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이 삼일 남았다. 노란 수선화가 4품종 피었다. 아직도 하양색등 피지 않은 종도 많이 있다. 가꾸지 못해 일부는 도태되고 나머지도 실하지 못하다. 화목 정리와 비 설거지 작업을 했다.
그리스도의 일꾼
1997. 7.17 오북환 장로님
고린도전서 4장, 그리스도의 사도,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던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던지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또 내가 나를 나 자신을 심판 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심판 하시는 분, 그 분은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 이십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를 심판 판단 못하고, 나를 심판 하시는 분은 주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 오실 때 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거 무슨 말이냐? 주님이 오셔서 판단을 해줘야지, 옳다. 그르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하나님보다 더 지혜 있는 것 같이 판단 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아예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주께서 지시에 의해서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주께서 하신 것이니까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주께서 하신 것이라는 상관없는데 내 스스로 하면 안 된다. 함부로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신데 어찌 내가 판단할 수 있느냐? 나를 심판 하신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5절,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 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이거예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각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바울사도가 베드로사도를 더 선배인데 베드로 사도는 수제자이고 으뜸 제자 중에 제일 머리이고 바울사도는 그때 제자 열두제자 축에 들지도 않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께 직접 받았다고 하면서 사도를 면책, 책망했단 말이야. 대중 앞에서, 맡 둘이만 아니고 여러 사람 앞에서 책망 했어요. 그 큰 참 체면 적으로 보면 크게 실례가 되지 않아요? 교만하고 어쩌면 수제자로서 자기는 직접 제자도 아닌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가지고 수사도를 잘못이라고 책망 하는 건 크게 무례한 실례가 아닙니까? 외면으로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바울사도 자신도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했지 않아요? 그 말이 어디 있어요? 빌립보 2장에 있지 않아요? 2장 3절인가 4절에 있지요?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또 자기는 온전히 겸손했다. 그랬거든.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책망을 하냐 말이야. 수사도를 갈라디아 2장 11절서 14절까지 있지 않아요? 왜 책망 했냐? 너무도 성경에 그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망했다. 바울사도의 전한 복음을 베드로 사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인정, 옳다고 그렇게 보기는 표면상으로 보면 책망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잘못은 아니지요. 베드로사도의 잘못은 아니에요. 유대인 아니고 이방 사람들하고 같이 식사를 했단 말이야. 왜 잘못이 아니에요? 사도행전 10장에 있지 않아요? 고넬료가 이방 사람 아니요? 예수는 잘 믿었어요. 이방사람 접촉을 못했어요. 그때 까지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어요. 네모진 보자기에다가 모든 더러운 짐승의 형상을 보이면서 잡아먹으라고 했거든. 아이고, 유대인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런 부정한 것은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법이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내가 깨끗이 했는데 왜 부정하다 하느냐? 