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뽑는 날 우리는 단호박을 본 포장에 정식 했다. 일이 밀려 늙은 묘종을 식구들이 모두 나와 옮겨 심었다.뒷밭에 심었다. 옛날에,15년 전에 심고 이제 또 심어 본다.
참목자 예수
1981.01.01. 엄두섭 목사
요한복음 10장 1절,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절,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 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6절까지 보겠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영원한 나그네 길입니다. 인생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벌써 묵은해, 일 년을 어제로 보내고 오늘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 길을 가는 사람들이고 또 동시에 바른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종교들마다 인생에게 길을 가르치고 있고 또 이것이 참 길이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길은 여러 가지 갈래 길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들이 많이 있고 그런 길로 가면 멸망하는 길이 많이 있고 미혹된 길이 많이 있고 성인들은 인생에게 바른길을 가르치는 이들인데 바른 길을 가려면 바른 인도자, 길을 바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를 바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 이십니다. ‘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 10장 1절에서 6절에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 그렇게 말씀 했어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데 목자는 자기 양을 불러내고 그 양들 앞에서 서서 가면 양들이 그 목자의 뒤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목자는 양의 길을 안내하는 그런 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언제나 나를 따르라. 나를 따라 오너라. 마태복음 4장 18절로 21절에 봐도 그렇게 나를 따라 오너라. ‘듀-테’라고 하는 말인데 나를 따라 오너라. 나를 따라 오너라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따라가서 종교를 배워라.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 인생의 철학이 있으니까 예수님을 따라가서 철학을 배우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예수님은 성경 선생이니까 예수님을 따라가서 성경을 배우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나를 따라오라 하는 그 말씀은 다만 그 어른이 가신 길,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만이 제자로서의 유일한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만 보고 다른 사람은 눈짓을 하지 말고 자기 목자 가는대로 목자가 산을 넘으면 산을 따라가고 목자가 강을 건너면 강을 따라가고 목자가 가시밭으로 가면 가시밭으로라도 양은 따라가고 양은 목자가 가는대로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에 바로 살길 바로 믿을 길을 가르치신 그런 우리의 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교훈을 보면 참 사는 길 너희들이 참 사는 길이 있다. 생명의 길이 있다. 참 사는 길 생명의 길이 어떤 길인가하면 좁은 문 으로 가는 길 협착한 길이라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 사는 길 생명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라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 사는 길 생명의 길은 너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길이 참 사는 길이라. 그렇게 가르쳐 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이리떼 같은 세상 속에서 비둘기와 같은 순결을 지키는 양의길이 너희들이 가는 길이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너희는 가난해야 되고 온유해야 되고 평화해야 되고 순결해야 되고 이편 뺨을 칠 때 저편 뺨을 돌려대는 그런 무저항 인력 해야 되고 원수를 사랑해야 된다고 그런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세상사람 들에게는 이건 알지도 못하는 다른 길입니다. 이 예수님이 가르쳐 준 이 길은 숨겨진 길입니다. 오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에 빠져서 믿는 세속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버림을 받은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또 우리 예수님 자신이 걸어가신 예수님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제가 등산을, 산을 타기를 좋아해서 등산을 하다가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저 함경도 천불산 이라는 산에 가서도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잊어가지고 헤매다가 애쓰고 그러다 그 다음에야 길을 찾고 아 여기 있구나. 여기에 길이 있구나. 길을 찾고는 감격을 한 일이 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처음 올라갈 때에도 혼자 올라가다가 길을 잃어버려가지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매다가 그 다음에야 길을 찾고 아 여기, 여기 길이 있구나. 그리고 감격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던지 예수를 믿는 것이 장한일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님의 길을 예수님의 길을 바로 찾아야겠습니다. 버려진 길, 오늘 세속 교인들이 내버린 길, 버려진 길, 숨겨진 길,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 그 길은 세상을 등진 길, 그 길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도를 구하는 길을 찾는 구도자가 길을 찾을 때는 감격해서 아 여기 있다. 이 길이다, 이 길이다. 이렇게 감격하는 것 같이 그것이 새 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갈망하고 사모하는 길입니다. 우리 님이 가신 갈보리 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출세 성공하려는 것도 아니고 저 같은 목사는 예수 믿고 교회를 붙어 돌아다니며 밥벌이 하려는 것도 아니고 길 예수님이 가신 길 그 길을 찾아서 따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바른길 바른 예수를 믿자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로 가는 예수를 믿지 말자고 하는 것 이지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 내가 다름 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그렇게 바울이 고백하듯이 똑바로 가자고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인생길을 가자고 목표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이지요. 더 좋은 신앙생활이 있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예수 믿는 방법보다도 더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길이 있으니까 세속적인 교인들보다도 더 예수님을 본받는 그런 신앙생활이 있으니까 그 길이 무엇인가? 그 길이 무엇인가? 우리가 찾는 것이 우리들의 노력이지요. 첫째 몇 가지 여러분 에게 말씀 드리지요.
