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기차마을 장미축제에 큰아들내외와 다녀왔다. 지난해 보다 별차이가 없는듯 했으나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이 덜했다. 놀이공원과 동물농장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고달에 있는 벼논에 들려 집에 돌아왔다. 저녁에 동악산 형제봉 아래 곡성레제에서 청년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오북환 장로님의 '온전한 십일조'를 올려본다.
온전한 십일조
1987.3.19 오북환 장로
함께하고 힘써 마음을 떼어서 하나님께 돌리면, 여기까지가 사람이 할 일이에요. 작고 작은 것이라도 행여 정을 붙일까? 행여 정을 붙일까? 그전에 정을 떼려고 했는데 돌아가서 정을 붙일까? 어머니 젖은 진작 떨어졌는데 또 가서 어머니 정을 요구하는 것은 젖을 먹으려는 것 아니야? 정을 붙일까? 크게 하고 힘써 마음을 떼어서 작은 것에 떼어서 하나님께만 돌려버려, 하나님께만 정을 돌려버려, 바쳐버려.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요. 하나님만 사랑해요. 하나님께 돌리면 주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자기 할 일은 안하고 도움만 주시오. 하고 떼를 쓰는 것은 안 된다는 거야. 자기가 여기서 받은 것을 전도하러 가야하지 않아요? 여기서 새로 받았다고 그런 용기로 가야지 무슨 일만 가서 도와주라. 그러면 자기가 없으면 그 집회가 안 되는가? ‘제가 없어도 다 하지요.’ 그렇지요. 다 하는데 그냥 조건 무조건 아무 이유 없이 갈수는 없으니까 집회핑계도 되지만 가서 돕는다. 그런 핑계가 목적은 아니라고, 목적은 아니고, 그 영적 교제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 그것이 목적이에요. 그런데 의례 결례로 규정되어 있으니까 차례다. 해서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무슨 모임을 갖으나 마나 똑같은 모임을 뭐 하러 가져요? 밤낮 배워도 도로 잊어버리고 도로 잊어버리고 그런 것을 뭐 하려 하냐고? 시간낭비 아니냐고? 내 공부가 되니까 자꾸 하지요. 그 말이에요. 여기 집회 안하면 나는 놀아야 되요. 내가 인제 공부하지요. 이런 것도 내 공부지만 또 이런 시간 안 가져도 저는 공부가 밀려있거든요. 가져도 공부, 안 가져도 공부 다 공부뿐이에요. 이제 오라할 때까지 공부할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이만큼 들었으면 다 정리해도 시간이 없을 건데 자꾸 가짜니까 그래서 물어본 것 아니에요. 무슨 배울 필요가 있는가? 공부를 조금이라도 시간을 가졌으니까 무엇을 새로운 것을 받았는가? 그건 말한 사람은 알아보고 싶을 것 아니냐 그거에요. 왜 물어보냐고, 어떤 반응이 있어야 말이 새로운 것이 되지요.
경애양이 문제를 내놓으니까 자꾸 안 되어요? 십일조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만 한 가지 조건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글자로도 그렇게 되어있어요. 십일조(十一條)의 조자가 조목 조(條)자 거든요. 법률상 몇 조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니까 법에 걸린다. 그런다고, 몇 조에 이 말을 보면 그건 법에 안 걸린다. 법률을 변호사들 재판할 때 법률책 보고 재판하지 않아요? 몇 조에 이런 법에 걸린다든지 몇 조에 보면 그건 안 걸린다든지 그래 재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질 조건이 무엇이냐 말이야. 따먹은 것이 조건이야.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 조건이야. 그러니까 인제 순교하려면 죽는 거지요. 완전히 바치는 것, 십일조 내는 것은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면 십일조 낸 거예요. 온전한 십일조거든. 말라기 3장 10절에 있는 말이거든. 연보는 장려 안한다고 하나 그 말하는 것이 벌써 장려야. 자기를 바쳐야지, 자기를 바치는 거지. 그러면 완전히 바쳐버리면 다 하나님의 것이 되요. 가정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의 가정이지요. 가정이 교회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요. 바치니까 어디로 없애버린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라기 3장 구약으로는 맨 끝장이고 끝 권이거든요. 공동번역에는 4장이 없어요. 3장으로 끝이야. 4장은 6절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3장으로 붙여버렸어. 절수가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가 그런 거예요. 10절인데 7절서부터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 말이지요. 돌아오라.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돼. 돌아가지도 않고 뭐 돈 좀 냈다고 된 거야.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이 돌아오신다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면 마음을 떼어 놓으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면 그 말이야. 돌리면 똑같지 않아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하나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하도다. 어떻게 해야 돌아 가리이까? 돌아가는 길도 몰라. 예수님이 길을 가르쳐 줬지요.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대주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수가 없다. 예수님이 길이라면 예수님 같은 생활을 해야 되겠어요? 안해야 되겠어요? 예수님이 길인데 예수님이 길이라면 그 길을 가려면 예수님의 생활, 몸소 생활로 몸으로 나타난 생활 본받아야지요? 어디 예수님이 혼인 했어요? 안 했어요? 안했지요? 그걸 본받으려니까 독신으로 산다는 것이 옳지 않냐? 더 잘하는 일 아니냐? 또 혼인했더라도 인제 깨달았으면 남매같이 사는 것이 옳은 거란 말이야. 베드로는 혼인했어도 바쳐버렸으니까 자녀도 없고 자녀가 있더라도 바쳐버렸지요? 다 자녀가 있다는 말은 없지만 그러니까 혼인 했다 거니 안 했다 거니 깨달으면 바쳐버리는 것이 십일조에요. 십일조, 주를 위해서 살아, 주님의 몸을 위해서 살아, 바쳐버리고 살아, 그러면 평안하다. 