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폭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손주들이 연산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밭가에 심은 또아리 호박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십자가의 도
1980.1.3. 정인세 원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여기 유대인은 직접적으로 인간 유대인을 가르친 거고 또 이방인이라는 건 믿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고, 또 유대인 이라는 건 이스라엘적인 믿는 자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것도 되고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우리를 말한 말이지요. 하나님과 우리를, 우리가 다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을 하던 인간들 아닙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인간들 아니에요?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과 화목할 길이 없었거든요. 막혀버렸었어.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적에 그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살이 찢어질 적에 하나님의 그 지성소에 법궤를 가렸던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때 하나님의 법궤를 사람들이 제사장을 빌리지 않고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돼. 그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까지 모든 율법과 상식 의식 제사장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만나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 오늘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 아닙니까? 언제든지 아무데서나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이 살이 찢어짐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왜? 꼭 그 살이 찢어져야만 되겠어요. 요놈의 피 덩어리가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로 만들었어. 우리들의 요걸. 그래, 그걸 찢어버려야겠다. 그래서 찢기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래서 인제 우리들의 살을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뜻이 있지 않아요? 너희들이 너희 자신을 이기고 이긴다는 건 십자가에 못 박는 한 과정이지. 말이 그렇게 시작해서 마지막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래서 그 참 말씀이 순서대로 되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내 제자가 되지 못 한다. 그러셔서 우리를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그 길을 열어놓으신 겁니다. 자기가 살이 찢어짐으로서 우리들도 똑같은 과정을 밟아서 알뜰하게 우리들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러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도록, 그걸 말한 거예요. 화해시키셨다. 이제 화목이 되었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죄 때문에 막혔던 담이 무너져버리고, 또 그가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우리 육체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조건이 없어져버렸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조건이 없어져버렸어. 그게 그 말 아니에요? 용서에 대해서 모든 요소를 제거했다. 그랬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되는 걸 다 없애버렸다. 그 말이에요.
십자가는 요소에요. 한마디로 하면 그 요소를 그것을 없애버렸어요. 다 없애버렸어. 막힌 담을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그게 요소야. 제거 되어버렸다. 어떻게? 이거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요? 그 십자가에는 그 깊은 뜻이 있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이 되었다. 이거 중대한 문제 아닙니까? 지금 이 땅위에는 평화가 없다고 그럽니다.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요. 이래서 불안에 떨고, 정치 때문에 불안하고 경제 때문에 불안하고 모두 오염문제 때문에 핵 문제 때문에 불안하고 인구가 폭발 되서 망하게 됐다고 불안하고 이래저래 참 불안한 요소가 많지요? 사람들이, 그러나 근본 문제는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영혼들은 불안한 거예요. 그렇지요? 언제든지, 그렇게 도둑질을 한 사람은 밤에 다리를 펴고 자지 못한대요. 밤낮 다리를 오그리고 잔대.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서, 어린애가 어머니한테 잘못을 저지르면 그 좋아하던 어머니를 피하지 않소? 뭐 그릇을 하나 깨뜨렸든지, 어머니한테 실수를 했으면 어린애들이 어머니소리가 나면 도망을 가거든. 그럴 리가 있소?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어. 에덴동산에서 보시오. 아, 하나님이 오시면 아담 하와가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어서 오십시오. 그러고 맞이하고 놀고 이럴 텐데.
아 죄를 지면서부터 도망쳐 버리지 않았소? 근본적으로 도망을 치고 또 무의식적으로 나뭇잎사귀로 요기 조금 가리고. 참 유감스럽게 되었거든.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없애버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아버지라고 마음 놓고 탁 부를 수 있어. 그때 가서 평화가 오는 거예요. 사람마음에는, 그게 생기기 전에는 이 땅위에는 평화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화목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지금 우리가 화목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니까, 다 못 하겠어요. 그래 성경에는 많이 지적을 했지요? 고린도서 같은 데는 특별히 그 지적을 했어요. 그 화해의 이치를 전하는 걸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제 하나님과 먼저 우리가 화해를 한 뒤에 하나님과 화목을 한 뒤에 그때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화목이 오는 거예요. 하나님과 화목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원수 된 조건은 그대로 놔두고, 사람사이에만 평화를 하려고 하니까 안 되거든요. 어디 땅에 평화가 옵니까? 평화를 하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지금 유엔사무총장 말고 먼저 총장, 그거 때문에 애를 태우다가 자살을 한 사람도 있었어요. 세계평화를 위해서 암만해도 안 되거든. 이 평화가 암만해도 안 되니까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지켜야 하는 거예요. 사람이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하고 그래야 내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이고 내 마음에 평화가 깃들어야 저 사람과 내가 화목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때 가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거야.
