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 무 이야기 205

새덕장에 무청 널기 : 이현필선생 소평전

농장 북향에 새덕장을 여름에 설치했는데 처음으로 무청을 설계와 시공을 한 큰아들이 와서 지도해 주고 있다. 을 남원 동광원에서 가져왔는데 저자를 확실히 몰라 밝히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현필선생 소평전 이현필 생애 해 간추림 1913년( 1세) 2월3일(음1912년 12월 28일) 출생 1018년( 6세) 서당에서 학어집 추구 등 한문교육 1923년(11세) 소학교 입학 1928년(16세) 소학교 5년 중퇴 1929년(17세) 영산포로 이사 1930년(18세) 영산포의 관파 교회 출석 1932년(20세) 광주농업실수학교, 확장주일학교, 독신전도단 1933년(21세) 신안 압해도 교사 1934년(22세) 서울Y 영어학교 1935년(23세) 중촌 귀향 사립학교 교사, 이세종선생을 만남 1937년(25세) 신안..

월동무 또 작업 : 우리들의 스승님

혹한과 폭설로 무가 조금 상했다. 마른 밭 부터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 본래 치자가 있던 밭이다. 동광원 수녀님의 글을 올려본다. 우리들의 스승님 그 분과의 첫 만남은 1944년 인 듯하다. 화창한 봄날 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큰 올케언니가 애기씨 하고 불렀다. 집에 예수 잘 믿는 선지자가 오셨다했다. 집에를 빨리 갔다. 건너 방에를 가보니 테도 없는 중절모에 조끼도 없는 맨 저고리의 한복차림의 옷은 남루했다. 나의 첫말이 ‘잘 믿는 선지자 십니까’ 했다. 돌아보시지도 않고 아무런 답변도 없으셨다. 그리고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날로 가셨다. 그때 서재호 집사님과 동행하셨다. 그 후에 여름에 밤에 한번 다녀가셨다. 그때 일제 신사참배 문제로 활발히 낮에 다닐 수가 없었던것 같아 밤으로 만 활동하신 것 ..

월동무 첫출하 : 성모님의 큰 기쁨의 노래

계묘년산 월동무 첫출하가 혹한과 폭설 속에 가까스로 준비되어 첫출하를 하였다. 늦게 핀 노란장미를 꺾어 거실에 두고 본다. 고드름과 빗물통이 꽁꽁 얼었다. 김춘일 수녀님이 쓴 성모님의 큰 기쁨을 소개한다. 성모(聖母)님의 큰 기쁨의 노래 ○○○ 2004년 11월에 정년 은퇴(隱退)하시고 개천산(開天山)에 오셔서 기도(祈禱)하고 계시는 심상봉 목사(牧師)님께서 금년 2005年을 성모송(聖母頌)을 외우고 명상(瞑想)하는 해로 정(定)하자고 하셨다. (눅1;28) 천사가 나타나 ‘은총(恩寵)을 가득히 받으신 아가씨 기뻐하십시오.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하셨고 (눅1;45) ‘너는 믿었으니 참으로 복 있구나.’하고 엘리사벳이 축복해 주었다. (갈2;19-20) 믿음이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

첫눈이 내리다 : 제자가 스승에게 받은 필담

삼일 연속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하여 내리고 있다. 금년 겨울 들어 첫눈은 이렇게 시작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첫눈이 낭만적이지만 농사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반가웁지 않다. 비를 맞아가며 무를 실내로 옮겨 포장 작을 하고 있다. 눈을 덮어쓴 무는 눈이 녹아야 작업이 가능하다. 오늘은 스승이 후두결핵으로 누어계실때 필담을 받은 스승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현필 사부님의 교회관 (후두결핵으로 말씀을 못하실 때) 필담으로 1956...✞ 형제를 새로이 뵈오니 마음이 희망에 찹니다. 거짓만 꾸미는 세상에 진실을 찾아 물불가리지 않고 용왕맹진한 젊은이를 또 만나니 마음이 한없이 든든합니다. 부디 참고 또 참으시사 겸손으로 순종을 배우십시오. 한 사람 인격은 태산보다 더 귀합니다. 금으로 쌓인 태산보다도 참 인격을..

