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유적지 탐방을 했는데 그때 광주지역 탐방 사진과 함께 '광주 지역 동광원/귀일원 순례 ' 자료와 함께 올려봅니다. 관심자들에게 도움이 될듯합니다.
광주지역 동광원/귀일원 유적지 순례
1. 에비슨과 농업실습학교
에비슨이 설립한 농업학교로 이현필선생이 21세 되던 1933년 입교하여 1년 동안 농업기술과 신앙을 배웠던 장소.
미국 선교사 에비슨은 농촌운동의 전문가로서 광주YMCA의 농촌사업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특히 1933년 수피아여학교 앞의 백운동 에비슨의 사저에 광주Y 농업실습학교( Farmers' Practise School)를 설립하여 농촌지도원을 양성하였다.
교장은 어비슨이 맡고 정인세가 사감으로 수고하였는데, 어비슨은 이 일을 위하여 자기의 사재를 아낌없이 바쳤다. 그리고 독신전도단을 설립했던 강순명이 강사로 협력하였다. 농업실습학교가 설립된 배경을 훗날의 강순명목사가 회상했다.
“시간 있는 대로 이리 저리 다니며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청년들을 모았으나 숙소가 없으니 에비슨의 허락을 받아 에비슨 사택의 우사(牛舍) 곁에 있는 빈 창고를 임시 숙소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때 전 독신전도 단원이었던 문남칠을 이들의 지도자로 정하고 이준묵, 고영로, 김석진, 이현필, 서화식, 박율룡, 이정옥, 문학영, 이남철, 최요섭, 성왕기, 이성일, 정봉은, 김영환, 조선구 등 20여명이 매일 새벽에 모여 기도하고 낮에는 에비슨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밤에는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
강순명선생은 이들을 신앙으로 지도하고 말씀으로 무장시켜 장래 농촌 지도자 겸 교회 중견 인물을 삼고자 한 것이다. 즉 이전에 해체되었던 독신전도단을 정신적으로 재건코자 한 것이다. 강순명은 박복만씨를 후일에 광주 기독병원에서 근무하게 하였으며, 이현필은 독신전도단 단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때가 1932년 중반 혹은 후반으로 생각된다. 이현필과 방안식(1923년생)/박영식(1929년생) 형제와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 즉 이들 형제의 어머니 곽신천은 영산포교회의 여전도사로서 이현필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이현필은 이들 형제의 유년주일학교 교사였다.
방안식은 1947년에 광주 선교부 운전사로 취직하여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광주로 왔으며, 구 에비슨 농업실습학교 창고를 개조한 집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곽신천 전도사와 두 아들은 양림동 선교부 선교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았다.
해방 후 이현필이 김준호와 함께 에비슨 농업실습학교 강당 한쪽을 빌어서 생활하던 어느 추운 날이었다. 이현필은 제자 김준호를 불렀다. 하루 종일 탁발과 넝마주이로 피곤한 온 몸을 겨우 담요 한 장으로 감쌌으나 찬바람 솔솔 들어오는 건물에서 온 몸으로 추위를 이겨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데 이현필은 김준호에게 물었다.
"오늘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더냐?"
"양림다리 밑의 거지들입니다"
이 대답이 나오자마자 이현필은 자신이 덮던 이불을 건네주면서 다리 밑의 거지들에게 주고오라고 하였다. 김준호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말에 순종하여 그 담요를 낮에 보았던 그 다 죽어가는 소년에게 가서 덮어주고 왔다. 그 다음날 낮에 찾아갔더니 그 이불은 거지 세계의 힘 있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죽어가는 그 소년은 이웃 빈 집의 벽장에 숨겨져 있었다.
이현필은 이러한 사람이었다. 불쌍한 아이가 눈에 보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고아들을 돌보고 또 돌보면서도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제 살을 깎아서 다른 사람에게 보탬을 주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이현필은 고아들을 보살폈으며, 고아들을 차가운 땅바닥에 재울 수 없었으므로 편안한 곳으로 분산시켰다.
해방 후 어비슨의 농업실습학교 자리에는 1955년 선교부에서 호남성경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호남신학대학이 되었고. 그리고 기독교광주방송도 여기에서 시작하였다.
2. 광주 YMCA회관
이현필이 1948년 봄에 남원의 제자들을 광주로 오게 하여 함께 생활하던 곳.
광주Y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1938년부터 활동이 정지되었지만 농업실습학교는 계속되었다. 에비슨도 1937년에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광주Y에 기여한 공은 매우 컸다. 충장로 5가 광주극장 옆에 정미소를 구입하여 첫 회관을 개설할 때 대지 구입비용 4천엔을 어비슨이 부담하였고 건축비로 호남은행에서 3천2백엔을 담보대출 받고 나머지 8백엔은 김후옥이 자비로 찬조하여서 회관과 체육관을 건립하였다.
이때 체육 간사로 정인세가 광주에 오게 되었다. 1932년부터 광주생활을 시작한 정인세는 에비슨 선교사가 세운 농업실습학교의 사감이 되었다. 그때 그 안에 강순명의 ‘독신전도단’이 있었고 그 단원의 한 사람인 이현필 선생을 본 것이 처음 만남이었다.
정인세는 1936년 27세 때에 최병준 목사의 큰 딸과 결혼한 후 광주에 정착하면서 덴마크 체조보급, 수피아 여학교 농구부 코치, 그리고 1935년부터는 YMCA 체육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강순명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에 따라 1937년에는 정인세가 농업실습학교의 학감을 맡기도 하였다. 1939년에 에비슨 선교사는 일제의 선교사 축출령에 따라 귀국하고, 정인세는 백영흠과 함께 1938년 옥고를 치른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8년에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폐교됨으로써 두 사람은 제 갈 길로 가게 되었다.
그 후 정인세는 강원도 산골로 숨고 백영흠은 광주에서 녹스 목사의 조수로 일하다가 예비검속에 체포되어 갖은 고생을 한 후 신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이후 일본 고베로 떠났다. 해방이 되자 정인세는 서울로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주형옥 목사와 서한권 장로를 만나서 다시 광주로 오게 되었다.
