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동생이 와서 땔감을 준비해 주었다. 오기 전날 맑은 하늘이 어더워 지더니 천동과 소나기가 내리고 두시간 온다던 비가 그날 종일 내렸다. 여름에나 있을법한 이변이였다. 연일 무청을 거두어 들이는 일을 하다가 비설거지에 옷들이 젖고 창고 정리를 했으며 다음날은 맑았다.
거 룩 (純潔)
1983. 3. 19 오북환 장로
네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룩함에 흠이 없게 개역이지요? 거룩함에 흠 다른 데는 흠 천지라도 괜찮아요. 사람 보기에는 가령 나사로 같은 사람이 있다면 뭐 흠 덩어리 아니요? 거지 덩어리지. 거지니까 형편이 없지요. 아무것 세울 것이 없어 인간 사회에서 아무 쓸모가 없단 말이야. 어디다 쓸 거예요? 대문간 지키라고? 개가 있는데 뭐 아무짝에도 쓸데없어요. 그러나 그 거룩함에는 흠이 없어요. 그런데 그러니까 이 말이 요한1서 3장3절 아니겠어요? 2절 3절, 이런 희망을 갖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을 갖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순결하게 사신 것처럼 자기도 순결하게 산다. 순결은 거룩함이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거룩함에 흠이 없게 여기는 간결하게 되었어요. 거룩하게 야고보 5장 8절로 되고요. 또 베드로전서 5장 10절로 되어있고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순결의 삶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하나도 못 잡았다. 왜 못 잡았지요? 왜 못 잡아요? 고기가 없어요? 그때만은 고기가 없었던 거야. 예수님이 나타나서 던지라고 할 때는 모여 들었다는 가요? 성경에는 그 말이 없지요. 함께 있다. 그 말이 없습니다. 곤솔라따, 네가 나를 사랑하고 114페이지와 115페이지입니다. 114페이지 하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많은 영혼을 구하겠다고 갈망한다면 언제나 내 안에 살고 일 할 때나 휴식할 때나 잠시도 나를 떠나지 말도록 하라. 그랬어요.
잠시라도 예수를 떠나지 말라고 잠시라도, 그리하면 많은 결실을 맺으리라. 많이 결실하리라. 그러면 되지요. 결실이면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야.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결실하리라. 그랬고 많이 맺으리라. 그랬거든. 그래 이건 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결실하리라. 그러든지 성 베드로를 봐라.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라. 나와 함께 그물을 던지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 한께 던졌다는 내용에는 무엇이 있겠냐는 거예요. 봅시다. 만일 네가 일순간이라도 나를 떠나지 아니한다면 베드로와 같이 많이 거두리라. 네가 네 자신의 정화에 힘쓸 때마다 네 자신에 있어 그물을 치는 거와 같고 그러니까 함께 던졌다는 내용은 꼭 함께 던졌다는 뜻보다도 구체적인 내용은 정화, 그래 이것이 그물을 치는 것이 된다. 자기 자신의 성화에요. 정화나 성화나 같아요. 그물을 못 댄 거예요. 그물을 아예 치지도 못했지만 그물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치지요? 자기가 성화를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낚아요? 그러니까 지금 안 목사님께서 내가 거룩하게 살자는 그러니까 청년들이 지도를 받고 있지 않냐 그거에요. 그런 것을 시인 안하는 겉으로는 시인 하는가 몰라도 내용으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청년이 지도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같은 계통이라도 그 점이야. 여기와도 통하는 것이 그것이지, 다른 것이 있소? 그러니까 다른 데는 통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 자기가 정화된 만큼 그물이 되는 것입니다. 되고 또 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예수님이 함께 해주지,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또 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화의 하나님께서 너희 몸과 영과 심령까지 거룩하게 하신다고 그랬어요. 평화의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이 제대로 되어야 어부노릇을 하지. 자기 자신이 성화를 받아야 되어 지지. 그래야 예수님이 쓰셔요. 그 후로 쓰신다고 소화 테레사는 함께도 아니에요. 예수님 덕담으로 던졌어요. 너무 어리니까 너는 그물 손잡다가는 딸려가 버리니까 방해만 돼요. 그러니까 너는 손잡지 말고 가만히 굿만 봐라. 내가 다 잡아주마. 그런 거예요. 만일 네가 일순간이라도 나를 떠나지 아니한다면 베드로와 같이 많이 거두리라. 네가 네 자신의 성화 정화에 힘쓸 때마다 네 자신에 있어 그물을 치는 것 같고 그렇게 함으로서 많은 영혼이 그물에 걸릴 것이니 그래야 걸려요. 자기 자신이 성화된 만큼 걸릴 것이니 찢어지려는 그물을 내가 잡아 끌어낼 것이다. 너는 천국에서 네 그물에 걸린 영혼을 만나볼 것이다. 땅에서는 잘 몰라. 천국에 가면 아 당신이 나 잡아줬지요? 아 그랬냐고 나 잘 모르겠다고 그래요. 천국에서 본다고 나사로는 나사로 자신이 그물에 걸린 것을 땅에서는 모르겠지요? 천국에 가면 다 그런 것이라고 그럼 이 114페이지 여기서부터 보는데 곤솔라따 나는 언제나 약속한다. 만일 네가 항상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면 네가 결심한 것과 약속한 것을 네가 지키게 되리라. 