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년전에 한 임플란트 어금니가 빠져 수리차 목포에 다녀왔는데 점심을 먹고 인근에 있는 갓바위를 보고 왔다. 남도에 내려와 40여년만에 처음 보았는데 지금은 해상산책로를 만들어 누구나 쉽게 볼수 있도록 되어있고 토요일이라 날씨도 좋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많았다.
1. 이현필 선생 전기
김춘일 언님
☉ 머리말
필을 들고 보니 프랜시스 성인의 글 속에서 본 일화가 떠오릅니다.
어느 귀족이 출가해 성인의 제자로 와 있었다. 열심한 귀족은 몇 년 후 분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하루는 그 분원에 손님이 찾아와서 원장을 찾았다. 문지기는 원장을 모셔왔는데 손님과 원장은 만나자마자 뜨거운 포옹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 대화도 없이 손님은 떠나갔다. 문지기는 궁금했다. 그래서 다녀간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원장은 우리나라 임금님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놀란 문지기는 ‘원장님은 좋은 자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했다. 그때 원장은 대답하기를 ‘하늘나라의 거룩한 은총의 신비를 사람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망치고 더럽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크신 은총으로 거룩한 영성과 순결과 거룩한 가난과 겸손과 신비에 싸여 살고 가신 존경하올 사부님의 삶을 아직도 살 속에 사는 제가 기록한다는 것이 도리어 망치는 것이 되지 않을지 주저가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으로 주신 기억에 입력되어있는 사부님 출가하시기까지의 내용을 감사히 알고 필을 들었습니다.
-이글을 듣고 보시는 분들에게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사부님 27세 때 결혼해서 3년간 지내신 내용과 출가하신 내용은 1998년 12월 28일에 돌아가신 황홍윤 사모님을 몇 년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들은 말씀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큰 은총으로 알고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눅 2 : 25.26)에 나오는 시므온이 만민 앞에 예비한 주님의 구원을 품에 안고 기뻐하시면서 이제 이 종은 편안히 눈감고 죽을 수 있다고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요 1:1)-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창 3: 끝절)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은 차단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죄인인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
사부님은 아버지가 우리를 만나러 오신 마구간 춥고 배고프고 냄새나는 그 낮은 자리 가난하고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 거기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은총으로 만나셨다. 인간의 본능을 직관하신 사부님은 짐승의 구유에 누우신 짐승의 밥으로 오신 그 생명의 말씀을 먹고 은총과 사랑으로 기쁨으로 만족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이 죽고 부활의 예수와 같이 숨을 쉬고 영원한 生命을 노래하셨습니다.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 사부님의 어린 시절
이현필 사부님은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엄마의 태몽은 소금 7섬을 사들이는 꿈이었다. 소금은 자체는 녹아 없어지면서 방부제 역할을 한다.
누가 지어준 별명인지 몰라도 어릴 때 별명은 싻뿌리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과 온 마을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자라났다. 네댓 살 때부터 가난 속에서 굶주리는 엄마의 배고픈 사정을 눈치챈 싻뿌리는 품앗이 일꾼들을 얻어 일을 할 때는 부엌에서 밥을 푸는 엄마 곁에서 ‘내 밥 많이 줘 내국 많이 줘’하면서 큰 그릇에다 국에 밥을 말아서 ‘엄마 먹어’하면서 엄마에게 드리고, 싻뿌리는 일꾼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한 수저씩 얻어먹었다. 그날 한 끼라도 엄마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싻뿌리는 7살 때까지 젖을 먹었는데, 여름 농번기 때 저녁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하면 ‘나 방아 찧고 와.’ 하셨다.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어 아침에 눈을 떠보면 엄마는 벌써 호미 들고 밭으로 나가고 없었다. 며칠 후,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싻뿌리는 엄마에게 달려들어 따뜻한 엄마의 가슴을 헤치고 젖을 빨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동안 맛있고 달콤했던 그 젖은 변해 짭짤하고 구역질이 나는 젖으로 변해버렸다. 싻뿌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통곡하면서 뒹굴었다. 하루는 엄마에게 활을 만들어달라고 졸라서 만들어주었다. 싻뿌리는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면서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데 저쪽에서 일본 순경이 오고 있었다. 싻뿌리는 겁이 나서 그 아까운 활을 얼른 친구에게 주어버렸다. 사부님은 훗날 본인은 어릴 적부터 욕심 많고 비겁하고 간교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고백하셨다. 차차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대장간 하는 하복만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똑댁아, 똑댁아’ 하면서 놀렸던 교만이며, 사춘기 때 마을의 같은 또래의 처녀들을 희롱하면서 지냈던 과거를 반성하시면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신다고 가끔 말씀해 주셨다.