첫째는 마태복음 10장 37절로 39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성경에 또 다른 데를 보면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따르겠는데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그랬습니다. 또 다른 어떤 제자가 주님 앞에 나와서 내가 주님을 쫒겠는데 잠시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을 작별하게 그렇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 때도 예수님은 대답 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마태복음 10장이라든지 그런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하는 이 말씀 이라든지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이 말씀이라든지 가서 늙은 부모 장사지내고 오겠다는걸 가지 못하게 했다는 이 말씀 이라든지, 자기 아내 자기 자녀들을 작별하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지를 말라고 하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느끼십니까? 예수를 따르는 길은 평범하고 손쉽고 간단한 길이 아닙니다. 지극한 길입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간단한 길이 아니고 지극한 길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펴보면 어디나 어디를 펴 봐도 명백하게 그것이 나타나지요.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성경을 그렇게 보는지 모르지만 성경을 어디를 펴도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장하고 고난을 각오해야 되고 십자가를 질것을 각오해야 되고 죽음을 일사각오를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따라가는 길인데 예수를 모르고 어떻게 기독교를 믿어낼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800만이요, 900만이요. 조금 있으면 천만 명이 되는데 오늘날 천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한들 예수를 모르고 예수님의 정신을 모르고 예수님이 가신길이 뭔지 모르고 그리고 어떻게 제 나름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해야 무슨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세상을 세속을 용납하는 예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가장 바로 받은 요한은 요한1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렇게 말했어요. 세상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가는 길, 이 세상에 매여 있는 모든 정, 그 모든 속정을 모두 끊고서야 가내는 길, 참으로, 참으로 무서운 길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출가의 길과 같은 집을 나서는 길 그리고 고독한 길 예수님을 따르는 길도 그런 길입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여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진지한 태도로 질문 했을 때 예수님은 당장 가서 네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 버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고백하기를 빌립보서 3장 7절로 9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그렇게 바울은 고백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일생은 예수를 믿고 그 가문도 문벌도 다 버리고 세상 모조리 버리고 그가 세상에서 배운 높은 자랑스러운 학벌을 버리고 세상 학문도 버리고 그는 예수를 믿고 가정적인 행복을 버리고 그는 독신으로 일생 갖은 핍박과 고난을 다 겪으면서 출가자의 길로 고독한 길로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바울은 따라갔습니다. 이런 길입니다. 이런 길 세상도 가정도 모든 탐욕도 모든 인간의 얽혀있는 그런 애욕의 줄도 끊고 버리고 나서는 출가의 길, 인간적으로는 쓸쓸히 임만 부르며 살아가는 절대 고독에 그런 길입니다. 높이 나르려고 하는 새는 발목에 거미줄 같은 끈을 매어도 날을 수 없는 것 같이 모조리 끊으려고 하는 길 세속은 간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장 간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적 비약을 막고 영적 비약을 망치는 것인 고로 모조리 끊으려고 하는 이 무서운 길, 주님의 길은 이런 무서운 길입니다.
세속을 완전히 끊으라. 김 일엽 이라는 분이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을 쓰면서 어떤 여대생이 세상을 버리고 절에 들어왔는데 어느 날 구석에 앉아서 후 훌쩍훌쩍 울고 앉아있으니까 김 일엽 씨는 그 여대생의 곁에 가서 ’왜 우느냐? 울지 않으려고 중이 되려고 들어온 사람이 울기는 왜 울지? 서러운 생각이 난다면 정답게 위로해줄 사람이 많은 세속에서 살지 산중으로 들어올 필요가 없지 않아?‘ 그러니 그 여대생이 울다가 편지 한 장을 김 일엽 스님에게 보여주며 ’이것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그 여대생의 동생이 써서 보낸 편지인데 누님이 그리워서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얼마 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의 상여가 넘어가던 그 고개 그 고개로 우리에게는 한분밖에 없는 누님마저 고개를 넘어서 산중으로 떠난 후에 영영 누님을 잊어버려서 누님이 그리워서 편지를 쓰면서 김 일엽 씨는 자기도 눈에서 눈물이 나오면서도 그 여대생을 격려 하면서 눈물에 속지말자. 