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해나고 또 눈발이 날린다. 어제 일산에서 조카네가 다녀가고 평택에서 아들네가 왔다. 나라가 총선을 앞 두고 시끄럽다. 아직도 무 말랭이 작업을 한다. 진도살이 40년을 회상해 본다.
동광원 진도분원 자료 모음
1. 진도 동광원 내려올 때
장금실
저는 풀무원에서 기도를 여덟 달 했어요. 건강이 나빠져 공동체에서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힘든 농사일을 그만두고 조경하는 일이나 해보라고 하셨다.
제 나름대로 우리가 없어도 풀무원은 괜찮을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우리 저 바깥분이 사람은 때를 잘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보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때를 잘 찾아야 한다는 말을 좀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풀무원 생활을 팔 년을 했지만, 그러고 내일은 자고 나면 또 오늘도 이 하루하루를 지낸다. 이 가정생활에는 이 마음이 없었어요. 그러나 공동생활에는 그 마음으로 팔 년을 사는 거예요. 그래 기도를 했습니다. ‘있어 랍니까? 가랍니까?’ 그거였어. 그걸 여덟 달을 했어요. 그 기도를 했는데 그렇게 해서 이제 오게 됐고 여기 와서 보니까 춘일 형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사 년 뒤에 말씀하셨는데, 소죽을 형님이 맡으셨데요. 소여물 죽을 왕겨 불로 끓이면서 기도를 했데요. 그걸 그때 바로 말씀을 안 해주시더라고요. 저는 여덟 달 기도했다는 얘기를 했는데도…. 풀무질해서 소죽을 끓이면서 그 기도를 하시기를 일 년을 하셨데요. 저는 팔 개월이니 참 저희들은 와가지고. 저는 이제 풀무원에서 안했죠 전혀. 제 건강이 안 좋아서 그냥 선생님이 풀무원에 있으라고, 다른 데 쉬운 걸로 하라고 그러시는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공동생활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에서는 일을 너무 잘해도 걸림돌이고 못해도 걸림돌이고. 나는 그래도 좀 오래 있었다고…. 내 성질에 가만 있을 성질은 아니고, 남에게 시험 거리나 되고 남 넘어지게 하는…. 아무래도 내가 없어져야겠더라고요. 그래 기도를 시작했어요. ‘풀무원에 있을 때 죽이시려면 죽이시고 그렇지 않으면 나 어디로 쫒아버리시라’라고. 그때 우리 형편은 주혈이가 17살, 주광이가 중학 1학년, 주염이가 초등하교 3학년, 주헌이가 1학년, 한참 먹고 돈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러나 없이도 살아온 그 경험이 있으니까. 나 살리려면 살려주시겠지. 그까짓 거 아무 데나 쑤셔 넣으셔도 내가 뭘 두려워하겠냐고. 공부 못 시키면 못 시키는 것이고. 그런 거 두려워할 게 없는…. ‘하나님 저 죽는 것도 두렵지 않으니까 그 때를 잘 찾아서 인도해 주세요.’ 그때 녹진 옆 대사 간척지 땅 이십만 평을 인수해 보라는 청을 받고 오영환 선생과 내려왔습니다. 한 사람씩 한 가정씩 그 땅을 나누어 청년들 자립시키려고 그걸 보러온 거야. 근데 이제 명목상은 제가 건강이 안 좋으니까 누가 여행을 한번 해보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여행을 열흘을 잡았는데, 사람 만나고 다니는 여행을 시작했어요.
언젠가 선생님이 진도에 사는 동광원 춘일 형님 얘기를 해요. 그 춘일 형님얘기 하는데 귀가 요렇게 되는 거야. 번쩍하니. 아! 내가 그분을 좀 만나 보아야겠다. 근데 공동 생활하는 주제에 어떻게 해? 혼자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그런 때만 기다리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죠. 이번 여행할 때는 진도 꼭 한번 보고 와야지 생각도 있었지요. 그래서 이제 처음에 오영환 선생님하고 그렇게 했어요. 근데 가보니깐, 허허벌판에 개미 새끼 들어가서 허우적대는 것 같아. 아유! 여기서는 일만 하다가 허우적거리다가 그냥 죽겠다고…. 그래서 이제 춘일 형님이 그날 눈보라가 많이 치는데 안내해줘서 갔다가 왔는데, 그래서 어떠시냐고 모여서 물어보시기에, ‘아이구! 물도 없고 너무 크고, 아유! 못하겠다’라고 그랬더니, 춘일 형님이 가만히 ‘그럼 여기서 하쇼’. 말도 그렇게 쪼그마하게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그런데 저는 그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근데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예요. ‘내가 잘 못 들었나?’ 이분들이 갈 분이 아니잖아요? 이상하다. ‘형님 뭐라고 그러셨어요?’ ‘아 여기서 하란 말이오.’ 힘도 안 들이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해요. 그래서 그냥 제가 ‘어떻게 저 같은 죄인이 여기 와서 살겠냐고, 형님들이 사시는데 형님들이 사셔야지.’ 이제 그러니까는 ‘해도 된다’라고…. ‘그러면 제가 요 집이 비어있으니까 요 집하고 저 밭들 남 줬더구먼요. 그러면 형님들 사시는 생활 좀 배우게 요 집 하나 하고 남 내준 밭하고 좀 주면 그렇게 형님들 옆에 모시고 사는 거 좀 배우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 선생님하고 정 원장님이 얘기해서 풀무원 분원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2. 오북환 장로님 증언
광주로 내려온 후 진도에 처가가 있는 방안식 씨(선교사 운전수)가 진도에 고아가 많은데 돌 볼 사람이 없다고 이 선생 보고 말해 진도 책임자로 내가 3월 8일 내려가게 되었다. 도착은 9일이었다. 3.8선은 내 마음에도 생긴다 했다. 9일 주일 날 방안식 씨 차로 고아 데리고 세등 동네로 왔다.