광주 YMCA는 1945년 10월에 동명동 서한권 장로의 집에서 첫 재건 모임을 갖고, 회장은 최흥종 목사가 총무는 정인세가 맡았다. 정인세는 광주 YMCA 총무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소유하였던 "적산가옥" 한 채를 인수하여 "고등농민학원"을 시작하였으며 이현필은 이 학원의 사감을 맡아서 학생들의 영적 지도에 앞장섰다. 이 시기가 1946년 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학원은 어느 시점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현필이 방림동에, 즉 최흥종 목사 가족소유의 토지에 "양영원"이란 간판을 걸고 농어촌 자녀들의 교육훈련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었다가 또 다시 시점을 알 수 없는 어느 때부터 양림교회 유치원에 간판을 걸었다. 따라서 이현필은 광주 YMCA와 관계를 맺고서 최흥종 목사, 정인세 총무 등과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현필은 1947년 가을부터 1948년 초에 이르기까지 서리내와 갈촌(갈보리)에서 집중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교육을 받은 어린 학생들을 광주로 데리고 가서 더욱 더 큰 꿈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2월부터 서리내와 갈밭에 소식을 전하여 광주로 옮겨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동은 광주 YMCA 건물에서 식구들을 기거케 할 수 있다는 허가를 서울 YMCA의 현동완 총무와 광주 YMCA의 총무 정인세를 통하여 얻었기 때문이었다.
광주 YMCA가 회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최흥종 목사가 사위 강순명 목사에게 맡긴 "축산기술학교" 건물과 부속 기숙사였다. 이 건물은 일제에 의하여 세워진 판잣집으로서 몹시 비좁고 추웠다. 건물 뒤쪽(동남)으로 양림교회 건물이 있고, 앞쪽(서북)으로는 오웬 기념각(Owen Memorial Hall)이 있고, 앞쪽(서남)으로 마주 보이는 건너편에는 숲이 울창한 양림동 선교부가 있고 왼쪽(남쪽)으로는 광주제중원(현 광주 기독병원)이 있고, 방림동으로 향하는 뒤쪽은 원방림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광주 양림동으로 이주한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은 양림동 YMCA회관에서 지냈으며 회관사택에서는 여자반이 모여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즉 남자 청년들은 광주YMCA회관에서, 여자반들은 사택에서, 그리고 소년들은 양영원(養英院)에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최소한 남반 20여명과 여반 30여명이 생활하였다.
이현필은 1946년 혹은 1947년 어느 시점에 광주 YMCA에서 적산가옥 한 채를 인수받아 개원한 "고등농민학원"에서 정인세 광주 YMCA 총무의 권유로 사감으로 지내다가, 이 학원이 시내권에 있음으로써 최흥종 목사와 함께 방림동으로 이전하여 최흥종 목사 집안에서 소유하였던 터전에 일종의 "합숙훈련원"을 개원하였으며, 회장은 최흥종 목사가 맡고 총무는 이현필이 맡았다.
이 훈련원은 기독교적 성경교육과 생활교육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낮에는 농사를 지었다. 이 합숙훈련원은 신앙교육, 정신교육, 노동교육으로 이루어졌으며 젊은 청년들을 기르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양영원(養英院)』이라고 하였다.
이현필은 남원으로부터 남반 제자들을 데리고 오자 이들을 양림회관 건물에 수용하였는데 여반까지 광주에 도착하자, 양림교회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던 "유치원" 건물에 양영원이란 간판을 붙이고 거기에 남반(소년)을 기거하게 하였으며, 여반은 YMCA 건물 내에 있는 사택의 방 한 칸에 기거시키다가 곧 사택 전체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양영원에서 소년들의 신앙과 교육은 김준호가 맡았다.
오북환장로는 한동안 광주 Y목공부에 있었다. 서리내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철저한 훈련을 받던 소년 7명과 소녀 7명도 처음으로 광주에 진출하여 YMCA회관과 사택의 방 하나를 얻어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생활 형편은 비참했다. 1인당 하루 한 홉도 못되는 식량으로 살아가야 했는데 9작이나 되는 곡식에다 보리, 풀잎, 겨 등을 얻어다 섞어 먹으며 거리에 나가서 걸식 탁발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살던 그 시절이야말로 이현필 운동의 역사 중에서 가장 즐거웠고 활기차고 순수한 시절이었다.
광주 YMCA 회관을 빌려서 생활하는 식구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남녀가 서로 존경하면서 순결하고 고상한 모범을 보였으며, 하루 동안의 노동에 시달린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새벽과 저녁에 예배드리는 모습은 참으로 고상하였다. 말씀중심의 성경해석과 온 마음을 다하여 이현필의 말씀해석에 경청하는 모습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주일날 오전 11시 예배에는 주로 이현필 식구들이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점심 후 오후 2시에 드리는 예배에는 시내의 여러 교회로부터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부분을 김정순은 이렇게 기록한다.
새벽예배, 주일예배, 저녁예배. 주일오후예배는 각 교회에서도 참여 소문이 나자 식구는 날로 늘어만 갔다. 먼저 정인세원장님 가족 즉 정신영, 건모, 영숙과 성금심 등 합숙했고, 박금례, 박명순, 하덕례, 동림, 전양선의 4남매, 최영희, 최명순, 삼용씨, 나주댁 등 날로 식구는 늘었다. 박경수 네 3 식구도 봄에 입사했고, 여름 수양회도 열었다. 주로 광주 각 교회에서 참석하였다. 김영규 집사도 그 때부터 왔고, 조사연, 조사은도 그 때 처음 만났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현필은 황금동 식구들 가운데 유녀반 5인과 여자반 3인(강남순 김정순 방순녀) 등 총 8명을 남원으로 보냈다.
이어 남원에 북한군이 진입함으로써 갈보리 어머니(강남순), 김정순, 방순녀 등 일행은 유녀5인과 함께 대산면 운교리 남창 어머니 집으로 갔다. 이 때에 남원으로 간 유녀반 5인은 신자, 이정자, 신금자, 정영숙, 이숙자등이었다.
1909년 서울 마포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정인세는 운동을 좋아하여 선린학교 시절 배구선수로 활약하였으며 YMCA체육관에서 유도2단의 자격을 땄다. 나이 23세 때 덴마크 체조의 지도교사로 광주에 내려가 YMCA체육부 간사 겸 종합체육관장이 되어 체조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유도를 포함 축구 배구 농구 등 체육만능인으로서 광주지역의 체육발전을 위해 힘썼다.
정인세는 광주에 내려온 이듬해인 1933년에 김태오 이택규등과 함께 소년잡지 <새동무>를 창간하고 많은 소년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935년부터 체육 분야뿐만 아니라 YMCA간사로서 성서반과 주일수련회 강습회 등 강사로 선교활동과 농촌계몽활동을 펼쳤다. 27세 때인 1936년에 최병준목사의 딸과 결혼 광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광주Y는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일본Y의 산하단체로 강제 편입된 후 1944년에 자진 해산하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가 광주에 YMCA를 재건하고자 1945년 10월에 서황건 장로 댁 다다미방에서 첫 모임을 가졌는데 최흥종 목사가 초대 YMCA의 회장이 되고 정인세 원장을 총무로 내 세웠다. 정인세는 Y총무로 있으면서 적산(敵産)을 접수하고 고등농민학원을 시작 했는데 그때 이현필선생은 정인세 총무의 권유로 농민학원의 사감으로 와 있었다. 그리고 학생 지도를 맡았다. 이때가 1946년 무렵이었다.