언제나 약속을 합니다. 만일 네가 항상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어라.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속 이니까 어디 장소가 아니지요. 마음속이니까 우리 마음이 또 마음속으로 가지 몸은 마음속으로 못가지 몸은 못가요. 니고데모가 어떻게 이렇게 장성한 사람이 어머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갑니까? 아니 몸이 들어가는 것 아니다. 성령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만일 네가 항상 내 마음속에 머물러있으면 네가 결심한 것과 약속한 것을 지키게 되리라. 포도나무에 들어나는 것은 그 가지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내 안에 있어 우리가 일치하여 하나가 되면 너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강력하게 될 것이다. 아주 강하게 될 것이다. 너는 큰 바다에 물 한 방울같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에요. 사라져버려요. 물 한 방울처럼 사라져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 한 방울까지 다 바쳐버려요. 내 침묵은 예수님의 침묵은 네 안에 들어가고 내 겸손과 내 정결과 내 자애, 내 사랑이지요. 자비로운 사랑 자애 관용 인내 다 예수님 것이야. 그리고 괴로움을 받겠다는 갈망도 예수님의 것이야. 갈망과 어떠한 희생을 지불해서라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이 다 예수님의 것이라고 그랬으니까 예수님의 것인데 그것이 다 네 것이 된다고 이래야 된다. 네가 나를 항상 사랑하고 나를 위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겠다고 갈망한다면 그러면 이 갈망이 아까 예수님의 것 받아가지고 해요. 자기 스스로 하는 것 아니에요. 할 수도 없고 못하지요. 잠깐 하다가 또 잊어버려. 예수님의 것으로는 계속 할 수 있지요. 또 데살로니가후서 아까 데살로니가전서 4장 덜 봤지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 거룩함과 존귀함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쫓지 말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쫓지 말라. 그랬어요. 그것이 거룩이야. 색욕을 따라가면 거룩할 수 없어요. 6절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 말씀을 넘어가지 말라는 그 말이지요. 5절 이내의 말씀 뜻을 넘어가지 말라. 형제는 서로 부부간도 형제거든요. 형제라 하는데 이제 아내니 자식이니 이러니까 도수를 넘어가는 거야. 본뜻은 너희는 다 형제다. 그랬거든.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내 어머니냐 말이야. 누가 내 동생이냐?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다. 또 말씀대로 사는 당신을 낳아서 먹인 젖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아니다. 그것보다 더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그 말이야. 또 후서 2장 13절,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들을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신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지, 성령이 거룩하게 하시는 것과 진리를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이지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주로 성령은 거룩하게 성화사업을 해 성령은 거룩하게 하심이니 예수님의 구속사 하나님의 창조사 성령의 성화사 거룩하게 하심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성령은 에베소 4장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 성령은 거룩하게 해서 거룩한 단체로 하나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자꾸 갈라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마의 역사에요. 자꾸 갈라져 쪼개져 너 나 따지는 것 당파가 자꾸 생기는 것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성령은 하나 되는 것 하나가 되니까 당파가 없어요. 다 형제에요. 다 형제로 알고 서로 사랑해 원수가 뭐야? 원수가 없어. 서로 사랑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야. 성화 사업이니까 서로 거룩하게 하자는데 협력을 해. 음탕하게 사는 것은 성령의 사업 아닙니다. 성령, 그런데는 자꾸 거슬려 버리지요. 그렇지만 거룩하게 사는데 협력하자는 게 성령이야.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그러니까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한 하나님 한 성령을 믿는다면서 자꾸 너니 내니 자꾸 따지고 판단하고 그래서 되겠느냐?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서로 비판하는 것은 악마의 짓이다. 서로 하나 되고 감싸주고 도와주고 자꾸 합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이다. 따지고 갈라지는 것은 성령은 아니다. 무조건 다 용납하고 다 포섭할 수 있고 그래야 되요. 저기 그 반대를 하나 더 봐야 되요.