문제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돌아 가리이까? 하도다. 하나님이 어째 하나님의 것을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주의 것을 도적질이 무엇이에요? 사람이 주님의 것을 어떻게 도적질 합니까? 그러니까 말도 근사하지 않아요? 자기를 바치지 않고 내 아내다. 내 남편이다. 내 자식이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 아내만 되어야지, 다 바쳐버리고 예수님이 남편이시니까, 어제 안 봤어요. 고린도후서 11장 2절 보란 말이야. 예수님이 남편 아니요. 신약으로 또 마태복음 25장 1절서 13절까지는 신랑 비유했지 않아요? 열 처녀 해가지고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가 있어서 신랑을 맞았단 말이야. 그러면 슬기 있는 다섯은 기름은 예비했단 말이야. 기름을 예비했으니까 신랑을 맞으러 갈 때까지 캄캄한 밤에 등불을 환히 켜고 맞으러 갔어요. 기름 예비 못한 미련한 처녀는 성령 못 받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밤에 갈수가 있어야지. 아 너희들것 좀 나누라고 팔라고 아이 나눠줘 버리면 우리도 못 들어간다. 파는 자한테 가서 사라고 사러간 동안에 만나버렸어. 미련한 처녀는 예수 못 만났어요. 신랑마지 못했어요. 처녀는 처녀라도 독신이라도 성령 못 받으면 신랑 되신 예수를 못 맞이한다고 성령 받아야 되요. 기름 예비해야 되어요. 캄캄한 밤에도 환하게 등불을 밝힐 수 있어야 되요. 그것이 성령이야. 세상은 다 캄캄한데 등불이 있으니까 넘어지지 않고 환하게 간다고 빛이 없을 때 넘어지지 빛이 있는데 넘어지겠어요? 그러니까 다 예수님의 아내가 되어야 할 텐데 아까 안 읽었지요? 고린도전서 11장 2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려는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훈계한 선행이 여러분을 오직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한 남편인 그리스도 남편은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순결해야 예수님의 정배가 된다. 신부가 된다. 순결해야 되요. 깨끗해야 되요. 세속 사마리아 여인같이 남편이 여섯이나 그렇게 그대로는 안 되거든. 여섯이나 있었어도 예수를 만나고 회개해서 예수님까지 일곱이 되지 않아요? 물동이 내어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니까 본 남편도 다 초월한 것입니다. 꼭 남편이 여섯이나 있었는지 그것은 모르는 것이고 비로 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다 무엇이 남편이냐? 의지하면 다 남편이야. 거기다가 의지하는 것이 남편이야. 정 붙이는 것이 부친이고 아버지같이 의지하는 것이 아버지도 되고 남편도 되고 한다. 호세아 2장에서 봐요. 구약에는 여러 군데 있지만, 호세아 2장 7절에서 봅니다.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죄인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에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으리라. 본 남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또 이사야 54장 5절 6절에 있습니다. 비교해 볼 데 가요, 본 남편에 대해 또 신약이면 이사야 54장 1절은 신약에는 갈라디아 4장 27절에 있어요. 54장 1절의 말씀을 거기에 인용했습니다. 애를 낳지 못한 처녀들은 행복하다. 남편이 있는 자의 자녀보다 남편이 없는 자의 자녀가 더 많다. 그랬어요. 어디라고 그랬지요? 갈라디아 4장 27절, 대저 기록되었으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야, 어째 석녀라고 그랬습니까? 돌 석(石)자에요. 돌 석자 석녀(石女), 거룩할 성(聖)자 아닙니다. 애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석녀 돌계집이야. 돌계집 석녀야. 기뻐하며 산고를 모르는 자야. 소리를 높여 해산의 고통을 몰라. 육체에 해산을 애를 배어 본 일이 없으니까 잉태도 안했으니까 해산 고를 산고를 모르는 자야. 소리를 높여 환호할지어다. 기뻐할지어다. 대저 혼자 있는 자가 남편 있는 자 보다 더 많은 자녀를 가질 것이로다. 이사야 54장 1절이 되어요. 그러면 남편은 5절 6절은 하나님이 남편이라. 호세아 2장에는 더 세밀히 있거든요. 본 남편이 11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또 19절 20절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게 장가를 오신답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남자도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남편이시니까 장가들어 영원히 사는데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귀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진실로, 육정으로 아닙니다. 음탕해서 하나님이 음탕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3절까지 보면 2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날에 내가 응하리라.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대답한단 말입니다. 응하는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또 이것들은 이스라엘에 임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위에 심고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귀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들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낸 백성이라 하리니 저는 내 아버지시다 하나님이시다 주는 내 아버지다 하리라. 그랬단 말이야. 하나님이 우리 남편이라는데 말입니다. 아까 고린도후서에도 그랬어요. 11장 2절 읽어봐요. 고린도후서 11장 2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려는 나머지 마음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킨 것입니다.’ 한 남편이에요. 그리스도 한 남편, 그걸 믿는 거예요. 한남편이 중요해. 그것이 복음 운동이고 복음 중심이에요. 그러나 교회를 상대할 때는 농촌 교인 교회를 상대할 때는 그런 말 못해요. 