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소개한 목포 공생원에 들리게 되었다. 목포 죽교동 유달산 아래에 있는 공생원은 일제 강점기에 윤치호 전도사(당시 19세)가 고아 7명을 돌보기 시작하여 설립된 고아원이며 광주 귀일원의 전신 고아원 동광원 설립에도 연관이 있다. 그래서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들리게 되어 원이 이루어 졌다. 그와 연관된 글 몇편을 올려본다.
아래 이야기는 <국민생각 언론>에서 소개한 글이다.
목포 유달산 후사면, 고하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야트막한 터에 소박한 건물 몇채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복지의 뿌리 목포 공생원.
세상은 수시로 낯을 바꾸고, 사람은 쉼 없이 오고 가지만 사랑으로 함께 사는 ‘공생의 꿈’은 오롯이 그 자리에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93년의 긴긴 세월동안 변함 없이 그 자리에~.
목포 공생원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살의 청년전도사 윤치호는 길을 가던 중 다리 밑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고아 7명을 발견 하게 된다. 아이들을 가없게 여긴 윤 전도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목포시 대반동 유달산 자락에 터를 잡게 되는데 이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
7명의 고아들로 시작된 공생원은 20명, 30명, 100명, 원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먹이고 입히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윤 전도사는 아이들과 밭을 일구는 등 자력갱생에 힘쓰는 한편 다른 전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 교육에도 마음을 쏟는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 다른 과목과는 달리 음악수업은 참으로 어려웠다. 음악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였다. 일본인 여성으로 목포 정명여고에 재직중이던 그녀는 아이들의 음악수업을 맡아 공생원에 운명적인 첫 발을 내 딛게 된다.
이후 윤치호와 사랑이 싹트게 된 그녀는 당시 정치, 사회적 벽을 뛰어 넘어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당시엔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남성의 결혼이 쉽지 않았다. 점령군인 일본인들이 식민지 조선인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우치 치즈코는 7살 때 고위관료인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온 엘리트 여성으로,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을 흔쾌이 받아들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우치 치즈코의 어머니 였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던 그녀는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늘 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다같은 형제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승낙 했다 한다.
단 무남독녀임을 감안, 데릴사위를 전제로 말이다. 그때가 1938년.
7년여의 세월이 흘러 해방이 됐다. 목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서둘러 귀국선을 탓다. 혹시라도 모를 위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치호·윤학자 부부는 일본행을 택할 수 없었다. 100여명이 넘는 고아를 데리고 일본까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해방후 일본인에 대한 위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분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라며 적극 보호에 나선 고아들과 “좋은일을 하신 분들”이라며 감싸준 목포 시민들 덕분에 무사 할 수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밀려오고 상당수 목사, 공무원, 경찰관 등이 인민재판 이라는 미명하에 목숨을 잃었다. 이 때도 고아들과 시민들의 보호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윤치호 전도사 신변에 변고가 생기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당시 500여명에 달하는 고아들의 생계를 위해 전남도청에 식량 지원을 요청 하러 갔던 윤 전도사가 행방불명 된 것이다.
이 때부터 공생원 운영은 올 곧이 윤학자 여사가 도맡게 된다. <2편에 계속>
[출처] <한국 사회복지의 뿌리 목포 공생원> (1)공생원의 시작...|작성자 국민의 생각이 언론
윤치호와 목포 공생원
목포 공생원 윤치호-윤학자 사랑 이야기 https://youtu.be/98rK8R_oEWU
정인세(1909~1991)
정인세는 서울 마포에서 천석꾼의 부유한 지주인 정원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고교시절 정인세는 YMCA에서 위로 하늘을 우러르며 땅속 깊이까지 뿌리를 딛는 유영모의 철학과,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극기 생활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대한 친숙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23세가 되던 1932년 친구 김후옥을 따라 광주에 온 그는 YMCA유도사범, 간사, 농업실습학교 학감을 거치는 동안 1937년에는 최병준목사(광주3.1독립운도주도)의 딸과 결혼하였다. 광주 숭일학교에서 덴마크 체조강습회를 열어 시내 각 급 학교 교사들에게 이를 보급했고, 수피아여학교의 농구 코치로 활동하며 농구 게임의 규율화를 위해 농구심판협회를 조직했다.