이현필 선생은 하나님 말만 듣지, 사람 말 안 들었다. 어느 날 김준호 씨가 ‘이 선생이 오시래요.’ 해서 걸어갔다. CAC 운전수 방안식 씨가 진도 처가에 가보니 그곳에 고아가 많아 돌볼 사람이 필요한데 동광원에 부탁하면 해결될 것 같아 얘기했다고 했다. 몇 연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짜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3월 8일이었기 때문이다. 3.8선은 우리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9일 주일 날 고아를 모집했는데 세등에서 맏딸이 5세인 5명의 고아들을 차에 태우고 군청에 가서 5명분 식량을 타가지고 향교로 갔다. 그 후 방 씨 처가(장모 이옥금 씨) 오두막에 있다가 고향에서 면장도 한 김춘일 씨 아버지 목사 소개로 군청에도 말해 주고 연산리 사토를 소개해 주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 광주 누문동교회 시무하실 때 춘일 양은 12세였고 그때도 친절하게 지냈다. 이곳에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사게 되었다. 돈지 어머니 집에 살다가 세등(친정집) 가까이 오게 되었다. 인원이 많아져 군청에서 고아들 데려가고 본 식구만 남게 되었다. 모두 3개월가량 살았다.
3. ‘진도 동광원 초창기 생활’ 좌담회 기록
장소 : 남원 대산 운교리 동광원
일시 : 2019년 4월 15일 오후 2시
사회/기록 : 연산 김종북
(사 회) 그때 사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그런데 거기에 50년대 들어가셨잖아요?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제가 알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때 사셨던 분들, 거기 다녀가셨던 분들, 그때 기억만 좀 얘기해 주시면 돼요.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말씀 안 하시면 제가 물어볼게요. 거기 계실 때 누구누구 사셨는지 그분들 그 얘기해주시면 돼요. 절대 부담가지시지 말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복 집사님 녹음기 안 가지고 오셨어요?
(김금남) 8.15 해방 후니까 6·25 때 이북서 온 반이 있었어요. 그 반을 다 데리고 진도에 갔었어요. 가니까 방이 이렇게 한 칸 있고 가운데 부엌이 있고, 또 이쪽에 방 한 칸이 있고 그러데요. 근데 가니까 서 집사님이 남반 한 반을 데리고 사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귀주 어머니가 사시고, 그래서 여반을 데리고 가서 몇 년 살았는지 산 연수는 모르겠습니다. 한참 살았어요. 한 일이 년은 산 것 같아요.
(사 회) 다른 분도 얘기하시지요.
(조성애) 저희는 그쪽에서 한나 어머니하고 살았어요. 진도 처음에 갔을 때, 그리고 서울 학생 남반이라고 있었어요.
(김금남) 그 해 몇 살 때라고 말해요. 몇 살 때?
(조성애) 동광원에 오기를 12살 먹었을 때 와서 지산동에서 좀 있다가 갔으니까 이듬해에 가지 않았는지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때 가서 서울에서 내려온 남반하고 살다 온 사람들과 같이 갔잖아요?
(오세휘) 아니에요. 우린 우리대로 갔고, 그 남반은 한참 동안 계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남반이 먼저 갔어요. 맨 처음에 갔어요. 연산에 집 안 샀을 때 갔어요. 그러니까 옥금 씨 집으로 봄에 가서 한동안 살다가 군청 뒤에 향교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얼마를 살았는지 몰라. 그래서 이제 연산으로 가니까 집이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아까 원장님 말씀대로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에 방이 있고 한쪽에는 여반이 살고 한쪽에는 남반이 살았어요. 그게 진도에 가서 세 번째 이사했을 때요. 세 번째 간 집이지요.
(방순녀) 진도에 가서 옥금 씨 작은방으로 갔다가 향교로 갔다가 세 번째 간 집이지요.
(오세휘) 그렇지, 세 번째지.
(조성애) 우리도 처음에 진도 갈 때는 배에서 내려서 걸어가니까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옥금 씨 어머니 집 같아요. 우리가 거기서 살았어요. 거기 가서 그리로 들어갔어요. 우리가 처음에 와서 배에서 내려서 가니까 오 장로님도 옛날에 거기서 뭐 헛간 같은 데서 일하고 계신 게 기억이 나고, 또 거기서 저희도 며칠 있다가 그때 연산에 왔거든요. 그래서 한쪽은 남반 요쪽은 여반 그렇게 살았는데 그때 한나 어머니가 있었어요.