☉ 이공(李空)님 방문
1929년 싻뿌리는 18세 사춘기, 고민하는 나이로 성장했다. 중촌 마을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개천산 그 산밑 등광리에 사시는 이세종씨라는 사람이 그 산 중턱에 산당을 짓고 도를 닦고 기도하면서 산신령처럼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사부님은 호기심에 끌려 마을 친구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다. 가서 보니 듣던 소문과 같았다. 산 중턱에 아담하고 깨끗한 집이 있고 작은 연못에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뜰에는 희귀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사춘기에 고민하는 인생 문제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선뜻 뇌리를 치고 지나갔다. 이공님은 때가 조금 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으셨는데, 그 인상은 위엄과 평화가 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다녀온 뒤 또 가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녀왔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한글밖에 모르는 무식한 농군, 그러나 그 인격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은 인생의 기로(岐路)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이공님은 생활과 삶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다. 땀 흘려 힘들게 모아온 재산도 절반은 전남노회에 바치고 남은 절반은 가난한 이들과 소작인들에게 다 구제하시고 겨우 연명할 것만 남겨 두시고 부인까지 시집을 가고 없어도 믿음으로 성경 연구와 기도로 평화로운 삶을 살고 계셨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있어도 연인에게 끌리듯 이공님이 그리워지며 하루에도 수없이 개천산을 바라보곤 했다.
☉ 스승을 배신한 제자
어느 날도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았다. 광주에서 잘 믿는다고 이름난 목사들이 몇 분 와 있었다. 산골 마을에서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 사람이 그 큰돈을 내어 노회에 바친 것이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아다녔다. 사부님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들었다. 대화 내용은 주로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문제, 남녀 문제였다.
이공님이 말씀하기를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은 우리 몸이요. 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과나무는 먹는 과실이 아니요. 남녀 간의 문제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나무는 척추라는 나무요. 척추 속 골수에서 피를, 생명을 만들어 내는데 이 피가 바로 선악과요. 이 생명의 힘을 잘 쓰면 선한 열매를 맺고 잘못 쓰면 악한 열매를 맺으니 선악과입니다. 이 힘(에너지)을 영혼을 깨우치고 믿음을 키우는 데 쓰면 아름다운 정신에서 아름다운 열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룩한 열매를 맺고, 육의 향락으로 쓰면 악한 열매를 맺으니 죄가 된다는 말이오.’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목사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아! 하나님께서 일남일녀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무슨 소리요. 당신은 성경을 잘못 보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 이단자요.’ 하면서 구박하고 떠나가 버렸다. 육으로 난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로 주신 이삭을 구박하고 학대하고 나섰다. 신학 공부해서 사명자 되어 전도해야지, 이런 산중에 앉아있으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고 핍박하고 떠났다. 이공님은 그들의 말에 압도되고 있었다.
젊은 사부님은 그들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따라 광주로 나갔다. 소경이 된 목사들을 따라 넓은 길 보이는 세상, 영광 길로 나선 것이다. 광주 시내에 있는 큰 교회 믿음이 높은 목사들을 추종하면서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내 변두리에 있는 신안동 재매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신안동 교회 백춘성 장로는 전남방직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몇 년 후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어 회사에서 쫓겨났다. 장로님은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과 살고 있었다. 장로님 어머니는 믿음이 좋고 덕이 높으셨다. 가난한 이웃을 많이 도우셨다. 6.25로 인해 고아들이 쏟아져 나오고 국민들은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사부님은 부모를 잃고 헤매는 고아들을 수습해 고아원을 시작했다. 백 장로님은 어머니와 의논해서 전 재산을 집까지 동광원에 바치셨다. 그 재산은 귀일원 인가를 낼 때 기본재산으로 쓰였다.
