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장작 패기와 무우 심기 : 정귀주 어머니

mamuli0 2024. 9. 28. 14:20

 목포 치과에 들려 디아코니아에 다녀왔다. 다음날 곡성에서 아들들이 내려와 장작을 만들어주고 갔다. 월동무를 심는 중이다.

 귀일원 60년사에서 옮기 정귀주 어머니를 소개한다.

 

 

정귀주(1901~1984)

 

청소골 고아원에서부터 진도분원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정귀주와 함께한 조정은은 정귀주를 ‘대쪽 같은 분, 철두철미하신 분, 엄격하시나 자애로우신 분’으로 평한다. 이현필이 청소골에서 고아원을 시작하면서 ‘일어나시오. 불쌍한 아이를 도와서 키우십시오.’ 하니 즉석헤서 ‘예.’하고 옷가지를 챙겨 청소골로 가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결단력 있는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청소골의 고아원이 한때 나주 방산으로 옮겨가는데 그 곳이 당시 나주 다도면 면장인 정귀주의 동생 집이였으며 또 다른 동생은 현재 광신대 정규남 총장의 장인 고 정기오 광주중앙교회 목사다.

 

 

정귀주는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과 정한나와 더불어 동광원의 3여걸로 불린다. 정귀주와 정한나는 본래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교인들이였으나 이현필을 만나자마자 그 인품에 동화되어 그의 제자가 된 이들이다. 그녀는 해방전 이현필이 능주교회에서 설교할 때 감화를 받은 자로 1947년 봄부터 이현필 정한나등과 함께 남원지역 복음을전파하는데 앞장 섰다. 이들의 전도로 여러 사람들이 서리내와 갈밭으로 모여들어 오늘날 동광원수도공동체의 모태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나주 남평교회 목사로 청소골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 엄두섭 목사는 ‘맨발의 성자’(113쪽)에서 ‘정귀주 보모는 고아원 애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부르는데 얌전하게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무릎위에 얹고 앉은 고아들이 부르는 노래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이는 정귀주 보모로부터 잘 지도를 받은 고아들의 모습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청소골 고아원 보모를 거쳐 6.25전쟁 후 지산동 시절에는 사감 역할을 했으며 이후 먹는 문제가 최대 현안이었던 방림동 동광원 시절 정귀주는 식구들에게 배급을 주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 묵묵히 수행하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반겨 하지 않은 진도 분원의 책임을 맡게 되면서 조용한 곳에서 수도하고 싶은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신앙인으로서 의 정귀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녀의 글이 ‘맨발의 성자’ 168쪽에 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은 ‘도(道)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 섬에 와 수도하면서 진도(珍島)가 진도(眞道)가 도려면 마음 하나 올 바라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반듯해야 한다. 몸이야 어디 가든지 어디 있던지 다만 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다 가는 것뿐이다. 이 변변찮은 나를 이 날까지 인도하시고 참 길 가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시다. 이제 내 마음이 진도(眞道)가 될 때에 그것이 곧 성도(聖道)를 걷는 일이다. 진실한 성도가 되어 살리라.하고 자기의 참 길을 찾았음에 감격하였다. 정귀주는 이현필 공동체 살림살이에 있어서 맏언니이자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여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