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중에 김제 서울 곡성에 갔다가 열흘만에 집에 돌아왔다. 아직 장마가 이어지고 오늘도 중부 지방에 호우 특보가 있다. 남도는 햇볕이 뜨겁다. 손주들과 함께 녹진에 들려 점심을 먹고 바닷가에 들렸다가 집에 왔다. 능소화 백일홍 계요등 사위질빵 회화나무 꽃이 활짝 피었고 벌들이 꿀따기에 바쁘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으셨는가?
에베소 4장 1절서 6절 까지만 읽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 하다가 감옥에 갇힌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며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하도록 노력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분 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십니다.’ 6절까지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통일하게 하신다고 그랬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위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기어이 하나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가되지 않는 부분은 다 멸망 할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성도들이 하나가 될 것을 열심히 기도하고 원하고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 오늘도 이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주님을 위해서 일 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바울 사도는 지금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로마 감옥에 만2년 동안 갇혀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 말씀을 보면 만 2년 동안 그는 로마 감옥에 계셨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전하다가 잡혔다고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3장 6절 말씀에 주님의 부활 주님의 죽으심 그것이 바울사도의 설교의 제목이요, 전도에 아주 제목이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까지 갔지요. 그래 거기서 사실은 재판을 받기로 가셨는데 그 로마 감옥에 가서 2년 동안 갇혀있는 동안에 바울사도는 계속 전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21장 이하에서 쭉 보면 사도바울이 잡히시던 이야기 또 그가 재판받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는 가운데 사도행전 25장 11절을 보면 내가 가이사에게 상소한다.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래 그 말 때문에 로마로 끌려가게 됐지요. 그래 27장에 가서 로마로 가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리고 로마에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생활 했다는 것이 사도행전 28장 16절서부터 31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거기 갇혀있으면서도 여러 가지로 그 궁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로마 군인들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 또 그 외에 제자들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항상 가르치고 전도하고 하는 일에 밤낮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사도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 하다가 감옥에 이렇게 갇히게 되었다고 자기 위치와 형편을 설명하고 계신데 그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몇 가지는 첫째는 이렇게 서신을 썼어요. 에베소서도 썼고 빌립보서도 썼고 골로새서도 썼고 또 빌레몬서도 썼고 이걸 옥중서신 이라고 그러지요. 대개 주후 62년 63년경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 바울사도의 서신 열네 개 중에도 이 옥중서신 네 개는 아주 그의 심각한 신앙과 체험에서 우러난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감명을 줍니다. 물론 어떤 성경말씀이나 한마디 한마디가 다 생명이고 우리에게 큰 힘을 주지만 특별히 이 옥중서신을 읽는 것은 많은 우리에게 힘을 줘요. 격려를 줍니다. 여기 이 편지를 쓰는데 바울 서신은 바울의 특별히 옥중서신 그중에 에베소서에서 바울서신이 바울께서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가 되라는 문제가 여기 중요한 문제 하나로 나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그 내가지금 감옥에 갇혀서 이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한 말씀은 감옥에 갇힌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를 부르셨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우리가 지금 다 예수님의 제자가 돼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이건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나를 예수를 믿게 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참으로 깨닫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무언지 모를 적에는 신앙을 깨닫기 전에는 그걸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하는 걸 모릅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믿음이 깊어질수록 그걸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런데 바울사도께서는 여기 긴 설명을 넣지 않고 간단하게 너희를 부르신 것은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다. 그런데 그 부르신 것은 부르신 것은 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 목적, 왜 부르셨을까? 우리가 사람을 부를 적에는 목적이 있어서 부르지 않습니까? 공연히 사람을 불러 오라고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면 무슨 목적이 있을까? 그것을 이 시간에 우리가 첫째로 제목을 삼아서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여기에 앉아있는 우리는 자기들이 지금 깨달았거나 못 깨달았거나 이 시간에는 잠깐 그 생각을 가져봐야 합니다. 이건 정신이 좀 흐린 사람도 내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이렇게 고개를 들고 올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셨다 하는 그걸 한번 들어보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늙었거나 젊었거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 시간은 우리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를 부르셨을까? 이 문제를 지금 제기해 보는 것이에요. 왜 나를 부르셨을까?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을까? 공연히 부르셨을 리가 없는데 왜 나를 부르셨을까? 그 부르신 목적이 있을 거 아니냐?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나를 부르시지 않았겠느냐? 그러면 그 목적대로 살아라. 그 말입니다. 큰 문제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으라고 불러내신 데는 하나님의 목적이 계실 테니까 우리들은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 마음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 이 시간에 정신을 여기다 집중해봐야 합니다. 왜 나를 부르셨나?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을 여기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대로 살라. 그 말이 되요. 그걸 생각해 보는 거예요.