내 속에 죄악의 씨를 그래도 남겨두고 하나님과 원수 된 요소를 그대로 놔두고 그러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한다는 게 다 쓸데없는 짓이고 아무것도 못해. 그러면 그것은 이런 말이 되요. 내가 뭐 의롭고 깨끗하고 죄가 없어서 그렇다. 그 말은 아니에요. 그 말은, 그래서 먼저 말하지 않았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라고해서 무조건 용서를 한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거지요. 내 죄가, 내 죄가 내가 죄를 안지어서든지 내 힘으로 죄를 없애버려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내 죄를 없애버리심 으로서 하나님이 자진해서 나와 화해를 하신 거예요. 화해한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안심을 한 거야. 그러지 않소? 세상에서도 요새도 보니까 꽝꽝 묶여있던 사람들이 이제 없애버렸다니까, ‘앗다, 이제 됐다.’ 하고 활개들을 치고 문을 열고 나오지들 않소? 용서받으면 되는 거야. 용서받으면 되는 거야. 이유야 어찌되었든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 도말해 주시고, 도말해 주시고. 심지어는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구약 때부터 예언을 해. 네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주홍 같을 지라도 내가 눈과 같이 양털같이 깨끗하게 해 준다. 와서 의논만 하자. 그랬어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야.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거든. 말로만 해서는 안 되니까. 야, 이제는 옛 따 먹어라. 예수님을 먹으라고 주셨다고 그러지 않아요? 예수님이 너희는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그러지 않고는 나와 상관이 없다. 먹어라. 용서해 주시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화목을 하시는 거지요. 우리하고 인제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될 조건이 이젠 이유가 없어. 뭐라고 변명할 이유가 없어. 그런데 용서를 받은 우리는 이제 안심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끝에 가보면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겠느냐? 칼이냐? 환난이냐? 기근이냐? 핍박이냐? 그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또 다윗 왕 같은 이가 그 시편에 보면 자꾸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여, 방패요. 그 순종을 가르친 건데 다윗 왕이 죄가 없어서 그랬소? 시편 51편 같은데 보면 우리아의 아내를 실수를 하고 우리아를 죽인 뒤에 그런 죄가 어디 역사가운데 드문 죄 아니요? 그렇게 역사가운데 아주 불법한 죄가 그렇지만 그런 다윗 왕이 하나님을 참 뭘 하고 한 것은 용서함 받은 자리거든요. 용서함 받고 마음에 평화를 회복한 거예요. 그것이 아주 오늘 이 땅에 평화를 성립하는데 이 인류평화다. 세계평화다. 모든 평화를 세계에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거기 기초를 세우지 않으면 다들 쓸데없는 짓들이야. 하나님과 먼저 평화를 갖는다. 죄 사함을 받는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비켜놓고는 되지가 않아. 그래서 주님과 화목.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또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다섯째로 하나만 더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새 생명을 얻었지요. 사실은 성신을 받음으로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성신을 받으면 확실히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성신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는 과정에 반드시 십자가가 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새 성신 받았다고 그러고 실수를 많이 하는 것은 십자가를 비켜놓고 성신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그게 담을 넘어들어 간 도적이라고, 요한복음 10장에 그걸 뜻하는 게 있어요. 그렇게 가르친 것인데, 성신을 받고 거듭나는 것도, 십자가를 십자가의 생애를 통해서 되어지는 거예요.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죽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어요. 그것이 참 중생이거든요. 그것은 완전한 중생입니다. 물론 성신님의 이건 성신 론이 나오니까, 다른 이야기로 나갈 염려가 있지만. 성신님의 역사는 여러 가지이지요. 또 성신님의 역사는 정신적으로 우리를 이렇게 우리를 대조하시기도 하시고, 또 우리를 아주 특별나게 대조하시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지 성신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역사 하실 적에 반드시 그 십자가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다시 말하면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살리는 과정입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어찌되었든지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중생을 체험하게 되고 다시 말하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나오게 되는 거니까. 십자가 생애를 통해서 동시에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사람이라는 게 완성단계에 들어가요. 십자가 앞에까지 우리가 갔을 때에는 완성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어려워져요. 이야기가, 그러나 꼭 생각해야 해요. 십자가 앞에까지 갔을 때, 아무리 우리가 성경을 잘 알고 수도를 잘하고 몸부림을 치고 그래도 사람 완전한 사람, 완전한 인격이 될 가능성은 있지만 된 거는 아니에요. 십자가를 질러가야해. 십자가를 질러가야 완성된 거야. 그래서 바울사도는 죽고 사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아까 성경 읽었지요. 죽고 다시 산다. 그래서 그걸 통해서만 우리는 완성이 됩니다. 동시에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늘나라를 가는 거 아니에요? 요즘에 참 예수 믿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에게나 아쉬운 문제 아니야? 하나님이 십자가 통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쑥쑥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나요? 고생 좀 안하고 죽지 않고 그게 모두 그런 거거든. 세상 죄를 짓고 마음대로 먹고 음란도하고 시집도가고 장가도가고 그저 놀고 그저 돈도 많이 벌어서 호강도하고 그래서 하늘나라 가서 천당에도 가서 아랫목에가 앉았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들이 꽉차가지고 있는 거야.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아니야. 안 된다.