이현필은 1947년 가을부터 남원의 선경(仙境) 서리내 산중에서 소년 소녀들을 훈련시키며 손수 신앙지도를 통해 길러 냈다. 그리고 이듬해 1948년 봄, 그 소년 소녀들을 광주로 나오게 하여 광주 YMCA회관 이웃 방에 모여 살도록 하였는데 그들의 생활은 누가 보아도 감동적인 생활이었다. 그 소년, 소녀들이 보여주는 순결, 겸손, 순종과 그들이 부르는 고요한 노래 소리에 그 당시 Y총무였던 정인세는 그만 그들의 모습과 노랫소리에 감동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이들의 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의 전도는 부흥회를 한다거나 전도 강연회나 노방전도를 한다거나 하는 대중 상대의 전도활동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삭 줍듯이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지목하고 전도했다.
정인세 선생이 광주YMCA 총무로 있을 때 그의 숙소에 찾아온 이현필선생의 모습은 초라했다. 문 밖에 와서 누가 유리창을 똑똑 두드려서 내다보면 이현필 선생이 서 있었는데 그 꼴은 완전히 거지차림이었다. 들어와서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요? 바로 사는 무슨 일을 좀 해야 하지 않겠소?” 하며 정인세 선생을 설득하곤 했다.
3. 광주 제중원 (기독병원)
이현필선생이 1956년 봄에 입원하여 카딩톤 원장과 인연을 맺고 활동하던 장소.
이현필과 동광원은 1954년 여름에 두 가지 것을 크게 잃었다. 첫째는 동광원의 폐쇄명령이고 둘째는 노회로부터 동광원의 후원자인 두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금지하는 결정이었다.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예장측과 기장측으로 분열된 이후 예장측 전남노회는 1954년 8월 26일 광주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9 전남노회에서 유화례(Florence E. Root)선교사와 김아열(Bruce A. Cummings) 두 분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중단시키라는 건의서를 접수받았다. 그것도 백춘성 장로가 익히 알고 신안교회에서도 잊을 수 없는 광주시찰장 나명수 목사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여 1954년 여름이후로 방림동 밤나무골에서 동광원이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활하기 시작할 무렵에, 아니 이 때로부터 동광원 정신이 정상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할 무렵에 동광원을 지원할 수 있는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분은 광주 기독병원 원장으로 부임한 카딩톤(Herbert A. Codington: 고허번) 의사 선교사이다. 카딩톤은 1948년 한국에 선교사로 나와서 목포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일본으로 피신하였으며, 1954년 광주 기독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현필은 1956년 서울에서 파계를 선언한 후에 광주로 내려와서 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서울에서 광주 밤나무골로 돌아온 이현필의 몸은 거의 죽은 몸과 같았다.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의 상태를 알고 카딩톤 선교사의 차(랜드로바)를 빌려서 카딩톤 부인이 운전하고 광주 기독병원에서 방림동 밤나무 길로 따라 가는데 그 길가에 말리려고 벌려놓은 나락들을 최흥종 목사가 친히 운반하여 길을 만들면서 밤나무 동산에 도착하였다. 이 때에 함께 동행 하였던 사람들에 의하면 이현필의 초췌한 모습을 본 최흥종 목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품에 안아 이현필을 차에 싣고 기독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김준호는 이렇게 상기한다.
스승 이현필이 제자 김준호와 함께 입원하지 않으면 입원하지 않겠다고 거부함으로써 광주기독병원측은 특실을 찾아보았으나 특실은 침대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기독병원측은 갑작스럽게 남자 두 사람의 입원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자 간호사 기숙사의 방 하나를 내서 남자 두 사람이 기거할 수 있도록 급히 개조하였다.
김준호는 결핵균이 오른 손에 기식하면서 손등으로 고름이 흘러나옴으로써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현필은 사랑하는 제자의 그런 모습과 아픔을 보고 더욱 가슴이 쓰렸다. 그리하여 제자를 입원시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함께 입원시켜 주지 않으면 자신도 입원을 거부한다고 버텼다. 이를 알아챈 최흥종 목사는 "두 사람은 이신동체이니 둘 다 함께 입원시키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혼자 입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카딩톤 원장을 설득시켰다.
카딩톤은 간호사의 숙소를 개조하여 두 사람이 함께 입원할 수 있는 특등실을 마련하였다. 이현필은 병원에 억지로 입원하여 약도 먹지 않고 퇴원을 고집하면서 버티다가 퇴원하였고 제자 김준호는 6개월 입원한 후 퇴원하였다. 이현필은 퇴원 후 동광원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고기 먹고 약을 썼으나 그러나 나는 고기 안먹고 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의 그런 신앙도 존경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얻는다. 약도 안먹고 살생도 않는 사람들도 자기주의대로 그대로 안먹어 좋으나 먹는 사람도 안먹는 사람도 서로 남의 인격과 신앙을 존경하라.”
얼마간의 치료로 병이 다 나은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병이 나은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병원에서는 퇴원을 만류하였지만 이현필은 퇴원을 고집하였다. 이현필은 퇴원 후에는 약도 먹지 않았고, 주사치료도 거절하였다.
이현필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을 하였는가? 당시 광주 기독병원은 병상이 65개 밖에 없었으므로 장기 입원을 요하는 결핵환자들에게 6개월 입원 서약서를 받고서 입원시키곤 하였다. 그리고 5개월 째 되는 날에는 안내장을 보내서 퇴원을 준비시키곤 하였다. 어느 날 카딩톤 원장이 회진하는데 퇴원 한 달을 앞둔 반공포로 출신 환자 오인환씨가 카딩톤 원장의 목에 칼을 들이 대고서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협박하였다. 사연은 간단하였다. 그 환자는 퇴원하더라도 고향도 없고 오고 갈 데 없는 몸이므로 오히려 병원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울먹이면서 칼을 내려 놓았다.