요한 2서 9절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니라. 12절 까지 이 말씀이 인제 하나 되는 것과 반대가 안 되겠소? 그 말이 여기 10절이 공동번역으로 대조가 되요. 9절서부터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사람 그것이 조금 틀린다고요. 개역하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 나간단 말이야. 그래 순서가 조금 틀렸지 않아요? 여기에 보면 그러니까 뜻은 이해에 따라서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그 말씀이에요. 그러면 여기 개역에 지나친다는 말하고 공동번역에 지나친다는 말하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친다. 그 말은 교훈을 지나쳐 버린단 말이고 예수님의 교훈을 그냥 넘어가 버린다는 말 아니요. 그대로 안하고 넘어가 버린다고 그전 개역에는 요새말로 하면 구역이지요. 구역 구역은 말입니다. 지나쳐 그 말은 세속을 지나쳐서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그 말입니다. 똑같아요. 통해 어떻게 표면으로는 반대되는 것 같은데 내용으로는 같다고요. 이제 세속을 지나쳐서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들어가느냐 아니냐 그 말이에요. 세속을 지나쳐 공동번역에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쳐버리면 안 된다. 말이야.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훈을 지나치는 것이 무엇이냐? 6절에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지나쳐버려 사랑을, 그리고 그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 안하고 계명을 어겨버리고 말이야. 계명은 사랑인데 사랑은 없이 미움으로 지나쳐버려요. 아 그렇게 거룩하게 살면 백성이 어떻게 퍼지냐 말이야. 씨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염려를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들이 걱정해. 자기들이나 어서 성화를 받을 일이고 성화할 일이지 거기나 힘쓸 일이지 성화에 힘쓸 일이지, 이 음탕한 세상 그대로 좋다는 거야? 자꾸만 계속하잖아,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쳐버리면 안 된다. 계명으로 지키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건데 말이야. 그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속이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적 원수입니다.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수고해서 얻은 것을 잃지 말고 상을 남김없이 받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쳐 버려 지키지 않고 지키지 않고 지나쳐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야. 계명을 지키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인데 희생하는 것이 계명인데 친구로 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그랬는데 예수 믿고 사랑을 우리에게 보였다. 당신 목숨을 버리신 것으로서 사랑을 나타냈다. 그랬는데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교리나 따지고 그래가지고 상대를 안 해버려, 사랑을 안 해. 그런 사람은 찾아가서 교훈과 다른 것을 전하거든. 그들을 집안으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내용에 있어서는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 율법이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같이 대하라고 그러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자기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법이 없는 것 아니라고 있기는 있어도 그 영혼을 얻으려니까 원수시하는 것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의 정도를 따라서 같이 맞춰주는 겁니다. 그러나 내용까지 따라가지 말라는 거예요. 인사하지 말라는 것은 외모의 문제이지. 전혀 교제도 하지 말라. 그 말이 아니에요. 표면으로만 보니까 그러니까 십자가 길에 나선 사람들이 인사 말라. 세상일을 따지지 말라. 인사하면 세상일 아니요? 사람일 아니요? 사람일 영적 일을 의논할 일이지, 그러기 때문에 이 장로님도 퇴짜 맞았어요. 안 목사님께 좀 문의할 일이 있는데 하필 주일날에 갔었어요. 그때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오늘 주일날 이니까 그만 다음에 이 장로님은 타락해 놔서 주일날 그런 것 교회서야 주일날 모두 의논하지 않습니까? 제직회의가 있고 그걸 엄격히 지키니까 주일날 그런 것 사사로이 암만 장로라도 소용없다.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야 좋습니다. 그러나 뜻은 알고 지켜야지요.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고치고 또 전신을 건전하게 하셨는데 그러니까 비난을 받았지만 그 비난 안 받기 위해서 체면 닦기 위해서 하신 분 아니거든요. 의식을 깨트려버리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라. 의식이 목적이냐?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안식일을 위해서 왔냐?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생겼냐? 목적이 무엇이냐? 그래 우리는 법에 끌린단 말이야. 내가 법에 종인가? 법을 쓰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모두 내는 것이지 거룩함을 위해서 냈어요. 모든 것을 사랑하라. 법은 하나뿐이야. 사랑하라. 그 속에 다 들어가 버렸어. 다른 법 아무리 다 지켰어도 사랑 없으면 다 소용 없는 것이야. 안 지킨 것이야. 실상은 계명 안 지킨 것이야. 계명은 하나님은 사랑이지, 무조건 사랑이에요. 사랑은 법은 소용없어요. 어디에다 쓰냐? 이익 따라서 쓰는 거예요. 그걸 어기면 손해 볼 테니까 이해타산 잘 못쓰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하는 데만 써야 되요. 무슨 일이든지, 저 사람에게서 내가 무엇을 가져오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영혼에서 사랑 빼앗아 버려야지.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지요. 자발적으로 내놓도록 해야 되지요. 그것이 사랑이야. 주는 것만 사랑인줄 알아요. 들어주는 것이 더 사랑이야. 그것 때문에 죄를 지으니까 죄를 안 짓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 아니요? 