(사 회) 한나 어머니도 계셨네요?
(김금남) 귀주 어머니가 처음에 갔을 때는 계신 것 같은데….
(조성애) 한나 어머니가 계셨고 서 집사님도 계시고 지금 서울에 사시는 인옥 씨 장로님과 두 분이 남반들 하고 같이 계셨습니다.
(사 회) 그럼 이야기가 거의 다 된 건가요? 거의 그 이야기가 진도에서 만든 동영상에 나와 있어요.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시더라고요.
(방순녀) 그리고 우리가 저 수인씨 차 타고 해남으로 가서, 계속 찬송가 부르고 갈 때 그때 같이 안 갔어요? 그때 가서 두 반이 같이 나왔어요.
(조성애) 그래서 우리가 거기서 살고 있으니까 6.25 전에 오셨던 사시는 언니들이라고 이 선생님이 같이 데리고 진도를 오셔서…. 우리가 거시서 살면서 그 바다에 다니면서 갈파래 뜯고 쑥 뜯고 그러니까 몸이 막 깔따구는 많고 바다에 가서 젖은 갈파래 뜯어서 지고 오면 물이 흘러서 이 등들이 다 젖어졌었어요. 하여튼 간에, 그때는 우리랑 가서 살다가 그 전에 그랬어요.
(방순녀) 진도 모기라는 것은…. 밤에 길을 못 가요. 요렇게, 요렇게 헤치고 가야지, 눈 앞을 가려 가지고, 밤에 어찌나 모기가 떼로 달라붙는지 요렇게, 요렇게 헤치고 가야 해요.
(조성애) 그래서 깔따구들이 말도 못 해요. 머릿속이고 어디고 다 파고들어서 물면 아주 많이 사람 정신이 없어져요.
(김금남) 지금 생각이 나는 것이 이 학생반을 데리고 사는데 방이라고 너무 좁지요. 그런데다가 어떻게 빈대가 많은지 벽에 전부 빈대 구멍이에요. 도저히 잠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엌에다가 가마니를 깔고 그러고 살았어요. 그러고는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바닷가에 많이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우리는 고기 안 먹을 때니까 바다에 가도 절대 고기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고, 갈파래 그것이 나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너벅발이라는 것도 나고 청각도 나고 그래서 한물 때 가면 물이 조금 빠지니까 바위에서 조금 뜯어오고 또 두 물질 때 가면 조금 더 깊은 풀이 나서 뜯고 세 물 지고 나면 그때 가니까 깊은 데까지 들어가도 이렇게 위에까지 안 올라오더라고요, 물이. 근데 제일 기억나는 것이 청각이 막 요렇게 기어 올라오더라고요. 그거 뜯는 것이 그렇게 재미가 있고, 근데 그렇게 뜯고, 힘든 줄 모르겠어요. 거리는 한 십리가 넘은 것 같아요.
그렇게 가면 모두 힘껏 다 지치고 오죠. 그러면 남반이 받으러 와요. 그래서 도중에 인계해주고 한 기억이 나요. 그래도 이런 데(산중)서만 살다가 바닷가에 가니까 생소하고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고 그렇게 힘든 줄은 모르고 그러고 가니까, 서울에 있는 사람 인옥 씨가 수박을 많이 심어서 그거 먹던 것이 그렇게 기쁜 기억이 나요.
그렇게 살고 있는데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오셔서는 저희는 모르는데 같이 사니까 모르는데 너무 보기가 애처로웠던가 봐요. 우리 사는 것이, 너무 사람들이, 한참 크는 사람들이 말라서 있으니까, ‘가자’. 데리고 가고 싶었던가 봐요. 그래서 선생님 뒤따라서 모두 나왔어요. 목포로 해서 그렇게 나온 기억이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방순녀) 그때 가서 살 때, 이 선생님 모시고 살 때, 한참 가물어서…. 금골산에 예배를 보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식구 전체가 예배를 보러 갔어요. 예배를 보는데 이상해요. 예배를 막 끝내고 이 선생님이 ‘빨리들 집에 가시오. 비가 옵니다’. 우리 집에 도착하기 전에 뇌성이 울리고 소나기가 내려 가뭄을 해결했거든요.
그 시절 식사가 무엇이냐면 아침은 큰 참외 반쪽, 저녁은 옥수수 1통. 참외 반쪽 먹고 나면 배가 부른데 옥수수 1개 뜯어 먹고 나면 배고 고파요. 그동안 다 꺼져버렸어요. 그런 기억이 나고….
그러고 그 반을 다 데리고 같이 나왔지요. 나올 때 풍랑이 어찌 심하던지, 해남으로 왔든가 목포로 왔든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나오니까 사람들이 모두 놀래요. 이 풍랑 속에, 운항 금지령으로 배들도 못 다니는데 어떻게 살아서 나왔는지? 모든 식구가 뱃멀미로 토하고 그랬어요.