첫째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며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의 평화의 줄로 묶어 여러분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가 되라는 말이 나와요. 여기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놓고 있어요. 그걸 조금우리가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적어도 이 말씀대로 우리의 생활을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정리해야겠어요. 여기 첫째 겸손을 말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겸손하게 살라고 부르신 거다. 그 말이에요. 겸손하게 살라고 이건 여러분이 많이 듣고 아마 자기 나름 대로들 겸손이 무엇이라는 걸 대충 알고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의 절대적인 표준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그 예수의 마음을 가르쳤지요.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시고 낮추셔서 종의 형상을 입고 죽기까지 하셨다고 그게 예수의 마음이라. 그 마음이 곧 겸손을 가르친 것입니다. 또 있지요? 히브리서 5장 8절에서 9절 말씀 보면 또 그런 거 있지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게 참 겸손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먼저 겸손을 배우되 외형적인 껍데기 겸손 말고 예수님이 전 생활로 중심으로 진리의 순종해서 죽기까지 하신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내신 것은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같이 그렇게 겸손한 생활을 하라고 높은 마음은 갖지 말고 높은 자리를 찾지 말고 자기의 어떤 영광을 구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고 그래서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겸손의 반대되는 것, 적은 교만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이외의 세계를 전부 지배하는 이 교만의 왕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마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속에 마귀가 들어가면 우리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면 하나님 비켜놓고 제 마음대로 하려고 그럽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까지도 선생도 장로도 목사도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면 자기 고집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게 마귀입니다. 하나님을 비켜놓고 그러니까 겸손이라는 것은 그걸 죽이는 겁니다. 거기 그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나라는 거, 나라는 거 그것을 완전히 죽이고 참으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 하는 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나님의 음성대로만 진리에 순종해서 무조건 사는 거 그게 예수님의 생애 아닙니까? 또 모든 사도들이 그랬고 선지자 성인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따라가고 그렇게 살라고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보내셨다. 그 말이 되요.
둘째로는 거기 보면 온유하게 살라. 그 말씀이 있지요? 온유 온유는 성신 받은 거지요. 쉽게 말하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온유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육을 가지고 있으면 혈기가 있으면 그러면 온유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신 받은 상태 또 성신으로 거듭난 사람 완전히 혈기가 없어진 사람 거기, 거기 가서 온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의지해서 사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적에는 혈기대로 살았거든요. 혈기는 뭡니까? 정욕과 물욕 아닙니까? 욕심 때문에 혈기가 붙어있는 거거든요. 그대로 살았거든. 그런데 인제 그걸 회개하고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게 인제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에게는 혈기의 무리의 끌탕이 이미 없어져 버렸으니까 순전히 예수님께서 온유하신거와 같이 그렇게 온유하게 살아지는 것 아닙니까? 여기 그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7절 9절 근처에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입을 한 번도 열지 않으시고 참았다. 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계시고 털을 깎이는 어린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 예수님의 그게 참 온유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우리보고 실천하라고 자꾸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왼편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을 주고 심지어 나를 해치고 저주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고 그렇게 하라는 거야. 언제든지 그런 마음 자세를 가져라. 이게 혈기를 갖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라는 거야. 그게 우리의 생애표준 이에요. 목표야.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슬퍼하고 애통을 하고 자기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걸 탄식을 하고 그래야 하는 거야. 그래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불러내신 것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안 살거든요. 남의 겉옷까지 빼앗아다가 자기가 부자가 되려고 하고 자기가 잘 살려고 하는 게 세상 아닙니까? 그 반대의 생활을 하라고 불러냈다.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욕심 부리고 혈기 부리고 마음대로 살면 다 너희들은 마귀의 백성들이고 궁극적으로 지옥에 갈 거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래서 불러내셨다는 거야. 불러내셨어. 그러니까 반대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온유하게 살아라.