그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받을 그때는 몰랐어요. 무슨 뜻인가? 몰랐는데 고넬료의 심부름꾼이 와서 가자고해서 그때서 그 계시의 뜻을 알았단 말이야. 아, 이방 사람도 이렇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이니까 교제하라. 복음 전하라. 그러니까 바울사도의 책망은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고넬료 집에 가서 이방사람에게도 전도 하라는 뜻인데 몸으로도 접촉 하라는 뜻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 것뿐이지 베드로가 잘못한 거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왜 책망 했냐?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니까 그 사람들 바로 책망할 수 없어. 너무 신앙적으로 어리니까 그러니까 그걸 초월한 베드로 사도를 때린 거야. 책망을 해. 베드로 사도는 또 책망을 달게 받는단 말이야. 자기한테 하는 것이 아닌 줄 알고 달게 받아요. 약자를 위해서 대신 받아준 거예요. 가령 자서전 소화 테레사 자서전을 보면 남을 꾸지람 하는 거보다 꾸지람 받는 것이 몇 천배 낫다고 그랬거든. 그럼 소화 테레사만 그렇겠습니까? 수사도는 그런 마음 없겠어요? 책망을 받는 것도 좋다. 책망을 하는 것은 자기 책임이 있거든요. 남을 책망할 만큼 자기가 실력이 있냐? 예수냐? 예수가 아니고는 할 수가 없거든.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가 어떻게 책망 하느냐? 그거야. 바울사도 안에는 그리스도고 베드로 사도 안에도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끼리 책망을 하고 책망을 받고 그래요. 이 말씀도 그리스도가 사람을 통해서 하시면 듣는 사람도 그 사람 속에 듣게 해 주세요. 듣게 하셔야 들리는 거예요. 내 욕심으로 암만 듣고 싶어도 들려지는 거 아니란 말이야. 귀를 열어주셔야지, 말 하는 사람도 주께서 그 사람 영혼 안에서 말씀하시고 주께서 하시고 입만 쓰신 것이지, 하시고 듣는 편에서도 그 사람 듣는 사람 속에 예수께서 귀를 열어 주셔야 한다고 그러면 인제 구체적인 문제로 귀는 어느 때 열어주시는가 말이야. 우리 마음상태가 어느 때 이 시간 아니고 정신적인 시간 어느 때 어디서 열어주실지 몰라. 친히 하신 말씀이 어느 때 어디서 들릴 런지 몰라요. 바울사도는 어디서 들었어요? 친히 하신말씀을 다메섹 도상에서 탁 거꾸러졌어요. 완전히 자기를 부정했어요. 자기라는 건 떨어져 버렸어요. 말에서 떨어져버렸어. 옛사람이 죽었다는 말이에요. 이제 새 정신으로 새로 영안이 떠서 영의 귀가 있어서 들린 거예요. 사울아, 사울아 처음으로 그런 명령적인 음성을 듣거든요. 사울아, 바울 사도는 누구의 권위에 굴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고는 주여 누구십니까? 자기는 없어요. 그런데 욥기 서를 보면 어느 때 귀를 여시는 가요? 그럼 우리가 지금 그런 귀를 열어 주심을 받을 때인가를 각자가 살펴보라고, 그런 환경에 부닥칠 때 그런 역경에 부닥칠 때 들리는 건데 나는 그 때가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이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아요. 말씀을 들을 때도 자기의 세속적인 귀를 어둡게 하고 영적인 귀를 열어서 듣게 하는 건데 열두 제자만 보더라도 열한 제자만 보더라도 누가복음 24장에만 보더라도 말이야. 어느 때 귀를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했는가? 열어주셔야 한다. 어느 때 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제자들이 그때가 어느 때인가? 3년 동안 예수 따라 다닌 거 허사였구나. 완전히 절망하고 돌아갈 때, 그 자기 고향 두 제자의 고향이 엠마오인데 엠마오라는 뜻은 그거지 않아?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런데 인제 할 수없이 도로 찾아가는 거야. 인제 두 번째 내동댕이 쳐버리는 거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보고 잠깐 눈을 떠서 알아보게 하고 그대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간 거예요. 3년 동안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 예수님과 육적으로 고생했지 않아요? 그런 결과가 허무하게 되어버렸다. 하도 허무해서 둘이 주고받고 이야기 해. 우리가 꿈을 꾼 것 아닌데 실제로 우리가 3년 동안 살아온 것은 분명한데 그 결과가 왜 이럴까? 누구 부끄러워서 어디 가지도 못하겠고 3년 동안 예수 따라다닌 것이 부끄러울 정도라고 그렇게 허망하게 되어버리니까 완전히 절망 상태라고, 그럴 때 귀를 열어준 거예요.
