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에 심은 월동무가 올라온다. 석산이 날씨가 더워서인지 이제야 올라온다. 지난해 심은 무우로 벌레를 유인 포획하고 있다. 추석이 지나는데도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들깨 꽃이 피었다.
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 된 김준호
안기석 기자
동아일보 2006년 7월 28일
맨발로 밥을 빌어먹으면서 걸인들의 친구가 되고 폐결핵에 걸려서도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김준호 씨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다.
그가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까지 걸어온 삶은 쾌락과 안락과 좋은 음식과 화려한 의복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닌다더라’ ‘농사지으며 길쌈을 하는 등 먹거리와 입을 것을 자급자족한다더라’ ‘평생을 채식하면서 독신으로 살고 쥐나 이도 죽이지 않는다더라’ ‘병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다더라.’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11월 10일 풍문으로만 듣던 ‘기이한 삶’의 주인공을 만난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100년은 넘어 보이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우뚝 서 있는 귀일원의 작은 방에는 고승처럼 생긴 한 노인과 청년처럼 혈색이 좋은 또 다른 노인이 큰절을 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맞아들였다.
고승처럼 생긴 노인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닌 오북환 장로(吳北煥·92)였고, 혈색이 좋은 노인은 김준호 선생(金俊鎬·75)이었다. 이 두 노인의 현직을 구태여 따지자면 오 장로는 귀일원의 이사장이고 김 선생은 귀일원의 이사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들과 지체인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가족처럼 모여 사는 공동체다. 지난해 최우수 정신요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 두 노인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자선사업가들인가? 귀일원이 생긴 독특한 내력을 살펴보면 두 노인이 단순한 의미의 자선사업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엄두섭 목사가 쓴 『맨발의 성자(聖者)』란 책에는 거지와 병자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이라는 사람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현필씨는 직후에 동광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수도자들과 이들이 돌보는 과부, 노인, 고아, 걸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는데 동광원이 이런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동광원이 바로 귀일원의 전신이다. 지금도 종교계에서는 귀일원보다 동광원으로 불린다.
64년에 타계한 이현필 씨의 제자는 전국에 50명 정도 되는데 경기도 벽제, 전북 전주·남원·장수, 광주광역시, 전남 화순·함평·진도·비금도·보길도 등지에서 순결 청빈 순명 정신에 입각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구도 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자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독신으로 살며 살생을 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약 대신 자연적으로 치유하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오북환 장로는 이현필 씨의 친구이자 제자이며, 김준호 씨는 이현필 씨가 가장 아끼던 수제자다. 동광원 공동체의 족보를 따지자면 이현필-김준호로 이어지는 셈이다.
김준호 씨가 스승인 이현필 씨의 인품에 마음 깊이 사로잡힌 것은 23세 때였다. 전남 해남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던 중 밤에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곳이 수동교회(해남읍교회)였는데 이곳에서 이현필 씨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현필 선생님과 오북환 장로님이 추운 겨울 새벽에 오셨는데 머리를 깎고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바지저고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양말도 신지 않았더군요. 종교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마치 머슴 같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강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하시는데 꽃병에 든 국화꽃을 보고 선생님은 몹시 떨리고 슬픈 목소리로 ‘꽃은 핀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봐야 합니다. 앞으로 꽃을 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는 공부를 포기하고 일생을 이분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준호 씨는 이현필 씨를 만나러 무작정 광주에 갔지만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이현필 씨를 만날 수 없었다. 김 씨는 광주에서 거지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중 광주YMCA에서 이현필 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준호 씨는 그때부터 이현필 씨의 문하생이 됐다. 입문식은 밥을 빌어 오는 일이었다.
“6·25전쟁이 나기 전이었을 겁니다. 비가 장대처럼 죽죽 내리는 날 아침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보고 밥을 빌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맨발로 근처에서 잘사는 듯이 보이는 부잣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앞에 서서 큰소리로 ‘밥 좀 주세요’라고 외쳤어요. 한참 뒤에 새댁이 나와 밥을 주기에 빈손을 벌였더니 놋그릇째 가져가라고 해요.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새댁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밥을 들고 선생님께 돌아왔더니 선생님은 맨발로 나와 저를 맞으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이 밥은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때 선생님이 밥 먹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 밑의 물고기를 건져라’
이현필 씨는 김준호 씨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걸인 한 명을 스승처럼 붙여줘 같이 다니게 했다. 탁발 생활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며 제자에게 말보다 실천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이현필 씨와 김준호 씨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어보면 마치 옛 선승들이 선문답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김준호 씨가 광주 시내의 다리 밑에서 10여 년간 거지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이현필 씨가 던진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동광원의 단조로운 공동체 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나가버린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겨울이 닥치자 이현필 선생님은 그 아이들이 걱정이 됐는지 ‘상류를 빠져나간 물고기는 하류의 다리 밑에서 건질 수 있을 터인데…’라며 독백하듯이 말씀해요. 저는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부랑아들과 함께 살라는 말로 들었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동광원을 나와 광주 시내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동냥도 하고 이들이 병에 걸리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던 김준호 씨는, 마치 가톨릭의 데미안 성인이 나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처럼 폐결핵에 걸렸다. 이현필 씨는 김준호 씨를 동광원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스승은 제자를 직접 간호했지만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쓰지 않는 데다가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니까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동광원 공동체가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었다.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순회 강연을 다니고 틈나는 대로 제자를 간병하던 이현필 씨도 마침내 후두결핵염에 걸렸다. 서울의 아현동 굴다리 밑에서 사는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희망해 서울에 올라온 이현필 씨는 어느 날 김준호 씨를 서울로 불렀다.
“아현동 굴다리 밑 걸인을 시켜서 굴비를 사오게 하더니 물에 넣어 끓이게 해요. 그리고 그 국물을 당신의 입속에 넣게 하셨어요. 제자 앞에서 파계를 선언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병으로 아픈 제자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스스로 파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주에 있는 제중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갔더니 저도 함께 입원을 시키더군요. 그리고 한 달 뒤 선생님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가 다시 육식을 금하고 수도 생활과 강연 활동을 하시다가 6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무등산의 폐병 환자들과 살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김준호 씨는 광주 무등산에서 움막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한 폐결핵 환자들은 이승의 마지막 쉼터로 무등산을 찾았다. 김준호 씨는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임종을 지켜봤다.
“움막은 계곡물이 흐르는 근처에 여러 개 지었어요. 이들이 마지막 소원인 물을 실컷 먹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염이 된다면서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극진히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신선한 물을 마시다 보니 병이 완쾌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무등산에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무등산에 있는 움막은 무등원이라는 환자들의 공동체로 변했습니다.”
김준호 씨는 정부가 폐결핵 환자 요양소를 세우기까지 20년간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동광원 공동체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며 보냈다.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수도 생활에 전념하며 가끔씩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구도자들을 만나러 나온다.
스스로 새처럼 산다는 김준호 씨는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스승인 이현필 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준호 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현필 씨의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그라고 입을 모은다.
신의 말씀에 따라 자연과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에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채 독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냐’ ‘자식이나 손주가 없어 노년에 쓸쓸하지 않으냐’는 우문에 김준호 씨는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돈은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와 생활했던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고 손주들입니다.”
이 기사는 <[특집] 한국의 기인ㆍ괴짜 10인 열전>이라는 연재글의 하나로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안기석 기자가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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