셋째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합당한 생활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인내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인내도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거지요. 예수님은 30년 동안을 목수의 아들로서 나사렛에서 참는 생활을 하셨지요. 그리고 40일을 광야에서 주리시고 목마르시고 그 마귀에게 참 굴욕적인 시험을 당하셨지요. 그리고 3년 동안 그 인간들에게 시달리면서 대단히 괴로운 생활을 하셨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주리고 목마르시고 그러면서 그 생활을 하셨지요. 한 번도 편하게 쉬시지 못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태형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기어 올라가시고 그리고 피 한 방울 까지 마지막 숨 한번 쉴 때 까지 그 전부 인내 아닙니까?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자기의 그 사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그러셔 끝까지 참아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모습가운데 하나는 인내입니다. 참을 수 없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또 참고 또 참고 잘 참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열매 가운데에도 인내가 들어갔지요. 갈라디아 5장 22절 성령의 열매에도 인내가 들어갔습니다. 또 사랑의 조목가운데도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참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참 사랑이 있는 사람이 잘 참는다. 그 말이지요. 또 성신 받은 사람은 잘 참는다. 그 말이지요. 물론 우리가 조금씩 혈기도 나지요. 그러나 거기 져서는 안 되는 거야. 언뜻 돌이켜서 회개해가지고 또 참고 그렇게 하는 거야.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참 책임이야, 임무야. 우리는 그걸 지켜야해. 그래서 인내 참는 생활 그것을 하라고 부르셨다. 아마 그 인내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여기 앉아 지금 말씀을 듣는대도 참 인내심이 필요하지요. 인내성이 필요해요. 더구나 이렇게 모여서 사는 단체생활 에서는 인내 없이는 하루도 못갈 겁니다. 혹 일 년이나 이년은 가지요. 그 일생동안을 이렇게 공동생활을 단체생활을 하려면 아주 인내의 덕이라는 게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을 겪어본 이들은 잘 잘 알겁니다. 잘 알아.
그런데 참고 참으면 사실은 바보가 되고 손해는 많이 나지요.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러나 많이 참으면 참을수록 영적 생활은 손해가 없습니다. 우리 구원을 이루는 데는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보탬이 됩니다. 마지막 까지 마지막까지 죽도록 참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기 아마 인내라 꼭 보면요, 그 인내는 어떤 덕을 말씀하는 가운데도 그 인내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오지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많이 읽어본 데지만 여기같이 아마 인내의 덕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말씀한데 아마 드물 거예요.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이랬지요. 고통은 많이 겪어야 인내심을 갖게 된다. 그 말이지요.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잘 참는 사람은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끈기를 낳고 이랬어요. 잘 참는 사람이 시련을 이긴다. 아 시련 없는 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인생 쳐 놓고 시련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 이겨 내는 게 인내야. 인내심 없이는 그걸 못 이겨내, 그리고 거기서 시련을 잘 참아내는데 거기서 끈기가 나온다. 같은 말 같은데 강한 끈기를 낳고 그와 같은 끈기에서 희망이 솟아난다. 소망이라는 많이 참아서 이기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지. 뭐 참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참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말이야.