십자가라는 대문턱은 아주 좁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건 예수님이 달려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듯이 아무나 고개 들고 쑥 들어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어렵지 않소? 아주 어려워. 그런데 그걸 꼭 통과해야만 하늘나라 들어간다니까요. 요새 그런 교파가 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는데 우리가 뭐 질 필요가 있느냐고, 아주 당당하게 그 교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이해가 안 되어요. 나는 토론하고 싶지 않지만 이해가 안 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라고 그러셨지. 내 몸통어리를 생각해 보니까 암만해도 한번은 지나가야겠어. 암만해도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해.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늘나라 들어간다. 이걸 모르는 기독교인이 어디가 있어? 십자가 없이는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는,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지만, 실제로 그 십자가를 통과하는 사람은 드물거든. 그러니까 하늘나라 들어가는 자가 귀하다고 그러신 것 같아요. 인자가 오는 날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그러신 거 같애. 아주 그건 싫거든. 싫어. 아주 그 미움 받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그냥 못 먹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그게 싫거든. 그게 그러니까 그 통과를 안 하려고 그러는 거지요. 그건 하늘나라 못 들어가는 거지요.
아예 하늘나라 들어갈 생각을 말아야지. 그래서 그런데 그게 우리가 어느 부분만이라고 그게 조금 어느 부분만이라도 조금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게 있어요. 몽땅 나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몽땅 십자가에 못 박는다든지 거기를 통과한다든지 이러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요. 어려운 문제니까 조금만 팔아요. 조금만은 용서해 줄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렇게 되지 않지요? 아주 완전한 걸 요구하셔. 완전하게 전부를 못 박기를 원하고 계신거지요. 또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 돼. 한사람도, 우리는 그런 소리 잘 하지요? 어떤 사람이 낙심을 한다든지 떨어지고 그러면 아마 그 사람은 소망 없나보다. 이렇게 잘 던져 버려요. 던져버리는데, 그게 아니야. 십자가가 요구하는 건 그게 아니더라니까 요. 한사람도 빼놓지 않는 거지. 그게 예수님의 사랑이야. 기어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그 한 마리 기어이 찾아가지고 가축 간에 데리고 들어가시려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이야. 탕자의 비유라든지, 잃어버린 은전 한 푼의 비유라든지, 전부가 아니야. 전부가, 그러면서 자기 백성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몽땅 끌고 십자가로 들어가려고 그러셔. 예수님이, 단 한사람도 비켜날 수가 없어. 이 말은요, 이 말은 그 천로역정에도 그런 대목이 나타나지만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무슨 학문으로 철학적으로 그런 것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용납이 안된다는걸 통합적으로 이야기해요.
다른 방법으로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늘나라라든지 인류의 구원이라는 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모조리, 모조리 십자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해요. 그건 아시지요? 도리어 아마 우리같이 무식한 신자들이 더 이해할 수 있는지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이 십자가에 죽고 산다는 그 이치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시대라도 다 이걸 꼭 그대로 해야 하고 또 우리가 일생동안 사는 동안에 하는 일 사사건건이 전부 십자가를 통과하게 됩니다. 어제 밤에 그 녹음하는 데서 거기서 듣는 게 더 잘 들려요. 말씀이 그래서 인제 거기 않아서 듣고 앉았는데 밖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여기서 조금 나간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그 사람이 와서 야단을 치고 난리를 했나보던데, 어떻게 하나 내가 나가 봤어요. 아무 효과도 날것 갖지 않고, 여기 처음 올 때서부터 놔두고 하나님께 맡기라. 그 뜻이지요. 놔두고 가서 예배들 보지오. 그러고 들여보냈거든요. 그래서 들여보내고 저도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자. 아이고, 하나님 저 사람 좀 어떻게 해서 제가 세상 적으로 봐서는 한심지요. 원장 되는 작자가 그러고 앉아서 손 놓고 있다가 그런데 얼마 있다가 조용해져.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는가?