(오세휘) 해남으로 갔어요. 죽을 뻔했어요. 내가 어찌 토했든지….
(방순녀) 그때 참 같이 나왔어요?
(오세휘) 먹을 것이 없으니까 바닷가에 가서 밤낮 파래 같은 것 먹고 사니까 화장실은 큰 웅덩이 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하니까 너풀너풀….
(조성애) 그때는 먹는 게 그러니까 배앓이들을 잘했어요. 쑥을 삶아서 한나 어머니가 쑥물이 쓰니까 잘 안 먹으려고 하니까 쑥물을 잘 먹어야 예수를 잘 믿는다고 그러시면서 큰 통에다 떠가지고 다니면서 떠먹여 주시던 그것이 항상 제일 안 잊히데요. 우리가 거기서 살 때 쑥을 삶아서 쑥을 식량으로 하고 쑥물을 하나도 안 버리고 그릇그릇 다 두어서 그걸 다 마셨거든요.
(오세휘) 한번은 서 집사님하고 같이 살 때, 아침에 해가 떴더라고요. 몇 사람이 안 일어났어요. 서 집사님이 양동이에다 물을 떠다 확 찌끄렀어요. 그게 생전 안 잊어버려져요. 나는 일찍 일어났는데 몇 사람이 자고 있다가 이 양반이 참다못해 양동이에 물 질러서 방에다가 이불 덮고 있는데…. 생전 안 잊어버려져요.
잠자리도 안 좋았어요. 가마니를 깔았더라고요. 기억나실 거예요. 가마니를 깔고 자다가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다고 물 찌끄러 버렸지요.
(조성애) 그래서 물을 갖다 부어버렸어요, 방문을 열고. 이 양반들이 자다가 놀래서, 뒷산으로 다 올라가고 그랬어요.
하루에 두 끼 먹는데 아침은 참외 반쪽 저녁은 옥수수 한 통
(방순녀) 두 끼를 먹었는지 어떤지…. 그때 식사가 참외 반쪽하고 옥수수 1개였으니까…. 참외 반쪽 먹고 나면 참외가 크니까 배부른데, 옥수수 1개 뜯어먹고 나면 곧바로 배가 고파. 그때 여럿이 갔을 때 그랬어. 학생들하고 여럿이 갔을 때. 그리고 거기서 살 때는 주로 주식이 갈파래였으니까.
(사 회) 예. 파래는 소화가 잘 안 돼요.
(방순녀) 그때 쑥이 없었어요, 거기에 진도 연산. 진도 땅이 사토라고 이름이 났더라고. 죽은 땅이라고. 그래서 쑥을 먼 데서 캐다 심었데요. 서 집사님 계실 때…. 그 뒤에는 쑥이 있었지요.
(조성애) 우리는 하여튼, 그때 갈 때, 진도 처음에 갈 때, 4월에 갔어요 4월에. 왜 기억이 나냐면, 옥금 씨 어머니 집에를 들어갔는데 부활절이라고 쑥을 캐오라고 해서 떡을 해주셨든가 해서 4월이란 걸 기억 하거든요. 그때 인옥 씨랑 오 장로님 이랑 같이 살았거든요.
(오세휘) 예. 서울서 살던 사람들이 그대로 목포에서 어느 장로님 집이라는 곳에서 신세 지고 아침 얻어먹고 배 타고 진도 집에 왔어요.
(사 회)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능곡이죠? 경기도 능곡에서 사시다가 이리 오신 거죠?
(김금남) 그때 내려간 사람들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오세휘) 50년대예요, 하여간….
(방순녀) 그러니까 그때 내려간 사람들 이름을 말씀해주시라고요.
(사 회) 혹시 같이 내려오신 사람들?
(오세휘) 태현이 명훈이 성춘이 나 의용이 명진이
(방순녀) 태평이는?
(오세휘) 태평이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
(복은순) 있었어요. 거기서 살다 나왔어요.
(오세휘) 아, 그러면 다 데리고 왔구나. 하여튼 서울 살던 사람들은 다 데리고 나왔어요.
(사 회) 그때는 그러니까 오 장로님 안 계시고, 서 집사님이 책임자로 계셨어요?
(오세휘) 예. 처음에는 오 장로님 계셨는데 언제 가셨는지는 모르겠고.
(사 회) 오 장로님이 먼저 진도에 내려가셨고, 향교에 사실 때는 서 집사님이, 그리고 귀주 어머님도 계셨고. 근데 한나 어머님도 계셨다는데, 그러면 귀주 어머니 전에 계셨나요?
(오세휘) 한나 어머님은 기억이 안 나요.
(김금남) 한나 어머님은 기억이 안 나.
(조성애) 아녀요. 귀주 어머니는 언제 살았냐면 저기 저 돈지 살 때 귀주 어머니가 살고 계셨거든요. 돈지 가기 전에 귀주 어머니가 가셨어요. 귀주 어머니가 제일 오래 살았어요 거기에서.
(방순녀) 돈지 가기 전에 귀주 어머니가 함께 살다가 우리 나올 때 돈지로 같이 가셨어요.
