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마한마을에 있는 미세마을에 다녀왔다. 길가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있다. 춘분이 다가오면서 꽃들이 피어난다. 밭에 저절로 난 갓을 베고 마늘밭에 쪽파를 뽑아 가지고 가서 김치를 담가가지고 왔다. 새집을 크게 짓고 토방을 예쁘게 단장하고 있다.
거룩한 사명
오북환. 1993. 8. 14.
사실은 아직도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는 바울파다 라느니 나는 아볼로파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파당을 초월하지 못한 것입니다. 도대체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나는 씨를 뿌렸고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한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중요하십니다. 심은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동등한 사람이고 각기 수고한 만큼 그 차이는 동등하나 수고한 만큼 삯을 받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 10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
나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의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초위에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 사람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 진짜냐 가짜냐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려줄 것입니다. 불로 시험을 해서, 만일 그 기초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다 된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가던지, 왼쪽으로 가든지 뒤로 걸어가던지 목적지에 가면 되지요. 그런데 왜 구원은 영의 구원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5장 3절부터 5절을 보면, 나는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몸은 다 갈려서 각기 직장으로 처소로 가는데 마음까지 갈려서는 안 됩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더 가까워야 됩니다. 몸은 서로 얼굴을 대하니까 마음은 거리가 멀지만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으로 생각하니까 마음이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다는 거 몸만 모였다가 헤어지면 몸은 멀리 떨어져도 마음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 잔치에서 무언가 먹었으면 맛이 있겠지요? 어제 어떤 분이 여기 음식은 어쩌면 그렇게 맛있나요?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맛있나요? 저는 다른데 가면 맛있는데 라고 느껴집니다. 똑같은 음식인데 술에 인박힌 사람은 구정물을 가져다 줘도 맛좋다고 하는 것처럼,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몸보다도 마음으로 항상 같이 연락이 되어야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미 단죄하였습니다.
4절. 그때에 한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나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주 예수의 권능으로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어 그 육체를 멸하기로 판결한 것입니다. ‘육체를 멸하기로’를 구역으로 보면 ‘정욕을 멸하고’, 몸을 멸하면 회개도 못하니 몸은 그대로 있지만 정욕을 멸하기로 판결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날에 그 영혼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3장 15절의 구원은 몸이지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욕이 어느 정도 멸해졌는지 정욕을 말합니다. 몸이 아닙니다. 불에 탈 때 얼마만큼 시련을 겪었는가? 그 공적은 다 실패입니다. 불타버려 상은 없습니다. 사석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영혼의 구원은 창세기에 다 되어있습니다.
제 말인가? 성경에 있는 말인가? 저도 들어서 알았는데 한번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이미 구원해 주셨어요.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이제 구원은 창세전에 벌써 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벌써 해수를 정할 수 없이 전에 몸은 몇 살 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영혼의 연령은 없습니다. 언제인지 모릅니다. 창세전에 구원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딱 ‘기억 하셨다’라고 하면 전능하시니까 벌써 완성된 것입니다. 사람은 시작했으면 절반은 이룬 셈이지만 하나님은 시작도 없이 계획하시면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이니까 창세후 이 지구가 최후 마지막 몇 년이 될지 금년이 될지 몇 억년만년이 될지 모르지만 최후 마지막까지 태어날 영혼까지 다 해당됩니다. 사람의 영혼은 다 해당됩니다. 자기가 어찌해야 구원을 받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해 놓았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빨리 회개할 것뿐입니다.
회개는 무엇을 회개하는가? 묵시록 2장 21절 이하에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은 무엇 하려고 부르셨을까? 택해 주셨을까? 또 이 자리에 나와서 무슨 말을 들으려고 나왔을까 각각 다 있겠지요?
여기에는 우리를 무엇 하시려고 선택 하셨는가?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그일 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우리를 선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세상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입니다. 영혼은 다 어떤 영혼이든지 차별 없이 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상관없고 목적은 거룩한 일을 위해서 영혼이 거룩하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과 은혜에 따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보이시려는 이 계획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분명해 졌습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완성의 십자가상의 7언중의 하나인데 그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것은 이 땅위에서 몸으로 계신 동안에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나면서 소경 앉은뱅이 여러 가지 기적을 다하셨는데 최후 마지막 기적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모든 죄인들이 전 인류가 먼저 일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문이 길이 열려졌습니다, 성전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이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담이 막혀 휘장이 가려져있는 것을 죄가 가려져 있는 것을 허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들 일수록 더 많이 죄를 깨달은 영혼 일수록 일등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다 이루었다. 회개의 길이 열렸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휘장이 찢어졌다’라는 기적을 행하신분이 예수님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문이 열렸습니다, 담이 터져버렸습니다.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려면 나도 거룩해야 하니까 모든 사람은 거룩해야 합니다. 성화됨입니다.