그러고서 나중에 보니까, 총무 되는 이가 그 동안에 애를 몽땅 썼습디다. 파출소에 전화해서 순사들을 오라고해서 순사둘이 택시를 타고 저기 가둬놨던 사람이 도망쳐 와서 여기 와서 난리를 쳤거든요. 그 자리에 도루 갔다. 넣어버리고 애썼어요. 그 양반이 그동안에 혼자 애썼지. 한사람이 희생을 했지. 무슨 사건이든지 가만히 보면 희생 따르지 않으면 정리가 되지 않아. 이거 조금 잘못 해석하면 잘못될 런지도 몰라. 그러지만 어떤 일이든지 꼭 보면 무슨 일이든지 희생 따르지 않고는 일이 바로 되는 일이 없어. 정치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이런 사업도 그렇고, 심지어 이런 집하나 짓는데도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라야만 그 역사가 성공이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이렇게 진지 한 그릇 받아놓는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어려서 우리 목구멍에 넘어가는 겁니까? 사사건건 무슨 건이든지 반드시 그 십자가의 정신이 깃들어야만 일이 되는 거예요. 또 어떠한 사상이든지 그래요. 요새 세상에 사상이라는 게 참 많지요. 그런데 그 사상이 좀 이야기가 어려워요. 아주 건전하게 성숙하게 우리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사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 주는 겁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깃들어있지 않은 사상은 전부 인류 에게 해독제가 됩니다. 해롭고 독이 되는 거 꼭 기독교만 말고도 말이에요.
어떤 사상이든지 그래요. 그 말은 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그 말이에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반드시 십자가와 결부시켜야 내 생각이 살아난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게 되는 거예요. 만일 십자가의 정신을 빼먹고 내가 뭘 생각한다면 반드시 잘못된다. 그 말이에요. 이걸 우리가 명심해야 되요. 그러니까 이 말은요. 지금 제가 다섯 번째로 하는 말은 십자가는 모든 걸 완성시킨다. 그 말이에요. 완성 시킨다. 우리의 개인 개인의 인격을 완성시키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고 하늘나라를 완성시키고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이제 다 이루었다. 이제 나 할 일 다 했다. 그래서 그래요. 우리 개인의 생활도 그래요. 우리도 우리가 모든 것을 완성 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십자가 안에서야. 밖에서는 혹시라도 속지 말아요. 된 것 같아도 된 것 아닙니다. 속지 말아요. 그래서 우리가 결론을 지읍시다. 그 이 십자가의 이치는 사실은 기독교의 전유물이지요. 예수교에서 십자가 말하지 어느 다른 종교에서 말해요? 요새들은 아주 뭐 별사람들이 다 십자가라는 말을 쉽게 씁디다만 어떻든지 그러나 그래도 희미하게 십자가의 정신이 좋은 줄 알았기 때문에 또 그 십자가의 정신에 희생이라든지 봉사라든지 무슨 사랑이라든지 그런 걸 쪼금이라도 깨달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라는 말을 하는데,
기독교의 전용물인 동시에 이건 가장 보편성을 띈 진리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라는 이름도 모르는데도 십지가의 정신이 들어가면 조금 살아납니다. 조금 이렇게 소망이 있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어요. 십자가는 십자가의 정신은 진정한 사랑의 원리이다. 진정한 사랑의 원리이다. 이거 기억해야 되요. 우리가 사랑을 말 할 적에는 반드시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해야한다. 그 말이야. 또 십자가는 이것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새로운 창조의 원리다. 그렇게 생각되어요.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이 되었다. 하는 것은 전부 가짜야. 꼭 십자가를 통해서 지어진 것만이 정말로 새로운 창조야. 그런 것이 있어요. 이건 우리 인간으로부터 우리 사상으로 인류평화, 가장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우리 생활이지요. 우리 생활이 새로워지려면, 새사람이 되려면, 그게 정말 모든 창조의 근본인데 새사람이 나오는 게 지금 오늘 무슨 새사람운동, 무슨 새마을운동, 새 생명운동도 새것들을 좋아하니까 자꾸 그런 말이 많이 나오는데, 진정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는 십자가의 정신이, 십자가의 정신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것이 절대로 안 나온다. 새로운 창조의 원리 또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이 없어. 영생이 없어. 그거 무슨 말이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고 그런 사람은 그 생명이 벌써 끝났다. 그 말이야. 죽었다. 그 말이야. 지옥에 간다. 그 말이지요? 망했다. 그 말이지요?
영생이라는 게 없어. 그 사람들은 실제로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거야. 송장들이야.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아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그런데 그게 또 유일한 길이야. 거듭 말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야. 또 십자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흑암에서 광명으로 나가는 통하는 길이야. 십자가는 어둡던 세상 오늘 세상은 참 어둡지요. 참 어두워, 아주 답답하고 숨구멍 하나 아무리 좋아지는 것 같은데 저는 여기서 맨 끝장에 가서 그랬던가? 그런 정도의 참 재미있는 걸 하나 읽었어요. 이것도 그 안병무 박사가 쓴 글인데, ‘해방되던 해의 회상’이라. 그래가지고 자기가 간도 용정촌에 있을 적에 해방을 만나서 거기서 당하던 이야기를 썼어. 해방이 됐다고 덩실덩실 춤을 췄더니 막 소련군들이 나와서 여자를 욕을 보이고 빨간 기를 달라고 그러더니 이거 해방이 어디를 갔던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으로 해서, 어떻게 해서 삼팔 이남으로 내려와서 이 남쪽은 괜찮으려니 그랬더니 아 여기는 미군들이 들어오더니 그냥 미군들이 맨 처음에 들어와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한국 사람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본군대를 모아놓고 며칠 동안 치안유지 한다고 그랬어. 그때 이야기를 쓰면서 아 그 일본 군인들은 망한 줄 알았더니 군인들 앞에다 우리를 대놓고 총부리 앞에다 우리를 또 복종을 하라고 그러니 원 이런 분통이 터질 일이 어디가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썼어요.