누가복음 24장 24절 또 우리와 함께 한자 중에 두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전혀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믿기는 믿어. 믿는 게 더뎌. 빠르게 속히 확실히 믿지를 못해. 그런가? 사실은 그런 거 같은데 믿어지지는 않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영광을 바라면서 고난을 싫어한단 말이야. 고난을 먼저 치루면 영광은 바라지 않아도 오게 되어 있는데, 영광은 탐내지 않아도 된다고, 고난만 겪어 놓으면 받기 싫어도 받아진다. 받기 싫을 리 없겠지만 원하지 않더라도 주어진다. 고난은 안 받으면서 영광만 탐하면 어떻게 되느냐? 서울을 간다면서 저 여수나 목포로 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서울로 간다. 가지만 실제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부자는 천국 간다고 했지만 실제는 자기도 모르게 반대방향으로 가는 거야. 나사로는 처음부터 세상길은 갈 필요가 없지요. 세상으로 떨어질 필요는 없지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올라간 거예요. 온갖 불행은 독차지하고 그게 가는 길이니까 방황하지 않고 바로 있는 장소에서 곧바로 가는 거예요. 바로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감정을 싫어한다. 이거야. 고생을 싫어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을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 하시니라. 한 약 25 리, 한 두어 시간 서너 시간 걸리는 시간에 길을 가는 그 시간에 구약을 다 설명해 버렸어. 모든 성경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것을 말했단 말이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할 것을, 그런 사건을 다 미리 예언해 놨단 말이야. 이사야 53장 같은데 그대로 예언해 놓은 대로 다 이루어 진거란 말이야. 그런데 실제 체험을 못하니까 그 말은 부인하지는 않지만 믿어지지는 않아. 그런 말이 있기는 있는데, 30절, 저희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 사 이사야 37장에 환난의 떡이라 말이야. 환난의 고생의 물, 떡을 가 지사 축사했다. 축사 빌 축(祝), 빌 축(祝)자가 먼저이니까 또 사례할 사(謝) 축사 또 감사라고도 하지. 감사 사례할 사(謝)자가 버릴 사(謝)자거든. 끊어버려. 죄를 끊어버려. 죄의 뿌리를 끊어버려. 축사 감사 인제 버릴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말로하면 고맙소. 일본말로하면 이거 있기 어렵습니다. 너무 과분해서 미안하고 과분하고 너무 영광의 대접을 받아서 있기 어렵습니다. 축사라는 말은 마음에 죄를 끊어졌다는 거지. 그럼 우리는 축복해주고 축복 기도하고 축사를 하고 그건 말뿐이지. 실제로는 그대로 안 되거든. 내 속에도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면서 누구 죄를 끊어주겠습니까? 내가 죄의 종살이에 있으면서 누구를 해방시켜 줍니까? 어제 저는 도암을 두 번이나 갔다 왔는데 내가 지금 뭣 하러 다니는 사람이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참 이상해요. 누가 요구도 안하는데 내 스스로가 꼭 필요하고 받아야 할 사람이 안 받는데 어쩌느냐? 말이야. 아 내가 정신없다. 또 아침에 소식이 왔어요. 지금 목사가 한 5일 휴가가 있으니까 나한테 온다는 거야. 아주 기쁜 소식이지요? 대화할 시간이 있으니까, 다른 때는 원치도 않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간다고 하거든. 없어. 이 말씀을 전하러 다녀야 하냐? 들을 사람이 와야 하냐? 어떤 것이 정상이요? 들을 사람이 오는 것이 정상 이지요. 가만있으면 아쉬운 사람이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더라고 하는 겪이라고, 목마른 사람이 찾아와야지. 목마르지 않은 사람을 가서 주려고 한다고 되겠어요? 말씀에 갈증을 느껴야지 그런 사람에게 주게 되어 있는 거지. 갈수 있지요? 갈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갈수 있어요. 성경 보면 누구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내렸습니까? 가서 증거 하라고 간다게 여왕의 내시로 있는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고 가는 도중에 마차 안에서 성경을 보고 있어요. 여가 선용을 한다. 그 말이야. 가만히 있는 거 보다 마차 안에서 성경을 봐. 보되 이사야 53장을 본거예요.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성경을 보는데 빌립에게 하나님이 계시 했어. 가서 전해라. 그 성경말씀을 아십니까? 아 지도자가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보기는 보지요. 허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알지요. 설명 해줬어. 아 그리고 세례 받고 기쁨으로 떠났지 않아요? 성령의 지시대로 하면 된다. 가서 증거 하라는 대로 그 내시라는 사람은 그냥 성경만 봤지, 누구한테 갈 줄 모르니까 하나님이 자연히 지시해서 가서 들려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참으로 진리를 사모 하냐가 문제라는거야. 우리 영적으로 목마르지 않아요. 너무 배불러 가지고 필요를 느끼지 않아버려요. 저희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셨다. 마음을 열어준 거예요. 눈을 뜨게 해준 거예요.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의 눈이 밝아졌어요. 눈을 떠야 보이지요? 밝아져. 그인 줄 알아봤어요. 얼마나 반갑겠어요? 기쁘고, 그 순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 순간 번개보다 빠르게 저희에게서 보이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어디 오고가버린 거 아니에요.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서 눈만 딱 떠버리게 해 준다고요. 오고가고 할 거 없어. 어디든지 계시니까, 누구 마음속에 다 계시고 만물 속에 계시니까 내 마음이 눈을 뜨냐? 안 뜨냐? 그것뿐이야. 뜨면 그 자리에 자기 안에 있다. 그 말이야.