눈물 이라고 하는 그 가짜 다리, 그 가교 눈물의 가교를 밟고 다시 세상에 돌아간다고 하면 귀속한다고 하면 살고 죽는 생사마저도 도로 침륜이 되어가지고 불가사도불여 생사에 고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어려움을 참아서 영원히 계속할 그 평안을 얻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 조각조각 떨어진 그 감상에 의존해서 감상적인 기분에 의존해가지고 그 조각 파편적인 감상에 의존해가지고 만경창파 속에 파선한자와 같이 그렇게 이 어폐의 부침에서 헤매어 있지 말라. 그렇게 격려한 이야기를 읽어보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길이 이 세상은 아무것도 뒤돌아볼 거 없다는 그것 바울과 같이 배설물과 같은 세상 똥과 같은 세상 모든 거짓이요. 모든 허무요. 모든 것은 역스러운 것이라. 이 세상은 또 실로 번갯불같이 잠깐 찰나적으로 어른거리다 없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고 그 속에 무슨 출세가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을 끊으라. 끊는 것이 애처로운 것 같아도 이 세상을 끊으라고 하는 예수님의 길도 그런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 점을 첫째로 명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그랬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 가난숭배 청빈이지요. 청빈숭배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은 가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보면 예수님은 베들레헴 외양간 말구유에서 나시고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집에서 30년 동안 사시고 예수님 자신도 가난한 목수 생활을 하시고 예수님은 일생동안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어도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이 유랑방황하고 단벌옷을 입고 맨발벗고 완전한 무소유로 다니시고 예수님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입고 있던 속옷마저 빼앗기고 벌거벗은 수치로 운명하시고 세상 떠난 후에 자기 무덤이 없어서 남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가난하신 예수님, 아까도 마가복음 10장 27절에 부자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할 때에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 청년 자기가 계명을 다 지켰다고 뽐내는 청년인데 그 청년에게 대해서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또 마태복음 19장 21절에 보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그랬어요.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버리라. 모든 것을 버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랬습니다. 이 청년이 영생은 갈망하면서도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지는 못하고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그렇게 성경에 썼습니다. 요새 요즈음 교인들은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이런 말씀을 주의 명령이 임한다고 하면 요즘 교인은 픽 웃을 것입니다. 미친 소리야. 그러지 아니하면 비판을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면 그것은 그 마태복음은 19장이라든지 마가복음 10장에 부자청년의 그 특별한 경우에 하신 말씀이지 모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 그건 특별한 경우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혹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면 그렇게 믿는 길이라 하면 진정 예수 믿는 것이 진정 그렇게 믿는 길이라고 하면 나는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못가겠다. 요즘 교인들의 대답은 그런 대답일 것입니다.
제가 20년 이상 이런 세월을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세속교인들을 데리고 밤낮 앉아서 청빈, 청빈, 청빈, 청빈, 교회 벽에 다가 청빈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청빈, 청빈 교회 주보에다가도 청빈이라고 표어를 써놓고 청빈 청빈을 가르쳐 봤습니다. 가르쳐본 결과 그 세속 교인들의 태도는 반발이고 반대이고 그러지 않으면 픽 웃는 냉소이고 그러지 않으면 그런 소리를 무시하는 그러지 않으면 멀리 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이 가난 청빈이라고 하는 이 선한 덕 선덕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이들이 짊어지는 그 십자가가 가지는 가장 두려운 형식의 하나입니다. 청빈정신으로 이 가난의 정신 청빈정신으로 살려고 하면 밖으로는 외적으로는 언제나 모든 것에서 결핍을 겪으려고 해야 됩니다. 청빈정신으로 살려고 하면 좀 무엇이 결핍하고 부족해도 그것을 잘 참아야 되고 또 안으로 내심으로는 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포기를 철저히 해야 이 청빈정신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이 청빈생활은 영혼이 구원 얻는데도 중요합니다. 성화되어가는 즉 성성을 이루어가는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가운데 중요한 그런 덕입니다. 청빈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청빈생활을 하겠느냐? 수도하는 사람들 청빈을 지키는 것인데 또 우리 동광원 식구들도 청빈주의인데 어떻게 해야 청빈을 지킬 수가 있느냐? 청빈을 지키려고 하려면 요구를 적게 가져야 합니다. 욕심이 많으면 안 됩니다. 요구를 적게 해야 되고 또 모든 결핍을 견뎌야 합니다. 또 고통을 참아야 됩니다.