(조성애) 그래서 우리가 언니들하고 같이 두 번째 같이 갔을 때구나. 그때는 거기 살다가 남반하고 바꿨거든요. 우리는 돈지로 가고, 인경이 그 양반들이 연산으로 오고 그랬어요. 제가 두 번째 가서 살 때 그때여 그때가.
(사 회) 원장님이 데리고 간 소녀반 누구 누구인지 기억나세요?
(김금남) 이북서 온 사람 다 갔을 때요?
(조성애) 근데 저는 가만히 생각하니까 하나도 모르겠어요. 몇 명이 간지도 모르겠고, 이름도 모르겠고. 누구라도 한 명 같이 살았다면 그때 누구누구 갔었는지 물어나 보겠는데 다 나가고 저 혼자 거든요, 남은 사람이라고는. 그러니까 어디다 물어볼 데도 없고.
(방순남) 그때 같이 갔던 사람이 성애 양, 인숙이, 경숙이.
(조성애) 경숙이는 그때 안 갔어. 거기 안 살았어요. 안 갔어요. 또 한 사람 있는데 생각이 안 나요.
(방순녀) 한 열일곱 분 된 것 같은데….
(조성애) 그 정도 된 것 같은데…. 세상에 그렇게도 깜빡, 그분들 다 이북에서 온 분들 다 가버렸잖아?
(사 회) 기록에는 안농에 피란민들이 있었잖아요? 진도 금골에. 거기 고아들 데리고 있었다고 그렇게 쓰인 것 같거든요. 혹시 안농 피란민 중 고아들, 동네 사람들 아니고요?
(김금남) 그게 아니고, 이북서 온 다른 피란민들입니다. 철순이도 그때 갔잖아?
(방순갑) 철순이도 갔어요? 그때 나도 갔는데 왜 갔을까?
(방순녀) 언니 갔을 때는 여럿이 풍랑 만났을 때 갔다가….
(방순갑) 해남으로 갔다가 진도로 갔어요. 그때 여럿이 갔어요. 어떻게 식구들이 그때 열댓 명 된 것 같아. 다 뱃멀미를 해서, 한나 어머니하고 나하고만 뱃멀미를 안 했고.
(방순녀) 그때 올 때. 갈 때는 안 그러고 올 때.
(방순갑) 나도 같이 갔어. 풍랑 만날 때 같이 갔어. 그때 갈 때. 다른 건 기억 안 나는데 남반이 먼저 가서 살아서 인옥 씨가 바작에다 수박 참외를 가득 싣고…. 그거밖에 눈에 안 보인다고.
(방순녀) 그때 우리가 갈 때 금남 언니가 거기 계셨어요. 농사지어서 그것을 먹고 금남 언니랑 전부 같이 나왔어요. 그때 언니가 갔을 때 금골산에서 예배 볼 때에요. 예배보고 내려와서 풍랑을 만났어요. 바다로 해초 뜯으러 간다고 했는데 못 갔거든.
(김금남) 우리가 그때 얼마나 못되었었나 봐. 얼마나 말라비틀어졌던지. 밤이면 빈대 때문에 잠을 못 자니까 부엌에서 가마니 깔고 드러누워서 자고 날 새면 갯가에 나가야 하고. 그래도 그렇게 재미가 있습디다.
(방순갑) 모기 때문에 밤에도 갯가에 나갔지. 그렇지 않으면 안 가지.
(김금남) 바다에는 어쩔 수가 없어. 바다에는 뭐 뜯으러 가지. 깔따구는 말도 못 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뼈만 남았었나 봐. 근데 우리는, 나는 몰랐어요. 재미만 있고 그랬지. 그리고 예수 믿으려면 그렇게 고생해야 하는 것 같고, 십자가 진 것 같고, 그렇게 좋더라고. 나는 그래서 그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보시더니 그냥 저를 부르시더구먼. 그러면서 안 되겠다고 다 데리고 가자고…. 그래서 그때 광주에서 오신 식구들이랑 같이 모두 나온 것 같아요. 내 생각에.
(방순녀) 그때 빈대라는 것은 자다자다 못 자고 나와서 옷을 벗어서 보면 옷이 빨개. 옷 속에 빈대가…. 그걸 못 잡아. 탈탈 털어서….
(김금남) 그때는 약도 안 할 때잖아요? 약도 없었어. 있어도 안 할 때지.
(방순갑) 그러니까 바다에 가서 앉아있었잖아.
(방순남) 그것은 돈지에서 살 때 그랬지.
(방순갑) 아니야. 그 때만 아니고 거기서도 그랬어.
(조성애) 우리가 가서 봄에 묵정밭 판 것 생각 안 나세요? 묵정밭.
(모 두) 묵정밭도 개간했지.
(조성애) 조그만 애들을 그 벌판에 데려다가 개간을 하는데, 바람이 얼마나 세요? 진도 바닷바람이. 그 바람 속에 묵정밭 일군다고 그 땅을 다 팠어요.
(사 회) 성경공부반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죠?
