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니 개알꽃이 활짝 피었다. 겨울에도 피는 야생초인데 날씨가 흐리고 비가와서 보지 못했는데 해가 나오니 온 밭과 뚝에 개알꽃이 활짝 피었다.
✞황홍윤 어머니의 고백
김춘일 언님
남편의 가는 길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부인은 할 수 없이 큰집으로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은 조금만 고생하고 참고 있으면 돌아올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일각이 여삼추와 같이 지루하고 외로워 더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었다.
중매한 형부 백영흠 목사를 찾아가 울면서 원망을 했다. 그때마다 형부 목사는 ‘괜찮아 괜찮아’라고만 했다. 애증은 하나라는 말과 같이 그립고 보고 싶은 애정의 감정은 미움의 감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번뇌와 고통은 쌓이고 밤마다 고독을 안고 몸부림치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숨을 쉬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죽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혼자 죽기는 너무 억울했다. ‘미운 님하고 같이 죽어야지’ 하면서 남몰래 칼을 품에 품고 다녔다고 훗날 고백하셨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여경에 지원해 여경 훈련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김은연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전남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젖먹이가 딸려있고 애기를 보기 위해 어린 조카도 같이 왔다. 홍윤 엄마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한방(같은 방) 훈련생들에게 양해를 얻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우리가 한 수저씩 덜먹고 이 딱한 세 식구를 돕자’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50년 6.25가 (광주에는 7월 23일) 터지고 기세가 당당했던 경찰들은 기가 죽고 사기가 떨어지고 갈 곳이 없어졌다. 이 상황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의 종 사부님은 사람을 보내어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화순 도암으로 피란 가자고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은 또 한 번 남편의 사랑을 느끼고 울었다. 은연 친구는 삼 남매를 큰집에 맡기고 동료들 5명과 함께 동광원 식구들을 따라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 유화례 여선교사님은 이 몸은 한국에 바친 몸이라고 죽어도 한국에서 죽는다고 광주에 남아 계셨다. 운전기사로 있던 방안식 씨가 달려와 사부님께 이 소식을 전했다. 사부님은 빨리 이곳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사부님은 여선교사님을 짐짝처럼 꾸며 지게에 짊어지고 도암까지 모시고 가도록 했다. 화학산 굴속에 숨어서 3개월간 구사일생의 시련을 겪었다. 하나님의 딸은 깨끗이 죽기 위해 목욕을 하고 계셨다.
김은연 친구는 평양이 고향이다. 일본 강점기에 중국에서 전라도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남편 고향 시집(시댁)으로 왔으나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부인이 먼저 여경이 되고 남편도 다음에 경찰이 되었는데, 남편은 여순사건 때 지원병으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순직했다.
3개월간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원상복구가 되었다.
사부님은 김준호 제자와 15일 후에 하산하셨다. 사부님은 당신 때문에 여러 사람이 순교를 당했는데 무슨 낯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굶어 죽는 죽음보다 더 깨끗한 죽음은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를 위해 할 수 없이 15일 후에 하산하셨다.
은연 친구는 외모도 예쁘지만 정직하고 겸손하고 신앙이 깊고 경우가 바른 친구였다. 오갈 곳 없는 자기들뿐 아니라 미국 선교사까지 생명을 내놓고 감싸주신 그 큰 사랑을 꿈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은연 언니가 선생님께서 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동광원을 찾아와 방문을 열고 사부님을 뵙는 순간 그 인격에 압도되고 말았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나 입이 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만 한없이 흘렸다. ‘다음에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겨우 남기고 사부님 방을 빠져나왔다. 아버지의 성령으로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다.
고향 평양에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오늘에야 동천이 열리고 하늘의 신선한 거룩한 은총의 숨을 마시기 시작했다. 암담했던 인생 문제 생존 경쟁의 문제가 확 풀리고 인생의 정로, 가야 할 길이 밝히 보였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친구는 기쁘고 즐거웠다. 사람이라야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과 같이 은연 친구는 어두운 굴속에서 빠져나오는 큰 기쁨이었다. 친구를 보고 ‘어야 자네 남편, 의인이네 의인이여. 받아만 준다면 나 아이들 데리고 살러 갈라네. 자네도 같이 가세’ 했다. 그러나 친구는 거절했다. 몇 차례 의논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삼 남매를 데리고 영혼의 평화를 찾아 영혼의 고향인 동광원에 들어왔다. 1952년 33세 때 들어와 40여 년을 열심히 봉사하시고 91년 72세로 원하시던 평화를 얻고 아름답게 세상을 뜨셨다. 귀일원 2대 원장으로 계시다 세상을 뜨셨다.
외롭고 고독했던 홍윤 엄마는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 의지하면서 친구 삼 남매를 같이 기르면서 살기로 했다. 그러나 의지했던 친구마저 하필이면 그 미운 님을 따라가고 마니, 속이 상할 대로 상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들 원수를 갚아야지’. 그래서 재혼을 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얼마 전부터 요청해온 상처(喪妻)한 남자와 재혼을 했다. 본실 자녀 사 남매를 길러 결혼을 시켰다. 남편은 부인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친정어머니는 의인 남편 버리고 시집갔다고 딸 집에 한 번도 가시지 않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첫사랑의 상처는 항상 마음속 깊이깊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1964년 3월 18일 사부님의 귀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슬픔의 보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가게에 앉아있으면 가게 앞을 지나가면서 방긋이 웃어주는 그 미운 님의 모습마저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한없이 서글펐다. 그 후 영감님도 돌아가시고 6년간 시내에 계시다가 1996년 7월에 도장리 종순 씨(정월례) 땅을 얻어 집을 짓고 이사 오셨다.
그 어머니를 볼 때마다 미안하고 죄송했다. 어머니가 받아야 할 사랑을 우리들에게 억지로 빼앗기고 고생하신 어머니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들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는 도장리에서 3년간 회개의 눈물을 흘리시고 사부님의 사진을 보시고 ‘내가 잘못했소. 그때 바늘귀만큼이라도 보였으면 이렇게 후회되는 50년을 안 살았을 것이요.’ 하시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나같이 후회되는 삶을 살지 말고 예수 바로 믿고 어른들 말씀 잘 순종하라고 전도하셨다. 날마다 이공님 부인 묻힌 산을 향해 기도하시고 묵주신공 바치시고 1998년 12월 28일 82세를 일기로 아름답게 성화되어 한 많은 일생의 막을 내리셨다.
아버지, 성모님 감사합니다. -아멘-
✞생각따라 마음따라
홍윤 사모님을 그리며...
생각 따라 마음 따라 미운 님 고운 님
1. 정든 님 맨발 벗고 외개길에 나서니
떠난 님 그리워 고독만 쌓이는구나
정든님 가신길은 아득한 천리 길
미운 님 가실 길이 회개인지 몰랐네
은총으로 가는 길 겸손하게 가는 길
생각 따라 마음 따라 미운 님 고운 님
2. 후회되는 50년을 바람결에 보내고
기저귀 차고서야 엄마 찾는 어린애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공포라
인제야 뚫린다. 바늘귀가 보인다
정든 님 맨발 벗고 가신길이 보인다
생각 따라 마음 따라 미운 님 고운 님
3. 내 안에서 찾았네 하늘 가는 밝은 길
죄의 빚 갚고 보니 남은 것은 흙 한 줌
도장리 언니 동생 사랑의 빚 이고 지고
날마다 기도하던 한골 엄마 무덤 곁에
보기도 아름답다 회개한 두 무덤
생각 따라 마음 따라 미운 님 고운 님
홍윤 엄마를 추모하면서 지은 시 1998. 12. 28 도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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