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째 내와와 친구 내외가 내려와 주변 구경을 하고 갔다. 40여년 전에 내려와 살았지만 이제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을 보았단다. 인생살이에서 친구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준다.
오늘은 동광원 지당 어머니를 소개할가 한다.
지당 어머님
외가가 멀리 있는 탓으로 중매쟁이에게 속아서 15세 어린 나이에 40이 된 재혼 자리를 오신 어머님. 혼례식 마당에서야 속은 것을 알고 외할머님께서 치알(천막)을 걷어차고 난리가 나서 혼례를 못하고 소동이 나고 아버지는 가마에서 내려오지도 못하시고 되돌아가라는 외할머님의 병력 같은 고함 소리에 혼인예식 마당은 수라장이 되었다 합니다. 그때의 아버지 입장은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보다 못한 어머님께서 내가 전생에 저 집에 빚이 많아 갚을 게 있어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 합니다. 생각에 생각을 하시고 어머님께서 할머니께 내가 가겠노라고 일어셨답니다. 할머님 반대를 무릅쓰고 마당으로 나가셨답니다. 난리 속에 혼인을 치르고 다음 날 하루를 걸려 가마를 타고 오시는데 그 심정을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하십디다. 오셨는데 5남매가 앞에 와서 절을 하는데 앞이 캄캄하면서 목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하십니다. 그 이후로 그 쓴물이 계속 올라와 그로 인해 평생을 진지 한 그릇을 못 드셨던 어머님. 그리고 사시는데 어떻게나 우상숭배는 심해서 대문 앞에 물밥 마를 날이 없었다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세상을 사시는데 마침 지당에서 부자로 사신 할머님이 한양을 다녀오시더니 복음 전도를 받아들고 오셔서 어머님께서 전도를 받으셨다 합니다. 물론 양반 가문에 우상에 절은 가문에서 반대가 없을 리 없었겠지요. 허나 어머님께서는 살길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도 어렵게 사시면서 5남매를 다 결혼을 시키시고 어머님이 딸만 5형제를 두시고 38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순녀는 난지 3일 만에. 그러니 무슨 꼴이 되었겠는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세상. 논은 수해가 나서 다 떠내려가고 자갈밭 강변만 남고, 큰언니만 결혼하고 밑으로 딸만 4형제였었는데, 거기에 갓 태어난 저는 또 9달 만에 태어났다 합니다. 그렇게 살길이 막연한데, 그때 이미 전도를 받아 신앙을 갖고 계신 것이 어머님으로서는 큰 힘이 되셔서 배겨나신 것이었다고 하십니다.
어머님은 제가 어려서부터 자다 보면 언제나 엎드려 기도하시고 편히 자리에 누워 주무시는 모습을 별로 뵈온 적이 없으셨던 어머님. 찬송을 부르시면 1장에서 600장 다 외우신 한 곡조로 통하는 찬송 1장부터 끝장까지 다 외우시며 부르신 찬송 소리가 지금도 귀에가 들리는듯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몰랐으면 이 육신도 살지 못했노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님. 누구를 만나든 첫 말씀. ‘하나님 믿으시오. 하나님 믿지 않으면 우리는 살길이 없습니다.’ 하셨지요. 일제 말엽 한번은 4km가 넘는 교회를 가시다 순경에게 취조를 당하셨습니다. 당신 어데 가요? 예, 나 예배당 갑니다. 퇴비 안하고 무슨 교회인가? 하나님이 어데 있는가고 권도로 어깨를 누르며 위협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퇴비 증산하시오 하니 어머님께서 당신 하나님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거요?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당신 오라 하면 가야 하는데 하나님 없다고 무엄하게 말하는 거요? 하시며 큰소리를 하시니 그대로 끌고 주재소로 가서 3일을 감금하고 4일 만에 집으로 돌려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고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렇게 꿋꿋하게 신앙으로만 사셨던 어머님이 마을에 어려운 형편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 누가 어딘가 아프다고 모시러 오면 밤새워 기도하시고 말씀 전하시기에 정말 혼신을 다하신 어머님. 공직으로 있던 손주가 할머님 때문에 우리도 잡혀가게 되었다고 할머님께 사정을 했어요. 할머니 맘으로만 믿으시고 믿는다는 것을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전도하지 말라고 사정을 합니다. 