자기들이 성경을 보고 깨달아야지, 증거 하는 사람이 그 내용을 확실히 믿어야지요. 믿고 생활로 보여야지요. 묵시 14장 3절 ‘저희가 보좌와 그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렵혀지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가운데서 보석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 했다. 공동번역에는 숫총각이라고 했지요? 숫총각 처녀는 숫처녀라고 하는데 숫총각 정절이 있는 자라 정절이 있는 자야. 여자들로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숫총각들이에요. 정절이 있는 자들이라고 숫총각이라고 그랬지요?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다녔어요. 그래야 돼.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야 돼. 사람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요,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들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야. 그것으로 알 수 있단 말이야. 믿는 것은 바로 믿는 것은 어린양에게 속해있냐? 세속에 속해있냐? 세상 따라 가냐? 세상 따라가는 것은 아직 바른 믿음이 아니라고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 그랬어요.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시골교회서는 제가 믿는 교회서는 강력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동서도 제사에 저기해서 안 나온대요. 그러니까 전도는 안 되지요. 전도가, 그러니까 안 되어요. 지내라고 장려할 것 없어도 그것은 죄라고 지적을 말아야 되요. 하늘에 성의를 바치는 것이고 선조의 좋은 뜻은 추모하는 것이니까 그건 정성껏 하라고 해야지요. 음식을 금한다고 그것은 제사 음식만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면 되지 않아요? 안 먹으려면 그러나 그 먹고 안 먹는 것은 제사 음식 아니에요. ‘아현동 시절에 김 목사님의 조언을 받았을 때 철저히 제사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먹지 말라고 금할 것은 없어요. 스스로 안 먹으면 되지 사랑을 위해서 안 먹을 수도 있고 사랑을 위해서 먹을 수도 있고 그것을 초월 해야지 되어요. 법에만 걸려서는 안 되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법도 모르는 사람도 법에다 꽉 매어놓으니까 꼼짝도 못해 그것은 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는 사랑이 나타났으니까 율법은 폐한 것이에요. 다시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내놓으면 안 된다고 전도를 하려면 더군다나 그것은 안 되어요.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되요. 권장도 말고 금하지도 말고 아까 시간에 만화는 애기들에게 보여야하냐 금해야 하냐? 이런 문제라고요. 좋다는 뜻으로 보게 해야 한다는 수가 많습디다. 수가 많은데 하나는 이렇게 말합디다. 정도에 따라서 나이가 어느 정도에서는 좋고 또 어느 정도에 가서는 수박 겉핥기가 되니까 그런 때는 조금 어느 정도 부모가 억제해야 한다. 그런데 못 가게 할 때는 못 가게 할 때는 거짓말로 뭐 다른 것 사먹겠다고 돈 들고 가서 본다고, 한번 보는데 50 원이라든가? 백 원도 내고 빌려다보면 백 원 낸다던가? 그런데 어떤 데는 그런다고 합디다. 만화책을 쟁여놨더라고 아 장사도 아닌데 뭐 이렇게 책을 많이 쟁여놨냐고 부모들이 사다준 것이라고 만화가게에 가면 더러운 것 보고 안 봐야 되는 것 보니까 거기 못 가게 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가서 좋은 것만 골라다가 미리 가기 전에 사다가 집에서 보라고 그래서 많다고 하데요.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참고하고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면 좋다고 억제하는 법이라는 것은 법이 생기면 더 보고 싶어 하는 반발적인 생각이 나와 버려. 법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용에 가서는 반발심이 속에서 커가지고 있어요. 그러다가 어느 기회가 되면 툭 터져버려요. 그러면 변통이 된다고 그러니까 지금 남녀공학 안 할 시대에는 좋았지만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밖에 되어있어요. 그래야만 된다고, 스스로 깨닫게 억제하는 법으로 말고 자기가 스스로 깨달아서 보일 수 있도록 그렇게 자유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발전이 되어가요. 자기 성격에 맞는 대로 할 것이고 부모 욕심에 맞도록 자녀를 가르칠 수 없어요. 자녀에게도 다 타고난 개성들이 있으니까 알아서 살려줘야지. 그러니까 부모들이 더 머리가 열려야 돼. 자녀 교육이 암만 법이 금해도 부모들이 다 가르치는 대로 되는 것이거든. 꼭 부모한테 배운 대로 하는 거예요. 말로 안했지 말은 안했어도 행동으로 다 봤단 말이에요. 부모의 행동에서 다 봤어요. 그러기 때문에 다 자녀들이 그대로 되는 거지요.
인간 테레사 이웃 에 대해서 41페이지입니다. 공동체 수녀들에 대한 이탈이 있습니다. 이탈, 화를 피하라. 그 말이야. 공동체 수녀들에 대한 이탈, 자아이탈 모든 주위 환경에서 이탈 공동체 수녀들에 대해서 이탈해, 테레사 수녀는 공동휴식 시간에 자신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아닌 뜻이 안 맞아요. 그렇게 맞는 동료가 아닙니다. 우호적이 아닌 자매들 중에 그녀의 짝을 골랐다. 나하고 꽉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니라 조금 안 맞는 사람하고 그것이 공부에 좋거든요. 딱 맞는 사람은 공부는 못해요. 좋기는 우선 좋지만 안 맞아야 지적해 주거든. 공부하는 사람은 안 맞는데 가서 공부할 수 있고요. 딱 맞는 사람하고 공부 잘 안된다고, 표면 겉으로는 좋아요. 그렇지만 공부하는 데서는 자기가 깨달은 것은 서로 안 맞는 것이 드러나야 하거든. 그러니까 결과가, 결과가 좋으니까 이렇게 하지요. ‘안 맞으면 결과가?’ 그러니까 결과를 알아요. 어디가 결과야? 언제가 결과야? 다 떠나버릴 때 과정을 마쳤으니 졸업을 해야지, 그러면 학교를 6년 마쳐도 거기 있어야 되어요. 초등학교 6년 마쳤으면 졸업해야지 거기에 있어야해? 또 새사람이 어떤지 결과를 우리가 몰라. 지금 생활이 그때가 그때라면 결과가 어디에 있소? 죽은 뒤에나 나타나지. 