. 구약 때 하나님은 다르다. 사실은 그게 아니야. 구약 때 하나님이 다르고 신약 때 하나님이 다른 게 아니야. 그 말씀은 세우고 말씀이 아닌 것은 쓸어버리는 게 하나님의 목적이야. 그 가나안 일곱 족속은 말씀은 모르고 말씀이 들어갈 구멍도 없고 여지가 없이 말씀으로는 도저히 생기를 얻을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어. 그래서 없애버리시는 거예요.
그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가 죽었지요? 여호수아가 죽으면서부터 혼란이 일어났거든요. 그냥 질서가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제 나중에는 누가 이번에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어떤 성을 칠까하고 꼭 하나님한테 일일이 여쭈어 봤거든요. 그 시대를 사사시대라 그러지요. 사사시대가 한 이백여 년 동안 계속되지요. 이백여 년 동안에 열한명의 사사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마지막에 사무엘까지 하면 그 열한명의 사사가 일어났는데 그건 아주 뚜렷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시대가 사사시대야. 그리고 사사시대 이후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져 버렸어. 그런 때는 막 아말렉으로, 암몬으로 막 들이쳐 들어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그 가나안땅을 하나 견본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말씀으로 통치해보시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질서를 세우고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그렇게 해보신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이 없어져 버리면 그건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되어요. 사람을 죽여서 없애버린 게 잔인하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이 말을 하다가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속에도 말씀이 없으면 송장이나 마찬가지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하등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에요. 속에 가서 말씀이 살아있어요. 제가 요새 그 생각을 더군다나 간절히 한 이유가 있습니다. 동광원이 그럭저럭 한 사오십년 되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나이가 오십 살이 되고 육십 살이 되고 그런데 이 이상한 게 모두 병신들이 되가 모두가 가만히 보시오. 젊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해 지는 게 아니라 전부 시들시들 비실비실하고 맨 아프다는 소리뿐이고 맨 이 약사발만 붙들고 다니고, 이거 왜 그럴까? 이 여러 가지로 지적들을 합디다. 이번에 김 준선생도 동광원 운동 좀 시켜야 한다. 뭐 영혼은 말씀으로 세우지만 육신은 운동을 좀 해야 한다. 별소리 다 하지만 물론 그 말씀도 다 옳은 말씀이야. 옳은 말씀 이지만 속에 알맹이가 없어져 버렸어. 모두 그래서 이렇게 약해빠지는 거야. 말씀이 없어져 버렸어. 속에 그래서 난 요새 자꾸 그 생각을 합니다. 이건 내가 세우는 게 아니에요. 내가 믿음을 사람의 믿음을 집어 넣어줄 수도 없고 어떻게 북돋아 줄 수도 없고 가만히 보니깐 맨 병만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 볼수록 제일로 걱정 되는 게 저걸 믿어야 할 텐데 믿어야 할 텐데 약으로만 저렇게 씨름 하지 말고 믿어야 할 텐데. 그 속에서 굉장하게 일어나거든요. 믿음이 없어서 저렇게 비실비실한다. 그래서 이 말씀이 들어가서 살적에 그때 사람이 생기가 나는 거예요. 그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 골짜기에 사람의 송장 뼈다귀가 꽉 차 있었지요. 그때 에스겔이 쳐다보니까 아주 징그럽게 뼈다귀가 많았지요?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랬어요.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그 뼈다귀가 전부 일어나서 사람이 되었는데 큰 군대가 되었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생기가 빠져버리면 전부 뼈다귀야. 송장 뼈다귀, 오늘 이 시대상을 잠깐 본다. 하더라도 교회 건물이 좋다 해서 생기가 있는 것 아니에요. 나라에 정치가 잘되고 군대가 강하다고 해서 생기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것은 히틀러의 정치를 보던지 무소리니를 보던지 대일본 제국을 보던지 그 나라들이 아주 쇠 덩어리 보다 더 강하고 또 이건 잔소리 같은 이야기지만 히틀러가 망할 적에 군대가 약해서 망한 줄 아십니까? 아마 여기 히틀러가 누군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히틀러가 망한 뒤에도 독일 군대가 세계를 상대로 넉넉히 싸울 수 있도록 무기도 있었고 군인들도 있었다고, 그렇게 많이 죽고도 그런데 그 히틀러가 망한 것도 그렇고 어떤 나라가 망한 이유를 찾아보면 정신이 빠져가서 그랬어요. 