자꾸 주면 죄를 더 짓거든.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랑인줄 알아요. 더 줄수록 죄는 더 짓거든. 그러니까 이제 아주 꼭 필요한 사람에게 줄때는 사랑을 느끼도록 주는 것이지 느끼기 위해서 주는 것이지 주든지 받든지 간에 사랑으로 해라. 사랑으로 받는 것이 사랑이면 받고 주는 것이 사랑이면 주고 그때그때 성령의 지시에 의해서 해라. 그 말이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데 조금 더 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봅니다. 106페이지에 있습니다. 애정적 생활에 진보하기 원하는 영혼은 애정 사랑이지요. 사랑 사랑에 진보하기 위한 영혼은 철저하게 꼭 한 가지를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꼭 한 가지 무엇이냐? 그것은 불쌍한 피조물은 우리 안에 우리한테서 예수님의 사랑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만은 알아둬라. 진짜 사랑하고 싶은 영혼이 있다면 이 한 가지 꼭 알아둬라.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 한 가지밖에 원하는 것이 없다. 불쌍한 피조물인 우리한테서 예수님이 사랑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창조하셨고 따라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소유물이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제일 큰 것 무엇이요? 형체 보이는 것 중에 제일 큰 것이 무엇이요? 우리에게 제일 큰 것 보이는 것 중에 큰 것이 무엇이냐? 제일 큰 것 즉 무엇이냐? 우리의 목숨이에요. 몸이에요. 몸 보이는 것은 제일 큰 것이 몸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어려운 문제가 부닥치면 아이고 죽겠다. 큰일 났다. 이 죽을까봐 큰일이지 다른 거 뭐있겠소? 죽는 것이 큰일이지. 제일 겁나는 일이에요. 무서운 게 그러니까 다 하나님이 당신이 지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생명이 목숨이 제일 큰 것인데 우리 생명을 바친다. 하더라도 제일 큰 것 즉 우리 생명을 바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가 바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자유롭게 하실 수 있어요. 당신이 지었으니까 빼앗아갈 수 있어 그러나 자유롭게 우리 생명을 앗아가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그렇지 않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시지 강제로 사랑을 받으려고 안 해 그런 사랑을 어디다 쓰려고 그것은 사랑은 아니야. 죽인다고 하니까 너 그럼 나사랑 안하면 죽인다. 살라니까 거짓 사랑을 해. 진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 가짜 사랑을 원하시겠습니까? 가짜인지 진짜인지 예수님이 모르시겠어요? 아시지요? 예수님은 자유롭게 우리 생명을 앗아가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 면에는 그렇지 않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인간의 자유에 달려있는 것이어서 인간이 주를 사랑하던지 거절하던지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유를 주었어요. 그러니까 인격이지요. 사람이지요. 존귀한 사람이라고 만물의 영장이지요. 자유가 없는 것 같으면 기계요. 짐승이나 짐승이지 사람이 할 수 있어요. 짐승은 오라. 때리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훈련시키면 그것뿐이지 뭐 자유의사는 없거든. 아 우리 주인이 지금 어쩌겠다. 그런 생각은 없단 말이야. 영리한 개는 아 주인이 지금 어디 가신다. 밤에 그런 영리한 것도 있기는 있지요. 사랑하던지 거절하던지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랑을 바라시고, 바라시고 사랑을 요구하신다. 자유롭게 하시기를 바라시나 할 수없이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러나 자유롭게 그렇게 사랑하시기를 바라시고 사랑하시기를 바라시고 요구하신다. 그 사랑이 인간창조의 목적이었으니까 인간을 뭐하려고 내셨어요? 서로 싸우라고? 전쟁만 하라고? 사랑하라고 냈어요.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서로 사랑하라. 사도요한은 사랑 아니요?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 한마디로 하면 그것입니다. 계명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에요. 참 사람이에요. 사랑 없는 것이 죄인이고 그것뿐이야. 사랑안하면 죄인이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고 참 사람이야, 예수야. 예수 그 사랑이 인간창조의 목적이었으니까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 1계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규정하시고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사랑을 전부 원하시고 있다. 사랑뿐이야.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영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전력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 사랑을 받으시려면 위해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 오사 사람이 되셨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사랑의 법을 가르쳤어요. 우리들에게 이렇게 서로 희생하는 것을 보였단 말이야. 모범을 보였다. 당신이 죄인이 되셔가지고 죄인의 몸으로 보내셨다. 그것 어디 있지요? 죄인의 몸으로 보냈다. 로마서 8장 3절은 죄인의 모습을 갖으셨다. 그랬는데 그것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죄 있는 분으로 정해버렸어요. 아주 죄인으로 어디 있지요? 써놨어요. 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에요. 공동번역이에요. 나중에 보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죄선언 죄 없다. 죄 있는 분으로 보냈습니다. 바로 죄 있어 모습만이 아니야. 죄인의 모양만 갖은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웠어요. 전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지웠어요. 그래 죄 있는 분으로 오셨어요. 그래 인제 몸을 가져야 사랑을 보일수있지요. 몸이 없으면 어떻게 사랑하느냐? 