또 모든 욕망을 배격해야 합니다. 사람이 욕심이 한이 없는데 욕망을 배격해야 되요. 또 많은 적에게 공격을 당해도 그것을 끔쩍하지 아니하고 또 언제나 최저생활로 만족을 해야 됩니다. 청빈생활을 하려고 하면서 최저생활을 할 줄 모르면 청빈정신을 살수가 없습니다. 또 언제나 영광보다도 수치를 구해야 합니다. 적고 초라하고 때로는 필요한 꼭 필요한 필수품에도 그것이 결핍해도 그래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또 이 청빈정신을 살려고 하면 이 청빈주의로 나가는 사람의 살아가는 꼴이 얼른 볼 때는 아주 기괴하고 음침한 듯 하고 남들 보기에 거친 것 같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천빈주의로 극도로 나가는 생활을 보면 마치 이 현필 선생이 거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 같이 그렇게 남들 보기에 야만시대의 잔재같이 그렇게 보일수가 있어서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눈에는 그게 참혹하게보이고 수치스럽게 보이고 혹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어도 그래도 그것을 참아야 해요. 그래야 그것이 청빈정신을 살수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디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철저하게 청빈주의로 살았습니다.
간디의 옷은 겨우 몸에 그 수치스러운 부분이나 가리 우는 그런 정도의 옷을 절반 이렇게 입고 자기가 그저 마시기 위해서 염소 한 마리를 끌고 다니고 언제든지 쉬는 시간 있으면 물레를 돌리고 남자인데도, 기차를 탈 때는 언제든지 3등차만 타고 자기 이빨이 다 빠졌지만 그러나 그것을 고치지 아니하고 전 인도사람의 이빨을 다 고치기 전에는 내 이빨을 고치지 아니한다고 그랬습니다. 감옥 속에 들어가 갇혀있어도 언제든지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읽고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 그것이 좋아서, 그 간디가 사는 그의 집은 토담 움막집인데 그 집은 얼마나 너절하고 얼마나 볼품 없냐하면 인도에 비참한 감옥보다 더 못한 집 속에서 그 속에서 살면서 그 토담집 흙벽에다가 예수님의 사진을 하나 걸어놓고 그 밑에 (끊김)
예수 믿는 사람들만 아니라 오늘 교회에 목사들이든지 교회 지도자들이 극력으로 이 청빈생활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세속적인 기독교인들이 이 청빈생활을 반대하는 이론은 그럴듯한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역자들이 청빈을 반대하는 이론이 그럴듯해요. 뭐이라고 말하는 고 하면 예수를 믿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거지꼴하고 다니면 전도가 되지 아니한다. 남에게 멸시를 받고 예수 믿는 신자들이 남자들이 여자들이 옷을 입어도 좀 좋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입고 그리고 다녀야지, 그래야 전도가 되지, 거지꼴하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전도가 되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 음식도 잘 먹어서 혈색도 좋고 건강 하게 보여야지 남 보기에 하나님께 은혜 받은 거 같아 뵈지, 빼빼 말라 가지고 파리해가지고 어떻게 전도가 되냐? 남에게 기독교인이 멸시를 받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배당을 지어도 교회를 지어도 크게 짓고 화려하게 짓고 예배를 보아도 그럴싸하게 그렇게 예배를 보고, 교인들이 주일날 교회를 나올 때에도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와야 되고 그렇게 주장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도 교인들에게 주일날 교회 나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오시오. 그랬어요. 미국에 슐러라는 목사는 예배당을 수정교회를 지었는데 수정가지고 예배당을 지었는데 그 교회 유리창 하나 값이 다른 교회 예배당 전체 값만큼 그렇게 비싼 수정교회를 지어놨습니다. 그리고 찬란하게 돈으로, 우리 서울에도 그런 교회 있지요? 돈으로 메질을 하듯이 막 쓸어 넣어 가지고 예배당을 짓고 이렇게, 이렇게 해야 전도가 된다고 그러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난의 청빈의 정신은 교회 건물에서부터 예배로부터 기독교인의 생활에서부터 완전히 일소당해. 그래야 된다고 오늘날 교역자들이 그렇게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 그런지는 모릅니다만 또 일반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수도하는 사람들도 수도하는 단체 수도회들도 주장하기를 그 수도단체와 그 수도회와 그 명예와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의 지위가 남에게 멸시를 받지 아니하고 존대를 받을만하게 그렇게 살아야지 너무 멸시를 받아야 되겠냐고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목을 끌어들이거나 남이보기에 우스꽝스러운 행동이든지 이상야릇한 풍모를 하지 말라. 수도를 한다 해도 그런 이상한 모양을 하고 돌아다니지 말라. 그저 남들같이 평범하게 살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피해야 된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아무리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시대가 다르지 아니하냐? 그 시대 시대에 순응해서 살아야하지 아니하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행하는 유행에 제일 앞에 서서 유행의 첨단을 가는 것은 피해야겠지만 그러나 너무 시대에 유행에 뒤떨어진 그런 시골 떼기처럼 그렇게 살면 못쓴다.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혹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거지꼴을 하고 미친 사람 광인 꼴을 하고 가난뱅이 차림으로 오늘 현대사람 앞에 나서게 되면 도리어 반감을 일으키고 역효과가 나타난다고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아무리 신자라도 혹 아무리 수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몸 건강을 늘 무시해서는 안 되고 자기 몸을 아껴야 되고 자기 몸을 육신을 소중하게 늘 건사해야 되고 영양보충을 잘해서 늘 자기 몸을 조심해야 된다고 그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청빈정신이 아닙니다. 청빈을 예수님의 이 가난의 정신을 배격하려는 구실이지 청빈정신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청빈이라고 하는 것 가난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데 청빈의 모습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난의 모습 청빈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앙 속에서 가지는 그 경건한 신자의 청빈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말 없는 무언의 설교라고 그럽니다.