1938년 백영흠 목사는 총각 전도사를 자기 처제와 결혼시켜 동서지간이 되었다. 사부님은 27세, 황홍윤 어머니는 22세 때 맞선을 보고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 후 첫 주일이 돌아왔다. 약혼한 총각이 와서 어디 갈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때 광주에는 북동 천주교 한 곳밖에 없었는데, 그 성당엘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약혼녀의 집은 언니들이 많고 큰아들은 폐병으로 앓고 있는 집이었다.
☉ 이공(李空)님의 깨달음 [마 7 : 21. 23] [요 16 : 9. 10]
하루는 이공님이 길을 가고 있었는데 얼마쯤 가시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났다. 항상 준비해서 가지고 다니시던 돈을 꺼내어 꽤 많은 돈을 그 거지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불쌍한 거지는 돈만 받고 무심히 지나쳐 버렸다. 큰절을 하면서 ‘감사합니다.’를 기대하신 이공님은 괘씸한 생각이 났다. 그래서 ‘저런 괘씸한 놈 같으니, 그 많은 돈을 받고서도 감사가 없어.’ 하시면서 뒤를 돌아보시는 순간 이공님은 깜짝 놀라셨다. ‘아! 이세종이가 아직도 안 죽었구나. 아직도 안 믿었구나. 이 몸도 제물도 내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아직도 내가 살아 있구나.’ 하시고는 구제도 전도도 다 포기하시고 더 깊은 산중으로 입산하셨다. 땀 흘려 모아온 재산을 다 구제하시고 예수님 크신 은총으로 주신 큰 깨달음이시다.
입산하시기 전에 이공님은 부인이 쓰던 살림살이를 지개에 짊어지고 재혼해 사는 부인 집을 찾아가셨다. 그 남편을 보시고 ‘저런 여자와 같이 사느라고 애 쓰요. 언제든지 살기 싫거든 꼭 제게 보내주시오.’, 그리고 부인 보고는 ‘예수님 잊지 마시오.’ 이 한마디를 남기고 오셨는데 그때마다 부인은 저 백년 원수가 내 우세 다 시키고 다닌다면서 구정물을 퍼 찌크렀다. 구정물 세례를 받고 돌아오시는 이공님의 발걸음은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같이 든든하고 기쁨이 넘치셨다. 그리고 이공님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부인과 총명한 제자가 돌아오기만을 날마다 기도하고 계셨다.
☉ 부인이 돌아오다.
하루는 부인이 두 번이나 시집을 갔어도 못살고 그 깊은 산중으로 미운 님, 본 남편을 찾아왔다.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못 드는 부인을 보시고 ‘아이고 반갑소.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소? 내가 뭐라고 했소? 또 못살고 도로 올 것이니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했다. 부인은 이런 남편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이런 의인 남편을 내 욕심 안 채워준다고 두 번이나 떠났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의연하게 맞아주는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이공님 계시는 곳에서 뒷산을 넘어가면 접밭재라는 손뼉 같은 큰 산이 나오고 그 접밭재를 넘어 약 20리(8Km)를 걸어가면 이양면이 나온다. 그곳에 5일마다 이양장이 선다. 장날이면 이공님은 부인에게 밀가루 한 근을 사오라고 돈을 주셨다. 부인은 밀가루 한 근 값을 받아서 접밭재를 넘어 장에 갔다 오다 보면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눈먼 딸 하나만이라도 있었어도 그 딸보고 살았을 텐데 하면서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 장은 시끌벅적하다.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아 유혹을 했다. 그러나 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를 용서하고 기다리는 남편만 생각하면서 곧장 산중 움막집으로 돌아왔다. 산나물과 쑥을 뜯던 어쩌던 그 밀가루 한 근으로 둘이서 5일을 먹어야 했다. 밀가루 한 근은 두 사람 한 끼 먹을 분량이다. 이공님은 돌아온 부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런 고된 훈련으로 죄를 이기도록 하셨다.