이 사실을 목격한 이현필은 동료들과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요우회(療友會)를 결성하고서 요우회에서 병원의 매점을 운영하여 그 이익금을 집 없는 환우들에게 돌려주자고 하였다. 그리고 이현필은 또한 식구들에게 자원봉사로 간호를 보조하는 일과 병원 청소를 담당하는 등 간호부와 미화부 일을 돕도록 하였다. 이현필과 그 식구들의 헌신과 책임감 그리고 근면 성실한 생활은 누가 보아도 모범이었다. 병원 업무를 비롯하여 화장실 등 모든 시설과 비품이 새롭게 정돈 되고 구석구석 청결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카딩톤 원장은 무의촌 봉사나 기타 활동을 위해 늘 이현필과 의논하였고 병원직원들도 모두 동광원 사람들이라 하면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광주 기독병원 결핵병동에 입원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박창규 전도사이다. 박창규는 광주 성서학관을 졸업하고 담양 성산교회 전도사로 재직하다가 결핵이 발병하여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하였으며, 그 당시 병원에는 원목이 없었으므로 카딩톤 원장의 허락을 받아 박창규가 병원 원목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카딩톤은 박창규 전도사를 데리고 주일날이면 확장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퇴원명령을 받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 특히 반공포로 환자 등은 보낼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박창규 전도사는 이들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밤중에 비밀리에 병원을 빠져나와 동광원의 정인세 선생을 찾아가서 강제 퇴원환자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박창규 전도사와 정인세 원장은 일찍부터 사제관계였다. 즉 박창규 전도사가 숭일중학교 시절에 정인세 원장이 역사 선생님으로 계셨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기독병원에게 강제로 퇴원해야만 하는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이현필과 정인세는 오갈 곳 없는 딱한 환자 5-6명을 방림동 밤나무골 동광원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았다. 그리고 이현필은 이런 환자들을 위해 장차 화순 등광리에 집을 짓고 옮겨갈 것으로 계획하였다.
이 시기가 1956년 봄으로부터 여름 사이였다. 그러다가 1956년 8월 동광원 수양회에 현동완 선생과 유영모 선생이 강사로 참석했을 때 이런 형편과 사정을 알리고 향후의 계획도 알렸다. 현동완 선생은 동광원 집회를 인도한 후 상경하여 당시 국회의장인 이기붕을 만나 이현필과 동광원, 그리고 결핵환자들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여 그 자리에서 300백만원의 후원금을 지원 받았다.
그 후 현동완의 연락을 받고 정인세가 상경하여 이기붕씨가 후원한 수표를 받아 옷 앞섶에 바느질로 포장하여 안심하고 광주로 가지고 오다가 이리(익산) 역에서 소매치기 당한 것을 알아차렸다. 소매치기단도 수표가 너무 큰 액수였기 때문에 그 수표를 이리 역 대합실에 버렸으며 사람들은 이를 밟고 지나갔다. 정인세 원장은 경찰에 신고하여 그 수표를 찾았는데 소매치기로 훔쳐간 자도 그 액수가 너무 큰데 놀라서 역 대합실에 버렸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과 정인세 원장은 화순 등광리에 집을 짓고 환자들을 수용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후원받은 돈으로 우선 산수동(꼬두메) 최씨 소유의 빈 기와집 별장을 60만원에 임대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방림동 동광원에 수용하여 돌보던 5-6명을 포함 기독병원의 환자들까지 1차로 12명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때에 카딩톤의 목에다 칼을 들이댔던 오덕환(북한군 중위 출신)도 함께 갔으나 그는 2년쯤 지나서 결국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1958년에 송등원이 설립되었는데 최흥종 목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이현필의 지시에 따라 정인세 원장이 운영과 관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세종선생의 고향 등광리 (燈光里)에서 등자를 따오고 이기붕 의장의 호인 만송(晩松)에서 송자를 따다가 송등원(松燈園)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이사로는 카딩톤 선교사, 박두옥 장로, 정인세...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송등원의 처음 총무는 박창규 전도사가 맡았으며, 김준호 선생도 함께 사역하였다. 이현필의 지시에 따라 동광원의 김은자, 김천자 등의 제자들 그리고 많은 후원자들이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강제 퇴원 결핵환자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동광원에서 지원하는 숫자도 점점 많아졌고 2차로 현재의 무등파크 아래편인 산수동 골짜기에 땅 200여평을 매입하여 집을 짓고 30여명을 수용하였다.
4. 신안재매교회(광주신안교회)
이현필과 정인세가 목회자로 활동하며 식구들이 함께 신앙생활 했던 교회로 백춘성장로와 김준교수 두 분의 협력자를 얻음.
서서평 선교사는 당시 금정교회(현 광주 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최흥종과 함께 광주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가 1925년부터 개척중인 재매지역의 기도처에도 가끔씩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신안교회는 1925년 광주 중앙교회의 “확장주일학교” 선교단이 신안동 재매부락의 동각을 빌려서 주일 오후에 어린이 주일학교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에 열성이었던 10여명의 학생들은 백춘성, 박윤보, 강두팔, 등이었으며, 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최흥종 목사의 둘째 사위인 김창호 전도사, 조은례 등이었다.
이 당시가 신안교회의 초기 부흥시대로서 정정촌(백춘성 장로의 모친)씨도 이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의 교세는 성인 교인 10여명, 청년 교인 10여명,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 20여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흥종 목사의 둘째 사위 김창호 전도사가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담임 교역자로 사역하다가 1931년에 영산포로 떠났다.
재매교회 교인들은 1932년도에 부지 300여평에 초가 2채가 딸린 부동산을 구입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초가 한 채는 가운데 벽을 헐어내서 예배드리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다른 한 채는 목회자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교회 자체 건물을 갖게 된 신안교회는 야학을 실시하였다.
김창호 전도사 이후 광주 중앙교회 정순모 목사가 비거주 겸임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1933년에 제주도 금성교회로 떠남으로써 담임목회자가 빈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파송하였던 사람이 바로 이현필 전도사였다. 이 부분은 「신안교회 발자취」는 이렇게 말한다.
“양해영 전도사가 2년 동안 시무한 후 사임하게 되어 김봉이, 안보연 두 성도들이 서서평 선교사에게 교역자 파송을 간청하자 1934년 그가 신임했던 이현필 전도사를 보내주었다.”
1925년 광주 중앙교회 확장주일학교의 하나로 시작한 재매교회(현 신안교회)는 세핑(서서평) 선교사의 도움이 컸다. 초기 교인인 정정촌 권사는 어느 날 딸을 잃고 시름에 젖어 있을 때에 예수를 믿으면 딸을 만날 수 있다는 세핑 선교사의 말을 듣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정촌 권사와 그녀의 아들 백춘성은 1932부터 최흥종 목사의 둘째 사위 김창호 전도사 그리고 이어서 1934년부터 이현필 전도사 등으로 이어지는 교역자를 통하여 기독교의 참 신앙을 깨달았다.