백가지의 유명한 설교에서 얻는 감동보다도 믿음 좋은 사람이 경건하게 그리고 청빈하게 살아가는 그 청빈의 모습은 백가지의 유명한 설교를 들을 때 감동보다도 청빈하는 모습이 남에게 더 감동을 준다고 그럽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볼 때는 초라하고 단벌옷에 맨발벗고 그리고 돌아다니고 그 청빈의 모습인데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볼 때는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청빈의 모습은 무언의 설교라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제자들과 같이 전도하러 오늘 아시스 거리로 전도하러 나가자고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나섰는데 아침부터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까지 프란치스코는 누구보고도 한마디도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아니하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묵묵히 땅만 바라보고 그리고 겸손하게 아시스 거리를 돌아다녔어요. 집에 돌아와서 그 제자가 이상하게 생각해서 선생님 오늘 전도하러 거리에 나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런데 왜 누구보고도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다. 기다려보라. 그 후에 여기저기서 소식이 오기를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그 제자들을 데리고 걸어가는 청빈의 모습, 그 허줄한 수도복을 입고 맨발벗고 그리고 겸손하게 땅을 보고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청빈은 무언의 설교라고 그랬어요. 아시스 성에 성주에 집에 교회가 있었는데 프란치스코가 초청이 되어서 성주의 그 교회에 들어가서 어느 날 설교를 했습니다. 그 이상한 머리를 가지고 또 맨발벗고 허리에 새끼줄 띠를 띠고 그 가련한 모양을 가지고 프란치스코는 성주의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성주의 딸 글라라가 자기 어머니 곁에 앉아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묵묵히 듣는데 그렇게 감동 받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저분의 저 수도자의 길을 내가 따라나서야 되겠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그 모습에 청빈의 모습에 감동이 되어서 성 종려주일날 밤에 자기 성에서 빠져나가서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끔가끔 그 글라라의 수녀원에 가서 설교를 할 때도 늘 청빈의 모습을 가지고가서 자기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 ‘모든 것은 재다. 이 프란치스코도 재다.’ 하면서 설교를 했어요.
이 청빈의 덕은 특별히 성자 성을 양성해 주는데 가장 뛰어난 그런 덕입니다. 우리에게 성성을 거룩하게 해주는 이 성자 성을 양성해 주는데 가장 뛰어난 것인데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돈에 대한 모든 의뢰심을 전적으로 끊는 일, 그렇게 해서 가난을 숭배하는 청빈을 숭배하는 그런 일은 성자 성을 우리가 참 못된 것을 버리고 호강하는 마음을 버리고 성자 성을 가장 효과 있게 길러주는 그런 방법입니다. 이제 말한 성 프란치스코의 그 성자성은 특별히 성프란치스코가 다른 것도 뛰어난 것이 있지만 절대 무소유,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주장하기를 나는 성빈 양하고 그는 청빈을 성빈이라 그랬어요. 거룩한 가난이라. 나는 이 성빈 양 하고 결혼 했노라고 그렇게 고백했어요. 프란치스코는 청빈을 숭배를 했어요. 그러면서 그의 표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체를 버리고 가난에 자체를 남겨놓고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가난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내 주여 나의 전부여’ 그렇게 부르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베네딕도의 수도회 회칙에는 베네딕도의 수도회 회칙은 모든 수도회 회칙에 표준 되는 회칙인데 거기에 이렇게 써져 있습니다. 수도자는 세속과 소유욕을 그 뿌리를 최후 한 개까지 마저 뽑아버리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수도자는 세속과 무엇을 가지려고 하는 소유욕을 그 뿌리를 마지막 최후 한 개까지 뽑아버리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일체의 모든 욕망, 그리스도 외의 일체 모든 호기심을 다 버리는 것이라고 돈으로 부자 되지도 말고 지식으로 학자 되지도 말고 신학과 성경을 많이 아는 학자 될 필요도 없고 일체 무슨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지위가 될 인기를 탐하지도 말고 수도하는 사람은 교회 직분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직분도 필요 없다고 하면 어디 가서 이상한 선전한다고 그런 목사가 왔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청빈, 어찌되었든지 지위 인기를 탐하지 말고 많은 활동을 할 필요도 없고 많은 사람하고 교제할 필요도 없고.