(방순녀) 그 이후예요. 이후에 계명산에 3번째 갔을 때 공부반에 갔어요.
(사 회) 그 계명산에서 찍은 사진 보면 1기, 2기. 그니까 1회 2회 졸업생 사진만 있던데.
(복은순) 저희가 2기였거든요. 언니들이 72년도에 계명산에서 공부하고 73년도에 가셨고, 우리는 73년도에 계명산에서 공부하고 74년도에 저희가 4명이 가서 일 년 살았어요. 귀주 어머니하고 74년도에.
(사 회) 그때는…. 그러니까 진도에서요?
(방순남) 네. 진도에서.
(사 회) 그리고 성경공부반은 1번만 그렇게 하셨나요?
(복은순) 아니요. 성경공부반은 7회까지 마치고….
(사 회) 7회까지?
(복은순) 네. 7회까지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 다 데리고 진도로 갔어요. 7회까지는 계명산에서 마쳤고. 거기서 공부를 마치고 나면 진도 도암 부안 계명산 광주 신안 등으로 몇 명씩 갈라져 가서 무조건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었어요. 저희 살 때는 집이 짚으로 된 옛날 집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까 돌집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국자 언니에게 물어봤어요. 그 돌집을 언제 지었냐고 했더니 국자 언니 계셨을 때 그 돌집을 지었데요. 그 초가집을 헐어버리고 사문자가 몇 사람 데리고 와서 집을 지었는데, 자기 인건비는 안 받겠다고 하더니 지붕을 아직 끝내지도 않고 가버렸데요. 그런데 그 돌을 어디서 나서 다했냐 했더니 날마다 금골산에서 손수레로 날랐데요. 엄청나게 고생이 많았더구먼요. 사문자가 지붕을 안 하고 가더니 오지 않더래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동네 이장님한테 사정해서 인부를 얻어서 지붕을 했는데, 벽은 돌로 쌓기만 했지 제사는 하지 않았데. 밖은 돌이니까 제사는 안 해도 되잖아요? 집 안쪽은 국자 언니가 그걸 흙으로 다하셨데요. 엄청나게 고생하셨죠. 그 이후 사문자가 자기 인건비 달라고 계속 독촉하더래요.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당시 국자 언니가 좁쌀 있는 거, 깨 전부 팔아서 인건비로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고는 먹을 것이 없어서 일 년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74년도에 살 때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아마 70년대쯤 지은 것 같아요, 그 돌집을.
(오세휘) 광주 씨 아들 이름이 무엇인지 그 사람을 내가 보냈어요. 초가집 때는 이렇게 집이 안 컸어. 더 작았는데 방 두게 하고 가운데 부엌 있고 그랬는데 지금은 크더라고요, 집이.
(김금남) 우리 계명산에서 공부 끝나고….
(복은순) 언니가 73년도에 살았어.
(김금남) 첫째 방에서 저하고 해신이 하고 정은 언니…. 정은이는 조금 살다 그냥 가버리고 그리고 어머니들하고 그러고 살았죠. 다 작은 데서.
(복은순) 우리는 저하고 겸이 언니하고 나숙자 언니하고 고복선 언니하고. 근데 셋이 키가 다 작아요. 배에서 내려서, 이것저것을 싸다 보니 꽤 커진 짐보따리를 이고 연산까지 오는데,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니까 더 키가 작게 보여서 서로를 쳐다보면서 저희가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성현이 이모 등 큰 사람들은 다 다른 데로 가고 그중에서 제일 작은 사람들만 진도로 가서….
저희가 72년까지 십 년 동안 저희가 기독병원에서 보조 간호사로 일했었는데, 귀주 어머니가 병원에 다니던 애들이 왔다면서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몰라요.
(이오순) 진도로 간 사람들은 부잣집으로 가서 사랑받고 살았는데 우리는 이숙자 로스앤젤레스에 박옥주 그렇게 넷이 없는 데로 가서 일 년 동안 우리는 고생고생하고 살고 그랬죠.
(복은순) 그래도 부안으로 간 사람들은 소식을 들으니까 일이 가을에 빨리 끝났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진도는 김 선생님 아시지만, 12월까지도 일이 있어요, 밭에. 유채 옮기고 뭐하고 우린 아직 할 일이 겁나게 있는데, 도암 식구들은 일찍 끝나고 다 끝났다고….
(이오순) 진도는 부잣집이라 잘 먹고 살았는데….
(복은순) 우리는 먹기는 잘 먹었지.
(이오순) 우리는 못 먹고.
(복은순) 방으로 절반이 고구마가 쌓여있고 그래서 우리는 먹는 것도 잘 먹고, 그 고생은 안 했지.
(방순녀) 공부반이 끝나고 목지에 간 것은 7회 반까지 끝나고 광주로 다 내려갔고 1회 반에서부터 7회 반까지 저 혼자만 갔어요. 그때 어머니들도 순이 씨 어머니 종우 씨 어머니 배자 어머니 그렇게 가시고, 우리도 저, 사연 양, 또 유엘라, 또 하나 나갔어요. 그 사람 학생 여섯인가 하고 장로님하고 열둘인가 진도로 갔어요.