백춘성은 일제 말엽에 만주에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귀향한 후 건설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은 후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방하고, 한국전쟁 기간 중 제주도에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광주로 돌아와 신안교회 재건에 앞장섰다. 1951년11월 9일에 장로임직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어머니의 회갑을 맞이하였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광주에 많은 피난민들, 고아들, 걸인들이 몰려들었는데, 백춘성 장로와 어머니 정정촌 권사는 이들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동광원에 답 1,400평, 전 1,000평, 대지 100평, 임야 3정보, 가옥 1채, 가재도구 그리고 농사지은 것 일체를 헌납하고, 회갑잔치는 지역의 걸인들을 초청하여 "걸인잔치"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 본 이현필은 백춘성 장로에게 "3년 내에 큰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축복하였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백춘성 장로는 광주시내 황금동에 광주에서는 최초로 5층 건물 "한공빌딩" 을 신축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53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낙심한 백춘성 장로는 신안교회의 "중립"을 선포하고 노회로부터 탈퇴한 후 1955년 6월부터 동광원의 정인세 원장을 목회자로 초청하였다.
물론 동광원 식구들은 백춘성 장로가 기증한 집에서 살기 시작하였으나 정인세 원장이 목회자로 재직하면서부터 이현필, 오복희 전도사, 김준호, 신진호, 박양덕, 남애주 등 10여명이 신안교회의 각 부서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북환 장로는 한공빌딩에 목공소를 차린 후 한쪽 켠에 방을 만들어 동광원 식구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정인세 원장이 1959년 2월에 서울 행화정 교회 목회자로 떠난 후 이현필, 오복희 전도사가 1959년 11월까지 신안교회를 돌보았다.
1955년 6월부터 1959년 11월에 이르기까지 4년 6개월 동안 동광원 식구들이 신안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에 신안교회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첫째는 목회자에게 사례를 드리지 않았다. 정인세 원장은 백춘성 장로가 기증한 신안동의 집에 동광원의 유녀반이 기거하게 하였다. 이들을 데리고 온 보모는 남애주, 박양덕 씨였으며, 신안교회는 목회자에게 드릴 사례비를 유년반 부양으로 대체하였다.
둘째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교회에는 남녀가 각각 나누어 앉았는데, 신안교회는 남녀의 구별을 더욱 엄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주일학교 운영에서도 오전에 남학생을, 오후에는 여학생 반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셋째는 이 당시 교회에서 관행적으로 실시하던 헌금 채를 통한 헌금수금이 아니라, 예배당 입구에 헌금함을 설치하여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유도하였다.
넷째는 당회를 폐지하고 교회의 제반 업무는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들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며 온 교회는 묵묵히 따름으로써 초대교회 유형의 공동체를 회복하려 하였다.
다섯째 정인세 원장의 목회 기간에 동광원 소속의 오복희 여전도사가 여 교우들의 영적인 어머니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동광원의 순결사상을 그대로 실천하여 남자 목회자가 여자 교우들을 개별적으로 만날 수 없었으므로, 여성 교우들의 지도는 여교역자가 전담해야 했다.
- 김준원장
김준원장은 1943년에 이리농고를 졸업하고 1949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1951년부터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김준 교수는 기성 조직교회 유형의 신앙에 회의를 품고 있었던 터이라, 이 당시 광주에서 시작한 동광원 운동과 이현필 선생의 신앙노선에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1955년부터 정인세 원장이 설교자로 있던 신안교회에 김준교수가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준 원장은 농과대학 재직시에 일단의 기독교인 학생들이 찾아와 「밀알회」란 동아리를 구성하고 지도교수로 지도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 자리에서 김준 교수는 “너희들이 참으로 밀알이 되려 한다면 농대 화장실 인분을 다 퍼서 농대 실습 농지에 거름하라”고 하였다. 이 시험성 지시에 응한 학생이 7-8명 되었으며, 이들이 만든 단체가 현재는 전국적인 규모를 가진 「밀알회」가 되었다.
김준 교수는 동광원 지도자들이 신안교회를 맡았던 시기에 전남대학교 농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광주시 방림동 밤나무골 동광원에 들어와 생활하다가 함평군 대동면에 있는 동광원 분원으로 내려가 고아들을 돌보고, 유기농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러한 사이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부흥을 위하여 김보현 장관에게 농촌을 실질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을 찾아보라고 지시하였다. 김보현 장관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유달영 교수에게 이를 의뢰하였으며, 유달영 교수는 김준 교수와 신귀남 교수를 천거하였다. 초청을 받은 김준 원장은 앞서서 방에 들어간 지도자들의 신발을 나란히 정리한 다음에 입실하였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이현필과 동광원에서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새마을운동본부 연수원 원장을 맡아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한국의 농촌과 사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가 부르짖었던 정신은 “근면, 자조, 협동” 이었다. 이 세 가지 정신은 결국 동광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정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준 원장을 통하여 동광원의 기독교 정신이 1960-1970년대에 이르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외적인 운동으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5. 양림 광주천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이 움막치고 기거하며 수양생활을 하고 걸인들을 돌보던 장소
동광원에서는 어린 고아들을 동광원 제자들이 떠맡아 각 분원으로 분산하기 전인 1953년부터 성인 제자들은 거적대기 몇 장과 나무 막대기를 이용하여 양림교와 부동교에 이르는 광주천변 고수부지에 움막을 짓기 시작하였다. 양림교와 부동교 다리밑은 오래 전부터 걸인들의 집단 합숙소였다. 바로 그 다리 밑에서 1908년에 윌슨은 다리가 없는 한 소년을 발견하여 인공다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1920년대 말 세핑 선교사는 오복희 전도사를 통하여 덮던 이불을 전해주었으며, 해방 전후에도 부동교 다리 밑은 집없는 걸인들과 나환자들의 안식처였다.