그 여러분이 들으셨지요? 까를로라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까를로에게 말씀하기를 결혼하지 말라. 예, 여러 해 있다가 또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나와 함께 사막으로 가자. 나는 너의 많은 활동을 원하지 않는다. 활동보다 더 효과가 큰 너의 기도를 원한다. 예수님의 요구는 그 까를로에게 활동보다 더 효과가 있는 기도를 하라고, 까를로가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갔을 때 그 수련장은 까를로를 만나자마자, ‘까를로,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까를로는 자기의 가방에 마지막 남은 그 친구들의 주소록을 수천 명의 친구들의 주소록을 끄집어내서 불을 질러버리고 완전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사하라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여러분이 전에도 들으신 줄 압니다만 자기에게 내가 인물로 자랑할 것이든지 문벌로 자랑할 것이든지 내게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 재주를 자랑할 것이든지 내게 무슨 훈장이 있던지 내게 지식이 남보다 뛰어나 지식 자랑이든지 기타 무엇이든지 무엇이 자랑할 것이 있다고 느껴서는 모든 것을 숨기고 버릴 것은 모두 버리고 그리고 완전히 청빈정신을 우리의 모든 분야에서 살릴 수 있는 이것은 그리스도의 걸어가신 길입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이 길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 번째로 예수님의 길에 가장 뛰어난 특징은 세 번째로는 순결의 길입니다. 순결이 곧 거룩이지요. 순결 곧 거룩은 하나님 나라 천국민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순결하신 분 스랍들은 하나님의 주위에서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면서 거룩, 거룩, 거룩,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어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 자체는 마음에도 몸에도 심신에 일점의 오해도 더러움도 없이 순결이시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교훈 속에서는 모든 교훈 속에서 순결, 순결, 순결, 그 순결의 영혼이 울려오고 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내어 버리라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 말씀 했는데 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 가운데는 전부 어떤 교훈이든지 거기에 순결, 순결, 순결, 이 순결의 여운이 그 속에서 들려오는 교훈입니다. 이 수도하는 사람들은 순결을 백합화라고 그러는데 백합화라고 상징을 합니다. 백합화 여러분의 꽃밭에 심은 백합화의 모양 그 꽃 모양도 순수하지만 백합화는 높은 향기를 갖은 꽃입니다. 그런고로 순결의 덕은 가장 높은 향기를 가지고 있는 그런 덕입니다 백합화 꽃의 그 단순성 백합화 꽃의 그 순진함 백합화 꽃의 그 높은 기품 백합화 꽃을 볼 때 그 미묘한 모양 또 더구나 그 백합화 꽃을 대할 때 거기서 풍겨 나오는 그 청초한 그 향기, 아 그 순결의 향기 동정녀의 향기 주님은 그 향기를 기뻐하십니다.
아가서 6장 1절에서 3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으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면서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그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성자 베르나르드는 말하기를 순결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 순결은 죄 속에 잉태된 피조물에게서 이 순결의 이상을 끌어내어서 인간을 천사로 삼는 것이고 이 동정의 순결은 육체의 부패를 예방해주는 상쾌한 향유 같아서 우리 지체 우리 오감에 배어들어가서 이를 썩지 아니하게 보전해주는 것이 순결이라고 말했습니다.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특별히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순결해야 되겠지만 수도하는 사람들의 영감입니다. 거룩한 성인들의 영감 성인들의 에스피레이숀 수도자의 수도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아름다운 덕이고 이 순결은 가장 높은 최고의 향기입니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한 아내로 깨끗한 정배로 구별해서 바친 그 수녀들은 내 몸을 내 마음 뿐만 아니라 내 몸마저 예수님에게 깨끗한 정배로 주님께 바친 수녀들은 그대로 그 자체가 향입니다. 거룩한 성인 거룩한 수녀들이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이들의 그 죽은 시체에서도 막 향이 납니다. 그들이 세상에 남겨놓은 손수건 그 유물에서도 실제로 높은 향기가 막 진동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 가운데 자기 몸의 순결을 바치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순결한 수녀의 모습은 그대로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를 따라나선 글라라는 자기 부모의 집을 나올 때 대문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송장을 내보내는 죽은 그 송장 문으로 빠져나가서 그날 밤에 머리를 깎아버리고 삭발하고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는 백합화 꽃을 사랑해서 순결을 사랑해서 화원의 백합화를 가꾸면서 깨끗한 순결한 일생을 보내었습니다. 그 자체가 순결이었습니다. 남미 페루에 로제는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몸 바치려고 이렇게 동정을 지키는데 부모에게 매를 맞아가면서도 기어이 결혼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 뜰 녁 구석에다가 조그마한 수도하는 암자를 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만 생각하며 자기의 몸을 주님의 정배로 바치면서 그 로제의 얼굴이 너무 예쁘기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자꾸 미혹을 받으니 그것이 걱정이 되어서 후추 가루를 비벼서 얼굴에다 비벼가지고 흠집을 만들어놓고 머리를 깎아버리고 그러면서도 순결을 지키려고 우리나라 임진란 때에 어떤 유명한 귀인의 딸이 일본사람 소서행장에게 붙잡혀서 일본사람 포로로 일본으로 끌려갔지요. 일본으로 끌려가서 그 처녀가 예수를 믿었는데 천주교를 믿었는데 후에 일본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 궁궐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똑똑하고 어떻게 예쁘게 생겼는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꾸 눈독을 들여 가지고 자기 첩으로 만들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끝까지 나는 예수님을 믿는 처녀인데 주님께 몸 바친 처녀인데 어떻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첩이 되겠느냐?