이건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 믿는 사람이 소망으로 구원 얻는다. 그러는데 소망이 없으면 아 그 지옥이지 뭐예요? 소망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인데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에든지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인데 그게 반드시 그 인내를 통해서 끈기를 얻어야 그 소망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모로 보던지 우리는 아 인내가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이로구나. 인내의 덕이라는 건 반드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이로구나. 이렇게 덮어놓고 ‘믿는다, 믿는다.’ 그러지만 말고 참는 것이 믿는 것이로구나. 믿는다 하면 참아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되요. 참기 어려운 때 많지요. 그러나 참을 줄 모르면 지옥입니다. 참을 줄 모르면 예수 못 믿습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구원에서 떨어집니다. 아마 참으로 인내의 덕을 많이 쌓으신 분이라면 참아서 손해본거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렇게 말씀했지요.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며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그 다음에 사랑을 가져라.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 그러라고 우리를 불러내셨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싸움만 한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자녀들 입니까? 마귀 새끼들이지. 하나님의 아들딸들은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살라고 사랑 공부 시키려고 사랑을 실천 시키려고 불러내셨다는 거야. 서로 사랑하면서, 아 이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아주 초보적인 거라 그 말이지요. 초보적인거야. 그래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데 사랑에 대한 건 많이 듣고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깨끗한 사랑 진실한 사랑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거기는 진실하기 때문에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신자들 사이에는 진실로 서로 사랑해. 또 그리스도의 사랑은 완전한 희생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기주의란 있을 수 없어. 나를 생각하고 뭐 내 육신의 붙이나 생각하고 인간적인 어떤 그 이유를 가지고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건 용납이 되지를 않아. 예수님이 모든 걸 희생하셨듯이 모든 걸 희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럼 믿는 사람들은 서로 희생하는 거야. 서로 희생하는 거야. 쓰러지고 죽도록 희생하는 거야. 그러라고 하나님이 부르셨어. 그걸 잘한 사람이 하늘나라 가는 거야. 자기 몸둥어리만 생각하고 기껏해야 제 집안 식구나 생각을 하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은 지옥가요. 지옥 가, 우리가 그걸 확실히 믿어야 해요.
또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그 자기희생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모이는 곳은 밤낮 싸움이야. 이기주의가 크게 폭발하는 게 전쟁이야. 나라도 내 나라만 생각하면 전쟁이 나고 교회도 내 교회만 생각하면 교파가 생기고 같은 교회에서도 자기 권리만 주장하면 싸움이 나서 교회가 쪼개지고 그런 거야. 가정도 자기만 생각하면 가정이 밤낮 불화하고 그렇지 않아요. 이런 단체도 그렇고 이런 단체도 그러니까 그러라고 부르신 게 아니야. 세상은 그렇지만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고 부르신 거야. 그런 속에서 나오라고 불러낸 거야.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해라.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왜 미워하느냐? 그것 때문에 시기하느냐? 그 말같이 보기 싫은 게 없어. 여러분들도 보시지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은근히 그러는 거 볼 때 그것같이 보기 싫고 괴로운 거 없어. 얼굴이 예쁜 게 예쁜 겁니까? 말을 얌전하게 하면 착한 사람입니까? 그 마음에 사랑이 깃들고 있어요. 사랑이 깃들고 있어요.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 그건 마귀야. 목사라도 신부라도 장로라도 마귀야.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 그건 마귀야. 그걸 우리가 알아야 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라고 그래 우리를 불러내신 거예요.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한다고 그랬지요. 완전하지요. 아주 완전한 것이야. 사랑만 하면 안되는 게 없지요. 사실은 다 되는 거지요. 모든 덕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랑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사랑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무엇이 있습니까?
국가 문제가 해결이 되고 정치는 물론이지만 산업이니 교육이니 무엇이든지 사랑만 있으면 다 완전하게 됩니다. 교육도 그런 이야기도 여러분은 이미 많이 들었을 겁니다. 특별히 이렇게 단체 생활에서는 교회 안에서는 믿는 사람 사이에서는 제일 중요한 덕목이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사랑은 제일이다. 또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다른 건 다 없어져도 좋지만 사랑만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마침을 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가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랑치 않는 곳은 악마입니다. 신의 계명은 오직 사랑이고 하나님의 자녀는 이 계명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요.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것이고 모든 문제의 열쇠가 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궁극 목표는 자기 자녀들을 사랑 화 시켜서 이 불러내셔서 자기 자녀를 에베소서에 보면 불러내셔서 거룩하게 하셔서 그렇게 하신다. 그랬는데 결국은 사랑 화 시켜서 사랑의 사도로 사랑의 이렇게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셔서 그래서 그 사랑으로 자기 백성들을 한사람, 한사람 완성시킨다고 그랬지요.
