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추석을 앞둔 구월의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광주 소화에서 손님이 다녀갔다. 울금 꽃이 만개했다. 울금밭에 물을 주고 있다.
동광원 계명산 수녀원을 창설한 한나 어머니가 능주교회 출신인데 우리나라 기독교 아버지 이수종 선생이 옥과 출신임을 알고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강의를 올린다.
아래글은 나무위키에 나오는 정경옥교수에 관한 글이다.
정경옥(鄭景玉, 1903. 5. 24~1945. 4. 1)[1] 은 감리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전남 진도군 진도면[2] 교동리 123번지에서 출생했다. 진도소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며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다. 출옥 후 상경하여 서울YMCA 영어과를 수료한 후, 1923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士大学)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2학기 개강을 앞둔 그 해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사건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편입하고 1927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7년 9월 도미,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 있는 개렛(Garrett)신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미국 사상계를 휩쓸던 자유주의 신학자 롤(H.F. Roll)의 지도를 받아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석사(B.D) 학위를 받았다. 1929년 9월 계속하여 같은 지역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로 1931년 5월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하여 박사 과정을 밟으려 했으나, 모교의 부름을 받고 1931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조직신학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편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3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정교수가 되었으며, 1937년까지 협성신학교[3] 교수로 재직하면서 명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다.[4]
그는 교수 취임 이후 강의에도 주력했거니와 집필에도 힘을 기울였다. 협성신학교 교지인 〈신학세계〉의 주간을 맡으면서 1932년에서 1936년에 걸친 5년간, 무려 60여 편의 신학논문을 발표했고 한 권의 저서(《기독교의 원리》, 1935)를 내놓았다. 이 외에도 YMCA에서 발간한 〈청년〉지, 류형기 박사가 주간으로 펴낸 〈신생〉지에 여러 논문과 일기, 수상, 설교 등을 발표했다.
한편 열정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된 그는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년간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이 기간중 그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설교집 《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와 조직신학 개론서인 《기독교신학개론》(1939)을 집필하였다.
요양을 마친 후 1939년 모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가, 1941년 3월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던 중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요양하게 되었다. 1942년 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이후 한국인 친미파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친미파로 지목되어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여기서 일제는 그에게 일본적 기독교의 논리적 구성을 강요하였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논리와 문장이 유독 어려운 "일본적 기독교론"을 쓰게 된다(이 논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국 일본적 기독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천배, "고 정경옥 교수의 편모", 〈기독교사상〉, 1958. 5). 이 공로로 풀려난 그는 1943년 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특히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토"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자기 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5년 3월, 두 차례나 수술받은 복막염이 악화되어, "곧 날이 밝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그 해 4월 1일, 불과 광복을 4개월여 앞두고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42세,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언명하였듯이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의 주된 저서에서 즐겨 인용한 신학자들은 역시 슐라이어마허, 리츨, 바르트 등이다. 특히 "위기의 신학"(1932), "위기 신학 사상의 연구"(1936) 등에서 바르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한편 성서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당시 고도로 발전되었던 역사적, 문학적 비판연구를 채택했다. M. 디벨리우스와 R. 불트만의 형식 비판연구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한 이도 바로 정경옥이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역사나 과학적 지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성서가 인간의 책이요, 종교문학에 속하는 것이라 했다. 즉 한 민족과 개인이 하나님을 찾고 이에 복종하는 생활의 경험을 역사, 율법, 편지, 시가 등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성서이기에, 마땅히 문학적, 역사적 연구 등을 통해 그 진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어떤 통일된 신학체계나 학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롭게 형성해 가는 것이 개신교의 원리라고 보는 신학적 경향이다. 이런 점에서 정경옥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또한 그의 신학적 공헌은 무엇보다도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원리》 서론의 요점만을 간추려 보면, 그는 먼저 조선 감리교회의 교리적 특질을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는 종교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선교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전자를 경건주의라 한다면 후자는 복음주의다." 또한 "교리는 구원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아니한다." 즉 감리교 교리적 선언은 우리가 믿는 바를 선언한 것이요, 결코 우리 교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교리적 경험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는 결심뿐이다." 누구든지 경건한 삶을 영위하는 이상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 자유를 옳게 인정한다."