그리고 부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전도는 못해도 본인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돌아온 부인은 옛 부인이 아니었다. 어린양처럼 순종을 잘하면서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가니 참으로 아버지께 감사하는 나날이었다. 부인은 이렇게 돌아왔는데, 이공님이 깨달은 진리의 대를 이을 제자는 언제 돌아올 것인가. 내 사랑이 부족했던가? 내 말이 부족했던가? 가실 때는 다가오는데 소식도 없는 제자를 학수고대하면서 아버지께 기도로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어느 날 그 제자는 결혼을 해서 부인과 이공님 앞에 함께 나타났다. 이공님은 억장이 무너지고 떡심이 풀렸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 앞에 나타난 것은 탕자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였다.
제자의 말 : 고독한 산중에서 묵묵히 썩을 수는 없었습니다. 인생으로 태어나 날개 한번 펴보지 못하고 죽기란 너무 억울했습니다. 세상에 나가보니 사방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예쁜 여자와 결혼도 했습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요. 축하해 주십시오.
무화과 잎으로 하체도 가리지 않고 벗은 채 나타난 아담과 하와였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스승 이공의 구곡간장이 녹아내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아픔은 피눈물이 되어 주름진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여셨다. ‘선악과 따먹지 말고 남매같이 깨끗하게 사시오.’(사모님의 증언)
‘믿어서는 안 될 인간을 믿은 내가 무지했던가? 내 욕심이었던가?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아무리 파 봐도 힘만 들고 답답했다고 떠나버린 제자, ‘아깝지만 잊어버리자.’ 스승은 이렇게 다짐하고 마음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신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한 쌍의 모습은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리고 18세부터 열심히 찾아와서 즐겁게 가르치고 기쁘게 배우던 그 옛날 그때로 돌아가 아픔의 십자가로 다가왔다. 이공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배신의 고통을 뼛속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숨이 끊어지는 무서운 고통 중에서도 자기를 죽이는 악당들을 보시고 ‘아버지 용서해 줍시다. 모르고 저러는 저 무리를 용서해 줍시다. 용서해 주어야만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화목이 되고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 가운데서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번개같이 이공을 쳤다. 이공님은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총과 사랑에 더 깊이깊이 침투되어 가고 있었다. (예31: - 내 백성이 아무리 많은 罪를 지었더라도 버릴 수가 없구나. 죄를 짓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스승은 제자의 회개를 위해 남은 생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후 4: 10-12) 말씀과 같이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식음을 전폐하시고 공기만 마시면서, 그렇게 100일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공님의 숨은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숨 쉬면서 성령으로 교통하고 있었다.
☉ 아들의 소원이 아버지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들과 함께 찾아오셨다. 성모님은 환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내 사랑하는 아들, 평안하고 기뻐하세요. 아들의 소원이 아버지께 상달되었습니다. 때가 되면 아들의 소원이 다 성취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고 견디시면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생사가 통하고 현세와 내세가 통하고 만물이 하나로 통했다.
제자들이 얼기설기 지은 움막집은 천국의 영광과 기쁨으로 차고 넘쳤다. 아멘. 아버지 성모님 감사합니다. 이공님은 만족하셨다. 그리고 大自由人이 되셨다.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었다.
며칠 후 사랑하는 여 제자 손임순 수레기댁이 찾아왔다. ‘아이고 반갑소.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영과 영으로 통하는 유일한 여제자를 반기셨다. 스승은 마지막 유언을 그 여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나 3일 후면 이 허물 벗고 본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요. 나 죽은 뒤에 나 같은 사람 한 사람 만날 것이요. 그리고 예수 어머니 마리아가 나를 사랑하요. 그리고 나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소.’ 이공님은 제자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신 허락을 받으시고 유언을 남기시고 3일 후에 아버지의 품으로 영광되이 떠나셨다. 생명의 뿌리 되신 아버지의 품으로.