정신이 죽어서 정신이 썩어져버려 그러면 그 나라가 망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고구려 때부터 죽 내려오면서 나라가 망할 때 보면 정신이 부패하면 나라가 꼭 망해요. 동광원도 똑같아. 동광원도 믿음이 식어져 버리고 사랑이 없어져 버리고 정신이 죽어져 버리면 동광원 같은 건 문제도 없어요. 이건 뭐 아 지금 일천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 가운데 한웅 큼도 못되는 동광원이 무엇가지고 뻗대겠소? 어찌되었든지 그 말씀이 속에 가서 살아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가 그게 문제야. 한 사람만이라도 한 사람만이라도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동광원은 떠다밀어도 폭파를 시켜도 안 망하지요. 노아의 홍수 때 모양 노아의 한사람으로 말미 아마 보존된 거 마냥 그래서 역사를 보면 언제든지 하나님은 그걸 찾았어요. 하나님하고 아브라함하고 문답한 거 있지 않아? 그냥 소돔 고모라 성을 치러 갈 때에 의인 스무 명만 있으면 치시렵니까? 열 명만 있으면 치시렵니까? 자꾸 그런 것도 그거지요.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다만 몇 만 있어도 이 소돔성은 치지 않을 텐데 멸망시키지 않을 텐데 그게 없어서 소돔성도 쳐버리고 그러니까 이 말씀도 있느냐? 없느냐가 이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돼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 그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기 보니까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는 것도 심지어 날라 다니는 하루살이 한 마리까지도 이 공중에 날라 다니는 먼지하나 까지도 다 말씀하고 상관이 있어. 말씀하고 상관없는 거는 하나도 없어. 이 우주만물 가운데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으니까 하다못해 이런 무생물인 책상까지도 전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전부가 말씀에서 힘을 얻어가지고 생기를 얻어가지고 나와서 물질이 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말씀만 걷어가 버리시면 이 우주는 무너져버려. 하늘의 별들까지도 떨어져버려. 그 마지막에 우리가 거길 조금 보지요. 계시록 17장인가 거기를 보면 지금 제가 가진 것은 구역성경입니다. 19장 13절부터 봅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여기지금 묵시록 19장 대 환난이 지나가고 이제 심판을 하는 마당입니다. 심판을 하는 마당인데 군대들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마지막으로 가서 이 인류의 역사를 심판 하는 것도 말씀으로 심판을 해. 마지막에는 천지창조 하실 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셨고 마지막으로 심판할 적에도 그러면 말씀이 없는 부분은 심판을 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뭐 어디고 가면 어쩌고 무슨 교파로 들어가면 심판을 면하니 그거 다 도깨비 같은 소리들이야. 쓸데없는 소리고 말씀이 그 속에가 살아있으면 심판을 이기는 거예요. 심판을 이제 그 말씀이 무엇이냐는 것은 우리가 조금 뒤에 생각해 봅시다. 어찌되었든지 마지막에 가서도 모든 일을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가르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끊김)
흙으로 빚어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그 외에 어느 사람도 전부 육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서 사람이라는 꼴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은 다르지요. 예수님만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잉태시키신 게 그래서 그런 것이에요.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거기다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서 구세주를 만들지 않았느냐? 그 육신으로 된 인간으로는 육신으로 망한 인간을 건질 수가 없으니까 육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순전히 영으로 성령으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이 되어졌다. 그걸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말씀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한번 이 세상을 전부 망할 수밖에 없게 되어 지니까 말씀을 다시 한 번 내 보내신 게 예수님이야. 말씀을 다시 한 번 내보내서 사람을 형상을 뒤집어쓰고 오게 하셨어. 