광주에 온 후 더욱 기독교 신앙이 돈독해져서 금동교회(현 광주제일장로교회)의 안수집사가 되었으며, 강순명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원으로도 활약했다. 광주청년회가 시작한 농업실습학교에서 정인세는 성경, 체육은 물로 사감으로서 그리고 교목으로서 다각적인 임무를 맡으면서 서서평 선교사가 창설한 확장 주일학교 총무일도 맡아 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937(28세)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으며, 평양신학재학중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 당하자 강원도 횡성군 산골 친구의 목탄산판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과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8.15해방 후 광주로 내려와 1947년에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교감으로 있으면서 광주YMCA초대 총무가 되어 5년동안 새로 출발하는 청년운동의 기반을 잡았다.
1950년 초 여순반란사건(1948년10월)으로 부모 잃은 고아들이 쏟아져 나오자 광주의 각계각층 70여 인사들이 모여 사회사업단체를 설립하였다. 동광원으로 이름 지어진 이 단체에서 새로 탄생된 고아원 원장 직을 맡으라는 권고를 받고 정인세는 지금처럼 교육에만 전념할 것인가, 새롭게 사회사업에 발을 딛을 것 인가?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목포공생원장 윤치호씨의 권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영향은 당시 화학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이현필선생이 보낸 종이쪽지 한 장이었다. 손바닥만 한 쪽지에 연필로 ‘약1:27’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성경 대목을 찾아보라는 줄로 알고 뒤적여보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건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는 구절이었다. 이 말씀에 바늘 끝만큼도 주저함 없이 동광원의 원장을 맡게 되었다.
정인세선생이 수도자가 된 것은 이현필선생의 영향이 컸다. 1941년 32세때에 강순명목사가 이끄는 독신 전도단 일원으로 활동하던 이현필선생을 처음 만났으며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교류하였다. 1952년3월, 양복에 새파란 넥타이는 물론 모든 책과 아끼던 헬라어 성경까지도 다 불태워버리고 완전무일물(無一物)이 되어 이현필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정인세와 이현필은 평생을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는 동지로 살았다.
정인세는 동광원의 원장으로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의 설립자이자 귀일원의 토대를 닦은 최고의 공로자였다. 6척이 넘는 큰 체격에 지성이 번득이는 용모, 정인세의 설교는 막힘이 없는 달변이기도 하려니와 실제 생활이 성경 말씀 그대로였기 때문에 귀일원 사람들은 그를 더욱 믿고 의지하였다.
정인세의 삶을 나타내는 단일적 일화가 있다. 당시 거리의 걸인을 없애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정인세는 걸인 수용소 소장 일도 맡아했다. 자신의 자녀를 따로 돌보지 않고 고아들과 함께 키웠는데 걸인 수용자 중에 쓰리꾼이 아들 건모를 꾀어 절도를 시키는 것도 몰랐다. 대전지방법원법정에서 판사가 정인세에게 “처음 일이니 잘 타일러 교육하라”며 아들을 훈방하려했으나 죗값을 치러야한다며 거절하였다. 사람들이 인정머리 없는 아비라고 수군거렸지만 그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집에 돌아와 금식하며 기도에 들어갔지요. 내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아들딸을 데리고 동광원을 나가느냐, 아니면 내 아이들을 희생시키고 여러 사람 위하는 이 사업을 계속하느냐하는 갈림길에 선 것입니다. 그때 떠 오른 것이 ‘나를 위해 가족을 버리는 자는 2백배로 되리라’하신 성경말씀입니다.”