그런데 겉으로 보면 순리적으로 떠난 것 같지 않지요. 아니야, 순리가 아니라도 자기들이 순리가 아니지, 자기 인간성이 안 맞으니까 자기 순리가 안 맞는 거지. 하나님 앞에는 섭리인데 어쩔 거야? 율법에서 순리가 될 리가 없거든. 그것은 껍데기일 뿐이지 율법과정은 그것은 마친 것 아니야. 그러니까 인제 다시 거기에 들어가기 까지는 어디가든지 그 과정은 거기에 있거든. 테레사가 공동휴식 시간에 자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 아닌 자매들 중에 그의 짝을 골랐다. 그들을 애정에서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고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에서도 그랬지만 동시에 아무런 위로도 마음으로 추구하지 않으려는 원도 있었다. 사람이 짝을 맞추면 서로 위로를 받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취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소화 테레사는 자기가 그 인정적인 사랑을 안 받으려고 안 맞는 사람을 골랐다고, 또 자기도 그런 정을 주지 않아. 영혼으로 사귀려고 그런 것이에요. 아무도 마음으로 위로를 취하지 않으려는 원도 있었다. 테레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기쁨을 두려는 자신의 결심에 충실하고 싶었다. 동무들에게 친구들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고 이성을 하나님께만 쏟으려고 그 사랑을 받지도 않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바쳤다. 하나님께만 기쁨을 두려는 자신의 결심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리고 객실에서도 언제나 그러한 태도를 취하였다. 1889년 10월 15일경에 테레사는 헬레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낼 수 있었다는 마음을 이해한다. 자기언니에게 편지 쓴 내용이 나와요.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우리의 삶이 우리 생활이 끊임없는 희생이 되고 사랑의 순교가 되게 하자. 언니에게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일입니다. 세 가지 조목이 있는데 하나는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원이 있어요. 첫 번째는 사람이 할 일이고, 가운데는 두 번째는 그분은 예수님은 말입니다. 우리의 단 한 번의 눈길, 한 번의 눈길 우리는 눈길이 어디로 향할 때 무엇을 위해서 사냐? 그거에요. 무엇을 보려고 가냐?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면 그 사람의 얼굴을 마음속에 예수님을 만나러간 것이에요. 그 사람의 얼굴만 보러가는 거예요. 보통 얼굴 보러 가지요? 마음 보러가지는 않거든. 그런데 여기는 그 얼굴을 보러간 것이 아니야.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 역사를 본다고 예수님의 마음을 보러 간 거란 말이야. 저 사람이 예수님이 어떻게 나타나실까? 그걸 보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분은 우리의 단 한 번의 눈길, 단 한 번의 숨길, 숨 쉬는 것 까지 숨결이 그분만의 것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분만의 것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이에요. 이 원하는 것을 알아야 쓰겠어요? 몰라야 쓰겠어요? 믿는 사람이면 알아야 쓰겠지요. 그분의 원을 맞춰야 하겠지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 무엇을 어떻게 맞춰드려요? 그러니까 이것 써 놓으라고, 책에 있든 없던 써놓고 외워라. 예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소화 테레사는 그런 점이 투철해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 그래서 성녀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7장 3절에 무엇이 영생이냐?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 그랬다고, 벌써 아는 것은 영생이 없이는 못 받지 않고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통하지 않고는 모르거든요. 서로 관계가 밀접하다는 거예요. 아는 것이 아무개 친구인가 나 얼굴만 알지 마음은 모르네. 우리들 사람들은 보통 암만 같이 살아도 몰라요. 속에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분은 우리의 단 한 번의 눈길 쓰려면 써요. 첫째부터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랬습니다. 우리의 삶이 생활이 끊임없는 희생이 되고 끊임없는 희생이 되고 사랑의 순교가 되게 하자. 언니한테 이렇게 편지한 겁니다. 순교가 사랑의 순교가 되게 하자. 예수님의 원을 알았어요. 둘째는 그분은 우리의 단 한 번의 눈길 단 한 번의 숨결이 그분만의 것이기를 그분만의 것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바로 예수님의 것이 된다는 거야. 눈도 예수님의 눈으로 써요. 또 숨결도 예수님의 숨결이야. 똑같게 예수님이 속에 계시다고 또 숨결이 그분의 것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분 뜻을 거스리는 눈길이나 숨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또 여기 둘째로 우리 사람이 할 일인데요. 우리 삶에 대한 것인데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순간은 깜작이에요. 순간순간들이 두 번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이 잠깐 잠깐들이 말이지요. 순간순간들이 그분만을 위한 것이 되게 하자.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 곁을 피조물은 우리 사람도 들어갑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 되게 하자. 그러니까 사람들이 불교에서는 그러지요.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저기서 오고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가다가 옷자락이 닿아도 인연(因緣)이라고 했어요.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이 되게 하자. 