그래서 말씀이, 말씀이 이번에는 직접으로 육신이 되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번에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육신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 차고 넘치게 만드신 게 예수님이야. 그러자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온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습니다. 죽지 않으실 몸인 동시에 거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 진리가 충만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어. 이것이 예수님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독생자에요. 이 땅위에 어떠한 존재든지 그 피조물 가운데 육신을 갖은 가운데 은총과 영광과 진리가 충만한 것은 예수님 외에는 없어요. 그런 예수님 외에는 없어요. 그런 예수님을 다시 땅위에 보내셨어요. 그것이 인제 말씀이 육신이 된 과정이지요. 제가 지금 줄여서 간단하게 말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과정이 다른 세상 만물을 만드신 과정과는 다르게 은총과 진리와 영광이 충만하도록 만드신 건 한번밖에 없는데 그것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인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러니까 인제 여기가 중요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사람들이 인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에서 이탈되었어. 에덴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말씀 없이 살아왔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서 다시 사람들 속에 생명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말씀을 되찾으시는 거예요. 우리 사람들 속에 말씀의 씨를 떨어뜨리시는 거예요. 심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 1서에는 그것을 지금 이렇게 사도요한이 설명하시려고 애쓰시는 건줄 압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사도요한이 사도요한은 생명을 받은 사람이거든요. 사도요한이 손으로 만졌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직접 만져보았으니까 손으로 만져 보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육체를 만져본 것 갖고 만져봤다는 게 아니에요. 사도 요한은, 그 예수님 안에 있어서 살아서 움직이는 그 말씀 그 생명을 손으로 만져보는 것 같이 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데 우리가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통으로 말들 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하지 않으면 예수를 참 믿는 게 아니다. 어제저녁에도 주로 말씀한 게 제가 곁에 보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여러분 속에다가 사랑을 좀 쳐 넣어 아마 그때 김 선생님 생각 같으면 그냥 차대기에다 보리 한차대기씩 쳐대듯이 여러분에게다 사랑을 쳐 넣고 싶으신 심정인 것 같아요. 그냥 받으세요. 합니다. 사랑하세요.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 속에다가 말씀을 이렇게 들이미는 방법이 여러 가지지요. 믿음이라 그래도 좋고 사랑이라 그래도 좋고 어떻든지 우리 사람 속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그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이 힘을 얻어요. 힘을 얻어. 그래서 나는 믿음으로 병 고친다는 거 그거 믿어요.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런 짓은 절대로 안합니다. 아픈 사람 더러 찾아가면 아 선생님 병 낫게 기도 좀 해주시지요. 나는 한 번도 기도 안했습니다. 이 사람 병 좀 낫게 해 주십시오. 기도 나는 이 선생님처럼 이빨이 썩어내려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는 안했어도 병 낫게 해주시라는 기도는 안했어.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그 병난 몸통어리 썩어들어 가는 몸통어리 그냥 힘을 타지 못해서 안쓰러워서 쓰러지는 몸통어리 저 속에 믿음만 들어가면 생기가 날 텐데 그 생각은 있거든. 그 생각은 어떠한 병충이던지 믿음으로 다 낫습니다. 믿음으로 안 낫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반드시 믿음으로 어떤 병이든지 믿음이 들어가서 그 생명에다가 새 생명의 기운만 불어넣어주면 그때는 사실은 문둥병으로 썩어지는 것도 문제가 아니지요. 뭐 육신이 망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찌되었든지 사람이 생기를 얻어서 일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생기를 얻어 병이 무섭지가 않아지는 건 사실이지요. 