우리 사랑하고 싶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을 받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대답해 보세요. 어째요?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못 하겠지요? 그러니까 한국은 모두 사랑 받을 사람이 많거든요. 가난하니까 그래 하나님의 복음이 많이 전파되지요. 세계적으로 가난하면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대로입니다. 물질적인 가난만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말한 것이지만 물질적으로도 그렇다. 가난하니까 무엇을 바라지요? 그래 인제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서 몸을 입으셨어요. 하늘에서 내려 오사 사람이 되셨다. 그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 오사 사람이 되셨고 그뿐 아니라 거지같이 피조물의 발아래서 내게 마실 것을 좀 주지 않겠는가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랬지요? 끝에 가서는 십자가상에 희생물이 되어 피 눈물 나는 목소리를 짜내서 나는 목마르다 하셨다. 목마르다. 사랑을 갈망하여 외치는 소리는 성서를 통하여 20세기 동안 온 세계에 계속 울려왔는데 모든 성인 성녀들을 통해서 성녀 발현하신 성신의 계시 때에 이르러 더욱 강력히 호소하셨고 근래에는 소화 테레사와 곤솔라따 에게 현시를 통해서 더욱더욱 열을 띄게 되었다. 나는 천당을 떠나서 천국이지요. 떠나서 성모의 태중에 잉태되기 위하여 성모의 태중에 잉태되는 것은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성모의 태를 통했다. 그 말입니다. 성모의 태중이 목적은 아니야. 말씀으로 나타날 때는 반드시 성모의 태를 통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몸을 입고 나타날 때는 성모의 태를 통했다. 마리아의 배를 통했어요. 그것이 말씀이에요. 나는 천당을 떠나서 성모의 태중에 잉태하기 위하여, 위하여 그러면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데 태를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이고 말씀이 되었다. 반드시 마리아의 배를 통해서 성령으로 성령이 배를 감싸주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태중에 말씀으로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버렸으니 그 말이야. 버렸으니 즉 모든 희망 예수님이 뭐 다른 희망이 있겠소? 세속적인 희망은 없겠지만 우리의 모범이니까 모든 희망과 권력, 권리 예수님이 권리가 얼마나 있어요? 예수님의 권리가 몸으로 권리가 얼마나 있냐 말이야. 한 푼어치도 없지요. 그런데 어느 때 권리가 있었냐하면 간음한 여인이 잡혀서 율법학자들에게 잡혀가지고 그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때 권리가 있었지요? 어떻게 했냐? 아 너희들 죄 없으면 치라고, 치라고 했는데 못 치는 권리야. 양심의 가책을 깨달을 수 있는 그 권리 치라고 했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고 들었던 돌을 가만가만 놓고 가버렸어요. 인사도 없이, 그 권리에요. 그런 권리이지 세상에 세속적인 권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이요. 그래 인제 자행 자제할 수 있는 그런 권리는 하나님께 받았지요. 받아있는 만큼 있어요. 그러니까 채워야 권리 안 했어요. 버린 만큼 우리는 그 자살할 권리는 있어도 다시 살아날 권리는 없지요. 자살은 할 수 있지만 다시 살수 없어.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세상 적으로는 무슨 권리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에 약함으로 십자가 지시지 않습니까? 권리도 완전히 십자가상에서 포기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떤 권리 능력이 나타나느냐 하면 모든 영혼이 지구상에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생명의 길로 나올 수 있는 길이 열어져버렸어요. 그래 육체상으로 있을 때 마지막 기적은 그것입니다. 십자가 지실 때 나는 다 이루었다. 목마르다. 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심은 모든 영혼이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길이 열렸다. 당신하나 목숨 바침으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함으로 완전히 얻었습니다. 어제 봤지요? 다 버리면 다 얻는다. 모든 것 버리면 모든 것 얻는다. 그 원리란 말이야. 십자가상에서 영혼까지 하나님께 다 바쳐버리니까 모든 영혼을 다 얻었지요. 다 버리니까 다 얻었어요. 당신 하나 버려버리니까 모든 영혼을 얻었습니다. 그런 기적 마지막 땅에서 몸으로는 그 이상 더 큰 기적은 없어요. 영혼은 다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다 이제 구원 되요. 지금 결과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어요. 지금 제일 죄 많은 사람이 앞에 가서 서고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꼴찌가 되어요. 죄 먼저 발견할수록 앞서버려 그러니까 지금 행동보고 현재 행동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죄가 드러나게 해가지고 회개시키려는 섭리인데 그걸로 판단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해요. 한 영혼 한 영혼 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거예요. 교회를 다닌다. 안 다닌다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가 판단 못해요. 거기다가 또 어떤 시험에 걸리면 타락하고 사람은 그런 것이니까 그래가지고 더 완전해질 수 있고 하나님은 능력에 있다. 지금 행동만 보고 판단 못해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자신만 판단해요. 나 외에 다른 사람 함부로 판단하면 안 돼. 성령의 지시에 의하면 할 수 없지요. 성령이 그렇게 지시하신다면 그것 판단해라. 그런 지시가 있으면 순종하는 것이지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때 쓰임만 받다가 도로 버려버릴 수 있어요? 우리 빗자루 다 쓰고 달아 지면 내버리지요? 그러지 않아요? 그러듯이 악마도 하나님이 쓰시는데 뭐 성도를 안 쓰시겠어요? 그러면 인제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버렸으니 즉 모든 희망 권리와 기쁨 육적기쁨 기쁨과 경향성 우리 사람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가졌지요? 경향성을 시사하고 언제나 스스로 양보하고 자기변명을 하지 않았고 항상 상대편의 희망을 인정하여 이것이 참 좋은 점입니다.