그 궁중에서 그 유혹을 기어이 뿌리치고 기어이 거절하고 마지막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가 세상에서 못한 일이 없는데 이 조그마한 처녀 한국에서 붙잡아온 포로처녀 요거하나를 내가 굴복을 시킬 수가 없구나. 그래서 정배를 보내버렸어요. 죽일 것인데 다른 사람 같으면 죽여 버릴 것인데 자기가 너무 마음을 두었던 여자이기 때문에 이즈오오시마 라는 데로 정배를 보내버렸어요. 그 여자가 줄리아라고 하는 여자인데 오오시마에 가서 정배살이를 하면서 멀리 바다건너 자기의 고향 산천을 바라보다가 거기서 죽었는데 그 줄리아가 죽은 지 오래지만 요 몇 해 전에 그 죽은 파묻은 그 자리의 흙을 한줌을 옮겨서 저 서울 절두산 한강 옆에 거기에 갖다 묻어놓았습니다. 순결, 순결을 지키려고 님에게 바치는 인간 제물, 향기 진동하는 제물, 이 순결의 향은 님께로 올라갑니다. 이 순결의 향은 우리 님에게로 올라가는데 아마 이 동광원 수녀들의 향기도 님에게로 올라갈 것인데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너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려라.’ 젠마 갈거니 동정녀는 임종하는 전날 밤에도 유언하기를 이 몸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몸도 예수님의 것인데 내가 죽은 뒤에 세속 사람의 손이 죽은 송장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하고 죽었다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들었지요. 마음도 몸마저 깨끗한 순결 그대로 내 님에게 바지고자 이 백합화의 길로 이 순결의 길로 님을 만나러 가는 길로 계시록 14장 1절로 5절에 보면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명이 섰는데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4 절에는 시집가지 아니한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하고 시집가지 아니한 자, 처녀는 주님을 맞이하면 몸도 순결하게 영도 순결하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정조는 하나님에게만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주님을 위해서 순결생활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정배입니다. 그러나 이 순결을 이같이 높고 아름다운 덕이고 이 순결의 덕은 덕 가운데 수도자들이 닦는 덕 가운데 여왕의 지위에 있는 그런 높은 덕이지만 그러나 이 순결은 아주 나약한 덕입니다. 자칫 잠시 실수하면 깨어지고 잠시 마음을 놓으면 더럽혀지는 덕입니다. 그렇게 높은 덕인데 그렇게 향기가 진동하는 덕 이지만 아주 나약한 덕이기 때문에 잠시 마음을 놓으면 자칫 실수하면 어느새 깨어지고 더렵혀지는 게 덕이기 때문에 이 순결의 덕은 늘 싸우지 않으면 지켜내지 못하는 그런 덕입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려면 마음도 생각도 늘 순결하게 그 육신도 전력을 다해 순결하게 이 수도자의 순결은 그 생명보다 귀한 것이니까 생명은 희생 되어도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니까 아마 그래서 이 현필 선생은 임종하면서 벽제에서 숨이 끊어지면서 곁에 있는 수녀에게 ‘생각해 봤습니까? 생각해 봤습니까?’ 하면서 순결을 다짐한 줄로 압니다. 이 세상과 세속 생활은 오늘날 얼마나 더러운 세상인지 갈라디아 5장 19절로 20절에 보면 음행과 더러움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 하는데 지금은 이 지구 전체가 더러워진 시대인데 인간생활이 진실 이하로 떨어져 있어요.