이공님 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 그 움막집에서 3년간 회개와 눈물을 흘리고 마을로 내려오셨다. 그리고 20여 년 후에 도장리 잘 믿는 정월순 월례 두 자매의 수종을 받으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방문한 자매가 일생 동안 언제가 제일 기쁘셨냐고 물으니 ‘아! 예수님이 이때가 그때라고 안했소.’ 하시고 (요 4:23-)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당신과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시면서, ‘나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시면서 한 많은 생을 아름답게 마치셨다. 아멘. - 이공님 말씀대로 성취되었다.
☉ 제자의 회계
스승을 배신한 제자는 가래몰이라는 조금 떨어진 마을로 분가해 나갔다. 마을 노인들은 현필씨 부부는 50년 앞을 산 부부라고 했다. 그 당시 산골에서 젊은 부부는 손을 잡고 다닌다고 숙덕거렸다. 집안 어른들이 말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비상약은 항상 준비해서 가지고 다니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이웃 마을에까지 찾아가서 치료해 주고, 한글도 못 배우고 노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모아 무산아 교육도 시키셨다.
그 무렵 거리에 나서면 언제나 개천산이 보이고 ‘남매같이 깨끗하게 사시오.’ 하신 스승님의 말씀이 자꾸만 영혼을 괴롭혔다. 제자는 그때마다 자기보다 더 똑똑한 아들 하나와 부인보다 더 예쁜 딸 하나는 낳아야 한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당시 전국에 이가 퍼져 탕자의 머리에도 이가 생겼다. 그래서 부인은 남편 머리에 이를 잡아주고 있었는데 뜻밖에 이공님 부인이 찾아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애간장이 타들어간 이공님은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가보고 오라고 부인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렇게 3년간의 신혼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임신의 소식이 있었다. 집안 어른들까지 경사라고 기뻐했다. 임신 후 몇 개월이 지났는데 그렇게 건강하던 부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더니 손발이 붓고 전신이 부어올라 자리에 눕고 말았다. 시아버지가 약을 지어다 먹으라고 했지만 약을 안 먹으니 화를 크게 내셨다. 형편이 이렇게 되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고 탕자는 제정신을 잃고 멍청해 있었다. 그때 마침 영산포에서 사는 친구 지근씨가 찾아왔다. 퉁퉁 부어서 누렇게 부어있는 친구의 아내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이 친구야 저런 환자를 죽으라고 보고만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타고 온 자전거로 되돌아가서 50리 돌밭 길을 리어커를 끌고 왔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붉게 타고 있는 낙조를 아쉽게 바라보면서 만고에 길이 남을 통회의 출발 길에 올랐다. 리어카에 요를 깔고 환자를 편히 기대도록 하고 광주로 향했다. 삼강오륜에 나오는 붕우유신이라는 말과 같이 친구 지근씨의 고마움은 두고두고 듣는 이의 가슴에 따뜻한 우정의 불씨로 남을 것이다. 그 친구 지근씨는 곤경에 빠진 탕자의 위로와 힘이 되는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5~6명씩 짝을 지어 리어커에 짐을 싣고 광주에서 도암까지 여러 차례 왕래했다. 새벽에 밥을 먹고 부지런히 걸으면 남평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저녁 늦게야 도암에 도착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두 다리에 태옥이 나 4~5일 후에야 풀렸다. 그래도 우리 젊은이들은 즐겁고 행복했다. 단신으로 갈 때는 남평에서 다들 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샛길이 보인다. 행긴재를 넘어 대초리 뒷산 세재를 넘어 내려가면 운주사(雲柱寺)가 보이고 오후 4시쯤 도암에 도착했다.