다 썼으면 경애 양 읽어요.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우리 삶이 끊임없는 희생이 되고 그분은 우리의 단 한 번의 눈길 한 번의 숨결이 그분만의 것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랬어요. 그분만의 것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또 그 다음에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들이 잠깐 잠깐 위한 것이 되게 하자.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 되게 하자. 성경 읽을 때 공동번역 읽을 때는 하느라고 쓰여 있으니까 그대로 읽어야지. 또 그전 습관대로 하나하나 하나님이 하나 두 개인가? 늘 한분만 계신다고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건 너무 저속해 하느님 그대로 공동번역이니까 신구 합동해서 구교 신교 한 하나님을 믿는 거니까 성경을 공통하자. 그래서 공동으로 번역 했으니까 읽어야 할 것 아니요? 엄 목사 수도원에서도 공동번역을 본다고 저번에 하시더니 안보시데 그런 것은 이렇게 이렇다 고집하는 것이 틀려요. 공동으로 보자고 약속했으면 무조건 하나 되자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데 자꾸 아니다 하는 것은 갈라지는 것이거든. 이것은 아니다. 나만 옳다 하면 갈라져. 그러니까 파당이야. 다 옳다고 시인해 줘야해. 배척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돼. 다 하나님 믿는 건데 그 사람은 그것이 옳다 생각하니까 그렇게 이해해 주고 용납을 해야지 아니라고 배척해 버리면 자기도 아니거든. 자기 아닌 것이나 확실히 깨달아지면 가능하다. 다른 이들 아니라고 말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 다음에 여기 놓인 것도 강원도 이런 것 공부하면 늦게 왔어도 다 앞서버려요. 이제 왔으니까 그러지 말고 바로 들어 가버리면 오히려 먼저 믿는 사람은 습관이 들어가지고요. 얼마 안 고쳐집니다. 그러니까 초보 처음에 바로 들어가 버리면 쉽게 가버린다고. 길을 잘못 들어버리면 그것 돌이키려니까 시간이 더 결려요. 그것이 고집이 되어가지고 깡깡 굳어져서 고쳐지지 않아요. 그것이 쉬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사람이 하는 일인가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하세요. 벌써 어렵다 하면 내가 하려니까 어렵지 그러니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하려고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지 하나님이 하시는데 나는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하나님이 하세요. 안되지요. 못하지요. 마음을 깨야 적은 일에서라도 작고 작은 일에도 마음 정붙이지 말고 뚝 떼어다가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내게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마. 그랬지 않아요? 아까 그러고 보니까 덜 봤네. 그것 보고 10절까지 안보고 말았네.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그랬는데 공동번역에는 하나님이라고 그것도 벌써 안고치려고 하는 것이 벌써 고쳐보려는 생각이 없다는 증거가 되어버려. 일 년 성경공부 네 차례인가 다섯 차례인가 해버린 사람도 저번에 보니까 도로 그 하나님 그 습관이 꽉 채워놔서 안 고쳐져. 무엇이라고 하든지 좋기는 하나 고쳐보려는 마음이 없어. 그런 것도 못 고친다는 거야. 말라기 3장 8절에 다시 봐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갈까 하도다. 돌아가는 것은 정을 떼는 일이라니까 화를 피하는 일이에요. 히브리 6장 18절 말씀같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그랬거든, 하고도 그 도적질이 무엇인지 몰라. 다 도적질 했는데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은 인류 역사가 그것 아니냐 말이야. 지금도 따먹고 있거든.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어요. 하나님의 정배가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다 이제 깨달았으면 하나님께 몸을 바쳐야 할 텐데 말이야. 도적질 하고도 그 말이 있어요.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내 물건 가지고 달라는 줄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 사람은 예수님의 정배만 되어야 할 텐데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하나님이 남편이시니까 우리는 그 황후가 되어야 한다. 황후 왕비가 되어야 한단 말이야. 주의 것을 도적질 한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그랬지 않아요? 헌물, 십일조와 헌물이라. 그러니까 열 칸에 하나 그것만 안 바쳤다. 그것 도둑질했다. 그것만 생각한단 말이에요. 10절 봐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다. 온 나라가 온 나라가 십일조 안낸다는 그 말이에요. 그럼 신약에 와서는 다 바치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마음까지 생각과 뜻과 목숨까지 다 바치라고 했어.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음으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는 데는 한 군데 뿐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데는 신구약 통 털어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한데는 여기 한 군데 뿐이라고, 그래 무엇이든지 완전한 십일조, 완전히 바치라는 것입니다. 열 칸에 하나 바치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자기를 바쳐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부모가 따먹어서 나를 낳았고 내가 또 따먹었기 때문에 자녀가 있고 그러니까 예수로 십자가 그것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지어야 할 조건이 그 한 가지 뿐이에요. 그래 십일조라 그랬어요. 예수님이 십자기 져야할 한 가지 조건은 따먹어서 그랬다고 정욕 따라가서 그래요. 