이곳에서 이현필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새벽기도를 드리고, 조용하게 찬송하고, 일사분란하게 청결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겉모습이야 걸인이었지만 속으로는 뜨거운 열정이 끓어올랐다. 말씀에 대한 뜨거운 열정, 국가를 위한 뜨거운 기도, 헐벗은 동포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이것은 동광원 식구들이 양림 천변에서 느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광주천변에 김영규반 김정순반 박공순반 등이 생활하다가 1954년 봄에 모두 남원으로 이동하였다고 함(김정순 회고)
6. 수피아 여고
정인세원장과 유화례선교사가 근무했던 곳으로 이현필선생이 자주 찾아가 정인세 원장을 만나 설득했던 장소
수피아 여고의 일본인 교사와 그와 가까운 한국인 교사 3명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루트(Florence E. Root: 유화례) 선교사에게 폐교조치를 내리지 못하도록 연좌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의 폐교반대에 분노를 느낀 광주 양림동의 청년들은 이들 3명의 선생을 양림교회 선신애 기념각으로 불러서 약간의 위협을 가하였다. 이들 3명의 교사는 경찰에 신고하였으며 위협을 가하였던 14명은 경찰서에 수감되어 갖은 2달 동안의 옥고를 치른 후 벌금을 내고서 풀려났는데 1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백영흠, 강태국, 최기영, 문안식, 문천식, 김천배, 이현수, 정인세, 조일환, 김현승, 김현애, 조아라, 한성장, 이종필>
백영흠 목사는 1938년 수피아 사건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후 이현필을 처제와 결혼시키고, 1939년 여름에 만주로 갔다가 1년 쯤 지나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1940년 9월에 그만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때에 오북환, 오동옥, 정인세, 조용택 등과 함께 체포되어 백영흠은 수감 생활하는 동안에 결핵을 얻어서 1941년 여름에 풀려났다. 제반 상황으로 볼 때에 오북환 장로도 이 시기에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북환 장로의 석방도 백영흠 목사와 동일한 결핵 감염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35년으로부터 1938년에 이르는 사이에 한국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직면한 문제는 신사참배라는 국가적 명제였다. 이를 순수하게 따르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거부하는 방법은 직접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체포-수감-순교 혹은 복역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었고, 또 다른 방법은 일제의 강압이 미치지 않는 해외로 떠나거나 깊은 산속으로 은거하는 방법이 있었다. 형 오북환과 동생 오동옥 다같이 수감되었으나 형은 5개월 만에 풀려난 후 남원으로 은거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며, 동생은 1년 반이 지나서 풀려났다. 오북환은 목수이기 때문에 남원에는 지리산에서 나오는 좋은 나무가 있어서 그곳으로 간다고 핑계를 삼았지만, 실은 남원으로 간 것은 신사참배를 피해서 은거하는 태도였다.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청 통치로 인하여 양림동 선교부에는 미군 장교들이 생활하고, 수피아 여학교 건물들을 미군 사병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세핑 선교사가 세운 이일성경학교 건물은 국제 적십자사 건물로, 오웬 기념각은 미군들이 체포한 용공 용의자들을 수용하는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정인세 원장은 1947년 6월 13일부터 1948년 5월 1일까지 수피아여학교 교감직을 맡았으며, 백영흠 목사는 1947년 6월 13일부터 1948년 10월 13일까지 수피아여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이현필 선생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던 정인세 총무가 온 가족과 함께 동광원에 가입함으로써 그 동안 맡았던 수피아여학교 교감직과 광주 YMCA 총무직도 겸하여 사임하게 되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일년 전 정인세 선생이 광주 수피아여고 교감으로 1년가량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이현필 선생이 학교에 찾아왔다. 그 행색은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그때 가정 문제로 복잡하고 골치를 앓고 있는 정인세 선생에게 이현필 선생은 그의 복잡한 가정문제와 식구들을 자신이 맡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이현필 선생 자신처럼 나서라고 하였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현필 선생의 모양은 수염을 깎지 않아 길게 자랐고 엉덩이가 찢어진 바지 한 쪽을 손으로 움켜쥐고 모자는 어느 쓰레기통에서나 주워온듯한 거지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런 거지꼴에 제법 남의 복잡한 식구까지 맡겠노라고 제의한 것이다.
정인세 선생을 모시고 남광주역 근처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하는 말이 “앞으로 많은 피를 흘릴 일이 생기겠는데요!” 했다. 그때는 여순 반란사건 직전이었는데 이현필 선생은 그때 이미 무엇을 예감했던 것이다.
이현필 선생의 꾸준한 설득에 감복당한 정인세 선생이 마침내 이현필 운동에 전적으로 발 벗고 나서고자 했다. 그래서 양복에 근사한 넥타이를 매고 다니던 그가 넥타이도 양복도 다 벗어버리고 삭발을 하고 과거의 모든 사진과 책까지도 모조리 태워버렸다. 아끼던 헬라어 성경까지도 다 버리고 완전 무일물(無一物)이 되어 이현필선생 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했다. 정인세 선생을 그렇게 감동시킨 것은 이현필선생의 생활이나 그가 훈련시킨 제자들의 감동적인 모습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르치는 말씀의 감화력이었다.
정인세 원장의 본부인은 3남매를 남기고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어떤 수녀출신 여자와 재혼을 했으나 그 결혼은 불행했다. 대체로 가정이 너무 행복한 사람은 수도생활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수도생활에 들어간 사람치고 가정이 비참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가족에게 환영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사람들이다. 주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의 기쁨을 버린 사람들이다. 정인세 원장도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그는 많은 매스컴들이 그의 헌신적인 삶을 취재하려 하였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고 1980년대 시민대상 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일언지하에 수상을 거절하였다. 상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을 광주의 그늘진 곳만 찾아다니며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다가 1991년 4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을 떠났다.
- 유화례선교사
광주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미국 대사관의 지시에 따라 부산과 일본 그리고 미국으로 다 철수하였는데 광주 수피아 여자고등학교 교장인 루트(Miss Florence E. Root: 유화례)선교사는 전쟁 발발 후 한 달이 넘도록 귀국을 미루면서 고아들과 병약자를 돌보다가 피신할 기회를 놓쳤다는 전갈이었다. 그리하여 유화례 선교사를 동광원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는 다급한 전갈이었다. 유화례 선교사는 전남매일신문에 "그때 이야기"라는 시리즈에 '수피아와 나'라는 제목으로 27회에 걸쳐서 연재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주에 선교사들이 모여 선교사회 강당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전화를 받으러 갔던 사람이 예배가 끝나고.….."북쪽에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곧바로 부산으로 출발 그곳에서 미국이나 일본으로 떠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다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라고 기도했다...떠나지 않기로 작정했다...나는 광주로 돌아왔다. 나는 우리 짚차를 타고 피난민들이 들끓고 있는 학교나 창고 등을 돌아다니게 되었다...나는 따뜻한 물과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아침이면 집을 나섰다...물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초췌한 모습의 얼굴을 대하고 나면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7월 23일 상오 11시 양림예배당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내게 조용택 전도사 동광원장 이모씨 등이 달려왔다. 인민군이 지금 장성까지 내려왔습니다. 광주 사람들은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곧 숨이 넘어갈 듯한 다급한 소리다...조전도사와 함께 간단한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호남신학교 뒤에 갔을 때 동광원에서 나온 청년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둘이서 맬 수 있도록 들 것을 만들어 준비해 놓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들 것에 뉘어졌다. 환자로 가장했던 것이다.