인제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병이 무서워서 벌벌 떨지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 같은 분은 폐병 균을 사랑한다고 까지 하시지 않았어. 모두 잘 믿는 양반들 보면 오히려 병균을 사랑하고 다니엘 같은 분은 온몸이 썩어져 들어가니까 아이 이제 감사합니다. 자기 소원이 이루어졌거든. 문둥병자하고 친구가 된 거 그 이야기 하시지요. 다니엘이 문둥병자가 있는데 가 전도를 하는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암만 그래도 문둥병자들이 픽픽 웃고 듣지를 않아. 자기는 몸통어리가 성하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 사랑이 뭐야.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문둥병자가 되면 그 사람들이 조금 말을 알아들을 것 같거든. 그래. 그 다음에는 문둥병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 그래서 다니엘이 문둥병자가 됐지요. 그런데 문둥병자가 되어도 아주 악성 문둥병이 됐어요. 손가락이 이렇게 퉁퉁 부어서 고름이 나오고 다니엘의 사진을 보면 아주 볼 수가 없어. 그렇게 되고 그냥 코가 이렇게 되서 떨어지고 귀가 떨어지고 인제 그렇게 되어가지고 떡 강대상에 올라서서 문둥병자들 보고 여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러니까 그때 아멘 그러더래요. 문둥병자들이 그때는 마음이 통했다는 거지요. 문둥병자가 되니까 마음이 통했다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거기서 전도하다가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좌우간 다니엘과 같이 내가 저 사람들 사랑하려면 그 속에 파고 들어가서 그 사람 속에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넣어주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넣어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저 사람들처럼 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대개 보면 성자들 보면 거의가 그런 사람들이야. 그래서 자신이 문둥병자가 되고 몸통어리가 망쳐지고 어찌되었든지 그 사람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것도 한 개의 노력뿐이지. 그렇게 한다고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고 믿음이 들어가는 건 아니야. 그래 가만히 저 모르겠어요. 여러분들 쪽에서 어제 그 사랑을 얼마나 받아들이셨는가? 내가 조사해 보고 싶어요. 김 선생님이 아마 이게 깨지도록 책상을 두들기고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셔도 한 푼어치도 안 들어가는 사람은 안 들어가니까 오늘 낮에 생동생동 하고 그대로 돌아가던지 사랑이 사람이 내가 그런 이야기 하나 조금 합니다. 언젠가 한번 당진서 왔다고 청년 하나가 왔어요. 예배당 방에가 자고 있는데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제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져 볼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이야기 하는데 산에 가서 이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제게 사랑 주시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사랑 주시라고 끝끝내 했는가? 그건 모르겠어. 어찌되었든지 사랑 주시라고 해서 여기가 죄 깨져버렸대. 피가 나고 그 청년도 놀라운 청년이다. 내가 알아봤어요. 그 말을 듣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했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하나님한테 사랑주시라고 바위가 손이 깨지도록 했어. 그래서 뭐 해줄 말 없어. 하나님이 주실 거예요. 그 말하고 말았지. 그렇게 구하는데 안주실 거예요. 그런데 어찌 되었든지 그렇게 받아보려고 애쓰고 마음에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또 믿음을 받아보려고 애쓰는데 그게 들어가기만 하면 참 성공이야.
그런데 그게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거든요. 그냥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별 방법을 다 써서 그 살아있고 지금 또 교회에서는 그 사랑을 집어넣어 주려고 예수님의 믿음을 집어넣어 주려고 부흥회를 하고 마루 장을 두드리고 통곡들을 하고 철야를 하고 그러지 않아요? 그거 다른 거 아니야. 믿음을 받아보려고 믿게 해 주시라고 그리고 야단들을, 그런데 어쩐지 그게 들어가야만 살기는 살아요. 문제는 그런데 여기 요한 1서에 보면 우리가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들은 바요. 말씀에 대한 건 지금 여러분이 제가 말하는 거 다 들리지요. 네 졸지 말고 들으시오. 귀 좀 열어놓고 들어요. 