그러면서 세상은 되는 거 같은데 되는 게 없다는 거예요. 오늘도 뭐 되는 거 같은데 밤낮 안개 속에 사는 거와 같다. 그래 세상이라는 거야. 그런 거야. 여러분 있어요? 뭘 되가는 거 같고 빠금하게 좋아지는 것 같지만 항상 세상은 어두움이 흑암이 정치고 문화고 심지어 종교계까지도 개인 개인의 마음 마음속에도 흑암이 어두움이 모두 깃들고 있어. 그래서 모두 왜 사람들이 부닥치고 싸우는 거야. 어두움에 싸여있으니까 부닥치지. 가령 빛 가운데 있으면 싸울 리가 있어요? 흑암이 흑암에서 왜 흑암아래 있느냐? 아직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해서 그런다. 인류도 개인도 민족도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 했기 때문에 아직도 흑암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야. 거기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거기까지는 암담한 세계야. 그런데 예수님이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거기까지는 암담하지요. 그랬다가 그 돌멩이를 비키고 무덤을 열고 일어나시면서 부터 광명이야. 거기는 칼도 못 들어가고 창도 못 들어가고 아무 그림자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광명의 세계야. 그래서 하나님이 맨 먼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그랬지요.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제일 싫은 게 어두움이거든. 그래서 어두움을 제일먼저 쫒아버리셨어. 빛이 있으라. 예수님이 인제 무덤에서 헤치고 일어나시는데 광명체로 영광체로 부활하셨다고 광명을 되찾으신 거야. 그러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나오면서 부터야 우리의 영혼이 빛을 보는 거야. 우리의 생명은 광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야.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중생이야. 광명의 세계.
그전에 이 선생님도 무등산에서 기도할 때 제가 한번 이야기 했지요. 아주 빛의 바다 광명의 바다 생명의 바다 생명의 세계요. 광명의 세계요. 그때 어떤 때 그 말을 했어. 나는 참 지금도 잊어지지 않아. 통을 옆에 놓고 각혈을 하시면서 그냥 통에다가 자꾸 피를 토해. 아주 멈추는 재주도 없고 안쓰러워 죽겠어. 곁에서 보고들만 앉아있지. 이러고 엎드려서 창을 내다보면서 광명의 세계 생명의 바다를 보라. 그런 비참한 지경에서, 꼭 여러분이 각혈을 해야만 광명을 본다는 건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흑암에서 광명으로 통하는 길이 십자가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 또 다른 말로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그런 말이 있어. 죽음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사람들은 똑똑한 척 하고 십자가를 자꾸 피해야 사는 것인 줄 알지요. 그러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럽니다.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죽는 줄 알고 피합니다. 그건 아니거든요. 실제로는 십자가를 뚫고 나가야 정말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이 범인들은, 성인들은 그걸 자진해서 했고. 군자들은 가르쳐줘서 했고. 그래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못해서 억지로라도 십자가에다가 고개를 디밀고 뚫고 나가려고 해. 그쯤만 해도 무던해. 그래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예 돌아서버려. 돌아서서 뚫고나가려고 하거든. 그럼 죽는 거지 뭐. 그럼 우리 마음가운데 이걸 찾아야 해요. 십자가를 항거하는 거, 십자가를 아까 말한 대로 기피하는 거, 싫어하는 거, 그게 무서운 마음이야. 그게 지옥으로 가는 마음이야. 그러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거야. 또 다른 말로 하면 악에서 선으로 옮기는 거야. 암만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그래도,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선을 못하는 거야. 선을 할 능력이 없거든. 알지도 못하고, 선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한번 십자가에 죽어야, 선을 이제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또 선을 행할 능력이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않아요?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통하는 것이고, 십자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되는 거지요. 또 이렇게도 말 할 수 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비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신비,
사실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오묘하고 깊은 진리가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게 십자가의 도입니다. 알고 보면, 십자가라는 건 우리가 명상할 때는 많은 비밀을 발견해요. 생명의 원리도 생명의 법칙도 사실은 이 성경말씀 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무데나 여러분이 그 한절만 읽고 그걸 깊이 파고들어 가면 성경 66권이 다 뚫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있어. 생명체라는 건 내 이 새끼손가락 하나만 꽉 눌러 아프게 하면 온몸이 아프다. 느끼듯이 성경도 그럽니다. 성경도 꼭 신구약 66권을 다 외워야만 성경을 아는 게 아니야. 그렇게 배우는 법도 있어. 그렇지만 어떤 절수든지 한 절수에 깊은 뜻을 완전히 파악을 하면 다 뚫어지게 마련이야. 성경은 그렇게 되어있어. 그런데 이 기독교의 비밀이, 또 우리 신앙생활의 비밀이라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든지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해 할 수가 있어요. 기독교의 모든 진리, 가령 아까 말한 그 창조에서부터 마지막 심판까지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재림 모두 그런 거든지, 그런 것이 다 모두 그렇지만, 어떠한 것에든지 용서로 꼭 이어져 들어가는 게 십자가의 비밀이다. 하는 걸 우리는 조금 생각할 줄 알아야 돼.