두 친구는 교대해 가면서 리어카를 끌었다. 도암으로 해서 남평으로 빠져나갔다. 길에는 돌이 많아 리어커는 덜거덕거리고 몹시 흔들렸다. 친구의 피곤과 아내를 생각해서 자주 쉬었다. 쉴 때마다 남편은 쌕쌕거리는 아내에게 다가가 덮고 있는 웃옷을 떠들고 ‘죽지 말고 살아 응? 무엇이든지 다 해줄게. 응?’했다. 다 죽어가는 아내를 싣고 가는 100리 길은 천리나 만리보다 더 멀고 지루했다. 처가 사람들을 무슨 낯으로 볼 것인가.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처럼 배가 터지고 창자와 쓸개가 쏟아져 나왔다. (行 1: 18)
오! 자비하신 아버지, 스승을 배반한 이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놈 죄로 아내가 희생합니다. 차라리 이놈을 징치하시고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심과 동시 정의의 칼날은 무섭게 번쩍였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의 장자를 죽이신 것이다. 광주에 도착하니 새벽이었다. 서둘러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에 입원했다. 예상했던 대로 친정 식구들과 세 언니 형부들까지 몰려와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보고만 있었냐고, 똑똑하다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냐고 입을 모았다. 병원의 의사들이 다 동원되었지만, 병명이 나오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전주예수병원에 있는 미국 의사를 모셔와 결과가 나왔다. 자궁외임신이었다. 서둘러 수술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에 맞은 무죄한 태아는 죽어 상하기 시작했고 냄새까지 났다. 산모까지 위험한 상황이었다. 수술한 환자에게는 3일간 물이 금지되었다. 남편도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 옆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참회와 용서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간단한 부인병 수술인 줄 알았는데 3개월 만에 퇴원했다. 엄마와 식구들의 사랑도 컸지만, 남편의 간호야말로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탄복할 정도였다. 그런 극진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인은 마음으로 굳게 결심했다. 죽어도 못 잊을 이 남편의 사랑을 내 전부를 받쳐서 섬기겠다고 했다. 퇴원 후 건강이 회복됨과 동시에 서로를 아끼면서 행복된 한 달이 흘렀다.
☉ 퇴원과 출가
그런데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여보 당신과 의논할 일이 있는데 꼭 들어주었으면 좋겠소.’ 했다. 남편은 심각한 어조로 도움을 청했다. 부인은 걱정 말고 말씀해 보라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이 후회와 고통과 미움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은 물 한 그릇을 떠오라고 하더니 물그릇을 부인과의 사이에 두고 ‘내가 요사이 가슴이 좀 아픈 것이 아마도 폐가 좀 나쁜 것 같으니 우리 이렇게 지냅시다.’ 했다. 부인은 기쁘게 승낙했다. (고전 7:5)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인생 싸움, 영과 육의 싸움, 지옥과 천국의 싸움이 될 줄은 정말 모르고 승낙했다. 새벽에 눈을 떠 보면 남편의 자리는 언제나 비어있었다. 방에서도 추운데 어디 가서 기도하고 있을까? 조반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뒤늦게 와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혼자 먼저 먹지 않고.’ 하면서 ‘원래 소식(小食)인데다가 나 큰집에서 먹었소.’, ‘누님 집에서 먹었소.’ 하면서 단식투쟁을, 자기와 세상을 이기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때 사부님은 30세이고 부인은 25세였다. 깊은 겨울이 다가오고 눈이 키 높이로 쌓여도 남편의 자리는 새벽마다 비어있었다. 기도하러 가는 곳은 약 1Km 떨어진 청소마을 뒷산 골짜기였다. 마을 사람들이 땔 나무를 하려고 올라가면 눈 위에 발자국이 있고 큰 마당바위 한쪽에는 눈이 녹아 없는 자리를 보게 되었다.
하루는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기도하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마을에 사는 누님 집에 들렀다. 누님 집에는 어린 조카 3명이 있었다. 꽁꽁 얼어서 들어오는 동생을 본 누님은 마음이 너무너무 아팠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좀 녹이게 하셨다. 한참 후에 따뜻한 밥상이 들어왔다. 그때 그 집에서 기르는 큰 고양이가 들어와 밥상 밑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그리고 얼어서 상해 냄새나는, 양말도 신지 않은 사부님의 발을 꽉 물고 놓지를 않았다. 그때 사부님은 ‘고기 아니오.’ 하시면서 발을 빼냈는데 발에서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하신 스승을 배반하고, 보이는 넓은 세상 길로 빠져나간 이 자식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매를 때려서 건저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죄로 물든 이 몸과 마음을 징치하시고 심판해 주십시오. 무슨 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아멘 (시 51 : 1-5)
남편은 차츰 집을 비울 때가 많아지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변해가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생각했다. 부부간의 애정보다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나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애정의 욕망이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인은 참다못해 언제 온다는 약속도 없이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끄럼도 체면도, 염치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구를 믿고 이런 산중에 와서 고생하고 사는데, 누구를 믿고 의지하란 말인가?’