따먹으면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랬거든. 그래 예수님이 죽는다 그 말이에요. 그러므로 나를 시험하여 시험하라는 것은 완전히 바쳐보라는 거예요. 시험하라는 것은 뭐예요? 시험해 보라는 말은 무슨 말이라고요? 시험해 보라고 벌써 잊어버렸어? 완전히 바쳐놓고 보라고 마음에 평화가 있나 없나 보라고,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놓고 모든 염려 다 송두리째 바쳐버리고 생활해 봐라. 어떤가? 평화가 있나 없나? 그 말이라니까요 또 물어봅니다. 나를 시험해봐라. 그 말은 무슨 말이라고요? 예수님의 왜 십자가를 졌냐 하는 이유를 깨닫고 자기를 바쳐버려. 깨달았으면 그것이 회개에요. 그것이 회개야. 음란을 버린 것이 회개이거든요. 묵시 2장 21절이요.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 하는 도다. 그 음행을 회개하는 것이 회개에요. 다른 것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음행을 회개하라. 도적질 하는 것을 깨닫고 이제 도적질 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순결하게 살아라. 그 말이에요.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그 말입니다. 침소를 더럽히면서 회개했다. 안 될 말이라고 회개가 아니에요.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마음에 넘치는 복이에요. 그 복을 바울사도가 체험했습니다. 어디에 했어요? 고린도후서 6장 10절이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창고가 넘치지 않소? 모든 사람을 넘쳐서 부요하게 한단 말이야. 자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실질적으로는 그러나 모든 사람을 모든 것을 갖은 자로다. 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몸 하나 뿐인데 몸도 자기 것 아니지요. 내놔버렸으니까 그런데 모든 것 영적인 것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영적인 것으로 부자가 되게 해요. 영적인 부자에요. 강원도 어머니가 빈손으로 오셨지요? 오셨지만 영적으로 부자가 되었어. 신령한 것 많이 봐. 빈손 뭐 가지고 왔으면 부자가 못된다고, 가난해 빈손으로 왔으면 마음에 싹 비워버리고 왔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풍부히 받을 수 있어요. 또 성경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꼴찌가 되고 꼴찌 된 자가 먼저 된다. 앞선다. 그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여러 군데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왔다. 그러지 마시고 앞서게 하신다. 그 말을 믿고 자꾸 공부하면 앞서게 하신다고.
아까 그 자리, 수도자들에 대한 이탈 42페이지입니다. 아까는 무엇이 이탈을 해? 공동체 수녀들에 대한 이탈이고 여기는 수련자들에 대한 이탈이에요. 조금 더 고상해가지요. 수련자 수련자니까 믿음의 단련기간 수사들이라면 수련자들이거든. 수사들이고 여기는 지도 받는 사람들이야. 수련자들에 대한 이탈, 1893년 테레사는 수련자들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지워지자 즉시 그 일을 하는데 어떤 위험이 있음을 깨닫는다. 즉 이 새로운 소임에서 자기 맡은 책임에서 오는 수련자들과의 갖은 접촉 접촉하지 않겠어요. 접촉은 애정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채우려 하지도 않으려는 위험, 스스로 채우려 할지도 모르는 위험입니다. 애정이요, 지도 받는 사람에게 그 애정 사랑 애정적인 사랑은 안 받으려고 하는데 그걸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요. 잦은 접촉은 애정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채우려 할지도 모른다. 그거야.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르니까 지금 현제 결심은 아주 굳은 결심이라 할지라도 그때 가서는 시험에 빠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여자들 까지 아니에요. 남녀 사이라면 더 어려운 문제이지요. 수련자들과 갖게 될 내적 애정을 스스로 채우려 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다 취해야 하거든요. 접촉을 자꾸 끊어버리면 우선은 끝으로는 안 받지요. 애정 받을 필요가 없고 끊어져 버리지만 지도해야 하니까 접촉을 해야 하지 않아요? 이 문제가 이 선생님 지도 방법을 이해 못 하는 거야. 밤중에도 제가 무등산에 있을 때 밤중에 한번 내려와 가지고 따로 자는데 오라고 그러신다고 그러니까 갔는데 지도받는 여자와 이 선생님이 밤중이거든요. 그러고 있는데 내가 이 선생님 인격을 믿지 않는다면 저 사람이 저럴 수가 있냐 말이야. 단단히 오해할 형편이거든요. 사실은 시험해 보는 것이거든요. 이럴 때 네가 어떻게 보느냐? 젊은 여자, 그 지도받는 여자거든요. 그러니까 나를 오라고 해놓고 그것 뭐요? 그건 믿음이란 말이야. 서로 믿어. 이 선생님 인격을 내가 의심하고 그랬다면 단박에 가서 소문내 버리지요. 그러나 그것을 인격을 나는 못 믿어도 믿으니까 나를 시험으로 보는 것이지 그분이 시험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거든. 털끝만큼도 의심이 안 들어요. 그럴 때 이 선생님이 믿어지지 않으면 누구든지 의심하겠다.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 사람의 직접 문제가 아니라 환경에 다른 사람을 깨우치는 방법도 되지 않겠냐? 그거에요. 제게 대한 교훈이지요. ‘그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바로 볼 것이고 그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의심할 것이라 그 말이지요?’ 그 인격이 믿어지면 예수 믿는 것은 그만두고 그 사람이 직접 신임이 되면 당연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교육상 지도상 그런 필요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조건은 몰라도 그렇게 믿지, 아 무슨 욕구가 채우려고 저랬다.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다고요. 나 같으면 위태롭지요. 나 같으면 빠지지요. 그분이야 빠질 분 아니다. 