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 전전 날 꿀벌 공준 잔치가 있었던 같다. 비가 계속 내리는 장마철에 잘 치러진지 궁금하다. 중복 전 날 철쭉 위로 올라탄 댕댕이 넝쿨을 잡아주고 생강 밭 손질을 조금 해 주었다. 방향 꽃이 피기 시작한다. 금년에는 거두어 이용해 보려 한다. 장마가 그치면 수확해 보려한다.
껍질과 속알
예수만이 말씀으로 된게 아니다. 개똥도 말씀으로 됐어요. 예수교인의 생리란 이상한 거라 생각됩니다. 예수만 말씀으로 되었고 우리는 딴 데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겸양입니까? 그리스도는 전체의 것이지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고 그를 쳐다 보는 것은 빛깔 얼굴 몸 껍질을 보고 따라 가는게 아니라 예수의 속 알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속알만 말고 먼저 제 속에 있는 속 알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의 몸도 껍질이지 별 수 없습니다.
사람 사귀는 데도 버릇으로 친해서는 못씁니다. 사람 숭배해서는 못씁니다. 그 앞에 절을 할 것은 참과 한아님뿐입니다. 종교는 사람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아님이 한아님 안 되니까 사람더러 한아님 되어 달라는 게 사람 숭배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를 한아님 자리에 올려놓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카토릭이 마리아 숭배하는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의 혈육은 다른 사람과 똑 같은 혈육입니다. 마음은 목마르지 않으나 몸은 목마릅니다. 목마르고 아프지만 이 육체에 어떤 의미를 위하여 육체가 있다면 나타낼 상징은 빠뜨리지 말고 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게 없습니다. 예수라고 해서 저절로 되었습니까? 밤잠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온 정력을 다 쏟아야 작품 하나라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꽃피는 기독교에서 십자가의 꽃다운 피를 흘리는 것으로 들어납니다. 의의 피를 흘리는 것이 한아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의 표입니다. 성숙이란 한아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아님의 아들이란 죽음을 넘어선 이이입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과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요, 진리를 깨닫는 것은 지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입니다.
나와 한아님이 하나 요 성령과 내가 하나입니다. 내 생명과 한아님의 생명이 하나입니다. 나와 한아님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유한(有限) 무한(無限)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석가, 노자 등은 정신적으로 영생합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파서 그들의 말을 듣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하고 상관없습니다.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와 상관없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빛으로 왔다. 빛을 얻으라(요한 8:12) 참 적극적입니다. 속죄가 아닙니다. 빛입니다. 속죄는 너무 소극적입니다. 밥없이 사는 것이 정신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본능입니다. 죽어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p133-p134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장마 중 : 생각은 ‘나’를 낳는 존재 행위다 (0) | 2020.07.29 |
---|---|
중복 다음 날도 비가내리다 : 말씀 사름 (0) | 2020.07.27 |
대서 날 연산의 꽃 (0) | 2020.07.22 |
초복과 대서 사이 (0) | 2020.07.20 |
경자년 제헌절 날 : 동광원의 뿌리 (0) | 2020.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