삼위일체가 왜 삼위일체라고 하는가? 나도 모르지만 그런데 어떤 분의 말대로 한다면 당신의 직책이 분담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인데 성부가 하실 일 성자가 하실 일 성신께서 하실 일 삼위께서 하실 일이 나뉠 수도 있다. 결국은 하나님은 전체의 창조를 하신다면 성자는 죄에서 영혼을 대속해 내신다. 그 죄인의 벌을 당신이 받으시고 죄에서 건져낸다. 건져내서 누가 씻어줘야 하는데 성령은 거룩히 깨끗이 씻어주신다. 똥통에 빠졌다면 깨끗이 씻어야 하는데 성령이 씻어 주신다. 성령은 우리 각자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하시는 일에 분담이 되기 때문에 삼위라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나 같은 죄인을 무엇 하려고 부르셨을까? 거룩한 일을 하라고, 복음운동이 성화사업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산다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똑같이 생활하며 세상풍속대로 산다면 무엇이 다른가? 믿으나 안 믿으나 똑 같은 것 아닌가?
믿는다고 하며 사는 것이나 안 믿으며 사는 것이나 생활이 똑같다면 무엇인가?
에스겔 22장 26절에
이 땅에 제사장들은 나의 가르침을 제 편리 할대로 설명하고 내게 바친 제물과 헌금을 더럽혀 놓았으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제사장들 까지 구별 하지 않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백성에게 가르쳐 주지도 않고 자기가 그렇게 부정하게 사니까 백성에게도 깨끗이 살라고 가르쳐 주겠습니까? 안식일에 수치스럽게 되는 것도 마음아파하지 않고 거룩한 안식일에 날짜가 아니고 거룩한 마음의 안식일에 그것도 마음아파하지 않고 멋대로 죄에 빠져 산 것은 모두 그들의 책임이다. 제사장들의 책임이다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속되고 거룩한 것을 구별하지 않고 사람들을 구별시켜 줘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맡아서 하시려고 오셨는가?
요한복음 10장 33절. 유대인들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나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거요. 당신은 한낱 목수의 아들이고 사람인데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 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주셨다. 가서 거룩하게 하라 성령이 같이해요. 일체이시니까 성령은 거룩해요. 예수님과 나에게 세상에 거룩한 일을 하라고 보내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또 공동번역에 보면 고린도 후서 1장 21절인가 22절인가 거기에 보면 우리도.
끊김
세상에 보냈습니다.
19절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의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 보면 ‘바친다.’는 말을 ‘거룩하게 한다.’ 로 되어져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려는 것은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이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역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번역에 있는 말씀 바친다는 말과 개역으로는 거룩하게 한다는 말과 서로 틀리냐 하면 같습니다. 일치된다. 같은 뜻이다.
로마서 15장 14절 형제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너그럽고 지식이 풍부하여 지식은 있어야 한다. 영적 신앙의 지식, 서로 충고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에 계신 남자 분들은 대학교수, 목사님으로 누구를 가르치는 자리에 있고 충분하지만 이 자리에 오시면 배워야 하겠다. 배워서 가르치지요. 저는 배워야 할 처지에 있는데 지금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르치면서 자신이 배운다.
다만 내가 남을 충고하고 권고하고 인도하는 자격이 충분하지만 다만 내가 이 편지에서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 그냥 사명이 아니라 거룩한 은총으로 주신 사명은 성령이시니까 삼위가 다 거룩하니까 거룩한 일을 하는 사명입니다. 그것을 성도라고 합니다. 거룩 성(聖), 우리 도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 뿐입니다. 목적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일 년에 한차례고 두 차례고 모이는 것은 또 들었던 말씀을 잊어버렸는데 다른데 정신이 휩쓸려서 잊어버렸는데 들으면 그 말씀이 새로워집니다. 작년에 들었던 말씀을 또 들었는데 이번에 말씀은 그 말씀이 또 다른 뜻으로 새롭다. 성경의 말씀은 한절 한절이 날마다 늘 보고 늘 들어도 늘 생각해도 늘 새롭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면 종일해도 못다 합니다. 우리가 들을 귀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에 따라서 말씀을 하시니까.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할 말은 많다 만은 네 몸을 그대로 가진 몸으로서는 부활 받지 못한다. 몸으로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몸으로서는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올라가서 보혜사를 보내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하겠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셨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게서 들은 말씀이 살아날 것이다. 너에게서도 다 예언이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시니까 사명을 주시니까 기억을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 져야 한다. 지난 아침에 들은 말씀이 무엇이든 오늘 아침에 듣는 말씀이 새롭게 다시 들려져야지 똑 같이 또 그 말이다. 하면 실증이 납니다.
시간이 길어지면 짧게 한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길어집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 말 안하려고 합니다. 기억을 새롭게 충분히 남을 충고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지만 주님이 주신 은총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16절 그 사명은 무엇이냐?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맡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사명 우리의 사명도 그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 죄인취급 받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로 바치는 것은 기쁘게 받아질 수 있어야 바치지, 받아주지 않을 텐데 나만 스스로 바쳐봐야 어디에 바칩니까? 바친다는 것이 마귀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마귀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께서 40일 금식을 하시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이 뭐라고 합니까? 높은 산에 올라가서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주겠다.’ 사탄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는 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탐하는 것이고 그것을 빼앗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지 신령한 사람은 그것이 필요 없다. 다 그것이 허무한 것임을 깨달았으니 다 양보하고 다 내버리고 신령한 것만 하나님의 성령과 일치되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지 그런 속된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기복신앙 이라든지 복을 비는 신앙은 사탄에게 한 셈이 된다.