수소문 끝에 어느 집에서 찾아냈다. 앞문으로 들어가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믿음 좋은 남편 만나 시집 잘 갔다.’고 칭찬받던 내 신세, 내 팔자야! 며칠을 정신없이 헤매다가 집이라고 찾아오니 그립던 남편은 먼저와 있었다. 배는 등짝에 붙어 있고, 바싹 말라있는 얼굴은 두 눈망울만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래도 집이라고 찾아와 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희비의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지어 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남편은 밥상은 쳐다보지도 않고 모든 문서를 내놓고 입을 열었다. ‘당신 혼자 이곳에서 살 수 없으니 나를 따라나서든지 큰집으로 들어가든지 친정으로 가든지 한길을 택하시오.’ 했다. 부인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죽지 말고 살기만 하면 내 말 다 들어준다고 해 놓고 이게 왠 날벼락인가? 아내는 겨우 기운을 차려 울면서 대답했다. ‘나 혼자라도 살 수 있으니 이대로 두라.’고 애원했지만, 전부 큰집으로 다 돌려주고 정리해 버리고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도와 같이 장망성을 떠났다. 아내는 울면서 매달렸다. 남편도 같이 울었다. 불 속에 떨어진 벌레와 같이 뒹굴면서 몸부림쳤다.
차라리 나를 죽으라고 하시오.
(마 10 : 34 – 30) 예수님 제자의 자격. 예수님은 칼을 주러 오셨다. 네 집안 식구가 원수이다. 부모나 처자나 전토(田土; 논과 밭 따위의 경작지)를 버리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히 11: 24 – 30) 모세의 믿음. 모세는 일시적 죄의 쾌락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고, 메시아가 당하는 치욕을 애굽의 재물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다. 사부님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순종했다. 예수와 같이 죽고 예수와 같이 살기 위해 십자가의 길, 가난의 길, 고난의 길, 겸손의 길, 거룩한 길, 약속의 길로 나선 것이다. 결단을 내리고 나서 날듯이 기쁘고 감사와 평화가 넘쳤다.
개천산은 바로 하늘을 열어준 산이요! 변화된 개천산으로 다가왔다. 하늘도 땅도 새로워졌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빛나 보이고 같이 기뻐해 주었다. 영안(靈眼)이 열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영원을 살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무안히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크신 은총으로 스승 이공님의 거룩한 영성으로 깨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이시다. 깨끗해야 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사부님은 성령의 은총으로 아버지의 크신 뜻을 직관하시고 관철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은총으로 주신 성령의 빛으로 인간의 본성도 직관하셨다. 인간의 피와 살의 본능이 70도가 음란의 힘이요 짐승과 동일함도 직관하였다.
사부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바르게 갖고 보니 부르심의 사명이 확실해지셨다. 거룩한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바로 생명과 몸으로 전하기 위해 출발하셨다. 목마른 영혼들이 생수를 못 먹고 번뇌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세속화되어 썩어져 가는 교계를 향해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야 한다.
☉ 이현필 사부님의 설교(說敎)의 줄거리
✞개체 완성이 천하 완성, 우주 완성이라고 하심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가 가셨다.
✞참믿음은 예수님같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는 생명이다.
✞62년도 도암 수양회 때 성모님을 의지하라고 발표하셨다.
✞넝마 생활할 때 개에게 물려 놀랜 것을 10리 밖에서 다 알고 계셨다.
✞1964년 3월 17일 마지막 예배 시간에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라고 하셨다.
(요17: ) 하나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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