(복은순) 몇 연도에 가셨었어요?
(방순녀) 그때가 아마 68년도일까? 78년도일까? 거기서 일 년 살고 계화도로 왔으니까. 계화도로 와서 지냈어요. 공부를 72년도에서부터 시작했는데요 72년도에 자기들이 살았고 78년도에 우리가 진도로 간 것 같아. 아니 77년도에 갔구나. 78년도는 계화도로 가고.
(복은순) 우리가 74년도 살았는데요. 확실히 79년도에 계화도로 갔어요. 그 안에 진도로 갔었지. 진도서 바로 거기로 갔으니까.
(조성애) 우리하고 그때 같이 가셨었어요. 그것은 그 전에….
(방순갑) 그니까 내가 진도를 3번을 갔어.
(조성애) 우리 살다가 언니들만 두 분이 나오시고 우리만 계속 살았어요. 그때 경숙이 성애 독임이…. 그때 8명인가 산 것 같은데.
(방순녀) 정식으로 공부반이 진도로 갈 때는 다 끝나고 1회 반에서 7회 반까지 장로님이 지적도 하고 가고자 하는 사람에 한하여 12명인가 간 것 같아요, 장로님까지. 명수는 확실히 모르겠고. 그리고 일 년 살고 계화도로 갔어요.
(조성애) 진도에서 살 때 돈지 어머니 모시고 거기서 사는데 여기 순심 언니 애 많이 쓰셨어요. 우리 데리고 산으로 나무하러 다녔지, 들로 밭매러 다녔지, 날마다 그러고 살다가 살다가 힘들이 드니까, 그때 명순 어머니하고 귀주 어머니하고 순심 언니하고 돈지 어머니하고 어른이 세분이여. 그리고 우리가 그때 한 8명이나 되었을까? 서순 언니에다 길람 언니에다 나간 장순 언니의 언니라고 그분도 계셨고, 거기서 살 때 겁나게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저 먼 데까지 가서 나무를 해서 마을까지 오면 산지기가 딱 뺏어가 버려. 하여튼 집에 다 오면 뺏어. 산지기에게 나무를 다 뺏기고 오면…. 우리는 양식이 없으니까 아침부터 한나절 동안 야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그 나무 주고 조 엿밥을 갖다가 바꿔 먹는 거야. 그때는 동네 사람들이 좁쌀 가지고 엿밥들을 많이 하데요. 솥에다가 엿밥을 하면은 좁쌀 잘잘한 것이 증기가 다 빠져버리면 껍질만 남아. 그게 엿밥이야.
소를 길렀는데, 그때 인욱 씨가 사셨을 때 소를 기르다가 가버리신 거야. 인자 소를 기를 사람이 없응께 저보고 꼴을 뜯어다가 먹이라고 해서 저는….
(방순갑) 몇 살 먹었는데 소를 먹여?
(조성애) 그때 많이 먹었으면 14살이나 먹었을까? 하여튼 어렸을 때 가서….
(방순녀) 15살 때였을 거예요.
(조성애) 그래요? 그러면 산에 가서 꼴 베어다가 소먹이고 그랬는데, 한번은 꼴을 베러 갔더니 버섯들이 이렇게 났어요. 막 덥북덥북 군데군데 많이 났어요. 꼴을 얼른 베어 놓고 버섯을 따가지고 가야겠다 하고 꼴을 베어 놓고 버섯을 따는데 그것이 독버섯인지도 모르고 땄어요. 그때는 버섯이니까 그걸 따와서 명순 언니가 볶아 줬는데, 먹을 때는 그렇게 잘 먹었는데, 토요일(다음) 날은 꼴도 많이 베야 하는데, 그걸 먹고 사람들이 너절허니 다 쓰러져버렸네! 독버섯이어서. 그래서 저녁때는 꼴도 못 베러 가고 다 누웠다가…. 그래도 한 사람도 죽지도 않고 그대로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 꼴을 베려고 봄이라 아직 풀은 안 자라고, 그 앞 논에 독세기들이 군데군데 나가지고 수북수북 자라요. 그러면 그때는 장화가 있을까 뭣이 있을까 옷을 걷어붙이고 들어가서 베어다 먹이는데, 찬바람에 종아리가 채 썬 것처럼 다 터 가지고, 그때는 뭐 바를 것도 없고 새빨갛고 그래서….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농사를 짓고 그랬는데….
가을쯤 되었을까? 자고 예배드리고 밥 먹으려고 청소하고 보면 식구들이 하나씩 없어져요. 못 살겠으니까 나가는 거야. 거기서 몇 사람 나가버리고….
그리고 채종답이라고 보리를 심어가지고 농사를 지어가지고 씨(종자)로 나가니까 그 보리를 베어서 이삭을 다 따가지고 그때는 디딜방아로 다 부숴서 그 씨알을 하나하나 고르는데, 깨지고 그런 것은 다 깨지고….