걷잡을 수 없이 되어있는데 이 더러운 세상 속에 우리가 살면서 이 백합화와 같이 혹은 저 진흙탕 속에서 티 하나 없이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이 세속에 물들이 아니하고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 입니까? 순결은 싸워야 되는 덕이니까 분도라 부르는 이는 길을 걸어가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번화한 길을 걸어가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조그만 한 소로를 택해서 걸어갔습니다. 분도 라부르는 이단자들이 사는 마을에는 지나가지를 않았습니다. 분도 라부르는 여자들이 와서 자기 옷에다 혹은 자기 곁에 올 가 봐 겁이 나서 일부러 일생동안 목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곁에 올 가 봐 수도하는데 방해되니까 일생동안 목욕하지 아니하고 자 예배당에 들어가서 예배 보는데 그 라부르가 거지지만 성자인줄 알고 라부르 곁에 가서 여자들이 마음이 그렇지요. 성자 곁에 가고 싶어 하는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보려고 그러는데 여자들이 곁에 와서 예배 보려고 그러면 그 몸에서 뭘 썩은 내 같은 게 나니 그래서 성자는 분명히 성자인데 냄새가 너무 나와서 곁에 오지도 못했습니다. 라부르는 말하기를 만일 여자들이 내 몸에다 손을 대면 손댄 자리를 칼로 오려내겠다.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 그렇게 그러면서도 ‘오소서. 내 주여 오소서. 내 주여,’ 주님만 부르면서 순결을 지킨다고 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생욕을 쫒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려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라 고 데살로니가전서 3장 3절에서 7절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수도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파렴치한 육신의 욕심에 사로잡히지는 아니하지요?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사정을 제가 알지 못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세상 사람처럼 뭐 그렇게, 그렇게 더러워지고 마음도 육신도 더러워지고 파렴치하게 육신의 욕망에 빠진 그런 이들을 없겠지요?
물론 수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더구나 없겠지요? 그러나 수도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파렴치한 육욕에 사로잡히지는 아니하지만 그러나 조심하고 경성해야 할 일이 하나있는데 뭐 인고 하면 수도하는 사람들은 완화된 육신의 욕심에 빠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 적극적인 파렴치한 육신의 욕심에 빠지지는 아니하지만 완화된 육욕, 혹은 다른 말로하면 수도원화한, 수도원화한 육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 육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면은 안락을 사랑하자고 하는 겁니다. 수도를 하면서 편안하려고만 육신이 편 하려고만 하는 것 또 두 번째는 무엇인 고 하면 이 수도원 생활 수도하는 생활의 그 부자유한 엄격한 생활을 두려워서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도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게 살지는 않아도 수도자로서 완화된 육욕, 혹은 수도원 화된 육욕에 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수도원 안에서 와서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편안하고 육신이 안일하려고 할 때는 그것은 곧 완화된 육욕이요, 수도원 화된 육욕이라고.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을 이 수도원 문제를 열심히 연구한 그런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엘리사벳 동정녀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말씀하기를 아 나의 정배여 순결하여라. 아 나의 정배여 순결을 사랑하여라.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들이 순결을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엘리사벳 동녀에게 나타나서 아 나의 정배여 순결하여라. 순결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교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들이 순결을 가르칠 수 있게 기도하여라. 순결을 그 전체 범위에 걸쳐서 완전히 지켜라. 나는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제가 존경하는 이 동광원 여러 수도하는 이들과 수도사들과 저는 수도사들이라고 여러분들을 부릅니다. 또 수녀들이라고 부르는데 존경하는 이 동광원의 수도사들 수녀 여러분들이여, 그 사이에 여러분이 얼마나 거룩한 성성을 이루었습니까? 그 사이에 여러분이 얼마나 성화가 되었습니까? 그 사이에 여러분이 얼마나 성인 성녀가 되었습니까? 우리들의 목표는 순결에 있는데 이 현필, 이 현필 정신의 아들들이여, 이 현필 선생이 남겨놓은 이 정신의 딸들이여, 그 사이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 현필과 같이 되었습니까? 백합화의 길을 걸으라. 순결의 길을 걸으라. 싸우면서 지키는 덕이니까 싸우면서 이 길을 걸으면서 이 길이 임을 만나는 길이니까, 순결에 이 덕을 사수하는 그런 생활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번째로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의 길인데 33년 동안 예수님의 그 일생과 특별히 그 예수님의 최후는
'단호박 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호박 순 덕장에 올려 주기 (0) | 2020.05.25 |
---|---|
단호박 덕장 설치 : 네 가슴의 슬픈 소리를 임께 다 아뢰어라 (0) | 2020.05.23 |
단호박 정식 포장 준비 : 고난을 통한 믿음 (0) | 2020.04.14 |
단호박 수확 : 영적인 것이 생명이다 (0) | 2019.07.05 |
선별과 출하 (0) | 2008.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