그 완성시킨다는 이야기는 그 위에도 바로 나오지요? 그 에베소 3장기도 가운데 끝머리에 가보면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그랬거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우리가 완성되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성됨으로서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런 때 하늘나라가 완성되는 것이야.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인간이 완성 되어야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이 돼.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무엇이냐? 이 세상에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서 사랑의 사람을 만들어서 한사람, 한사람의 인격을 완성시키고 또 그런 사람들을 모아놓은 하늘나라를 사랑의 나라로 만드시고 그게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야. 그러니까 사랑은 영원하다. 그러는 거야.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거든. 하나님은 한마디로 그래 사도요한이 일생동안을 체험한 결과를 똘똘 뭉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 거거든. 사랑이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으로 완성시키시는 거예요. 그게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에요.
그거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이걸 이루는 거예요. 이걸 이루라고 우리를 불러 내신거야. 다른 짓 하고 있지 말고 사랑하는 연습들을 해야 돼.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참 연구를 하듯이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여러분들 중에서 은근하게라도 참 미운사람이 있으면 그 저 미운사람을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 그걸 밥을 굶어가면서라도 밤을 새가면서라도 생각해야해. 그걸 생각해. 그게 제일 근본적인 문제야. 누구를 미워하는 사람의 그 미운마음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누가 되었든지 없애버리기 위해서 사흘을 굶고 삼십일을 굶어서 굶어 죽어도 괜찮은 거야. 그 마음 없애주기 위해서 그 마음가지고 지옥가면 무슨 소용 있어?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가 중대한 하나님이 그러라고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거야. 그러라고 우리를 불러내신 거야. 그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맞지 않소? 아주 그 부르신 목적에 꼭 맞게 사는 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거야. 저부터 이럴 적에는 우리 양심을 더듬어봐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대체 더러운 사랑 말고 진실한 사랑이 얼마나 있는가? 더듬어 봐요. 만일 조금이라도 누구를 미워하던지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귀를 몰아내버려. 그거 지금 할 일이에요.
그 다음으로 우리 생각해 봅시다. 거기 이런 말이 있지요? 3절에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그리고 3절에 가서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하십시오. 이것도 참 훌륭해.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성령님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었다고 그랬어. 묶었어. 싸움들 할까봐 모두 마음들이 조각조각 나서 아참 이 한국뿐 아니고 이 세계지만 전부 마귀의 꼬임을 받아가지고 교회마다 조각조각 모두 교파 한교파가 둘이나면 또 두 교파가 넷이 되고 넷이 되면 여덟이 되고 꼭 박테리아 늘어나듯이 만들어 가는 게 교파 아니요? 마귀가 기뻐하는 거야. 마귀를 기쁘게 하는 거야. 그럼 그 마음은 여러분 속에도 있어. 내 속에도 있고 누구하고 오늘 보면 좀 친한 거 같고 사랑하는 거 같아. 조금만 뭐 틀어지는 거 있으면 원수가 돼. 그래서 잘 들으시오. 여기 병동에 있는 이도 오늘은 요 사람하고 짝 짝꿍이가 됐다가 내일 보면 또 고놈하고 원수가 되고 저놈하고 좋아하고 한 일 년 뒤에 보면 어느 틈에 저놈 좋아하고 술장사하는 계집들 모양으로 요리 들러붙었다 조리 들러붙었다 그러 구들 살지 않아? 기껏해야 육정으로 낳은 거 더럽지 않소?