상대편의 희망을 인정하여 하나님이 지금 그 사람을 오늘 나타난 모든 결점을 내일은 장점으로 된다. 오늘의 죄가 내일은 선으로 바꿔진다. 그런 희망을 인정하여 자기 소망을 버렸고 자기 소망을 버렸고 육적인 것 항변하지 않아요. 누구 뭐 따지거나 변론도 안 해. 항변하지도 않았으니 한마디로 말해서 항상 사랑만 하는 것이었다. 무조건 용서하고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대환영을 하고 항상 사랑만 하는 것이었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 후에 곤솔라따는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깨달은 대로 실행했더니 모든 사태가 변해서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감화가 받아지는 대로 그대로 실행해야 돼. 실행을 해야 평화가 오지, 알기만 하고 실행 안 하면 화만 돼. 불안이 생겨. 알았는데 못하거든. 양심의 가책만 받고 불안만 하다. 그러니까 깨달아 진대로 실행을 해야지. 13절 14절이 제일 요점인데 다 말하지 못하겠고 대략 해 두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도성육신 했다. 성육신했다. 말씀이 도는 말씀이야. 구역은 도라고 그래 말씀을 길이라 그 말이야. 생명이라는 말이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러니까 도라는 말씀은 사람의 몸을 입었다. 도성인신 우리가운데 임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독생자라는 말은 꼭 아들이 하나뿐이라. 그 말이 아니에요. 창조주요. 또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님 한분뿐이다. 그 말이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예수 한분뿐이다. 그 말이에요. 독생자라는 말은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을 대체로 말하면 이 독생자에 대한 증거 확실히 이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어가지고 우리 죄를 대속하는 구주시다. 그런 증거를 일곱 부분에서 합니다. 일곱 완전수지요. 사람 중에서 일곱 사람 하나님 편에서 성령 일곱 부분에서 증거를 했으니까 확실한 증거라고 확실하다. 그런 증거라고 내린 것이지요. 그러면 인제 사람은 누구냐? 첫째 세례 요한이지요. 6절에 말씀같이 하나님께 로서 보내신 사람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세례요한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해서 대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증인은 증인이 의심이 나게 했다가는 안 된단 말이야. 그럴 사람을 뭐 하러 보내느냐? 그런 의심을 해버리면 누가 믿겠느냐? 그 증거를 누가 받아들이겠느냐?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의심이 나서 제자들을 보낸 것이 아니고 이제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듣고 증거 할 사람들이니까 너희들이 보고 앞으로 너희들이 그 이를 증거 할 것이고 나는 내 사명은 다했다. 나는 쇠해야하고 그는 흥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내 율법과정을 다했으니까 율법의 마지막으로 나는 마쳤다. 율법을 계속할 수는 없어요. 그리스도가 나타났으니까 율법은 끝났으니까 이제 사랑만 할 것이지 무슨 법에 매일 것이 없다. 법에 초월해야한다. 그런 뜻에서 첫째 사람 중에서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 다른 사람도 하나님이 보낸 것이지만 먼저 하나님이 보낸 사람 증인으로 보낸 사람은 요한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때 시원치 않은 사람 보내겠어요? 그렇게 의심나는 사람을 보내겠느냐? 말입니다. 또 의심나도록 하시겠어요? 안 하시겠지요. 하나님이 증인으로 보낸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러니 6절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절에 보면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려는 겁니다. 자기를 통해서 믿게 하려는 겁니다. 자기로 인해서 믿게 한다. 그래서 보냈어요. 요한의 증거 요한이 독생자에 대해서 증거 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너희는 이제 그를 따라가라. 35절 또 이튼 날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걷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증거 하니까 두 제자가 따라가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의심했으면 따라가라고 했겠어요? 가서 물어보라고 또 그러지 따라가라. 그러니까 또 믿어지니까 순종하지, 안 믿어지면 아까 누군지 모르니까 당신이 누굽니까? 그렇게 의심했다면 제자들이 순종하겠습니까? 안 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누군가 사람 중에 누군가 여기 있어요. 아니 거기까지 안가요. 거기 마지막이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쫓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 그러면 이제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안드레 하나는 안 드러났거든요. 안드레는 드러나고 하나는 안 드러났어요. 하나는 누구냐 하면 기자입니다. 세 사람이지요. 세 사람 그가 먼저 자기형제 시몬을 찾아 갔어. 베드로입니다. 네 사람 시몬을 찾아가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벌써 믿어버리지 않아요? 메시야 만났다. 라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야. 그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반석이라 그 말이야. 여기는 반석이라는 말 없어도 게바라.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나와요. 반석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면 여기까지 몇 사람이야? 네 사람이지요? 네 사람, 이튼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쫓으라. 하시니 여기 빌립이 위대해요. 어찌 초면인데 나를 쫓으라 하니 그냥 무심하니 따라간다고요. 왜 그럴 수 있냐? 물어보지도 않고 당신 누구관대 따라오라고 그래요? 자기 따라가면 무슨 좋은 일 있어서 그래요? 그러면 나 따라오면 이러고, 저러고 그런다. 설명도하고 그럴 텐데 그냥 물을 것도 없어요. 왜 그럴까요? 그전에 봤다는 말 없는데 (‘여기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베드로를 처음 만난 게 아니고 누가복음 5장에서 물고기 잡을 때 그때도 봤고 나중에’ ) 글쎄 그건 있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보면 그것이 안 되어 있을 거예요.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이거든요.