베드로 사도도 ‘죽지 마시오.’ 말 했을 때 사탄아 라고 하신다. 불신의 본능은 타락한 본능은 죽기 싫은 것이다. 십자가에 죽기 싫은 것이다. 고생이 싫다. 편안한 것이 좋다. 그러나 양심이 깨난 영혼은 일이 없는 것이 고생이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일이 있어야 좋고, 몸에 고통이 있어야 좋고 편안함은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 라고 한다. 저는 반대로 편안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라고 하고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생각합니다. 반대로.
성령의 요구는 육체의 요구와 반대되는 것이다. 서로 거스른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감정으로 쓰고 받을 수 없다. 믿음으로만 받아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일이 복음운동입니다. 바울사도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래야 한다. 아까 에스겔 22장 26절 말씀같이 제사장들은 자신도 구별되게 거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을 거룩한 생활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자신들이 속되게 사니까 사람들에게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한군데 더 보면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는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 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3절 내가 염려하는 것은 마치 하와가 뱀에 간사한 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욕에 끌렸다는 말입니다. 꼬임에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미혹되어 생각이 변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순결을 저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복음운동은 무엇인가? 성화사업, 성령 안에 성령과 같이 성화사업을 하는 것, 인생의 목적이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고 구원은 다 해놓았으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시니까 너희들도 거룩 하라.’ 라고 하는 거룩한 사업 성화사업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데 성도라고 불려 지기는 하는데 실제로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디도서 1장 10절 복종하지 않는 자들과 쓸데없는 토론을 일삼는 자들과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유대교회에서 넘어온 신자들 가운데 그런 자들이 특히 많이 있다. 이방사람들의 믿는 사람을 봐도 유대교회 안에 유대교회에서 넘어온 신자들 가운데서 그런 자들이 특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더러운 이익을 얻기 위해서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을 가르치며 가정들을 온통 뒤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우리 그레데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 이고 몹쓸 짐승이고 먹는 것 밖에 모르는 게으름쟁이이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그 예언자라는 사람입니다. 이 증언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여서 그들로 건전한 믿음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유대인의 꾸며낸 이야기이나 진리를 저버린 인간의 명령 따위를 지우지 못하게 하시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자들과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신도 양심도 다 더러워 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생활을 하고 속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밉살스럽고 완고해서 좋은 일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삼위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 성신이 하시는 것인데 성신 없이 율법적인 행위로 아무리 겉으로 꾸며 봐도 허사입니다. 기초를 튼튼한 기초위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다가 짚이나 건초나 나무로 지은 것은 불타버립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이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만 겨우 건져가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기초를 놓을 시간 여유가 있어요.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느냐 나무나 건초나 짚으로 기초를 하느냐 자기 스스로의 기초를 정하느냐 하는 겁니다.
골로새 2장 8절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과 다른 것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은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서 내놓은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과 반대는 세속의 기초이다.
세속원리는 무엇이냐?
창세기 19장 30절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굴을 무엇인가? 이세상은 굴입니다. 출가한다는 말은 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굴(窟)의 한자는 구멍 혈(穴) 밑에 팔자를 죽을 시(尸)위에 점을 찍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구멍에서 나오는(出) 것입니다. 그 구멍에서 나온 나도 죽을 것입니다. 낳고 죽고 낳고 죽고 끝이 없어요. 세상은 굴입니다.
큰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 도리를 쫒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고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행하자하고 끝 절에 보면 31절 큰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로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두 딸이 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누구하고 누구를 통해서 자손을 낳았겠나? 딸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어머니하고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아담이 인류의 시조라면 아담과 이브에게서 낳은 자는 형제에요, 형제끼리 아닙니까?
예수께서 너희가 형제라 이 땅의 임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이 땅의 임자를 지도자라 하지 말라. 아버지도 하나 지도자도 하나다. 다 형제니라. 어머니도 하나님이 아버지, 나도 하나님이 아버지 그러니 형제 다 형제이다.
제가 시인은 아닌데 제 아들이 대여섯 되었을 때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오 형제라고 해라. 라고 했다. 그 말이 틀렸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아버지라고 안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했다. 그렇지요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영적으로는 다 형제입니다. 세상의 원리가 이렇습니다. 인류역사가 이렇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 지구상에 전쟁이 끝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는 것과 세속원리를 기초로 놓는 것은 반대입니다.
이사야 28장 16절이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나니 곧 희한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려니와.
17절 나는 공평으로 추를 삼고 의로 줄을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탐(掃撢)하며 물이 그 숨은 곳에 넘칠 것인즉.
18절 15절이 세속 원리라고 하면 16절 17절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위해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사망과 음부와 맹약하였는데 어찌 그것이 파괴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 도다. 사망으로 너를 세운 언약이 너를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언약이 서지 못하며 넘치는 재앙이 위해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 밟힘을 당할 것임이라.
15절 18절이 세속원리라 한다면 16절 17절 은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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