말씀 하는 것 을 듣기는 들어요. 듣기는 들어요. 그러나 육신의 귀로 들리는 게 듣는 거요? 마음으로 들어야지. 마음으로 들어야지. 또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어쩐지 저 말하는걸 알아듣고자 애를 쓴다 해도 마음에서 깨달아져야지. 깨달아져야지. 그래서 그것이 이렇게 사도요한과 같이 이렇게 증거 할 수 있어야 되어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사도요한은 여러 가지를 애를 썼지요. 사도요한도 실수 많이 했지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엉뚱한 소리도 잘하고 실수를 많이 했지요.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요한 1서를 92년경에 쓴 거라고 하니까 이제 사도요한도 나이가 90살이 넘고 이제 아주 사랑의 사도라고 이름이 날 정도로 사랑으로 녹아질 때쯤 되니까 마지막에 가서야 인제 이게 느껴졌어요.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본 것 같고 귀로 들은 것 같고 손으로 만져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요한 1서 밖에 없거든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일언이 폐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걸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거는 사도 요한만이 할 수 있는 소리야. 우리가 암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목청이 터지도록 애를 써도 알아지지 않아요. 사도요한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만져보았고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여기 이 말씀이요. 주목하고 라는 이 말씀이 우리나라 말에는 단순히 주목이라고 쓰여 있는데 외국어 성경에는 그걸 여러 가지로 표현을 했어. 일본말 성경에 보면 스라스라 라는 말을 표현해 썼는데 그 스라스라 라는 말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근사하게 표현을 했다. 아주 눈이 뚫어지도록 닳아지도록 조용히 상고해 봤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걸 예수님에 대한 걸 그렇게 해 보니까 그건 틀림없이 손으로 만진 바인데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되었으니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이 사도 요한이 여기서 증거 하는 것은 아주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고 체험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보고 이건 틀림없이 진리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았어. 사도요한이, 우리가 우선 거기까지만 놓고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걸 얼마나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예수님이라는 이름만 불러가지고는 안 되어요.
약간 좀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물만 조금 찔끔거리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나 같은 걸 위해서 피를 흘리셨어. 그러고 조금 마음에 감동만 느끼는 그 것 까지고도 안 되어요. 이것은 뒤집어놓거나 제 껴 놓거나 자기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가 되어서 분리시킬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빠져버리면 사도요한 자신도 없어져 버리게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이 그런데 그 요한이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제일 많이 말 했지요. 그래서 사도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부르지요. 그것은 살아생전에도 예수님을 제일 가깝게 따라다녔다. 그러지 않았어요? 또 언젠지 예수님 그 유대나라 풍속에는 밥을 먹을 적에 한사람이 이렇게 밥을 먹으면 그 다음 사람은 여기 가슴에 기대고 이렇게 비스듬히 않아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언제든지 예수님의 품에 앉아있는 것처럼 되어있어. 예수님이 걸어 다니면 이렇게 품에 안고 다니셨겠죠? 가슴에다 이렇게 어찌되었든지 예수님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많이 지냈어. 그런데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을 참으로 알지 못했어요. 사도요한이, 그래 중간에 보면 가끔가다가 엉뚱한 실수를 많이 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이가 80-90세나 되가지고 그 밧모섬에 가서 귀양살이도 하고 그 에베소 교회에 가서 그 어려운 그 에베소 교회가 큰 교회이고 험상 진 교회거든요. 