그러니 여기서 하는 말 성령으로 묶어주신걸 지키라는 거예요. 성령으로 하나 되는 거 성신으로 하나 되는 거 성령께서 보시오, 근본문제 참 성경 말씀은 이것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해도 오다가다 생각을 해도 감격을 주는 거야. 성령께서 여러분을 묶었는데 무엇으로 묶었는가 하니 평화의 줄로 묶었다는 거야. 평화 평화의 줄로 묶었어. 그래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하도록 지켜라. 그러면 이제 이런 생각이 날거야. 언제 성령님이 나를 그렇게 묶어 놓으셨는가? 어때요? 성령님이 나를 그렇게 묶어서 또 다른 사람하고 그렇게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 이게 문제가 되지 않소?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평화의 줄로 묶여서 하나가 되는 것인데 우리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니 그 성령이 우리를 묶어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부하는 게 있어. 하나가 되지 않으려는 게 있다 그 말이야. 그게 뭐예요? 죄이지, 성령을 거슬리는 것은 죄에요. 우리 육체거든, 나라는 거거든, 정욕이고 물욕이고 욕심이거든. 교만이고 뭐든 그 당파를 짓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거든요. 그게 성령을 거스르지 않습니까? 자꾸 성령을 역사를 거부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평화의 줄로 묶여서 하나가 되려면 이놈을 없애버려야 해. 이 마귀 구더기 같은 것 기생충 같은 것이 속에 꽉 들어있어 그 촌충 회충 사람 배속에 기생충이 꽉차있으면 암만 먹어도 안 되어요. 빼빼 말라들어가요. 영양분을 다 버러지들이 빨아 먹어버리니까.
그 속에 가서 마귀새끼가 꽉 들어있는 사람은 밤낮 예배 봐도 쓸데없어. 성경 밤낮 봐도 쓸데없어. 그 영혼은 바짝 말라가지고 뭐 되지를 않아. 입으로는 잘 믿고 잘 알지. 그러나 영혼은 그대로 있어요. 영혼은 병들어가지고 노랗게 시들어 가지고 있어. 그 영혼은 그래 밤낮 쌈질만 해. 그 말은 성경말씀 가지고 다른 사람 쳐서 거꾸러뜨리는데다가 써. 오늘 교계가 그래 진리의 말씀 자기 영혼은 시들어져가지고 있어. 메말라가지고 있어. 그러니 그걸 지금 말하는 거야. 평화를 이룩하려면 평화를 이룩하려면 먼저 내 마음속에서 평화를 저해하는 거 평화를 못 이루게 하는 거 그걸 제거해야지요. 그래서 그 말씀이 가령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가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서 저 아래까지 내려가 보면 21절까지 내려가 보면 화해의 이유라는 데가 있지요.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거기를 우리가 중간에서부터 보십시다. 17절서부터 읽어보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인간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하나님과 우리도 원수가 되었었거든요. 하나가 되지 못했었거든요. 죄 때문에 죄의 담이 막혀서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랬지요? 그래서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해야 돼. 그건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의 살이 찢기신 거와 같이 내 살이 찢어지고 그 피로 내 죄 씻음을 받고 그래가지고 내가먼저 예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뒤에 내가 그걸 깨닫고 그 기쁨을 맛보고 그 진리를 알기에 저 사람을 또 하나님과 화해시켜 너희들 서로 싸우지 마라라. 또 너 너는 하나님과 그렇게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렇게 살고 있는 상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가지고 있어. 그러니 네 속에 있는 그 죄악의 뿌리를 뽑아버려라 회개해라. 그 전도라는 건 그거 아니요? 회개해라.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해라. 그러기위해서 우리를 불러내신 거야. 그래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시지 않았어? 그 임무를 주셨다.
그러면 다른 말로 하면 우리들은 평화의 사도 아닙니까? 하나님의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서로 싸움질을 해가면서 전도한다면 말이 되요? 말이 되요? 서로 미워하면서 전도한다면 그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보실 거야. 먼저 내가 누구하고든지 화목할 수 있는 소질을 마련해야지. 내 속에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해. 그래야 해. 또 그거보다 더 근본문제는 하나님과 내가 화목해야 돼. 하나님과 내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죄가 조금이라도 가려있으면 그걸 자꾸 비켜버려야 해. 그래가지고 내가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한 뒤에 그런 뒤에 또 사람과 화목을 하고 그리고 나서 그리고 나서 전도를 해야 해. 순서를 따지자면 그렇지 않소? 내가 누구하고 화목하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전도한다는 게 말이 되요? 말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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