허나 할머님의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이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 문을 닫으니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서재호 집사님께서 오시게 되어 이현필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뵈옵고는 어머님은 교회에서 제명을 당하고 저나 언니는 광주로 가고 어머님 혼자 계시는데 동광원 학생반이 지당와서 한 반이 같이 살다가 학생반이 광주로 가게 되니 어머님은 인천 언니 곁으로 가셨지요. 그때 한창 박태선 장로가 열풍을 불던 때 결혼을 안하고 예수만 믿고 살 수 있다는 말에 어머님은 저의 형제를 전도관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신앙촌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박태선이 장가를 갔다 하니 당장 인천으로 나오셔서 계시다가 내가 죽어도 성지에 가서 돌아가시겠다고 저희 있는 동광원으로 오셨습니다. 집을 팔아 남원 집 짓는 데 보태시고 오북환 장로님이 계화도에 계시니 그리로 이사를 하셨지요. 언제나 아니다 싶으시면 망설이지 않으신 분, 그런 분이 인천에 계시다가 나는 성지로 가서 하늘나라 가시겠다고 결단을 내리시고 당신이 직접 사람을 데리고 오셔서 집을 팔고 남선으로 내려오셔서 계화도를 거쳐 남원으로 오셨습니다. 남원 오셔서 그렇게 기뻐하시고 사시다가, 그때 남원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1주일에 1분씩 천국을 가셨습니다. 계속 3분이 금요일마다 가시는데 어머님은 3주 금요일 사순절 기간에 가셨습니다. 앓으시면서도 대소변 남에게 보이지 않으시고 늘 하신 말씀이 예배를 드리라고 평소에도 예배를 그렇게 중요시하시고 예배를 하루 몇 차례고 좋아하셨지요. 가실 때 너무 호흡이 힘들어하시기에 ‘어머님 너무 힘드시지?’ 하니 ‘아니다. 이때를 바라고 살았는데 이게 힘들겠니?’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기쁘게 분명하게 종신하셨습니다. 너무도 기뻐하시었지요. ‘아버지가 나 오라 하신다’. 당신 가실 날을 하루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나 내일 아버지가 나오라신다. 하시고 다음 날 아침에 예배드리고 형제(춘일)가 어머님 언제 가실 것 같아요? 하니 오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예배드리고는 나 오라 하신다면서 나 오늘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고 오전 9시에 숨 한번 크게 쉬지 않으시고 저희들도 모르게 가만히 운명하셨습니다. 누가 보이십니까? 하니 저기 멀리서 성모님께서 손짓을 하시며 어서 오라고 하신다고 하시더군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을 뵈옵고 있는데 호흡 한 번 거칠게 쉬시지도 않으시고 아주 조용히 아버지 품으로 안기셨습니다. 그런데 운명하시면서 어머님 게시는 방안에 왠 향취가 그렇게 나는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눈물이 나고 서러우면서도 얼마나 감사가 나오는지요.
헌데 어머님이 계신 아버지의 나라 그 속죄의 구원의 길을 저에게도 밝히 일러 주시고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영혼을 구하소서. 당신은 저의 속제물(贖祭物)이 되셨사오니 저희도 사랑의 제물(祭物) 되게 인도해 주옵소서.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아-멘. 당신의 사랑하신 딸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기도가 나왔습니다. 아-멘. 헌데 밖에서 어느 형제가 아침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지당 어머님이 흰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래어 깨어서 왔노라고 방으로 들어오시더군요. 헌데 어머님이 운명하시니 온 방안에 사과향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향기를 저는 처음 맡았습니다. 아무리 이리저리 보아도 향이 나올 데가 없는데 그렇게 향기가 났습니다. 주님 이렇게 가신 분들을 통해 많은 확신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운 어머님, 뵈옵고 싶은 어머님, 지금도 저희를 위해 빌고 계실 어머님, 그렇게 분명하신데 이 못난 저희를 위해 빌어주시옵소서. 어머님.
1986년 2월 28일 오전 9시 성금요일 운명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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