그렇게 믿어진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함부로 해도 좋다. 그것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내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 그런 시험 아니겠소? 당사자들이야 무슨 교육을 할 건지 상관할 것 아니고 나와 직접 내 눈에 부닥친 문제니까 어떻게 보느냐? 그런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무조건 이 선생의 인격이 믿어진 만큼 다른 것이 없다. 시험 들어서 그랬다는 둥 그런 실수를 했다는 둥 그런 예의에 어긋난다. 그런 말 할 것 없어요. 또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버린다면 이 선생님 자신은 시험에 들었다 하더라도 말할 문제가 아니지요. 시험에 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사람만 상대를 하면 조금 그럴 수도 있지만 잘못 본 것은 내 눈이 어두운 것뿐이지 바울사도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베드로 사도도 얼마나 실수를 했습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정면으로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인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수사도 수제자로 만드는데, 또 바울사도는 어떤 일에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은혜에요. 사양하는 것은 바로 율법적이에요. 은혜니까, 은혜라면 자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자랑하지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선생님 뿐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김 선생님에 대해서도 하도 오해가 많으니까 저는 그런 오해 안 해요. 그분의 신앙은 믿어지니까 나를 가르쳐 줘서 그랬다는 그런 것은 안 해도 의심할 것은 없어요. 그런 시험에 떨어질 사람 같으면 오늘날까지 그렇게 독신을 지키고 살아요? 또 그런 역사를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을 위해 고스란히 보전해야하는 사랑 대신에 수련자들과 갖게 될 내적 담화를 이기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즐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위험을 부닥치면서 이겨가야 실제 접촉을 하면서 이겨나가, 이 선생님도 몸을 가졌으니까 그런 접촉을 하면서 남녀를 접촉하면서 이길 수도 있겠지요. 깨달을 수도 있고, 그러나 그만한 정도는 못이길 정도에서 접촉을 못하지요. 수련자들과 갖게 될 내적 담화로 이기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즐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기적인 내 비유를 맞춰달라고 말입니다. 자기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 담화를 하는 것, 내적 담화가 못되고 말이지요. 외부적인 담화가 될 때 영적담화가 아니고요. 영적 담화라 하더라도 위험성이 있지요. 내적 담화를 이기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즐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테레사는 그들과의 지도받는 사람들과의 그들과의 관계에서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도록 해야 하기에 그녀가 늘 대인관계에서 지켜온 것처럼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요새 이걸 조금 보면서 자신의 공부이거든요. 꼭 내게 대한 교훈이에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테레사는 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수련자들을 사랑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순수했는가를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 세 가지 나와요. 첫 번이요. 기억(ㄱ)으로 되요. 왜 기억으로 번호를 매겼는지 아시오? 기어가라고, 니은(ㄴ)은 왜 두 번째 내가 기어가라고, 기억은 그리스도거든요.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그래 국문이 계시적이에요. 한문도 계시적이겠지만 한국 국문은 계시입니다. 세종대왕이 머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머리에요. ㄱ자는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테레사는 수련소의 책임을 맡은 즉시 하나님께 자신이 결코 인간적으로 사랑받지 않게 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 수련자들에게 인간적인 사랑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했어요. 청했어요. 왜냐하면 테레사는 예수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야. 자기도 예수님만 사랑하고 지도를 받는 사람도 예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 희망이 소망이에요. 유일한 둘도 없는 오직 하나만 있는 소망이야. 소망이었음으로 주님께 향한 수련자들의 열정이 그녀 자신위에서 멈추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수련자들에게는 열정이 하나님께로만 쏟아져야지, 그것을 자기가 도적질, 새 채기 안했단 말이야. 그것이 도적질이야. 하나님께 도적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내가 받아버려. 그것이 도적질이라고, 또 예수님의 정배만 되어야 할 것을 내가 딱 내 짝을 만들어 버린 것이 도적질도 되지만 순결을 빼앗아 버렸어. 그 순결을 하나님께만 바치라는 순결을 내가 빼앗아 버렸단 말이야. 그것도 도적질인데 하나님께만 사랑을 쏟아버릴 것을 내가 받아버렸다고, 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하고 감사만 돌려야 할 것을 내가 받아버렸다고, 그러니까 이것은 제대로 지도자 노릇을 한 거라고 어려운 일입니다. 거의 불가능이지요. 사람은 성령 안에 사로잡힌 순간만이 가능하지요. 그러기 전에는 맨 도적질만 해. 로마서 2장에도 모두 그거에요. 당신은 모두 도적질해, 신성 도적질해, 자기가 받아버렸어요. 