다시 말하면요. 이 성경의 어느 절수를 하나 읽었습니다. 절수를 하나 읽었는데 그걸 뜻이 잘 모르겠어. 그런데 만일 십자가의 정신을 터득한 사람이 그 십자가의 이치하고 그걸 결부시켜보면 그 뜻이 알아진다. 드러나요. 성경 뜻이 드러나 버려. 이건 조금 어려워집니다만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비켜놓고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그건 아는 게 아니야. 이거 제가 지금 십자가를 이야기하려니까 너무 거기다가 잡아맨다. 그러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해석해도 손해들은 안보실테니까.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모든 비밀 비밀이 있고, 거기는 또 무한한 지혜가 있고, 아까 지혜라는 걸 말 했지만요. 그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 것이고, 나는 세상사는 지혜까지를 지금 말하는 거예요. 여기 말하는 모든, 그 이런 거 있지 않아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바로 그 말을 했거든요. 예수님이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서 ‘죽고 자하는 자는 살고 나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자는 얻을 것이다.’ 너희들이 온 천하를 얻고도 너희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그 정신이 우리 일상생활에도 그래요. 무엇이든지 꼴을 부리고 안하려고 그러면 손해를 본다니까. 에잇, 그까짓 거 한번 해버리자. 죽어버리자. 그러면 오히려 뚫어져요. 여러분 나만 나이 좀 잡수신 분은 그런 거 많이 경험했지요? 누구든지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해보시오. 저 꾀보들은 이런 사람이 있어요. 여기서 뭣을, 여기서 일을 시킨다고 합시다. 하면 암만해도 저 일이 싫은데, 귀찮은데, 자기 차례가 올 것 같거든. 그러면 슬쩍 피해버린다고. 어느 틈에 피해버려. 그러면 그 사람이 그 귀찮은 일 안 하는 거 그 괴로운 일을 피해버린 줄 알아요. 몇 갑절 손해 봅니다. 반드시 손해 봐요. 경험한 사람들은 알아 반드시 손해 봐요. 그래도 그걸 자진해서 나가서 치룬 사람이 예수 믿는 길에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문제인 것이 어려운 것을 자꾸 자진해서 하는 사람이 잘 믿어져요. 그렇지요? 가정에서도 그렇고, 그래 인제 세상사람 보기에는 자꾸 고생하는 길 괴로운 것만 독단해서 나가는 게 바보 같아요. 저런 바보가 무엇 때문에 저런 고생을 사서해? 이러고 싫어해. 그러나 그게 십자가의 길이고, 그게 지혜라니까요. 그게 지혜 있는 거야.
알고 보면 만일 그렇게 괴로운 걸 고통스러운 걸 자꾸 피해버릇 하는 사람은 점점 약해지고, 점점 무능력자가 되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인간이 되요. 사람들 에게도 미움을 받고, 누가 그런 사람을 환영을 해요? 모두 괴로운 것 어려운 것은 남에게다 다 떠넘기고, 자기는 살살 마른자리로만 골라 다니고 표를 내고 마는 사람을 누가 좋아합디까? 여기 단체에서도 못 봐줘요. 어디서든 가정에서도 그런 사람 미움 받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이치는 그런데도 적용이 되요. 죽고자하는 자는 산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도 빼앗는다. 전부 그런 이치에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 정신은 아주 중요합니다. 중요해요. 또 더 이야기해서 아까 십자가는 능력이라고 그런 말을 했지요?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다. 저는 일반적인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우리가 십자가에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무서운 게 없다. 그렇게 생각 되요. 그러지 않소? 사람이 왜 약합니까? 무엇 때문에 모두 비겁하고 죄를 집니까? 죽는 게 무서워서 그러거든. 죽는 게 무서워서 죽는 게 무서워서 죄를 짓고 굶어 죽을까봐 무서워서 죄를 짓고 얼어 죽는 게 무서워서 죄를 짓고 그러는 거 아니요? 죽는다는 걸 제일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아?