제목이 붙은 것은 35절 이하가 첫 번째 제자들이니까 그전에 얼굴은 봤는지 모르지만 첫 번째 부른 제자들이에요. (‘사도요한하고 예수님하고 이종 사촌 간 아닌가요?’ ) 몰라. 나 그 촌수는 몰라. 모르겠어요. (‘봤다고 봐야지요. 어려서부터’) 봤다고 해서 따라오라고 한다고 따라갈 것 아니고 만나 이르시되 나를 쫓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얼굴을 봤는지 안 봤는지 그건 그만두고 모세 율법은 잘 아는 사람이야. 모세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알아본다고, 이것이 위대한 점이에요. 그래 벌써 믿음이 있어요. 믿음, 모세의 율법 책에 와 선지자의 기록에 예수를 예언해 놓은 것 있거든요. 그걸 언제 오려는가? 믿음이 있었어요. 바랐어요. 그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그랬거든. 바라고 바라니 실상이 나타나버렸어요. 실상은 예수거든. 실체 바라고, 바라고 그러니 그랬으니까 단번에 초면에 봤더라도 알아봐요. 모세의 율법을 믿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심령이 성령이 역사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알아보도록 성령이 해주신 것이에요. 메시야로 보도록 처음 봤어도 메시야로 알아보도록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부르신 것이지요. 따르라 할 때는 따를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믿고 따를 수 있기에 말하지, 의심하고 안 따라 올 사람에게 따르라. 그러시겠어요? 어떻게 시험적으로 해본적은 있지만 누가복음 9장에는 그런데 바로 따랐으니까 가서 친구 한고향사람 친구한테 소개를 하지요. 그 여기까지 지금 다섯 사람입니다. 다섯 사람이지요? 빌립까지 다섯 사람 나단이 여섯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다나엘은 또 친구는 친구인데 말입니다.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보라. 하니 처음에는 의심했지요? 나사렛에서 무슨 그런 신성한 것이 나겠느냐? 그런 선지자는 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은 무엇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껍데기를 보는 거지요. 그런데서 무슨 그런 촌구석에서 제자들도 또 안 믿었다. 그런데 있지 않습니까? 7장에 보면 친 동생들은 안 믿었더라. 이름 드러내려면 버젓이 예루살렘 같은 사람 많이 모이는데 가서 드러내야지. 이런데 숨어서 살아서 무엇 하느냐? 드러내고자하는 그런 마음은 세상이다. 세상, 그래 나다나엘도 좀 세속적인 것이 있지 않소? 그런데서 무슨 선지자가 나겠느냐? 빌립만치는 못 믿은 거지요. 빌립이 가로되 그러면 그렇게 의심이 나면 네가 가서 직접 보라. 내 말이 안 믿어지면 네가 와서 보라. 이것도 아까 38절 39절 어디 묵고 계신 데가 어디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니 와보라. 그랬지? 신앙은 들은 대로 깨달은 대로 실천을 해봐야지 기억만 하는 것이 절대 아니란 말이야. 기억도 해야지만 기억도 안 해 버리면 못쓰지만 기억하는 것은 기억 한만큼 실천하라. 실천 안하니까 잊어버리지 않냐? 실천하고 맛을 봐야 돼. 그래 의심이 되는데 밥은 먹으면 배 부른다더라. 그러고 안 먹으면 배불러요? 먹어야 소화가 되어가지고 힘을 얻지요. 그러니 와보라 그러니까 이것도 친구 사이가 아니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와보라 한다고 가보겠어요. 친구니까 믿을 것 아니? 믿어 믿음으로 이릅니다. 서로 믿어진 만큼 교제가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이번에 온다는 세 청년도 믿어진 부분만큼 가까워지고 안 믿어지면 할 수 없어요. 그것뿐이야. 왜 그러냐할 필요도 없는 거야. 자연스러운 것이야. 그러니까 또 조금 덜한 만큼 거리가 있는 것이에요. 서로 여기도 그래요. 같이 살아도 그래요. 똑 같아요. 한 이불 덮고 같이 자도 그래 마음으로 가까워진 것하고 몸만 가까워진다고 가까워 진 것 아니거든. 몸은 떨어져있어도 마음이 어떠냐하는 것이 문제 아니요? 몸이 문제가 아니에요. 마음이 문제지. 그러니까 한 고향사람이고 친구인 만큼 그 친구는 믿어야지요. 와보라. 그러면 가본다. 순종한 거예요. 예수께 빌립이 가로되 와보라. 하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이제 순종했어요. 믿고 따라갔어요. 봤어요.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 거짓 간사한 것이 없도다. 솔직하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게 하려니까 예수님의 수단이지요. 그러니까 믿어져버려 너는 간사한 것이 없다. 그 말이 딱 걸린 거거든요. 아 저분 나를 어떻게 속을 아실까? 초면인데 초면 초면이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만은 초면 아니겠어요?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보기 전에 너를 봐서 만나가지고 나한테 가라고 하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섯 사람입니다. 여섯 사람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것이 무엇이냐? 무화과나무 이것이 무엇이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봤다. 이것이 무엇이냐? 창세기 3장 봐요. 7절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벗은 줄 알고 예수를 옷 입어야 하는데 예수를 벗어버렸어요. 말씀을 떠났어요.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것이 벗은 증거에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하나님 낯을 피해서 이것이 벗은 증거야. 낯을 피했어. 하나님을 피해가는 것이야. 이것이 첫째 죽음이야. 하나님을 떠난 것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 아래 숨은지라. 무화과나무 이 때봤다. 양심이 가책 받을 때 하나님 그리스도가 보신 것이에요. 벗은 줄 알았어. 말라는 것을 알았어. 부끄러워 그래 엉겁 질에 가린 것이야. 무화과나무 치마를 가렸으나 그것이 며칠이나 가겠소? 며칠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 율법으로 자기 허물을 가리려고 그래. 요한복음 3장 이 성경만 그것이 되어있습니다. 19절 죄로 판단함은 대저 빛이 세상에 임하였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함이니 저들의 행실이 악한 연고니라. 대저 무릇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향하여 빛을 향하여 오지 않음은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향하여 오지를 않아. 않음은 그 행사로 하여금 그 행사가 바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이에요. 그 율법이에요. 그 행사로 하여금 책망을 면코자 함이로되 이 말이야. 책망을 면코자 자기가 잘해가지고 자기 공로를 쌓아서 그래서 지옥을 면하겠다는 거 또 조금 더 잘하면 천국 간다는 것 더 잘하면 상 받겠다는 것 행위 인간의 행위, 자기 힘으로 한다. 그것이 율법이야. 그러니까 책망을 면코자 함이로되 이것은 다른 성경은 다르지 않습니까? 치마 가린 것 그것가지고 죄가 덮어지냐 말이야. 아 옷을 입으면 죄가 덮어져요? 마음속에 있는 건데 진리를 준행하는 자는 빛을 향하여 와서 그 행실을 드러내고자 하나니 왜 드러내고자 하느냐? 대저 하나님을 인해서 행한 연고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서 드러내요. 자기 공로가 아니야. 