거기 가서 눈물 콧물 많이 흘려보고 그러고 인제 그때 가서야 조금씩 예수님의 사랑이 알아졌어.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그 사도요한이 마지막에 강대상에 설교할 때 이렇게 말을 많이 안 했답디다. 기운도 없어서 너무 늙어서 이기도 했지만 그냥 이렇게 손을 벌리고 다 쓰러져가는 태도로 올라서서 서로 사랑하라 한마디만 하고 그만 뒀어요. 그래 그게 큰 감화를 줘가지고 마음을 자극을 줬다는 건데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을 하니깐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그러니까 요한1서에 가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저는 처음에 여기서 시간이 나면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 멋대로 마음대로 만들어 가지고 믿으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그걸 좀 제 나름대로는 지식을 총 동원해서 그걸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사도요한의 말을 빌리면 그것도 쓸데없는 짓이야.
그냥 사도요한더러 말하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한마디로 그렇게 말하고 그쳤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동시에 체험도 보통 체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들이 사랑화 해버려야지. 그래서 뒤집어 놓고 봐도 제 껴놓고 봐도 그 사람 속에는 사랑 밖에 없다는 것이 흘러 나와야지요. 우리가 말로든지 생각으로든지 행동으로든지 사랑의 법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야해. 가령 우리가 쉽게 말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대로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뭐 어쩌고 아주 노래들도 잘하지 않습디까? 그것이 그대로 구비 되어 있어야 돼. 그대로 그 조건들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그렇게 되어버렸어야 인제 조금 사랑화 해진 사람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어. 이제 그렇게 변해져야 우리 자신이, 제가 오늘도 느꼈습니다만 제가 외손녀딸이 두어서넛 있습니다. 그런데 꽤 할아버지를 따르는 것 같아요. 마음으로, 그런데 오면 큰 손주 딸은 조금 나이가 먹어서 조금 떨어져 않아서 얌전을 뺍니다. 그리고 둘째하고 셋째는 서로들 여기에 와서 인제 그런데 나는 이걸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걸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야 어떻게 해야 좋을 런지 말로도 이렇게 해도 안 되고 그래서 나는 그 애들이 오면 얼떨떨해요. 아 이건 사랑을 받기는 받아야하고 사랑을 주기는 줘야 할 텐데 어떻게 줘야할지 참 딱해요. 이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그대로 온전히 상대편에다가 전해주기도 어렵고 보여주기도 어렵고 이 사도요한쯤 되면 아주 확실하게 보고 듣고 손으로 만져본 거라고 하거든. 만져본 것이다. 인제 그때 가서야 말씀에 대한 걸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조금 우리가 사랑에 대한 것을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때 가서, 그러니까 우리생활이 그렇게 아주 사랑으로 전체가 그냥 녹아져 버렸으면 우리 사랑이 녹아져 버렸으면 그럼 그때 가서는 사랑을 말할 수 있지요. 사랑을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말씀이 태초에부터 있었다. 하는 것을 거꾸로 올라가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먹은 거야.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면 사랑에 대한 것을 지금 자꾸 예로 들었지만 어떠한 덕목을 들어놓고 봐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덕목이 풍성하게 성숙 되어가지고 있는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거야. 다시 말하면 온유 겸손 겸손하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해지는 사람은 뒤집어놓고 봐도 제 껴놓고 봐도 길게 펴도 겸손이야. 겸손밖에는 없어. 그 사람 속에는 도저히 혈기 날 교만이 붙어있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겸손해. 그런 사람은 겸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이런 사람은 어디 설교할 사람 있겠소? 몰라요. 다른 분은 할 수 있을 런지 몰라도 정말로 내가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체험한 사람이에요. 겸손을 온유해져야 하는 것도 절제에 대한 것도 인내에 대한 것도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그 열매를 풍성하게 갖으라고 그러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가지라. 