그래서 의지를 보다가 덜 봤는데, 책에서는, 내가 지금 어떤 의지를 갖고 있냐? 말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하는 간절한 의지인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고자 하는 의지인가? 내 뜻을 맞추자는 의지인가? 내 뜻 표준이면 길이 막힐 것뿐이고 내 뜻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목표를 하면 열리고 그거라고요. 그래 내 뜻은 버리기 싫다. 이거야.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조금 보충해서 뜻이 하나인데 둘을 가지고 이렇게 한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소원이 둘인데 머리가 둘인데 어떻게 하냐고? 성령께 순종하고도 싶고 내 감정 요구대로 채우고도 싶고, 어떻게 하냐? 안 된다.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졌다. 눈이 밝아져서, 16절은 저희의 눈이 가려졌다. 가려졌던 것이 인제 조금 열어졌다. 밝아져서 이거 잠깐입니다. 잠깐 그런데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서 보이지 아니하더라. 번개보다 빠르게 곧 거기 계신 거예요. 예수님 우리 마음속에 호흡 속에 왔다갔다 숨 쉬고 왔다 갔다 하며 계신다. 그런데 거기서 눈만 딱 열어준 것이야. 아 예수님이 여기계신 것을 내 안에 여기 계신 것을 저 먼데 가서 찾았다. 또 그 사람 속에도 예수 계신데 내가 가서 소개해 준다고 어리석다. 오히려 그 사람이 더 바로 예수를 보고 있는데 나는 소경이면서도 보여주겠다고. 가만히 생각하면 어리석어, 내가 소경인줄 알아.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참 이상하더라 말이야. 이 사람이 누군가?
3년 동안 같이 살았으면서도 몰라, 몰라봐. 누군가? 그런데 좀 다르단 말이야. 말씀 하시는 순간에 뜨겁고 마음이 이상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갔어요. 다시 한 번 또 두 번째 동댕이쳐버렸어. 포기해 버렸어. 완전히 포기해 버렸어. 이제는 나는 안 찾아오련다. 이제는 별일 있어도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끝나야지, 도로 사생활 자기 뜻 자기 집은 자기 뜻이야. 나, 나라는 집, 그 쪼그라진 집, 항상 구속 적인 거 자유가 없는 거 꽉 매여 버린 거 사람이라는 건 자기가 자기한테 매여서 살아요. 자기 육체 감정에 매여서 산다. 끌려산단 말이야. 그러니까 성령을 자꾸 거스르지요. 또 말씀 시간에 그냥 자버리거나 그럼 아예 나가서 다른 데 가서 자버려요. 그러면 그 자버리는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 말하는 사람도 문제가 된다. 어떤 선생이 말씀을 하시는데 이 선생은 자버렸어요. 그럼 누가 문제인가요? 표면상으로 보면 자버린 사람이 문제지요. 그러나 그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례 줄만하지 않냐? 자버렸는데 왜 자버렸냐? 자는 분이 아니에요. 항상 정신이 깨어있는 분이거든. 육신 눈은 자는 것 같아요. 마음은 깨어있어요. 잠은 자나? 마음은 깨어있다. 아가서 5장 2절에 있지 않아요? 육체는 잠을 자는 것 같아요. 그러나 마음은 항상 깨어있다고요. 그런데 자는 척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뜻이 무엇이겠냐? 그 말은 영혼에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이야. 그 말 천만가지 만 번 들어봤자 영혼을 깨우지는 못한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그러지 않아요? 하늘나라는 마음에 있는데 말로 그걸 하려고 하면 오히려 하늘나라 마음에 있는 하늘나라를 덮어버린 게 되요. 가려버려요. 지식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가려버려요. 그래 철부지 어린애에게 나타내시지, 안다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신 것 아닙니까? 천국의 비밀을, 그러니까 헛된 철학이란 말이야. 왜 그러냐? 기초가 세속원리니까 아무리 세상에 통해 있다하더라도 기초가 틀려요. 본바탕이 그리스도가 기초가 아니야. 세속원리가 기초야. 거기다 별 집을 지어 봐도 허망한 것뿐이야. 모래위에다 지어 그 증거가 어떻게 되었냐? 노름하는 사람은 한 사흘 밤도 안 자고라도 노름을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듣는데 졸리다는 건 그건 안 된다고. 그런데 입장을 바꿔져요. 조는 분이 조시던 분이 말씀하게 되요. 아까 존다고 말하던 분이 듣게 되요. 그런데 당신도 졸더라. 그 말이야. 내 앞에 앉아서 속으로 보시오. 그때 그 분이 졸았는가? 정신은 깨어있는 건가? 말을 들으나 안 들으나 항상 깨어있는 분인데 졸 리가 없거든요. 그게 한 교훈이라고요.