그러니까 드러낸다 하나님의 은총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때는 그리스도가 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8장에도 간음한 여인 잡아와가지고 예수님 앞에 시험할 때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했지만 양심에 가책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물러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벌써 죄 없는 자가 치라. 그러신 말씀 중에 양심에 가책을 드러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이니까 자기 마음 양심을 더듬어 보니까 감히 칠 용기가 없어 부끄러워 물러가 그것이 권위야.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보신거란 말이야. 꼭 저기 무화과나무 앞에 가서 예수님 만난다고 항상 거기 가있어야지. 거기서 자고 그래야지. 저기 무화과나무 있지 않아요? 그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저주하신 것도 왜 저주 했냐? 때도 아닌데 철도 아닌데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갈라디아 3장 13절이거든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소? 전 인류의 저주를 당신이 받지 않았냐? 율법이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두 가지 뜻이 있어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저주하신 것은 율법을 행한 것으로는 절대 평화가 없다. 영원히 없다. 영원히 맺지 않으리라. 그 말은 영원토록 아무리 잘해도 평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지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은 대충으로 보면 성령의 증거 30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하는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이스라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 그런대요. 이스라엘 요한이 또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서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 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 하였노라. 7수 아니에요? 7 수, 인간 인류 대표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세례 요한 그 외에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 여섯 사람, 사람 중에는 여섯 사람, 또 한편으로서 성령 일곱 독생자 한분을 두고 증거 했어요. 그것이 요한복음 1장이에요. 전 성경도 내용이 그거에요.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겠다. 16절 말씀같이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라. 은혜위에 은혜야, 은혜를 깨달아지는데 은혜가 더 받아지고 은총의 뜻을 모르는데서 아무리 백년 예수를 믿어도 소용이 없어요. 믿는다 해도 그것은 껍데기뿐이지 소용없습니다. 은총의 말씀에 참뜻을 깨닫는데서 부터 열매는 온 세계에 퍼져가요. 골로새 6장 5절에 있지 않아요? 은총의 말씀 로마서 1장 17절만 보고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니 요한복음 1장 믿음으로 믿음 서로 믿어짐으로 또 순종하고 또 순종한 만큼 믿어졌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은혜로 은혜위에 은혜로 찬송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게 되었는데 또 그렇게 하늘에 축복을 맛보고도 또 떨어져 나간다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되요. 그래도 못 알아들어요. 하늘에 은사 성령의 역사를 은사를 맛보고도 다시 타락해 가지고 세속으로 미끄러지면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믿었다가 다시 안 믿고 세상길로 가는 걸 말하나요?’) 그렇지요. 믿었다는 것이 무엇이냐? 믿었다. 그건 갈라디아 2장 19절을 외우라니까요. 마음에 늘 기억이 되어야 되요. (‘외웠어요. 외우기는 외웠어도 제가 기억이’) 외웠다. 그러면 율법에서는 죽었다. 그 말 아니요? 안 죽었으니까 세상으로 돌아가지요. (‘내 말은요, 못 깨달은 것은 제가 안 죽고 다시 세상으로 간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믿었으면 죽었어야. 믿음인데 믿었다 해도 아직 안 죽은 것이야. 그러니까 도로 세상으로 가지요. 18절, 하나 읽어요. 6장에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없는 분이심으로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우리는 큰 용기를 얻어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뭐라고 했어요? 조금 개역에는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위하여 피하여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함이라. 앞으로 다가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현재 있는데서 피해야 해요. 피해, 피하여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한다. 히브리 6장 18절입니다. 두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약속과 맹세입니다. 17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약속과 맹세가 있다니까 이 두 가지 변치 않는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꼭 맹세와 약속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현재 피할 것이 있다는 거야. 무엇에 피해 겸손과 이탈 두 가지 덕이 최고의 덕이야. 겸손 이탈 겸손은 자기를 벗어나야 돼. 모든 것에서 이탈해야 돼. 자기에서부터 자기 감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해. 이탈 거짓 자기를 떠나야한단 말이야. 그것이 이탈이야. 그런데 그전 구역은 이렇습니다. 구역은 이 두 가지는 변치 못할 일이야. 맹세와 약속, 변치 못할 일이니 하나님이 이 일에 능히 거짓말을 하실 수 없어. 약속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어길 수 없어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느니라. 화를 피하고 화 무엇이 화에요? 어떤 것이 화에요? 고린도전서 7장에서 봐요. 무엇이 화인가? 소망은 앞에 두고 소망을 위해서 화를 피한다는 거야. 능히 거짓말을 할 수 없는지라. 화를 피하고 앞에 있는 소망을 누리려 하는 우리로 하여금 큰 안위를 받게 하심이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용기 있게 나가라. 희망이 있다는 것 약속과 하나님이 맹세한 것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맹세했기 때문에 틀림없다. 약속하시고 화를 피하라. 피하여 피하고 앞에 있는 소망 우리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이 어디까지 하면 또 하나님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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