겨울 장마인가? : 황홍윤 어머니의 고백

겨울 날씨답지 않계 바ㅣ가 자주 내린다. 월동무 출하를 위해 외부 일군들을 얻어 작업을 해봐도 진도가 나가지 못한다. 손주들이 많이 자라 해외에 자주 나간다. 인사차 다녀갔ㄱ다. 시래기 덕장 진입로 보수 공사를 굴착기를 빌려 하루 했다. 동광원 김춘일 수녀님이 황사모님의 글 두편을 올린다. ✞황홍윤 어머니의 고백 남편의 가는 길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부인은 할 수 없이 큰집으로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은 조금만 고생하고 참고 있으면 돌아올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일각이 여삼추와 같이 지루하고 외로워 더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었다. 중매한 형부 백영흠 목사를 찾아가 울면서 원망을했다. 그때마다 형부 목사는 ‘괜찮아 괜찮아’라고만 했다. 애증은 하나라는 말과 같이 그립고 보고 싶은 애정의 감정은 미움의 감..

큰밭 월동무 작업 : 이세종과 무교회

큰밭 월동무 수확하다가 비가 와서 지장이 되고 있다. 무를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무청도 덕장에 널다 중단 되었다. 금년산 울금을 출하하려고 포장을 하고 있다. 유인호씨의 논문 일부를 올려본다. 엄두섭에 의하면 이세종은 이 동산교회에서 3년이나 설교를 했다고 한 다.32 또한 이세종은 등광리의 자신의 산당에서 주로 가정예배 형식의 예 배를 드렸다.33 당시 등광리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산당에서 홀로 혹은 제자들과 함께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이세종이 활 동하던 당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은 화순 지방의 안학수와 한국의 젊은 평신도 지도자들, 특히 김교신을 비롯한 여러 무교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세종은 이들과 같이 평신도 로서 성경을 가르치며 독자적인 성경..

월동무 작업 시작 : 오직 은총으로

당근 수확을 마치고 월동무 작업에 들어갔다. 예년 보다 일주일 빠른 것 같다. 덕장에 무청이 걸리고 규격미달 품은 가공을 한다. 산다화가 곱게 피었다. 덩굴 잡초 제거를 못해 주었는데 그래도 꽃을 예쁘게 핀다. 오직 은총으로 (동광원 사람들/정원장님 설교) 이 글은 1971년 3월 18일 선생님 추모일에 정인세 원장님께서 계명산에서 이현필 선생님에 대해 설교하신 말씀입니다. 꽃이 피고 잎이 피는 3,4월이 되면 우리들의 영육을 사랑하셔서 피와 살이 마르도록 염려하며 사랑해 주셨던 이미 고인이 되었던 선생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이 되면 누가 모이라는 것도 아니고 이날을 무슨 날로 정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이 그리운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모이면 서로 이현필 선생님에 대하여 생각도 하고 한마디씩 말씀을 합니..

추분 다음날 월동무 : 김준호 선생 증언 한토막

날씨가 조석으로 서늘하다. 낮 기온도 내려갔다. 그런데 벌레들이 어림무 잎을 먹어치운다. 생태계는 조화로운데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동광원 김준호 선생 증언 한토막을 올려본다. 저는 동광원은 고아원이니까 모두 집에서 공부하고 찬송배우고 성경배우고 그러는데 도망가는 애기들 거지지요. 이 선생님이나 정 원장님이나 모든 어른들이 걱정이 되어 얻어먹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느냐? 그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저를 다리 밑으로 보냈어요. 얻어먹는 아이들도 우리의 애기들인데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거기서 애들 데리고 살아라. 그래서 동광원에서 못살고 내뺀 애기들 때문에 제가 다리 밑에 가서 한 10년 더 살았지요. 애기들하고 같이, 애기들하고 같이 거기는 별별 사람이 다 오니까요. 밤중이면 섬에서 열다섯 살 먹은..

추분 3일전 월동무 : 사회복지 귀일원

구웡 장마가 이직 끝나지 않았다. 포장은 젖어있는 상태다. 낮 기온은 30도 가까이 이른다. 어린 무 포장에 친환경 농약을 살포해 준다. 이현필 선생 탄생 100주년에 귀일원에서 기념식 에 올린 자료를 올려본다. 사회복지법인 귀 일 원 ○ 설 립 정 신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돌보는 정신. ○ 설 립 배 경 1944년 이현필 선생이 남원 지리산 자락 서리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작은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여순사건으로 인한 1949년 전남 화순 도암 청소골에서 고아 8명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1950년 광주를 중심으로 뜻있는 인사 70명이 설립한 동광원의 고아 600여 명을 공동체 가족이 주축이 되어 돌보고, 광주 시내를 배회하는 고아, 걸인,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