그런 말 들을 필요가 없다. 어제 제 처지도 그래요. 일방적으로 가서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하니 꼭 들어야 할 사람이네데 안 들어 버려요. 그럼 내 문제라는 거야. 나에게 대한 교훈이 된다. 이거야. 그러니까 함부로 말을 증거 할 가치가 없어져요. 아주 가치 있는 것은 함부로 증거 하지 않아요. 감춰놓은 거예요. 그래서 꼭 필요한 영혼에게 나누어주게 된다고요. 적절한 때에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가서 찾아라하면 그래 사람의 생각으로 자꾸 주고 싶어서 준다고 받을 사람이 있냐고 없다고, 제자들은 그렇게 세속적으로는 완전히 절망 아니에요? 그럴 때 숨이 죽어있었으니까 소금으로 간을 쳐놨으니까, 그러니까 거기다 귀를 열어서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해석해. 45절,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그랬다고, 마음을 열림을 받을 때가 어느 때냐? 아주 세상에 미련이 하나도 없을 때에요. 자신에게 대해서 앞으로 어떤 희망이 창창한 사람에게는 아직도 멀었다고. 길이, 딱 막혀야지 궁즉통야(窮卽通也)란 말이야. 딱 끝이 속수무책이라는 거 뒤로 후퇴할 수도 없고 전진할 수도 없고 좌우로도 딱 갈 길이 없어. 오직 하늘만 쳐다본다 하나님께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 하나님이 없다하는 무신론자도 항해하다가 파선당하면 하나님 나 살리소. 그런다고 하나님 자기 마음에 계시니까 완전히 절망상태에서 그럼 거기 한번보고 로마서 4장 18절 19절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 5장 3절서부터 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그런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빠져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때라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또 고린도 후서 1장 8절서 형제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어떠한 것인지는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그 환난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어요. 우리의 힘 인간적인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 환난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서 마침내 우리는 살 희망조차 잃게 되었어. 세속에 대해서는 완전히 절망이야, 희망이 없어요. 희망조차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 죽었다. 생각이 들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렇게 어려운 죽을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주셨고 앞으로도 건져내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건져내 주시리라는 희망이 있어요. 믿고 의지하는 희망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 여러분은 기도로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이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랬다고요. 또 고린도후서 4장이에요. 6절서 봅니다. 어두움에서 빛이 비쳐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춰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는 빛나는 빛은 무엇을 보라는 빛인가? 무엇 보라는 빛이에요?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는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말이야. 그거를 깨달으라는 빛이에요. 가장 겸손한 영혼, 멸시만 받고 천대만 받는 영혼, 그런 영혼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빛이에요.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부자유스럽고 맨 남의 손만 빌려가지고 몸을 부지한다는 거, 백유자, 백유자를 통해서 지금 큰길이 지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또 아주 귀하게 쓰인다. 말이야. 앞으로 백유자 자신은 필요 없다는 겁니다. 어디다 내던져도 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니까 사람들을 통해서 시켜서 보호된다. 백유자에게 따른 종이, 그거 되고 싶어도 아무라도 못되는 거야.