늘 자녀들에게 어떤 종류의 부담과 자책감이 있었던지 정인세는 아들의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퍽이나 대견했다. 가정의 보살핌 없이 자란 정건모는 타고난 재능으로 어디를 가나 제 몫을 척척 해냈고, 고아들과 함께 자란 딸은 수녀로 부친의 사업을 돕다가 34세에 심장병으로 요절하였다. 화순의 동광원분원에서 거칠고 고된 일을 솔선하며 동료 수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가정문제는 이렇듯 저절로 해결이 된 셈이었고 부인은 병으로 해방되던 해에 세상을 뜨고 자녀들도 제 갈 길을 찾아갔다.
박선홍의 광주[백년](103쪽)에는 “정인세는 평소 사랑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동안 많은 매스컴들이 그의 헌신적인 생애를 취재하려 했으나 한 번도 이에 응한 일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우리 지방 종교, 체육, 문화 발전의 큰 공로자이면서도 그 흔한 상하나 받은 일도 없다.”고 기록하였다.
백춘성의 [시온의 빛고을 광주](29쪽)는 광주광역시 시민대상 추천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박선홍의 말을 빌리어 “종교, 교육, 체육, 문화 발전에 위대한 공로 자라는데서 정인세에게 광주 시민대상을 수여하였으나 본인의 고사로 결국 상을 드리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정인세는 어디에서 주는 상이라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상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밥도 지어줘야먹고 빨래도 해줘야 입는데, 그저 입이나 잘 놀릴 뿐이지요. 설혹 내가 잘한 일이 있어 칭찬받을 일이 있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테요. 세상에서 미리 받아 놓으면 못 받습니다.”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정원장은 스스로 한 일이 알려지는 것도, 알아주는 것도 달갑지 않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인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자상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두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준 인자한 아버지 같은 분이다.”고 평하였다.
남부대학교 설립자인 조용기는 [달걀이 깨어나 바위를 넘다](96쪽)에서 자신이 정인세선생과 같은 분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행운이라면서 “정인세 선생은 이승만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여러 번 모셔가려고 했으나 거절했던 실력가였다”고 회고하였다.
[신안교회80년사](221-231쪽)에 의하면 1955년 6월부터 1959년 11월까지 약 4년6개월간 신안교회 목회자로 재직한 정인세는 교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부활신앙과 사랑과 봉사, 절제, 노동 등의 행함 있는 믿음, 주님을 위한 자기의 희생, 순결, 청빈 등 수도자적인 삶을 강조하였다. 성경말씀은 로마서를 중심으로 바울서신14권에서 주로 강론하였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종전에 기명식, 연보 대 거출 식으로 하던 헌금방식을 바꾸어 출입구에 헌금함을 놓고 자유롭게 하도록 하였으며, 모아진 헌금은 교회당 유지관리비와 교회내외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비로 쓰도록 하였다.
그의 신앙과 가르침을 사모하여 상당수의 대학교수, 학생 등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의 창시자인 김준은 정인세의 설교말씀과 행동이 일치됨을 보고 전남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수도자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동광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가르침으로 당시 신안교회와 주변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지금도 그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1984년 정인세가 종교관이 달랐던 홍효순 일당들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고 눈이 상하고 머리에 피가 찰 정도로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는 혼수상태에서도 “그분들을 용서하시오”라고 부탁하였다. 하행자 자매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이 없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함과 같이 정인세원장님께서 피를 흘리신 희생으로 현재의 귀일원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고아와 과부, 환자, 걸인을 위하여 헌신적인 싦을 살면서 전 세계의 기독교가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 되는 것이 희망이며,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소재라고 했던 정인세는 1991년(83세)귀일원 원장으로서, 교회 지도자로서, 수도자로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이현필이 동광원과 귀일원의 정신적 지주라면, 정인세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수도공동체 동광원과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의 실질적 설립자이자 오늘의 귀일원의 토대를 닦은 최고의 공로자라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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