하여튼 그때 우리 돈지 어머니가 거기서 살으실 때 고생 많이 하셨어. 우리 산으로 데리고 다니지, 들로 데리고 다니지…, 그러시면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거기서 살다가 농사를 다 지어놓고, 추수는 안 하고 거의 깨를 벨 때가 되었던가 베어 놓았던가 어쨌던가 그러고는 그때 나왔거든요, 돈지에서 살다가. 오래되어 다 잊어버려서 얘기도 못 하겠네.
(방순녀) 그때는 식량이 귀하니까 보리를 껍데기째 찧기 시작하면 한 번도 안 까불러요. 끝까지 찧어서 그대로 해 먹어. 그냥 죽 끓여 먹고. 밥은 상상도 못 하고 그렇게 했고.
진도 살던 기억에서 젤로 잊히지 않는 것은 독사에요. 여름에 보리를 베었을 때 비가 오면 보리를 뒤집잖아요? 뒤집은 데마다 독사가 2~3마리는 있어요. 산에 가서 풀을 깎다 보면 앞이 구물구물해. 뒷산에도 풀은 없고 맨 독사야. 저녁에 자려고 하면 눈에 우굴우굴 하는 뱀이 아른거려. 우리 자던 방에도 들어오고. 그래도 뱀 물린 사람은 없었어요.
보리를 찧기 시작하면 끝까지 찧어서 그 겨채 해먹었고….
(오세휘) 이제 생각하니까 한나씨 어머니가 나중에 오셨든지 어쨌든지 진도읍에 있을 때는 안 계셨는데, 나중에 연산 와서 살 때인데, 그때는 걸어 다니니까 군내면 분토리에서 올라오다 보면 마지막 고개가 벼랑박(바람벽) 같아. ‘우리가 길을 가다가 고되면 쉬어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가다가 쉬었다 간다.’ 그런 얘기를 해주시던 것이 아직도 막 생각이 납니다. 한나 어머니가 언제 오셨는지 몰라도 같이 좀 살았어요.
(방순녀) 귀주 어머니가 젤로 오래 사셨죠. 귀주 어머니가 끝까지 살다 함평으로 오셔서….
(사 회) 모두들 고맙습니다. 피곤하실 것 같으니까 이만 마치죠.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오세휘) 다 잊어버려가지고.
(사 회) 많이 말씀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뒷이야기
(복은순) 돌집 집짓기 전까지, 70년대
(사 회) 저희가 84년도에 갔어요.
(복은순) 집 지을 때는 국자 언니 말씀이 풀무원에서 살던 김 선생님께서 식구들과 와서 예배실 거시서 사셨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으셨어요?
(사 회) 아니요, 그분들 나오시고 우리 들어가고. 같은 날에.
(복은순) 그랬어요? 아, 그러셨구나.
(사 회) 그 녹진 가는데 큰 간척지, 그걸 국희종 의사 선생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순창에 계시는. 그분이 풀무원에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오셔서 그 땅을 한번 사보라고 해서 저희가 답사를 갔었어요. 83년도일 거예요.
(복은순) 진도를요?
(사 회) 예. 그때 오영환 선생하고 같이 갔지요. 춘일 씨가 안내하셨지요. 그 자리에 가서 보니까 물이 별로 없어요. 저수지가 멀리 다른 곳에 있고 물이 적어요. 땅은 넓고 그래서 우리는 맞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춘일 씨가 여기 해보라고, 여기서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 동영상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못 보여드려요. 집사람 얘기가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살아요? 그 흙집 거기서 우리가 살면서 형님들 사시는 것도 좀 배우면서 다른 사람한테 내놓은 땅이나 빌려주세요.’라고 그러니까 그럴 거 없이 여기서 하라고…. 그런데….
(복은순) 국자언니 말씀은 오셔서 거기서 살으시면서.
(사 회) 살았던 것이 아니에요.
(복은순) 정 원장님이 오셔서 저분들한테 집을 드리라고 해서 드리고 나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예배당 거기서 사셨어요? 예배 보는데요?
(사 회) 아니요. 나오시고 우리가 들어갔어요. 같은 날. 그러니까 답사하러 갔을 때 한 이야기 가지고 혼동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때 세놓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춘일 씨가 일 년인가 소죽 끓였데요, 왕겨로. 그러면서 기도를 아침마다 하셨데요. 우연히 ‘떠나야지’ 하는 생각이 난 거요. ‘떠나야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근데 저희 할멈은 8개월 풀무원에서 기도했지요. 그런데 그때는 그 얘기를 안 하시더니 나중에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 기도를 하셨다고. 그러니까 흙집에서는 우리가 살지를 않았고, 나가시는 날 우리가 들어갔어요. 녹진 토지 답사 갔을 때 그 흙집에서 살게 해달라고 얘기만 했었지요. 그래서 원 선생님과 정 원장님이 얘기해서 매매 형식으로 했는데, 돈이 안 되었어요. 천만 원 계약금으로 드리고 서울에 있는 아파트 팔아서 올 건데 그 아파트가 안 팔려가지고, 그래서 해약이 된 거예요. 일하는 소까지 포함하여 삼천오백만 원인가 삼천만 원인가 되었었는데 그건 해약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복은순) 돌집 지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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