유화례 선교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23일까지 약 한달 동안 피난민을 돕는 생활을 하다가 피난 기회를 놓쳤을 때 곽신천 전도사, 조용택 전도사 등을 통하여 이현필이 이끄는 동광원으로 피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락을 받고 방안식/방영식 형제의 길 안내로 광주 선교부 건너편 에비슨 농업실습학교 갔더니 동광원에서 파송한 신남식, 손덕삼, 김삼용과 함께 방안식/방영식 그리고 조용택, 김재택 전도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유화례 선교사를 환자로 위장하여 들 것에 뉘인 후 출발하였으나 언덕에서 구르는 바람에 들것이 부서지고 말자, 방안식/방영식 형제가 자기네 집으로 달려가서 사다리를 들고 나와 새로운 들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방림동 밤나무골에 도착한 후 굴을 파고서 유화례 선교사를 그곳에 숨겼으나, 밤나무골로 광주의 피난민들이 몰림으로써 그곳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때까지는 모두에게 거의 비밀로 하였다. 유화례 선교사는 곽신천 전도사의 배려로 눈을 가리고 머리도 가림으로써 환자로 인식될 뿐 외국인이라는 낌새를 나타내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23일 오전 예배를 마친 정인세 원장도 비로소 유화례 선교사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현필은 김금남에게 조금 큰 여자 한복 한 벌을 만들게 한 후 대숲에 숨어있는 유화례 선교사에게 김금남을 소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화례 선교사는 광주의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화순군 도암면 청소골로 온 식구가 이동하였다. 화순 화학산에 들어가 피란생활을 하면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유화례선교사의 목숨을 구하였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특히 강차남 서울어머니 문재현 세 분이 화학산에서 순교당한 사실은 잊을 수가 없다.
7. 무등산 증심사 입구
1948년 음력 3월 18일부터 광주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동광원의 신앙생활 모습은 이미 광주와 인근 신앙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용기있는 신앙인들이 소속 교회를 떠나서 이현필에게로 옮겨오기 시작하였다. 이현필은 우선 제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였다. 이현필은 1949년 연초부터 무등산 증심사 입구에 있던 김천배 소유의 주택과 그 위쪽의 빈집과 김상옥 한의사의 보조로 지은 집에서 여제자들이 살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그리고 고개너머 다른 한 채에서는 남반들이 기거하도록 하였다.
가을에는 그곳에서 목포 최명길 목사를 초청하여 동광원 최초의 합동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무등산 증심사 시절에 동광원에 가입한 사람이 임선님, 복은남, 방순남, 홍효순, 복은순, 이정님, 홍미숙, 이복순이었다. 세례를 베풀었던 최명길 목사는 이듬 해 한국전쟁 기간 중 완도에서 순교하였다.
8. 방림동 밤나무골과 귀일원
현재의 귀일원 장소
1949년 이현필선생이 이끄는 수도공동체가 방림동 밤나무골 부지 100여 평을 기증 받았지만 집을 지을 자금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현동완 총무가 희사금을 주어 집을 짓고 이주하게 되었다. 이현필은 현재의 방림동 밤나무골 부지의 소유자인 김판용 집사로부터 부지의 일부를 기증받자 서울 YMCA 현동완 총무의 후원금과 재산을 기증한 여러 식구들의 후원금으로 조그마한 건물을 짓고 이동하였다. 훗날 이현필은 백춘성을 비롯한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이 밤나무골을 매입하고 건너편 이성태씨의 감나무골을 임대하여 많은 식구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생활공간을 마련하였다. 방림동 밤나무골에 터를 잡은 후부터는 고아, 걸인, 환자 등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즉 1949년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현필과 제자들은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사업을 지속하여 왔다. 이곳이 바로 현재 사회복지법인으로 설립된 ‘귀일원’ 장소이며 지금까지 많은 장애인들을 돌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현필은 광주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제자들을 광주로 오게 하여 생활하면서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고아들을 데려와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현필 제자들이 돌보던 고아들 가운데 상당수는 곡성의 강인영씨가 데리고 와서 이현필에게 맡겼던 아이들이었다. 광주에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한 시기가 어느 시점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1949년부터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고 할 것이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고아원 사업의 선구자는 목포의 윤치호 전도사이다. 그는 1928년에 부모를 잃은 고아 7명을 데리고 고아원을 시작하여 "공생원"을 운영하였으며 1932년에는 일본여성 다우치지즈꼬(한국명 윤학자)와 결혼하고서 500여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윤치호는 1949년에 정인세 선생에게 고아원을 운영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며, 그렇지 않아도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던 이현필과 제자들은 이 사업에 적극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정인세는 최흥종 목사, 김천배, 백영흠 목사 그리고 전라남도 도지사, 경찰서장 등 광주와 전남 지역의 유지 70여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사회복지시설 "동광원"을 설립하고 정인세가 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부터 이현필에게 고아들을 데리고 와서 맡긴 곡성의 강인영이 동광원의 총무를 맡았다. 동광원을 시작한 날자는 1950년 1월이며, 강인영씨가 데리고 온 고아들과 광주 시내에서 발생한 고아들을 합쳐서 20여명 가량이었다. 동광원이란 명칭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사는 에덴동산, 즉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졌다.
동광원 간판이 걸린 곳은 전라남도 도청 보건과 소유의 적산가옥이었다. 이 적산가옥은 광주 YMCA가 1949년에 국제위원회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매입한 재산으로서 약 60평의 2층 건물과 100평 가량의 창고로 되어 있었으므로, 광주 YMCA는 본채를 본부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뒤편에 딸린 창고는 동광원 고아들이 생활하였다.
정인세 선생은 1948년 여름이후 이미 광주YMCA 총무를 사임한 상태였다. 정인세 원장은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하고, 두 번째 부인과 재혼하였으나 재혼한 상태에서 심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에 이현필과 함께 신앙생활하기로 결단하고서 출가하였다.
문제는 이때로부터 시작하였다. 황금동 광주YMCA 건물은 본부건물과 동광원으로 구별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고아들이 북적이기 시작함으로써 고아원인지 아니면 회관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어서 "YMCA 정신이 청년운동인지? 아니면 고아원 운영인지?" 라고 시비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고아들은 20여명이고 이 고아들을 돌보는 보모와 선생들 다시 말하여 이현필을 따르는 제자들이 또한 20-30여명에 이르게 됨으로써 광주 황금동 YMCA 회관은 동광원 사람들이 아무리 조용하게 지낸다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동광원에 1951년 당시 피란민 수용소에서 고아들을 동광원에 맡김으로써 숫자가 불어나자 이들을 양림동 회관과 지산동 등 여러 곳에 분산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아들과 이들을 돌볼 수 있는 보모와 선생들을 동광원 제자들 가운데서 선발하여 여러 지방으로 분산 이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거처는 증심사 입구 무등산 숲속 거처들이다. 증심사 아래 무등산에 있었던 집들에서 동광원 식구들이 보모와 선생으로 잠시 생활하다 1949년 말에 모두 나왔다.