성령의 열매는 온유와 겸손과 절제와 인내와 양선과 자비와 모두 그런 것인데 그러면 인제 그 중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이어서 견주어서 생각을 해볼 때 절제라든지 인내라든지 그거 한 가지 만이라도 우리 안에서 익어들어 가면 사실은 그런 거지요. 많이들 말씀하는 거지만 아무 덕목이라도 좋아요. 친절이래도 좋고 절제라도 좋고 인내라도 좋고 한 가지만 완성되면 다른 건 저절로 다 완성되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은 말씀에 대한 건 이것 다르고 이 것 다르고 그런 법이 없어요. 가만히 조금만 명상해 보면 알아져요. 진리는, 진리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곧 진리라고 그러시는 것이 그렇게 일생동안 또 씹어보고 생각을 해봐도 아주 저는 모르겠네요. 예수님이 어째서 자기는 진리라고 그러셨을까? 물론 예수님은 거짓이 없으시니까 진리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진리라고 그러실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예수님 안에는 모든 하나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그랬지요. 사도바울은 아주 그걸 강조했거든요. 그 안에는 모든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그전에 여기 광주 나중에 목사가 됐지요. 그 처음에 장로 일적입니다. 김 요한 장로라고 아주 성경 잘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어디 가서 그렇게 성경을 잘 공부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잘은 모르겠는데 아주 참 성경에 도사야. 도통을 했어.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의례 이런데 와서 이야기 하려면 아무데나 한군데 읽어 보시오. 그러면 누가 아무데나 이렇게 에베소 33장하면 1절부터 읽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풀어나갑니다. 풀어나가면 꼭대기로 창세기까지 올라가고 아래로 묵시록까지 내려가고 아주 그냥 뭐 절수 외우는 거라든지 도통한 양반이에요. 그런데 그 양반이 그 이야기 할 적에 보면 하나님의 빛에 대한 거 이야기 하면 빛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데도 하루 종일 서서 그냥 나중에는 얼굴이 환해지고 광채가 나도록 그냥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그래도 끝이 없어요. 끝이 없어. 그래서 확실히 저 양반은 말씀을 체험한 사람이다. 말씀을 말씀에 도통한 사람이로구나. 그런걸 알 수가 있었어요. 그 전에는 그런데 그분 제자들이 몇 분 있지요. 광주에도 그런데 그 말씀이 자기 속에 와서 그렇게 아주 화해져 버리도록 그렇게 된 데는 일생을 걸려도 어려웁디다. 대개 보니깐 그런 사람은 결점이 없느냐하면 그래도 결점이 나타나. 그러니까 완전히 뒤집어 봐도 제 껴 봐도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고 결점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을 아직은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널리 다니지 못했으니까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본 중에 이 현필 선생님이 그렇게 좀 근사한 사람이다. 그렇게 보여 졌으니까 그 분을 따랐지요. 그 분은 아주 생활이 말씀대로 사는 양반이다. 하는 걸 내가 이야기는 드문드문 했지만 또 하고 싶어요. 제가 맨 먼저 왜 이 현필 선생을 왜 따랐는지 알겠소? YMCA총무로 있을 때 가만히 그 양반을 보니까 성경 말씀대로 사는 양반 같아요. 제가 이 현필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이공 어른도 잠깐 뵈었지요. 이 공 어른도 잠깐 뵈었는데 이공 어른도 말씀대로 사는 분이라고. 그런데 이 선생을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무서워지지는 않습디다. 처음에 그 이공 어른은 처음에 보면 무서워요. 제일 무엇 때문에 내가 무서워했는가 하니 그 양반은 말씀 한마디 이렇게 성경에서 깨달으면 그대로 사는데, 그대로 실천으로 옮기는데 그게 무섭더라니까.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이 땅위에 어디에 있겠소? 성경에, 아이고, 저 양반 그렇게 그런데 이 선생님도 가만히 보니까 말씀을 그대로 생활로 옮기는 분이야. 뭐 조그만 거 하나도 가령 좋지 않은 예가 나오지만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셨지요. 입원을 하고 계실 적에 거기 현 동완 선생이라는 양반이 훌륭한 양반 이지만 또 한쪽으로는 짓궂은 양반입니다. 제가 서울 올라가서 이 선생을 이야기 좀 했지요. 그래 정말일까? 그런 사람 있을까? 내가 한번 가봐야지. 그러고 광주를 처음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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