그 십자가정신은 죽는 정신이거든. 한마디로 하면 죽는 정신이야. 죽을 각오만하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은 제일 무서운 사람이지. 죽는 거 무서워하는 사람, 그 이야기도 여기서 몇 번 한 거 같은데, 제가 그전에 젊어서 서울 YMCA에서 유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 막 친구들하고 밤새며 술은 안 먹었어요. 그러나 어깨를 메고 종로바닥을 쓸고 다녔지요. 자기세상인줄 알고. 그런데 그 종로바닥에 제일 무서운 깡패가 있었어. 그게 모두 인사동파, 무슨 대마적파, 소마적파, 그런 파들이 있었는데 그 인사동파 두목하나 있어. 그 이름도 안 잊어버려. 팔복이라고, 아주 쪼그맣거든. 그까짓 거 주먹으로 이렇게 치고 집어던져도 던져질만한 쪼그만 건데, 아 그게 깡패 아주 무서운 그 마적단의 두목이야. 아 저놈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뻘뻘대고 기나? 그랬더니. 아 이게 무서운 걸 모르는 사람이야. 무서운 게 그냥 싸움만 하면 그냥 열 명이 덤벼들던 스무 명이 덤벼들던 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 죽여라. 하고 막 덤벼든다니까.
그리고 종로경찰서에다 귀찮으니까 잡아다 놓거든요. 그럼 경찰에 들어가도 걸상에 앉는 법도 없고 서는 법도 없어. 딱 아주 그 형사계 주임이라든지 아주 무섭지요? 왜정 때 일본순사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도 딱 그 책상에가 올라앉아요. 가면 경찰서에 들어가면, 딱 왜 오랬소? 나 왜 오랬소? 이러고 덤벼드는 걸 해볼 수가 있어야지. 그러고 조금만 뭘 하면 그냥 책상이고 걸상이고 전부 부숴버리니까. 죽여라. 그러니까 어떻게? 죽여라. 그러는데 뭐 어쩔 거요? 그래서 무섭다고 그러는 거야. 저건 죽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무서운 거야. 세상에서 무서운 거야. 왜 사람들이 비겁합니까? 그런데 십자가에 그 정신이 있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그거는 많은 것을 그걸 이기는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태도가 어떻게 그렇게 의연했습니까? 가야바 나 안나스 앞에 섰던 예수님 어디 죄수 같습니까? 더군다나 대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그 무서운 세력인 빌라도 앞에서 서계셨던 예수를 보시오. 빌라도가 재판관 같소? 예수님이 재판관 같소? 빌라도가 뻘뻘 기지 않았소? 도리어 예수님 앞에 무서워서 떨지 않았소? 그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벌써 죽음을 예견하신 분이야.
그래 십자가를 내다보고 지금 너희들 나를 잡아 죽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죽여라. 그것이 하나님 뜻이야. 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왔소. 이러니까 의연한 것이지요? 태도가, 우리도 그런 거예요. 우리 일상생활에서 그런 거예요. 명심해요. 우리가 인생을 비겁하게 살지 않으려면 죽음을 각오하면 비겁하게 안 되어요. 그렇다고 악착같이 죽으라는 건 아니고요. 선한 죽음을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 십자가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게 만사에 적용이 된다. 그 말이에요. 또 십자가에도 많은 비밀이 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했는데 우리 항상 마귀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십자가의 비밀을 몰랐으니까 우리가 대개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는 십자가를 기피하려고 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래서 참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승리의 월계관이지요. 모든 것을 이기는 거 모든 것을 이기는 거예요. 예수님의 일생을 생각해 보시오. 어려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 자체가 비참하지 않아? 그래가지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의 생활을 하신 것으로부터 마지막에 골고다를 엎드러지면서 올라가신 것 까지 그걸 모두 다 해가지고 만일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만지지 않고 거기서 져버렸다면 그 모든 생활이 다 실패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마귀의 조롱거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죽음 으로서 과거의 모든 생활이 다 승리로 이렇게 살아난 겁니다. 그거 생각해 보신일 있어요? 과거의 모든 생활이 또 그가 한 말씀에 보증의 도장을 찍었어. 내가 너희를 위해 죽겠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그런데 그게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공염불이 되고 말았겠지 않느냐? 그 말이야.
그러나 과연 자기 살을 주어서 찢겨서 먹이신 게 됐거든. 그러니까 그 말씀이 살아난 거예요. 참 십자가를 통해서, 그의 모든 과거가 살아나 동시에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기신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기셨지요? 그때까지는 어떻게 보면 마귀하고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거 같이 보여 졌어. 그러나 이 십자가에 한번 마귀의 대갈빡을 그렇게 눌러버린 뒤로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각오하는 신자는 마귀가 무서워합니다. 덤벼들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승리로 이끕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우리 육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악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지옥문을 깨치고, 영원한 승리로, 완전한 승리로,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없는 신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찬송 부릅시다. 찬송가, 영문 밖의 길.