두 번째 거처는 지산동 "수의 축산전문학교" 교사이다. 이 교사는 광주의 부자 지응현(일명 지참봉)씨가 사비를 들여 광주군 극락면 쌍촌리에 세운 응세농도(應世農道)학원이 일제 말엽에 군사시설로 수용되어 문을 닫았다가 지응현씨의 막내 아들인 지계선씨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지산동에 세운 중학교와 동물의학을 가르치는 "수의 축산전문학원"이었다.
세 번째 거처는 1949년 말에 건물을 지어 이현필이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기 시작한 현재의 귀일원이 있는 방림동 밤나무골이었다.
이 밖에도 물론 처음 동광원 간판을 내 걸었던 YMCA양림회관이 있다. 여전히 몇 식구들은 양림회관에서 살았으며 또한 몇 사람은 양림회관 뒷동산의 선교사들의 거처에서 살기도 하였다.
1951년 1.4 후퇴라는 큰 술렁임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은 이후로 지산동 양림동 및 방림동 밤나무골에서 생활하며 고아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광주로 몰려든 피난민들의 행렬과 그들을 따라 온 수많은 고아들로 인하여 광주시로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강순명 목사는 학동에 "천혜경로원"을 세우고 노인들과 고아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정순모 목사는 "무등육아원"을 세워서 고아들을 받아들였으며, 광주시는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고아들을 동광원에 위탁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광원의 고아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하였으며 600여명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는 단순히 돌보는 수준이 아니라 운영과 경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 부분에서 정인세 원장의 역할이 컸다. 우선 조직을 개편하여 보모와 선생으로 나누었으며, 분산배치 계획을 세웠다.
한국전쟁이 종결되고 1954년 봄에 이르면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새로운 젊은 선교사들이 파송 받아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광원 식구들은 양림동 선교사촌과 건너편 에비슨 농업실습학교 교사도 비워주고 방림동 밤나무 골과 건너편 감나무 동산으로 몰려들었다. 왜냐하면 지산동 수의축산 전문학교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밤나무골에서는 동광원 고아운동과는 별도로 틈틈이 광주역에서 방황하거나 갈 곳이 없는 무의무탁한 장애자들을 데려다가 목욕시키고 밥 먹이고 재워 보내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 즈음에 광주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퇴원한 전신불구 환자를 맞이하였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가 동광원을 찾아와서 머지않아 퇴원할 환자 김인옥씨는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으며 마땅히 갈 곳이 없으므로 동광원에서 맡아서 병수발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때맞춰 동광원 소식을 들은 병원측에서 환자를 인수하여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 때로부터 김은연씨는 자신의 방 옆방에 두고서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이 결국에는 귀일원 운동의 본격적인 사회복지 사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현필은 1961년 총회 이후 화순 도암면 중촌리에 가서 기거하였다. 이 기간에 이현필은 동광원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동광원을 이끌어 갈 인재를 키우는 일이며 동시에 자급자족하는 단체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현필은 1964년 3월 총회를 마치고 서울로 마지막 떠나기에 앞서서 부르짖었던 "일작운동"과 함께 귀일원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정인세는 1965년 2월 24일 귀일원을 설립하여 현재 법인 산하에 귀일정신요양원, 귀일민들레집, 귀일향기일굼터에 총 200여명의 장애인들과 직원 6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9. 송등원과 무등원
소화자매원으로 탈바꿈된 역사
동광원 식구들이 식량이 부족하여 매우 고통당하는 것을 알았으나 광주 기독병원 앞으로 할당된 배급품을 나눠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필과 카딩톤은 하나의 합의에 이르렀다. 즉, 병원에서 나오는 잔반(殘飯)을 동광원에서 수거하고 동광원은 광주 기독병원의 분뇨수거와 청소를 맡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카딩톤이 거부하였지만 회수된 잔밥을 잘 삶아서 먹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그리하여 김은연이 새벽 3시경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어둠에 병원의 분뇨를 수거하여 감나무 밭에 비료로 뿌렸다.
카딩톤이 동광원에게 베푼 큰 혜택가운데 하나는 동광원 식구들 가운데 초기에 세 사람, 민장순, 김순남, 이태례에게 광주기독병원에서 보조간호사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후일에 복은순 나숙자 남애주 이맹순 이오순 김교매 등이 보조 간호사로 근무하게 하였다. 간호조무사 훈련을 받은 식구들 중 몇 사람은 간호학원에 다님으로써 자격증까지 획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동광원의 송등원 운영과 환자관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일어났다. 환자들에게 채식만 제공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동광원의 규율을 지키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현필선생과 정인세원장은 동광원 본래의 정신을 훼손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송등원의 이사진들은 별도로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어 독립하였다.
한편 송등원의 초기 총무를 담당하였던 박창규 전도사가 갑자기 떠남으로써 그 자리를 이현필선생의 뜻에 따라 김준호가 맡게 되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송등원은 이현필의 수제자 김준호가 책임을 맡아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김준호는 방림동 동광원 본원과 항상 깊은 관계를 갖고 광주 기독병원에서 강제퇴원 당한 환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등산 전역으로 땅과 집을 매입하고 움막을 지어 환자들을 수용 돌보게 되었는데 이 때로부터 송등원에서 무등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무등원은 산수동 골짝의 이전의 송등원 시설 규모의 차원을 넘어서 원효사 계곡으로, 삼밭실로, 은혜실로, 복음당으로, 손님 접대실로 여러 시설을 갖추면서 시설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설확장은 당시 한미재단에서 제공하는 밀가루와 옥수수를 가지고 학동과 산수동의 노동 시장에서 싼 임금으로 일일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무등산에 널린 돌을 모아서 집을 짓곤 하였으며, 카딩톤은 이들에게 식품과 약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다가 무등산 요양소가 1972년 5월 무등산이 도립공원화 되면서 다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카딩톤 원장은 김준호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카딩톤 원장은 봉선동 아리랑고개에 전 500평, 조봉동에 전600평, 골매에 전500평의 땅을 사줌으로써 조봉동에 15동, 골매에 5동을 짓고 아리랑 고개에는 50평 규모의 집을 지음으로써 아리랑고개에는 남자가 조봉동과 골매에는 여자들이 이사하였다.
카딩톤이 1974년에 방글라데시로 결정하고 떠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무등산 일대에 퍼져있었던 무등원은 운영상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큰 경제적 도움을 주던 카딩톤이 떠남에 따라 일단 무등원에 들어 온 환자들의 지속적인 생필품 공급이 어려워짐으로써 가장 급선무로 대두되었다. 이때로부터 무등원 운영을 맡았던 이사진이 운영을 책임질 단체를 찾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에 광주 가톨릭 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조비오 신부를 비롯한 책임자들이 무등원을 소화자매원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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