-저서:《기독교의 원리》, 감리교신학교, 1935;《그는 이렇게 살았다》, 평양애린원, 1938;《기독교신학개론》, 감리교신학교, 1939;《감리교교리》,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39;《신비경험의 가치》, 삼각산기도원, 1939.
참고 자료 : 이수정 마가복음 번역본
『마가전복음서언해』
[ 瑪加傳福音書諺解 ]
분야
종교/기독교, 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시대
근대/개항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16년 12월 15일
출처
디지털동작문화대전-『마가전복음서언해』
목차
정의개설편찬/간행 경위서지적 상황형태구성/내용의의와 평가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개항기 한글 복음서.
개설
『신약마가젼복음셔언imagefont』[이하 『마가전복음서언해』]는 수신사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이수정(李樹廷)이 번역한 쪽복음서이다. 미국성서공회의 기록에 따르면 1885년 2월에 일본 요코하마[横浜]에서 6,000부[영국성서공회의 기록에서는 1,000부]가 인쇄되었다고 전해진다.
편찬/간행 경위
『마가전복음서언해』의 번역자 이수정은 1882년 수신사[일명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자 농학자였던 쓰다 센[律田仙]과의 교류 중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했다. 1883년 4월 일본 동경(東京) 로게쓰초 교회[露月町教会][일본기독교단지교회(日本基督教団芝教会)의 전신]에서 세례를 받아 일본 내 최초의 조선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이수정에게 당시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는 한글 성서 번역 사업을 제안하였고, 이수정은 이에 응하여 1884년 한문 성서에 이두식으로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85년에는 4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을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한 『마가전복음서언해』를 완성하여 간행했다. 1885년 4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조선에 입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으며, 이들은 이수정의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를 수정하여 1887년에 개정판 『마가의 젼imagefont 복음셔언imagefont』를 간행하였다.
서지적 상황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본 『마가전복음서언해』의 표제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imagefont’이며 난외제(欄外題)는 ‘마가젼복음서’이다. 크기는 22.0㎝×15.1㎝이며, 판식은 4주쌍변, 무계, 행자수는 11행 29자, 무어미, 신연활자로 인쇄되었다. 책의 본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되어 있으며, 세례, 그리스도, 예수 등의 고유명사는 밥테슈마, 크리슈도스, 예수쓰와 같이 헬라어 원음을 따라 한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주요 단어는 한자로 표기되어 있으며, 오른쪽에 한글로 음을 표기하였다.
형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본 『마가전복음서언해』의 표지는 훼손으로 인해 보존처리 된 상태이다. 표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imagefont’의 글자의 일부가 훼손, 망실되었으며, 4침으로 개장되어 있고, 배접이 되어 있다. 본문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구성/내용
누가복음 1장 1절부터 21장 25절까지의 내용이 번역되어 있다. 누가복음은 루카(Luke)가 예수의 탄생부터 부활을 기술하여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쓴 복음서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과 함께 4복음서로 불린다.
의의와 평가
『마가전복음서언해』는 조선인이 단독으로 번역한 최초의 성서번역본이자 일본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 성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점에서 전통적 지식인을 향한 전도까지 염두에 두고 번역된 성서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1882년 심양 문광서원에서 간행한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 등의 한글 성서와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특히 한자를 언해하며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것은 한글화 과정에서 특이하고 중요한 변화 과정을 내포하고 있어 국어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기초 자료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한편 『마가전복음서언해』는 최초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에 들러 국내로 가지고 와서 선교를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세계 기독교 선교사상 선교사가 선교지의 언어로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이것이 최초이기 때문에 교회사적 측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후 『마가전복음서언해』는 로스역 성서들과 함께 1900년대 성서번역자회에서 새로운 한글 성서로 간행한 『신약젼셔』의 발간에도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하여 2016년 12월 15일 문화재청에서는 대한성서공회 소장본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를 국가등록문화재 제670호로 지정했다.
