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두번째 방문 공생원 : 애양원을 꽃피운 복음의 씨앗

mamuli0 2024. 5. 13. 16:17

 세째네와 공생원을 다시 찾아갔다. 마침 이일행 사무국장님이 안네를 해주셔서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미쳐 알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을수 있었다. 원에서 만든 '사랑의 묵시록'도 담아왔다.

 

 

애양원을 꽃피운 복음의 씨앗

 

지난 선교사 열전 13에 소개했던 유진 벨 선교사의 교회 개척과 선교사역의 열매 배경에는 의료선교사 오웬의 헌신과 동역이 뒷받침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일대에 수피아 고등학교와 기독병원(제중원) 등 선교사 마을을 이루고 오늘날 광주 전남지역에 믿음의 토양을 이룬 데는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오웬 선교사의 역할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죽음이 오늘 날 애양원을 꽃피운 복음의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에 복음의 울림이 되고 있다.

 

미국 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오웬

 

오웬은 1867년 7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나 햄든 시드니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에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1896년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897년 미국 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5일 남장로회 선교사 2진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됨에 따라 1898년 유진 벨 선교사가 목포선교의 개척 선교사로 결정되면서 오웬 선교사도 여기에 합류하게 된 것.

 

의사였던 오웬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호남지방의 선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오웬은 한국에 오자마자 유진 벨과 함께 목포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1899년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식 의료소인 목포 진료소를 세워 병자들을 돌보며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을 진행해 나갔다.

 

또한 오웬은 그 이듬해 12월 제중원의 올리버 에비슨 박사를 돕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 조지아나 휘팅과 결혼 가정을 이뤘다.

 

휘팅은 오웬과 결혼식을 올리고 남장로회 선교부로 소속을 변경했다. 오웬은 의료 경험이 풍부한 휘팅과 결혼함으로 더욱 힘을 얻어 그의 사역은 풍성해져 갔다.

 

파란 눈의 신의 복음을 전하다

 

처음 유진 벨의 임시 주택에서 시작된 진료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오웬은 치료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기에 가난한 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는 진료소에 기독교 서적을 배치해 병 때문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했고, 약봉지에는 한글로 성경 구절을 써서 나누어 주었다.

 

비록 처음 목포지역이 복음 전도에는 배타적이었지만 의료선교를 통한 사업만큼은 많은 사람의 호의를 얻고 그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팔 기회를 주어졌다. 나아가 치료를 받은 자와 가족들은 더욱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던 오웬은 목포지역에서 신의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는 의료선교와 복음전도를 긴밀하게 연결해 더 큰 효과를 내었다.

 

1900년 가을에 오웬에게 세례를 받은 김윤수는 목포 경무청의 총순(현재의 경감)으로 일하던 관리로 주조장을 소유한 목포지역의 실세였다.

 

그는 어머니 손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인 오웬을 찾았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다. 김윤수는 자신만 믿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을 비롯해 어머니와 장모까지 교회로 인도하였다.

 

1902년 집사로 임명된 김윤수는 이듬해 목포교회당 건축공사 때에 총감독을 하였으며, 프레스톤이 도착했을 때 그의 어학 선생을 맡기도 하였다.

 

이렇게 복음을 듣고 회심한 김윤수는 1904년 광주 선교지부 설치를 위해 선교사보다 먼저 광주에 가서 선교사들의 집을 지었으며, 1912년 광주북문안 교회에서 장로임직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김윤수는 훗날 광주 선교사역과 나환자 사역에 크게 기여한 최흥종을 전도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전남 일대에 뿌린 씨앗, 복음 사역

 

1904년 12월 유진 벨과 함께 광주 선교지부를 개설한 후 오웬은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가,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복음전도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광주, 해남, 완도,보성, 나주, 고흥, 화순, 광양 지방을 지칠 줄 모르게 순회하며 복음전도에 전력을 다했다.

 

주로 강진에서 순천과 여수, 구례에 이르는 전남 동부지역에 복음전파를 위해 애를 썼다. 그를 통하여 광주 송정리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의 광주선교부 사역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기후와 풍토에 적응해 가는 중에 몸이 쇠약해졌다.

 

1909년 3월 22일, 아직 쌀쌀한 날씨 속에서 오웬은 남쪽의 도서지방을 순회하기 위해 다시 광주를 출발했다. 남평과 화순 그리고 능주를 거쳐서 1주일 만에 장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날 밤 오웬은 고열에 시달리면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놀란 그의 조사와 성도들은 허둥지둥 가마를 빌려서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삼일 밤이 걸려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광주 기독병원 원장이었던 윌슨은 오웬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히려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윌슨은 목포에 있던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에게 급히 광주로 와 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오웬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계속 악화되었으며 4월 3일 토요일 밤 10시 45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오웬의 장례식은 4월 6일 화요일에 프레스톤의 집례 아래 치러졌으며, 그는 광주 양림산 언덕 선교사 묘원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님’이란 존칭 없이 ‘오목사’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서 이 땅 백성들에게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섬기다 42세라는 너무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이후 양림산 언덕에는 23인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다. 그의 부인 휘팅 선교사는 광주에 남아 네 딸을 키우면서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신입 선교사들의 정착을 도우며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하니 이 가문의 한국 사랑이 대단하다.

 

오웬기념각(광주유형문화재26호)은 오웬 선교사와 그의 할아버지 윌리암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내 준 돈으로 1914년 건립되었다.

 

오웬 선교사의 뒤를 이은 쉐핑(서서평) 선교사가 이 건물에서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를 시작했고 간호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곳은 한국 의료선교역사의 큰 꿈이 시작된 요람이기도 하다. 그 건물을 지금은 기독간호대학교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 알의 밀알 애양원의 시작

 

광주 선교지부 묘지에 처음으로 자리 잡은 파란 눈의 신의 오웬은 갔지만, 그는 호남 선교에 거룩한 씨앗을 남겼다. 특히 오웬의 병과 죽음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사에 유명한 애양원이 출발하였다.

 

열병에 걸린 오웬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전보를 받은 포사이드 역시 배를 타고, 말을 달려서 광주를 향해서 부지런히 오고 있었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길가에 쓰려져 있는 여자 나환자를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포사이드는 말을 세우고, 그 여자 나환자를 말에 태운 후 자신은 걸어서 광주진료소로 왔다. 하지만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친구의사 오웬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포사이드가 광주에서 데리고 왔던 여 나환자도 결국엔 몇 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외면한 나환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최홍종이 충격을 받아 지금의 애양원이 시작되었다. 최흥종은 포사이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나환자들마저 사랑으로 품는 모습을 통해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광주로 밀려드는 나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지금의 광주시 봉선동의 자신의땅 1,000평을 기증하여 나환자 수용소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나병원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1926년에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현재의 여수에 그 터를 잡아 애양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다.

 

최흥종은 오웬과 포사이드의 삶과 신앙을 보고 나환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돌보면서 애양원을 섬겼다.

 

 

 

https://youtu.be/gf1-MN5f5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