특별히 선택받은 영혼만이 되어요. 그 종은 무엇이냐? 그리스도 종도 그리스도 대접을 받는 자신도 그리스도야. 말도 그리스도거야 말 하는 사람 속에 그리스도 듣는 사람 속에 그리스도 듣는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가 귀를 열어 주셔야 되요. 복음은 예수 끼리 그리스도끼리 말하는 것이고 율법은 사람끼리 말 하니까 통하지를 않아. 서로 답답해. 그게 율법이야. 복음은 자연스럽게 되는 건데 율법은 막 억지로 하려고해. 억지로 때도 기회도 허락도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요구도 안했는데 갑자기 주려고 하는 거야. 실상은 줄 것도 자기도 따지면 없는데 고린도후서 3장에도 있네요. 9절,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율법은 정죄하지요? 그래도 진실은 영광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사라질 거예요. 영광이 있었다면 사람을 무죄석방 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느냐? 무죄석방,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하면 과거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도 율법은 잠시 쓰고 버릴 거예요. 없어질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 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아직도 있는 것 같이 속인거야. 너울을 가려졌어요. 자기 얼굴을 모세 그때 십계명을 받을 때는 빛났거든. 그래 산 사람이 모세 얼굴을 볼 수 없어. 가린 거야. 그런데 사라졌는데도 가린 거야. 그런 짓은 안 한다. 사도들은 율법이 아니에요. 복음이에요. 확실한 빛이 있어요.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울에 가려져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지금 어두워 졌어. 마음이, 얼굴에 보자기 쓴 게 아니라 마음에 보자기가 씌워졌어.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열어주셔야 알지, 어떻게 압니까? 귀를 열어주셔야 알지. 그 뜻을 알지 못 했어.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자기라는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실 때 내 머리는 없애버리고 그리스도가 머리가 될 때 믿을 때란 말이야. 의식적으로 믿는 거 아니고 자기라는 것이 율법에서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있을 때 믿을 때 비로소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려져 있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집니다. 어두움이 빛 속에 가면 없어져야 되요. 주님은 곧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매이지 않아요. 이 자유는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춰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야 한다.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이란 말이야. 주님이나 성령이나 예수나 성부나 하나님이나 삼위가 일체란 말이야. 일체 한 몸이야. 주님이신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에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성령이시니까 사람은 성령께 절대 순종할 것뿐이에요.
한 시간 조금 넘었는데 여기 책 101페이지 조금 보고요. 의지에 대해서 여기는 의지라는 말로 안 되어 있어요. 내 아이야, 네 마음의 문간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마음 문간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온전히 네 것이며 네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내 것이 된다. 믿는 사람의 것이다. 나는 완전히 하나님 것이고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고 하나란 말이야. 네가 그분께 말할 때 그분은 그분을 돌아볼 때 네 주위의 것들로부터 주의를 돌려 지극한 다정함으로 그분을 향할 때 지향 심향 마음이 어디로 행하냐? 자 오늘 각자 우리들 마음이 어디로 행하냐? 몸은 인제 오늘 또 시간되면 남원으로 간다. 몸은 남원으로 가는데 마음은 어디로 가냐? 그거야. 몸만 가면 마음은가냐? 그럼 몸이 가버리면 마음은 여기 없는가? 마음은 어디든지 갈수 있단 말이야. 그래 마음을 어디로 가냐? 하나님께 로냐? 땅으로냐? 그리스도 에게냐? 유다 에게냐? 아담으로냐? 유다나 아담이나 같지 않아요? 그리스도로 행하냐? 땅으로 행하냐? 육으로 행하냐? 영으로 행하냐? 그거에요. 심향 지향 의향 의지 뜻 네가 그 분께 말할 때 그 분을 바라볼 때 네 주위의 것들로부터 주의를 돌려 지극한 다정함으로 그분을 향할 때 지향이란 말이야. 지극히 다정함으로 행할 때 너는 그분께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때 이제 마음을 여는 거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어야 되요. 다시 볼게요. 내 아이야, 네 마음의 문간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저 먼데 안계시고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시다. 온전히 네 것이며 네 안에 계시니까 믿는 사람 안에 계시니까 누구든지, 누구든지 그 사람 안에 계시니까 온전히 그 사람 것인데 네 마음은 딴판이란 말이야. 온전히 네 것이며 네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내 마음은 다른 살림을 한단 말이야. 다른 살림 밖의 사람, 하나님 싫어해. 네가 그분께 말할 때 그분은 그분을 바라볼 때 네 주위의 주위 모든 주위의 것들로부터 주의를 돌려 지극한 다정함으로 그분을 향할 때 마음이 뜻이 향할 때 나는 그분께 마음을 여는 것이야. 오로지 다른데 가지 말고 마음을 나누지 말고 오직 거기다 마음을 여는 것이다.
