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순을 덕장으로 유인 작업을 한다. 이틀 동안 미세먼지로 사랑초 꽃이 화방을 제대로 열지 못한다. 오래 전에 밭에서 주운 돌도끼 두점 파편을 사진에 담았다. 무늬 둥글네 옥잠화 맥문동도 담았다.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시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 교회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다. 교회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할 뿐 예수의 삶과 정신을 살지 못한다. 다석은 오늘 여기서 예수의 삶과 정신을 이어 사는 일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살고자 했던 다석에게는 날마다 먹고 마시는 밥과 물이 예수의 살과 피였다. 다석에게는 날마다 먹는 밥이 날마다 드리는 제사이고 날마다 먹는 성찬이다. 다석은 이런 사상을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으로 표현 했다. 상의(嘗義)는 <중용>에 나오는 ‘체상지의(禘嘗之義)’의 준 말인데 체(禘)는 천자가 5년에 한 번 하늘에 드리는 큰 제사이고 상(嘗)은 해마다 가을에 지내는 추수감사제이다. <중용>은 체상의 뜻을 제대로 알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다.” 하였다.
다석에 따르면 ‘하늘을 찾는 천자’가 중심이 되어야 이 땅은 온전한 백성이 사는 곳이 되고 사회가 바로 잡힌다. 민주시대에는 모두가 천자,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어 하늘에 제사하고 추수감사제를 드려서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 다석은 날마다 밥을 먹는 것을 하늘 제사와 추수감사제라고 보았다. ‘상의극치일정식’은 하늘에 감사하고 제사 드리는 정신으로 날마다 바른 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날마다 밥 먹는 일을 하늘제사로 알고, 날마다 먹는 밥과 물을 예수의 살과 피로 알고 먹자는 것이다. 다석은 또한 하루에 한끼 먹는 일이 예배의 극치라고 하였다. 하루 한 끼 먹는 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제사를 지내는 일”이라고 하였다. 다석에게 하루 한 끼를 먹는 것은 아침과 점심을 금식함으로서 자기 살과 피를 불태워 그 힘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고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다석은 자기가 죽고 나서 자기의 얼굴과 몸은 다 잊어도 ‘상의극치일정식’만은 기억해 달라고 했다.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이 사람의 얼굴과 몸은 다 잊어도 좋은데, ‘상의극치일정식’, 이 한마디만큼은 기억해 주십시오. ....다음에 이 사람이 죽은 뒤 이 사람이 못 보는 세상에서 이것이 어떻게 되나 한 번 보아 주십시오. 먹고 마실 때 한 번은 꼭 이 ‘상의극치’라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필자는 1985년경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과 교회>라는 글에서 예수 운동을 밥상 공동체 운동으로 설명했다.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서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서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했다. 성만찬은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의 연장이며,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데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예수의 살과 피로서 하나로 된 공동체로 이해 했다. 나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밥상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았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예수)의 죽음은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나는 밥을 먹는데서 예수와 하느님과 ‘나(민중)’가 하나로 만난다고 보았다. 나는 밥과 예수를 동일시 하면서도 밥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밥과 민중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나는 밥과 관련하여 다석처럼 깊은 영성적 통찰에 이르지 못했고 식사와 관련해서 ”정신이 육체를 먹는다.“든가 ”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린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다석은 밥과 예수를 동일시 하면서도 식사를 하늘 제사로 보고 영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다석은 식사를 ‘사랑의 나눔(割愛)’으로 보고, 천지 만물의 조화와 농민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을 말했다는 점에서 밥의 공동체성과 민중성과 생태학적 차원을 주목했다. 1980년대 후반에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미국의 학자들도 예수의 운동을 치병 사건과 밥상 공동체로 파악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학자들은 밥의 깊은 영성적 차원을 말하지도 않았고, 밥 먹는 일이 예수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57년 2월에 함석헌이 간디 기념행사를 준비할 때 다석은 걱정하는 말을 거듭하였다. “왜 함선생이 간디를 기념하려고 하는가? 간디를 기념해서 무엇 하는가?” 간디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간디의 정신을 가지고 간디처럼 산다면 몰라도 간디를 기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은 죽은 예수와 함께 과거에 머무는 것이고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은 예수와 함께 지금 여기서 새 역사를 창조하고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다석의 이러한 성만찬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서 그리스도록”으로 이해하는 것과 일치한다. 예수를 과거의 인물로 숭배하고 신격화하며 기념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예수를 이어서 예수의 자리에 서서 예수의 일(그리스도 사명)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셔 내가 예수가 되고 예수가 내 몸과 마음속에서 나의 삶속에서 육화되고 부활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다석 유영모> p276-p279
주님 마음(동광원 영성) 산의 여우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 있건만 우리주님 세상 와서 집 한 칸을 못가지고 아픈 다리 끌으시며 이리저리 다니시네. 고대광실 화려한 궁 우리 주님 원치 않고 죄인들의 마음속에 성전 꾸며 살기 위해 문 밖에서 두드리며 애처롭게 부르시네. 엄동설한 추운 밤에 내 맘 문간 찾아와서 밤새도록 두드리니 그 머리에 서리 앉아 검은 머리 희게 되고 손에서는 피 흐르네. 불원천리 너를 찾아 몇 번이나 왔건만은 사랑하는 나의 벗아 모진 잠이 그리 들어 내 소리를 못 듣고서 잠꼬대만 하고 있나. 사랑하는 나의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인비목석 인비목석 주님 마음 몰라주고 무정하게 굴었으니 죽을죄를 지었어요. - 저의 마음 추하오니 주님 피로 닦으시고 성신 불로 소청하사 성전 꾸며 살으시고 불초한 종 수종들어 주님 섬기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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