자기가 복을 받겠다고 모두 연보해준 것을 자기가 써버렸어요. 그래 도적질 해놓고도 도적질을 몰라요. 하나님 앞에는 다 도적질인데 그걸 모른다고 바울사도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데 도적질 안 했겠어요? 해왔단 말이야. 자기가 영광을 따먹었다고 자기가 제일 잘 믿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렸거든. 율법 상으로는 흠이 없을 때에요. 예수만 몰랐지, 율법 상으로는 흠이 없습니다. 멈추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테레사는 수련자들에게서 자기가 받게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에서 일체 기피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받을 수 있는 것도 다 기피해버렸어요. 수련자들의 결점을 지적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래가지고 그 잘못을 잘 덮어주면 높여줄 것 아니에요? 이것이 보통 안 되는 겁니다. 율법적인 태도로 지적해 놓으면 더 병이 생긴다고, 사랑이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지적을 해야지요. 순수한 사랑으로 허물을 지적해야지, 그러면 그 결과로 벌써 알아요. 지적하면 결점을 지적하면 할수록 더 존경을 받으니 그것이 순수한 증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아까 나온 듯이 만화를 보게 하냐? 금해야하냐? 사랑 없이 하니까 금해도 병, 자유를 줘도 병, 금한 것보다 조금 나을지 몰라도 자유를 줘도 병입니다. 완전한 것은 없다. 금하는 것은 거짓말을 가르치거든. 어머니 나 무엇 하나 사먹게 돈 좀 줘요. 나 뭐 교과서 학용품 무엇이 없어요? 그러냐? 살짝 가서 어디로 갈래? 저 문방구 집으로 가지요. 가서 만화 본다고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아요? 거짓을 자꾸 가르치니까 무엇해요? 자기도 자녀를 낳으면 거짓말을 한다고 배울 테지요. 가르치고 배우고 자기 낳은 아들도 거짓말 할 것 아니요? 수련자들의 결점을 지적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일들은 테레사의 인망을 추락시키는 일이에요. 덕망을 인 맞으라는 말은 덕망 자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된단 말이야. 그러면 그럴수록 율법적인 멸시될 것 아니요? 그렇지만 순수하니까 그럴수록 더 존경을 받는다는 것 그것이 순수하다는 증거란 말입니다. 책임을 맡은 수련자 책임을 맡은 수련자들을 지도함에 있어 주목 할 만 한 것은 그녀는 결코 수련자들을 사랑을 받기위해 인간적으로 양보하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양보하지 않았다. 수련자들의 수도자로서의 완덕에, 수련자들이 말이야. 수도자로서의 완덕에 도달하는데 이익 되는 것만을 고려했고 자신의 인간적인 인기를 희생해서, 그들이 완덕에 이르는데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럴수록 사실 수련자들은 이렇듯 엄격한 그들의 젊은 수련장을 수련장이에요. 소화 테레사는 수련장을 더 사랑했었다. 이것을 봤어요. 결과 아까 김 집사님이 이야기 했지만 계명산은 비교적 엄격했지요? 규율이 엄했지요? 밤에 성경도 자유롭게 못 봤지요? 전기 절약하라고 낮에 보지 왜 밤에 보냐고 엄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서 내게 그랬다. 그러면 털끝만치도 오해가 없어야 되지 않겠어요? 왜지요? 그 사람이 그랬다. 그러면 오해가 있지, 하나님이 그 입을 빌려서 내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셨다.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어요. 그러면 오해할 것 없어요. 그만하니까 여기 와서 자유롭게 살고 계셨지요? 오해를 품어도 어디를 가도 자유롭게 못 살아요. ‘어느 때는 저분이 나를 굉장히 사랑하나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분을 미워했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분을 미워했더라도 상관없다고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이 그 입을 쓰신 거예요. 미워했더라도 오해는 없어야 해요. 그러니까 물론 사랑해서 했다면 더 좋지만 그리고 또 아닐 때도 나오니까 사랑으로 해서 그랬던지 미움으로 해서 그랬던지 하나님이 하셨다. 그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다. 요나에게도 그랬지 않아요? 하나님의 폭풍, 하나님이 뱃사공의 손만 빌렸지 하나님이 뱃사공의 손만 빌렸지 선원들의 손만 빌렸지 하나님이 던져넣었어요. 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던지라고 가 아니라 던졌다니까요. 그렇게 되었다니까요. 보십시다. 요나 1장 14절부터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치니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더라. 여호와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다 하나님이 하신일 아니에요? 물고기가 한일 아니에요. 요나를 삼키게 하셨음으로 요나가 삼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까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수르의 배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에 바다 가운데 던지셨음으로 누가 던졌습니까? 선원들의 손만 빌렸지, 사람들이 그랬지 않아요? 주께서 나를 깊은 바다 속으로 던지셨음으로 존경 사 아니에요? 던지셨음으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 아닙니까? 파도도 주의 파도에요. 주님이 일으킨 것입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주께서 던지셨어요. 뱃사공의 손만 빌린 것뿐이야. 그러니까 계명산도 어머니들 입만 빌린 거예요. 입만 빌려서 하나님이 밤에 보지 말고 낮에 봐라. 그 말 무슨 말인지 아시오? 밤에 암만 봤자 아는가? 말이에요. 낮에 봐. 빛을 받아서 보라는 말이에요. 빛을, 왜 웃느냐 고? 사실이지. 왜 밤에 신을 벗었어? 샛별이 뜨도록 본다고 했어요. 베드로후서 2장, 전기 절약하라. 그런 뜻으로 그분이 그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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