또 떨어져서 조금 봅니다. 그렇다. 내 어린 딸아 나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기다린다.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다. 자기가 나를 버리고 내빼버렸지. 내가 버린 일 없다. 자기감정에 따라서 버려 영의 욕에 끌리면 하나님 안 버리는데 하나님께로 오는데 감정의 욕에 끌린단 말이야. 나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들을 찾아 베들레헴에 왔으며 예수님이 탄생한 것은 그런 영혼을 찾으러 왔단 말이야. 죄인 부르러 왔으며 세상 마지막까지 그들을 찾아다니기를 계속할 것이다. 네가 어디가 숨어도 소용없다. 나는 먼저 거기에 있다. 갈 것도 없다.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이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끝까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찾아가, 그러니 어떻게 네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믿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믿는 것 그렇지 않느냐? 그러니 자주 네 믿음에 대해 내게 말함으로서 그것을 굳건히 하라. 믿음에 대해서 지치지 말라 선을 하다 지친다. 말이야. 내 뜻대로 안되면 지쳐 버려요. 안될 때에 새로운 계시가 있단 말이야. 완전히 지쳐버려야 된다고 완전히 자기 희망은 절망이 되어버려야 영적 계시가 온다. 지치지 말라. 너는 더 많이 희망하고 더 많이 사랑하라. 너를 몹시 원하는 분은 누구냐? 나 한 사람 한사람 몹시 원하는 분은 한분이 계시다. 그분은 네 크신 하나님이시다. 나같이 아무 죄 덩어리고 먼지만도 못하고 이런 것을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어서 돌아오라. 종일 손을 벌리고 계셔 까불고 어서 오라. 어서 오라. 오라니까 더 내빼고 있어. 오라니까 저기 목포나 해남이나 저리 땅 끝, 토말 까지 땅 끝까지 내빼요. 땅 끝이 있는데 거기서 가면 완도 뭔 섬으로 가요. 보길도 또 뭔 도인가? 여러 섬으로 간다. 완도읍에서 가는 것보다 토말 에서 가면 더 가까워요. 한 30분 빨라요. 배가 가면 몹시 원하시는 분은 네 크신 하나님이시다. 내 지극히 연약한 어린 딸아 항상 우리는 어려야 되요 하나님 앞에 죄 앞에는 대단해야 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지만 주님 앞에는 항상 어려야 되요. 어리고 항상 어린양을 하고 달라붙어야 돼. 그러고는 한걸음 더 전진하라. 말이야. 전진하라. 네 나약한 의지 나약한 의지에 있어서 한걸음 더, 걸음 보(步)자 어떻게 쓰지요? 걸음 보(步)자, 그칠지(止) 밑에 젊을 소(少) 젊어서 한걸음 그쳐라. 그럼 바를 정(正) 밑에 젊을 소(少) 그러면 젊어서 한걸음 그쳐라. 일보 일보라고 하면 한일(一)자 한걸음 일보라 써놓고 그거 뭐야? 한일(一) 걸음보자(步) 씁니다. 한일 걸을 때 바를 정(正)자 쓰거든. 한일(一) 그칠지(止) 작을소(少) 석자가 두자로 만든단 말이야. 일보(一步) 그칠지(止)를 한일(一)자에 붙여버리면 바를 정(正)자가 되어요. 젊었을 때 한걸음 바르게 걸어라. 생사는 한걸음에 있다. 사망으로 한걸음 걷느냐? 부자와 나사로가 있다면 한걸음 나사로는 처음부터 한걸음 천국으로 가는 길로 갔어요. 가장 낮은 자리로 부자는 높은 자로 스스로 교만자리로 가니까 음부로 가버렸어. 거꾸로 다른 데로 반대로 생사는 한걸음에 있단 말이야. 죽고 사는 거 한걸음에 있다. 음부로 걸음을 한걸음 놓았냐? 천국으로 한걸음 디뎠냐? 한걸음에 있어. 음부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나냐? 그리스도냐? 나는 지옥이고 그리스도는 천국이야. 한걸음 더 전진하라. 네 나약한 의지에 있어서 한걸음 더 네 신실함 신실함에 있어서 한걸음 더 나를 위해 전진하라. 나에 의해서 살라. 한걸음 더 전진하라. 찬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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