사실 이번 기회에 혹시 대개 한 시간씩이라도 말씀을 하게 되면 ‘완덕의 길’이라는 이야기를 좀 해볼까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어요. 그건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적인 인격 완성에 위해서는 완덕에 대해서 생각을 아니할 수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뜬금없이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물론 십자가에 대한 신앙이 곧 완덕으로 들어가는 길이니까, 이야기는 결론은 마찬가지가 되지요. 한번 또 이야기를 시작해 놓고 보니까 많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누락되었다고,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몇 군데 더 성경을 봤어야 될 걸 그랬다. 그런 아쉬움도 또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간에 이렇게 시간이 되어 지니까 몇 군데 더 보면서 더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오전 시간을 보충하는 의미로 아침 새벽시간을 먼저 성경말씀 읽겠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율법은 소용없다.
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한다는 이 신 비밀을 강조한 사도바울의 서신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은 주후 75년경이라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상당히 바울서신으로 봐서는 바울이 그때까지 살았을까? 의심날 정도로 말년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바울사도가 계셨다면 고린도에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들 합니다. 그럼 고린도 교회에 계시면서 지금 멀리 떨어져있는 갈라디아 지방 교회, 갈라디아 지방은 소아시아 지방에 오지입니다. 산골짜기, 아주 고지대에요. 그래서 바울사도가 밤빌리아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나섰다가 눈병을 치료하러 갔다. 그런 말도 있고, 공기가 좀 건조한데를 찾아간다는 게 갈라디아 지방으로 갔거든요. 2차 전도여행 때 그래가지고 설립된 교회가 갈라디아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그 교회에다가 이 편지를 하시면서 이 말을 하셨는데, 지금 읽으려고 하는 갈라디아서 3장1절 말씀은 참 다른데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말씀인데, 어떻게 해서 그때 바울사도께서 그런 참 은혜가운데 계셨으니까, 이런 편지를 쓰셨고, 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이런 걸 쓰게 하셨고 그랬겠지만, 우리가 읽어보면 알 것이에요. 좀 심각하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의 여러분은 어리석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그렇게도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 이렇게, 이 무슨 말이에요? 지금 갈라디아 지방의 사람들이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봤다고? 또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벌써 35년 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는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는데,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여러분들 눈앞에 지금 생생하게 나타나있는데, 어째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혹 예수님의 우상을 입은 프란치스코 성인이라든지 젬마가렛 같은 성녀 같은 이야.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지만, 갈라디아 교인이 전반적으로 이런 은혜가 있었을까? 참 대단히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그렇게도 생생하게 나타나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 시켰다는 말 입니까?’ 먼저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봐서 틀림없거든요. '
그건 비 기독교인도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로마 정치 하에서 그 갈릴리 지방에서 전도하러 다니던 청년 예수가 로마 국법에 걸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런 것을 조세프스 역사가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걸 이 안병무 박사는 그걸 조금 이렇게 기록하고 있군요. 그 긴 글 가운데 결과 적으로 그는 지배층에게 오해를 사서 예수님이 정치범으로 몰렸다는, 그런 견해도 있다. 예수님이, 말하자면 민중을 봉기시켜서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런 의혹도 조금 받았었지요? 그래서 그의 십자가는 오해에 의한 억울한 수난의 상징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는 그렇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니, 로마 나라 그때 정치에서는 정치범으로서 특별히 국가 반란죄에 해당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해당했거든요.
십자가 사형에 해당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서 로마에 반역을 했으니까 죽인다. 그러고 죽인 거 아니거든요. 사실은 죄목은 잡지 못했고 또 빌라도 자신도 그 바리새교인들, 그때 그 소위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질투하기 때문에 죽이려고 그런다. 그걸 알고서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 아닙니까?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는 이런 오해도 있었다. 억울한 수난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던 저렇게 보던 십자가 사건은 집권자에 의해서 처단된 사건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름이 없다. 그렇지요? 사실은 바리새교인이나 유대인이 죽였는데, 왜 사도신경에도 빌라도에게, 빌라도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이렇게 되었느냐? 그때 사형선고 권은 빌라도만 쥐고 있었거든요. 빌라도가 못 죽인다. 그러면 못 죽였어요. 빌라도가 죽여라 할 때만 죽일 수 있었으니까, 책임은 져야지요. 그 집권자에 의해서 처단된 사건이라는 것은 그건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해 입추 연산 : 좁은 문 (0) | 2019.08.09 |
---|---|
기해 입추 전 날 :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0) | 2019.08.07 |
바다체험 :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0) | 2019.08.02 |
길농원 여름 : 하나님이 왜 나를 지으셨는가? (0) | 2019.07.31 |
태풍 다나스 : 믿음 (0) | 2019.07.20 |