참고문헌
『방언학 사전』(방언연구회, 태학사, 2003)
『한국기독교박물관 상설도록』(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04)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기독교 자료 해제』(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07)
『2016년도 문화재위원회(근대문화재분과) 제6차 회의록』(문화재위원회, 2016)
김양선, 「Ross Version과 한국(韓國) Protesranrism」(『백산학보(白山學報)』 3-3, 백산학회, 1967)
이만열, 「특집1 : 한국초기교회의 성경번역 ; 한글어 성경 번역의 초기 역사와 한국 교회」(『장로교회와 신학』10, 한국장로교 신학회, 2013)
전승민, 「이수정의 『신약성서마가전(新約聖書馬可傳)』과 『신약마가젼복음셔언imagefont』의 대조 연구 : 구결의 현토 양상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오용섭, 「초기 개신교 한글 성서와 찬송가」(『사회과학연구』 11-1, 인천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8)
「국내 최고(最古) 한글성서본 발견(종합)」(『연합뉴스』, 2009. 11. 26.)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문화재 등록예고」(『연합뉴스』, 2016. 12. 20.)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http://museum.ssu.ac.kr)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http://www.aks.ac.kr
이수정
[ 李樹廷 ]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42년(헌종 8) ~ 1886년(고종 23)
성격
개신교인
출신지
전라남도 곡성
성별
남
저서(작품)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
대표관직(경력)
최초 한글성서 번역자, 조선말기 개신교도
목차
정의개설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개항기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서 『현토한한신약전서』를 간행한 개신교인.
개설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의 한 사람. 전라남도 곡성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병규(李秉逵)이다. 가계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왕족의 먼 친족으로 전해지나, 일설에는 평창이씨(平昌李氏)인 천주교도 이승훈(李承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종 친정 후 유력자로 떠오른 민영익(閔泳翊)과 깊은 교분을 맺었는데,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피신시킨 공으로 왕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농학자 안종수(安宗洙)와도 절친한 사이로서, 안종수의 권유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 보호의 공로 등으로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일본 체재 중 안종수가 소개해 준 당대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쓰다[律田仙]와 교분을 가지고, 쓰다로부터 근대적인 농법·법률·우편제도 등을 배웠다.
그러던 중 쓰다의 방에 걸려 있던 한문으로 쓰여진 족자 가운데 성서에 나오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읽고 그 내용에 감명받았다. 그 뒤 쓰다의 인도로 한문성서를 탐독하다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같은 해 성탄절날 쓰다의 안내로 기독교예배에 처음 참석한 뒤 1883년 4월 29일 동경 노월정교회(露月町敎會)에서 일본주재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녹스(Knox, G.W.)의 입회하에 목사 야스가와[安川亭]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신자가 되었다.
한편, 세례를 받은 뒤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대표해 주고 있다.
기독교에 입교한 뒤 한글성서 번역사업에 착수,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Loomis, H.)의 권유와 협력에 따라 먼저 한문성서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다.
이어서 순한문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를 번역했는데, 이 한글성서가 1885년 4월 처음 입국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와 아펜젤러(Appenzeller, H. G.)에게 주어졌다. 이 밖에 몇 편의 교리서를 번역하고 한국 문학과 천주교 관계 저서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1883년 12월 13일 미국에서 발간되던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의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 외국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1884년 7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 맥클레이(Maclay, R. S.)를 김옥균(金玉均) 등과 만나게 하여 입국을 실현시켰다.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내한에 앞서 간단한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 한국 개신교 수용에 교량적 구실을 다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1886년 귀국 뒤에 수구파의 음모에 휘말려 처형된 것으로 전하여진다.
참고문헌
「이수정의 인간과 그 활동」(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77)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http://www.aks.ac.kr
[네이버 지식백과] 이수정 [李樹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비 : 사랑의 용서(화순 장태방죽 이야기) (1) | 2024.09.23 |
---|---|
추석 지나고 : 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 된 김준호 (5) | 2024.09.18 |
월동무 해충 잡기 : '맨발의 성자' 이현필 (0) | 2024.09.08 |
백로 전날 : 고난의 은총 (0) | 2024.09.06 |
풀베기와 월동무 파종 준비 : 김준호와 무등원 (1) | 202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